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88화 (88/104)

〈 88화 〉 88 ­ 베르테 야영지 上

* * *

야영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10분 정도 걸어간 뒤에 낮은 산과 함께 곳곳에 세워진 천막과 평평한 바닥이 보였다. 저 멀리 라피에 초원이 보이는 이름 없는 야산. 이곳이 다크나이트가 실전 훈련을 하는 베르테 야영지였다.

사실 산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판타지아에 있는 여러 산에 비하면 여긴 뒷동산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훈련 설비까지 열악한 건 아니었다.

넓은 연병장. 튼튼한 천막. 곳곳에 비치된 치료 시설과 타격 훈련 인형들. 마지막으로 날을 갈지 않은 검과 무게만 높인 방어구들이 있었다. 그 외에는 건식량 창고, 망루, 참호 등이 있었지만 딱히 쓸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왜 이 곳으로 온 건가?”

넬하트는 질문을 던졌다. 버트는 주변을 살피며 한 천막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오고 나서야 용건을 털어놓았다.

“둠워퍼를 만들 거예요.”

“음?”

“가능한가?”

“뜻대로 하시옵소서.”

넬하트는 의아한 반응을, 스터그는 의문을, 퍼드롬은 반문 없이 대답했다. 버트는 웃으면서 골드로츠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둠워퍼를 당신에게 양도할 거예요.”

“저에게요……?”

골드로츠는 빈 침대에 케틀라이아를 눕히며 대답했다. 이제는 그녀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틸카스가 그녀의 검을 받고나서 보인 반응을 떠올리면 당연했다. 그저 대체 무엇을 만드는 건지,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네. 둠워퍼는……”

버트는 다른 세 사람을 보았다.

“이제부터 설명해주실 거예요.”

버트가 스터그와 퍼드롬을 보았다. 두 사람은 버트의 시선에 서로를 한 번 보았다. 시작은 퍼드롬이었다.

“둠워퍼는 리아주크의 발걸음을 쫓는 자를 지칭하는 존재입니다. 그림자에 사는 난쟁이들로 리아주크의 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골드로츠는 퍼드롬의 경어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본디 나이트피어처럼 형체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육체에 연연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평면세계를 넘나들기 위해서 그렇기도 하고요. 중요한 점은 마기에 가장 친화적이며 리아주크가 가장 먼저 만들어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기에 능통한 것으로 치면 리아주크의 수족들 중 제일이라 할 수 있지요. 일단 문헌으로 전해진 정보는 이 정도입니다.”

퍼드롬은 스터그를 보았다. 스터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내가 상대했던 둠워퍼들은 하나 같이 거대했다. 본디 드래곤의 육신은 하나의 산을 뒤덮을 정도로 크다. 그런 드래곤과 맞먹을 크기까지 불어났으니 작은 편은 아닐 테지. 형태도 자유자재로 변해서 상대하기에는 가장 어려웠다. 오히려 다크나이트가 상대하기 편했지.”

버트는 루하다가 라피에 초원에서 라이칸들을 위협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외에는 이 광신도가 말하는 거랑 크게 다를 거 없었다.”

“정말요?”

“그럼.”

“음, 좋아요.”

버트는 넬하트를 보았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 알고 계신 게 있나요?”

“처음 듣는 군. 애초에 둠워퍼란 존재가 있단 것도 처음 알았다네.”

혹시나 싶었다. 어딘가에는 기록으로 전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것조차 없었다.

버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를 해야 했다. 리아한테 물어봐도 될 일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설사 곁에 있었다고 해도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둠워퍼. 그것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알았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둠워퍼를 만들 거예요. 퍼드롬 할아버지. 바로 돌아가셔야 하나요?”

“아닙니다. 성지에서 급했던 일은 전부 처리했으니 얼마든지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릇께 전해야 할 말도 있으니 조금 더 있겠습니다.”

“전해야 할 말이요?”

“예. 남은 리아주크의 육신이 어딨는지 알게 됐습니다.”

버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요.”

퍼드롬은 인자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구체적으로 어딨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릇께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끝내고 찾으러 가셔도 좋습니다. 블랙스타는 리아주크의 부활을 100년이고 200년이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때? 저기 여왕님이 내가 목적이랬으니까 좀 더 머무를 수 있지?”

스터그는 케틀라이아를 보았다.

“가능하다.”

“물어본 건 아니지……?”

스터그는 침묵했고 버트는 머쓱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골드로츠였다.

“여기에 얼마나 머무실 수 있나요?”

“정확히 정한 건 아니지만…… 한 달 내외로 돌아갈 듯 합니다.”

“그러면 그 전에 만들어낼 수 있게 할게요.”

“그, 제가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만…… 혹시 이전에 검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NPC를 만들어 낸다는 소린가요?”

골드로츠는 NPC라는 말을 하며 슬쩍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봤다. 버트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 웃으며 대답했다.

“비슷해요.”

“그거 직권 남용 아닌가요? 운영자라면 응당­”

직권 남용이란 말에 퍼드롬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골드로츠는 말이 쏙 들어갔고 버트는 그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영자는 아니에요.”

“네? 그럼 평범한……?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운영자랑 연락도 하려 했는데 잘 안 되더라구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운영자는 아니에요. 전부 게임을 하면서 얻어낸 거예요.”

“음…… 이거 아무 한테나 말하시는 건가요? 파장이 적잖이 클 텐데.”

골드로츠는 이것이 상당히 위험한 내용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 게 아이템을 뽑아내고 NPC를 생산해낸다는 시점에서 이미 끝났다. 이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듀크 사에서 나설 것이다. 설사 정당하게 해서 얻었다고 해도 질시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 아뇨. 그럴 리가. 그저 문제가 될 듯 해서 그렇습니다.”

“걱정 마세요. 이 자리에서 여기저기 퍼뜨릴 사람은 없으니까요.”

버트는 그저 골드로츠를 믿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골드로츠는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섣불리 입을 열지 마라.

지금 이 곳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괴물이었다. 아니,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버트는 믿는다는 의미에서 말했을지 몰라도 골드로츠에게는 역으로 협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입지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귀족이 된 골드로츠에게는 온라인의 입지가 더 컸다. 오프라인의 손가락질보다 눈앞에 있는 버트의 존재가 더 가치 있었다.

골드로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건 어쩌면 출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귀족들의 멸시와 플레이어들의 조롱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서 백작위까지 얻어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분명 그 이상은 욕심이었지만 지금 그 길이 보였다.

“물론이죠. 플레이어로서 동맹을 제안한 입장에서 먼저 배반할 수 없죠.”

버트는 묘하게 대답이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둠워퍼를 창조하는데 집중하고 싶었다.

“어쨌든 여기서부터 만들어낼게요. 퍼드롬 할아버지. 루하다를 돌봐주세요.”

“장로께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검은 동굴에서 회복 중이에요. 제가 다가가면 마기가 빨려 들어와요. 그래서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힘들어요.”

“그릇께서 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아빠는 내 곁에 있어줘.”

“그러마.”

“할아버지는 어쩌실래요?”

넬하트는 자신을 지목하자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꽤나 흥미로운 일이긴 하네만…… 리아, 그 아가씨가 좀 더 흥미롭구나.”

“네. 그리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위험한 일이었을 수도 있는데……”

“뭘 그 정도로.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넬하트는 껄껄 웃으며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골드로츠는 머쓱한 얼굴로 버트를 보았다.

“그럼 저도 당분간 이 영지에 머물러야겠네요. 로디아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골드로츠와 퍼드롬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버트와 스터그, 케틀라이아 뿐이었다. 케틀라이아는 깨어날 기색이 없었으니 버트는 곧장 작업을 시작했다.

“좋아, 만들어볼까.”

*

“으음……”

버트가 둠워퍼를 창조해내는 사이 케틀라이아가 깨어났다. 그녀는 힘겨운 소리를 내며 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긴……”

케틀라이아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버트였다. 그녀를 본 케틀라이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큰 소리로 호통을 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어느 새 다가온 스터그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읍­ 읍­

스터그의 커다란 손이 코와 입을 완벽하게 막았다. 케틀라이아는 숨이 막혀 얼굴이 시뻘개질 때까지 발버둥쳤다. 스터그가 손을 놓아주는 건 케틀라이아가 소리를 낼 여력도 없을 때였다.

“흐하…… 흐하……! 흐학……!”

케틀라이아는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다 스터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의 무심한 눈을 보고 말을 삼켰다.

지금 그는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지 버트의 편을 드는 듯 했다.

“……왜 이러는 거지?”

케틀라이아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입을 틀어막았다는 건 큰 소리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일단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내 딸이 원해서지.”

“딸이라니…… 대체……”

케틀라이아는 버트를 보았다. 그녀는 다른 데는 신경 쓰지 않는지 검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시 스터그의 합류도 버트의 계략인가 싶었다.

“딸의 부탁으로 네게 온 거다. 그런데 네가 쫓는 게 내 딸일 줄은 몰랐군.”

“그런……”

케틀라이아는 그때 실신해서 알지 못했다. 그 당시 상황을 보았던 에이어 공작은 집무로 바빠서 스터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단이 일어났다. 아마 케틀라이아가 그 당시 상황을 알았더라면 진즉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터그가 얼마나 무심한 남자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있어라.”

케틀라이아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녀가 뭘 할 수 있을까. 일국의 여왕이란 직책이 무색하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정도 지났을까…… 버트가 손을 한 번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케틀라이아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또 만났네요.”

“……그렇게 됐군.”

분명 쳐들어온 건 케틀라이아였다. 그런데도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제가 부탁 드렸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셨네요.”

“그런 굴욕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하는 수 없죠.”

버트는 입에 손가락을 물었다.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케틀라이아의 생각이었다. 버트는 상당한 고주파를 냈다.

“……뭘 할 생각이지?”

“처벌이죠.”

“처벌?”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이렇게 찾아왔으니까…… 벌을 내릴 거예요.”

그 순간 케틀라이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분명 그녀는 나름대로 표정 관리를 하려 했다. 그러나 모든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다. 혹시나 어떻게든 표정 수습을 했다고 해도 버트에게 속내를 숨길 수는 없었다.

쿵­

천막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버트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누가 온 지 알 수 있었다.

사락­

천막이 걷어지고 거대한 흰늑대의 머리가 들어섰다. 화이트슈트가 본체로 온 것이다.

“불렀는가.”

“응. 이 여자 데려가서 손 좀 봐줘.”

“무슨 짓을 하려는­”

케틀라이아는 말을 하다 말고 천막으로 들어서는 늑대인간들을 보며 말을 잃었다.

“몬스터……? 대체 너는 뭐하는 작자냐……!”

“잔말이 많구만.”

“그릇한테 찍히려면 뭔짓을 해야 해?”

“이, 무슨……! 놔라! 이거 놔……!!”

라이칸들은 케틀라이아를 붙잡았다. 케틀라이아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끌려갔다.

버트는 그녀가 나가고나서 슈트를 한 아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보송보송한 털을 한참 만끽하고 말했다.

“늑대들이랑 같이 괴롭혀줘.”

“괴롭혀달라면 고문을 하란 뜻인가?”

“아니. ……나한테 했던 것처럼.”

“흠. 그러지. 그런 취향인 건가.”

“비슷할 거야. 잘 부탁해.”

버트는 슈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슈트는 그곳을 떠나기 전 스터그를 힐끔 보았다. 스터그는 슈트가 떠나고 버트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죽진 않겠지?”

“나한테 한 것처럼 해준다면야…… 좋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버트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러다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보다 뭔가 감이 잡히지 않아. 다른 걸 만들 때는 잘 만든 거 같은데…… 막상 둠워퍼를 만들려고 하니까 어렵게 느껴져. 아니, 할 수는 있는데 잘 안 될 거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버트는 횡설수설하며 손을 퍼덕였다. 스터그는 가만히 들어주다 질문했다.

“너무 강박을 느끼며 하는 게 아닌가.”

“강박……?”

“왠지 모르게 쫓기는 느낌이라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버트는 확실히 쫓기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루하다에게 선물도 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었어.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해주고 싶어.”

“얼마 안 남았다라.”

스터그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지긋이 보았다.

“조만간 딸을 잃겠군.”

“미안해, 아빠.”

“그 정도는 각오했다. 다만 네가 사라진다면 이전처럼 은거하며 살지 않을까 싶군.”

“그건 안 했으면 좋겠어. 하다 못해 친구들이랑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보는 건 어때……? 저번에 멜그라우라는 드래곤도 찾아가보라 했잖아.”

“그랬었지.”

스터그는 폭급했던 드래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이 너를 만났을 때가 기대되는 군.”

“아빠가 직접 말할 정도면 이상한 사람인가보네.”

“그렇지. 싸움에 미친 녀석이었으니까. 아마 널 보자마자 덤빌지도 모르겠군.”

“그런 사람한테 보내려 한 거예요?”

“걱정 마라. 네가 이기니까.”

“그런 문제가 아닌데~”

버트는 투덜거리다 피식 웃었다.

“아무튼 모두의 좋은 모습을 보며 떠났으면 좋겠어. 내가 없어진 후로도 좋아졌으면 좋겠어.”

버트는 만지작거리던 마기를 그대로 쥐어짰다.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욕심이 나.”

“흠.”

스터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렇게 버트가 창조에 집중해주는 동안……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

뮬러 7세는 심각한 얼굴로 슌 후작과 마주했다.

“난처하군요, 허허……”

후작은 풍성한 얼굴로 웃었다. 뮬러 7세의 심각한 표정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의 이 넉살 때문에 고위 관직에도 불구하고 정계에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업무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특유의 느글느글한 성정이 문제였다. 뮬러 7세도 그 점을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골드로츠의 축하. 키런 왕국이 판테스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축하해주려 사신을 보냈다. 안 그래도 키런 왕국의 침입자 일로 복잡한 판국에 사신을 보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그저 외교를 위해 자잘한 축하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끔찍하게 겹쳤군.”

골드로츠가 로디아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 이것 역시 같은 이모탈 귀족끼리 만난다는 전제 하에 특별할 일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는 점이었다. 그저 축하를 해준다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을 들게 했다.

키런 왕국의 샬론 백작과 판테스 왕국의 블랙 남작이 무엇 때문에 일 주일도 아니고 그 이상을 함께 하는가.

둘이 연인이란 말도 있었고 모종의 협약을 맺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 중 대두되는 화제는 키런과 판테스의 동맹이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건 두 나라의 행보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서방 최강국 베톰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 설비를 늘린다든지,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 부분은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 그 두 나라의 귀족이 만난다? 그것도 서로가 등용한 최초의 이모탈 귀족 두 사람이? 직위는 낮을지언정 그 상징성이 약하지 않았다. 물론 몇 귀족들의 의견은 달랐다.

중요한 일을 이모탈에게 맡긴다? 그건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견은 키런과 판테스의 동맹으로 보고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여왕 케틀라이아. 그녀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한 건 정확히 하루 뒤였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뮬러 7세는 정보망을 가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의 원흉인 골드로츠의 수상함이 그의 정보망을 움직이게 했다. 그 덕분에 로디아 마을에서 벌어진 이변, 그것도 상당히 굵직한 사건을 보게 되었다.

“여왕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지?”

뮬러 7세의 질문에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정보원이 대답했다.

“달의 신전 지하에서 참배 중이라고 합니다. 신전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누구도 보지 못해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로이첸 측에서는 뭐라 하던가?”

“에이어 공작은 여왕이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고 했습니다. 아마 왕국 내에서도 극비리에 이동한 듯 싶습니다.”

“골치가 아파. 이 사실은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겠지?”

“3대 정보 조직에서 언급되는 건 없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렇다면……”

가장 큰 건이 남아있었다.

“블랙스타 교주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려진 건?”

“……그건 아직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워낙 보는 눈도 많았거니와 그의 이동 경로가 너무 명확했습니다.”

블랙스타. 나라 하나를 궤멸시켰던 교단. 최강국 베톰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했고 어느 나라도 품지 못했던 단체.

그 교주가 로디아 마을에 입성했다.

지금 판테스 왕국은 필요 이상으로 시선이 쏠리게 됐다. 이건 그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분명 키런 왕국에서 벌어진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블랙 남작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런데 웬걸, 소란이 더욱 커졌다. 돌풍에 그쳐야 할 바람이 태풍이 되어 휘몰아치려 했다.

“교주가 스카이 왕국을 나선 게 이번이 2번째……”

한 번은 버트와 만나기 위해, 다른 한 번은 지금이었다.

우연도 아니고 같은 나라를 두 번이나, 그것도 몇 년만에 재방문했다? 실상 몇 년도 아니었다. 근 1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미치겠군.”

뮬러 7세의 말에 슌 후작은 슬쩍 눈치를 보다 말했다.

“우선 이 건은 당장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회의를 여시지요.”

“후우…… 그것도 어중간해진다네. 이번 방문 때문에 회의를 한다면 어떻게 보겠나?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써서 여는 회의라 생각하겠나, 아니면 블랙스타를 어떻게 포섭할지 작당모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나?”

“음음……”

후작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니 회의는 열어선 안 되네. 그저 그 마을을 방문한 세 사람 전부 하루 빨리 돌아가길 빌어야지.”

“그렇군요. 그럼……”

후작은 슬쩍 뮬러 7세의 눈치를 보았다.

“심신 안정에 좋은 차가 있습니다. 살리마 왕국에서 건너온 건데……”

“허허­”

뮬러 7세는 그의 넉살에 다그치는 것도 아니고 기뻐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의 말대로 차나 한 잔 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래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 무엇인지 맛이라도 봄세.”

“마음에 드실 겁니다, 폐하.”

*

비슷한 시각……

“전부 모였나?”

고경태. 판타지아의 운영부장인 그는 모니터를 향해 말했다.

[ 아직. ]

간단한 문자가 떠올랐다. 경태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백신을 호출한지 몇 주 째였다. 분명 윤희정은 그냥 두라고 했지만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전원 호출에는 즉각 반응할 수 있지만 희정이 알게 됐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백신 3호의 이상 행동도 해결해야 하고 지금 판타지아에서 벌어지는 이변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경태는 머리를 벅벅 긁어대다 마른 세수를 하며 웅크렸다.

“제발……”

그렇게 한숨을 쉬며 쉬는 동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똑똑­

“부장님.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지금 바쁘다고 나중에 찾아오라고 하세요.”

“그게……”

“나중에 찾아오라 하라니까요.”

경태는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

“나일세, 고 부장.”

익숙한 목소리. 경태는 벌떡 일어나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이사님.”

경태의 눈앞에 있는 남자. 그는 듀크 사의 임원 중 하나인 정영훈 이사였다.

*

똑­ 똑­ 똑­

영훈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경태는 말없이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듀크 사 주식을 보았나?”

“예. 연일 급등하고 있더군요.”

“자네는 이게 좋은 상황이라 생각하나?”

영훈의 질문에 경태는 시선을 바닥에 깔았다.

“좋습니다. 좋은데……”

“좋은데?”

“먼 미래를 보면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도 임원들은 마냥 주가가 오른다고 좋아하고 있어. 앞날만 보고 사는 멍청이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정말 속편하다고 생각해.”

“회장님 일 때문인가요.”

뿌작­

영훈은 회장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볼펜을 부러뜨렸다. 영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경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판타지아의 개발 비화? 거기에 휩쓸린 게 회장의 아들이란 거? 아니, 회장 아들도 아니었지. 그때 아버지는 대주주였을 뿐 대표 이사도 아니었으니까. 여튼 아들보다 손자를 더 챙기던 그 꼬락서니 말이야?”

“이사님.”

“흥분했구만.”

영훈은 박살난 볼펜을 툭 던졌다.

“그래서 회장님 일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냐면…… 아니야. 백신 관리는 자네가 하고 있지?”

“예? 예, 그렇습니다만…… 실질적인 권한은 제가 아닌 윤희정 팀장이 갖고 있ㅅ”

“백신 하나를 빌려가지.”

“예……?”

“말 그대로야. 백신의 몸을 빌릴 거야.”

경태는 그의 말에 의아함을 표했다.

“대체 왜…… 아니, 그 전에 불가능합니다. 그건 뇌파를 투영하는 아바타가 아니라 온라인에 존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접속 후 동기화 자체가 불가…… 능한…… 데……”

경태는 말을 하다 말고 영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격 요건은 충분하지?”

“……백신 중 적합 개체를 추려보겠습니다. 하지만 동기화가 안 되면 불가능합니다. 이건 아무리 이사님이 ‘그런 상태’라고 하셔도 불가능합니다.”

“괜찮네.”

“그럼…… 왜 백신을 쓰려 하시는 겁니까?”

영훈은 경태를 지긋이 보았다.

“그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목적에 따라서는 대여하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영훈은 콧김을 푹 뿜었다.

“그냥…… 감사라고만 해두지. 게임 내에서 부적절한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알겠습니다. 찾으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럼.”

경태는 영훈이 나가고 한참 모니터를 보았다. 응답한 백신은 셋. 아직 응답이 없는 3호를 제외하면 둘의 대답을 더 기다려야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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