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78화 (78/104)

〈 78화 〉 78 ­ 샤킬가의 창 下

* * *

버트의 계획은 단순했다. 지금까지 스터그가 겪은 삶을 돌아보며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야 저는 아직 당신에 대해 잘 모르고…… 알아도 단편적인 것 뿐이니까요.”

“아니, 내 말은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날 돕느냔 것이다.”

스터그는 루하다를 보았다.

“원래 이렇게 오지랖이 심한가?”

“정이 많다는 표현도 있다.”

“그게 너무 심하면 오지랖이 되는 거다. 이래서야 마신의 부활은커녕 제 몸 하나 간수 할 수 있겠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버트의 질문에 스터그는 입을 다물었다. 버트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예전처럼 멍청하게 당하지만은 않으니까요. 사람이어도 확실히 죽일 각오가 됐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스터그는 말없이 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터그의 손을 붙잡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그의 공허함을 피해 내면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스터그는 그런 버트의 머리를 토닥였다.

“고생이 많군.”

“……예? 아, 예…… 조금…… 헤헤……”

버트는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스터그는 시선을 살짝 내리 깔았다.

“혹시라도…… 만약에…… 내가 의미를 찾는다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부탁이요? 네, 들어드릴 수 있다면……”

“나의 허무함을 날릴 수 있다면 분명 가능할 거다. ‘그 녀석’도 나와 다를 게 없으니까.”

“그 녀석이요?”

“나와 같은 드래곤이다.”

“혹시 엔실라……?”

“응?”

스터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하는 녀석은 다른 녀석이다. 멜그라우, 붉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지.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허망함이 느껴졌다. 다만 나와는 달리 동족과 소통을 하며 지내는 듯 하더군.”

“그럼 스터그 씨는 왜 동족을 떠나오신 건가요?”

“역겨웠거든.”

스터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를 짓이기고 쟁취한 승리에 취해 있었지. 그리고 그걸 정당화하고 당연하단 듯이 굴었다. 그나마 브라함은 그것이 잘못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들 중 몇이나 반성했을지 모르겠군. 개인적으로 내 손으로 그것들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 있기도 했고 혐오스러워서 당장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은둔을 택했지.”

버트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손을 조물락거렸다.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낫겠어. 창을 돌려주겠나? 그것들을 미리 처분해두면 마신의 부활은 문제없을 거다.”

스터그의 무감정한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걸 알아챈 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지금은 살아갈 의미부터 찾는 게 더 중요해요.”

“괜찮겠나? 아무리 그것들이 단련을 게을리 해도 타고난 힘이 있다. 네 힘이 강하긴 하나 드래곤과 백신의 합공은 이길 수 없다.”

“저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다못해 우군으로 두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냐.”

버트는 루하다를 바라보았다.

“스터그 씨를 이용한다 해도 우리가 먼저 도와준 준 다음이야. 삶의 가치를 알아야지 더 필사적으로 싸울 거 아니야.”

그 다음 버트는 스터그를 보았다.

“그리고 내게는 루하다가 있어. 스터그 씨도 강할 테지만 루하다가 더 세다고 생각해. ……아닌가요?”

버트는 자신 있게 말하다가 마지막 말에 힘이 빠졌다. 스터그는 버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네 뜻은 알겠다. 그러면 너의 그 계획을 계속 하지. 어느 정도 읽었을 거라 생각하니 네가 모를 이야기 정도는 하지. 내가 가장 큰 절망을 느꼈던 부분이라면……”

*

스터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지금은 만들어졌다고 허탈해했지만 가족을 상당히 아꼈다. 아내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가 지금까지 신과의 싸움에 나섰던 건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리아주크, 백신과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드래곤들도 선택을 해야 했다. 리아주크는 여타 신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창조한 게 그였기 때문이었다. 스터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잘 꾸며진 미니어처 장식일 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강대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드래곤과 백신 전부 힘을 합쳐야 대항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랬기에 스터그는 고민했다. 과연 그와 대적하는 게 옳은가. 그래서 드래곤들의 회유에도 망설였다.

그걸 무너뜨린 일이 생겼다.

“나이트피어의 족장이 일을 벌였다.”

스터그의 눈에 보인 건 백치가 된 아내와 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둘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순간 버트가 루하다를 보았다.

“리아주크를 대신하여 일을 벌이는 건 나이트피어의 주특기입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장로였던 저는 물론이고 족장이었던 타벨라르도 몰랐을 겁니다.”

“유감스럽군. 그 일로 분노하여 나를 막은 것들을 찢어 죽였을 터인데.”

스터그는 루하다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둠워퍼들을 몰살한 게 스터그라는 소리였다.

“그런가.”

스터그는 루하다의 담담한 반응에 방금 했던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그런 계략에 휩쓸리고 전장에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래곤과 백신, 리아주크의 가신들이 얽히고설킨 수 싸움이었지. 단순한 나는 거기에 붙잡혀서 휘둘린 거고.”

그렇게 스터그는 전장에 참여했고 리아주크와의 싸움에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 그를 꿰뚫어 진실을 보고…… 그 후 잠적했다. 이 과정에서 버트는 묘한 얼굴로 스터그를 보고 있었다.

“더 상세한 얘기를 하기에는 며칠의 시간으로는 부족할 거다. 외부 세계의 시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모든 걸 풀어내기에는 모자랄 게 분명하다.”

“아뇨, 괜찮아요. 충분해요.”

버트는 눈을 감았다. 이미 그와 대화를 하면서 다양한 걸 읽었다. 그가 가족에게 느꼈던 애틋한 감정부터 모든 걸 잃고 분노하고…… 전부 끝난 뒤에 느낀 허무함까지……. 그것들을 차례차례 받아들이니 처음 느꼈던 끔찍한 공허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갈피가 잡히지 않는 건 그의 욕망이었다. 혹시나 성욕이 있나 싶어 훑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의 욕망은 가족에게만 반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버트는 ‘주머니’에서 물건들을 준비했다. 동시에 루하다를 불러 준비를 돕게 했다.

“이건 여기에 배치하면 됩니까?”

“응.”

루하다는 버트가 만들어낸 식탁과 의자를 옮겨놓았다. 아드레이 왕국에서 수련한 이후 별다른 진전은 없어보였다. 그런데 지금 만들어낸 가구들만 보면 이제 간단한 창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덕분에 삭막한 신전 한 곳에 동떨어진 듯한 살림살이가 만들어졌다.

루하다는 나뭇결이 살아있는 가구를 바라보다 문득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을 던지려 했다.

“나도 잘 몰라.”

“예?”

“이렇게 해서 스터그 씨가 삶에 의미를 찾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며칠 동안 최대한 노력해볼 거야.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잖아? 그 후에 정말로 스터그 씨가 말한대로 창을 돌려주고 드래곤을 잡아달라고 해도 되고 그냥 곁에만 있어달라고 해도 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알게 됐어. 스터그 씨를 훑어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니지만…… 뭔가 알게 됐어.”

루하다는 말없이 버트를 바라보았다.

“네가 염려하는 대로 마신의 부활이 머지않았다는 거지.”

버트는 자기가 말하고서도 뭔가 이상해서 루하다를 보았다.

염려해?

마신의 부활을?

버트는 뭔가 이상해서 루하다에게 시선을 주었다. 루하다는 버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 응…… 스터그 씨! 준비 다 끝났어!”

“……그래.”

스터그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 다가섰다. 루하다가 그림자로 스며든 순간 버트는 ‘주머니’에서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머리는 질끈 올려 묶고 새침하게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스터그는 헛웃음을 냈다.

“어서 와 여보! 자리에 앉아!”

지금 버트가 연출하는 모습은 스터그의 아내였다. 누군가 본다면 조롱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찬 표정과 자신감 넘치는 행보만큼은 진심으로 보였다.

“확실히 아내가 특이하긴 했지. 각 종족의 결혼 생활을 하며 지내자고 했고 말이야.”

스터그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딸은 인간의 생활을 지낼 때 가지게 됐지. 그립군.”

스터그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 말의 뉘앙스는 참 애매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건지 아니면 아무 것도 모르고 가족과 함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버트의 시도를 그렇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란 점이었다.

“식사 먼저 할래? 아니면 나부터……?”

“식사로 하지.”

“이렇게 예쁜 아내를 두고 식사부터 하는 거야……?”

“원래 맛있는 건 나중에 먹거든.”

“에헤헤, 그럼 금방 준비할게!”

버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 도구나 식재료는 상시 준비되어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행히 스터그의 아내가 만드는 요리도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금방 스터그가 먹을 만한 것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얇게 저민 사슴 고기와 눅진한 야채 스튜, 으깬 감자…… 전부 내가 즐겨먹는 요리로군.”

스터그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하나하나 맛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맛. 분명 그 맛을 제대로 재현해냈다. 한순간 온몸이 따스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맛있군.”

“정말?”

“그래. 요리 솜씨가 나날이 늘고 있어.”

“으흐흐­ 다행이다. 내일은 더 맛있는 거 해줄게.”

버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난 모습. 버트도 스터그가 잘 받아주니 분위기를 탄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에게서 욕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버트는 이대로 섹스까지 가버릴까 생각했다가 그의 추억 중에 다양한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달그락대는 식기 소리. 그 소리가 끝날 때쯤 버트가 테이블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배도 꺼뜨릴 겸 산책이라도 갈래?”

“갑자기 말인가?”

“운동도 갑자기 하면 배 땡긴다구. 알지?”

“운동이라. 그 후를 생각하고 있었나 보군.”

“그러니 가자!”

버트는 스터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스터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여기는 사방이 물 밖에 보이지 않는 신전이었다. 심지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탓­

스터그는 그런 신전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버트는 말없이 그의 팔짱을 끌어 안았다. 한순간 느껴지는 그의 추억. 거기에는 감성적인 아내와 여러 이벤트를 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별빛을 머금은 꽃밭에서 가벼운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어둑한 밤을 배경으로 은근한 빛과 싱그러운 꽃향기 속에서 춤을 춘다…… 그냥 엿보기만 한 건데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촤락­

신전 앞의 물이 갈라졌다. 곧이어 물은 통로처럼 변해서 둘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스터그의 에스코트를 받은 버트는 멍하니 그 통로를 걸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물컹거리는 물의 질감이 확연히 보였다. 게다가 머리 위에서 은근하게 흔들리는 태양빛. 물고기와 수초의 움직임까지……!

“와……”

버트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았다. 물이 통로처럼 변한 것 말고는 자연적인 광경이었다. 누가 이렇게 깊은 물 속을 걸어다닌단 말인가.

그때 통로가 무너졌다. 버트가 화들짝 놀라 파닥거리자 스터그의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버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오들오들 떨며 눈을 떴다.

숨을 쉴 수 있다.

버트는 두 다리를 가볍게 움직였다. 분명 물속에 있었다. 몸도 붕뜨고 물장구도 칠 수 있었다.

“아.”

스터그는 놀라고 있는 버트의 두 손을 잡고 가볍게 물속을 유영했다.

물고기들. 수면 위를 지나다니는 배 그림자. 몸을 기분 좋게 휘감는 물결.

신기했다. 분명 판타지 게임이었지만 거기에서도 손꼽히는 신비로움이었다. 윙던 숲에서 만난 요정들이 보여준 신비한 빛. 그걸 처음 보았던 느낌이었다.

“와아아­!!”

버트는 한 발 늦게 탄성을 터뜨렸다. 한순간 이해를 넘어선 아름다움 때문에 머리가 뒤늦게 반응한 것이다. 그녀의 순수한 감탄과 순진무구한 표정이 스터그의 눈에 박혔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즐겁나?”

“네! 신기해요, 엄청!”

희미한 기운. 해맑게 웃던 버트가 화들짝 놀라 스터그를 보았다. 그건 분명 욕망이었다. 무엇이 그를 자극한 걸까. 상세한 건 알 수 없었다. 스터그에게서 마기로 자극할만한 욕망이 느껴졌다. 그것 뿐이었다.

그걸 느낀 순간 버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마신의 힘. 그걸 최대한 끌어내어 스터그에게 침투시켰다. 상대가 드래곤이니 보통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엔실라였다. 그토록 길들이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면 스터그는 그에 배가 되는 노력을 해야 했다.

여기서 버트가 간과한 건 엔실라에게 어느 정도 마기가 먹혔다는 점. 그리고 스터그가 상상 이상으로 마기를 잘 받아들였단 점이었다.

스터그의 욕망이 서서히 촉발되었다. 그의 눈에 강렬한 욕망이 감돌기 시작했다.

“앗.”

스터그는 버트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버트를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버트는 그의 박력에 사로잡혀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터그는 버트를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착하구나.”

“아.”

그의 중후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 버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 닿는 촉감…… 촉촉하고 매끈하고……

……

……?

입술이라기에는 너무 미끈거렸다. 그보다 지금 입 안에 들어온 건 혀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슬쩍 눈을 떠보니 스터그가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버트의 입에 물린 건……

젖병이었다.

*

“샬론 백작.”

“예.”

골드로츠. 최초의 이모탈 귀족의 자리는 뺏겼지만 지금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존재…… 위대한 기사 바틸카스 엔드로만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골드로츠를 호출한 건 다름 아닌 로이첸 왕국의 일이었다.

분명 우탄 후작은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에이어 공작 역시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틸카스는 로이첸 왕국의 이변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가장 가까운 나라이기도 했거니와 그곳에 심어둔 첩자로부터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현재 로이첸 왕국의 왕성이 정체 모를 존재에게 테러를 당했다는군.”

골드로츠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드레이 왕국을 떠올렸다.

“혹여……?”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우려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위험에 처한 곳에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얼마든지 가겠습니다.”

“다행이군. 샬론 백작. 그대는 이모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네. 어찌 하여 나를 비롯한 왕과 귀족들이 이모탈을 거두지 않는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자네처럼 부름에 즉각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 말에 골드로츠는 로그아웃 상태를 떠올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면서 저돌적이고 시건방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틸카스의 말을 듣는 순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백작위에 있으면서 제법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영지 내에서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있었고 합동 훈련이나 귀족 회의도 있었다. 그나마 골드로츠는 기사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좌하는 서기나 관리직이 업무를 덜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모탈로서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로그아웃 타이밍은 오직 수면 시간밖에 없었다. 급박하게 나갈 일이 생기거나 외부에 다른 약속을 잡기가 어려워진 셈이었다.

“그래서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네. 으레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면 거만해지거나 변하기 마련이지만 샬론 백작, 자네는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폐하.”

“그러니 자네에게 일을 하나 맡기겠네.”

바틸카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곁에서 말없이 서있었던 황금늑대 기사단의 단장 넨피스 후작이 걸어왔다. 골드로츠는 여전히 한쪽 무릎만 꿇고 있다가 후작이 내미는 검을 보았다.

새까만 검집. 매끈하면서도 어떤 장식도 없었다. 그야말로 검을 보관하는 용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 특이한 검집이었다.

“받거라.”

“네.”

골드로츠는 검을 받았다. 그 순간 몸에 힘이 감돌았다.

“이건……”

“마법검 『심연』.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검은 기사에게만 내리는 징표이자 무구일세.”

“비밀 임무라 하심은…… 로이첸 왕국을 돕는 것입니까?”

“그래. 황금늑대 기사 스물을 붙여줄 테니 곧장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게. 상황을 보아 왕성이 여전히 점령 상태라면 침투하여 점령자를 처단하게.”

“예!”

골드로츠는 곧장 일어나 게이트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황금늑대의 기사 스물이 뒤를 따랐다. 그중 넷은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흑사병대와도 견줄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분명 직위는 골드로츠가 위였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이나 경력만 본다면 골드로츠보다 한참 위였다. 그랬기에 그는 공석이 아닌 자리에서는 말을 높였다. 그 덕분에 황금늑대 기사단 안에서도 그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좋네.”

“가지.”

골드로츠를 위시한 기사들은 게이트에 올랐다. 희미한 빛이 쏟아지며 그들은 로이첸 왕국으로 사라졌다.

*

특수 플레이?

버트는 놀란 눈으로 젖병을 빨고 있었다. 뭔가 빨지 않으니 스터그가 머리를 받쳐주고 자상하게 웃는 바람에 무심결에 입을 놀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취향일 거라 생각도 못 했다.

“잘 먹는군.”

다정한 미소. 묵직한 목소리. 버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다 큰 자신이 아기 취급을 받을 줄 몰랐다. 두 가지의 이질적인 상황이 겹치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욕망에 취한 건 스터그만이 아니었다. 버트 역시 이 상황에 몰입하고 있었다.

“아우우­”

그제야 버트의 정신에 스터그의 감각이 느껴졌다. 욕망이 더해진 스터그의 시선은 버트를 완전히 아기로 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귀엽게 보이나 싶을 정도로 손도 자그맣고 오밀조밀한 귀염둥이가 있었다. 그렇게 여과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버트도 점점 퇴화했다.

“우우웅…… 웅……”

버트는 젖병을 열심히 빨다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터그가 버트를 안아들더니 등을 두들겨주었다.

“옳지. 옳지.”

“우웅­ 으하햐­”

버트는 몽롱한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그야말로 애처럼 풀려버린 표정이었다. 그렇게 스터그의 포옹을 받고 엉덩이까지 두드려주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애가 되버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착하구나.”

스터그는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시 침대로 옮겨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눕히지 않았다. 어느 샌가 버트의 몸은 자라나서 5살 쯤 돼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버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터그를 보았다. 그러자 스터그가 버트의 볼을 꽉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는 금방 돌아오신다니 조금만 기다리렴.”

“와핫­!!”

스터그는 그렇게 말하며 버트를 목마 태워주었다. 버트는 갑자기 위로 휙 들어올려지니 자기도 모르게 신나서 소리를 내버렸다. 스터그는 가볍게 버트를 튕겨주면서 주변을 걸었다.

“오늘은 무엇을 먹고 싶니?”

“아, 움.”

버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응이 재밌었는지 스터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저번처럼 오므라이스랑 크림 스튜 중에서 고민하고 있구나. 둘 다 해달라고 해볼까?”

“응! 둘 다 조아!”

“그래, 그래. 아예 너는 오므라이스, 아빠는 크림 스튜로 하면 엄마도 괜찮다고 하겠지?”

“응!”

버트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러다 주변을 걷다 말고 버트를 내려주었다. 이번에는 좀 더 자라나 중학생 정도 되는 소녀가 서있었다. 인상이 조금 날카로웠지만 순둥한 미소가 귀여운 아이였다. 스터그는 그런 버트를 은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꽉 끌어 안았다.

“아빠?”

“안 돼……”

“아빠……?”

“이 다음은……”

버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모습은 없었다. 스터그는 버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다음에 보일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마음이 무너진 스터그였지만 다시 한 번 상처를 돌아보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심지어 욕망이 증폭된 상태에서 자신의 딸을 마주하니 그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버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에 정신으로 투과된 자신의 모습은 없었다.

“아빠.”

버트의 한 마디. 그 소리에 스터그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만 떨어져 봐.”

스터그는 멍하니 버트를 놓아주었다. 버트의 모습은 어느 샌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스터그의 두 눈에는 자신의 딸이 아닌 버트가 있었다.

“너……”

“아빠.”

하지만 버트는 여전히 아빠라는 칭호를 버리지 않았다. 욕망에서 조금씩 깨어난 스터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

“아빠.”

버트는 꿋꿋하게 스터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엄청 이쁘게 자랐지?”

“어…… 어……”

드래곤은 고등한 생명이다. 수 백, 수 천 년이 지나도 미치지 않을 정신력이 있었다. 지성이 높은 만큼 웬만한 일로 세뇌나 정신 이상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스터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한순간 버트가 하려는 의도를 알지 못했고 그녀의 말에 대꾸도 제대로 못했다.

“나는 아빠가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말아줘.”

버트는 스터그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스터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니까…… 알겠지? 더 이상 의미 없다는 소리 하지 말고……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 줘.”

다정한 속삭임. 별 거 없는 말이었고 하찮은 설득이었다.

스터그는 대답 대신 버트를 꽉 끌어 안았다. 그는 심호흡했다. 거친 숨결, 정신과 육체에 부조화가 일어날만큼 그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너는 정말 내 딸이냐……?”

떨리는 목소리. 그건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하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아빠가 딸이라고 믿어주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아빠”

스터그는 갈등했다.

마기로 촉발된 욕망. 마음이 무너지며 굳어진 의지.

그냥 딸로 받아들이자는 본능. 모든 건 가짜일 뿐이고 전부 죽었다는 이성.

달콤한 허상에 빠지려는 마음. 그 허상의 진실을 깨우치라는 정신.

몇 번이고 충돌이 일어났다. 스터그는 버트의 제안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버트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버트.”

“네.”

스터그는 버트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리고 어떤 말 대신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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