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77 샤킬가의 창 中
* * *
샤학
루하다를 베려는 병사의 검이 스쳐지나갔다. 루하다는 병사 하나를 손으로 붙들고 내던졌다. 저 멀리 날아간 병사는 아군 무리에 추락했다.
“근접전을 피해라! 마법사를 배치해!”
“왕성의 마법진의 파장이 여기까지 미칩니다!”
“마력이 약해도 준비시켜! 병장기는 통하지 않는다!”
에이어 공작의 영지군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은빛상어 기사단만큼 다채로운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적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루하다의 경우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었다.
화살은 먹히지 않았다. 검도, 창도 통하지 않았다. 화약 폭발이나 성수도 소용없었다. 인챈트한 밧줄도 걸리지 않았고 대포를 맞춰도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포션까지 던져봤지만 멀쩡했다.
난공불락.
요새나 건축물에 들어맞는 표현이 루하다 하나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그저 뒷짐을 지고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누구도 넘어갈 수 없었다.
마법?
아니다. 마나 파동이 감지도 안됐을뿐더러 이만한 수준의 마법사라면 살리마 왕국이 먼저 접선했을 것이다.
육체?
하지만 이것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분명 팔을 휘두르는 것까지 보였는데 모든 공격이 무력화되었다. 그 후에 보이는 건 없었다. 그만큼 빠르게 움직였다는 걸까. 두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움직이는 건 둘 째 치고 팔다리의 가동 범위보다 넓게 휘두르는 게 가능한 건가!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되신 거야!”
“일단 계속 몰아붙여라!!”
병사들은 루하다에게 덤벼들었다. 아직까지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간 공작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특히 그의 영지에서 일하던 병사들은 필사적이었다. 에이어 공작은 다른 건 몰라도 귀족을 떠나 호탕함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군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로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루하다는 그들을 보며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부하들.
분명 루하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 둠워퍼라는 일족이 멸족하기 전에는 그도 장로의 위치에 있었으니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도 갈기갈기 찢기고 간신히 살아남은 뒤로는 그 생각조차 옅어졌다.
동족.
으레 생물이라면 자신의 종족을 널리 퍼뜨리고 싶어 한다. 그런 루하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미 없다.”
루하다는 나직하게 말하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병사 70이 그 한 번의 손짓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 여파는 뒤의 병사 수 백을 흔들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 보통 병사들이라면 질겁하여 도망쳤을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래도 뚫어야 한다! 일어 나!”
“1진 퇴군! 2진 진군!”
“3,4진 뭐하고 있어! 빨리 빨리 움직여!!”
“홀수열 벌어져! 빨리!!”
그들은 달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사기를 챙겼다.
‘멍청하긴.’
루하다는 혀를 찼다. 이렇게 해봐야 결국 손해를 보는 건 그들이었다. 만일 전부 죽였다면 무의미한 소모전이 됐을 것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목적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는 허무한 짓거리였다.
‘멍청해.’
루하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전부 박살내고 싶었다.
자기 목숨이나 세력을 보전할 생각도 않고 허무하게 희생되려는 자들을 벌하고 싶었다.
결과가 어떨지도 모르는 것에 의리 하나만으로 몸을 던지는 걸 짓밟고 싶었다.
‘멍청하다고.’
루하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힘조절을 해왔던 그의 손에 피가 튀었다. 앞에서 덤비던 병사 둘은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끊겨 나뒹굴었다. 루하다는 손에 묻은 피를 곁눈질하더니 혀를 찼다.
흥분했다. 이런 싸움은 놀이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에 점점 이성이 흔들렸다.
그들 공격에서 데자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새끼들.”
루하다는 살기를 흘렸다. 분노와 마기가 뒤섞여 흘러넘치는 기세. 수 천의 병사들이 그 기세를 접하고 벌벌 떨었다. 버트가 가진 힘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루하다 역시 강했다. 그가 작정하고 뿜어낸 기운은 보통 병사들이 견딜 수 없었다.
루하다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혀를 찼다. 그들은 주춤거리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 틈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지휘관 역시 보였다. 아무리 바로 보려고 해도 그들의 모습이 리아주크를 섬기던 시절의 자신이 겹쳐보였다.
다크나이트. 둠워퍼. 리아주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버린 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 중에는 루하다도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 최후까지 싸웠다가 갈가리 찢겼다. 함께 싸웠던 다크나이트는 어떻게 됐는지도 몰랐다. 동족인 둠워퍼들조차 어떻게 됐는지 몰랐는데 다른 이들을 챙길 여력이 있었을까.
결국 둠워퍼는 멸족했다. 다크나이트도 상징만 이어졌을 뿐 실질적으로 명맥이 끊어졌다. 무사한 건 다른 다섯 추종자들 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조차 원해서 얻은 생존이 아니었다.
굴욕 그 자체. 그들 중에는 둠워퍼와 다크나이트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우”
루하다는 한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파앗
한순간 병사들에게 환상이 보였다. 자신들의 몸이 갈가리 찢기고 내장이 비산하는 모습이 비쳤다.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목이 화끈거리고 팔다리가 욱씬거렸다. 뱃속이 뒤틀렸고 격하게 기침이 나왔으며 머리가 아팠다. 병사들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각 부대의 지휘관들 역시 같은 걸 보고 있었다.
“마법인가……?”
“큿…… 눈이 아파……!”
“모두 정신 차려라!!”
그렇게 루하다가 들어 올린 손을 내리치려 했다. 그들이 본 환상은 곧 일어날 일이기도 했다.
참다못한 루하다는 병사들 중 일부를 처분할 생각이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지우고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성 쪽에서 마신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분명 버트가 뿜어내는 것이었다. 버트가 하고 싶은 대로 잘 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느낀 루하다는 서둘러 주춤대는 병사들을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팟
“드래곤?”
루하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왕성에서 갑작스레 느껴진 기운은 드래곤이 분명했다.
루하다는 그대로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단 몇 초의 차이로 병사들은 학살을 피했다. 그들은 적이 사라지니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왕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렇게 잠깐 사라졌던 루하다는 버트의 앞에 나타났다. 푸른 머리칼의 장한. 그는 루하다를 한 번 보더니 버트를 보며 말했다.
“마신. 부활한 건가?”
그 질문에 루하다가 대답하려 했다. 그러자 버트가 루하다 밀고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뇨. 아직이에요.”
“아직?”
“네. 아직 부활한 건 아니에요.”
남자는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그렇군. 함께 가지.”
“……어디로요?”
“나의 거처.”
“거처요?”
버트는 케틀라이아를 안고 있는 에이어 공작을 보다 남자에게 말했다.
“잡아가는 건 아니죠?”
“가기 싫다면 다른 장소를 찾지.”
“음, 그냥 거기로 가요.”
남자는 가볍게 손짓했다. 버트와 루하다는 남자와 함께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공간…… 그곳은 물 속에 만들어진 신전이었다.
*
“스터그.”
남자는 덤덤하게 자신의 이름을 뱉었다. 뜬금없이 나온 단어였기에 버트도 이 말을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실버트리. 버트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쪽은 루하다에요.”
“알고 있다.”
“네?”
스터그는 루하다에게 시선을 주었다.
“살아 있었군.”
“날 알고 있나?”
“이 형태로 마주한 건 처음인가? 그게 아니면 기억이 흐릿한가?”
“내가 싸웠던 녀석들 중에 너 같은 놈은 없었다.”
“그런가.”
스터그는 루하다에게서 시선을 떼고 버트를 보았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일단은 드래곤이다. 지금 네 뱃속에 있는 것을 갈가리 찢은 살인자들 중 하나지.”
“살인자……? 근데 지금은 왜 그냥 두시는 건가요?”
“왜 그냥 둔다 생각하지?”
“그야 공격하시지 않으니까요. 적의도 안 느껴지고……”
“싸우기 편한 장소로 데려왔다고 생각하진 않나?”
“에이, 그럴 리가……”
버트는 대답해놓고도 확신을 못하는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죠……?”
“아니다.”
“다행이네요!”
스터그는 묘한 얼굴로 루하다를 보았다.
“뱃속의 마신이 악영향을 끼친 건가?”
“아니. 그릇께서는 원래 이러시다.”
“그런가.”
“저기, 무슨 얘기를……? 나 뭔가 이상한 말 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은데?”
버트는 심통난 얼굴로 말하다 스터그를 보았다.
“그래서 왜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
“그게 궁금한가?”
“음, 다른 드래곤이나 백신으로부터 숨겨주시려고 이곳우로 온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생각하면 궁금하진 않은데…….”
스터그는 묘한 얼굴로 버트를 바라보다 루하다를 보며 물었다.
“원래 이런 녀석인가?”
“그릇께서는 항상 똑같으시다.”
“왜 당사자를 두고 묻고 답하는 거야.”
스터그는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널 이곳에 데려온 건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 진상을 듣기 위해서다.”
“진상이요……?”
“품고 있는 마신의 씨앗. 그것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군. 되도록 상세히.”
“어, 음……”
버트는 루하다를 보았다. 루하다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하다가 사념을 보내지 않았기에 버트 역시 그걸로 묻지 않았다.
“일단…… 설명하자면 조금 길어요.”
“괜찮다.”
스터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버트 역시 바닥에 앉았다. 버트는 서늘한 돌바닥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여정을 얘기 해주었다.
*
쾅
라이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마법 통신은 은거 중인 넬하트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저기, 뭐라고요?”
“여기 땅이 좋아서 말이야. 이 마을에서 작은 탑을 하나 세워주었더군.”
라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니, 그 앞에 한 말은 기억 안 나요?”
“정식 마법사 활동 및 설파를 허락 해달라고 했지?”
“본인이 은거 중이란 건 잊고 계시나 본데,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고 있죠?”
“알다마다. 그거 라이센스 하나 따는 데만 몇 백 골드가 들어가고 기한 줄이고 채점 방식 간단하게 하려면”
“뭔 개소리야 이 늙은이가!! 대놓고 비리 저지르겠단 소리네 그냥! 그게 문제가 아니란 거 알잖아요!!”
넬하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거 탑주가 되어서 골드가 아까워?”
“본인이 어떤 위치인지는 잊어먹었나 본데, 은퇴한 탑주는 섭외 0순위예요. 무엇보다 살리마 왕국에 의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명실상부 손꼽히는 마법사를 포섭할 기회인데 다른 곳에서 눈독 들이지 않겠어요? 네?”
“걱정 않는다. 알아서 커버 쳐주겠지.”
“노망이 들려면 좀 예쁘게 들어야지……!! 아니 왜 이제 와서 그래요? 조용히 살고 싶다고 은퇴한 거 아녔어요? 그래서 정보 조직한테 뒷돈 세게 줘서 은폐해주고 땅도 물색해줬더니만 이제는 마음에 들어서 마법사 칭호를 다시 달겠다고요?!”
“잘 알아 듣는 구만. 역시 탑주의 후계자로 점 찍길 잘했어!”
“이야아악!!”
라이는 한 번 크게 비명을 지르고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허가는 어렵지 않은데 이름은 어떻게 하시게요? 넬하트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 건 아니죠?”
“그럴 생각이었는데?”
“내가 연구하는 마법이 하나 있는데 그걸 당신한테 쓰게 될 거 같네.”
“그거야 환영이지! 후배의 마법을 받을 기회는 좀처럼 흔치 않으니까 말이야.”
“아…… 이제는 화도 안 나네. 후, 알았어요. 뻐꾸기들한테 연락 넣어요. 그레노 부탑주님한테 얘기해 둘 테니.”
“응? 그 얘기는 못 들었나 보군.”
“예? 무슨 얘기요?”
“그레노도 은퇴하고 내가 있는 곳에 올 예정ㅇ”
넬하트는 말을 하다 말고 사라졌다. 라이의 격분하는 얼굴을 본 그 순간 넬하트 쪽에서 통신을 끊어버린 것이다. 라이는 말없이 꺼진 영상을 다시 키려고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이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니스는 실시간으로 깊어지는 라이의 다크서클을 보며 말했다.
“너 에이스 대학원생 같아.”
“비유를 그렇게 하지 마. 체감 확 오잖아.”
라이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니스는 은근하게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에구, 우리 라이 열심히네.”
“아니 징그럽게 왜 이래?”
“귀여워서 그런다, 왜.”
“와, 진짜 소름 쫙 끼치네. 돈 나올 구석 생기니까 이뻐 보이는 거 모를 줄 알아?”
“들켰나~?”
니스는 실실 웃으면서 손을 까딱였다.
“자, 무조건 선불.”
“계약 내용은 확실히 하자. 내가 요금 밀린 적 있어?”
“저번에 카페에서 만났던 게 뭐 때문이었더라?”
“그건 버트 때문에 만난 거지!”
“웃기지 마! 정보료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중간에 누락된 게 여러 요인 때문이라고 해도 못 넘어 가!”
“와, 그러니까 그거 때문에 돈을 한 번에 받으시겠다?”
“물론.”
“아오씨, 진짜. 진짜 몇 년 내로 늙은이들이랑 동년배 되겠네.”
라이는 칭얼거리면서 돈 주머니를 건넸다. 니스는 주머니의 묵직함에 무게감을 즐기다 내용물을 확인했다.
“오케이. 나중에 이걸로 집이나 지어야지.”
“집? 너 금수저인 건 알았는데 건물까지 세우는 거야……?”
“아니, 뭔 개소리야. 당연히 판타지아에서 만드는 거지.”
“그렇지? 아효, 놀래라.”
“괜히 어설프게 건물 늘려봐야 세금만 늘어. 터를 잘 봐야지.”
“응?”
“자, 그럼 계약 내용 재차 확인한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주관해서 넬하트에 대한 모든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차단. 맞지?”
“그래.”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본 니스는 눈을 껌뻑였다.
“뭐야, 그 손은?”
“그림자를 쫓는 별 세력 다툼 때 준 도움.”
“아.”
니스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래서 할인해주잖아.”
“할인해서 그 가격이야? 그거 상층부 마법사들 1년 치 연구료야!”
“그 영감님 네임드를 생각해! 여기저기 새나가는 정보 틀어막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어어? 어어어? 그렇게 나오지? 그렇게 나와?! 너 몰래 빼먹은 거 다 퍼뜨려?”
“뭘 빼먹어! 그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지!”
“다른 조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게 라이와 니스의 다툼은 주머니에 든 돈 일부를 돌려받는 것으로 끝났다.
“진짜 악착같네. 저번에 만났던 성직자 때문이야?”
니스의 말에 라이가 움찔 떨었다.
“그런 거 아냐.”
“버트는 포기했구나?”
“아니래도. 그 누나가 이쁘긴 해도 내 취향은 아니야.”
“누가 보면 이미 썸타는 줄 알겠네~”
“시끄럽고.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어?”
“물론이지. PK범 녀석들 전부 찬성했어. 운영자 잡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니스는 어깨를 쭉 펴며 우쭐해했다.
“이 정도야 뭐. 근데 버트를 마신으로 만들겠다는 네 생각이 더 어이 없는 건 알지?”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금까지 찾아낸 자료랑 누리 누나가 알아낸 것만 봐도 가능해. 아니, 누리 누나가 보여준 것만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신이라.”
니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라이를 바라보았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게임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에 변화가 생긴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니스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너, 최근에 버트 오프라인에서 만난 게 언제야?”
“어…… 2학기 끝나고 거의 못 보긴 했는데…… 왜?”
“아니,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변한 거 같아.”
“응?”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만나 봐. 나는 왠지 제대로 못 느끼겠어.”
“그게 뭔 소리…… 일단 알았어. 어차피 한 번 만나서 얘기 나눌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더 볼일은 없는 거지?”
“한 가지 더. 지금 베톰 왕국 쪽 정세가 심상치 않아.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둬.”
“준비라면……”
“전쟁.”
라이는 혀를 쯧 찼다.
“이 게임은 허구헌 날 이벤트야.”
“그러게 말이야. 크리스마스에 뭐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거 플래그다.”
“하여간 알아두라고.”
“알았어.”
*
스터그는 묵묵히 버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적으로 씨앗이 심어지고 많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버트는 중간에 몇 번이고 얘기를 순화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녀가 겪어온 일상 중 대부분이 섹스 아니면 그와 유사한 것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도 여왕을 능욕했으니 그런 것들을 걷고 나니 빈틈이 많아졌다.
다행히 스터그는 명석했고 금방 이해했다. 다만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버트가 가진 마신의 힘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런 힘을 쓰는가. 또한 어떻게 신의 씨앗을 품고도 멀쩡한가.
하지만 스터그는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길쭉한 창이 나타났다. 창대와 창날이 일체화가 된 청록색 창. 거대한 옥을 깎아 만든 듯한 그 창은 왠지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버트가 그걸 멍하니 보고 있으니 스터그가 창대로 바닥을 쿵 찍었다. 그러자 신전 전체가 우르르 떨렸다.
“먼 옛날, 나는 이 창으로 신들을 꿰뚫었다. 그 중 하나가 마신 리아주크, 네 뱃속에 있는 근원이자 내게 죄악감을 안겨준 존재다.”
버트는 고개만 끄덕이며 들었다. 하지만 루하다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감정이 서렸다. 스터그는 루하다를 한 번 곁눈질 하며 말했다.
“본래 이 창은 신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신의 건축물의 조형물일 뿐, 신을 죽이는 힘은 없다.”
“그래요……?”
“다만 상징성은 있지.”
스터그는 버트에게 창을 내밀었다. 버트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들었다.
“어떤가.”
“뭔가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그런가.”
스터그는 은은하게 웃었다.
“그걸 부숴라.”
“네?”
“그 창은 마신의 부활에 있어서 변수가 될 거다. 그것만 부순다고 무사할 수는 없을 테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거다.”
“그저 상징성만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 아니에요……?”
“신을 죽일 힘이 없을 뿐, 영향이 없는 건 아니다. 네가 시원하다고 느낀 그 감각은 신의 기운이다. 리아주크가 가진 마기와는 반대되는 영향력이지. 긍정적이고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지는 군요. 그래서 그런 느낌이……”
스터그는 창을 들고 있는 버트의 손을 겹쳐잡았다.
“그리고 이건 속죄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하셨죠? 리아주크를 죽이기도 했다고 말하셨고요.”
스터그는 무심한 눈으로 창을 내려다보았다.
“신들을 죽인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리아주크는 아니었지.”
“어떤 분이셨나요.”
“어떤 분……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스터그는 루하다를 보았다.
“어리고, 단순했지. 순수하고, 직선적이었다.”
“무슨……”
“어이가 없을 테지. 거의 이 대륙을 창조했던 존재가 그렇다니 말이야. 하지만 확실하다. 이 창으로 꿰뚫은 순간 깨닫고 말았다. 내면의 읽어내고 보니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나도 물론이고.”
스터그는 버트를 직시했다.
“우리의 존재는 창조…… 그 이하의 결과물이다.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의 발언은 오묘했다. 루하다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버트는 단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쪽의 눈치는 빨랐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한 순간 버트가 스터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게임…… 말하시는 건가요?”
“……그래.”
스터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버트도 제법 놀란 눈치였다.
게임 속 세상임을 자각한 NPC라니. 버트는 이따금 이 게임이 너무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사람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세계의 흐름, 모든 것이 진짜 같았다. 그래서 사냥은 물론 NPC들조차 쉽게 건드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스터그의 반응을 마주한 순간 그 느낌이 다시 피어올랐다.
“어차피 그들은 모른다. 백신들은 알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부분이 그 사실을 모른다.”
스터그는 애절한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리아주크라는 존재를 죽이고 얻은 건 죄책감과 허탈함뿐이었다. 그의 정체를 깨닫고 죄악감을 얻었고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닫고 허무함만 남았다.”
“그래서 이 창을 주신 건가요? 가슴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요?”
“그래.”
“정말 이걸 부숴도 되는 건가요?”
“그래.”
“좋아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스터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버트는 그 반응을 보고 두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창을 내팽개치고 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시선.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시선. 버트는 스터그의 내면을 훑었다.
가슴 속이 시릴 정도로 끔찍한 공허함이 느껴졌다. 멀쩡한 정신조차 날아갈 아주 끔찍한……
“아……!”
버트가 놀라서 손을 뗐다. 스터그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바라보았다.
“무슨…… 무슨 일을 겪으신 거예요……?”
“별일 없었다. 그저 반대로 생각해보라 하고 싶군.”
“반대로요?”
“만일 네가 사는 세상이 우리와 같은 거라면 어떻게 할 테지?”
“그럴 리가 없”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었지.”
버트는 합죽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가짜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 어떨 거 같나. 내가 죽을 듯이 아꼈던 가족, 그 가족을 죽게 한 신, 신에게 복수하고자 도움을 구했던 드래곤과 백신, 모든 게 허상이란 걸 알게 됐을 때의 기분…… 어떨 거 같나.”
“……참담할 거 같아요.”
“참담하지.”
스터그는 창을 주워 다시 버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 감정을 죽이고 싶다. 그래서 창을 넘기는 거다.”
“하지만 제가 이걸 부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잖아요. 설마…… 자살하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그랬을 거라면 진즉 자결했을 거다.”
“음……”
버트는 고민하다 ‘주머니’에 창을 넣었다.
“그럼 자살은 안 하신다고 했으니까 다시 물어볼게요. 이후에는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다. 그 싸움이 끝나고 은둔했던 것처럼 이대로 조용히 살아갈 거다.”
“……정말 그걸로 되는 건가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데이터’로 보인다.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나.”
버트는 시선을 떨구었다.
“그건 몰라요.”
“뭐?”
“모른다구요. 루하다. 여기서 며칠 정도 더 머물러도 괜찮지? 그 다음에 키런 왕국으로 떠나자.”
“저는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그릇의 뜻대로 하시지요.”
스터그는 멀뚱히 버트를 바라보았다. 버트는 씩씩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의미. 같이 찾아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