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9 베르테 야영지 中
* * *
츠르릇
마기가 응집된다. 새로운 존재가 만들어질 만큼 에너지의 양은 충분했다. 실제로 몇 가지가 만들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형태는 아니었다.
철퍽
“으음……”
둠워퍼 창조를 시도한지 이 주일 째. 생각 외로 진척은 없었다. 처음 이틀 동안에는 금방 끝날 거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게 마기를 조작하는데는 거의 통달했다. 평면 세계에 넘나드는 시점에서 이미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창조가 완벽하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진 생명체는 분명 제 기능을 했다. 하지만 생물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버트가 알고 있는 둠워퍼가 아니었다.
하나는 흐물흐물해진 토끼였다. 창조 도중에 귀여운 걸 생각하다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또 하나는 처음 만났던 루하다처럼 조그마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잿더미처럼 파스스 무너져내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루하다를 생각하며 만들어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맹한 모습이 되었다.
“조금 더 멋진데.”
아무리 루하다를 떠올리며 만들어도 재현할 수 없었다. 물컹하기 그지없는 젤리가 되기도 하고 제 형태를 이루지 못하는 무언가가 되기도 했다. 어쩔 때는 그림자에 스며들어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사흘 째 되는 날에는 설계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둠워퍼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종족. 설계를 하려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야 하는 데 테두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으아아……!”
버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뒹굴었다. 그러다 너무 쫓기는 마음으로 하니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물론 이건 버트 스스로 생각한 게 아니라 스터그의 조언이었다.
“조금 쉬었다 해봐라.”
그래서 쉬었다. 이따금 라이칸들에게 케틀라이아의 근황을 보고 받거나 로디아 마을을 순회했다. 종종 접속을 종료하고 판타지아의 정세를 검색하거나 다음 학기의 준비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쓰다 보니 게임 내에서는 일 주일이 넘게 지났다. 무려 배속을 걸었는데도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뭘 만들어? 리아주크의 추종자를 새로 만든다고? 우리 쏭이 요즘 많이 피곤했구나……? 나라에서 쫓기고 심적으로 힘든 건 알겠어. 나중에 동혁이 데리고 호캉스나 한 번 조지자. 동혁이 요즘 돈 많이 벌었다니까 방 2개 정도는 껌이겠지.”
세영의 핀잔을 듣고난 뒤 그림자를 쫓는 별이 찾아왔다. 정확히 10일 째 되는 날 버트에게 둠워퍼에 대한 자잘한 기록들을 전해주었다. 세영이 말은 그렇게 말해도 버트를 챙겨주려고 노력해주었다.
그렇게 받은 기록은 퍼드롬이나 스터그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확이 있었다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굳이…… 얽매여야 하나.”
리아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 버트의 오리지널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런데도 기존 둠워퍼에 대한 정보를 찾은 건 루하다에게 이질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루하다의 종족과 비슷하면서도 버트의 유일한 종족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루하다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만큼 헛되고 쓸데없이 큰 욕심이었다.
버트는 마음을 비웠다. 게임 안에서 이 주일 정도 지났을 때 집착을 버리고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15일 째 되는 날……
츠르릉
툭
마기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흐느적거리며 일어나더니 자그마한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검은 덩어리에 동그란 눈. 루하다가 부활하기 전 보았던 그림자의 모습이었다.
삐이잉
그림자의 두 눈이 휘어졌다. 녀석은 버트를 보자마자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루하다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그때의 루하다가 햇빛을 싫어한단 걸 알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그늘에서 슬쩍 머리를 빼더니 버트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건가? 버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안녕?”
삐이
그림자는 자그마한 손을 흔들었다. 버트는 그 손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악수를 나누었다.
그림자는 그것마저 황송한지 버트의 손가락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열심히 파닥거리며 악수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어주었다.
삐이잉
“이제부터 너는 둠워퍼야.”
삐이
“이제 막 그림자처럼 여기저기 스며들고 나타나고…… 모습도 마음대로 바꾸고 그러는 거야.”
버트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그림자에게 조금씩 의식을 주입했다.
루하다에 대한 기억. 버트가 알고 있는 루하다의 모습. 그의 행동. 모든 것을 전수해주었다. 아무래도 이쪽에 의식을 집중하다보니 말이 어눌해질 수밖에 없었다. 뭔가 더 얘기를 해주어야 할 거 같아서 입을 뻐끔거리면 유치원생의 자기소개 같은 말들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닌 듯 했다. 그림자는 조금씩 기억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했다. 마기를 먹고 성장하며 하나의 존재로 각인되었다.
“옳지, 옳지.”
버트는 싱글벙글 웃다가 그림자를 지긋이 보았다.
정말 작다. 이대로 둠워퍼로 키우자니 너무 작았다. 마기를 준다면 루하다처럼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하다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의 힘을 회복한 것과 달리 지금 눈앞의 그림자는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났다.
“……둠워퍼가 아닌가, 그럼.”
버트는 잠시 고민했다. 그렇다고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어 선물하기에는 조금 그랬다.
“프로토타입이라 생각할까.”
버트는 그림자를 위아래로 흔들면서 말했다. 그림자는 그게 신나는지 짧은 팔을 포닥거렸다.
“좋아, 그럼 새로운 녀석을 만들어야……”
버트는 그림자를 내려두고 다시 창조를 하려 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옆에서 계속 기웃거리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 하지 못했다. 특히 녀석 앞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니 왠지 못할 짓을 하는 거 같았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없애고 다시 만들 수도 없었다. 버트의 고민은 길었다. 그림자가 한 번 눈에 띄니 도저히 다른 걸 할 수 없었다.
“그래, 구경이나 할래?”
버트는 그림자를 어깨에 얹어두었다. 녀석은 햇빛을 맞아도 멀쩡했으니 데리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천막을 걷어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며 밖으로 나왔다.
“성공했나?”
스터그의 무심한 질문에 버트는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버트가 곧장 대답을 못하니 스터그는 말없이 비켜섰다.
“어디로 가는 거지?”
“얘한테 마을 구경 시켜주려고. 겸사겸사 다른 애들도 소개해주고.”
“학습을 시킨다는 소리로군. 어설프게 정을 주면 떼어내기 더욱 어려워진다. 명심해라.”
스터그의 말에 버트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자신을 빗대어 말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괜스레 이상한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접어두는 게 좋을 때도 있었다.
“알았어. 아빠 말 명심할게.”
“그럼 조심히 다녀와라.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아빠는 같이 안 가게?”
“나는……”
기분전환 겸 스터그와 함께 로디아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은 곳은 꺼려지는 건지 버트와 같이 가는 게 아닌 이상은 어딘가로 가지 않았다.
“아빠는 그럼 여기 있어. 대신 위험하면 부를 테니까 꼭 와줘?”
“그래. 그리고 이제 여왕도 한계인 거 같으니 슬슬 풀어줘야 한다.”
“아, 맞다.”
버트는 로디아 마을을 둘러보려는 계획 마지막에 달의 신전을 목적지로 끼워 넣었다.
“그럼 아빠도 슬슬 가야겠네……?”
“그렇지.”
“미안, 너무 오래 붙잡았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다. 그저 그 여왕의 인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오늘 떠날 수 있게 조치 해놓을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서로 난처해지는 게 싫어서 그래. 나도 빨리 정리를 해야지……”
버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스터그는 지긋이 보다가 버트의 머리를 두드려주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처음 한 말은 즉답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은근하고 차분했다. 그래서인지 좀 더 버트에게 와닿았다.
“고마워, 아빠.”
“쑥쓰럽군.”
“이따 선물도 줄게! 기대 하라구!”
“그러지.”
버트는 야영지를 떠났다. 길을 걷고 걸어 도착한 로디아 마을 초입. 확장 공사도 순조롭게 되는 건지 주변을 순찰하는 병사도 종종 보였다. 그래봤자 마성자들이 자처해서 봉사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마성자들은 버트를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이상 과하게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게 블랙스타의 교칙이었다. 하지만 블랙스타에 몸담고 있는 대부분이 그녀와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 중에는 발르틴에서 벌어진 ‘성례의 날’에 참석하지 못해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아쉬움을 버트의 굿즈로 달래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렇게 버트가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하나둘 시선을 보냈다. 알게 모르게 그녀에 대한 입지는 알려져 있었다. 마성자들 뿐만 아니라 마을 토박이들도 버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알아차렸다. 그것도 그럴 게 귀족으로 보이는 골드로츠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금화를 내놓았다.
최소 귀족 가문의 여식. 혹은 마룬 자작의 외동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이건 로디아 마을에 배치된 그림자를 쫓는 별 지부에서 벌인 수작이기도 했다. 그들은 버트에 대한 소문이 외부로 퍼지지 않게 최대한 난잡한 정보를 퍼뜨렸다.
어느 때는 운좋은 마을 처녀. 어느 때는 종기사. 또 어느 때는 귀족의 여식. 간혹 마룬 자작의 비서라는 말이 돌기도 했고 어쩔 때는 평범한 농부가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 골드로츠조차 그 소문을 종잡을 수 없어서 감탄했다. 버트와 비슷한 외견, 혹은 비슷한 이름의 사람들도 배치된 걸 알았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철저하구나.’
골드로츠는 그녀가 처음부터 대비를 끝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철저하고 매끄럽게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
‘운영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장악력을 가졌다. 베타 테스터라기에는 너무 젊어보였어. 그렇다면 듀크 사나 다른 테스터에게서 정보를 받아서 일을 벌인 건가?’
그런 골드로츠의 예상과는 다르게 버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버트를 만나 인사를 나누는 지금도 소름 끼쳐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멋쩍은 미소를 보며 오늘은 기분이 안좋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저 사람이 골드로츠라는 사람이야. 기사라는 캐릭터에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
삐이?
“그래서 조금 부럽기도 해. 나도 처음 시작은 기사 캐릭터로 했었다? 지금은 그냥 영락없는 모험가지만 말이야.”
버트는 골드로츠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또 왔구나.”
작은 탑. 일전에 살리마 왕국에서 보았던 귀르디의 탑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높이의 탑이 있었다. 그 앞에서는 야외 테이블에서 그레노와 리버가 오셀로를 두고 있었다.
“으아……! 이거 잘못 뒀어!”
“무르는 건 없다 이 놈아.”
“너무해 진짜! 저번에 약속도 안 지켜놓고!”
리버는 귀를 쫑긋거리며 분개했다. 그러다 코를 벌름거리더니 뒤돌아 버트를 보았다.
“누나!”
“하이고, 늑대란 녀석이 참 일찍도 알아채는구나.”
“여기에 집중하느라 몰랐단 말이야!”
리버는 헤벌쭉 웃으면서도 쉽사리 안기지 않았다. 이전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많이 성숙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종종 마을로 내려올 때 섹스를 하자고 하긴 하지만…… 그런 걸 뺀다면 정말 많이 컸다.
“그건 뭐야?”
“얘?”
버트는 어깨 위의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토닥였다.
“일단…… 둠워퍼야.”
“둠워퍼?”
“성공한 건가?”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그레노는 그렇게 말하며 판을 뒤집었다.
“으악! 뭐 하는 거야 늙은아!”
“이런 판에 연연하는 모습이 퍽이나 불쌍해서 말이다.”
“내가 역전할까봐 그런 거지!?”
“그래서, 넬하트를 찾아온 게냐?”
그레노는 리버의 역정을 넘기며 버트에게 물었다. 버트는 탑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오늘은 잠깐 들른 거예요. 구경 시켜주고 있었거든요.”
“으흠, 그래서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군.”
“네?”
“미완성이기에 완성을 위해서 지식을 습득시키려는 게 아닌가?”
그레노의 말에 버트는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맞는 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이 산책은 그림자를 위한 구경이었다. 이걸로 그림자가 좀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비슷해요.”
“그렇구나. 힘내거라. 탑에서도 새로운 종족을 창조하거나 변종을 만들어내는 걸 연구해보았단다. 필요하다면 자료를 요청해보마. 어차피 라이벨과 친구니까 그 정도는 해주지 않겠더냐.”
“말씀 감사합니다. 한 번 얘기라도 해볼게요.”
버트는 고개를 꾸벅이며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러다 직전에 뭔가 떠올라 질문했다.
“혹시 드래곤에게 좋은 선물이 뭐가 있을까요?”
“드래곤? 음, 드래곤에게 좋은 선물이라……?”
그레노는 턱을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리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커다란 소 한 마리를 선물하는 건 어때? 가끔 마을에서 신전으로 소를 보내주는 데 엄청 맛있었어.”
“으후후, 그래, 그것도 생각해볼까.”
버트는 리버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이거 제법 큰 과제를 주는 군.”
“죄송해요. 저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다 같이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럼 그 건은 맡겨주겠나? 어차피 지금 하는 일도 아직 진행 중이지 않나.”
“그래주시겠어요?”
“최적의 선물을 선출해보지.”
“감사합니다.”
*
버트가 다음 행선지로 삼은 곳은 달의 신전이었다. 마을 외곽에 세워진 이 신전은 거의 초원에 가깝게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신전이 마을의 창구라는 말도 했다.
“언제 봐도 예쁘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신전. 이곳은 NPC만이 아니라 플레이어도 종종 보였다. 그들은 늑대인간이 되기를 희망하거나 늑대인간과의 교류가 목적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들은 언젠가 이곳의 늑대들이 아드레이 왕국과 전쟁을 벌일 거라 예측했다.
소위 늑대인간 코인을 타는 사람들은 신전을 오고가는 라이칸들을 유심히 보았다.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거 같은 라이칸이 보인다면 선물 공세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버트는 그들을 지나치며 신전으로 똑바로 나아갔다. 신전의 크기는 로디아 마을의 건축물 중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이 신전이 눈에 띄지 않은 이유는 저 멀리 세워진 신상 때문이었다.
버트가 봐도 정말 큰 신상이었다. 멀리 있어도 커보이는 데 가까이서는 얼마나 클까. 거기에 시선이 흘러버리니 신전의 웅장함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라이칸과의 교류라는 부가적인 목적도 있었으니 더더욱 신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보여? 저 신전은 라이칸들을 위한 거야. 달의 신전이라고 불러. 달이 떠있을 때 보면 진짜 예뻐.”
삐이 삐
“저기 신상은…… 뭘 만든 건지 모르겠어. 엄청 예쁜 사람이란 건 알겠는데 페이니는 아니더라. 니스도 아니고…… 영 감이 안 잡혀.”
버트는 그렇게 말하면 신전으로 들어섰다. 정보 조직 벌떼의 요원들은 버트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 말았다. 그림자를 쫓는 별이나 미래의 눈에서도 그녀를 마킹하지 않았으니 그들도 자연스레 손을 뗐다.
타각 타각
신전 곳곳에 라이칸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버트를 본체 만체 했다. 이건 리버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타 이모탈이나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반응하라. 이것 역시 버트에 대한 시선이 떨어지는 데 한 몫 했다.
버트는 신전 곳곳에 설치된 의자들을 지나갔다. 그렇게 한 구석에 도착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께 기도 드리러 왔습니다.”
“어서 오시죠.”
신전 지하로 향하는 길. 그 안에는 기도실이 있었다. 그리고 버트는 그 많은 기도실 중 하나에 들어가게 됐다.
물론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쿠르릉
버트가 들어서자마자 기도실이 진동했다. 그림자가 놀라서 버트의 어깨를 붙잡고 오들오들 떨었다.
“괜찮아. 이제 지하로 이동하는 거니까.”
그렇게 지하에 도달하고 보인 건 곳곳에 뚫려있는 토굴이었다. 사람 두셋은 우습게 지날 수 있는 굴들은 그야말로 토끼굴처럼 사방팔방 뻗어있었다. 이 구멍들은 초원 곳곳으로 통했다. 그래서 신전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신전 지하로 올 수도 있었다.
“그릇. 왔나?”
라이칸 중 하나가 버트를 반겼다.
“여왕님은 어디 있어?”
“저기 있다. 흐후후.”
라이칸은 음흉하게 웃으며 손가락질 했다. 거기에는 석실 하나가 있었다.
“고마워.”
버트는 석실 문을 열었다. 확 풍겨오는 비린내. 코를 찌르는 악취에 버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흐하…… 흐하…… 후하아……”
거기에는 정액에 뒤덮인 케틀라이아가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떡져있는 머리카락은 체액에 범벅이 되어 엉켜있었다. 옷은 없었다. 목에 걸린 목줄 하나가 전부였다. 흐릿해진 눈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던 케틀라이아는 문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엉금엉금 기어왔다.
“늑대 자지 마시써어…… 더 해져……”
케틀라이아는 아예 입을 다물 힘도 없는 건지 턱이 벌어져 있었다. 발음도 제대로 못해 어눌하기 그지없었다.
버트는 웃는 얼굴로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아응…… 응……”
“이제 돌아갈 시간이에요, 여왕님.”
“돌아가……? 어디로……?”
“여왕님이 계시는 나라죠.”
버트의 대답에 케틀라이아가 뒤로 엉금엉금 기었다.
“시러…… 안 가…… 여기 이쓸 꺼야……”
그러자 버트가 목줄을 확 낚아챘다. 버트는 서늘한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목이 당겨져서 숨통이 조이게끔 해주고 내리 까는 시선으로 봐주니 케틀라이아가 오들오들 떨며 오줌을 지렸다.
“자지가 그렇게 좋아요? 평생 여기 늑대들한테 박히며 살게 해줄까요? 아니면…… 늑대의 새끼를 계속 낳게 해줄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케틀라이아의 호흡이 가빠졌다. 비단 목줄이 숨을 조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망상을 버티지 못해 몸에 오류가 난 것이다. 버트는 처음 초원에 왔을 때 라이칸에게 붙잡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아마…… 로그아웃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걷어차버렸었지. 지금 케틀라이아도 버트와 같은 선택을 하고 있었다.
버트는 다시 목줄을 당겼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든 다시 오면 늑대들의 구멍으로 써줄게요. 그러니 오늘은 돌아가세요. 안 그러면 늑대도, 자지도 없어.”
마지막 한 마디는 강압적이었다. 그건 효과적이었는지 케틀라이아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버트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쯔덕
아직도 입안에 남아있는 정액이 뒤섞였다. 버트는 아랑곳 않고 케틀라이아와 혀를 뒤섞고 키스해주었다. 이것도 제법 큰 자극이 되었던 걸까. 케틀라이아는 그대로 헤벌쭉한 얼굴로 나자빠졌다.
버트는 그런 케틀라이아를 뒤로 하고 라이칸 하나를 불렀다. 최대한 깨끗하게 하고 야영지에 있는 스터그에게 돌려보내라 부탁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돌아갈까?”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기로 갈까, 그럼.”
*
버트가 향한 곳은 검은 동굴이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퍼드롬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릇이시여.”
“아…… 루하다는 어떤가요?”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이제 찾아 보셔도 마기의 역류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요? 보러 가도 돼요?”
“네, 물론입니다.”
퍼드롬은 슬쩍 어깨로 시선을 두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버트는 그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루하다가 있는 동굴 깊은 곳으로 향했다.
*
“보여?”
버트는 어둠 너머로 보이는 루하다를 보았다. 그는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저 사람이 루하다야. 아니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루하다가 마지막 남은 둠워퍼야. 네가 널 만든 이유기도 해.”
삐이
그림자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서…… 내 고집 때문에 저렇게 누워있는 거래. 그래서 그것 때문에 미안해서 미칠 거 같더라.”
버트는 아련한 눈으로 루하다에게 다가갔다. 그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마기가 역으로 빨려나가는 상황에서 그의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는 건 그를 죽이는 짓거리였다.
“정말 이상해. 나랑 처음 봤을 때부터 무조건 섬기기만 하고. 내가 하는 건 전부 들어주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해주고.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삐이!
그림자는 자기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끄덕였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해.”
삐이……?
“정말…… 몇 번이나 생각해봤지만 나는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모르겠어. 마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아무리 마신의 부활을 위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버트는 그림자를 계속 쓰다듬다가 루하다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넌 둠워퍼가 될 수 없어. 어느 누구도 루하다…… 그리고 루하다의 종족을 대신할 수 없어. 무슨 짓을 해도 이런 존재가 또 나타나진 않을 거야.”
버트는 루하다를 보고 있었지만 명백히 그림자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얌전히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루하다를 위해서라고 해도 너를…… 아니면 너 이후의 다른 무언가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걸 너희에게까지 한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둠워퍼는 둠워퍼만의 방식이 있는 거고,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버트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다른 이름을 줄까 해. 그래도 루하다를 위해, 루하다를 기반으로 만든 거니까 흔적은 남겨야겠다 싶었어. 그래서…… 뭔가 다른 이름을 생각해봤는데 내가 이름 짓는데 센스가 워낙 없거든.”
그 자리에 리버가 있었다면 격하게 공감했을 것이다. 버트는 그림자를 보더니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둠.”
삐이?“
“둠워퍼에서 따올만한 게 없었어. 그냥 딱 듣고 떠오른 게 이거 뿐이더라. 미안해.”
“어…… 둠……”
“어?”
그림자는 미숙한 발음으로 말했다. 버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 이름…… 어둠…… 나는…… 어…… 둠……”
그 순간 주변 시야가 꺼졌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었지만 명백히 다른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야가 꺼졌을 때 무언가 버트의 어깨를 감쌌다.
“루하다?”
누워있어야 할 루하다가 버트를 안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루하다는 버트가 아닌 검은 동굴을 어둠에 잠식시킨 존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넌 뭐지?”
“어, 어둠……”
목소리만 들렸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히 느껴졌다.
“나, 나는…… 버트의 시종…… 어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