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85 로디아 마을 上
* * *
“이…… 무슨……”
골드로츠는 방금까지 검을 나누던 상대가 사라지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죄송해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건 버트였다. 그렇게 떠나간 자리에는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비단 당황한 건 골드로츠만이 아니었다. 다른 다크나이트들과 싸우던 황금늑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는 골드로츠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골드로츠는 기사 한 명의 질문에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말없이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뺏어간 검을 대신하기라도 한 것일까. 골드로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도망친 듯 합니다.”
“그 말씀은……”
“저의 패배입니다. 왕명까지 완수하지 못했으니…… 처벌을 피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 자리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왕이 하사한 검을 빼앗겼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자를 잡지도 못했다. 설사 상대가 기묘한 방식으로 사라졌다고 해도 변명할 수 없었다.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이 일의 원흉이 누구인지 알 거 같습니다. 그러니 제 직위를 걸고서라도 이번 사태를 해결할 것입니다. 다만…… 저로 인해 키런 왕국의 명예가 실추된 점…… 또한 황금늑대의 이름에 먹칠을 한 건 몇 번을 사죄해도 부족합니다.”
골드로츠는 이를 까득 물며 말했다. 그의 말에 기사들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철수하겠습니다. 각자 병력들을 인솔하겠습니다. 이쪽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건 그들이 쫓는 이들도 사라졌다는 소리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키런 왕국은 유례없던 추격전과 방어전을 벌였다.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전투. 그러면서도 침입자를 단 한 명도 잡지 못한 전투. 누즐라 요새를 포함하여 전력을 다한 포위망이 실패한 전투.
이 굴욕은 로이첸 왕국처럼 역사에 기록되었다.
*
“주군.”
엘도트는 벙찐 얼굴로 버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있는 다크나이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이었다. 분명 그들은 황금늑대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꺼진다 싶더니 의문의 장소로 이동됐다. 그게 로디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장소는 다크나이트들이 몇 번이고 훈련을 위해 돌아다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버트의 말에 엘도트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야말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였다면 주군께서 위험하지 않았을 터인데……”
버트는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로그아웃한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했다. 니스나 라이에게 정보를 부탁했지만 그걸 들려주기에는 시간이 모자란 듯 했다.
그래서 질문을 던져야 될 상대는 따로 있었다.
‘루하다, 괜찮아?’
루하다는 대답이 없었다. 새로 익힌 평면 세계를 넘나드는 힘으로 그림자의 세계로 보냈다. 그것이 리아와 마주했던 공간과 거의 비슷했단 걸 알았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게다가 그림자를 쓰고 루하다의 방식을 떠올린 덕분에 순간이동도 가능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루하다는 곧장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실신한 동안 마기가 상당히 빨렸단 사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큰 해를 입었다고만 이해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버트는 엘도트에게 대략적인 얘기를 전달받았다. 상황을 대강 이해한 버트는 그 다음 리아에게 질문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이 다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편히 쉬세요.”
“알겠습니다.”
버트는 다크나이트를 남겨두고 떠나갔다. 엘도트는 그녀가 떠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디아는?”
“이디아 부단장은 없었습니다.”
“먼저 와서 쉬고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겠지. 우선 이동한다. 움직이면서 각자 상태 조장에게 보고하도록.”
“예.”
하지만 그들이 캠프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재를 알게 됐다. 국경선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던 이디아는 거의 몇 시간 동안 분투를 벌였다. 그러다 모두가 도망쳤단 걸 알게 되는 건 버트가 다시 이디아를 데리고 온 뒤였다. 그 전까지 엘도트도, 버트도 이디아가 없단 걸 알지 못했다.
*
버트는 다시 검은 동굴의 지하에서 나타났다. 길렌 백작은 그녀가 다시 올 거라는 생각에 움직이지 않았다. 넬하트와 그레노는 버트에게서 일어난 현상을 해석하고 있었다.
“다들 안 가셨네요……?”
“버트, 나의 기사가 떠나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대의 향취를 즐기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군.”
“나와 그레노는 자네한테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
“참으로 신기했지.”
“……그런 짓 한 게 신기했어요?”
“흠, 그런 것도 신기하긴 했지만 말이지, 우리는 다른 얘기를 나누었다네.”
버트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보다가 도리어 자신이 변태 같아져서 얼굴을 붉혔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제가 기절해있는 동안 지켜주셨죠……?”
버트는 확신에 차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길렌 백작은 모르겠지만 다른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그 중 한 명이 이전에 방문했던 귀르디의 탑에 전 주인이란 건 몰랐다. 또한 드높이 솟아있는 여신상의 인식 왜곡이라든지, 팬클럽의 굿즈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등의 일을 했단 사실도 몰랐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거기 백작이니 우리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버트의 말에 넬하트가 잠시 고민했다.
“허면 자네 안에 있는 비밀을 알려줄 수 있겠나?”
“제 안에요? 그……”
버트가 주춤거린 그 순간 그림자에서 리아가 솟아났다. 그녀를 본 넬하트는 조그마한 눈을 크게 떴다.
“오호……”
그리고 놀란 건 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도 지쳐서 쉬고 있어야 할 텐데……
넬하트는 놀란 것도 잠시 차분하게 리아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저 아가씨 안에 있는 비밀인가?”
“……응.”
리아는 아직 발그레한 얼굴로 대답했다. 넬하트는 수염을 쓸며 그레노를 보았다.
“이거 흥미롭구만. 얼마나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리아는 버트를 보았다. 그러더니 버트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얘기는 생각보다 길었다. 버트는 가만히 리아의 얘기를 듣다 입을 서서히 벌렸다. 그리고 리아가 넬하트에게 건너갈 때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하는 만큼.”
리아는 한 발 늦게 대답했다. 넬하트는 버트를 보았다.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나?”
“네? 아, 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네. 궁금한 게 한 둘이 아니야.”
넬하트는 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아가 손을 잡은 순간 그레노와 함께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버트는 벙찐 얼굴로 허공을 보았다. 길렌 백작은 말없이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아, 저희도 갈까요?”
“생각은 다 정리된 건가? 필요하면 더 있어도 된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버트는 길렌 백작과 검은 동굴의 지하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이동하는 동안에도 리아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루하다가 그렇게 된 건 자기 때문이다.
어차피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당분간 따로 있겠지만 금방 돌아가겠다.
버트는 그녀가 남긴 말을 정리해보았다. 아직 전후 상황을 알지 못했다. 마신 세트의 일부를 취한 이후 기억이 없었다. 그 동안 자신은 쓰러져 있었는데 리아는 루하다가 그렇게 된 게 자기 때문이라 했다.
폭주한 건가? 그게 아니면……
버트는 고민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반긴 건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었다.
“어? 버트 누나!”
귀여운 소년과 훤칠한 미남. 리버와 슈트였다. 리버는 못본 사이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그래봐야 꼬맹이에서 소년 정도의 성장이었지만 제법 잘 컸다. 반면 슈트는 처음 본 그대로였다.
“리버!”
버트가 반가움에 리버를 안아들었다. 리버는 귀를 쫑긋거리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좋아라했다. 그때 버트의 머릿속에서 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기.”
버트는 리버를 다급히 내려두고 그림자로 빨려들어갔다.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리버는 얼빠진 얼굴로 바닥을 보았다.
*
“루하다.”
루하다는 검은 액체 상태로 흐물거리고 있었다. 리아가 없어진 이 장소에는 버트와 루하다 단 둘 밖에 없었다.
“루하다.”
버트는 몇 번이고 루하다를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버트는 마기를 가볍게 흘렸다. 루하다에게 마기가 스며드나 싶더니 서서히 되돌아왔다. 리버에게 일어나던 현상. 압도적으로 거대한 마기에 힘을 빼앗기던 그때와 같았다. 오히려 이렇게 루하다를 품고 있는 게 독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버트는 루하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검은 동굴.
버트는 루하다와 처음 만난 장소로 돌아가 루하다를 꺼냈다. 그러다 자신이 누워져서 돌봐졌던 그 자리에 눕혀놓았다. 그 후 손을 쓸어서 주변에 마기를 흩뿌렸다. 그리고 잠시 루하다를 바라보다 그림자로 스며들어 동굴 입구로 이동했다.
“어, 버트 누나? 어디 갔다 왔어?”
“리버 보니 생각난 게 있어서.”
“뭔가 해답을 얻은 모양이군, 버트.”
“네.”
“그러면 이쪽도 상대하는 게 어떤가.”
길렌 백작은 시선을 돌렸다. 분명 방금까지 없었던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버트?”
페이니. 그녀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
버트는 페이니의 집무실로 불려갔다. 버트는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페이니는 버트를 앉혀두고 사무용 탁상에 앉아 서류를 읽었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 팔랑거리며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났다.
버트는 괜히 안절부절 못해서 맞붙인 무릎만 꼼지락댔다. 버트도 무엇을 잘못 했는지 나름 알고 있었다. 페이니가 뒤치다꺼리 해준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눈치를 살피며 페이니의 얼굴을 보았다.
“꽤나 저질러 줬더라.”
“아, 네…… 조금……”
“조금?”
“……조금 많이요.”
“분명 내가 자처해서 블랙 남작이 됐고 뒤처리도 해주는 거지만 말이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들었다.
“우선 키런 왕국으로 정식 입국 후 실종. 이거 입국 명단에서 네 이름 지우고 은폐하는 건 그렇다 쳐. 그 다음은 로이첸 왕국으로 가서 여왕을 강간했다지?”
“그건…… 그 사람이 좋아해서……”
“뭐, 이제는 심연을 볼 수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 후 키런 왕국을 경유해서 국가적인 분쟁을 일으킬 뻔하기도 했고?”
“그…… 그거는 제가 그때 기절해서 루하다가 하는 수 없이……”
“그 녀석한테 책임을 물면 되는 거야?”
페이니는 턱을 괴며 물었다. 버트는 쭈뼛거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안한 거 알면 다행이네. 그래도 그냥은 안 넘어가.”
페이니가 손짓했다. 버트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페이니는 의자를 뒤로 끌더니 자기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버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그 위에 걸터 앉았다.
“그게 아니지.”
페이니는 버트를 자기 허벅지에 엎어뜨렸다. 배를 깔고 늘어지게 된 버트의 허리를 다독여주었다.
“체벌이 필요하겠지?”
“으, 응?”
페이니는 버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짓으로 그림자가 벗겨졌다. 그렇게 드러난 희고 토실토실한 엉덩이 살 위로…… 페이니의 손바닥이 내리찍혔다.
짝!!
“흐익?!”
짝! 짝! 짝!
페이니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버트의 엉덩이를 때렸다. 버트의 엉덩이 살에 붉은 손자국이 차례로 찍혔다. 버트가 쓰라리다고 느낄 정도로 힘차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버트는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참았다.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언젠가 손바닥이나 발바닥을 맞는 체벌보다 약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엎어뜨린 채 엉덩이를 맞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스터그와 했던 유아 플레이가 생각나니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보다…… 그만큼 페이니가 화났다고 생각하니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버트도 말없이 엉덩이를 맞았다.
“후우~”
페이니는 버트의 엉덩이가 사과처럼 빨개질 때까지 때리고나서야 매질을 멈췄다. 손바닥에 입김을 불며 식히던 그녀는 때린 부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상상 이상의 짓을 저질렀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커버가 불가능한 건 아니야. 불만스러운 건 안 그래도 다크나이트 양성 때문에 바쁜 사람이 더 바빠졌단 거지?”
“엘도트 때문에요……?”
“그래, 잘 아네.”
“흐힛……!”
상냥하게 쓰다듬던 손길이 살을 한 움큼 쥐었다. 가느다랗지만 확실히 힘이 담긴 손가락 사이사이로 살이 삐져나왔다. 손톱이 살을 조금 파고 들기도 했다. 그렇게 힘껏 엉덩이를 쥐었다가 풀고 다시 세게 쥐고 놓아주니 화끈거리는 살에 다시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적어도 일을 벌이기 전에는 귀띔이라도 하라고. 알았지?”
“네에……”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페이니는 손가락을 번갈아 움직이며 엉덩이를 주물렀다. 꼼지락대는 손가락 움직임은 화끈거리는 엉덩이를 간지럽혔다.
“흐후…… 흐하……”
“우리 버트, 어덩이 맞으면서 많이 설렜나 봐? 누구는 이렇게 화나서 때리는데.”
“아니, 그……”
“그?”
“……기분 좋았어요.”
“옳지, 솔직하게 잘 얘기하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발이라도 핥게 해볼까……?”
“아으……”
버트는 몇 번이고 경험을 쌓았지만 도저히 페이니를 이길 수 없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에 파악하고 능숙하게 대처했다.
“일단 지금은 내 화풀이보다는 지금 상황부터 알아야겠지? 잘 들어두라고.”
“저기, 근데 손가락이 들어오는…… 앗……!”
“키런 왕국에서 있었던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없어. 로이첸 왕국에서는 따로 사절을 보내고 있지 않았지만 키런 왕국은 아니야. 너란 걸 특정할 수도 있거니와 가볍게 넘어갈 수준도 아니거든.”
“앗…… 으읏……”
페이니는 차분히 말하고 있었지만 버트는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 들어 음부를 슥슥 긁어댔기 때문이었다. 버트는 입술을 씹으면서 신음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음부를 훑다가 질을 후벼팠을 때는 그것마저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니 키런 왕국에서 무슨 대응이든 올 거야. 그쪽은 최소 사절을 보내든지 배상금을 요구하든지 할 거야. 적어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니 각오해야 해.”
“네, 네에……”
쯔걱 쯔걱
“일단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키런 왕국에 불법침입한 점. 그리고 검을 가져간 것. 그 정도가 있겠네.”
“흐읏…… 읏…… 거, 검은…… 제가 따로…… 다시 드렸어요…… 혹시나 해서…… 아읏……!”
“그래? 그건 잘 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우선 네가 기절한 이후의 모든 상황을 알아두라고.”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듣고 싶었던 얘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휘젓는 게 아니라 작정하고 절정시킬 셈이었는지 버트가 날아갈 듯이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렇게 애액을 흩뿌리며 절정하는 동안에도 페이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덕분에 버트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모든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어디 갈 생각하지 마. 마신의 육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댔지?”
“하아…… 흐하…… 하, 하나……”
“그렇구나.”
페이니는 음부의 주변부를 만져주다 애액에 젖은 손가락을 낼름 핥았다.
“그러면 더더욱 여기서 기다려.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도 그렇고 앞으로 남은 육신을 찾았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네에……”
“그럼 대강 알아들었지?”
“네……? 네……”
“그럼 마저 할까?”
“아.”
……
“……네.”
*
판타지아에서의 하루가 지났다. 그토록 원하던 로그인이었고 페이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진상도 파악했다. 하지만 곧장 로그아웃 해야 했다. 로그인을 하기 직전의 상태를 생각하면 걸리는 순간 끝장이었다.
자위를 하다 로그인이라니. 그건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트는 곧장 로그아웃하고 몸부터 추슬렀다.
“후유.”
은송은 로그아웃하자마자 주변 정리를 했다. 그렇게 치우고 나니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다.
읽지 않은 메시지. 그건 세영이 보낸 메시지였다.
[ 지원 요청했어. 어떻게 됐는지는 보고 받아야 해. ]
아마 동혁이 얘기해줘서 문자를 한 것 같았다. 길렌 백작이 단독으로 온 건지 아니면 페이니에게 도와달라 청한 건지까진 알 수 없었다. 주변 정세를 전달하고 버트가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들었던 정보를 전해듣기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세영이 신경 써주고 있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밥이라도 사야겠다 생각했다.
그때 벨이 울렸다. 세영의 전화였다.
“어, 왜?”
[ 로그인 했어? ]
밑도 끝도 없는 질문. 은송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 했구나. ]
“……미안.”
문책 받는 것도 당연했다. 동혁에게 들은 얘기라면 세영도 알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로그인을 한다. 이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였다.
[ 너 그러다 큰일난다? ]
“그래도 접속하고 싶었어. 게임 중독 그런 건 아닌데……”
[ 그건 네가 생각할 때나 그런 거지. 우리가 봤을 때는 게임 중독이야. ]
“으응……”
[ 뭐, 이미 해버렸다니 어쩔 수 없지. 몸은 괜찮고? ]
“지금은 괜찮은 거 같아. 아직 변화도 없는 거 같아.”
[ 변화? ]
“어, 응. 나도 몰랐는데 동혁이 말해줘서 알았어. 머리색이나 체형 전부 바뀌었거든.”
세영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세영아?”
[ 아, 아니 그게 뭔 소리야? ]
“어……? 무슨 소리냐니? 동기화라고……”
은송은 말을 하다 말고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동혁에게 들었던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 그게 가능한 거야? ]
“……변했더라.”
[ 그렇구나. 알았어. 일단 괜찮은 거 맞지? ]
“응? 응, 괜찮아. 걱정 마.”
[ 응, 그럼 나중에 보자. ]
전화는 끊어졌다. 어째선지 다급하게 끊는 느낌이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세영의 상태에도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로그인에 성공했다는 기쁨과 판타지아의 상황에 대한 생각 정리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송은 정리가 끝나자마자 밑준비를 하고 다시 로그인했다.
*
판테스 왕국의 왕성 뮬러 7세. 그는 블랙 남작의 이름으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하고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키런 왕국에 침입했다?”
자세한 건 전부 읽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로 축약하자면 불법 침입이었다. 심지어 그냥 불법 입국만 한 게 아니라 누즐라 요새를 선두로 엄청난 난리를 일으켰다. 뮬러 7세도 그 난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버트란 건 생각도 못했다.
지금 판테스 왕국은 재정비 중이라 바빴다. 외교적인 사건을 최대한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내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터뜨릴 줄이야. 아니, 이건 사소했다. 그 다음 보고가 문제였다.
“……그리고 로이첸 왕국의 여왕을 겁탈했다는군.”
“예?”
왕실 기사단장 릴본 자작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만큼 버트가 벌인 짓이 황당한 일이었다.
“순서는 상관없지만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소리지. 어떻게 생각하나, 릴본 자작?”
“다소…… 황당합니다. 작정하고 일을 벌이려는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심지어 이번 일에 드래곤도 개입했다니……”
“드래곤이요? 베톰 왕국에 있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드래곤은 만트라 협곡을 날아다니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타국에 있을 몬스터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면 진즉 보고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보고도 없이 드래곤이라니? 그러니 이 얘기가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프구만.”
“그래도 내치실 생각은 없으시군요.”
“물론이지.”
릴본 자작은 뮬러 7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앓는다는 건 품고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작위를 박탈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페이니의 위상이 있었다.
블랙 스타의 비호를 떠나 페이니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드러커스의 미로 사태가 벌어지기 전 함께 했던 페멜로 백작의 보고 덕분이었다. 상황이 안정된 이후 백작은 파틸카 요새에서 있던 일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여기에 노스페라투 기사단의 테러를 예견하고 귀족파 귀족들을 처분한 혜안까지……!
‘그것만이 아니다. 누즐라 요새를 돌파한 건 단 하나. 검은 기사 리실버라고 알고 있는 존재의 힘. 그의 존재도 강하다. 어쩌면 스카이 왕국의 대들보 ‘현자’와 버금가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키런 왕국과 로이첸 왕국의 행보에 대응해야 했다.
“가만, 이걸 고민할 필요가 없겠군.”
“예? 무슨……”
뮬러 7세는 혜안을 떠올렸다. 마룬 자작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지배하는 영지. 그곳을 공론화한다!
“현재 마룬 자작의 영지는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라이칸슬로프라는 이종족이 결집되었고 라피에 초원을 끼고 있다지만 큰 이슈는 없었지. 그러니 그걸 정식으로 알리면 되는 것이다.”
릴본 자작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이번 일을 벌인 원흉은 종기사 버트. 그리고 그걸 품고 있는 건 블랙 남작! 두 왕국 전부 버트에 대해 모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그곳에 신경이 쏠리겠군요?”
“어차피 일이 터질 거라면 일찍 터뜨리고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정답이다. 구태여 꼭꼭 숨겨놔봐야 언젠가 들키게 될 터. 그리고 이번 일을 추궁하면 떠넘기면 그만이다. 어차피 판테스 왕국은 로이첸 왕국 다음 가는 무능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으니 그걸 이용한다.”
뮬러 7세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릴본 자작은 그 행동에 감탄하면서도 다음 명령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마룬 자작이 라피에 초원 일대를 안정화시킨 걸 치하해야지. 왕명으로 보상을 내려라. 그러면 로이첸은 몰라도 키런의 첩자들이 알 테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대표자는 누구로 하면 되겠습니까?”
“페멜로 백작으로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블랙 남작을 대외적으로 알리려는 뮬러 7세의 계획은 어느 정도 순탄하게 흘러가게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