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6 로디아 마을 中
* * *
첫 번째 변수가 생겼다.
“키런 왕국이 침공 당했어?”
“근데 그 원흉을 놓쳐?”
“그리고 그 책임자가 골드로츠라고?”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로이첸 왕국의 침공 사태 역시 영상 채널이나 웹사이트 곳곳에 기재되었다. 갑자기 왕국군이 통제를 하고 현상수배를 걸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큰 이슈가 되진 않았다.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이었고 워낙 약소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키런 왕국은 강대국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곳은 수많은 이슈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골드로츠였다.
최초의 이모탈 귀족을 꺾고 으뜸이 된 이모탈 귀족! 심지어 블랙 남작과 달리 그는 정체를 까발린 상태였다. 누구든 그를 시기하기 마련이었다.
“이거 빅 이슈야!”
어느 한 정보 조직이 이번 사태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3대 정보 조직에 밀려나 그저 그런 위치에 있었다. 본래 이번 침공 사태를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원래 그가 캐내려던 건 로이첸 왕국의 테러 사건이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키런 왕국의 국경에서 난리가 나나 싶더니 누즐라 요새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특종!
벌떼조차 이번 일을 알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래봐야 몇 시간 차이였지만 가장 먼저 알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한 정보 조직의 여파로 시작된 골드로츠의 실패. 그리고 황금늑대 기사단의 실패이자 키런 왕국의 실패!
이제는 모두가 이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 원흉이 누군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미친 이벤트가 많아.”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니잖아? 그냥 겨울 이벤트 준비 중인 건가?”
“혹시 모르지. 골드로츠처럼 새로운 이모탈 귀족을 늘리려는 계획일 지도 몰라.”
“아니면 골드로츠의 자리를 누군가 대신한다거나?”
모두가 이번 사태에 대해 왈가왈부했다. 그러면서 키런 왕국의 행보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연찮게도 이 상황에서 이득을 본 건 판테스 왕국이었다. 시선이 폭발적으로 모이게 되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판테스 왕국과 외교를 벌이는 순간 이번 일의 원흉이 판테스 왕국임을 알리는 꼴이었다.
약소국. 로이첸 왕국 다음에 불과한 약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굴욕을 받았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미치겠네.”
골드로츠는 컨셉도 잊어버리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도 백작위에 오른만큼 정보 조직에 로비를 많이 해두었다.
그가 택한 조직은 벌떼. 이름도 모를 정보 조직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한 뒤에 이번 이슈를 터뜨리려 했다.
그런데 선수를 쳤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로이첸 왕국에서부터 시작해서 뒤를 쫓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대로 허를 찔린 셈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골드로츠는 손가락을 잘근 씹었다. 지금 돌아가는 사태만 본다면 언제 문책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선은 근신. 차악은 강등 혹은 해임. 최악은 귀족 작위 박탈.
골드로츠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없었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간 쌓아온 귀족 인맥도 지금에서는 소용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특히 권력을 쥐는 이들은 아직 이모탈 귀족을 배척했다.
그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왕권이 막강한 키런 왕국이었으니 대놓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백작 각하.”
병사 한 명이 골드로츠를 불렀다.
올 것이 왔다.
골드로츠는 병사를 따라갔다. 예상대로 바틸카스가 그를 호출했다.
하지만 알현실이 아니었다. 그는 새까만 검을 들고 연무장에 서있었다.
“샬론 백작.”
“부르셨습니까, 폐하.”
골드로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바틸카스는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검을 빼앗기고 추격에도 실패한 저의 책임입니다.”
“확실히, 현 황금늑대의 부단장이 저지른 실책은 크지. 하지만 샬론 백작, 그 자리에 단장인 넨피스 후작이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바틸카스의 질문에 골드로츠는 대답을 망설였다.
황금늑대의 단장. 알카이드 나이트. 바틸카스를 제외한다면 가장 강한 기사. 이것이 전부 넨피스 후작을 일컫는 말이었다.
넨피스 후작은 강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있다고 해서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당장 루하다도 강했지만 골드로츠가 검을 섞었던 엘도트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손속을 봐주고 있단 걸 깨달은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허면 황금늑대 기사들 전부 거기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겠나?”
바틸카스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골드로츠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다고 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지. 불가항력의 존재가 돌파한 걸 누구도 책임을 물을 수 없네. 그저 보여주기 식의 겉치레에 불과하지.”
바틸카스는 검을 늘어뜨렸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흠.”
바틸카스는 그의 대답을 듣고도 검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좋은 검이야. 지금까지 이런 걸 본 적이 없어.”
“……그렇습니다.”
골드로츠도 아이템 감정을 해봐서 알고 있었다. 바틸카스가 잠시 빌려주었던 ‘심연’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검이었다.
“이만한 검을 그냥 내준다. 심지어 키런 왕국을 횡단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기이한 일이지.”
“네, 그렇습니다.”
골드로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처벌을 내리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맞장구 쳐주었다.
“그리고 그 원흉은 판테스 왕국에 있고 말이야.”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나는 인재야.”
그의 한 마디. 골드로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바틸카스를 보았다. 본래 왕명이 있기 전까지는 함부로 시선을 맞추어선 안됐다. 하지만 그의 황홀해하는 한 마디가 몸을 움직였다.
욕망이 가득찬 눈빛. 검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짙은 욕망이 넘실거렸다. 그저 단순히 감정에 취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야망이 있었다.
“분명 판테스 왕국이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럴 거라 생각했지. 뮬러 7세의 야망이 얼마나 큰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거든.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그 자가 노리는 건 베톰 왕국. 군사 정비를 하고 인재를 간수해도 모자란 판국에 갑자기 그런 짓을 벌인다?”
바틸카스는 싱긋 웃으며 골드로츠를 보았다. 골드로츠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통제 불가능한 괴물. 그렇다는 건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지.”
“그 말씀은……?”
“스카웃 해오게.”
“예?”
골드로츠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혹여 키런 왕국의 침입자를 초빙해오란 말씀이신지……?”
“그래, 잘 이해했군. 어느 정도 정비가 끝나면 판테스 왕국으로 축하 선물을 보내줄 걸세. 자네가 대표로 가서 블랙 남작과 만나보게. 그리고 데려올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데려오게.”
“그건……”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좋네. 그저 가서 제의만 하고 와도 괜찮네. 그저 키런 왕국이 원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된다네.”
이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에 왕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 의중을 묻는 건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괜찮네.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바틸카스는 잠시 허공을 보았다.
“뮬러 7세…… 그가 생각보다 인복이 있어서 말이야. 가이람 백작이나 길렌 백작, 릴본 자작 전부 그 나라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들이지.”
골드로츠도 정보를 어느 정도 주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이해가 안 가는 이름도 있었다.
“가이람 백작이라면…… 망나니 귀족이 아닌지요? 심지어 그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세간에는 그리 알려졌지. 심지어 가이람 백작을 모르는 이도 있지만…… 그와 검을 맞댄 자라면 누구라도 알 걸세. 그는 허명에 가려진 인재일세. 그래서 어떻게든 데려오려 했네만 상황이 좋지 않았지.”
바틸카스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어쨌든 최선의 결과를 가져와주게.”
“……물론입니다.”
“그럼 가보게.”
골드로츠는 일어나다 말고 멈칫했다.
“처벌은 어찌 되는지요……?”
“처벌? 자네를 왜? 규격 외의 강자의 침입은 누구도 어쩌지 못해. 오히려 그 상대를 책임지고 쫓고 맞서 싸웠다는 걸 칭찬해야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책임. 내부에서는 자네가 책임을 지고 이번 일의 원흉을 해결하라고 해놓았네. 외부에서는 그저 이번 일을 씹어대게 두면 되겠지. 아마 그것 때문에 이모탈들 사이에서 자네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올 거야.”
“아.”
골드로츠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다시 부복했다. 골드로츠는 실패한 임무를 만회하기 위해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책임은 이모탈에게 오명을 쓰게 된 것, 그것 뿐이었다. 좌천 되지 않았고 강등되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은 결과로 전하게.”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만에 하나 스카웃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로이첸 왕국에서도 소란을 일으켰던 존재인데…….”
압박감.
골드로츠는 정보창을 열어 자신에게 가해진 상태이상을 확인했다. 히든 상태 이상 중 하나인 이었다. 강자가 작정하고 내뿜는 기세에 휩쓸렸을 때 나오는 상태이상이었다.
“꽤나 의심이 많군, 샬론 백작.”
“죄송합니다. 변수가 많은 존재이다보니 조금이라도 안정성을 높이고 왕국에 위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드린 질문입니다.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골드로츠의 말에 기세는 단숨에 사라졌다.
“주제넘은 호기심은 화를 불러오지. 하지만 지금 그건 정당한 질문이고 충분히 할 수 있는 간언이었네. 그래서 자네를 내치지 않는 게야.”
“감사합니다.”
“통제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 말게. 자네는 자네에게 주어진 일만 해내면 되는 거야.”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가보게.”
골드로츠는 물러났고 바틸카스는 황홀한 얼굴로 검을 보았다.
“대단한 검이야.”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그득한 욕심.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지독한 욕망이 담겨있었다.
*
두 번째 변수.
“……특정된 건가?”
“그렇습니다.”
로이첸 왕국의 여왕 케틀라이아. 그녀 역시 버트를 찾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꺾인 고개. 그녀의 표정에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그거면 됐다. 수고했다, 우탄 후작. 물러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후작이 물러나고 케틀라이아는 고개를 들었다.
최근 일이 잘 풀렸다.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농락 당하고 왕위가 위태로웠지만 그걸 아우를 운이 따랐다. 그 중 하나가 그녀의 곁에 있는 마법사의 존재였다.
“나를 공격한 이의 존재가 특정됐다. 그곳에 나와 함께 간다.”
그녀의 곁에 있는 건 스터그였다. 이 무미건조한 표정의 남자는 케틀라이아를 보며 짧게 말했다.
“좋다.”
그의 오만함. 그건 실력에 걸맞는 행동이었다. 케틀라이아는 그의 태도가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고용 조건에는 자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존재는 나에게 정말 큰 행운이다. 장담한대로 스카이 왕국의 현자와 견줄 수 있는 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싸울 필요도 없지. 하지만 그쪽에서 공격한다면 반격해줄 수 있다.”
스터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마르가트는 구면이었다. 모르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에 관한 것 역시 허언은 아니었다. 마르가트도 강했지만 스터그도 그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믿음직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그 침입자는 강하다. 여차하면 그대를 넘어 나를 직접 위협할 수도 있다. 그대는 침입자의 존재를 모르니 어떨지 몰라도…… 난 불안하다.”
“걱정 마라.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무르지 않다.”
“그대만 믿지.”
스터그는 곧이 곧대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케틀라이아가 쫓고 있다는 게 버트란 건 연결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세심함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 버트와 만나게 되어 주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케틀라이아와의 관계가 첫 번째였다.
물론 이것 역시 버트의 부탁으로 치르게 된 것이다. 그걸 모르는 케틀라이아는 그때 일어난 사태에 흥미를 갖고 찾아온 마법사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케틀라이아는 열망에 가득 찬 두 눈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은 음심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에게 굴욕을 준 버트를 끝까지 쫓아 갚아줄 생각 뿐이었다.
*
마지막 세 번째 변수.
“성녀께서?”
블랙스타의 교주 퍼드롬.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에게 보고하고 있는 건 블랙스타의 추기경 중 한 명인 카반이었다.
“예.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탈하시더냐.”
“건강하시다고 합니다.”
“다행이구나.”
퍼드롬은 눈에 띄게 지친 표정이었다. 카반을 비롯한 추기경들은 왜 그런지 모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블랙스타 모두가 리아주크의 일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시작점 중 하나가 스카이 왕국의 마르가트였다. 단서를 얻기 위해 그와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루하다의 도움도 있었다.
다행히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긴 전투는 금방 끝이 났고 백신이 마르가트에게서 신체 일부를 회수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덕분에 마르가트는 예민해졌고 그 덕분에 나중에 벌어졌던 노스페라투 기사의 기습에 즉각 대응했지만…… 이건 다른 얘기였다.
어쨌든 마르가트와의 전투 이후 후유증은 제법 깊었다. 퍼드롬은 물론 마르가트 역시 진심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서로가 가진 피해는 생각보다 심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요양을 거쳤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퍼드롬은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마기를 조작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소식은 어떤가.”
“……판테스 왕국의 로디아 마을에서 쉬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가.”
퍼드롬은 차분히 카반을 바라보았다.
“앞의 이야기는 빼놓았군. 내가 거슬릴만한 일인가?”
카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개국을 선포했던 아드레이 왕국으로 이동한 적이 있었고 그 후 로이첸 왕국, 키런 왕국을 거쳐 도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부상을 입었다고 했습ㄴ”
카반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퍼드롬에게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마기. 그의 감정이 실린 기운은 카반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비록 몇 번 추태를 부렸다고는 하나 앞뒤 못 가리고 덤벼들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그릇께서 불편할 상황은 만들지 않을 테니 가감없이 보고하도록.”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정보원이 흡혈귀들의 정보를 전달했을 때의 반응 기억하십니까?”
“……음.”
퍼드롬은 심호흡했다.
“불경한 자들을 쳐낼 뿐이다.”
“추기경들이 전력으로 막았으니 다행이지 그릇께 미움을 살 뻔했습니다.”
“……으음.”
“확실한 건 더 이상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행이군.”
“그러면 일정을 잡으시겠습니까?”
“아니, 최소 인원으로 방문하지. 주의를 끌기 싫어하시는 분이야.”
“그걸 아시면서…… 일단 알겠습니다.”
그렇게 퍼드롬의 판테스 왕국으로 향하는 일정이 잡혔다. 그로 인해 블랙스타에서는 한 차례 난리가 났다. 이곳이 블랙스타의 성지이긴 했지만 신을 품고 있는 그릇과 만날 기회였다. 힘의 고저를 떠나 누가 퍼드롬을 수행하고 그녀와 만날지 다툼이 일었다. 회복을 취하던 마성자나 추기경들조차 나섰으니 블랙스타에 한 차례 혼선이 생겼다.
*
그렇게 로디아 마을로 향하는 여러 변수로 인해 뮬러 7세의 계획이 조금씩 틀어졌다. 본래 그는 모든 시선을 그곳에 쏠리게 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이번 사태에 대한 추궁도 덤으로 떠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게 생각보다 원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샬론 백작이?”
“예. 같은 이모탈 귀족이라는 걸 언급하면서 개인적으로 축하를 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슌 후작의 보고에 뮬러 7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건 현 상황에서 가장 애매한 대처였다. 바틸카스가 이번 일의 원인이 블랙 남작이란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작의 행동을 방관할리 없었다. 키런 왕국에 시선이 집중된 이 순간 모든 행동이 노출될 것이다.
분명 블랙 남작이 조명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러면 필요 이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래, 그 정도 요청을 들어줘야지. 이모탈끼리의 유대란 게 있을 테니 말이야. 왕성으로 들릴 필요 없이 곧장 마룬 자작의 영지로 가게끔 조치를 취하게.”
“알겠습니다. 혹여 다른 조치 사항은 없습니까?”
“음.”
뮬러 7세는 조금 고민했다.
이모탈이란 철새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언제든 나라를 배신하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들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뮬러 7세가 버트를 붙잡고 있는 건 순전히 이용해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용 도구가 위험해진다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게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손절하느냐. 끌어안느냐.
그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야 한다. 최대한 뽑아먹을 걸 뽑아 먹어야 했다.
“어차피 무슨 조치를 하지 않더라도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거야. 어설픈 수작은 화를 입을 터. 그저 왕명으로 샬론 백작의 입국을 환영하게.”
“알겠습니다. 국빈으로 대우하겠습니다.”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뮬러 7세는 그가 떠나고 고개를 돌려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이람 백작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냈나?”
“아직입니다.”
“쯧.”
뮬러 7세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혀를 찼다. 당연하게도 그가 은퇴를 하고 나서도 계속 추적했다.
그는 인재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면서 옛날 같지 않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그를 뒤에서 보필하고 있단 게 ‘그림자를 쫓는 별’이란 걸 안 순간 뮬러 7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괜히 3대 정보 조직이란 이름을 가진 게 아니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판테스가 약하다고는 해도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정보망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정면 대결을 한다면 국가 대 조직이니 판테스가 이기겠지만 그렇게 해서 이겨도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블랙 남작의 동태는?”
“여전합니다. 여타 이모탈과 다른 듯 하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가이람 백작과 마찬가지로 버트에 대한 정보도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소득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다면 결과를 내겠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래, 우선 이번 샬론 백작의 방문이 끝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아.’
뮬러 7세는 그 후 결과를 보기로 했다. 골드로츠가 방문하고나서 득이 된다면 품고, 실이 된다면 이용만하다 버린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변수는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 변수로 인해 뮬러 7세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지게 됐다.
*
그렇게 폭풍의 중심지에 서게 된 당사자는…… 아직 자신의 상황도 모른 채 페이니와 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어떻게 하긴. 나도 그대로 분위기를 타버렸지.”
두 사람은 나신으로 이불을 덮은 채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었다. 두 여인의 모습은 섹스 후 다정하게 대화하는 연인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연인은 아니었다. 심지어 성별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말 자연스러웠다. 페이니는 엘도트에 대한 얘기를 했고 버트는 말하는 족족 맞장구를 쳤다. 지금 그녀들의 모습과 장소만 아니었다면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아가씨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바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페이니가 집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버트도 루하다의 회복을 기다리느라 지쳐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버트는 슬슬 욕구불만이 들었고 간만에 페이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유혹했다.
페이니도 간만에 일탈(?)이라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하루 종일 진하게 시간을 보냈다.
“지금 며칠 째더라.”
페이니는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날짜를 물었다. 버트는 손가락을 꼽았다.
“이틀…… 아니다. 나흘 정도 지났을 거예요.”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럼 올 시간이겠네.”
“네? 누가요?”
똑똑
“들어오세요.”
노크 후 들어온 건 페멜로 백작이었다. 그는 집무실에 비치된 침대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알몸으로 있는 것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버트는 꼼지락거리며 이불 안으로 파고 들었고 페이니는 느긋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간만이네요, 페멜로 백작님. 정계로 잘 복귀하셨죠?”
“……덕분에 말이지.”
“으후후, 말에 뼈가 있으시네요.”
페이니가 머리칼을 넘기며 일어났다. 백작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고개 다시 돌리세요. 얘기는 얼굴 보고 해야죠.”
“그게 무슨”
백작은 슬쩍 페이니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페이니의 몸은 어느 새 옷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백작님이 대표로 오신 건가요?”
“그래. 라피에 초원을 안정시킨 공훈을 인정하는 바, 폐하께서 상을 치하하셨다.”
“로디아 마을의 확장 설계에서부터 자재 조달까지 전부 끝내고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요? 시선 돌리기인 게 너무 뻔히 보이는데.”
“타국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온 귀족을 품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어련하시겠어요. 폐하의 자비에 눈물이 다 나네요.”
“그래야지. 불경죄를 범하는 대타를 처벌하지 않는 것도 감사해야 하고.”
페이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백작도 밀리지 않고 조곤조곤 따졌다.
“그래서, 다른 명령은 없었죠?”
“없었다. 그저 주의할 게 있다면 곧 찾아올 샬론 백작을 잘 맞이하란 것 정도겠군.”
“……샬론 백작이 여길 왜 와요?”
“축하하러 온다더군. 폐하께서도 국빈으로 대접한다 하셨으니 잘 대해주도록.”
페이니는 이마를 짚었다. 분명 몽마의 보고를 받고 판테스 왕국으로 온다는 건 알았다. 그런데 행선지가 여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범인을 마주한다는 건 키런 왕국의 명예를 깎아먹는 짓이었다.
판테스 왕국의 인재가 키런 왕국의 영토에서 난리를 치고 무사히 돌아갔다? 전쟁의 명분이 되기도 하거니와 키런 왕국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요.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버트. 거기서 더 사고 친 건 없지?”
“없…… 을 거예요.”
버트는 자신감 없게 대답했다. 페이니는 콧방귀를 뀌며 백작을 보았다.
“그렇다고 하네요. 책임지고 뒷수습할 테니 백작 각하께서는 폐하께 말씀 잘 전해주시겠어요?”
“그래, 확실히 전하지. 겸사겸사 이 마을도 돌아보겠네.”
“그러세요. 여독을 푸시죠.”
백작은 집무실을 나섰고 페이니는 버트를 째려보았다.
“덕분에 일이 많아지겠네. 다시 업무에 빠져살게 되겠어.”
“그렇겠네요……?”
“그렇겠네요? 이리 와봐.”
“꺄앗!”
페이니는 손을 꼼지락대며 버트에게 덤벼들었다. 버트는 약하게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고 페이니는 그녀의 약한 부분을 계속 공격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침대에서 뒤섞이는 동안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오게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