〈 91화 〉 91 라이벨 외전 上
* * *
친구.
이것만큼 사람을 옭아매는 단어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연인으로서 가기 전의 다리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연인으로 갈 수 없는 족쇄와도 같았다. 그 뜻을 느끼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넌 여친 안 만드냐?”
동혁은 세영의 질문에 눈을 부라렸다.
“사실 나는 널……”
“지랄 노.”
“입구컷 에반데.”
“너가 여자면 너 같은 놈이랑 사귀겠냐?”
“그러지 않을까?”
“지랄 노.”
“아, 왜.”
두 사람은 지도를 사이에 두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영양가 없는 얘기가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은 「그림자」 세트 장비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혁이 아이템 코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고 세영 역시 지금의 판타지아에 대해 감을 잡아가던 중이었다. 여기서 대부분의 공로는 동혁이 차지했다.
동혁의 해석 능력은 대단했다. 어느 정도 인맥을 갖춘 세영조차 놀랄 정도였다. 이대로 다른 베타테스터들에게 소개를 할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동혁은 자신의 재능을 과소평가했다. 동혁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흥미가 더해졌을 뿐이라 말했다.
세영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누가 게임에 접속해서 단숨에 코드를 파악하고 해석해서 응용한단 말인가. 몇 년 전부터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알려진 마끼야또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데?”
동혁은 심드렁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냥. 물으면 안 돼?”
“구체적으로 시비 터는 게 좆같아서.”
“꼬우면 여친 만드시던가.”
“됐거든요? 연애는 관심 없거든요?”
“모쏠아다 새끼들 변명 1순위 나왔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는데 어떡해?”
“2순위 나왔죠?”
“어우, 진짜.”
동혁은 짜증내면서 지도 곳곳에 펜을 찍어두었다.
“코드가 확인된 건 대략 이 정도야. 이 근방에 있던가 그게 아니면 이미 누군가 가져갔거나 그럴 거야.”
“오차는 어느 정도?”
“아직 완벽하게 알아내는 건 아니라서 몇 킬로미터씩 오차는 생길 거야. 그래도 아이템이 있단 건 틀림없어. 이건 확신할 수 있어.”
“어디 보자…… 다행히 판테스 왕국에서 가까운 곳들이네. 뭐야. 라피에 초원 근처? 설마 엘리트 몬스터한테 있는 거야?”
세영은 경악하며 말했다. 라피에 초원은 판테스 왕국에서도 기피하는 장소였으니 이렇게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리가. 근데 거기 말고는 없긴 하네. 그 근방의 사냥터가 검은 동굴이랑 초록뿌리 숲 정도던가?”
“초록뿌리 숲은 몬스터 박멸 당해서 검은 동굴뿐이야. 거기 숲은 동물 밖에 없을 걸.”
“그럼 거기 밖에 없긴 한데…… 사실 거기 신호는 조금 복잡해서 말이지. 게다가 거긴 초심자 전용 지역이잖아. 있다고 해도 기믹이 숨겨져 있다는 소린데 어지간히 복잡하겠네.”
“뭐, 됐어.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치킨 쏠게~”
세영은 지도를 낚아채고 돌아섰다. 동혁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흔들었다.
“자기 멋대로라니까.”
동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간만에 연락을 한 은송에게 답신이 왔다. 그걸 본 동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쪽도 제멋대로긴 마찬가지지.”
*
동혁은 은송이 판타지아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엄청 기뻤다. 같은 대학에 갔어도 과가 달랐으니 함께할 시간이 적었다.
‘둘이서 함께할 시간.’
동혁은 기대감에 버트를 전력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가 「밤」 세트를 찾을 때 최선을 다해 흔적을 찾았다.
“돌겠네.”
동혁은 라피에 초원에 버트와 니스가 사냥을 가는 동안 홀로 수식을 해석했다. 그런데 어찌된 건지 아이템 코드는 물론 그 위치가 애매하게 나왔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말 복잡한 수식으로 이어져 있거나 한 글자 차이로 정보가 달라져서 나오는 오류였다. 그게 아니면 버그밖에 없는데 판타지아에서 버그라고 해봐야 불법 패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은송은 절대 그런 패치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으로 제법 머리를 싸맸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아이템 위치를 확인하고 방방곡곡으로 쏘다니던 라이는 그녀가 기뻐할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거면 되겠지.”
라이는 발르틴으로 이동하고 계속 아이템을 수소문했다. 쉬지 않고 돌아다닌 덕분에 버트가 세트 아이템을 잔뜩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템에 대한 정보도 확인해서 대강 이미지로 뽑아내주었다. 니스는 그걸 받고 조직력을 이용해 아이템을 찾아주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라이의 눈에 보인 건 밤 기사의 갑옷으로 만들어진 버트의 모습…… 그 이면이었다.
‘마신?’
그가 알기로 현 판타지아 세계의 신이라 한다면 성신 리아주크 정도였다. 용신이나 전신 정도는 들어봤지만 마신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마신 리아주크. 태초부터 존재하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블랙스타라는 교단과 접선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섬기는 신의 이름이 리아주크였으니 단서를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어쩌면 신화적인 아이템을 먹은 것일지도 몰랐다. 이모탈이 닿을 수 없다는 귀족의 영역을 넘어서 니스가 노리는 최초의 이모탈 마스터 직업까지 넘볼 수도 있었다. 버트가 그런 위치에 오른다면 이 게임을 더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버트가 세트 아이템을 모으는 데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만 버그가 난 건지 종종 이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지켜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사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왜 신인데 이렇게까지 배척받은 거지?“
블랙스타에게 절멸당한 크로수스 교나 미친 신을 섬긴다며 매장당한 데마스와는 달랐다. 블랙스타는 생각보다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어쩌면 현재 존재하는 나라들 중 몇몇보다 더 일찍 태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런 종교가 섬기는 신인데도 제대로 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귓동냥으로도 알 수 있는 하찮은 정보가 끝이었다.
분명 거대한 교단이다. 엄청난 위세의 신이다. 그런데 중요 정보가 없다?
하다못해 성서라도 있어야 정상이었다. 판타지아에서 책이 어느 정도 희소가치가 있다지만 희귀한 건 아니었다. 동화책도 팔리는 판국에 교리가 적힌 책이 귀할 수 없었다.
라이는 마법사의 탑에서 시간을 보내다 결국 블랙스타와 접선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마성자들 중에서 몇 명이 라이를 직접 찾아왔다.
“당신이 라이벨입니까?”
라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자와 만났다. 라이는 그가 대번에 블랙스타의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에게 내재된 마기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가요?”
“블랙스타에서 추기경의 지위를 맡고 있는 카반이라고 합니다. 블랙스타의 뒤를 쫓고 계신 듯 하여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왔습니다.”
라이는 카반을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성 모독적인 행위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탐구심이 순수한 의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로수스 교와 같은 부류일 거라 생각하셨나요?”
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블랙스타를 공격하거나 음해하려는 게 아니라 제 친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그런 거니까요.”
“친구……”
카반은 라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릇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릇?”
“마신의 씨앗을 담은 그릇. 저희는 그분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라이는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위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마 버트…… 걔가요?”
“네. 함께 다니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만 음해 세력이라는 생각에 경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녀의 친우분께서는 부디 이 점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카반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돌려 말할 필요 없겠네요. 성신 리아주크와 마신 리아주크. 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신의 씨앗을 심는다는 그 내용 또한 자세히 알고 싶네요.”
라이의 말에 카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녀님의 친우분께 숨길 수는 없겠죠.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
라이는 예언의 내용을 듣고 황당해했다. 씨앗을 품을 사람이 올 지 안 올지 기다린다는 것도 놀랐는데 그 상대가 버트라니. 그냥 프로그램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의심할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인가?’
버트에게 일어난 버그와 마신의 씨앗.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누군가 은송이 버트로 접속하길 기다리고 씨앗을 심었다.
‘지나친 음모론이야.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라고.’
그러나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운영진의 개입이 거의 없다시피한 공간. 라이는 니스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한 가지 추측을 내걸었다.
‘이미 이 게임은 억제할 수 없게 된 거 아닐까?’
그렇게 되면 의심해야 될 게 많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겪은 게임 생활을 뿌리 뽑아야 될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떠오른 게 있었다.
‘캐릭터 삭제.’
판타지아는 캐릭터를 한 번 만들면 끝이다. 대신 성형도 할 수 있고 이것저것 바꿀 수 있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얼굴을 고치고 재범을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 운영진에서 그걸 잡았어야 했지만 여러 길드가 나서서 선수를 쳤다. 보통 이런 경우 저지른 범죄가 워낙 화려해서 플레이어들이 나서서 해치울 때가 많았다.
이때 이후로 자정 작용이 언급되었다. 플레이어끼리 일어난 일은 플레이어끼리 해결한다! 어찌 보면 그럴 듯한 얘기였지만 운영진의 무능함이 드러난 결과기도 했다. 당장 라이의 치트 행위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운영진은 판타지아에 간섭을 하지 못하거나 간섭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머리 아파.’
어쩌면 버트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판타지아에 불법 패치를 했다가 쇼크를 먹었거나 쓰러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버트가 모드를 깔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판타지아에 있을 버그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운영진이 무능하다면? 그들이 판타지아를 제대로 관리할 생각이 없다면?
의심이 한 번 피어오르니 무럭무럭 자라났다. 결국 라이는 버트와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다 생각했다.
*
시간이 흘러 동혁은 은송에게 연락을 넣었다. 은송이 판타지아를 시작하고 거의 웬종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따로 만나는 게 어려웠다.
“요즘 어때?”
동혁의 질문에 은송은 달고나 커피를 마시다 눈을 껌뻑였다.
“뭐가?”
“판타지아 말이야. 재밌어?”
“응, 엄청.”
“뭔가 다른 일은 없고?”
“다른 일?”
은송은 태연하게 커피를 마셨다. 동혁은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요즘 세영이가 마스터 퀘스트 끝내고 일거리가 많이 늘었나봐. 그것 때문에 플레이어들 견제도 심하고.”
“맞아, 그렇다더라. 한 두 번도 아니고 특히 벌떼에서 싸움 거는 게 많다던데……”
“그런데 최초의 이모탈 귀족이 한가할 리가 없잖아.”
은송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에이 너까지 왜 그래.”
“너가 몰라서 그러는데 진짜 대단한 일이라니까? 귀족이 되려고 골드로츠가 키런 왕국에 한 것만 해도”
동혁은 태연하게 떠들기 시작했고 은송은 심드렁하게 얘기를 들었다. 반 이상은 흘려들었지만 동혁은 아랑곳 않고 얘기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대화가 끝나고 동혁은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힘든 일 있으면 불러.”
“응?”
은송은 배시시 눈웃음 지었다. 분명 세영에 비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견이었다. 하지만 수수한 매력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이 자꾸 가는 마력이 있었다.
“어쭈, 고인물이라고 소매넣기라도 해주겠단 거야? 우리 동혁이 많이 컸네?”
장난스러운 대답. 동혁은 잠시 입술을 꾹 물었다가 방긋 웃었다.
“그럼 내가 옵베때부터 한 세영이도 따라 잡았잖냐. 재능충만 믿으라고.”
“으이구, 알았어. 힘들면 바로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그렇게 동혁은 은송과 헤어졌다. 동혁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뇌까리며 돌아섰다.
“……꼭 찾아줘.”
*
시간이 흘러 버트는 많은 일을 겪었다. 펠론의 지하에서 수모도 겪었고 또 다른 리아주크의 수족과도 만났다. 「밤」 세트 아이템도 착실히 모아갔다.
그만큼 라이 역시 많은 일이 있었다. 7개의 던전을 주파하고 마법을 한 종류씩 배워나갔다. 희귀한 아이템도 얻었고 여러 지식도 습득했다. 중간에 기연도 만나서 잊힌 마법들도 배웠다.
이건 버트의 공로가 컸다. 버트가 검은 동굴과 라피에 초원에서 습득했던 걸 나눠주면서 기인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라이의 폭풍과도 같은 성장은 마법사의 탑에서도 주시했다. 어떤 마법이든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았다. 자잘하게 여러 마법을 쓰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라이처럼 일정 경지에 이르는 경우는 마탑주나 부탑주 외에는 없었다.
이런 라이도 처음에는 주목 받지 못했다. 뭘 가르쳐도 둔했고 막막했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 놀라운 응용을 보여주었다. 라이는 짧지 않은 시간에 ‘올 클래스 매지션’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이런 라이의 성장은 오롯이 한 여인을 위한 일이었다. 그 열정이 라이를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간절함이 만든 기적은 대단했다. 순식간에 9성 마법사의 위치까지 도달했고 이제는 10성 마법사까지 넘보고 있었다. 실상 그는 11성 마법사의 후보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저 위로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경력’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메우지 못할 시간의 장벽이 라이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라이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3대 공략불가 지역에 힌트가 있을지도 몰라.’
라이는 계속해서 리아주크에 대해 탐구했다. 동시에 듀크 사와 판타지아의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했다. 판타지아에 있는 모든 지식을 탐구하고 그 원리를 규명했다. 그러면서 실제 프로그램을 분석하며 코드를 해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건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분석해도 운영진이 판타지아에 간섭할 껀덕지가 보이지 않았다. 기껏 해야 강한 힘을 가진 이모탈 정도가 판타지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모탈로서 판타지아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런 기록이 없었다.
‘이모탈과 NPC의 결정적인 차이.’
라이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기껏 해야 플레이어에게만 통하는 스킬로 구분을 짓는 정도였다. 그게 아니면 수면 중 녹화나 스크린샷, 외부 메시지 등이 구분을 짓는 방법이었다. 그만큼 이 세계의 인간과 플레이어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그걸 구분 짓는 기준…… 그것만 알게 된다면 버트의 변화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버트의 상태가 단순한 버그가 아닌 판타지아에 동기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판타지아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해져. 지금 버트에게는 이곳이 진짜 현실이 될지도 몰라.’
라이에게 필요한 건 단서였다. 버트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해결할 단서가 필요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버트와 접촉해서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 방법은 꺼려졌다.
‘곁에 있는 리아주크의 수족이 문제다.’
그의 뜻을 모르는 이상 섣불리 경계심을 키워서는 안됐다. 분석이 방해받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거짓 정보를 흘려서 혼선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루하다는 라이에게 있어서 좋은 수단이 아닌 크나큰 변수였다.
같은 이유로 운영진과 만남을 갖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곧장 제지를 당할 수도 있었고 입막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이건 그저 그런 음모론이 아니었다. 듀크 사에서 사람 하나 치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 찰나에 라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칼라 해변의 이벤트! 판타지아에 시련이 내린다는 소문과 함께 사람들이 칼라 해변으로 모여들었다. 라이 역시 이 정보를 접하고 해변으로 향할 준비를 끝냈다.
‘이번 이벤트로 뭔가를 알 수 있을지 몰라. 운영진이 시련을 어떻게 유도하는지 파악하면 돼. 지금까지 접한 시련 몬스터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걸지도 몰라. 어쩌면 직접 몬스터에게 접속한 걸지도 모르고. 겸사겸사 11성 마법도 시험해봐야겠어.’
*
라이는 칼라 해변의 주역이 되었다. 이벤트 보스 메두사의 처단 이후 그는 엄청난 러브콜을 받았다.
“그게 11성 마법 맞지?! 나도 알려줘!”
“주문 파밍 어디서 한 거야!!”
“템 좀 나눠줘!”
“골드 좀!”
“신성과 주술, 마법이 뭐가 다른 거야! 알려줘!”
사방에서 플레이어들이 덤벼들고 바다하피의 깃털이 난무하는 가운데 라이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절벽에서 봐요
2번째 대마법 {르뤼에} 시전에 도움을 준 성직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라이는 인파를 따돌리기 위해 메두사를 가리켰다.
“앗?! 저 놈 방금 움직였어요!”
다름 아닌 괴물 마법사의 말이다. 갑자기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하물며 방금 죽은 메두사가 움직였다는 말에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듀크 이 새끼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페이즈3는 국룰이지!”
“설마 귀르디처럼 언데드가 된 건가?”
“진짜 누군지 몰라도 페이즈 좆같이도 짜놨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을 때 메두사의 사체는 미동도 안했다. 기껏 해야 판테스 왕국이나 타국에서 보낸 감찰관들이 사체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들은 다시 라이를 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어디로 사라진 거야!!”
“빨리 찾아!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와씨, 텔레포트를 이렇게 빨리 캐스팅하는 건 처음 보네.”
“설마 어디 끼어서 죽은 건 아니겠지?”
모두가 찾는 라이는 멀지 않은 절벽에서 만남을 갖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리라고 해요.”
그녀는 검은 수녀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외견만큼은 라이가 본 이들 중 손꼽히는 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몸매도 뒤처지지 않았다.
라이는 그런 누리를 지켜보다 고개를 꾸벅였다.
“라이벨이라고 해요. 라이라고 불러주세요.”
“설마 이렇게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때 제가 드린 신성의 힘이 인상적이었나 보군요.”
“그만한 힘을 가진 건 랭커 정도니까요. 그저 그런 베테랑이라고 보기에는 신성에 담긴 힘도 심상치 않았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온 걸까. 그러면서 왜 많은 사람 중 저를 콕 짚은 걸까……”
라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반응에 누리가 머쓱하게 웃었다.
“당신이 듀크 사의 운영자로군요.”
“당신의 마법사로서의 지식이 필요해요.”
동시에 이루어진 말은 완벽하게 엇나갔다. 라이가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니 누리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운영진이라구요……? 저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운영진일 리가…… 애초에 운영진이 게임을 하고 있을 리 없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서야…… 그보다 제 지식이 필요하다뇨? 제가 알고 있는 건 많이 없어요.”
라이는 복잡한 얼굴로 누리를 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운영진이 게임 속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거였다. 외부 프로그램으로 간섭하는 건 고작해야 접속할 때의 상태가 끝이었다. 골드를 만들어낸다던지 없던 아이템을 만드는 건 정말 힘들었다.
그렇다는 건 판타지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누리를 운영진으로 의심했던 건 그녀의 기본 스킬이 하나 같이 막강해서였다. 운영진이라면 단기간에 강하게 육성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캐릭터를 즉석에서 만들어내고 강하게 조작하여 배치한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가 라이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누리는 판타지아가 출시하자마자 부던히 해왔던 게이머일 뿐이었다. 기본 스킬이 강해진 건 기초가 튼실해야 한다는 그녀의 사상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어쨌든 라이의 오해가 풀리고 누리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기사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구나. 나도 처음에는 음모론 같은 거 많이 생각했지. 뇌를 스캔해서 게임 세상에 접속한다니…… 본체에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었거든. 뭐, 그런 거 있잖아. 뇌의 착각으로 몸에 변화가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세뇌를 벌인다든지.”
라이는 머쓱하게 웃었다.
“예, 뭐…… 아무튼 죄송합니다. 조금 풀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러면 내가 원하는 정보랑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맞아. 데마스 교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데마스 교라면……”
누리는 책을 하나 꺼냈다.
“네가 반납했다고 했던 책의 사본이야. 그릇된 성서. 이건 데마스의 교리가 담겨있는 책이지.”
라이는 그 책이 발르틴에서 버트에게 받은 책이란 걸 떠올렸다.
그렇단 건 데마스 교 역시 블랙스타에게 대항하다 무너진 교단이란 뜻인가. 실상 그 종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기껏 해야 신성 마법을 구현하는데 참고한 정도였다.
“근데 그거랑 운영진에 대해 아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데마스 교는 잊힌 신 게볼라이아를 섬기는 신앙이야. 그러니까 신에 관련된 문제니 이걸 쫓다보면 운영진에게 닿지 않을까?”
“신……”
만물의 창조주. 그것이 신의 정석적인 포지션이었다. 누리의 말은 즉 신이 운영진을 에둘러 표현했다는 말일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게임 개발자의 이스터에그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라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일단 친구 등록부터……”
“그래봐야 주머니마냥 어디에 적어놓는 게 끝이잖아. 난 리얼리티를 추구해서 그냥 면식을 트는 걸로도 족해.”
“아, 그런 플레이도 있긴 하죠. 완전 리얼 플레이…… 그럼 걸어 다니시겠네요?”
“응. 그래서 좀 힘들긴 하지만 재미는 있어.”
라이는 버트와 누리가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놓으시죠……?”
“그냥, 뭔가 나보다 어린 거 같아서?”
라이는 누리의 천연덕한 미소를 보며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동시에 그녀의 화사한 미모에 넘어간 스스로를 욕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