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69화 (69/104)

〈 69화 〉 69 ­ 브라함의 상자 下

* * *

“어?”

“웅.”

버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분신이 아니었다. 버트와 정말 똑같이 생겼지만 적어도 가짜는 아니었다. 그걸 확신한 이유는 본능과 무의식에 새겨진 정보였다. 버트는 단숨에 이 분신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너는­”

“……뭐지 이건?”

셀기디어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트는 분신을 힐끔 보다 손을 휘적였다.

“뭔가…… 좀 더 느끼고 싶고 여러 명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래서 나온 게 이건가?”

셀기디어는 분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분신은 버트와 똑같이 생겼지만 머리색이 새까맣고 뚱한 표정이 달랐다. 셀기디어가 그녀를 계속 보는 이유는 알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이건 필시 마신에 대한 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신은 남자다.

누구보다 셀기디어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부활했다면 가장 먼저 셀기디어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랬기에 가능성을 버려두었다. 마신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씨앗에서 뻗어나온 마기 때문이라 단정지었다.

“창조의 힘. 그래, 그게 본래 마기가 가진 힘이다. 그 어떤 물질이든, 그 어떤 존재든, 그 어떤 시간선이든 간섭하고 변형할 수 있지. 그야말로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며 뒤바꾸는 힘, 신의 힘이라 할 수 있지.”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버트를 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기를 스며들게 하는 것 정도가 한계지. 마기에서 태어난 존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지.”

버트는 라이칸 때를 떠올렸다.

“그 다음은 마기를 통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래봤자 물리적 간섭 정도나 하는 것이지.”

버트는 기사 리실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후에는 마기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도 간섭할 수 있게 되지.”

버트는 랑그라 밀림에서 종속한 마법사 린베스를 떠올렸다.

“그렇게 마기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눈앞의 결과물로 나타나지. 진정한 창조의 영역에 발을 걸치게 되는 거다.”

버트는 분신을 보았다. 분신은 뚱한 얼굴로 바닥을 보고 있다가 버트를 보았다.

“그럼 이제 연습은 끝났으니 본격적인 창조를 해야지.”

“어…… 왜 손톱을 세우시는 건가요?”

“처분이다. 불완전한 창작물은 어떤 결과를 부를지 모른다.”

“이, 이건 제가 처음 만들어낸 아이니까……! 그걸 기념해서 계속 간직하고 싶은데요……!”

셀기디어는 눈가를 꿈틀거렸다. 버트는 적극적으로 분신의 앞을 막아섰다. 훈련 내내 그의 말을 듣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셀기디어는 버트의 어깨 건너로 분신을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내렸다.

“좋아. 어쨌건 이 정도까지 왔다면 마신의 부활은 안정적으로 끝날 거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마기를 잘 다루는 거랑 마신이 부활하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나요?”

버트의 질문은 생각보다 예리했다. 셀기디어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을 내주었다.

“마신의 육체를 전부 짜맞추고 정신을 끼워 맞춘다고 끝이 아니다. 잘 조율해야지. 맞지 않는 옷을 입게 하거나 앉기 불편한 의자 같은 수준이 아니다. 정확하고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지. 물론 누군가 직접 한다면 좋겠지만 기왕이면 씨앗과 가장 오래 지낸 쪽이 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허튼 짓은 하지 마라. 정에 휩쓸려서 이상한 짓을 하지도 말고.”

“네. 그건 걱정 마세요.”

셀기디어는 묘한 표정으로 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쉬어라.”

“아, 네!”

버트는 셀기디어가 멀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분신에게 눈길을 주었다. 분신은 멍한 얼굴로 자기 몸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안녕?”

“응……”

분신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버트는 그런 분신을 지긋이 보다 손을 잡았다.

“결국 이렇게 만났네.”

“……응.”

“같이 가자.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버트는 해맑게 웃으며 분신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드러커스의 미로 지상에 있는 메일드로우였다.

*

루하다가 버트의 지시로 지상으로 올라온 지 꼬박 일 주일이 지났다. 그가 한 거라고는 리실버의 모습을 취하고 메일드로우를 방문한 일이었다. 그렇게 멀뚱히 서있으니 주변을 복구하던 엠파이어들이 하나둘 다가와 도움을 청했다.

버트의 명령은 지상 수습. 그랬기에 그들의 부탁을 하나둘 들어주게 되었다. 건물 잔해나 시체를 옮기고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검은 기사 리실버! 지금은 이슈에서 밀려났으나 아직까지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였다. 세간에는 블랙 남작의 가신으로 알려졌으며 판테스 왕국에서는 왕을 지킨 기사란 평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아드레이 왕국에 와있었다. 판테스 왕국과는 이웃하고 있다지만 그가 몸소 주변 정리를 한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당연히 이 일은 차근차근 외부로 퍼져나갔고 소식을 접한 페이니는 골머리를 썩었다.

‘이것들 뭐하고 있는 거야?’

페이니는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서 영지를 보살피는데 집중했다. 상상 이상의 인재가 넘쳐나는 땅이다보니 관리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틈틈이 찾아오는 길렌 백작이나 델폰 남작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간간이 리어페어리 일족이 찾아오는 것도 괜찮았다. 세계 3대 정보 조직 중 무려 두 곳이 분점을 내는 것도 문제없었다.

문제는 은퇴한 전 마탑주였다. 그의 존재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인간.’

그냥 무시해버리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그 강력한 노스페라투 기사가 그 한 명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 단순히 무력만 비교해놓고 봐도 압도적이었지만 그의 입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본국인 살리마가 아닌 판테스 왕국으로 온 것인가. 아무리 정계에 간섭하지 않고 마법사의 탑에서 은퇴했다지만 정말 파격적인 행보였다. 심지어 그가 은퇴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페이니는 세 명의 다크나이트 중 이디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디아는 갑자기 자기가 지목되자 깜짝 놀랐다.

“저요? 선배가 아니라?”

“셋 중에서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너니까.”

이디아는 그녀의 대답에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일단 그 영감의 목적은 별개로 영지에서 신경 써야 하는 건 맞아요. 근데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은퇴해서 쉬겠다는 노인이고 살리마 왕국이 아니라 판테스 왕국에 온 거…… 그냥 여기가 좋아 보여서 자리 잡은 게 아니냔 거죠. 귀한 손님인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그 사람도 영지민이잖아요. 듣자 하니 로디아 마을에서 모임에 종종 내비친다던데…… 그럼 그냥 우리 나라 사람 아닌가요?”

이디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목적을 숨기고 침입했다기에는 너무 서스럼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국빈은 아니더라도 귀빈 대접은 해줘야지. 그 모임에서 종종 무엇을 하고 있었지?”

“어­”

이디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천장을 보았다. 다른 두 사람의 반응도 이디아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꽤나 곤란하거나 어처구니 없는 모임인가보네.”

“맞다.”

엘도트가 말했다. 페이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외국과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정작 영지 내부 사정은 꿰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 해야 달의 신전이 건립된 후로 라이칸들의 기세가 등등해졌다든가, 정보 조직을 비롯한 각종 번화가가 들어서면서 로디아 마을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넬하트나 길렌 백작을 선두로 한 모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버트에게 현혹당한 길렌 백작이 있는 이상 엄한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모임인데? 설마 버트를 추앙하고 찬양하는 모임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그게 추앙이라고요? 그건 그냥 딸감으로 ㅆ”

이디아가 기겁하며 말을 했다. 그러자 브론트가 커다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뭐…… 추종자가 생기는 건 나쁘지 않아. 블랙스타가 성녀로 떠받들고 있다지만 결국에는 마신을 섬기는 교단이니까. 버트를 숭배하는 건 아니지.”

세 사람은 일찍이 페이니를 포함한 리아주크의 추종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발언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건 마치 신도들이 리아주크가 아닌 버트를 찬양하기를 바라는 거 같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못했다. 어쩌면 단순히 말을 잘못했을 수도 있었거니와 자신이 섬기는 군주가 강해지는 것에 반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페이니가 넬하트를 우려하는 것처럼, 그들도 페이니의 목적에 대해 의아함을 품게 되었다.

적어도 위해는 끼치지 않겠지. 그들은 나름대로 페이니를 믿고 있었기에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버트를 다른 나라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오지 않기를 걱정할 뿐이었다.

*

[ 루하다. ]

버트는 자신의 분신과 함께 로브를 둘러쓰고 루하다를 찾아갔다. 루하다는 복구 기간 동안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에는 흡혈귀도 있었고 그의 정체를 간파하려는 플레이어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념으로 목소리를 보내니 루하다가 대답했다.

[ 오셨습니까. 하시려는 일은 다 끝났습니까? ]

[ 응. 많이 바쁜가 보네? ]

[ 그래도 휴식 시간과 공간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

[ 아, 아니, 괜찮아. 기다릴게. ]

[ 제게 최우선은 그릇입니다. ]

루하다는 단호했다. 버트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그가 말하는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루하다의 말을 따라 멀지 않은 곳에 가장 호화스러운 숙소로 이동했다. 거기에 들어서려 하니 엠파이어의 제지가 있었지만 루하다의 단호한 말 한 마디로 입장되었다.

“뭔가 고급스러운 느낌이야.”

버트는 분신과 함께 고목으로 지어진 듯한 건물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 지하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만들었다는군요. 그래서 유달리 향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이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나무와 비슷한 목재로 와인도 담근다고 들었습니다.”

“오오오……”

버트는 루하다의 말을 들으며 방에 들어갔다. 다섯이 지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공간이었다. 넓은 공간을 과시하려는 듯 침대도 컸다. 곳곳에 비치된 가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더 넓어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예?”

버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루하다로서는 무슨 얘기인지 몰라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니……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방금 루하다가 얘기한 거, 숙소를 안내해준 사람이 말한 거지? 웬일로 그런 걸 다 기억한 거야?”

“아.”

버트는 평소 루하다의 행실을 알고 있었다. 라이칸에게 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도 쉽사리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의 말을 귀를 기울여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지상에서 남을 돕는 건 버트의 명령이었다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심경에 변화라도 있던 걸까.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그건 아닙니다. 그저…… 그릇께서 기뻐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알아둔 겁니다.”

“나를 위해?‘

“예.”

버트는 그 말이 싫지 않았는지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옆에 있는 건 무엇인지요?”

“아, 이 애?”

버트는 후드를 벗겨주었다. 그리고 나타난 건 버트와 머리색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흑발의 미녀였다. 그녀를 조우한 루하다는 잠시 주춤거렸다.

“내 마기에서 태어난 분신이야. 이름은­”

버트는 잠시 생각하는 건지 말을 하다 말고 멍한 얼굴로 있었다.

“리아라고 해!”

“리아…… 혹여 리아주크에서 따온 이름입니까?”

“응. 일단 내 힘의 근원이기도 하니까.”

루하다는 갑옷을 벗고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루하다?”

“그릇의 분신이라는 건 그릇의 일부라는 뜻…… 그 실험에서 만들어진 조잡한 결과물과는 다릅니다.”

루하다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인사를 한 뒤에 일어나 버트를 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순도 높은 존재를 만들어내셨단 건 그만큼 노력하셨다는 뜻이겠죠.”

“에헤헤, 이 정도로 뭘~”

버트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루하다가 다가와 손목을 낚아챈 순간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루하다? 왜……?”

“지하에서 열심히 훈련도 하셨을 테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마기를 부여받은 이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아.”

버트는 루하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당연히 뭔가 찔리는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치…… 잘 알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루하다는 버트의 손목을 잡은 채 벽으로 몰아붙였다. 버트는 루하다가 다가오니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니 다급히 고개를 틀었다.

“아, 아니 별 일 없었는데……?”

“제가 다른 녀석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특징까지 모르지 않습니다. 흡혈귀 놈들의 체액에 어떤 힘이 있는지도 알고 있죠.”

루하다는 고개를 숙여 버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얼마나 목을 내주셨습니까?”

“어, 으, 아? 어? 어?”

“흡혈 당할 때 쾌락은 약한 오르가즘과 비슷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릇께서 그걸 그냥 지나치실 리 없지 않습니까. 처음 흡혈 당한 뒤에 몇 번이나 물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까?”

나긋나긋한 추궁. 정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말들은 하나 같이 버트를 꾸짖는 말이었다. 버트는 당황해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루하다의 말도 말이었지만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셀기디어에게 몇 번이나 흡혈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일부러 마기가 폭주하는 척 하며 물리는 걸 기다리기도 했다.

“아…… 그……”

버트는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감춰둔 비밀을 들킨 것 마냥 머리가 어질거렸다.

“계, 계속……”

“깨물기만 했습니까?”

“물기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내가…… 내가 참지 못하고…… 어…… 허리를…… 흔들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섹스까지 갔습니까?”

“아냐…… 아냐…… 그냥 손가락으로…… 해줬어……”

“기분 좋았습니까?”

“아…… 아으……”

버트는 귀가 화끈거렸다. 그의 속삭임이 귀를 간질이고 숨결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추궁이 부끄러웠지만 차마 루하다를 밀어낼 수 없었다. 오히려 귓속말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조금씩 피어 올랐다.

“말로 하시기 부끄러우시다면 생각으로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도 뭘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 으, 응…… 응…… 알겠어……”

버트는 머뭇거리다 그 당시를 차분히 떠올렸다.

*

“발정났군.”

“하악…… 학……”

버트는 셀기디어의 팔을 끌어안고 그의 손을 다리 사이에 끼워넣었다. 그러면서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헐떡였다. 지금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게 정확히 5번째 흡혈 때였다. 2번째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3번째부터는 흡혈 당하며 느껴지는 쾌락을 감당 못해 손장난을 시작했다. 셀기디어는 말없이 목을 깨물어주었고 버트는 그 쾌락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 자신의 음부를 매만졌다.

이때부터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4번째부터는 셀기디어의 팔을 붙들고 조물거리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손등에 음부를 갖다 대고 비비게 되었다. 셀기디어는 손등이 애액으로 흥건해짐에도 손을 빼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좋나?”

“좋아여…… 흐헤…… 피 빨리는 거 좋으아……”

버트는 혀가 풀린 채 허리를 흔들어댔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나른해지는 감각에 쾌락 성분이 더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저릿거릴 정도의 쾌락이었다. 몇 번이나 깨물려도 익숙해지거나 둔감해질 틈이 없었다.

“헥…… 헤엑…… 헥…… 헥……”

그런 상태에서 셀기디어의 단단한 손등에 음부를 비비는 건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 덤덤한 눈이 피학심을 촉발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흥분했고 발정 나게 되었다.

버트는 계속 근질거리다 못해 화끈거리는 음부를 서늘한 그의 손등에 비벼댔다. 그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자위가 멈추지 않으니 셀기디어가 행동에 나섰다.

“히햑……!”

셀기디어가 손을 빙글 돌려 손가락으로 음부를 삭 쓸어주었다. 미끈해진 균열을 훑는 손가락 덕분에 버트의 입에서 콧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흑…… 흐학…… 학…… 학……”

셀기디어는 말없이 버트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긁어주었다. 다만 뾰족하고 긴 손톱 때문인지 질구멍 근처만 손가락으로 훑어줄뿐이었다. 그래서 버트는 갑갑함에 허벅지로 그의 손을 조이고 문질렀다. 허벅지가 번갈아가며 손을 문질러대니 셀기디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뒤로 돌아라.”

“헤엑…… 헥……”

버트는 고분고분하게 그의 손을 빼고 뒤로 돌았다. 그러자 셀기디어의 손이 시간차를 두고 그녀의 다리 사이로 훅 들어왔다.

“아앗……!”

삐죽 튀어나온 손. 크고 두터운 손은 그대로 음부를 뒤덮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음핵이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주었다. 버트는 그의 굵직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느릿하지만 힘 있게 음부를 쓸어주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혼자 만질 때보다 훨씬 좋았다. 그가 이렇게 만져준다는 사실이 자극적이기도 했다.

버트는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주물러댔다. 남의 손으로 자위하면서도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히잇…… 힛……”

츠덕­ 츠덕­

셀기디어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찐득한 소리가 났다. 극심하게 흥분한데다 계속 새어나오는 애액이 음부와 손가락에 끼어 문질러지니 점점 끈적하게 변했다. 분명 애액이 계속 분비되면서 새로운 것이 덮어 씌워졌지만 찐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흘러대니 손가락이 질척해졌다. 손바닥에도 애액이 고였다.

셀기디어는 아랑곳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을 파고 들어 음핵을 짓누르거나 느릿하게 후벼 파는 등, 그의 무심한 손가락 놀림은 버트 스스로가 유두를 꼬집으며 절정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흑…… 흐극…… 그윽…… 윽…… 흐윽……”

그렇게 버트가 허리를 휘며 절정하려는 그 순간……

*

“흐학……?!”

버트는 셀기디어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말고 작게 소리쳤다. 갑자기 루하다가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 넣더니 음부 위를 더듬어댔기 때문이었다. 옷 위로 만지는 거라 심한 자극은 없었지만 몸이 흥분하던 상태라 화들짝 놀랐다.

“루, 루하다?”

“계속 하시면 됩니다.”

“이러면…… 내가…… 앗…… 읏……”

이제는 그냥 만지는 게 아니었다. 루하다는 대놓고 음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긁어댔다. 옷이 음부 속살에 파묻힐 정도였으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버트는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루하다가 말한대로 상상을 해보려 해도 손가락이 자꾸 방해했다.

“그…… 그리고 거기서…… 계속…… 갈 때까지…… 만져주고……”

“이렇게요?”

“흐읏…… 학……! 으응……! 응……! 맞아……! 계속 클리 있는 쪽만 계소옥……! 앙……!”

버트는 더 참지 못하고 몸을 감싼 옷을 걷어냈다. 그러자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루하다는 그림자 옷이 사라진 후에도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맨살이 드러난 순간 음순을 후벼 파고 들어가 음핵을 직접적으로 자극해주었다.

“아흐아…… 아……! 아아……! 아……!”

버트는 크게 뜬 눈으로 자기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벌려진 허벅지 사이로 루하다의 손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찐득거리는 소리도 이전보다 심해졌다.

생각해보면 루하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뒤 음란 행위를 한 기억이 없었다. 이전에는 틈만 나면 몸을 만지게 하고 음란한 말을 속삭이게 했는데…… 요근래 그런 적이 없었다.

정말 반가웠다. 그건 루하다도 마찬가지였을까, 버트의 음부를 만지는 손길이 점점 끈적해졌다. 그것도 그럴 게 음핵을 위주로 건드리던 손길이 어느 샌가 음부 주변까지 충분히 만져주고 있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 그 다음에도…… 계속…… 피 빨아 달라 하고…… 만져줬어……”

“만지다뇨, 어딜 말입니까?”

“하아…… 학……! 힉……! 하아…… 보…… 지…… 피 빨게 하고…… 계속 보지 만져달라 했어……”

“기분 좋았습니까?”

“좋았어…… 되게 한심하단 듯이 쳐다봤는데 그것도 좋았어…… 그럼 안 되는 데 변태 같은 짓 시키는 거 너무 좋았어……”

버트는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뱉어냈다. 루하다는 그녀의 귀에 조금씩 숨을 흘려보내다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은 멈추지 않고 그녀와 시선을 얽었다. 버트의 입이 벌어졌다. 루하다는 그 입을 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맞물렸다. 입을 오물거리면서 혀가 뒤엉켰다. 느긋하게 키스를 하는 동안에도 음부를 어루만지는 루하다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씩 질 안으로 손가락이 밀고 들어왔다. 버트는 콧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허벅지로 조였다.

“흐훕­ 흐웁­ 흐웁……”

두 사람의 키스는 잠깐 숨을 쉬는 타이밍을 제외하고 끊이지 않았다. 애액이 절절 흘러넘치는 음부도 키스와 애무가 동시에 이루어지니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뜨겁다.

간다.

온다……!

온다!!

버트는 애정이 듬뿍 어린 눈으로 루하다를 보며 애액을 분사했다. 루하다는 키스를 멈추지 않고 계속 혀를 섞어댔다. 그녀가 절정하는 그 순간에도 음핵을 계속 문질러주다 천천히 음부 주변을 쓰다듬었다. 절정의 여운은 하반신 전체로 번져나가 제대로 서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하아…… 하아……”

버트는 숨을 고르며 루하다를 보았다. 그러다 그의 다리 사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발기했다.

그의 발기한 하반신을 본 순간 버트의 욕망이 무럭무럭 솟구쳤다. 실상 그가 인간화한 시점에서 유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섣불리 그를 덮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욕망이 커져서 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는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루하다…… 나……”

버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루하다랑 섹스하고 싶어.”

그 말을 들은 루하다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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