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4 로이첸 왕국 中
* * *
“당장 찾아내!”
케틀라이아 폰 로이첸. 그녀는 여섯 왕국 중 유일한 여왕이자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리스마가 없거나 유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드러커스의 미로에 납치당하는 순간에도 의연했다.
하지만 무사한 건 아니었다. 그들이 각 나라의 수장을 납치한 건 인질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예우를 갖춘 건 아니었다.
감옥. 거기에서 표적이 된 건 케틀라이아였다. 어째선지 나이가 들었지만 그녀 못지않게 꿋꿋했던 키런의 왕 바틸카스는 외면 받았다. 덕분에 케틀라이아는 상당히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골드로츠가 바틸카스를 무사히 구할 수 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케틀라이아가 다른 곳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동안 바틸카스는 감옥에 감금 당했다.
‘찾아내야 한다.’
케틀라이아는 거의 발작하다시피 반응했다. 그녀는 아직까지 납치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정을 살피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건 아니었지만 대규모 마법 반응에는 집착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다.
‘나에게도 힘이 있었더라면……!’
로이첸 왕국은 약소국이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무시할 정도로 약한 건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의 나라였다. 비록 나라 하나가 교단에게 집어삼켜졌고 로이첸 왕국 역시 그럴 수 있다지만 그걸 제외하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시당했다. 존엄이 짓밟히고 철저히 망가졌다. 인질로서의 대우는 없이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소름이 끼쳤다. 온몸이 부들거리면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영상 통신으로 보았던 존재.’
스카이 왕국의 침범을 막았던 자.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설마 스카이의 왕이 엄청난 존재의 비호를 받을 줄 몰랐다. 베톰 왕국은 원래부터 강했기에 언급할 가치가 없다. 살리마 왕국은 유일무이한 마법사의 나라이기에 당연했다.
하지만 판테스 왕국은?
그 점이 케틀라이아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녀가 납치당해서 모진 일을 당하는 동안 판테스 국왕은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 잡기 위해 나섰다. 듣자 하니 블랙스타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는 건 판테스 역시 엄청난 배경을 둔 셈이었다.
‘반드시 내 걸로 만들어야 해!’
케틀라이아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마법을 쓴 존재. 그 자를 찾아내어 데려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한 케틀라이아는 신호가 감지되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생사 구분 없이 포획하라.
로이첸 왕국은 단숨에 전시 상황으로 돌아섰다. 당연히 다른 귀족들의 반발도 있었다. 하지만 여섯 왕국 중에서 가장 젊은 왕인 케틀라이아가 왕위를 차지한 이유가 있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도저히 젋은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터프함이 귀족들을 찍어 눌렀다. 로이첸 왕국은 가장 온화한 나라였다. 그런만큼 역대 왕들도 그 성격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강인했고 강렬했다. 강직하고 강력했다. 그렇게 강권을 얻고 해상업에 진출했다. 그렇게 로이첸 왕국은 해상 무역만이 아니라 바다 자체를 주름잡는 국가가 되었다. 약소국이라고는 하나 해상 전력에서만큼은 베톰 왕국조차 혀를 내두른다는 게 전체적인 평이었다.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걸 우리의 힘으로 만들지 못하면 끝장이라 생각해라!”
케틀라이아의 호령에 신하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원래 왕의 허락 없이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됐다. 그렇지만 그걸 떠나서 그녀의 터프함은 모든 행동을 억제해버렸다.
그야말로 군주의 면모! 피식자들 위에 군림하는 육식동물이었다.
“현재 가른 낚시터에서부터 시작해 그 주변을 전부 포위했습니다. 증원 요청도 하였으니 잡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잡을 수 있다가 아니다. 잡아 와야 한다.”
“물론입니다.”
보고를 올리던 기사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나할 백작이 베톰 왕국과의 수교에 차질이 있다고 하여……”
“그 건은 직접 보고 받지. 지금은 이 건이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케틀라이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기사는 보고를 끝내고 물러났고 곁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군총괄자 우탄 후작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베톰 왕국과의 수교입니다. 그걸 먼저 우선시함이 어떠실는지요.”
“우탄 후작. 내가 지상군과 해상군을 나눈 건 그대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예……?”
“납치된 걸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 후의 대처를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갑자기 시작된 말에 우탄 후작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내가 그걸 찾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걸 생각하면 무엇을 우선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답을 찾기 전까지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명에 토달지 마라. 알았나?”
“알겠습니다, 폐하.”
“수색대에 2천 더 증원하라. 필요하다면 마법사도 차출해.”
“알겠습니다.”
우탄 후작은 곧장 통신을 넣었다. 그때 연락용 통신 구슬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비상 신호. 그걸 확인한 우탄 후작은 곧장 케틀라이아에게 말했다.
“폐하, 수상한 자를 찾았습니다.”
“그럼 당장 잡아오지 않고 뭐하는 거지?”
“빠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순식간에 포위 진지 셋을 뚫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몇 미터 간격으로 설치했지?”
“50미터입니다.”
“잡아라! 그것이 확실하다! 그걸 포섭해야 앞으로 있을 변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 와! 죽일 수 있다면 우리 나라의 국력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잡아와서 포섭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
“예! 상비군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투입하겠습니다.”
우탄 후작은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로이첸 왕국은 때 아닌 병사들의 움직임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세간에서는 갑작스러운 병력 이동에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했다. 그게 아니면 대규모 전투, 혹은 기습적인 시련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지금 이 사달은 한 명의 여인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
‘빽빽하네.’
버트는 나무 위에 숨어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로이첸 왕국의 병사들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약소국이란 이름에 맞지 않게 적당한 무장에 훈련도 그럭저럭 되어 있었다. 판테스 왕국군과 비교하면 약했지만 적어도 나라 하나를 이루는 군세였다. 작정하고 짠 포위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어딜 보아도 서너 명씩 짝 지은 병사들이 있거나 이동식 초소가 세워져 길을 막고 있었다.
[ 전부 처분하시겠습니까? ]
처분. 그 말에 버트는 손을 움찔거렸다.
‘괜찮아. 굳이 일을 크게 벌리고 싶지 않아.’
루하다는 구태여 더 권유하지 않았다. 버트가 할 수는 있지만 그냥 넘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고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는 것이니 한 달 이상은 걸릴 겁니다. ]
‘역시 오래 걸리는 건 좀 그렇지……?’
[ 그릇께서 스트레스를 받으실 겁니다. 사나흘 정도면 괜찮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긴장하고 있으면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
‘아하하, 그러게. 피부 트러블도 생기겠다.’
버트는 실없이 웃으며 앞을 보았다.
‘가까운 텔레포트 게이트로 가보는 건 어떨까?’
[ 그쪽에도 검문이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마법사가 잘못 날리면 큰일입니다. 그 드래곤이 벌인 짓을 생각해보면 더 먼 곳으로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
‘역시 강행돌파 뿐일까.’
[ 반드시 사상자가 나올 겁니다. 저항을 할 게 뻔하고요. ]
‘으음.’
[ 베톰 왕국에서 상대했던 암조직들과는 규모가 다릅니다. 하나의 국가인만큼 그 수준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
‘확실히 그렇겠지? 음’
버트는 루하다의 대답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도망친 곳의 반대 방향이었다. 그녀가 지나온 곳에 비하면 경계가 비교적 널널했다.
‘그렇다면…… 안으로 가볼래?’
[ 안쪽으로 말인가요? ]
‘바깥쪽 경계가 심하니까. 허를 찌르는 거지.’
[ 직접 공략하시겠단 말씀이시군요. ]
버트는 결심한 듯 돌아섰다. 루하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베톰 왕국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동시에 할 일이 있었을 뿐, 지금처럼 버트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떠넘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렇게 숨어 다녔지. 두근거리네.’
브루트 서클. 지하도시 라존을 지배하는 암조직 중 가장 강력한 폭력 단체. 당연히 그 두목인 자이든에게 도달하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기척을 숨기고 빈틈을 파고 든다! 잠입 액션을 벌이면서 제법 고생 좀 했다. 정작 보스인 자이든과 만났을 때는 손쉽게 제압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장소도 훨씬 넓어지고 병력도 치밀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버트도 그만큼 성장했다.
샤샥
발소리를 죽이는 건 기본이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넘기도 했고 몸에서 그림자를 뿜어내어 지형지물에 붙어 날아다니기도 했다. 비교적 포위망이 약한 내부이다 보니 이런 짓을 해도 거의 들키지 않았다.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잘못 본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사람이 날아다닌다니. 아직 이 게임에서는 몬스터 외에는 비행체가 없었다. 기껏 해야 마법사 정도겠지만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는 마법사가 이런 소국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탓
숲을 지나 마을 근방에 도달했다. 그곳에도 병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검문만 하고 있었다. 버트의 생각대로 대부분의 병력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가두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방향은 어때?’
[ 확인해보겠습니다. ]
버트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를 스물 정도 세었을 때 루하다가 답을 물어왔다.
[ 우측으로 살짝 틀어 직진 하시면 됩니다. 마을 다섯 개 정도 지나서 멀리 성벽이 보일 겁니다. ]
‘고마워.’
버트는 자기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러자 적발이었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었다. 복장도 모험가가 입을 법한 어두운 가죽 방어구 차림새가 되었다. 이렇게 하니 영락없이 리아의 모습과 똑같아졌다.
버트는 정말 뻔뻔스럽게 그 상태로 검문을 지나갔다. 그런 뒤 다음 마을까지 빠르게 내달렸다.
‘생각 외로 잘 먹혔네.’
[ 다행입니다. ]
‘리아가 루하다처럼 잘 돌아온다면 양동 작전을 해도 됐을 텐데. 아쉬워.’
[ 안전이 최우선이니 괜찮습니다. ]
‘히히.’
쐐액
버트는 작정하고 힘을 주어 내달렸다. 다리에 온 힘을 주며 숨이 차오를 때까지,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하니 상상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됐다. 행인 한 명이 멀리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쯤, 바람과 함께 지나칠 정도였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단순한 육체 능력으로 그녀를 이길 사람은 없을 듯 했다.
그렇게 성벽이 보이는 거리까지 도달할 때까지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로이첸 왕국의 수도 근방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케틀라이아의 분노였다. 하루가 지나도 어떤 연락이 없으니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부 대기한다.”
케틀라이아의 명령에 도열한 병사들이 고개만 꾸벅였다. 그들 손에는 커다란 작살이 쥐여져 있었다.
일명 푸른고래 기사단!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작살이었다. 일반적인 창도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투창이었다. 기사라기에는 격식이나 품위가 없었다. 중무장에 비교하면 상당히 동떨어진 무기였다. 대신 그들에게는 박력이 있었다. 단순히 작살을 던지는 실력만이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이 힘을 쓰지 못한 건 워낙 삽시간에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가 그런 식으로 왕을 납치할까. 약소국인 걸 떠나서 누구도 그걸 대비하지 못했다. 저마다 운이 좋거나 상황이 들어맞았을 뿐, 모두가 한 방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케틀라이아는 작정하고 대비했다. 자신이 붙잡으려는 대상이 성으로 올 것조차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성의 주둔군은 1천. 국군은 그보다 많았지만 전부 포위망을 형성하여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푸른고래 기사단 백 여 명과 궁중 마법사 스물, 암암리에 조직 중인 첩보 및 비밀 조직도 다섯 개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곳곳에 공성 병기와 함정도 깔아두었다. 만일을 대비해 마법도 뒤틀어버릴 거대 마력장도 발동시킬 수 있었다.
케틀라이아는 나름 자신 있었다. 그 의문의 존재가 도망치든 정면돌파를 하든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납치했던 노스페라투 기사가 다시 쳐들어와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틀 째에도 소식이 없다면 내부로 포위망을 좁힌다. 그 후에는 전 병력을 소집하여 출동시킨다.”
그녀의 명령에 우탄 후작이 발언했다.
“하오나 폐하, 그건 전시 체제 이상의 대응입니다. 타국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아드레이 왕국 건을 내세우고 대응했다고 하면 된다. 그런 식으로 내정 간섭을 하려 한다면 병력 지원도 요청해볼만 하겠군.”
“타국의 병력을 들이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이 근방 지형은 우리가 더 잘 안다. 여차하면 그들을 방패로 내세우면 돼. 병력을 내준 걸로 생색을 낸다면 그들이 활약하지 못한 걸 꼬집으면 된다. 배상을 요청한다면 우리 병력을 기준으로 지불하면 될 터, 배상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하든 안 하든 손해는 아니다.”
우탄 후작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역시 그 녀석을 포섭하는 게 우선이다.”
“이런 식이면 반항하지 않겠습니까?”
“그 녀석이 이모탈이라면 직위를 내릴 것이다. 그것들이 귀족이 되려고 안달내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모탈이 아니라면 갑작스럽게 그런 강자가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흥을 나온 초월적인 존재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은거기인일 테지. 전자라면 가벼운 놀이라고 생각할 테고 후자의 경우 혹독한 가르침이라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설득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우탄 후작, 그대는 주어진 일에만 집중해라.”
“예, 알겠습니다.”
케틀라이아는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반드시 잡는다. 그 존재를 죽이든, 포섭하든 결과를 내야만 했다.
그래야 그녀의 무너진 자존심을 되돌릴 수 있었다.
*
“정말 깔끔하군.”
퀵스. 그는 아드레이 왕국에서부터 버트를 뒤쫓았다. 타이밍이 좀 늦었지만 그래도 꽁무늬는 잘 물었다. 그래서 버트가 습격을 받고 엔실라에 의해 날아갔던 그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처음 콴타르의 길에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일주일이 지나도 못찾았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가 치밀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뒤를 쫓고 있단 걸 알고 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도발인가.”
퀵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흔적을 남기면서 완전히 쫓을 수 있는 단서는 남기지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추격자를 도발하는 꼴이었다. 혹여 아드레이 왕국과의 인연으로 자신을 갖고 있는 거라면 당장 무너뜨려줄 생각이었다.
그가 소속된 벌떼도 마냥 약한 조직은 아니었다. 한 나라에 대항할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견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습격을 받고 다급히 달아났다…… 텔레포트 외에는 탈출 수단이 없어. 그런데 이 근방에 마력방해 장치가 있다. 그러면……”
“어? 당신 뭐야.”
그때 누군가 퀵스에게 말을 붙였다. 퀵스는 본능적으로 단검을 품고 일어났다.
“워, 진정해. 쿠쿠랑 동종업자인 거 같은데 그거 루팅 안 하는 게 좋아.”
그에게 말을 걸어온 건 블랙잭이었다. 그의 정체를 모르는 퀵스는 경계하는 눈치로 무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거기 시체랑 템 중에는 내꺼도 있어. 자꾸 그러면 나도 무력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블랙잭은 그렇게 말하며 몽둥이를 꺼냈다. 퀵스는 그의 말에 주춤하더니 단검을 놓고 두 손을 들어보였다.
“네것도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그건 모르겠지만 일단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다들 악명 하나는 자자하거든. 쿠쿠, 못 들어봤어? 그 왜, 밥솥 말고 있잖아.”
“쿠쿠…… 설마 아이템 강탈자……?”
정보를 만졌던 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판타지아에서 PK 전과가 있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네임드가 된 플레이어면 말 다한 셈이다.
“잘 아네. 그럼 그 녀석이랑 어울려서 일한 놈들이 어떨 거 같아?”
“음……”
“그러니 물러나라 한 거야. 지금은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겼지만 안 그랬으면 머리가 먼저 깨졌을 거야. 조심하라고.”
“……고맙군.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엉?”
블랙잭은 퀵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야, 까마귀인 줄 알았더니 뻐꾸기였어? 이것 참, 나도 감 많이 죽었네. 어쩌다 여기까지 정보를 물러온 거야? 역시 다른 상행을 습격한 거 때문인가.”
까마귀와 뻐꾸기. 그건 아는 사람들이나 아는 은어였다. 까마귀는 방금 블랙잭이 오해한 것처럼 시체를 뒤져 아이템을 찾는 사람을, 뻐꾸기는 정보를 캐는 사람을 뜻했다. 어찌 보면 정확했지만 그는 다른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퀵스는 그걸 놓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버트를 쫓는 일이었다.
“아니, 내 목적은 블랙 남작의 가신뿐이다.”
“너도? 아하, 너도 그림자를 쫓는 별에 의뢰를 받았구나?”
의뢰?
퀵스는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블랙 남작은 그림자를 쫓는 별과 긴밀한 관계로 알고 있었다. 설사 내부에서 갈등이 있다고 해도 귀족의 가신이었다. 쉽게 건드릴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쟁에서 밀려나거나 깊은 원한이 있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표적이 될 이유가 없었다.
퀵스는 일단 사실대로 밝히기로 했다. 또한 그와 거래를 하기 위해 의문점을 제시했다.
“그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쫓고 있는 거라서…… 그보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가신을 살해하란 의뢰를 내렸다고?”
“아, 이건 비밀이었나. 이런, 플레이어라서 입막음도 안 되잖아.”
“아니, 조금 이상해서 말이지. 그거 정말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준 의뢰인가?”
“엉?”
블랙잭은 그 질문에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괜히 혼란을 줄 생각하지 마. 이쪽은 말이야, 그 유명한 인간사냥꾼 코노야로도 있다고.”
“……그저 의아할 뿐이다. 분명 그쪽 조직은 이제 막 파벌 싸움이 끝난 걸로 알고 있거든. 그런 상황에서 귀족 가신이 처분 대상인 점이 이상해서 말이지.”
“어, 엉? 파벌 싸움?”
“그래. 정보 조직의 특성상 물갈이까진 아니어도 구조 조정은 필수적이지. 그러니 아무래도 내부에서도 바쁘고 겨를이 없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한 때 대륙 최고의 이슈였던 귀족의 신경을 건드릴 필요가 있나 싶어.”
퀵스의 의문에 블랙잭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일개 가신을 치우는 것치고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블랙 남작이라는 브랜드를 떠나서 말이 안 되는 금액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 퀵스에게 직접 얘기를 들은 것만큼 의구심이 들진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밝혀두지만 나는 벌떼 소속 정보원이다. 지금 정보망을 떠나온 지 어느 정도 됐단 걸 감안해도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미친……”
블랙잭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 기다려봐. 다른 녀석들도 같이 얘기를 들어봐야겠어.”
“그 전에 어디로 갔는지부터 얘기해줄 수 있나?”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몰라. 그 여자랑 싸우다 순식간에 죽어버렸거든. 아마 전부 죽은 모양이야.”
“혹시 이상한 힘을 쓰지 않았나? 검은 기사 리실버 말이야.”
“엉? 무슨 소리야……? 검은 기사라니. 우리가 그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
퀵스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블랙잭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종기사한테 당했지 뭐. 우리야 그년이 그리 셀 줄 알았나.”
“종기사? 종기사라면…… 혹시 종기사 버트?”
“그래, 맞아. 검은 기사는 없었어.”
“그 여자가 당신이랑 다른 사람들까지 죽였다고?”
“어어, 그래.”
퀵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블랙 남작 실버트리, 검은 기사 리실버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종기사 버트.
어찌하여 이런 변수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퀵스의 머릿속을 스치는 가정이 있었다.
“운영자인가……?”
“엉?”
“그게 아니면 치트나 불법 프로그램을 통해서……”
퀵스가 여러 가정을 내리는 사이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를 알아본 건 블랙잭이었다.
“코노야로! 너도 당한 거냐?”
“아니. 저 사람은?”
코노야로. 그는 무심한 얼굴로 퀵스를 턱짓했다.
“별 건 아니고…… 아니, 별 거는 별 거지. 이봐, 그림자를 쫓는 별이 우리 통수 쳤을 수도 있는 거 같아.”
“알고 있다.”
“엉?”
“응?”
블랙잭은 물론 퀵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코노야로는 덤덤하게 말하더니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내게 그 얘기를 해준 사람이 있다. 앞서 온 녀석들도 기다리고 있으니 따라와라.”
“뭐……? 나보다 먼저 온 녀석들이 있어? 부활 시간 제멋대로인 버그 아직도 안 고친 건가.”
“……너도 따라올 거냐?”
코노야로는 퀵스에게 물었다. 퀵스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식사 중이니 가지.”
“식사? 음, 우리 중에 독 좀 쓰는 녀석 있지 않았나.”
“헛소리를……”
그렇게 코노야로를 따라 가다 보니 괜찮은 평지가 나타났다. 이 험한 곳에서 보기 드문 좋은 야영지. 하지만 누구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쓰러진 나무. 거대한 발톱이 할퀸 것처럼 생긴 상흔. 마지막으로 꽁꽁 묶여 나뒹구는 사람 몇 명.
“벌써 한바탕 했나 보군.”
“젊은이들이 늙다리 심심할까봐 배려해준 모양이더군.”
단정한 갈색 머리칼의 중년 사내가 말했다. 분명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며, 옷 아래로도 알 수 있는 튼튼한 근육은 결코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블랙잭은 자신의 동료였던 자들이 묶여있는 걸 보며 침을 삼켰다.
“혼자 제압한 건가?”
“갑자기 덤벼들지 뭔가. 이거 참, 난처하기 그지없어.”
느긋한 사내의 반응과는 달리 퀵스만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이람 백작?”
“오, 이런. 정보통이 있었나? 이모탈이라 살인멸구도 안 되고 난처하군.”
“대체 당신이 왜 살아있는 거지……?”
“가이람 백작이라고?”
“뭐야, 누군데?”
코노야로는 누군지 알아챈 눈치였고 블랙잭은 모르는 듯 했다.
“지금은 그냥 휴트라고 불러줬으면 하는 군. 대외적으로는 죽은 몸이니 말이야.”
“……검을 쓰지 않아 몰랐군. 이런 거물이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대체…… 무슨 일이……”
퀵스가 당황하는 사이 휴트는 블랙잭과 퀵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준 의뢰, 그건 가짜다. 내부의 파벌 싸움에서 밀려난 녀석들의 마지막 발악이지. 아마 그 짓거리를 했다가는 역으로 그곳의 눈총을 받을 거다.”
“정말이었군.”
블랙잭은 놀란 얼굴로 퀵스를 보았다. 그 다음 코노야로를 보았다.
“그래서 그걸 알려주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의리 하나는 끝내주네.”
“아니, 중요한 이야기는 다음이다. 일단 들어봐라.”
“그래, 중요하지.”
휴트는 한 호흡 쉬고 말했다.
“사람 몇 명 잡아줘야겠다.”
“누구? 그보다 겨우 그 일로 우리를 붙든 거야?”
“그렇지. 겨우 그런 일로 부른 거지.”
“표적은?”
“운영자.”
“……뭐?”
“운영자라고 불리는 놈들을 잡아주면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