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70 콴타르의 길 上
* * *
“괜찮으시겠습니까?”
루하다는 차분히 물었다. 버트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그러다 루하다가 옆을 보는 시선을 따라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인 건 방에 들어선 이후부터 지금까지 구경하고 있던 리아였다.
아.
버트는 뒤늦게 민망함이 치솟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루하다는 말없이 버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깜빡했어.”
“지금이라도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아으으……”
“갓 태어난 피조물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민망할 테죠. 이 다음은 나중에……”
“나중에?”
버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하다는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예, 나중에.”
그렇게 두 사람이 다음을 기약하는 동안……
“더 안 해?”
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 역시 버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좀 더 낮은 톤에 무뚝뚝한 느낌이었다. 버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머쓱하게 웃었다.
“응…… 지금은 더 안 해.”
“그렇구나.”
리아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버트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럼 잘래.”
“어, 어?”
리아는 버트의 품에 폭 안겼다. 그러더니 스르르 스며들었다. 버트는 리아가 마기로 변해 자기 몸에 안착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뭔가 몸이 뜨거울 때 시원한 바람을 맞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버트는 자기 몸을 더듬었다. 리아는 완벽하게 흡수되었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조금 불안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리아를 찾으니 그녀의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렸다.
[ 왜? ]
[ 아, 아냐. 아무것도. ]
버트는 안심하고 루하다를 보았다.
“아, 음, 음, 그래서 찾아온 이유는 성과를 보여주려는 것도 있었고…… 이제 슬슬 가야 하지 않을까 해서.”
“그렇군요.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기왕 동쪽으로 오게 됐으니 키런 왕국으로 가보자. 거기에 뭐가 있다고 했더라……”
버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루하다는 유독 그녀의 기분이 좋아보여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십니다. 지하에서의 성과가 그렇게 만족스러우셨는지요?”
“응? 아, 그건”
버트는 말을 하다 말았다. 그러다 루하다를 보며 방긋 웃었다.
“루하다랑 섹스할 수 있어서 기뻐서.”
루하다는 말없이 버트를 바라보았다.
“먼저 말씀하지 않으셔서 바라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야 내 명령으로만 들어주는 거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말 안하고 있었어.”
버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루하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합니다.”
“원해……?”
“예. 그릇께서 제가 아닌 그 박쥐를 택했을 때 질투가 났습니다. 볼일 때문에 몇 번이고 자리를 비운 그때도 그릇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릇이 없을 때마다 그릇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몇 번 일을 그르칠 뻔한 적도 있습니다.”
버트는 멍하니 루하다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 있었다. 이것도 분명 마신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아에게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뭔가 좋았다. 왠지 모르게 루하다의 애정을 확인하게 된 느낌이었다. 방금 보았던 그의 육체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베톰 왕국에 있을 때도 그런 반응을 본 적이 없었다. 억눌렀다고 해도 지금 드러냈단 건 그만큼 버트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리였고, 그게 아니라 버트에게만 반응한 거라면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루하다의 답변까지 들으니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그렇구나.”
버트는 괜히 얼굴만 만지작거렸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가자. 여기서 더 머무를 이유도 없고……”
“알겠습니다.”
루하다는 다시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버트는 리아, 루하다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엠파이어들은 버트 혼자 나오니 이상해하다가 뒤늦게 내려진 셀기디어의 명령을 듣고 납득했다.
“그릇이시여.”
그렇게 아드레이 왕국을 떠나려 할 때, 누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바로 히레이즈였다. 그와 만난 버트는 괜히 찔끔해서 시선을 피했다.
“안녕하세요……?”
“약속한 보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보상 아”
언뜻 넘어가긴 했지만 히레이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원하고 있고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보상. 솔직히 바로 떠오르는 건 없었다.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루하다로 인한 행복에 취해 있었다.
“특별한 장소도 마련했으니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특별한 장소. 그녀가 원하는 것.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
버트는 루하다 생각이 났기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괜ㅊ”
“안내해라.”
버트의 대답은 그림자 속 루하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히레이즈는 곧장 길을 안내했고 버트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 루하다? ]
[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말씀 드리지만 그릇이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 좋습니다. ]
[ 어, 아, 아…… ]
버트는 멋쩍게 웃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었으니 어쩌면 이 선택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루하다가 그걸 싫어했다면 적극적으로 저지했을 것이다. 불만이 있다면 자신을 추궁했을 때처럼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 알게 된 건 라이칸과 몸을 섞거나 엠파이어에게 의존하는 것 말고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언제나 평온했고 잔잔했다.
‘그래도 조금은 자중해야겠지.’
버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히레이즈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무엇을 본 걸까. 그리고 무엇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자신만만할까. 그 의문은 얼마 안 가 풀리게 되었다.
히레이즈가 안내한 곳은 아카람 투기장에서 멀지 않은 거대한 시설이었다. 물론 지금은 본래 형태의 3분의 1밖에 남지 않아 형편없지만 이전에는 훨씬 멋있을 건물이었다. 히레이즈가 엠파이어 몇에게 인사를 건네며 어느 자리에 위치했다. 그러자 버트와 히레이즈가 바닥으로 쑥 꺼졌다.
“우왓!!”
“지금부터 안내해드리는 건 극비 사항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실험이니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버트는 지하로 내려가는 속도감에 휘청이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하 깊은 곳으로 도착한 둘은 거대한 문 앞에 위치했다.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뭔가 엄청…… 크네요?”
“예. 그릇께 드리기 위해 많은 걸 준비했으니까요. 이곳에서 얼만큼 시간을 보내시든 괜찮습니다.”
“이 안에 뭐가 있나요……?”
히레이즈는 자애롭게 웃었다.
“키메라입니다.”
“키메라요?”
“예. 그것도 그릇의 취향에 맞춰 개조한 것들을 엄선하고 엄선해서 모아두었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즐겨 주십시오.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즐거우실 겁니다.”
히레이즈의 호언장담에 버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좆됐구만.”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그림자를 쫓는 별’의 정보원들이었다. 한창 내분으로 정신없던 조직이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대화를 나누는 정보원들이 그 당시 세력 다툼 때 정리 당한 이들이었다.
‘별자리’라 불리던 조직의 장 카슘. 그리고 그에게 대항하여 차근차근 세력을 키워나가던 3인자이자 1등성 위치에 판테스 왕국 지부장이었던 로트로이. 둘의 세력 다툼은 정말 은밀했다. 오죽하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조용한 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조직원의 1할이 죽거나 다쳤다. 다행히 서로 조직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다툼을 벌였지만 인명 피해까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정보 조직 중 역대급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젠장, 카슘 님이 패배 선언만 안 했어도……”
“그랬으면 지겹도록 오래 싸웠겠지.”
“그렇다고 그 놈에게 자리를 훅 넘겨줘?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해?”
“작정하고 암약하던 놈이야. 오히려 그런 능력이 있다면 계승해주는 게 맞겠지.”
“쫓겨났다고 이제 그 놈 똥꼬까지 빨아주는 거냐, 엉?”
“현실을 보란 거야.”
그들은 하나 같이 침울했다. 한 명씩 좋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이번 내분으로 은퇴나 다름없을 정도로 보직 변경이 일어났다. 물론 이전에 비하면 나쁘지, 반대파에 선 것 치고는 괜찮은 자리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그런 자리에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단 점이었다.
“죽자살자 식으로 다른 조직에 귀화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푸대접을 받으며 조직에 남을 수도 없어.”
누군가 결단하듯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고. 새로운 조직이라도 세워? 지금 이 땅의 정보망은 포화 상태야. 차라리 그들을 연결해주는 말 장사나 하는 게 더 이득일 거다.”
“당연히 아니지.”
“그게 아니면?”
조직원 하나가 초상화를 내밀었다. 거기에 그려진 건 붉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이건……”
“판테스 부지부장 알지?”
“어쌔신 마스터 말이군.”
에니스트의 이름은 조직 내는 물론 다른 정보 조직에서도 유명했다. 이 땅에 많이 없는 마스터 중에서도 최초의 이모탈 마스터였다. 그녀가 가진 그림자의 힘은 유연하고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이번 내분 때 그녀와 마주했던 이들 대부분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전력 차를 느꼈다.
“그 여자가 아끼는 여자다. 세간에서 유명했던 블랙 남작의 가신 중 하나지.”
누군가의 말에 정보원들은 한 마디씩 의견을 냈다.
“최초의 이모탈 귀족 말이군. 그 여자의 가신이랑 친하다는 건가?”
“이모탈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 대개 이모탈 습성이 그렇잖아. 무모한 짓거리를 하거나 붙어먹으려고나 하지.”
“확실히…… 과거 이력 조사해본 사람은 있어?”
“일단 ‘미래의 눈’에서 첩자가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판테스 왕국민이고 고아였다나 봐.”
“스물을 훌쩍 넘겼으니…… 음, 케르베로스 사태 때 희생자인가.”
“어쩌면 판테스 왕국이 처분한 소국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그 왜, 멸국해서 부랑자가 된 기사들 있잖아.”
“레드윙 도적들은 이미 끝장났다고. 전멸한 거 다 알려졌잖아.”
“일단 시덥잖은 얘기들은 그만하고, 어쨌건 그 년을 견제하려면 이 여자가 필요해.”
“최근 정보는 있어?”
그 말에 처음 의견을 낸 정보원이 입을 열었다.
“베톰 왕국에서 아드레이 왕국으로 향하는 상단에서 발견 했다더군.”
“베톰 왕국?”
“블랙 남작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자기 영지 정리하기도 바쁜 년이 무슨…… 근데 확실히 수상하긴 해. 있지도 않은 자작을 내세우고 기사들을 소집하고 있으니 말이야.”
“잘 하면 블랙 남작과 에니스트 둘 다 견제할 수 있다는 말이네?”
“그래. 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붙어.”
그의 말에 다른 정보원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블랙스타.”
극비 정보 중 하나로, 블랙 남작이 블랙스타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블랙스타가 어떤 곳인가! 신도 수만 따지면 나라 하나에 견줄 정도고 그들이 가진 힘은 한 나라를 견제할 수 있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나서지 않아 스카이 왕국으로 자진 유폐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갖기 위해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교단이 아니었다. 무려 2개의 교단을 전멸시키고 나라 하나를 섬멸한 기록이 있었다. 크고 작은 조직들까지 합하면 가장 많은 파괴를 이룩한 교단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조직 내에서도 블랙스타를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머릿수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치지 않게 납치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블랙스타가 경호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마성자들이 강하긴 해도 은밀 행동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그들이 그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다면 로이첸 왕국에서 가만히 있었겠어? 키런 왕국에서 벗어나려고 블랙스타를 포섭했을 거야.”
“그렇다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 잘못 하면 조직 내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목숨부지도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 새로운 녀석들을 들여야지.”
“새로운 녀석들?”
“독은 독으로 제압한다. 이모탈이 사고 친 건 이모탈이 수습해야지.”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두루마리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모탈 사냥꾼들…… 그들 말로는 ‘동족상잔’이란 이름의 길드지. 이들을 포섭한다.”
“그걸로 될까? 듣자 하니 죽지 않는 녀석들이라도 이모탈을 죽이는 건 견제한다던데.”
“그래서 여기에 이것들을 더하는 거지.”
새로 꺼낸 두루마리. 거기에는 조직 이름이 아닌 각 인원의 프로필이 적혀있었다.
“이거 이모탈 전문 킬러들이잖아?”
“이모탈 사이에서도 척을 진 녀석이라던데.”
“오호, 괜찮아 보이네.”
“블랙 스타의 마성자들이 있다면 적당히 견제가 될 거야. 그 틈에 우리는 이 여자를 납치해버리는 거지.”
“그럼 문제는 이걸 어떻게 안 들키고 시행한다는 건데…… 로트로이처럼 몇 년…… 아니, 그 이상을 기다릴 수 있겠어?”
“그래서 사전 작업은 끝내뒀다.”
“엉?”
“뭐, 사실 이들에게 노출하려던 건 에니스트였지만 사람만 바꾸면 되는 거야.”
“워, 그러니까 예전에 벌여 놓고 수습하지 않았던 걸 써먹겠단 거구만!”
“그래. 어차피 이걸 쓰기도 전에 내분은 끝났어. 게다가 정보도 조각조각 나눠놔서 알아먹기도 힘들지. 무엇보다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지 견제할 틈이 없을 거야. 아드레이 왕국 테러 때문이지.”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 내분이 끝나면서 준비해둔 무기는 비장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시기도 적절했다.
지금 뿐이다!
“지금 이 여자가 지하로 내려갔단 게 확인됐다.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그들이 암약하는 동안…… 납치 대상이 된 버트는 아직 아드레이 왕국에 있었다.
*
“흐아아아……”
버트는 노곤노곤하게 풀어져 있었다.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키메라들……! 버트는 그들의 육탄전에 휩쓸려 힘도 못 쓰고 제압당했다.
냐아아아
낑 낑
삐익 삑
보송보송한 솜털. 부드러운 털가죽. 따스한 몸체. 수많은 털짐승들이 버트를 휘감았다. 버트는 그들에게 파묻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벅지에는 고양이가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고 양팔에는 강아지들이 몸을 부비고 있었다. 발치에서는 여우가 발을 휘감았고 머리에서는 병아리와 뱁새들이 자리 잡았다. 손에 머리를 비비는 패럿과 다람쥐까지……!
그야말로 궁극의 행복……! 버트가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귀여운 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어디에 손을 뻗어도 복슬복슬한 촉감이 느껴졌고 조금만 숨을 쉬어도 따스함이 느껴졌다.
설마 이런 곳일 줄이야……! 지금 버트에게 애교를 부리는 녀석들 외에도 팬더나 카피바라, 늑대 등 커다란 동물들이 가득했다. 버트는 작은 동물들에게 파묻혀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느긋하게 일어나 커다란 녀석들에게도 몸을 던져 그 품에 파묻혔다.
“흐헤헤…… 흐헤헤헤……”
버트는 바보처럼 웃으며 동물들 사이를 거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레이즈 옆으로 루하다가 솟아올랐다.
“용케 그릇의 취향을 파악했군.”
“그릇의 심상을 조금 훑어보았으니까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실 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확신은 없었지만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준비가 잘 되지 않았나?”
“그래서 조금 오래 걸리긴 했습니다. 완벽히 만족하실 보상을 준비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니까요.”
루하다는 그의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것만 있는 게 아니군?”
“전략의 기본은 대비책과 대안이니까요.”
히레이즈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거기에는 어둠 속에 파묻힌 공간이 있었다. 루하다가 그 어둠을 꿰뚫어보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짐승들이 가득했다. 그 중 하나는 말미잘마냥 촉수가 잔뜩 돋아있었다.
“굉장하군.”
“과찬이십니다. 아직 다른 분들에 비하면 부족합니다.”
“저것들도 빌려가지.”
“영광입니다. 바로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루하다가 손을 뻗었다. 그에게서 뻗어나온 그림자가 공간 안의 모든 생물들을 집어삼켰다.
“쓸 데가 있을 거다.”
“그릇께서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세밀하게 설계한 키메라고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거쳤으니까요.”
“다행이군. 옛날 같았으면 그릇께서 성혈을 내렸겠지만 네게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구나.”
히레이즈는 빙긋 미소 지었다.
“역시나 과찬이십니다.”
“비록 박쥐들은 싫어하나 인재까지 내치는 건 아니다. 잘 섬기도록 해라.”
히레이즈는 루하다의 말에 단번에 그 의도를 파악했다.
“물론입니다.”
루하다는 그윽한 표정으로 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동물들에게 파묻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버트가 아드레이 왕국을 출발한 건 이틀 뒤였다. 행복감에 취해 있기도 했고 버트가 셀기디어를 찾기도 해서였다.
“죄송했습니다.”
셀기디어는 그녀의 뜬금없는 사과에 멀뚱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게…… 부인이 있으신 데 그런 짓을 한 게…… 그때는 제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흐음.”
버트가 이렇게 사과를 하는 이유는 나탈리아 때문이었다. 딸이 있다는 건 부인도 있다는 소리…… 유부남한테 들이댄 꼴이었으니 생각해보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셀기디어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 반응에 버트는 괜히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데서 마음을 쓰는 군.”
“그랬나요? 저는 그냥”
“신경 쓰지 마라. 그녀는 예전 싸움으로 죽었으니까.”
“아.”
셀기디어는 심드렁한 얼굴로 버트를 보았다.
“신경 쓰지 말라 했을 텐데.”
“그래도……”
“그렇게 신경 쓸 거라면 네 미래나 걱정 하는 게 어때.”
“아~”
버트는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네 육신은 마신에게 잠식될 거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몰라. 그리고 언제 시작될지도 모르고. 네 스스로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란 걸 모르는 건가?”
“알아요.”
버트는 머리카락을 꼬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처음 버그에 걸린 후부터 모든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아니, 지금은 확신하고 있어요. 그때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 때문에 이 세상이 진짜 같았거든요.”
셀기디어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서?”
“그래서…… 무서웠죠. 여기서 죽으면 정말 죽는 건가? 그리고 이 세상이 가짜가 아니라면 내가 죽인 사람들은 정말 죽는 건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어요. 정당방위긴 했지만 아직 그 느낌이 남아있어요.”
버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극복했지만요.”
“극복해?”
“이제 사람이랑 조금 비슷해도 싸워 이길 수 있게 됐어요.”
“그런가.”
셀기디어는 무언가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령 무엇으로부터 극복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처음 피를 본 이들이 으레 겪는 통과 의례였다.
“무엇보다…… 루하다가 약속했어요.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흥, 그런 평면체나 믿다니. 그보다 어찌 하여 그 녀석이 육신을 갖고 있는 거지? 분명 ”
“네 딸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루하다는 그림자에서 솟구치며 말했다.
“나탈리가?”
“마신을 만들어내어 정복하려는 계획, 모른다고 발뺌하지 않겠지?”
“아아, 그거 말인가.”
셀기디어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나는 그 연구를 포기했다. 본래 그건 타티샤가 정식으로 이어 받았지만 기껏 해야 요새를 만드는 게 고작이더군.”
“그 여자는 생물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던데?”
“그래봐야 그 옆에 있는 그릇의 토대로 이루어진 성과겠지. 무의식으로 벌여낸 창조의 결과물이 아니고서야 그건 불가능하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의지가 마기에 깃들어 섞여 나온 게 아닌가?”
셀기디어의 말에 버트는 속마음을 들킨 것마냥 시선을 피했다. 베즈웍 유적지에서 그녀와 몸을 섞었던 생물들은 전부 버트의 염원을 바탕으로 태어났다는 뜻! 그렇다는 건…… 그것들이 자신과 루하다의 자식이고 버트 자신은 그 자식들과 몸을 섞었다는 소리였다.
‘그, 그럴 리가……’
버트가 당혹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루하다와 셀기디어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그러면 이제 어찌할 셈이냐. 드래곤이나 백신의 눈을 피해 도망다닐 생각이냐? 페슈트 그 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어째선지 백신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드래곤들이 나타난 것…… 그것도 정말 의외지만 그릇을 노린 건 아니지 않나.”
“맞다. 그 놈들 중 금색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노리고 나타난 건 아닌 모양이야.”
“감지하지 못했다라…… 역시 그런가.”
“역시?”
셀기디어는 루하다의 반응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벨루그하, 전부 네놈이 노린 게 아니었나? 리아주크를 바탕으로 새로운 마신을 책봉하려는 속셈이 아니었나?”
“무슨 소리. 나는 리아주크의 발걸음을 쫓는 자…… 그 분의 그림자에서 태어나 오직 리아주크만을 모시는 하인이다. 그런 불경한 계획은 꾸미지 않아.”
“……네놈답구만. 허면 페슈트의 뜻은 어떻지?”
“그 녀석은 사랑 놀음 중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거 참.”
셀기디어는 턱짓했다.
“그럼 더 볼 일은 없는 걸 테지?”
그의 말에 버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라. 어차피 내가 나선다 해도 결과가 달라질 거 같지 않으니……”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셀기디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버트는 빙긋 웃으며 루하다의 손을 잡았다.
츠르릇
두 사람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셀기디어는 저 먼 곳에 걸린 빈 액자들을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거기에는 나탈리아를 닮은 여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백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리아주크가 죽은 이후에 모든 걸 없애버렸다.
‘운이 좋다면 그녀를 되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나처럼.’
셀기디어는 왕좌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가 홀로 고독을 씹는 사이 버트는 엠파이어들이 마련해준 마차를 타고 키런 왕국으로 떠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