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87화 (87/104)

〈 87화 〉 87 ­ 로디아 마을 下

* * *

“여기가…… 로디아 마을이 맞나?”

“예, 그렇습니다.”

샬론 백작, 골드로츠. 그는 놀란 얼굴로 로디아 마을을 보았다. 아니, 이제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성장해가는 도시의 느낌이 들었다. 비록 성벽은 없다지만 그 규모는 작은 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커져 있었다. 길도 어느 정도 닦였고 목책이 세워져 있으며 곳곳에 회반죽으로 만든 건물들이 보였다.

골드로츠가 기억하는 로디아 마을은 이렇지 않았다. 초심자 마을이란 명칭에 걸맞게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났다. 사람의 발길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왁자지껄. 그야말로 발전해가는 마을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전에 보았던 라피에 초원도 그랬다. 늑대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곳이라기에는 너무 평화로운 길이 되었다. 처음 판테스 왕국에서 초원을 관통해서 가면 된다는 안내에 시험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늑대들의 습격은 없었다. 지나가는 플레이어를 잡아 물어보니 라이칸슬로프에 대한 애기를 해주었다. 덤으로 골드로츠를 뒤늦게 알아보고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로디아 마을을 보고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플레이어에게 들은 얘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두 눈으로 보기 직전까지 믿지 못했다.

그 전에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거대한 여신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대한 조각상은 많이 봐왔지만 멀리서도 웅장하다는 느낌을 주는 건 처음 보았다. 키런 왕국에서 보았던 조각상도 10미터 정도나 되었다. 하지만 여신상은 그에 몇 배나 되어 보였다.

“굉장하군.”

“그러면 백작 각하께서 왔음을 알리겠습니다.”

병사는 고개를 숙이며 떠나갔다. 골드로츠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대답하고 마을을 보았다. 문득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그의 스타팅 포인트는 여기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시작의 마을이었다.

“너희는 기다리거라. 잠시 다녀오지.”

“예.”

골드로츠는 병사들을 두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직 흙길인가. 그래도 잘 다져져 있군.”

골드로츠는 길바닥을 통통 차며 생각했다. 주변 풀의 정돈도 잘 되어 있었다. 그저 돌과 자갈이 덜 깔렸을 뿐 충분히 좋은 길이었다. 건물들 역시 불안정함 없이 튼튼해보였다. 그 중 하나 눈에 띄는 건 탑이었다. 여신상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마법사의 탑을 축소판으로 줄여놓은 모습이었다.

“사준다 했잖아요! 제가 이겼잖아요!”

“어허, 차포 빼고 해서 이겼으니 완전히 이긴 게 아니지.”

“진짜 비겁해 진짜!”

회색 머리의 소년과 노마법사. 두 사람이 탑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의 머리에 있는 뾰족한 귀와 엉덩이의 꼬리를 보면 라이칸슬로프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발로 선 늑대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인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이보게.”

“음?”

골드로츠의 부름에 노인이 반응했다.

“혹여 여기 어떤 시설들이 있는지 알 수 있겠나.”

“방문객입니까. 그게 아니면 이모탈입니까.”

“이모탈이자 방문객이네.”

노인은 소년을 보았다.

“너는 돌아가거라, 리버.”

“초콜릿 사탕 사준다더니!”

“어허, 너는 먹으면 안된대도. 돌아가라.”

“나중에 누나한테 다 이를 거야!”

“그러려무나.”

소년은 툴툴거리며 떠나갔고 노인은 인자하게 웃으며 골드로츠를 보았다.

“잠시 걷겠습니까?”

“멀리 가지는 못하네. 소식을 전할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지.”

“혹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 말인지요?”

“……맞네.”

“소식을 전하러 온다면 말씀 드릴 테니 느긋하게 돌아다닙시다.”

“알았네.”

노인은 앞장 섰고 골드로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레노라고 합니다.”

“골드로츠라고 하네.”

골드로츠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레노는 그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손을 들어 각 시설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얘기를 듣다 보니 골드로츠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장간. 제련소. 가공소. 무기점. 방어구점. 잡화점. 거래소. 상단 은행. 여관. 약품점. 주조장. 식료품점. 식당. 이러고도 아직 남아있다?’

보통 마을에 있는 시설물은 복합적인 기능을 하기 마련이었다. 가령 숙소로 쓰는 여관은 식당과 주점, 정보거래소를 겸업하기도 했다. 건물 자체가 많지도 않거니와 한 곳에 몰려 있어야 이용하기 편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기능별로 건물이 나뉘었다는 건 그만큼 기능의 질이 좋고 마을의 규모가 크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미완성 건축물들만 봐도 로디아가 얼마나 발전하고 있고 발전 중인지 알 수 있었다.

“굉장하군.”

“혹여 이곳에 와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하지만 주워들은 얘기가 있지.”

골드로츠는 ‘그림자를 쫓는 별’의 분점 건물을 보며 말했다.

“본래 이 마을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알고 있네.”

“지금의 반의 반도 안 됐었다고 하더군요.”

“흠.”

골드로츠의 시선은 쉴 새 없이 여러 건물을 보았다. 초보자 마을의 발전이 확 와닿는다고 느낄 때쯤……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구요. 제가 거기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

푸른 갑옷의 기사와 검은 갑옷의 기사. 그 중 검은 갑옷의 기사는 골드로츠가 모를 래야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엘도트 그라이버. 키런 왕국의 침입 사건 때 직접 검을 맞댔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지만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엘도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디아는 주춤거리며 등에 맨 활로 손을 가져갔다. 엘도트는 말없이 이디아에게 손을 들어보이며 제지했다.

골드로츠와 엘도트는 움직이지 않고 시선을 섞었다. 그러다 동시에 한 발 내디뎠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걸었다.

“선배. 방금 그 사람……”

“신경 꺼라. 알아 보았다고 한들 무슨 짓을 벌일 자는 아니다.”

엘도트와 이디아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가 골드로츠를 찾아왔다. 정리가 끝났으니 저택으로 와달라는 말이었다. 골드로츠는 그레노를 보았다.

“덕분에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네. 약소하지만 사례일세.”

골드로츠는 금화 몇 닢을 꺼내 넘겼다. 그레노는 사양하지 않고 금화를 받았다.

“혹시라도 시간이 남아돌거든 언제든 찾아오시지요. 넬하트의 탑으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러지.”

골드로츠는 이번에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넬하트라는 이름을 떠올린 건 병사들과 함께 저택에 도착한 뒤였다.

*

‘여신상에 비하면 볼품없다. 결코 작은 저택은 아니지만 영주가 머무는 곳이라기에는 초라하다.’

판타지아에서 귀족은 상당한 입지를 자랑했다. 당장 판테스 왕국의 델폰 남작만 해도 남작위임에도 불구하고 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룬 자작이라는 사람은 그 흔한 목책조차 세우지 않았다. 근방에 훈련의 흔적이 보이는 연병장이나 인공적으로 깎아낸 언덕 정도가 끝이었다.

‘허술해.’

골드로츠는 다크나이트들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접객실에 앉으며 자작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넬하트. 그래, 마법사의 탑 최고 수장. 그 이름을 왜 잊어버렸을까. 확실히 범상치 않아. 그 그레노라는 노마법사도 분명 실력자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골드로츠는 고개를 삐걱 돌렸다.

‘일개 자작이 키런 왕국을 침범했던 그 검은 기사들을 육성했다? 황금늑대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전력은 무시할 수 없어. 게다가 라이칸슬로프로는 신규 종족도 우호적이다. 상상 이상으로 주의해야 할 곳이야.’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기다리셨나요.”

우아한 목소리. 골드로츠가 고개를 돌려 보니 페이니가 은근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당신은……?”

“마룬 자작 님께서는 다른 영지로 출정을 가셨습니다. 대리자 자격으로 이 자리를 찾아온 블랙 남작이라 합니다.”

“……키런 왕국의 샬론 백작위에 있는 골드로츠라고 하네. 헌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어머 그럴 리가요. 그래도 백작 각하께서 알은 체를 해주시니 소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페이니는 빙긋 웃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칼라 해변에서 스쳐 지나가는 느낌으로 보았을지언정 이렇게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거짓은 없었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마룬 자작은 물론 블랙 남작, 자네에게도 축하를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네. 선물은 병사들을 시켜 저택 근방에 내려놓았으니 나중에 확인하게.”

“감사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그 전에 몇 마디 하지. 자네도 이모탈이니 알 테지만 내가 꽤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네.”

페이니는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상황인지요?”

“어떤 상황이냐니. 자네의 부하들 때문에 내가 곤란해졌단 거지.”

“어머, 그런 일이……”

페이니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골드로츠를 비롯한 키런 왕국의 수뇌부가 모를 수 없었다. 그저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블랙 남작의 기사들과 가신이 그 난리를 쳤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놓고 모르는 척을 하니 골드로츠의 속이 끓었다.

“그러니 이번 사태를 통해 서로 돕는 게 어떻겠나.”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을 테죠?”

골드로츠는 페이니가 선뜻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이유를 마련해왔다.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겠지만 이모탈이 귀족이 되는 건 여전히 특이한 사례일세. 마탑주도 그렇고 시기하는 이들이 넘쳐나지. 그래서 조금이라도 흠이 잡힌다면 물어뜯으려 한다네.”

“용건만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그러지. 대외적인 시선은 둘 째 치더라도 물어뜯기는 사람끼리 뭉쳐야 한다 생각하네.”

“동맹 제의인가요?”

“비슷하지.”

골드로츠는 품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읽어보게.”

페이니는 그가 내민 두루마리를 펼쳤다. 거기에는 키런 왕국에서 보내는 선물 명단이 적혀있었다.

“그 물건들은 전부 선물로 넘기는 것일세. 적혀 있는 게 대충 뭔지 알겠나?”

“키런 왕국에서 제련한 주괴와 가공 목재, 곡식. 귀금속이나 보석, 조각상도 있긴 하지만……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요?”

페이니는 두루마리를 접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선물로 받기 좋은 것들 뿐이었다. 문제는 앞서 얘기한 주괴나 목재, 곡식이었다.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적었지만 그 양이 상당했다.

“그저 영지를 꾸리는 데 보탬이 되라고 보내드리는 겁니다.”

“이 정도면 병사 수 백은 무장시킬 수 있겠는데요.”

페이니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뭘 원하시는지?”

“간단하네. 자네의 신하 중 몇 명을 키런 왕국으로 보내주게.”

“거절하겠습니다.”

“누구인지 듣지도 않고 말하는 건가?”

“일부러 간을 보려고 누구를 원하는지 말하지도 않으셨잖아요? 그저 영지에 있는 인재를 한 번 훑어보고 추려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노리는 사람이 있으신 거죠?”

페이니의 말은 정확했다. 그랬기에 골드로츠는 선뜻 부정할 수 없었다.

“버트.”

페이니는 버트를 불렀다. 골드로츠는 집무실로 들어오는 여인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군요.”

“……네.”

골드로츠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맞았다.

설마 그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를 그냥 부를 줄이야!

뻔뻔했다. 뻔뻔하다 못해 존경심이 들었다. 이 행동 하나로 골드로츠의 머리는 어지러워졌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골드로츠는 페이니를 보며 물었다. 상대의 수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게 정답이다. 과연 페이니는 싱그럽게 웃어보였다.

“무슨 의미냐니요? 본인에게 직접 말하라는 거죠.”

“미안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골드로츠는 말을 하다 말고 버트를 보았다. 확실히 침입자들은 강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버트를 안고 달아났던 루하다였다. 버트도 갑자기 나타나 모두와 함께 사라졌지만 아직 강함이 증명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이모탈이다. 바틸카스가 골드로츠를 기용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이모탈에게 관대한 건 아니다. 당연히 스카웃 목록에도 없었다.

하지만 페이니의 어투는 뭔가 미묘했다.

지금 주어진 상황.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태도. 떠넘기는 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행동.

골드로츠는 한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버트를 보았다.

“설마 당신이 블랙 남ㅈ”

“샬론 백작 각하.”

그때 페이니가 골드로츠를 불렀다. 그러더니 입술에 검지를 세우며 눈을 찡긋였다.

“발언에 주의해주세요.”

골드로츠는 황망한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버트는 그런 골드로츠를 곁눈질 하더니 바깥을 가리켰다.

“잠깐 걸으실래요……?”

*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서고 한참이나 주변을 걸었다. 버트는 주변 경관을 구경했고 골드로츠는 그녀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대체 언제부터 이 판을 짜놓은 걸까. 설마 자신의 대타를 내세우고 뒤에 숨어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지금의 블랙 남작은 이모탈인가? 그게 아니면 NPC?

뭐가 됐든 대륙 3대 정보 길드는 물론 온­오프라인 통틀어 모두를 속였다는 점이 경악스러웠다. 지금도 블랙 남작이 누구인지 명확히 해명한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운영자 캐릭터, 아니면 이벤트를 위한 NPC라는 말이 나돌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 실체가 있었다.

“의외로 자주 만나네요.”

버트가 말문을 열었다. 골드로츠는 머쓱하니 입맛을 다셨다. 그는 할 말이 많았지만 막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협상도 해야 하고. 궁금한 걸 풀고도 싶고. 게이머로서 공략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뭐, 그렇죠.”

하지만 나온 대답은 단촐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지금까지 귀족이 되었을 때 대비한 처세술이라든지, 화술이라든지, 능동적인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원하시는 건가요?”

“예?”

골드로츠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버트는 그저 미소로 화답했다.

“……왕국을 횡단했던 남자. 저와 검을 맞댄 기사와 푸른 갑옷의 기사. 마지막으로 에보니 남작입니다.”

“에보니 남작이요……?”

버트는 가만히 얘기를 듣다 마지막 인물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할게요.”

“조건도 듣지 않는 겁니까?”

“네. 무슨 조건을 걸어도 보내지 않을 거예요.”

“난처하군요.”

골드로츠로서는 적어도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데 버트는 단 한 명도 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면 골드로츠만 난처해졌다. 소동의 당사자를 만나서 결과물도 내오지 못하고 물자만 내주는 꼴이었다.

“……난처해요?”

버트의 질문에 골드로츠는 잠시 고민했다.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대타를 세워놓는 인물이다. 지금 골드로츠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건 골드로츠를 시험하는 게 분명했다.

적진에서 자신의 치부를 내보일 자신이 있는가.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가. 굴욕적인 발언이라 해도 할 수 있는가.

“예. 알고 계시겠지만 제 위치를 시샘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기 좋게 실수를 저질렀으니 다들 물어뜯으려고 난리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 혼자서는 벅찬 상황입니다.”

“아.”

버트는 눈을 데굴 굴렸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떠나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게 그가 말한 실수는 엄밀히 말하면 버트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의 검을 가져가면서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 어지러웠다.

그렇다고 호구처럼 전부 내줄 생각은 없었다.

“제가 그분들을 내준다고 해도 당신의 처지가 나아지나요……? 애초에 키런 왕국이라면 그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인재는 많이 있을 거 같은데요.”

버트는 생각보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녀는 단순히 궁금해서 던진 말이었지만 의표를 찌르기에는 충분했다.

“그건……”

골드로츠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인재를 데려가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특히 루하다. 그는 한 나라를 흔들어놓은 인재였다. 엘도트와 이디아도 버트가 정확히 모를 뿐 탐나는 인재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타국에 와서, 나라를 어지럽힌 자에게 손을 내민다? 어지간히 뻔뻔한 게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뮬러 7세가 인재를 내보내는 걸 허락할까.

한편 버트는 고민에 빠졌다. 이전부터 생각했던 게 있었는데 지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둠워퍼.’

버트는 루하다에 대한 특성을 떠올렸다.

그림자. 납작. 멋있다. 딱 달라붙는다. 시중을 잘 든다. 착하다.

그들이 원하는 게 루하다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루하다에 준하는 인재를 바라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루하다가 아니라 루하다와 비슷한 존재를 주면 됐다.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베즈웍 유적지에서 접했던 신이 되지 못한 창조물들. 아드레이 왕국에서 단련했던 창조 능력. 정체 모를 공간에서 리아와 마주했던 순간.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버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골드로츠는 그걸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츠츠츳­

버트는 마기를 가다듬었다. 순간 페이니가 놀라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올 정도로 순도 높은 마기였다.

그렇게 버트가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마력 파장이 뿜어졌다.

[ 거기 누군가 왔어. ]

페이니 역시 그 기운을 느끼고 움직이려 했다. 버트는 창조를 하다 말고 느껴진 기운이 익숙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남녀가 나타난 순간 버트는 페이니에게 말했다.

[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

[ ……사람? ]

페이니가 당황하는 만큼 골드로츠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우선 갑자기 나타난 존재는 언젠가 만났던 셀기디어의 기세에 뒤지지 않았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장신의 남자 옆에는 로이첸 왕국의 여왕 케틀라이아가 있었다.

“여왕 폐하……?”

골드로츠의 반응에 케틀라이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버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군.”

“쫓아오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요.”

“그거야 내가 힘이 없을 때지. 지금 내 곁에는 제법 강한 신하가 있다.”

케틀라이아는 스터그를 곁눈질 하며 말했다. 설마 스터그가 버트의 소개로 협력한다고 생각할까. 스터그가 버트의 의부란 사실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이 자가 네가 말한 그 침입자인가?”

“그렇다. 그래서 이 년을 제압해서 성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데려간 다음에는?”

스터그의 질문에 케틀라이아가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대답할 의무가 있나?”

“있지. 그야 이 아이는 내 딸이니까.”

“뭐?”

“엉?”

케틀라이아의 반응은 당연했다. 자신이 초빙한 강대한 마법사와 침입자가 부녀 관계라고?

골드로츠의 얼빠진 반응도 틀리지 않았다. 버트는 분명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눈앞의 스터그는 NPC가 분명했다. 그런데 둘이 아빠와 딸이라고?

그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스터그가 행동으로 보였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버트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폭발적인 마기가 느껴졌다. 스터그는 그곳에 시선을 돌리더니 한 발 물러났고 막대한 마기가 지면을 강타했다.

“이 비늘 덩어리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성녀를 해하려 드느냐!!”

흘러넘치는 마기. 자신의 머리칼이 역류할 정도의 강대한 기세!

퍼드롬. 블랙스타의 교주가 나타났다. 그는 노한 얼굴로 버트를 등지고 섰다. 퍼드롬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경계하다 못해 원수나 다름없는 종족이었다. 그는 단번에 스터그의 기운을 읽어내고 그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래서 버트에게 줄 선물이 박살난 것도 모르고 다급히 이 자리로 달려왔다.

“네놈은 뭐지?”

“블랙스타의 교주, 퍼드롬이다. 네놈이 건드리려는 게 누군지 알고 있더냐? 블랙스타를 구원해줄 성녀이시자 성신 리아주크를 온전히 품을 그릇이시며, 더 나아가 추종자들을 규합하고 일깨워주는 선구자이자 모든 것을 아우를 정복자이시다. 그런 성녀를 감히 해하려 들어?”

퍼드롬의 막강한 살기와 적개심은 주변 공간을 일렁거리게 만들었다. 골드로츠는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케틀라이아를 부축하며 뒤로 물러났다.

“꽤나 재밌는 소리군. 자신이 허상에 갇혀 산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야.”

스터그는 구태여 그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저 손을 가볍게 풀며 그의 기세에 대항했다.

“아, 아니 저기­”

버트는 이 복잡한 상황을 풀려고 나서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존재가 간섭해왔다.

“무슨 일들인가.”

스터그가 고요하고 거대한 존재였고 퍼드롬은 폭력적이고 폭발적인 존재였다면…… 지금 온 인물은 정말 조용했다.

넬하트. 그는 퍼드롬과 스터그 사이에서 나타나 그들의 기세를 덤덤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할아버지?”

“꽤나 소란스럽구나. 혹시 난처한 상황이더냐?”

넬하트의 말에 버트는 퍼드롬과 스터그를 번갈아 보았다.

“아뇨, 그냥 사사로운 오해가 있어서…… 두 사람 다 진정하세요. 퍼드롬 할아버지도, 아빠도.”

버트는 대답하자마자 퍼드롬과 스터그 사이에 끼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리고 방금까지 휘몰아치던 사나운 기세는 단숨에 수그러들었다.

“아버지라고?”

“그러는 넌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군.”

퍼드롬은 미심쩍은 얼굴로 스터그를 보았다. 스터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이러지 말고 자리부터 옮겨요. 여기는 너무 눈에 띄니까……”

버트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거기에는 골드로츠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도 말입니까……?”

“네. 여왕님 데리고 와주세요.”

“아, 네.”

골드로츠는 엉겁결에 케틀라이아를 안아들고 뒤를 따랐다. 버트는 모두를 이끌고 가면서 몇 마디 얘기를 던졌다. 퍼드롬에게는 스터그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스터그에게는 퍼드롬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었다.

“과연 그런 사정이……”

“흠.”

“일단 오해부터 푸시고…… 두 분 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아빠는 뭐 때문에 온지 알 거 같으니까 됐고…… 퍼드롬 할아버지는요?”

“저는 간만에 그릇께서 잘 지내시는지 걱정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간단한 근황을 나누다 보니 어느 새 한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바로 다크나이트의 훈련장. 베르테 야영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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