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72화 (72/104)

〈 72화 〉 72 ­ 콴타르의 길 下

* * *

“이런 씨발! 설마 저런 곳을 택할 줄은 몰랐다고!!”

누군가 울분에 가득 차 소리쳤다. 버트가 리아와 함께 엔실라를 녹이는 동안 버트를 노리는 사냥꾼들은 다급히 장소를 옮기고 있었다. 최악의 가정, 설마 버트가 그런 쪽으로 향할 줄 몰랐다. 여행을 하는 사람이 가기에는 말도 안 되는 경로였다.

“일단 전리품부터 챙겨.”

코노야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지휘했다.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반박하거나 하지 않았다. PK 쪽에 있어서는 그가 베테랑이고 실력자였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 역시 눈칫밥이 있었다.

그들이 사냥한 건 작은 규모의 상단과 일부 플레이어였다. 그들은 몬스터들의 공습에 버티지 못하고 전멸한 상단을 갈무리 하고 있었다. 단순히 교역품에서부터 옷가지 등 가져갈 수 있는 건 전부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가져간 건 몬스터를 유도했던 사람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이었다.

처분할 때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몬스터를 이용하여 약탈하는 특성은 특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뒤를 쫓길 확률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장물 처분에 전문인 쪽이 있었다.

“옷가지는 그냥 둬, 내가 할 테니까. 최대한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걸 가져갔다는 것만 어필해야 해.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이지.”

아이템 강탈자 쿠쿠. 그는 마차에 붙은 주요 부품마저 감별했다. 그저 단순히 떼가는 게 아니라 몬스터들에게 파손될만한 부분을 추려냈다. 마차 부품과 시체 옷가지에서 가져갈 수 있는 걸 전부 가져간 뒤에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이렇게 해야 흔적을 찾아오지 않는다. 몬스터들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는 작업이었다.

“근데 정말 잘 만든 게임이란 말이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백정이라 불리는 우스터는 시체를 뒤지는 쿠쿠에게 말했다. 쿠쿠는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야 이렇게 사실적인 게 또 있을까 싶어서. 지금까지 나왔던 가상 현실 게임 중에서는 이게 탑이잖아.”

“그렇긴 하지.”

“어찌나 소름이 끼치는지, 나 처음 PK할 때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니까.”

“……그런 인간이 백정이란 소리를 듣고 있구만.”

“파하하하~ 필터 끼지. 그리고 뭣보다 이것들 데이터잖아. 실제 사람을 잡는 게 아니고. 그것도 구분 못하면 그게 싸패지 뭐.”

“그렇게 정신 멀쩡한 인간이 PK나 하고 있어?”

쿠쿠는 시체에서 건진 패물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스트레스 해소지. 게임이 원래 그렇잖아.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하는 거지.”

“너는 그게 PK고? 그럼 NPC는 왜 잡는 건데?”

“글쎄, 그냥 직장 동료가 자주 들르는 마을이었을 뿐이야.”

“싸이코구만.”

“그러는 너는?”

“나야 아이템 루팅하는 재미에 맛들였을 뿐이야. 내가 봤을 때 판타지아로 법 개정한다는 게 오바는 아닌 거 같다. 당신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맘대로 생각하라고. 그냥 공감이나 얻어 볼까 해서 말 붙였더니 말이야~”

“무섭네 그거. 그럼 저 녀석한테 하지 그래.”

쿠쿠는 저 멀리서 먼 곳을 보고 있는 코노야로를 턱짓했다. 그러자 우스터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저건 안 돼.”

“왜?”

“내가 말 했지? 잘 만든 게임이고, 정말 사실적이라고. 지금까지 내가 잡은 NPC 중에 민간인만 있을 거 같아? 진짜배기 암살자나 범죄자도 있었다고.”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나오는데……?”

“저건 진짜야.”

“뭐?”

“……저 놈은 진짜라고. 아무튼 그렇게만 알아두라고. 난 이제 저 놈한테 말이나 붙여야겠다.”

“아니, 잠깐 무슨 소ㄹ”

“어이! 여기 이거 어떻게 부수라고?”

우스터는 묘한 미소로 돌아섰다. 쿠쿠는 그를 불러 세우려다 다른 동업자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코노야로에 대한 얘기를 되새겼다.

‘진짜라고?’

쿠쿠는 묘한 표정으로 코노야로를 보았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주목받은 코노야로는 숲과 울퉁불퉁한 길을 보고 있었다.

“전부 알고 있나?”

그는 버트의 행선지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콴타르의 길은 수행자들조차 꺼리는 불편한 통행로였다. 아무리 마차가 좋아도 덜컹거렸고 호위를 잘 갖추어도 습격당하는 곳이었다. 최근에 수집한 정보나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받은 걸 대조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혹시 비밀 루트를 알고 있나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기껏 해야 매복하기 좋은 장소 외에는 돌아가는 길이라든지, 안전한 장소라든지 그런 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까다로운 건 그 장소를 택하면서 생긴 변수였다.

‘로그아웃 타이밍을 잡기 어려워.’

시간 가속을 최대한 걸었다고 해도 하루가 8일 정도. 그것마저도 중간중간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하기에 실질적으로 일주일이었다.

PK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둘 다 로그인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 수면 시간을 통해 접속을 해결했기에 그 타이밍에 다 같이 싸워야 했다. 그런데 상대의 움직임은 모든 가정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로그아웃을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직장인은 아니다. 그냥 백수라고 보기에는 지금까지 행적이 설명이 안 돼. 여유로울 때마다 하는 거 같으면서도 하루 종일 붙잡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휴학 중인 학생? 그것도 아니면 해외 유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코노야로는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전투 스타일은 기본, 플레이 방식이나 수면 패턴, 로그아웃 주기 모든 걸 확인했다. 이런 그의 직업은 암살자나 도적 계통이 아닌 상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상인이란 걸 알지 못했다. 기껏 해야 그가 초반에 몸담았던 상인 길드 정도…… 그것도 초창기 인원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평범한 플레이어였다. 놀랍도록 게임에 과몰입을 잘할 뿐, 우스터처럼 직장도 있고 인간 관계도 멀쩡했다. 그런 그가 PK에 손을 댄 건 단순히 재밌어서였다.

상대를 분석하고 잡는다! 집착에 가까운 플레이. 그 변태적이면서도 장인 정신에 가까운 플레이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당해보면 욕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그 중 최고를 꼽으라면 악몽의 기사 레이드 이전에 일어났던 ‘마법사 암살’이었다. 지금은 이름 있는 마법사가 된 플레이어 중 하나와 PVP를 벌인 적이 있었다.

문제는 룰이 없다는 것. 자유도가 최고점인 판타지아에서 PVP 룰은 없었다. 경기장도 없었고 전투 보정도 없었다. 감옥을 제외한 시스템의 구속이 없었고 그로 인해 상대는 코노야로에게 집요한 추적을 당한 끝에 죽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코노야로에 대한 악명은 널리 퍼졌고 지금에 이르게 됐다.

“이봐. 정리 끝났어.”

블랙잭. 기습으로 유명한 그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코노야로는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블랙잭은 흠칫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 이것이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동족이라 할만한 PK범들 사이에서도 그는 최고 위험인물이었다.

“걱정 마. 그런 거금을 받고도 뒤통수를 치면 사람이 아니지. 정말로 다 끝나서 알려주러 온 거야.”

“그러면 바로 출발하지.”

“지금까지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는데…… 이번 사냥이 성공할 거라 생각해?”

“예정대로 길 말미에 도달하기까지 피로가 쌓인다면 그러겠지.”

“말에 뼈가 있네. 호위도 없다고 했잖아? 도중에 죽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랬더라면 그 조직에서 의뢰를 맡기지 않겠지. 뭐든 철저하게 처리하는 게 그들 방식이라지만 이건 과투자야.”

코노야로는 자신의 생각을 전부 뱉었다.

“아무렴. 그래도 변수를 줄인다고 생각하면 맞지 않겠어?”

“그렇다고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국력으로 치면 키런이 베톰 다음이니까. 여차하면 그 놈들과도 싸워야 하니……”

“수배당하고 싶진 않은데. 우스터 그 놈 같은 꼴 당하고 싶지 않아.”

“국가 단위의 수배는 우스터뿐이었나?”

“자잘한 걸로 치면 나랑 쿠쿠도 있어. 넌?”

“음, 판테스 왕국 쪽에 있을 거다. 아니, 살리마였나?”

“면면이 화려하구만.”

“그러니 계속 도망 다니고 있지. 그럼 출발하자.”

코노야로는 블랙잭이 온 방향으로 돌아섰다. 블랙잭은 뭔가 신경 쓰여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넌 이 게임을 왜 하는 거야?”

“음?”

“이렇게 쫓기는 걸 즐기는 건 아닐 테고……”

“그 질문, 넌 어때?”

“나야 통수 치는 맛에 하…… 아니, 그래도 이번 일은 진짜 안 칠 거야.”

“재밌으니까.”

“엉?”

“이 게임 자체가 그냥 재밌으니까. 무언가에 집중해서 해낸다는 거, 그 성취감이 좋거든.”

코노야로는 기분 좋은 얼굴로 떠나갔다. 블랙잭은 그의 말에 곧장 움직이지 못했다.

‘미친놈.’

스스로가 어떤 평을 듣는지는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참 무섭고, 알고 있다면 소름 끼쳤다. 블랙잭은 더 이상 저 남자에게 엮이지 말자고 다짐했다.

차원이 다른 변태. 소름끼치는 괴물. 코노야로에 대한 오해와 악명은 조금 더 깊어졌다.

*

쪽­ 쪽­

엔실라는 버트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엔실라는 순순하게 버트와 혀를 섞었다. 이전에는 발버둥치며 저항했다면 지금은 헐떡이기만 할뿐 얌전했다. 마치 이 모든 걸 받아들인 듯한 태도였다. 버트의 반대편에서는 리아가 엔실라의 어깨와 허벅지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쫍­

버트는 키스를 끝내고 리아를 보았다. 그러자 엔실라는 허덕이면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리아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리아와 엔실라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리고 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느긋하게 혀를 엮으며 키스했다.

지금 이 순간은 이틀 째 되는 날…… 사냥꾼들이 헛걸음을 하고 버트를 다시 추적했을 때였다. 엔실라가 이렇게 되기까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버트와 리아의 애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의 포박이 풀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손목과 발목이 묶여있었다. 게다가 종종 쉬면서 로그아웃을 하거나 식사를 할 때도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버트는 엔실라에게 밥을 먹이거나 잠자리를 마련해주며 돌봐주었다. 절대 그녀를 풀어주지 않고 반드시 가지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엔실라는 도망칠 수 없었다. 리아와 루하다가 번갈아가며 그녀를 감시했다. 아니, 루하다 하나만으로도 틈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엔실라는 둘에게 붙잡힌 채 종종 키스를 하거나 스킨십을 벌였다. 리아는 키스는 물론 음부를 빨아주거나 손으로 만져주는 스킨십에도 능숙했다. 심지어 버트보다 잘 하는 것 같았다.

버트는 그런 리아의 손짓과 스킨십을 멍하니 지켜보거나 흥분하는 엔실라를 감상했다. 그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묘한 흥분이 솟구쳤다.

지금도 그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리아가 키스를 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랫도리가 후끈거렸다. 그녀가 루하다의 분신들에게 처음 능욕 당했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분명 리아주크와 깊은 연관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음란할 줄 몰랐다.

특히 자신의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런 짓을 하니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더 보고 싶다. 여기서 더 능수능란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리아가 성장해서……

자신을 덮치면?

“그릇이시여.”

그렇게 리아가 엔실라와의 키스에 열중하고 있을 때 루하다가 마부석에서 버트를 불렀다.

“아, 응. 왜 그래?”

“이대로 가면 이틀 내로 도착할 듯 합니다.”

“아아. 응.”

루하다는 버트의 유희를 존중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에 충분히 길을 들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버트는 루하다의 말을 이해했다. 엔실라를 키런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키런 왕국은 다른 나라보다 국경 검사가 철저했다. 느슨한 판테스 왕국이나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베톰 왕국과는 달랐다. 엔실라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만일 그녀가 허튼 소리를 하고 여정이 지체되면 가장 먼저 루하다가 나설 게 분명했다.

“그래, 알았어.”

버트는 키스에 열중하고 있는 엔실라를 보았다. 그리고 리아에게서 입을 떼게 하고 그녀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엔실라.”

엔실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숨만 헐떡이며 버트를 바라보았다.

“대답해야지, 엔실라?”

“……왜.”

“나랑 같이 다니자.”

“뭐어……?”

“나랑 같이 다닌다고만 하면 이걸 풀어줄게. 어차피 도망도 못 치잖아. 그러니까 내 것이 되어줄래?”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제안이었다. 엔실라는 곧장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욕을 쳐박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인 지속적인 스킨십 때문인지 생각보다 고분고분해져 있었다.

“그건……”

“리아.”

버트는 리아를 불렀다. 리아는 다시 엔실라와 키스했다. 버트는 손을 내려 엔실라의 음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네가 스스로 내 것이 되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할 거야.”

“으흐웁…… 훕……”

쯔걱­ 쭙­ 쮸릅­

리아가 엔실라의 혀를 뒤섞듯이, 버트가 그녀의 질을 손가락으로 휘저어주었다. 입과 입, 손가락과 음부가 키스했다. 이미 몇 번이고 벌인 스킨십이니 몸이 달아버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여기에 버트의 세뇌나 다름없는 속삭임이 더해졌다.

“너는 내꺼야. 버트의 거라고. 지금 리아와 키스하고 있는 입도 내꺼고, 손가락이 쑤셔지는 보지도 내꺼야. 유두를 발딱 세운 가슴도 내꺼고, 이 말랑말랑한 배도 내꺼야. 부드러운 허벅지도 내꺼고, 가느다란 팔도 내꺼야.”

버트의 집착에 가까운 속삭임. 부분부분 건드리면서 속삭이니 감각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엔실라, 엔실라, 엔실라, 엔실라.”

버트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계속 애무를 한 뒤에 다시 자신의 것이라고 속삭였다.

애무를 통한 자극. 반복되는 언어. 다시 자극. 음담패설. 자극. 언어 반복.

이건 세뇌였다. 엔실라에게 거는 세뇌이자 자신에게 거는 최면이었다. 엔실라를 서서히 잠식하고 집어 삼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분명 창조는 가능했다. 하지만 기존의 존재를 집어삼키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검은비늘을 시작으로 다른 추종자나 몬스터들은 씨앗에서 나온 마기로 알아서 정복당했다. 하지만 린베스의 경우 거의 무아지경으로 섹스를 하다 잠식한 거라 요령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건 그때처럼 쾌락에 잠식당한 채 염원을 불어넣는 것뿐! 그게 아니면 엔실라를 머리부터 뜯어고쳐야 했다. 그건 뭔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잡아먹어야 해.’

드래곤의 존재. 기왕이면 하나라도 많은 아군이 필요했다. 백신이나 다른 드래곤이 언제 방해를 놓으러 올지 몰랐다. 루하다나 다른 추종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전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패를 늘려야 했다.

‘이 녀석을 정복해야 해.’

버트의 사념. 욕구불만에 이르렀을 때 방출되었던 욕망과 비슷한 수준의 마기가 엔실라에게 스며들었다.

‘아…… 나는……’

엔실라는 당혹감에 가슴이 벌렁거렸다. 일단 그들이 원하는대로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점점 위장이 아닌 진심이 되어갔다. 머리가 어질거리고 몸이 노곤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방금까지 세뇌하듯 속삭이는 것도 무심코 수긍해버렸을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오히려 강렬한 마기가 그녀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점점 녹아들던 엔실라의 정신이 퍼뜩 깨어났다.

‘그렇지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버텨야 하는데……?’

답이 없는 질문. 누구도 해답을 줄 수 없었다.

‘순응해버릴까……?’

그렇게 엔실라가 고뇌하고 있을 때…… 생각보다 탈출의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

“음.”

루하다는 무심한 얼굴로 정면을 보았다. 앞에서 느껴지는 묘한 살기…… 루하다는 그걸 느낀 순간 버트에게 사념을 보냈다.

[ 습격입니다. ]

[ 습격? ……도적인거야? ]

[ 그건 모르겠습니다. ]

[ 알겠어. ]

버트는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하다는 그녀가 무엇을 말할지 알고 있었다.

콰드득­

앞에서 들리는 굉음. 나무 한 그루가 무너지더니 안 그래도 울퉁불퉁한 길 위로 무너졌다. 루하다는 고삐를 당겨 마차를 멈추었고 그 기회를 틈타 양옆에서 사람들이 덤벼들었다.

착­

“움직이지 마. 볼일 있는 건 마차 안쪽이니까.”

누군가 루하다의 목에 단검을 갖다댔다. 루하다는 침착하게 두 손을 들었고 나머지 인원들이 마차를 포위했다.

“마나 파장은 결속해뒀다. 순간이동은 막아뒀어.”

“내부에 몇 명?”

“둘. 마부는?”

“일단 표적부터 확보해.”

그들 중 한 명이 마차문을 열었다. 몬스터를 유도하여 기습하는데 실패했던 바야바였다. 그는 토마호크를 꼬나 쥐고 문을 열었다.

적발과 은발의 여인 둘. 그 중 은발의 여인은 포박 당해 있었다. 바야바는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따라 와라, 버트.”

“어쩌시려구요……?”

“어쩌긴. 그냥 얌전히 따라오면 돼.”

바야바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토마호크를 꽉 쥐고 있었다. 몬스터의 습성을 꿰뚫어 보며 살다보니 육감이 주로 발달했다. 그리고 그 육감이 지금 눈앞의 여인 버트가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녀는 생각보다 순순히 바야바를 따라 마차 밖으로 나왔다.

“정말 이 녀석이 맞아?”

누군가 거리를 두며 말했다. 그 말에 코노야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경계는 해둬. 괜히 거금을 내놓은 게 아닐 테니까.”

“그러지.”

“마부는 어쩔까. 죽여?”

“입막음 해라.”

“좋지.”

블랙잭이 무방비하게 두 손을 들고 있는 루하다의 뒤통수를 때렸다. 루하다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꿈쩍하지 않았다.

“몇 가지 묻지. 블랙 남작의 기사 버트가 맞나?”

“네…… 맞는데요……?”

“그렇군.”

코노야로는 한 마디 말과 동시에 버트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넣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버트조차 찔린 걸 몰랐는지 놀란 얼굴로 자기 가슴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주변을 경계해라. 그 검은 기사가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마차 안에 있는 포로 같은 건 어쩔까?”

“일단 풀어주지 말고 있어. 퀘스트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표적 수급은 누가 끊을래.”

“내가 하지.”

“진짜 백정이 억울하게 붙은 별명이야? 너무 선뜻 나서는데?”

버트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우스터가 다가와 머리채를 잡은 순간에도 놀란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거 참, 보기 불편하게…… 그냥 눈을 뚫어버리지 그랬어?”

“내 무기 특성 상 그러기는 어려워.”

“오호, 그건 약점이란 뜻?”

“좋을대로 생각 해.”

우스터는 덤덤하게 말하며 톱날 같은 검을 들었다. 그리고 버트의 목에 갖다 대더니 가만히 있었다. 코노야로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주변을 먼저 살폈다.

“다행히 알아차린 건 없는 거 같으니 수급만 챙겨서……”

코노야로는 말을 하다 말고 우스터를 보았다. 그는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그걸 본 코노야로는 즉시 거리를 벌렸다.

툭­

그와 동시에 우스터의 목이 떨어졌다. 그걸 본 코노야로는 품에서 암기를 던짐과 동시에 소리쳤다.

“싸워라!!”

우렁찬 목소리. 버트가 우스터를 밀치면서 옆으로 굴렀다. 코노야로가 던진 암기는 땅에 쳐박혔다.

쉬익­

마부의 뒷처리하려던 블랙잭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루하다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몽둥이가 버트의 머리를 노렸다. 이제 막 구르고 자세를 잡으려는 타이밍을 노린 정확한 기습이었다.

쩍­

경쾌한 타격음. 블랙잭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추가타를 넣으려 했다.

“뒤로 빠져!!”

코노야로의 외침과 동시에 블랙잭이 주저했다. 그가 코노야로의 말을 들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경쾌한 타격음. 손맛도 있었다. 하지만 코노야로의 눈에 보인 건 버트가 타격 직전에 머리를 빠르게 뒤로 젖힌 모습이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힘있게 부딪치면서 충격을 상쇄해버렸다! 무방비하게 맞지도 않았고 제대로 타격을 준 것도 아니었다.

블랙잭이 추가 공격이 아닌 도주를 택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쯔억­

블랙잭은 허리부터 서서히 갈라졌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반으로 쪼개졌다.

“후웁……”

버트는 인상을 구기며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코노야로를 똑바로 노려보며 허공을 그러쥐었다. 그녀의 손에 잡힌 건 아주 얇은 검이었다. 분명 무장한 걸 보지도 못했고 ‘주머니’에서 꺼낸 것도 보지 못했다. 마치 몸 어딘가에서 솟아난 듯했다. 그가 이걸 확신한 이유는 자신의 동체 시력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쌔신 마스터의 힘을……?”

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노야로에게 빠르게 근접하여 검을 내질렀다.

츠학­

코노야로의 가슴에 검이 스쳤다. 그가 놀란 건 두 가지였다. 우선 버트의 놀라운 속도……! 지금껏 그가 싸웠던 상대 중 가장 빨랐다. 두 번째는 격통이었다. 피부가 스치면서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감각이…… 살아있었다.

‘이건 무슨……?’

그의 두 눈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몸 어딘가를 꿰뚫려도 이만한 통증은 없었다. 피부에서부터 근육까지 쓰라렸다.

맹세컨대 그는 불법 패치를 받지 않았다. 목숨이 오가는 처지에서 쇼크사를 할 수도 있는 짓거리를 왜 할까!

코노야로는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었다. 버트가 무섭도록 빠르게 속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팔. 어깨. 허벅지. 종아리. 버트의 검술은 어딘지 모르게 조잡했다. 하지만 괴랄하리만치 빠른 속도가 모든 걸 압살하고 있었다. 코노야로의 동체시력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토막났을 것이다.

“헉…… 헉……”

숨이 찼다. 몸에 상처가 늘어갈수록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던 경각심이 솟구쳤다. 그때 저 멀리서 뭔가를 조작하고 있는 쿠쿠의 모습이 보였다.

폭탄? 그것도 아니면 마법 스크롤? 뭐가 됐든 지금 상황을 뒤집을만한 한 수가 되어야 했다.

쉬익­

그때 버트가 안으로 파고 들었다. 코노야로는 반격을 생각지도 않고 뒤로 크게 빠졌다. 그러자 버트가 몸을 옆으로 날리더니 마차 뒤에 숨어있던 쿠쿠에게 달려들었다.

“ㅇ”

쿠쿠는 단말마조차 제대로 못 내고 절명했다. 그 모습에 코노야로가 경악하며 단검을 쥐었다. 그 짧은 시간에 쿠쿠의 수작을 알아채고 일격에 처치했다.

대체 이 사람은……?

그때 버트가 다시 코노야로를 보았다.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검을 들었다.

죽는다.

코노야로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버트가 눈앞에 달려든 걸 보았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그저 버트의 검에 꿰뚫릴 거 같았다.

스학­

가슴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버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코노야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자리에 한참 서있었다.

“무슨…… 일이……”

코노야로는 땀에 푹 젖어서 방금까지 버트가 있었던 자리를 보았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확인했다.

사라진 건 버트와 마차 안의 여인, 마지막으로 마부의 시체. 다른 동료들의 시체는 그대로였다.

“미치겠군.”

코노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체를 수습했다. 그리고 그런 코노야로에게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렇게 코노야로가 의문의 인물과 접촉하는 동안 갑자기 사라졌던 버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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