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2 성지 발크락 上
* * *
츠캉!!
키런 왕국의 샬론 백작, 골드로츠.
다크나이트 엘도트.
두 사람의 충돌은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다. 서로의 검이 마주한 순간 피부가 저릿거릴 정도의 파동이 뿜어졌다. 골드로츠는 물론 황금늑대 기사들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니야.’
골드로츠는 엘도트의 힘을 알아챘다. 그냥 평범한 기사라기에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그냥 마주하는 힘만으로도 골드로츠가 밀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휘두른 장군도가 한순간 보이지 않았단 점이었다. 분명 휘두르는 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눈으로 인식하기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휘두르는 검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그 이질감을 알아챈 건 엘도트가 2번째 공격을 시도했을 때였다.
스슷
“미친”
골드로츠는 욕지기를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엘도트가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키런 왕국 측에는 기선제압을 주었고 다크나이트에게는 제법 좋은 기세를 주었다.
“그냥 보내줄 생각인가? 그러면 감사히 물러나지.”
엘도트는 덤덤하게 말했다. 이건 도발이었다. 그러나 골드로츠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방금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엘도트의 검은 도중에 2번 정도 급정거를 했다. 휘두르는 도중에 멈추고 다시 휘두르는 짓거리를 2번이나 했단 소리다. 검이란 건 꽤나 무거웠고 속도를 받게 되면 손목에 무리가 가게 될 정도로 힘이 커졌다. 그런데 엘도트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그의 힘과 기술을 떠나……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저 짓을 안 하고 그냥 가속한다면?
이 점이 골드로츠를 경계하게 했다. 잘못 하다가는 그의 목이 달아날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
골드로츠는 한 발 늦게 대답하며 인원들을 살폈다. 얼핏 본다면 황금늑대가 밀리는 분위기였다. 다크나이트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들의 완력은 황금늑대를 상회했다. 그런데 압도하지는 못했다. 다크나이트는 분명 강했지만 황금늑대의 경험은 그걸 뛰어넘고 있었다.
차캉!
특히 황금늑대의 합격술은 대단했다. 근처의 동료가 위험할 때 도와주거나 한 발 물러나 다른 동료와 힘을 합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촘촘하기 그지없는 공격망이었다.
삐익 삑
삐이익
심지어 그들은 휘파람으로 수신호를 주고 받았기에 다크나이트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크나이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엄격한 훈련으로 강해진 힘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무너졌을 것이다.
차캉
골드로츠는 이걸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엘도트에게 질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대장전에서 져버린다면 좋든 싫든 황금늑대에게 영향이 갈 것이다. 자존심이 좀 꺾일지언정 바틸카스의 명령을 이행해야 했다.
우선 이들부터 제압한다. 그러면 도망친 두 사람에 대한 단서는 물론 그 배후까지 알 수 있다!
신중하게.
조급하지 않게.
확실하게!
후읍
골드로츠는 검을 꽉 쥐었다. 그러더니 빛과 같은 속도로 날렵하게 찔렀다.
{빛뚫기}
이제 이 스킬은 최후의 수단이 아닌 필살기 정도로 발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전보다 훨씬 날렵하고 예리해졌다.
차캉!
그러나 상대가 좋지 않았다. 만일 이디아나 브론트였다면 그의 검에 반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
“빠르군.”
엘도트는 무심하게 검을 들어 막았다. 그것도 골드로츠의 검이 닿기 직전 칼날에 회전을 주어 힘을 분산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뿐이다.”
엘도트는 나직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골드로츠가 받아내지 못했다.
쩌억!!
분명 골드로츠의 검이 막긴 했다. 하지만 골드로츠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게다가 곧장 반격하지 못했다. 검이 여전히 쩌렁쩌렁 울리고 있어서였다.
“후웁……!”
그러나 골드로츠도 마냥 나약한 건 아니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겠다는 것에만 집중해서인지 주저앉지 않았다. 반격하지 않는 대신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엘도트가 추가 공격을 하지 못하고 대치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제법 현명한 선택이었다. 골드로츠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덤볐다면 엘도트가 단숨에 그를 쓰러뜨렸을 것이다. 하다 못해 전열에서 이탈해도 다크나이트가 우세해졌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골드로츠는 자신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난처하군.’
엘도트의 목적 역시 시간 벌기였다. 이디아와 그의 부하들이 버트를 무사히 데려나가게 막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국경 지대라지만 이곳은 엄연히 키런 왕국의 땅이었다. 조금 멀지만 다른 곳에서 온 병사들도 있었다. 지금은 루하다 덕분에 병사들이 오지 않았지만 언제 포위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예상 범주 내였다. 그렇지만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부디 다른 일은 없어야 할 텐데.’
*
“이건 대체……”
이디아는 안고 있는 버트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안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극심한 운동을 한 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느낌이었다. 단숨에 긴장이 풀려버려 노곤노곤해졌지만 어떻게든 힘을 주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안 있으면 완전히 끝장날 것 같았다.
이디아는 시선을 돌려 다크나이트 하나가 업고 있는 루하다를 보았다. 그는 분명 버트를 계속 안고 있었다. 사전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못해도 몇 시간은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키런 왕국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감탄밖에 안 나오네.’
대단한 의지였다. 힘도 강했지만 정신력 또한 굉장했다. 아니, 지금껏 그가 봐온 존재들 중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미치겠구만……’
이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이 정도라면 다른 다크나이트는 1분도 못 버틸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국경을 넘으려면 몇 시간을 더 뛰어야 했다. 그는 얼마나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쉬어가기에는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하다못해 지원이 더 있었다면……’
이디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크나이트 한 명이 거리를 좁혔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지?”
“기마병입니다. 이 백 정도 되지만 각기 다른 문양이 셋 이상 있습니다.”
“기마병……”
이디아는 혀를 찼다. 그들의 신체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말을 따돌릴 수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힘이 빠지는 상황에서는 어려웠다. 그나마 희망을 보는 건 왕국군과 영지군이 나뉘어져 있단 점이었다. 키런 왕국의 지휘가 확실하다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군대의 지휘계통까지 통일했을리 없었다.
“2조씩 나뉘어서 흩어진다. 각 조의 홀수 조장이 임시 지휘한다.”
“네.”
그들은 이디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뉘었다. 빠르게 갈린 다크나이트들은 다섯 방향으로 갈라졌다. 이디아는 그 중 어디에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러다 버트를 내려두고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아…… 돌겠네 진짜…… 이 아가씨는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디아의 말에도 버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디아는 한숨과 함께 버트의 머리를 토닥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고작 머리를 만졌을 뿐인데도 현기증이 일었다.
“지하……”
“응?”
버트의 입이 달싹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뭐야, 일어났”
이디아는 말을 하다 말고 등 뒤에 손을 가져갔다. 등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에 손이 갔다.
버트가 아니다. 그의 본능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지하로…… 가……”
“뭐라고……?”
“검은 동굴…… 라피에 초원 너머의 동굴…… 지하로……”
버트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디아가 느꼈던 위화감이 싸그리 사라졌다. 이디아는 뒤늦게 자신이 숨까지 참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한 발 늦게 숨을 들이킨 이디아는 호흡을 고르고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동굴의 지하로 가라고……? 대체 무슨……”
이디아는 일단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녀가 평소처럼 의식이 떠나간 게 아니다. 위험한 상태라고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평온해보였다. 하지만 방금 느낀 걸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버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몸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언젠가 버트에게 들었던 고백.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마신의 씨앗에 대한 얘기…… 그리고 루하다가 나직하게 했던 경고들을 종합했다.
‘마신이 깨어났다?’
이 가정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다름 아닌 신이다. 근데 무엇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한단 말인가. 이모탈의 몸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 정도도 못하면 왜 신인가. 하나를 가정하면 모순이 생긴다. 그래서 선뜻 단정지을 수 없었다.
‘누가 시원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이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하얀 활을 들었다. 분명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디아처럼 훈련 받은 레인저가 아닌 이상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분간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디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위를 당겼다. 그가 오는 방향은 국경선 쪽이었다. 혹시나 원군이 온 게 아닌가 싶어 기대했다.
“걸렸구만.”
키런 왕국의 표식. 그걸 확인한 이디아는 거침없이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다.
투명한 화살. 본래 버트가 검은 동굴에서 습득했던 물건이지만 이제는 이디아의 것이 되었다. 사실 투명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실루엣이 잘 보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두운 밤일 때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했다.
쌔액
달려오던 자는 갑자기 몸을 틀었다. 그냥 기감으로 피한 게 아니었다. 똑똑히 보고 피했다. 이디아가 그걸 확신한 건 상대가 아주 미세한 차이로 화살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위험하다.
이디아가 위험한 걸 떠나 버트의 목숨도 위험했다. 이디아는 다시 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화살이 아닌 바람을 쏘아보냈다.
피핑
마나를 압축 시켜 공기를 쏘아보내는 단순한 공격. 그러나 가고일 날개 정도는 가볍게 찢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타탓
이번에도 상대는 가벼운 동작으로 바람을 피해냈다. 그러더니 단숨에 거리를 좁혀 검을 뻗었다.
쌔애액
주먹만한 게 보이던 상대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디아가 눈을 두어 번 깜빡할 사이에 검을 찔렀다. 이디아는 기겁하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다면 눈이 꿰뚫렸을 것이다.
“후웁……!”
이디아는 뺨을 스친 검을 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활로 검을 쳐내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턱
상대는 한 손으로 주먹을 막아냈다. 그러더니 다시 검을 휘두르려다…… 말았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익숙한 목소리. 이디아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길렌 백작님?”
길렌 백작. 그가 키런 왕국의 기사 차림으로 서있었다.
*
길렌 백작은 영지 간의 거리 때문에 한 발 늦게 키런 왕국에 침투했다. 그에게는 꾸준히 상황을 전달해주는 정보망이 있었다. 가장 먼저 전해들은 건 누즐라 요새를 기준으로 포위망이 촘촘해지고 있단 것이었다.
‘미친놈이야.’
아무리 길렌 백작이라 해도 루하다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혼자는 혼자일 뿐이었다. 특히 상대는 온갖 시련을 겪은 누즐라 요새였다. 강자에 대처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을 테고 훈련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진즉 국경을 넘어 이곳에 왔을 것이다.
뭐가 됐든 구하러 가야 했다. 그가 흠모하는 버트를 위해서라면 작위는 물론 목숨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길렌 백작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형이란 걸 자각한 순간 마기에 침투당해 현혹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이게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랑그라 밀림에서 마법사 린베스가 잠식당할 때와 달랐다.
온전하게 재탄생한 린베스와 달리 길렌 백작은 약간의 변질만 일어났을 뿐이었다. 굳건한 의지에 아주 미세한 불순물…… 순수한 철보다 강철이 단단한 것처럼 그의 사상과 의지가 강해졌다. 이 말은 즉…… 굳이 마기가 아니더라도 그의 행동에 변화는 없을 거란 소리였다. 조금 이상해진 거라면 버트의 캐릭터가 가득한 검집 정도였다.
그렇게 길렌 백작은 꿋꿋하게 나아갔다. 그러더니 국경을 침투한 뒤에 보급품을 털어 기사의 복장을 착용했다. 그 후 이디아와 만나게 된 것이다. 길렌 백작은 만나서 버트를 안아 들고 달렸다. 마기로 탄생한 이디아와 달리 그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이디아는 정말 많은 게 궁금했다. 앞서 달리는 길렌 백작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회복에 집중해야 했다.
‘아군으로 왔으니 다행이긴 한데 대체 언제 지원을 부른 거지? 우리가 출정할 때인가? ……그보다 저거 아가씨 얼굴 박힌 거야?’
이디아의 마음은 계속 심란했다. 그건 길렌 백작이 버트를 안아들기까지의 과정도 한 몫 했다.
‘내 평생 살면서 그렇게까지 기꺼워하며 안아드는 건 처음 봤어.’
손을 덜덜 떨면서 머뭇거리기도 잠시…… 버트를 안아들고 난 뒤에는 눈물을 머금기까지 했다. 길렌 백작이 버트를 흠모하고 있단 건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간 다크나이트로서 후배를 양성하고 훈련에 전념하느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광신도가 아닌가. 이디아가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동안 길렌 백작은 버트를 살피고 있었다.
‘제법 오래 밖에 있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깨끗해.’
길렌 백작은 버트의 상태를 확인하고 감탄했다. 피부는 물론 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혈색도 잘 도는 걸 보면 영양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숨소리도 편안했다.
누군가 그녀를 온 힘을 다해 돌봐주었단 소리였다. 누군지 몰라도 그의 정성이 놀라웠다. 이 정도면 길렌 백작만큼 버트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혹여 수행하고 있다는 그 하인인가? 제법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지진 않아.’
저 멀리 국경선이 보였다.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길렌 백작이 조금만 늦었다면 전투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가야 한다. 국경선을 넘으려면 성벽을 돌파해야 했다. 넓게 펼쳐진 성벽은 높지 않았지만 병사가 많았다.
“이봐, 나의 기사를 부탁하지.”
“누구의 기사요……?”
길렌 백작은 버트를 이디아에게 넘기고 앞으로 내달렸다.
타타탓
길렌 백작은 성벽을 향해 달렸다. 어둠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그의 형상을 보며 소리쳤다.
“침입자다!!”
그러나 그건 이미 늦은 외침이었다. 길렌 백작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성벽의 눈앞까지 와있었다. 그를 발견한 병사가 소리쳤을 때는 성벽을 수직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디아는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대처를 하기도 전에 백작이 검을 뽑아 휘둘렀다.
퍼퍽
칼날이 아닌 옆면으로 후려쳤다. 몽둥이가 된 검은 순식간에 병사 셋을 쓰러뜨렸다.
“어, 어?”
“활을 ㅆ”
퍽
백작의 검은 투구를 쓴 머리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그의 정확한 타격에 맞은 병사들은 뇌진탕을 겪으며 기절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 다섯이 추가로 쓰러졌다.
“이런 미친! 다들 물러나라!”
병사들을 물린 건 2명의 기사였다. 백작의 양옆에 자리 잡은 둘은 검을 들었다.
“키런 왕국의 마가타다!”
“키런 왕국의 코르슬란이다.”
두 명의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하지만 백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싸움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단 건 자명했다. 그렇다고 기사도에 반하여 답하지 않는 건 이상했다.
“방랑기사 에보니 남작이다.”
백작은 블랙 남작을 떠올리며 비슷한 색으로 가명을 만들었다. 두 기사는 그 말을 믿는 건지 곧장 검을 휘둘러왔다.
차캉
간단한 소개처럼 승부는 금방 끝났다. 마가타가 휘두른 검은 백작과 마주한 순간 튕겨져 나갔다. 코르슬란은 기습을 시도하려다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후우”
그 이후로는 길렌 백작의 독무대였다. 두 사람이 해당 구역의 강자였던 건지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걸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이디아는 힘겹게 몸을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성벽에 다다를 때쯤 백작이 성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잘도 그런 몸으로 여기까지 왔군.”
“……이건 아가씨가 이상해서 그래요. 제 힘을 빨아 들이고 있다고요.”
“그래? 쓰러지지 않는 것도 용하다 이건가.”
백작은 버트를 넘겨받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아니……?”
“왜, 왜요? 어디 다쳤어요?”
“이렇게 아름답다니…… 다시 봐도 이 어두운 밤이 밝아지는 미모야.”
이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이제 귀환하면 되겠군.”
“먼저 가세요.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해야 할 일?”
“선배랑 부하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 상태로 말인가?”
“이 정도는 잠깐 쉬면 됩니다.”
이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심호흡했다. 백작은 잠시 이디아를 보다 돌아섰다.
“그럼 뒤를 맡기지.”
“아 참…… 검은 동굴의 지하로 향하라고 했습니다. 그걸 누구에게든 전해주세요.”
“검은 동굴의 지하? 누가?”
“그……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아니, 아가씨인데, 아가씨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헛소리지?”
“아씨, 그게…… 그러니까 잠깐 눈을 떴는데 아가씨가 아니었어요. 그러더니 무슨 말인지 모를 말만 하고 다시 쓰러졌고요.”
“음.”
“그러니 빨리 데려가세요. 위험할 지도 모르니까요.”
“알았다.”
백작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러더니 처음 이디아를 공격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려갔다. 이디아는 허탈한 얼굴로 점이 되어 사라진 백작을 보았다.
“나 참, 저게 그냥 단련한 사람이라고……?”
이디아는 경악하면서도 회복에 집중했다. 성벽 위에서 들리는 어수선한 소리를 그치게 하려면 일단 최대한 힘을 되찾아야 했다. 그 다음에는 간단했다.
국경지대를 점령한다. 그 후 엘도트와 다른 다크나이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계획의 끝이었다. 이디아는 생각을 정리하고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병사들을 수습하던 다른 구역의 병사들이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피핏
이디아는 신속하게 성벽을 점령했다. 그가 작정하고 국경지대를 점령하는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후 이디아는 하늘을 향해 폭죽을 쏘아 올렸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이디아가 얼마나 버티고 그들이 얼마나 빠르게 도망칠 지의 싸움.
*
‘빠르군.’
백작은 판테스 왕국의 국경을 통과했다. 그가 달리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멀리 폭죽이 터지는 게 보였다. 아주 희미했지만 그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검은 동굴의 지하.’
이디아가 헛소리를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검은 동굴은 분명 그 지역의 지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은 흔하디 흔했다. 당장 백작이 떠오르는 장소만 해도 다섯 군데나 있었다.
‘그렇다면 블랙 남작의 영지 근방일 터.’
누구에게든 얘기를 전달하면 된다는 건 블랙 남작에게 물어봐야 된다는 소리였다. 여차하면 그림자를 쫓는 별에게 물어봐도 됐지만 이런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백작이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몇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백작은 쉬지 않고 판테스 왕국령을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누군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오호?”
백작은 버트를 한 팔로 안아들며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다 얼굴을 확인하고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당신은……”
“뭔가 빠른 움직임이 느껴진다 했더니…… 자네였구만.”
길렌 백작의 앞에 나타난 건 넬하트였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마중을 나오신 겁니까, 어르신?”
“그건 아니네. 헌데 마중이라니? 무엇에 쫓기고 있는 건가?”
그의 질문에 백작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의 기사 버트가 타국에 불시착했다고 해서 구하고 왔습니다. 우선 지금은 그녀가 제정신일 때 했던 말을 들으러 이동 중에 있었습니다.”
백작의 말은 정중했다. 그가 이렇게 된 건 몇 번의 만남이 있던 후였다. 조각상 사건 이후 백작과 넬하트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그의 깊은 지식과 더불어 버트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진심이란 걸 깨닫고 감명 받게 되었다. 오히려 백작보다 더 섬세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직한 기사가 이상형인 백작에게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으흠? 흠.”
넬하트는 버트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과연. 아주 이상한 상황이로군.”
“보면 아시겠습니까?”
“얼추 알겠네.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넬하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둘이 있던 장소가 단숨에 어느 건물의 내부로 옮겨졌다. 백작이 놀랄 틈도 없이 넬하트가 어딘가에 통신을 연결했다.
“이보게, 그레노. 자고 있나?”
“응? 무슨 일인가?”
그레노라 불린 노인의 모습과 목소리가 선명하게 비춰졌다.
“함께 봐야 할 것이 있어서 말이지.”
“음, 잠시만 기다리게. 이 꼬마가 여간내기가 아니라서 말이야.”
“게임 중이었나 보구만. 내 기다림세.”
백작은 넬하트가 느긋하게 통신을 끊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별다른 영창 없이 먼 거리를 순간이동 하는 건 물론 다른 도구를 쓰지 않고 선명한 화상 통신까지 쓰고 있었다. 넬하트라는 이름이 살리마 왕국에서 은퇴한 마탑주와 같다는 건 우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가 본인이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자, 어디까지 얘기 했더라…… 그레노가 오기 전에 간단히 설명하겠네. 일단 그 아이를 여기에 앉혀보게.”
“예.”
백작은 버트를 의자에 앉혀주었다. 조심스레 내려두고서 두 팔은 팔걸이에 얹어주고 사뿐사뿐 물러났다.
“지금 그녀의 안에는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네. 그것이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건 이 세계와 융화되어 있기 때문이지.”
“세계와 융화되어 있다고요?”
“우리가 보는 육신 자체는 별개야. 다만 이 아이가 가진 힘은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있지.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거대한 존재의 손가락 인형과 마주하고 있다고 보면 되는 걸세.”
“그러니까…… 버트의 몸은 그녀의 힘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라 이 말인 겁니까?”
“바로 그걸세.”
넬하트는 버트를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지. 그 거대한 힘과 육체가 서로 뒤바뀌려 하고 있어.”
“예? 그 말씀은……”
인간 하나와 손가락 인형의 차이. 아니, 간단한 비유일 뿐 그 격차는 더 심할 것이다. 그럼 자그마한 것과 커다란 것의 입지가 바뀐다면……?
“이대로 몸이 힘에 먹혀 뭉개지거나…… 아니면 감당 못할 힘에 폭발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걸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