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73화 (73/104)

〈 73화 〉 73 ­ 로이첸 왕국 上

* * *

엔실라는 기회를 엿보았다. 타이밍 좋게 습격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버트에게 굴복했을지 몰랐다. 무심코 마법 주문을 외던 엔실라는 자신에게 가해진 금제가 풀린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자마자 다급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문제는 엔실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단 점. 그리고 텔레포트(순간이동)는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고 해도 대충 계산하면 큰일난다는 점. 경황없이 외워진 엔실라의 주문은 PK범들의 마법 훼방이 더해지면서 잘못된 좌표를 설정했다.

팟­

텔레포트는 발휘됐다. 문제는 엔실라만 이동한 게 아니었다. 버트와 루하다 역시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

풍덩­

버트는 코노야로를 죽이기 직전 갑자기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한참 허우적대던 버트는 누군가 뒤에서 안아주자 단숨에 진정했다. 루하다였다. 그는 버트가 버둥거리지 않게 뒤에서 한 번 안아준 후에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버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게 보이는 넓은 물이었다. 그게 호수란 걸 알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너무 넓었다. 당장 바닥도 보이지 않았고 물 밖에 나와서도 주변에 떠다니는 배가 시야를 방해했다.

“여긴……”

“뭐야, 텔레포트 사고야?”

“새로운 다이빙 아닐까.”

버트는 첨벙거리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일단 헤엄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때 무언가 그녀의 옷가지를 낚아챘다.

“아­!”

버트는 그대로 허공으로 당겨올려졌고 어느 나룻배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야야……”

“그렇게 물장구 치면 물고기들이 달아나, 아가씨.”

그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얼굴이나 목에 난 주름을 빼면 눈빛이나 자세는 늙은 티가 나지 않았다. 무심코 주름이 많은 아저씨라 생각할 정도였다.

“아, 네…… 죄송합니다.”

“어디 급하게 도망치다 여기로 왔나 보구만.”

버트는 항상 경무장 상태였다. 그말인 즉, 초심자일 때의 장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한 듯 싶었다.

“네? 아, 네…… 비슷해요.”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낚싯대를 드리웠다. 버트는 뭔가 더 말할 거 같은데 하지 않으니 얌전히 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1시간…… 버트는 나룻배에 앉아 주변 경치나 보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배의 움직임. 찰랑대는 물결. 은근히 따스한 햇볕과 조금씩 풍겨오는 물비린내. 잔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불과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습격했던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극과 극. 반대되는 상황이 삽시간에 이어지니 머리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좀 진정됐나?”

노인은 1시간 째 움직이지 않는 낚싯대를 잡으며 말했다. 노인 역시 버트처럼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물고기가 안 잡히는 듯 했다.

“네, 조금은요.”

“뭔일 있었나?”

“어, 음…… 그러니까……”

버트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시작했다. 대략 아드레이 왕국에서 키런 왕국으로 향하는 사이 마차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전했다. 처음 보는 데다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말이 편하게 술술 흘러나왔다.

노인은 그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구만. 도적이라기엔 이상했고 말이지?”

“네.”

“그럼 PK범들이겠구만. 왕왕 그런 놈들이 있지. 사람 잡는 걸 좋아하는 것들 말이야. 템들도 전부 잃은 건가?”

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노인은 버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이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심자를 건드리다니. 혹시 닉네임은 알고 있나? 아니, 작정하고 저지른 걸 테니 이름도 모르겠구만. 용모파기는?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는 알고 있어?”

“한 명은 조금 얍삽하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요. 잘 기억이 안 나요.”

버트의 대답에 노인은 심각한 얼굴로 낚싯대 끝을 노려보았다.

“하긴. 정신이 없었을 테지. 얼굴 볼 시간이 어딨겠어. 같은 플레이어가 대뜸 칼부림을 했으니 당황스러웠을 테지.”

버트는 차마 나머지는 죽여서 모르겠단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지만 그걸 풀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거기서 마음이나 추스르고 있어. 때가 되면 알아서 배에서 내려줄 테니까.”

“네.”

버트는 고분고분 대답하고 루하다를 불렀다.

[ 어떻게 된 일이야? ]

[ 붙잡았던 드래곤이 사고를 쳤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마법이 시작되기도 했고 시체인 척 하는데 집중 하느라 대처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 루하다, 생각보다 연기에 진심이구나……? ]

[ ……죄송합니다. ]

[ 그보다 엔실라가 결국 도망쳤단 거지? ]

[ 네. ]

버트는 뭔가 삐친 듯한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생각한 것보다 더 큰 호수. 그 위에서 종종 돌아다니는 작은 배들을 보았다.

[ ……화나셨습니까? ]

[ 루하다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

[ 죄송합니다. 마력 파장이 워낙 하찮아서 경계를 게을리 했습니다. ]

[ 아니야. 어차피 그런 쪽은 페이니가 특기랬잖아. 괜찮아. ]

버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노인이 말을 붙였다.

“괜찮아진 거 같구만. 오늘 낚시는 일찍 접어야겠어.”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노를 잡았다. 그가 노를 젓기 시작하니 버트는 빈 양동이가 눈에 들어왔다.

“한 마리도 못 잡으셨는데 괜찮으세요?”

“애초에 물고기를 잡으러 온 게 아니야.”

노인은 옆에 내려둔 낚싯대를 턱짓했다. 그러고 보니 낚시 바늘이 있어야 할 곳에는 추밖에 없었다. 혹시 이런 식의 낚시도 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물고기가 달아난다고 그런 말을 하셨어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낚시를 하니 그렇지.”

버트는 주변을 보았다. 확실히 낚시를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배를 타고 나와서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멀리 호숫가에 드리워진 낚싯대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험험. 아무튼 어디 쫓기는 신세면 당분간은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 마세.”

“할아버지가요……?”

버트는 갑자기 블랙스타의 교주 퍼드롬이 떠올랐다.

“뭐, 낚싯대만 쥔다고 약해보이나?”

“그건 아니지만……”

“민폐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 나도 그런 놈들에게 데인 적이 있었으니까. 뭐, 필요하다면 템도 지원해주마.”

“앗, 네 감사합니다.”

버트는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오래 게임을 했지만 금전 감각은 여전히 미비했다. 그나마 페이니를 통해서 물가를 어느 정도 알게 됐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어느 템이 좋고 안 좋고까지 분별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최악의 게이머였다. 평소 세영과 동혁과 함께 게임할 때를 생각하면 이런 플레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즐겁게 하고 있었다. 아이템이나 골드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목적을 세우고 그것을 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최고의 게이머였다.

“그래, 친추라도 하는 건 어때.”

“아, 좋아요. 버트라고 해요.”

“버트. 젊은 친구들은 영어 이름을 참 좋아해. 아님 프랑스어인가?”

“영어…… 맞을 거예요. 할아버지는요?”

“태공이다. 강태공 길드의 길마지.”

“자기 이름으로 길드를 만드신 거예요?”

태공은 묘한 눈으로 버트를 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푸르륵 떨면서 한숨을 쉬더니 실소했다.

“그래. 너도 길드에 들련?”

“아뇨…… 아직 길드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렇구만.”

태공은 무엇 때문인지 기분이 상한 듯 했다. 옛날에는 어땠고, 그냥 일반 PC로 게임하던 시절이 좋았다는 둥, 잔뜩 토라졌다. 버트는 그 모습을 보며 숨죽여 웃었다.

“길드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길드는 기억해둘게요. 그러니까…… 엄…… 태공 씨……?”

“그냥 태공이라고 부르면 된다. 낯간지럽게 태공 씨는 무슨 태공 씨람.”

그래도 그렇게 부르는 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할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보다 안색이 확연히 밝아졌다.

“헤헤, 태공 씨도 누가 도와준 적이 있나요?”

“응?”

“갑자기 이렇게 도와주셔서…… 예전에 그런 적이 있나 싶어서요.”

“도와주었다라.”

태공은 마른 멸치처럼 뻗친 수염을 쓰다듬었다.

“비슷한 일은 있었지만 결과는 다르지. 그 일 때문에 게임도 접을 뻔했고 말이야.”

“아……”

“뭐, 그래서 나처럼 접을 뻔했던 친구들을 못 본 척 하기 좀 그렇더라고.”

퉁­

배는 호숫가에 닿았다. 태공은 낚싯대를 어깨에 걸치고 배에서 내렸다. 그의 쭈글쭈글한 손이 버트를 향해 내밀어졌다. 버트는 그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다. 태공은 별다른 말없이 앞장 섰다. 버트도 그런 태공의 뒤를 따라갔다.

“날씨가 참 좋아. 낚싯대를 드리우기 좋은 날이지.”

“그러게요. 되게 조용하고…… 잔잔하네요.”

호숫가에서 멀어지는 데도 바람 소리뿐이었다. 사람들 전부 조용히 낚시를 하거나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서 로이첸 왕국이 휴양지로 손꼽히는 거야. 그 중에서도 여기 가른 낚시터가 제일이지.”

“그렇군요.”

버트는 무심결에 대답하고 태공을 보았다.

“로이첸 왕국이요?”

“응? 그래, 로이첸 앙국. 가른 낚시터 말고도 사니아 모래사장이란 곳도 있는 데 거기서 낚시하는 맛도 끝내주지.”

“아, 아니 그러니까…… 로이첸 왕국이면 동쪽 끝에 있는 나라 맞죠? 키런 왕국보다 더……”

“이잉, 그렇지. 갑자기 그건 왜? 혹시 키런 왕국에서라도 온 거야?”

“아,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헤헤……”

“시덥잖긴.”

태공은 혀를 찼다.

“그나저나 요 근방에 긴급 텔레포트를 타야 할 장소가 있었나? 호수 근방은 주기적으로 왕국군이 돌 텐데……”

태공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국가 내의 텔레포트는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면 된다. 그 비용조차도 무겁긴 했지만 국가간 텔레포트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물며 그만한 수준의 텔레포트를 쓰려면 게이트를 이용해야 했다. 게이트 근방에서 다급히 도망쳐 온 거라면 전쟁이라도 나야 했다. 그게 아니면 고위 마법사란 소리인데……

뭐가 됐든 절대 PK범한테서 도망치는 초심자가 쓸 게 아니었다. 태공의 연륜은 겉모습만큼이나 상당했다. 버트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

버트는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사실을 말해야 하나 싶었다.

“그럼 본래 목적지는 키런 왕국이냐?”

“네.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게 있어서 가던 중이었어요.”

“뭐, 기사라도 되려는 건가. 이모탈 중 최초로 백작위를 받은 녀석이 있다지. 나 참, 누구는 유유자적하게 낚시나 하는 동안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 다니다니 말이야.”

태공은 버트를 힐긋 보았다.

“뭐든 말하기 싫은 비밀이 있는 법이지. 다른 사정이 있을 테니 더 캐묻지 않으마.”

태공은 그렇게 말하더니 버트 너머를 보았다. 그의 두 눈이 가늘게 떠지며 어딘가를 보았다. 버트는 그의 시선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감각이 태공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처지지 않았다. 호숫가에서 들리는 소란…… 그게 누군가를 찾는 움직임이란 걸 알았을 때 태공이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이지, 이 나라도 미쳐 돌아간다니까. 큰 마법을 쓸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예……? 예? 아, 네.”

“뉴비는 아닌 거 같으니 미리 묻지. 아드레이 왕국이 또 전쟁을 치르려는 건 아니겠지?”

버트는 태공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대답은 해주었다.

“네. 제가 알기로는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구만. 그러면 이번 텔레포트는 사고이고…… 저번처럼 왕을 납치하려는 흡혈귀들의 수작질도 아니란 소리겠군.”

“왕을 납치해요?”

버트는 드러커스의 미로에만 있어서 전후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셀기디어가 전쟁을 선포했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판테스의 왕은 납치당한 적이 없으니 더더욱 알기 어려웠다.

“엥? 너 아드레이 왕국에서 온 게 아니었어? 아이고, 아님 이제 막 복귀한 올드비인가. 판타지아 정세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태공은 다급히 걸으면서도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들의 속도는 어느 샌가 보통 사람보다 빨라졌다.

“드러커스 미로 전쟁에도 참여 했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왕들 납치한 사건을 몰라? 애초에 방금 말한 이모탈 백작이 왜 백작위를 받았는데. 납치된 왕을 구해서 그런 거 아니야.”

“아~”

버트는 그런 쪽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지금 블랙 남작은 페이니가 이어 받은 수준이었다. 귀족과 관련된 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나마 관심을 보인 게 자신의 땅에서 영지를 꾸린다는 것 정도……? 심지어 그것도 페이니가 관리하고 있었지만…….

“하여간 그것 때문에 마력 파장이 큰 이동을 경계하고 있어. 그것도 당연하지. 납치된 건 키런과 로이첸의 왕 둘 뿐이고 심지어 하나는 도중에 구해졌지만 남은 하나는 아니었거든.”

태공은 혀를 끌끌 찼다. 어느 정도 소리가 잦아들 쯤에는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래서 홀로 돌아갔지. 얼마나 처참하겠어. 왕국에서 병사를 보내긴 했는데 키런 쪽처럼 직접 구하러 온 녀석들은 없었어. 인재가 없었단 말이야, 인재가.”

“뭔가 불쌍하네요.”

“그 결과 뭔가 순간이동한다 싶으면 학을 떼지. 언제 또 납치 당할지 모르고. 이번에 납치 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버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키런 왕국으로 향하는 거냐?”

“네. 기사가 되려는 건 아니고…… 찾을 아이템이 있어요.”

“오, 혹시 세트 템을 모으는 거냐?”

“어, 네. 어떻게 아셨어요?”

“크흐흐, 이 게임에서 템 찾는 거라면 돈 될 거, 아니면 스펙 높일 거 뿐이지. 키런 왕국에 돈 될 게 어디 있겠어. 그렇다면 남은 건 스펙 올리기 뿐이지. 그래, 무슨 세트냐?”

“밤…… 세트요.”

“밤 세트? 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으으음…… 밤, 밤이라…… 비슷한 걸 들어본 적은 있어. ‘그림자’나 ‘죽음’, ‘암흑’ 세트 정도인데…… 밤 세트…… 으음, 역시 모르겠군.”

“제 친구도 들어본 적은 없다 했어요. 아마 새로 추가된 게 아닐까요?”

버트는 밤 세트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능청스레 넘어갔다. 태공도 그 부분은 납득했는지 별달리 캐묻지 않았다.

“세트 아이템이라…… 나도 그걸 모으겠다고 웬만큼 고생했지. 마지막 하나가 그렇게 모이지 않던데 말이야. 너는 얼마나 남았지?”

“둘이요. 이제 2개 남았어요.”

“세상에. 몇 개 남았는지까지 써있다고?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내가 게임에 바친 세월이 얼만데 말이야. 이런 파릇파릇한 젊은이에게 기회가 넝쿨 째 굴러 오는 구만.”

“……헤헤, 죄송해요.”

“죄송하긴 뭘. 그만큼 노력을 했겠지.”

차마 그렇다고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기회가 스스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어쨌든 힘내. 나처럼 다음 단서에서 헤매지 않기를 빈다.”

“감사합니다.”

“쩝…… 그럼 가기 전에 미리 악수나 한 번 하지. 몇 없는 마스터가 될 친구인데 말이야.”

“네? 아, 네.”

버트는 그가 내민 손을 보며 주춤거렸다. 그러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한 번의 악수. 태공은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냥 기분 탓으로 넘겼다. 반면 버트는 뭔가를 고민하다 한 마디 했다.

“꼭 찾기를 바랄게요.”

“응? 그래, 고맙다. 근데 그게 쉽지는 않아. 새로운 걸 한 마리 낚아 보라는데 거 참. 판타지아의 모든 물고기를 낚아 봤는데 무슨 조건인지 모르겠어. 인어라도 잡아야 하는 건지.”

“그래서 바늘 없이 낚시 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럼. 뭐, 그래도 이 참에 다시 한 번 해봐야겠어. 다 털린 친구도 지금 계속 하려는데 다 갖춘 내가 그만둘 수는 없잖아. 안 그래?”

태공은 버트를 훑어보며 말했다. 버트는 멋쩍게 웃었다.

“꼭…… 찾을 거예요.”

“그래, 고맙다. 그러니 서둘러 떠나라. 지금 지체하면 큰일나니까.”

“네, 알겠습니다.”

버트는 태공의 말에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태공은 방금 버트가 떨어졌던 호수 쪽을 보았다.

‘노가다라도 해봐야 하나.’

태공은 베타테스터까진 아니어도 상당한 노장 게이머였다. 외견을 늙게 만들긴 했지만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게임 쪽에는 빠삭했고 나름대로 파악한 상태였다.

세트 아이템의 단서. 마지막인지 또 다음이 있을지 모르는 세트 아이템 수색.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태공은 말없이 호숫가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게임도 좋아했고 낚시도 좋아했다. 그래서 둘 다 즐기기 위해 판타지아를 하고 있었다. 나름 현실감이 있어서 즐거웠다. 슬슬 무료해졌다. 작은 낚싯대로 고래를 낚아 올리기도 했고 몬스터를 낚아 낚싯대로 잡기도 했다.

핑­

“엉?”

그때 손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태공은 흠칫 놀라 낚싯대를 쥐었다.

그가 물길을 파악해보니 절대 호숫가에는 월척이 잡히지 않았다. 기껏 해야 송사리 정도여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낚싯대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태공은 순간 가슴이 뛰었다. 손아귀에 전해지는 진동. 낚싯대를 통해 느껴지는 낚싯감의 활력!

이제까지 무료함에 빠져 있고 있었던 두근거림이 살아났다.

파다닥­

태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나 클까. 그의 기억 상 이런 곳에서 이만한 힘을 가진 낚싯감은 없었다.

혹시 신규 몬스터?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인어라도 낚인 걸까?

촤악­

물고기는 태공과의 밀고 당기기를 버티지 못하고 하늘로 튀어올랐다. 태공은 그렇게 낚아올린 물고기를 보았다.

“어?”

태공은 당황했다. 그냥 평범한 물고기였다. 방금 손맛을 느낄 정도로 월척인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뭔가 이상했다.

“방금 그건……”

태공이 방금 느낀 손맛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 사실적이었다. 실제로 낚시도 해본 경험상 그건 진짜와 같았다.

*

손. 분명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베었을 때의 느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딴딴하고 질긴 걸 갈랐을 때의 그 느낌…… 판테스 왕국의 수도 크람스로 향할 때 만났던 도적을 베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패닉에 빠졌지만 지금은 차분하단 점이었다.

[ 그릇이시여. ]

“아, 응.”

버트는 루하다의 부름에 무심코 대답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기에 혼잣말을 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 신경 쓰이십니까? ]

버트는 태공을 떠나오고 계속 자기 손을 보고 있었다. 태공과의 악수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PK범들과의 싸움이 신경 쓰인 건진 몰랐다. 그래서 루하다는 주어를 생략하고 물었다.

“조금.”

버트는 자기 손을 쥐었다 폈다.

“쇼크사 하진 않았을 거야. 그때 잡았던 사람들도, 태공 씨도. 그건 분명해.”

버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뭔가 느껴져. 마기를 쓰면 쓸수록…… 뭐랄까, 상대에 대한 게 느껴져. 방금 그 할아버지도 그렇고, 그 전에 만났던 암살자들도 그렇고.”

[ 무엇이 느껴졌습니까? ]

“……욕망.”

버트는 숲 저 먼 곳을 보았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어떻게 되고 싶은 건지, 왜 그러는 건지…… 조금씩 느껴졌어.”

[ 그렇습니까. ]

“응. 그래서 태공 씨한테 시험해본 거야.”

[ 가차 없군요. 위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아니, 위험하지 않아.”

버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셔터 킴 아저씨도, 태공 씨도, 위험하지 않아.”

이유를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하다는 그러지 않았다.

[ 다행입니다. 그러면 그릇의 지인은 어떻습니까? ]

루하다는 니스를 언급했다. 그러자 버트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걸 잘 모르겠어. 분명 위험했을 거 같은데…… 너무 즐겁게 하고 있더라. 그래서 차마 묻지 못했어.”

[ 지금은 괜찮다는 말씀이시군요. ]

“응. 지금은 괜찮아. 그건 확실해. 그래도 역시 물어보는 건 못하겠어. 왠지…… 지금 물어보면 안될 거 같아.”

[ 두 사람이 괜찮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입니까? ]

“아? 그건 아니야.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니스는 아니거든.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거 같아서.”

버트는 니스의 의중을 거의 꿰뚫어 보고 있었다. 특히 니스가 휴트(가이람 백작)와 있었던 일은 버트에게조차 숨기는 일이었다. 물론 철저한 계산이 아닌 본능으로 알아낸 우연일 뿐이었다.

[ 그렇군요. ]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을래. 걔를 믿고 있으니까. 아마 반대 상황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정말 위험하다면 구하러 올 테고…… 나도 구하러 갈 거야. 그게 아니니까 괜찮은 거고.”

버트는 배시시 웃었다.

“아무튼 이거, 운명이라고 생각해.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마기가 주는 힘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도 전부 알겠어.”

[ 괜찮으신가요. ]

“응? 괜찮냐니?”

[ 말씀 하시는 데 느껴지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자괴감……? 그 비슷한 게 느껴집니다. ]

“아니, 아무래도 그렇잖아. 마기가 욕망에 반응한다는 건 씨앗이 심어질 때부터 나한테 욕망이 있었단 거잖아.”

루하다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 괜찮아. 현실에서의 나든, 게임에서의 나든 전부 나니까.”

[ 저도 괜찮습니다. 그릇이 어떤 상태든 좋아하니까요. ]

“헤헤­”

버트는 키런 왕국 방향으로 향하며 바보처럼 웃었다.

“키런 왕국에 도착해서 밤 세트를 찾고…… 그 다음 엔실라를 찾아보자. 마지막 세트 아이템은 그 다음에 찾고.”

[ 알겠습니다. ]

*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왕국을 벗어나려던 버트는 곳곳에 배치된 병사들에게 발목이 잡혔다. 경무장한 병사들은 버트를 보자마자 제지했다.

“어디에서 오는 길입니까?”

“아, 낚시터에서 낚시하고 오는 길이에요.”

버트는 가른 낚시터라는 명칭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출입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네?”

버트는 당황했다가 아차 싶었다.

“아, 그거요? 제가 낚시를 하다 잃어버려서요.”

“그렇습니까? 그럼 발급 받은 지역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하~”

버트는 눈을 데굴 굴렸다.

“혹시 누군가를 수배 중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협조해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속도가 워낙 빨라 순간 병사들이 대응하지 못했다.

“당장 전서구와 통신망 연결해!!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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