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76화 (76/104)

〈 76화 〉 76 ­ 샤킬가의 창 上

* * *

팟­

버트가 로이첸 왕국에서 여왕 케틀라이아를 겁탈하고 있을 때 엔실라는 무사히 대피했다. 그저 몇 번이나 텔레포트를 더 해야 했다는 것 말고 큰 문제는 없었다.

“헉…… 헉……”

엔실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분명 마법은 제대로 쓸 수 있었다. 이전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속박된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가해진 금제 역시 해제되었단 점이었다.

끝없이 솟구치는 힘. 본체로 현신하지 않는 한 쓸 수 없는 마나가 온몸을 맴돌았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지쳐있는 건 이제 막 버트에게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몇 개의 마법을 난사해도 지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마신에 대해 알려야…… 상자를 열어야 해……”

엔실라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가 나타난 곳에는 샤누흐가 기다리고 있었다.

“엔실라?”

“왜? 무슨 일이야?”

“아니 그저 네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어서…… 역시 마신을 만난 거냐? 혹시 붙잡혔다거나……”

샤누흐의 말에 엔실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 의지대로 있었지.”

엔실라는 자기도 모르게 뱉은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샤누흐는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투덜거렸다.

“그런가. 그런 여흥을 할 거면 미리 말해. 너 때문에 멜그라우한테 모욕만 당했어. 게다가 백신이랑 접촉까지 하려 했다고.”

“그 잠탱이는 왜? 그리고 백신?”

“그야 마신의 힘을 느낀 직후에 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으니까. 리아주크 그 놈이 다시 부활한 줄 알았지.”

엔실라는 샤누흐의 추측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마신이 부활했다면 내가 무사히 올 수 있었겠어? 그 전에 백신도 출동했겠지.”

“흠, 그래. 네 말이 맞아. 멜그라우도 같은 소리를 했지. 어쨌든 다행이네. 괜히 상자를 열었으면 창피만 당했겠어.”

“멍청하긴.”

엔실라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그녀는 당황해서 자기 얼굴을 주물렀다.

“어떻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방금까지 상자를 열고 모두에게 마신의 부활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버트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졌다.

자기도 모르게 세뇌라도 당한 걸까? 그게 아니면 무의식 중에 개조라도 당한 걸까?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까드득­

엔실라는 이를 갈았다. 분명 힘을 되찾으면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억지로 적개심을 피어 올리려 해도 소용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엔실라는 고민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드래곤들 중 스스로 외톨이가 된 존재. 드래곤들끼리도 모른 척 하게 된 단 한 마리.

“어이, 샤누흐. 그 놈은 어디서 잠적하고 있지?”

“그 놈? 멜그라우 말이야?”

“아니.”

샤누흐는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다 표정이 급변했다.

“……설마 그 놈을 말하는 거야?”

“그래. 물어볼 게 있어.”

“그딴 새끼 어딨는지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작정하고 숨은 놈이야. 찾을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

“아아, 그래. 굳이 찾을 필요는 없지.”

“이상하긴. 간만에 나가서 논 게 해가 된 거냐? 이렇게 된 거 다시 그 흡혈귀나 혼내주러 가자고. 시건방지게 마신의 부활을 꾀하다니 말이야.”

“그건 혼자 가.”

“엉?”

엔실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쳤어. 가짜 마신 데리고 노느라 진이 다 빠졌단 말이지.”

“쯧, 혼자 놀고 오고 말이야. 백신까지 찾아가려 했던 내가 멍청한 놈이지.”

샤누흐는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엔실라는 마나를 회복하며 숨을 골랐다. 그런 다음 자신이 생각한 존재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일단 서쪽에 없단 건 확실하다. 눈밭? 녀석이 했던 말 중에 추위는 싫다 했던 말도 있었고…… 잠적하려면 어디가 좋을까……?’

엔실라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드래곤을 찾아야만 했다. 그가 마신을 잡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무기가 필요했다.

신을 죽이는 창.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신들을 꿰뚫었던 무구였다. 리아주크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가 가진 창이 필요했다. 그 창에 담긴 힘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마신의 세뇌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엔실라는 회복과 함께 그 드래곤의 존재를 깨닫기 위해 명상에 잠겼다. 샤누흐는 멀리서 그런 엔실라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왠지 모르게 마뜩찮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지금 있는 곳보다 북쪽의 공간…… 대륙의 끝 어딘가에 존재하는 미지의 땅이었다.

*

“흐…… 으으으…… 으으윽……!”

케틀라이아는 허리를 젖히며 발광했다. 그녀의 음부고 항문이고 촉수가 꽂힌 채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새하얀 점액질을 사출했다. 그걸 보며 딜도로 자신의 음부를 찔러대던 버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어디 보자…… 이번이 47번 째…… 아, 두 개가 쌌으니 한 번 더 한 걸로 쳐드릴게요…… 하아……”

버트는 애액에 절은 딜도를 뽑아내며 말했다. 케틀라이아는 눈을 거의 까뒤집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의 배는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앞서 말한 46번의 사정, 괴물들이 싸지르는 정액은 양도 양이었지만 상당히 끈적했다. 그래서 겁탈 당하는 내내 질이나 항문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가장 고역인 건 입으로 삼킬 때였다. 목에 걸려서 기침이 계속 나오고 비릿한 냄새가 역류했다. 게다가 숨을 쉴 때마다 뱃속에서부터 그 냄새가 역류했다.

“자, 그럼 다음.”

버트가 딜도를 휘적이며 말했다. 이번에는 위아래로 성기가 2개 돋아나있는 개였다. 개는 그대로 양쪽 구멍을 찌르려나 싶었는데…… 2개의 성기를 겹쳐 케틀라이아의 질을 꿰뚫었다.

“흐극……! 으으극……! 으극……!”

케틀라이아는 엎어진 채 신음했다. 가슴보다 배가 먼저 바닥과 닿았다. 그 상태로 앞뒤로 흔들어대니 짐볼로 요가를 하는 거 같았다. 그 상태로 개가 올라타서 음경을 찔러대니 항문에서 정액이 풋풋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입에서도 정액을 토해낼 거 같았다.

역한 냄새. 거북한 속. 불쾌한 상황. 끔찍한 느낌. 모든 게 뒤엉키며 케틀라이아를 좀먹었다.

“조금만 더 힘내 보세요. 아직 반이나 남았는 걸요?”

“흐읏…… 흑…… 흐윽……!”

케틀라이아는 버트를 째려보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황이어도 버트의 얄궂은 말을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버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웃기지 마…… 너는 내가 필히…… 처참히 죽일 것이다…… 이 수모는 잊지 않을 것이다……!”

버트는 입을 달싹였다.

당신이 원한 거잖아요?

버트는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손목을 낚아챈 그 순간 흘러들어온 욕망. 그건 무심결에 보았던 내면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케틀라이아가 무슨 짓을 당했고 어떤 걸 원하는지까지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달랐다. 판타지아의 NPC여서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보다 내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성고문이라.’

케틀라이아의 기억 속에서 보인 건 셀기디어의 딸 나탈리아였다. 그녀는 케틀라이아에게 정말 온갖 치욕을 주었다. 지금까지 버트가 겪은 건 간단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비교할 수 있는 건 펠론의 지하에서 있던 일……? 하지만 그건 인질이 잡혔던 것이고 그 외에는 비슷한 것조차 없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떠올리면 개처럼 짖을 때까지 엉덩이를 맞고 소변을 지리게 한 것? 케틀라이아는 결국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 때까지 버티다 필사적으로 짖어댔다. 그 직후 발라당 배를 까며 애교까지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버트는 그녀가 당한 걸 채용하지 않았다. 같은 걸 해봐야 질리기도 하거니와 버트가 눈여겨 본 건 핵심이었다.

케틀라이아의 욕망은 그때의 일과 비슷한 재현이었다. 강자에게 짓눌리고 능욕당하는 것! 그것도 말도 안 되게 수치스럽고 처참하게 짓밟히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성향인 건지, 나탈리에게 당한 뒤로 깨달은 건지 몰라도 꽤나 매니악했다.

대화는 소용없다. 그걸 확신한 버트는 결단을 내렸다. 적어도 왕이 붙잡혀 있으니 허튼 짓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당하고 나면 케틀라이아의 욕망도 잠잠해질 것이고…….

‘수배까지 걸진 않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버트의 생각이 더 미치지 않았단 점이었다.

한 나라의 왕을 굴복시켰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블랙스타가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유폐되었단 사실을 기억했더라면 좀 더 신중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버트는 그 정도로 현명하지 않았다. 인과 관계를 전부 꿰찰 정도로 지략가는 아니었다.

단편적. 즉흥적. 본능적.

다행히 짧은 순간의 임기응변만큼은 발군이었다. 우탄 후작을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게 아니라 검술로 굴복시키거나, 기사들을 전부 제압한 뒤 케틀라이아를 능욕한 점에서는 최고의 효율을 뽑아냈다. 전자든 후자든 다른 방식을 택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 하나는 피를 보거나 계획이 틀어졌을지도 몰랐다.

중간은 완벽했다. 역시 문제는 그 뒤가 없다는 것뿐…… 하지만 이 부분도 걱정은 없었다. 루하다와 함께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혹시 이번 일로 백신들이 오거나 하진 않겠지?’

[ 괜찮습니다. 아드레이 왕국이 공격받을 때도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릇께서 힘을 수련할 때도 마신의 힘은 방출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이 반응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입니다. ]

‘훌륭한 시험대가 되겠네.’

[ 물론입니다. ]

버트는 괴물들을 쓰다듬으며 루하다와 소통을 나누었다. 원래 자신에게 선물된 짐승들. 그때 딱 떠오른 게 아카람 투기장에서 만났던 대머리 히레이즈였다. 그는 나탈리처럼 생물을 개조할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흡혈귀들 전부 권속을 만들거나 마기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개척해냈다.

셀기디어도, 히레이즈도, 나탈리아도, 전부 그런 특이한 경지를 이뤄냈다.

그렇다면 루하다는?

생각해보면 루하다에게 다른 부하는 없었다.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라면 다른 동족이 있으면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버트의 가슴 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흑…… 하윽……!”

그 사이 케틀라이아가 다섯 번의 사정을 견뎌냈다. 그녀는 지치다 못해 실신 직전까지 몰렸다.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못했지만 눈빛은 아직 죽지 않았다. 본능이 쫓는 쾌락과 이성 사이에서 잘도 버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마기에 노출되는 이들 치고 멀쩡히 버티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케틀라이아 역시 버트에게 물들 수 있었다.

그때 루하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릇이시여.”

“응? 왜 그래 루하다?”

“오고 있습니다.”

“벌써?”

“제가 맞이하면 되겠습니까?”

“음……”

두 사람의 대화에 케틀라이아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지원군이 왔다. 분명 케틀라이아가 왕성에 배치한 건 정예가 맞았다. 그들이 순식간에 당하긴 했지만 대군이 온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인질로 잡혀있었다. 이건 최악이었다.

“지원은 오지 않게 했지?”

“예정대로라면 오지 않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지체해봐야 좋지 않을 거란 걸 암시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네. 좋아, 그러면 우리도 준비 하자.”

“네, 알겠습니다.”

루하다는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버트는 케틀라이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들 구하러 왔네요.”

“하아…… 하아…… 날 인질로 잡아봐야…… 달라질 건 없어……”

“알아요. 그래도 여왕님과 달리 대화는 통하겠죠.”

츠르릇­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절대…… 로이첸 왕국은 이런 걸로 무너지지 않흐아아앙……!”

*

“처참하군.”

에이어 공작.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십자가에 걸린 우탄 후작을 보았다. 그의 시퍼런 두 눈은 후작을 응시하며 턱짓했다. 병사들은 그를 조심히 내려주었다.

“상태는 어떻지?”

“무사합니다. 다만 충격이 커서 깨어나지 못하는 듯 합니다.”

“그래.”

공작은 성 쪽을 보았다. 후작이 걸린 곳은 2내성벽. 아직 성벽 하나를 더 뚫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성이 점령당한 것 치고는 잠잠했다. 공작은 손을 들어 성 안쪽을 가리켰다.

“출전하라.”

공작의 명령으로 2백에 이르는 병사들이 성 안으로 향했다. 아직 그의 뒤에는 1천하고도 8백의 병사가 더 남아있었다. 그 외에도 정규군 1만이 호출을 받고 수도로 오고 있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건 관계없었다. 수적 우세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로이첸 왕국의 중심인 수도였다. 고작 몇 명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후작이 깨어나거든 곧장 보고하라.”

“예!”

공작은 근엄하게 말을 이끌고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전투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 생각에 고개를 든 순간 진입한 병사들이 깃발을 올렸다.

점령 완료.

그렇다면 침입자들은 성 쪽에 있을 것이다.

“진군!”

공작은 간단한 말을 남기고 왕성으로 말을 몰았다. 그를 따르는 은빛상어 기사단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푸른고래 왕성기사단에 비하면 힘이 약했다. 하지만 2배에 이르는 숫자와 유기적인 지휘 계통으로 보완했다.

다각­ 다각­

게다가 그들은 해상전만이 아니라 지상전에도 달인이었다. 범용성을 따지면 왕성기사단보다 우위에 있었다.

공작은 진입하는 와중에도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사상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변 건축물이나 지형만 파괴되어 있었다. 간혹 영지군이 아닌 왕국군이 보이기도 했다. 왕성을 점령할 힘이 있는 자가 이렇게 병사들은 놔두었다?

힘에 자신이 있다. 그것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인원으로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지원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공작은 지원이 아닌 진입을 택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인질로 잡혀있는 건 로이첸 왕국의 왕이었다.

콰앙!

그때 멀리서 폭음이 났다. 공작이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작의 눈에 잠시 망설임이 일었다.

“왕을 구하라.”

그는 단호히 말했다. 기사들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공작의 명령이 진리인 것처럼 묵묵히 나아갔다.

철그럭­

왕성 안으로 들어선 공작과 기사들은 말에서 내리고 전진했다.

“흠?”

쉬릭­

쩌억!!

복도를 걷고 있던 공작의 눈앞에 촉수가 날아왔다. 그는 노련하게 몸을 돌려 피하더니 메이스로 촉수를 내리찍었다. 왕성 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막대한 파괴력! 우탄 후작이 노련한 검사라면 공작은 파괴력 넘치는 전사였다.

그는 촉수의 주인을 노려보았다. 꼬리 대신 수 십 가닥의 촉수를 가진 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뒤를 이어 몬스터보다 더 흉악하게 생긴 괴물들이 줄지어 복도를 점령했다.

“상어들이여. 물어뜯어라.”

공작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삿대질했다. 그러자 다섯의 기사가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이어 열다섯의 기사가 뒤를 따랐다. 괴물들이 저마다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거나 이빨이 흉흉한 주둥이를 디밀었다.

츠각­

선두에서 덤벼든 기사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그들은 괴물들의 공격을 유도함과 동시에 회피했다. 심지어 그 공격 유도는 후발주자를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었다. 덕분에 그 뒤를 쫓아온 기사들이 공격 후 빈틈이 생긴 괴물들을 순식간에 도륙할 수 있었다.

철걱­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크에에엑­!!

그러나 몇 녀석들은 질겼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에는 촘촘하게 톱날이 달려 있었다. 여기에 기교와 힘이 더해지면서 조금만 제대로 찔리거나 베인다면 치명적인 상처가 남았다. 그걸 감안해도 버티는 녀석들이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이런 상황 역시 상정해두었다. 처음 공격을 유도했던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한 번 크게 상처를 입은 괴물들은 연이은 공격에 힘없이 쓰러졌다.

스걱­

결국 공작이 알현실 앞까지 가는 동안 방해는 없었다. 기껏 해야 쓰러지고 나서 펄떡대는 시체 정도……

덜컹­

공작은 말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건…… 케틀라이아의 참담한 모습이었다.

“케흑……”

그녀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망가져 있었다. 늘씬하던 배는 빵빵하게 부풀었고 머리부터 발끝가지 새하얀 점액에 절여져 있었다. 힘없이 늘어뜨린 고개와 팔다리…… 그나마 조금씩 꿈틀댄 덕분에 죽지 않았음을 겨우 알았다.

에이어 공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이마와 목에 핏줄이 돋아나고 부릅뜬 눈으로 케틀라이아 곁에 있는 여인을 노려보았다.

“네년의 짓이냐.”

“네.”

버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공작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리쳤다.

“기사들은 밖을 지켜라!”

공작은 메이스를 한 번 휘둘러 괴물의 피를 털어냈다. 그의 두 눈은 버트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왕 폐하. 제 말이 들리십니까!!”

“에이어…… 에이어 공작…… 이냐……”

공작의 우렁찬 목소리에 케틀라이아가 힘없이 말했다. 그 대답조차 머리를 들고 하지 못했다.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런…… 가……”

공작은 케틀라이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했다. 몇 분 간의 정적이 이어지자 공작은 더 기다리지 않고 버트를 보았다.

“지금 이러는 이유라도 있나?”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요?”

“말이라?”

“뒤를 쫓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가.”

“그래서 당신께 부탁해보려고요. 여왕님 다음 권력자시죠? 이분을 놓아드릴 테니 제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마세요. 저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해코지 하지 마시고요.”

“협상하는 건가?”

“부탁이라니까요.”

버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은 잠시 버트를 바라보다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왕님은 죽어요. 다른 짓을 해도 죽어요. 제 말에 동의하는 것 외에 여왕님을 구할 방법은 없어요.”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사방팔방 쓰러져 있는 푸른고래 기사들의 앓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때 케틀라이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포기하고…… 네가 왕위를 이어라.”

케틀라이아에게 후계자는 없었다. 그녀가 없어진다면 당연히 그 뒤를 이을 왕이 있어야 했다.

“그게 당신의 선택입니까?”

“그…… 래…… 협상하지…… 마라…… 받아들이는 순간…… 로이첸은…… 평생 약소국이…… 되는 거야……”

공작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당신을 포기하고 병력을 재정비하는 게 옳은 선택이겠군요. 다른 유언은 없습니까?”

케틀라이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력을 다 쓴 것인지, 그게 아니면 그의 말에 차마 답할 수 없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공작은 버트를 보았다.

“너도 방금 들었으니 알아들었을 테지? 내가 이대로 떠나가면 네 부탁은 무의미해진다.”

“네. 그럴 거 같네요.”

“협상하지 않는다. 그건 제게 왕위를 건네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고집이십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알겠습니다.”

쿵­

“협상하지 않겠습니다.”

공작이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한 건 문이 아닌 버트 쪽이었다.

빠르다!

둔중한 갑옷을 입은 것치고는 상당히 날랜 속도였다. 공작의 돌진을 본 버트는 케틀라이아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내던졌다.

“음?!”

공작은 날아오는 케틀라이아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보였다. 그러다 메이스를 집어던지고 케틀라이아를 받아냈다. 그녀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점액과 냄새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공작은 주춤거리며 케틀라이아를 안자마자 버트를 보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 피하려던 공작은 버트가 꿈쩍하지 않으니 멀뚱히 쳐다보았다.

“대체……?”

“제가 바라는 게 여왕님 목숨도 아니고…… 다들 상상 이상으로 고집불통이어서요.”

버트는 턱짓했다.

“데려가세요. 두 번 다시 쫓아오지도 마시고요.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이건 부탁이에요.”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음.”

버트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쩌엉­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귀에 들린 건 무언가 깨지는 소리였다. 곧이어 그들이 느낀 건 머릿가죽이 뜯길 듯 소름끼치는 기세였다. 한순간 범접할 수 없는 공포가 느껴졌다. 그 영향은 알현실 내부만이 아니라 바깥쪽에도 미쳤다.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 수 십이 게거품을 물며 졸도했고 나머지 기사들은 힘이 쭉 빠져 쓰러졌다.

당연히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푸른고래 기사들은 죄다 기절했다. 케틀라이아는 한순간 눈을 까뒤집을 뻔했으나 입술을 씹으며 버텼다. 에이어 공작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판테스의 국왕조차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던 기운! 버트가 작정하고 뿜어낸 것이었으니 정신력이 약한 이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시겠죠?”

버트는 눈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런 버트의 옆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새파란 머리칼을 흩날리는 장신의 남성. 그는 홀연히 나타나 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 나타난 건 루하다였다. 남자는 무어라 중얼거렸고 버트는 루하다를 슬쩍 밀며 앞으로 나섰다.

공작은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그 짧은 대화 후에 버트가 공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후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

“공작……”

공작은 케틀라이아의 부름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왜 버리지 않았나.”

“해적도 아니고 비열한 방법으로 왕위를 뺏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습구나…… 정말……”

“지금은 쉬십시오.”

“그래……”

케틀라이아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케틀라이아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린 지금은 정신이 픽 나가버렸다.

공작은 그녀를 꽉 붙들고 현장 수습에 나섰다. 커다란 목소리로 기사 몇을 불러 케틀라이아를 보살피게 했다. 그 후 루하다가 난장을 핀 병사들을 확인하고 습격 받은 왕성을 정리해나갔다.

이 소식은 로이첸 왕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드레이 왕국 때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늦었다. 아무래도 약소국에 변방에 있다 보니 이쪽에 주목하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로이첸 왕국이 거병했단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기 폭풍처럼 몰아친 버트의 사고는 이후 태풍이 되어 몰아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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