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75화 (75/104)

〈 75화 〉 75 ­ 로이첸 왕국 下

* * *

타닥­

대낮에 성벽을 뛰어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 검은 머리의 여인은 순식간에 십 여 미터의 성벽을 뛰어올라 위쪽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경계병에게 노출되는 일은 없었다. 평범한 차림으로 검문소 근방까지 와서 벗어난 뒤에 성벽을 타고 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처럼 단숨에 성벽을 타고 오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경계병의 사각지대가 생기는 건 고작 해야 2분…… 성벽 위까지 도달하여 넘어가는데 1분도 걸리지 않았으니 상당한 속도였다.

탓­

‘혹시나 싶었는데 이쪽으로 오길 잘 했네.’

[ 검문이 훨씬 까다로워진 걸 보면 염색만으로는 숨기 어려웠을 듯 합니다. ]

‘그치?’

버트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면서 저 멀리 보이는 왕성을 보았다. 수도 크람스에 있던 왕성과 비교하면 몇 배나 작았다. 심지어 버트나 귀족들이 머물렀던 연회용 건물인 루스타르 궁보다 작았다.

이건 로이첸 왕국의 여왕 케틀라이아가 검소한 게 아니었다.

궁의 크기는 곧 국력! 실제로 최강국 베톰 왕국에서는 왕성만이 아니라 왕태자의 성이 터를 따로 터를 잡을 정도였다.

‘침투는 쉽겠네.’

[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라존 때와 비교하면 훨씬 위험합니다. ]

‘다치겠지?’

[ 그렇습니다. ]

‘그렇구나.’

버트는 싱긋 웃었다.

[ 그래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

‘괜찮아.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길을 걸었다. 곳곳에 들쭉날쭉한 벽돌이 많은 도로……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른 나라의 대도시보다 못한 수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은근히 바람을 타고 오는 바닷냄새…… 정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항구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배도 타보고 싶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샌가 왕성 근방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버트는 몇 가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면돌파. 혹은 설득. 아니면 자수. 지금 자신에게 내려진 수배령을 해결하기 위해 왕과 만나야 했다. 그저 그 과정을 아직 선택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수배를 내린 건지 잘 모르겠어. 정말 태공 씨가 말한대로 납치에 대한 경계 때문이라면 곧장 싸웠을 텐데…… 다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아.’

[ 그래서 고민 중인 겁니까? ]

‘응. 이대로 싸워야 할지, 그게 아니면 대화로 풀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

[ 때때로 단순하게 생각한 게 정답입니다. 평소처럼 깊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그렇구나, 평소처럼.’

버트는 루하다의 말에 대답하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루하다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버트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따 봐.’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머리색을 붉은색으로 되돌렸다. 그녀가 성큼 다가오니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보다 창을 세웠다. 그들 중 내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병사 하나는 다급하게 안으로 달려갔다.

“정지! 체포에 응해라!”

버트는 그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우선 그녀가 왕국군을 피해다닌 건 살인의 촉감이 싫어서만이 아니었다.

감옥 시스템. 그녀가 게임을 하고 있는 이상 시스템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이 붙잡힌 순간 델폰 남작에게 잡혔을 때처럼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특히 지금처럼 감각이 살아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경계해야 했다.

잡히지 않기 위해 가장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된 것이다.

츠르륵­

버트는 마기를 사용하려다 말고 힘을 거두었다. 어차피 들킨 상황에서 이걸 쓰나 안 쓰나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마기를 써서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팟­

굳이 마기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뭐, 뭐­”

병사는 버트가 달려온다 싶어 창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거센 바람이 자신을 지나는 것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내부에서 긴급하게 종을 울리고 있었다.

“마력방해장을 펼쳐라!!”

“내부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 포위망을 만들어!”

“대포 준비! 궁병들도 제자리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케틀라이아의 명령으로 내부 침입을 대비한 명령하달도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버트가 아주 빠른 속도로 왕성까지 들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버트는 견제조차 없는 상태에서 왕성으로 침투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알현실이다. 그곳에서 모든 걸 준비하고 기다린다 생각했다.

……그게 멋지지 않던가. 물론 전략적으로 자기 땅에서 가장 넓은 곳에서 병력을 총동원하는 것이 맞았지만…… 버트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타탓­

버트가 알현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작살을 들고 있는 기사들이 도열한 채 왕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호수에서 벌어진 거대한 마력 파동. 네가 한 일인가?”

“거기에서 온 건 저지만…… 제가 한 건 아니에요.”

“말장난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아뇨.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궁금해서요.”

케틀라이아는 심드렁한 얼굴로 버트를 보았다.

“국격 때문이다. 너를 포섭하거나 죽인다. 그걸로 일전에 있었던 납치를 상쇄할 수 있다.”

“……그럴 리가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대로 도망치면 끝까지 따라오실 테죠?”

“물론.”

“그럼 저항할게요.”

버트는 그렇게 말하고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나름 한 나라의 기사들이고 정예였다. 그러나 버트의 움직임은 섣불리 반응할 수 없었다. 선두의 기사들이 작살을 내지르려는 순간 어느 새 그들을 지나쳐 다음 대열에 도달했다.

팍!

버트의 두 손이 기사 두 명의 가슴팍에 닿았다. 버트는 그대로 기사 둘을 앞으로 내던지며 다시 내달렸다.

2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기사 대열의 절반을 주파했다. 이 엄청난 기세에 놀란 건지 기둥과 천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이 다급히 나섰다. 그들은 암기를 뿌리며 버트의 경로를 방해했다. 심지어 도망갈 곳까지 예측한 투척이었다.

버트의 눈이 오른쪽, 위, 아래, 왼쪽을 보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버트의 오른발이 가볍게 땅을 찍었다.

파핫­

“어?”

“헙!?”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버트가 갑자기 사라져서 얼빠진 반응. 다른 하나는 사라졌던 버트가 다시 나타나 경악하는 반응. 버트는 자신이 지나온 거리를 순식간에 되돌아갔다. 기사 대열의 초입으로 돌아갔던 버트는 이번에 지그재그로 전진했다. 워낙 빠르기도 하거니와 한순간 기세를 잡아버리니 기사들과 요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츠팟­

“막아라!!”

버트가 케틀라이아의 앞에 도달하기까지 14초. 한 나라의 왕이 방비한 것 치고는 빈약했다.

차캉!

그런 버트를 막은 건 우탄 후작이었다. 그의 시미터가 묵직하게 버트를 노렸고 버트는 마기를 피워낸 손으로 검을 쳐냈다. 그 직후 후작이 휘두른 검격을 피하며 거리를 살짝 벌렸다.

차악­

“후우­”

버트는 후작을 노려보며 그 건너의 케틀라이아를 보았다. 아직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을 되돌릴 수 없었다. 버트는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거두니 검은 불길이 넘실거리며 검의 형태를 취했다. 버트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후작을 겨누었다. 후작은 그녀의 도발을 지켜보며 꿈쩍하지 않았다.

……

……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 버트와 후작의 대치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그만큼 긴장되고 집중을 요하는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흐트러지는 순간 위험했다. 그래서 기습조차 할 수 없는 그때……

챵­!!

두 사람의 검이 부딪쳤다. 그저 눈 한 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귀청이 떨어지는 금속음과 검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다!

버트는 말도 안 되게 빨랐지만 우탄 후작 역시 그에 반응했다. 괜히 지상군을 총괄하는 게 아니었다.

챙강! 챠캉! 챙!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정작 검을 부딪친 횟수는 손에 꼽았다.

허수, 변수, 노림수.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검무. 검이 아슬하게 스칠지언정 불필요한 부딪침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 세 발짝도 걸음을 내딛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검을 다루는 솜씨며 힘조절이 경지에 이르렀단 소리였다.

차캉!

검이 부딪칠 때는 서로의 지척에서. 위험한 공격을 막을 때 뿐이었다.

챙!

카강!

바람을 가르는 소리. 속도가 그만큼 빠르기도 했지만 검에 담긴 힘도 상당했다. 기사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검풍.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다. 바람에 잘린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그만한 위력의 검을 정면에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샤학­

극렬한 대치. 하지만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우탄 후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검이 교차하는 순간 팔을 당긴 뒤 버트의 목젖을 노리고 찔렀다.

스프링처럼 쏘아진 찌르기! 여러 번의 공수 교대로 잠깐의 틈을 찾아낸 뒤에 벌인 기습!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공격 방법이었기에 허를 찌르기엔 충분했다. 그의 노력한 일격은 눈 깜빡할 사이에 틈을 파고들었다.

캉­

그러나 후작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 보인 건 가슴에서 솟구친 여러 가닥의 검은 촉수였다. 그것들이 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버트는 검을 겨누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후작은 그녀의 두 눈을 보고 천천히 손을 뗐다.

탱그렁­

검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버트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검을 그림자로 돌려놓고 후작을 지나쳤다.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을 치면 끝인가요?”

“그렇겠지.”

케틀라이아는 덤덤하게 말했다. 버트는 그녀의 대답에 후작을 돌아보았다. 멀리서 주춤거리는 기사들도 보았다.

“지금이라도 제 말을 믿어주시면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런 식의 동정으로 살아난다고 하여 내 자존심이 살아날 거 같나? 우습군. 오히려 그런 거래가 나를 추락시키는 것이다. 살아 있어봐야 왕권만 실추될 뿐이다.”

케틀라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움직였다.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찌르기까지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왕들과는 달리 빠르고 예리한 공격이었다. 그것이 후작을 꺾은 버트에게 통하지 않는단 게 문제였다.

탁­

버트의 두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버트는 후작의 모든 공격에 반응하고 자신의 손목과 팔 힘만으로 억지로 끼워 맞췄다. 이 정도 공격에 당하진 않았다.

버트는 케틀라이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덤덤한 얼굴이 되어 입술을 달싹였다. 케틀라이아는 그것이 마법 영창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지금 이곳에는 강력한 마력 방해장이 펼쳐져 있었다. 11성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원활하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설사 쓴다고 해도 그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버트는 뭔가 중얼거리다 말고 말없이 케틀라이아를 보았다.

“생각대로 되지 않았나 보군? 마법은 꿈도 꾸지 마라. 네가 무엇을 하려든 불가능할 것일 테니.”

케틀라이아는 후작의 검이 그림자에 잡히는 걸 보지 못했다. 버트가 입술을 달싹인 건 루하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좋아요, 죽이지 않을게요. 위해를 끼쳐봐야 제게 좋을 것도 없으니…… 물러날게요.”

버트는 손목을 놓아주었다. 케틀라이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고 있다가 한 발 물러났다.

“무슨 꿍꿍이지? 이래 봐야 나는 너를 쫓을 것이다. 처분하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눈총을 받을 걸 알아요. 그걸 모를 정도로 깊게 고민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버트는 유달리 마지막 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버트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몸에서 흘러넘치는 마기.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끈적한 기운이 순식간에 왕성 내부를 잠식했다.

“처벌해, 루하다.”

버트의 그림자가 퍼져나갔다. 벨벳 바닥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케틀라이아가 당황하는 그 사이 그림자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늑대 머리를 한 전갈이나 독수리 머리를 달고 있는 날개 달린 사자…… 팔이 3쌍인 고릴라, 인간의 상반신을 달고 있는 말…… 비대하게 부푼 무당벌레……!

괴물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사람만한 것에서부터 4미터는 되보임직한 덩치도 있었다. 여러 괴물이 나타나 케틀라이아를 감쌌다. 그걸 본 기사들이 주춤거렸고 우탄 후작은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여왕 폐하를 구하라!!”

후작은 떨어진 검에 몸을 날렸다.

츠르륵­

하지만 그림자에서 솟아난 검은 머리의 미중년 루하다가 검을 지그시 밟아버렸다.

“얌전히 있어라. 이건 벌이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벌……?”

후작은 고개를 삐걱 돌렸다. 기사들이 오지 않았다. 그들이 여전히 압도되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목 끝에 닿은 검은 가시 때문이었다. 루하다는 한쪽 팔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괴물들이 몇 마리 물러났다.

“무슨…… 짓을……”

케틀라이아는 옷이 찢겨져 알몸이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음에도 아직 팽팽한 피부에 충분히 단련하여 탱탱한 몸이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케틀라이아는 팔다리로 몸을 가릴 수도 없었다. 팔이 여럿 달린 고릴라가 그녀의 팔을 붙들고 다리를 벌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그 자리의 모두가 케틀라이의 알몸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땀을 살짝 머금어 반짝이는 피부. 해업을 일상으로 하는 나라의 여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뽀얀 피부였다. 단련된 몸은 사지도 쭉쭉 뻗고 근육도 잘 붙어서 늘어진 살이 없었다.

아름답다. 과연 여왕이라는 직위에 걸맞는 기품이었다. 한순간 넋을 놓고 보게 될 정도로 훌륭했다.

“놔라!! 이딴 식으로 능욕할 거라면 그냥 죽여라!!”

버트는 유달리 푹신푹신한 독수리 머리 사자의 등에 나른하게 앉았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휘적였다.

쯔컥­

고릴라의 커다란 손이 케틀라이아의 가랑이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웬만한 남성기보다 두터운 손가락이 그녀의 음부를 꿰뚫었다. 케틀라이아는 크게 뜬 눈으로 아랫도리를 보았다. 손가락이 질을 들쑤시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비명 아닌 비명이 터졌다.

“아으윽……! 아흐악……!! 놔라……! 놓으란……!”

케틀라이아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빠지진 않았다. 손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기사들과 가신이 보는 앞에서 능욕 당한다니……! 차라리 이 침입자에게 목숨을 잃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쯔국­ 쯔국­

고릴라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질을 쑤셨다. 케틀라이아는 뱃속을 긁어대는 두터운 손가락에 숨이 막혔다. 구멍을 벌리고 들어온 이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뱃속을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이걸 드러낼 수 없었다.

능욕 당하며 느낀다? 그것도 짐승에게 당하면서?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왕족을 능멸해서 건질 게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하악……! 흑……! 이래봐야 달라질 건 없다……!”

케틀라이아가 말하는 중에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버트는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케틀라이아는 그녀의 시선에 짜증이 확 솟구쳐 소리쳤다.

“최소한……! 말을 할 땐……! 읏……! 멈춰라……! 제대로 말을…… 아흑……!”

“제가 왜요?”

버트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애초에 멈춰줄 생각이었다면 이런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케틀라이아는 입술을 깨물며 버트를 노려보았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을까요? 아무리 자기 명예가 걸려있다지만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데 이미 거기서 끝이죠.”

쯔컥­ 쯔컥­

“그…… 으윽…… 으윽……!”

버트는 눈웃음 지었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지목했다. 턱이 비대하게 발달한 들개였다. 녀석은 혀를 빼물고 헐떡이다 케틀라이아에게 다가갔다. 고릴라는 그녀의 음부를 쑤시다 갑자기 바닥에 엎어뜨렸다.

“무, 무슨…… 뭘 하려는­”

케틀라이아는 고개를 들려다 고릴라에게 머리를 짓눌렸다. 간신히 목을 틀어 뒤를 보니…… 들개가 팔뚝만한 생식기를 발기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곳곳에 돌기가 가득하여 흉악하기 그지없는 짐승의 성기를 본 순간 케틀라이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녀석이 앞발을 들어 엉덩이에 손을 댔을 때 케틀라이아는 비명을 질렀다.

“멈춰라…… 멈춰! 멈추란 말이다­!! 난 로이첸 왕국의 여왕이다! 이대로 능욕 당하여 죽을 바에는 내가 직접 목숨을 끊겠다!!”

케틀라이아는 그렇게 소리치며 혀를 깨물었다. 그러자 고릴라가 그녀의 턱을 붙들고 볼을 찍어 눌렀다. 억지로 혀를 씹으려던 케틀라이아는 고릴라의 악력에 못 이겨 입을 벌렸다. 그런 케틀라이아의 입에 촉수가 틀어 박혔다. 근처에서 보고 있던 원숭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미끈하고 축축한 건 여왕의 입을 점액으로 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숨 정도는 쉴 수 있었지만 혀를 깨물기는 힘들어보였다.

크르륵­

들개는 우는 소리를 내며 음부에 음경을 맞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음경을 밀어 넣었다. 음경은 꽤나 신축성이 있는지 조금 뭉개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케틀라이의 질 안에 파고 들었다. 들개는 삽입이 어느 정도 되니 곧장 허리를 흔들며 섹스를 시작했다.

두터운 음경. 곳곳에 가득한 돌기가 질 주름 사이사이를 긁어댔다. 케틀라이아는 눈을 까뒤집으며 실성한 소리를 냈다. 입에서는 촉수들이 아슬아슬하게 목젖 근처를 건드리거나 혀를 엮어대며 농락하고 있었다. 아랫도리에서는 자궁이 짓눌릴 정도로 터프한 섹스가 벌어졌다.

도저히 여체로는 견디기 어려운 능욕이었다. 숨이 절로 막히는 성고문은 모두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왕 폐하……!”

우탄 후작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러다 뭔가를 결심한 듯 출구 쪽을 보았다. 그리고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루하다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움직이는 순간 여기 인간들은 전부 죽는다.”

그의 서늘한 경고는 결코 어쭙잖은 위협이 아니었다. 후작은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 전부가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었다. 분명 왕과 신하의 관계였지만 무조건적인 충성은 없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목숨이 중요했고 경이로운 힘 앞에서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들어라. 푸른고래의 기사들이여. 이미 한 번 폐하를 놓친 적이 있지 않았나.”

후작의 나직한 목소리는 케틀라이아를 겁탈하는 소리를 뚫고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너희가 인질로 잡힌다한들 나는 증원 요청을 하러 갈 것이다. 내 다리가 잘리고 너희의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시도할 것이다.”

후작의 말에 기사들 중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직감하고 눈물을 흘렸다.

“폐하께서 더 심한 꼴을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텐가? 그게 아니면 조금이라도 저항할 텐가? 그것도 아니면…… 희생할 것인가?”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 루하다를 보았다. 그러다 다시 한 번 기사들을 보았다.

“가십시오.”

누군가 말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도 가시는 게 맞습니다.”

“개죽음은 아니길 바랍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십시오!!”

기사들의 외침은 전염되었다. 그들의 의지는 모두에게 번져갔다.

“여왕 폐하를 위해!!”

후작은 앞으로 달렸다. 그걸 본 루하다가 손을 휘둘렀다.

“루하다.”

그때 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작은 그 틈에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하다는 그림자를 뻗다 말고 멈추었다. 기사들 대부분 가시가 턱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루하다는 버트를 보았다. 버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릇께서 원하시는 대로.”

“관중이 있는 게 좋잖아, 그렇지? 그래야 이 사람도 자기 잘못을 알 테고.”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여긴 나한테 맡겨.”

버트는 사자 위에서 깡총 내려왔다.

“루하다는 밖에 정리 좀 해줘.”

“알겠습니다.”

루하다는 손을 뻗고 가볍게 당겼다. 그러자 기사들의 턱을 겨눈 가시들이 걷어졌다. 루하다는 버트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버트는 뒷짐을 지고 기사들을 보았다.

“뭐하고 계세요?”

버트는 뒤에서 능욕 당하는 케틀라이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구하셔야죠?”

“여왕 폐하를 위해!!”

“으아아아­!!”

그들은 떨어진 무기를 수습하고 버트에게 덤벼들었다.

*

후작은 다급하게 달려나갔다. 그의 등장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우탄 후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에이어 공작님께 연락해라!! 지금 당장 지원을 요청해!! 폐하께서 인질로 잡혀계신다!!”

“예? 그게 무슨­”

“서둘러라!! 텔레포트 게이트도 작동시켜라!”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니 다급히 연락을 넣었다. 우탄 후작은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게이트를 작동시키던 마법사들은 잠시 후작을 지켜보았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후작님? 목적지는 어디로……”

“곧장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지?”

“키런 왕국입니다. 마나를 더 충전하면 판테스나 살리마도 갈 수 있습니다만……”

“키런 왕국으ㄹ”

스칵­

그 순간 게이트가 반토막 났다. 후작은 경악하며 뒤를 보았다. 마법사들은 다급하게 주문을 영창했지만 그림자에 붙잡혀 내던져졌다.

“네놈……”

“내부에서의 증원은 허락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안 된다.”

“뭐……?”

“그리고 그때까지 너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루하다가 손을 뻗었다. 후작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렀다. 그러자 그림자 여러 가닥이 허공을 휘어감았다.

“대체 목적이 무엇이냐!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목적?”

루하다는 후작을 지긋이 바라보다 코웃음쳤다.

“모르겠군.”

“뭐……?”

“그릇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구태여 알 필요가 있나?”

촤락­

“나는 그 분을 모시는 추종자이자 그림자, 추앙하는 집사요, 섬기는 신하이자 기능 좋은 도구이다.”

루하다는 후작을 단숨에 포박했다.

“그저 그릇의 뜻대로.”

*

20분 후.

“왔어, 루하다?”

“예. 일단 처분하지 않고 내부의 모든 이동 수단을 처분했습니다. 아마 1시간 내로 병력이 도착할 듯 합니다.”

루하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버트는 멱살을 잡고 있던 기사를 내려두고 방긋 웃었다.

“고생했어. 쉬고 있을래?”

“괜찮습니다. 다른 도움이 필요하신지?”

“으음, 어디 보자……”

버트는 사방팔방 쓰러진 기사들을 보다 케틀라이아를 보았다. 그녀는 들개에게 한 번 겁탈당한 뒤여서 그런지 힘겹게 숨을 고르며 늘어지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에서는 들개가 쏟아낸 정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긴 한데 그건 나중에 물어볼게.”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얘네들은……?”

버트는 괴물들을 가리켰다. 하나 같이 애무나 섹스에 최적화된 짐승들이었다. 정력은 물론이거니와 섬세한 움직임이나 과격한 힘 등 모든 것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건 몇 괴물들을 건드려보며 알게 되었다.

“선물 받았습니다. 셀기디어의 딸이 만든 실험체랑 적당히 섞은 것도 있습니다.”

“아하…… 뭐, 이런 걸 쓸 날도 있구나. 아!”

버트는 뭔가 생각났단 듯이 ‘주머니’를 열었다. 큐엘에게서 선물 받은 성인기구들. 원래는 엔실라에게 써보려 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아쉬운 김에 다른 사람에게 써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딱 기회가 온 거 같았다.

“어디 보자…… 이런 쪽은 좋아하실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 전에……”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케틀라이아에게 다가갔다. 케틀라이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괴물들에게 붙잡혔다. 버트는 방긋 웃으며 턱짓했다. 그러자 케틀라이아의 몸이 앞으로 쭉 숙여졌다.

“어때요? 발이라도 핥으면 용서해드릴 수 있는데.”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발 한쪽을 내밀었다. 그러자 케틀라이아가 버트를 노려보더니 발끝을 콱 물어버렸다. 버트는 옅게 미소 지으며 쓰러진 기사들 쪽을 보았다.

“저기 계신 분들이 100명은 안 돼요. 그러니까 한 가지 내기 하실래요?”

버트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기 있는 애들이 여왕님한테 사정할 거예요. 그걸 버틴 횟수만큼 저분들을 살려드릴게요.”

“뭐……?”

“그러니 잘 버텨봐요.”

버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괴물 중 하나가 케틀라이아게 삽입했다. 버트는 그런 케틀라이아를 보며 딜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음부를 쑤셔댔다. 케틀라이아가 능욕당하는 모습을 보며 공개적인 자위를 시작한 것이다.

루하다는 그런 버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쳐들어 올 로이첸 왕국의 군대를 맞이할 준비도 끝마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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