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68 브라함의 상자 中
* * *
콱
엠파이어 일족. 판타지아에서는 흔치 않은 종족이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드러커스의 미로에서만 살아가던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명칭은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 노스페라투 등 다양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뱀파이어나 흡혈귀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그리고 이들 종족으로 변하려면 흡혈을 당해야 한다는 게 세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었다.
저주로 인한 사망. 그것이 엠파이어로 종족 변경을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실제로 엠파이어가 된 플레이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권속을 늘린답시고 마구잡이로 흡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연찮게 저주까지 걸어 권속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흡혈은 식사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쮸으읍
엠파이어의 왕인 셀기디어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버트의 목을 물고 흡혈하고 있었다. 그녀를 엠파이어 일족으로 탈바꿈시키는 게 아니라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마신의 힘으로 폭주하고 있었으니 마기로 억누를 수 없었다. 완력도 조금 달리는 수준이었고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기에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신의 힘이 흘러 넘치는 상황을 예정하지 않았을까? 대비책도 세우지 않았을까?
그 해답이 바로 흡혈이었다.
“아…… 아…… 아아……”
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들오들 떨었다. 셀기디어는 피부를 꿰뚫은 굵은 송곳니와 다르게 부드럽게 허리를 안아주었다. 버트는 그의 큼직한 체구에 파묻히듯 안겨 피가 빨렸다.
버트는 덜덜 떨면서 입을 벌렸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흡혈의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송곳니가 피부를 뚫는 그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질 정도로 온몸이 저릿거렸다. 그저 오르가즘과 같은 쾌락이 아니었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감각이 살아나는…… 뭔가 전신의 감각이 잔잔하게 미쳐 날뛰는 느낌이었다.
“헥…… 헤엑……! 헥……! 헤엑……!!”
버트는 미친 듯이 경련했다. 그 어떤 애무도 없이 행복감에 가까운 쾌락을 맛보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엔실라를 향한 욕정이 단숨에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그녀의 하반신은 넘쳐흐르는 애액으로 절어있었다. 허벅지까지 범람한 애액은 그대로 흘러내려가 종아리까지 적셔버렸다.
버트는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바로 베즈웍 유적지에서 약물에 절여졌을 때였다. 조금만 건드려도 오줌을 지려버릴 정도로 예민해진 상태로 여기저기 주물러지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다름 아닌 수 백 년 동안 농축된 엠파이어의 체액. 그건 여타 합성물이 따라올 수 없는 진한 미약 성분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버트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엎어져서 헤벌쭉한 얼굴로 움찔거렸다.
한편 엔실라는 실성한 버트를 보면서 창백해졌다. 갑옷 안에서 촉수로 능욕당할 때도 정신을 못 차렸는데 버트는 단 한 방에 그녀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본래의 힘을 쓸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 셀기디어에게 물린다면……? 엔실라는 경악한 얼굴로 버트와 셀기디어를 번갈아 보았다.
셀기디어는 흡혈을 끝내고 입가를 슥 닦았다. 그러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버트에게 손을 뻗었다.
착
그 순간 그의 손목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손은 천천히 걸어나왔다.
“뭐하는 거지, 벨루그하?”
“그건 내 쪽에서 할 말이다, 셀기디어. 그릇께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리고 저기 있는 드래곤은 뭐고?”
셀기디어는 엔실라를 흘끔 보다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널 대신해서 돌봐주고 있었지.”
“피를 빨고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거냐.”
“폭주하려던 걸 억제했을 뿐이다. 온 지 얼마 안 됐다면 여기에 남아있는 힘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루하다는 그 말에 버트를 돌아보았다. 그럼에도 셀기디어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네가 네 딸년처럼 마신의 힘을 노리는 게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지? 그릇을 폭주시켜 마신의 씨앗을 취할 속셈이 아닌가?”
“폭주한 마신의 힘은 나조차도 어쩌지 못한다. 지금은 그저 운이 좋아서 편법이 먹혔을 뿐이야. 저 힘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저 여자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 없이 굴지 않아. 한 때 마신의 권위를 노렸을지언정 불가능에 목 맬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지.”
셀기디어는 그제야 루하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는 게 어때? 그릇을 짐승으로 길들여서 네 입맛대로 다루려는 셈 아닌가?”
루하다는 살벌하게 뜬 눈으로 셀기디어를 노려보았다.
“불경한 발언은 이번만 넘어가겠다. 한 번 더 그따위 말을 지껄이면 다시 지하로 파묻어주지.”
“어떤 거 말이지? 짐승으로 만든다는 거? 그것도 아니면 입맛대로 다룬다는 것?”
“네놈 족속들은 늑대 새끼들 다음으로 마음에 안 들었다.”
“어디 그림자에 숨어 사는 평면체 따위가 우리 종족을 논하더냐.”
둘이 마기를 뿜어내며 대치했다. 둘 다 적당한 수준으로 뿜어내는 게 아니라 마기가 육안으로 구분될 정도로 흘려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엔실라는 경악했다. 그녀가 아는 셀기디어는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상대는 리아주크와 함께 갈가리 찢어놓았던 둠워퍼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지?’
엔실라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셀기디어가 샤누흐와 대치할 때는 힘을 전부 끌어낸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엔실라가 놀랄 정도의 힘을 품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백신과도 견줄 수 있을지 모르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이미 사라졌어야 할 존재였다. 살아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셀기디어 못지않게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건 분명 큰 변화가 일어날 징조였다. 특히 마신에 근접한…… 아니, 마신의 발판이 되는 존재가 있는 데도 백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상자를 열어야 해!’
엔실라의 두 눈이 다급하게 둘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슬쩍 꾸물거리면서 바닥을 기었다. 드래곤으로서 자존심은 상하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급했다. 달아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지금이 적기였다.
그렇게 엔실라가 엉금엉금 기어가며 탈출을 엿보고 있을 때…… 버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거동을 할 수 있었다. 약물로 쾌락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긴 것도 있었고, 그들이 흘리는 마기 때문에 정신이 들기도 했다.
“후우우”
버트는 숨을 고르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도 피부가 저릿거렸지만 거동에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버트가 일어나니 루하다가 거짓말처럼 마기를 거두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돌아왔습니다, 그릇이시여. 다소 소동이 있어서 생각한 것보다 늦었습니다.”
“저번에 있었던 퍼드롬 아저씨 일이랑 같은 거야?”
“그 건은 해결했었습니다. 다만 비슷하게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버트는 멋쩍은 얼굴로 끄덕이다 셀기디어를 보았다.
“그럼 계속 훈련하는 건가요?”
“그릇이시여……?”
“네가 바란다면.”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턱짓했다. 버트는 고개를 돌려 꾸물꾸물 기어가는 엔실라를 촉수로 붙잡아왔다. 엔실라는 촉수가 휘감아오자 온갖 욕설을 내포한 표정으로 버트를 노려보았다. 도망치려던 순간 붙잡힌 것도 화가 났지만 갑옷 안에서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엔실라를 보았다. 그때 루하다가 말했다.
“그릇이시여. 정말 저 박쥐 녀석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까?”
“응. 마신의 힘을 제대로 쓰게 해준다고 하셨어. 아마 괜찮지 않을까……?”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셀기디어를 힐끔거리는 눈짓…… 루하다는 단숨에 그녀가 뭘 바라는지 파악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곁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응? 엉? 아, 아냐. 루하다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예?”
버트는 루하다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루하다는 버트의 말에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게, 마신의 힘을 잘못 쓰면 루하다에게 영향이 갈 지도 모르고…… 아저ㅆ 오빠가 신경 쓸 거 같아서 따로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요?”
“지상에서 일을 수습해줄 수 있을까? 검은 기사의 모습으로 해줘야 해.”
“리실버라고 했던가요. 알겠습니다.”
루하다는 리실버의 형상으로 바뀌며 돌아섰다.
“그럼 하시는 일이 무사히 끝나시길……”
버트는 루하다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셀기디어는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말했다.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만, 네가 신경 쓰였나 보군?”
“네? 아…… 네.”
버트는 다시 물린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보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가.”
셀기디어는 버트의 표정을 확인했다. 여러 사람을 본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겪으며 사람을 보는 눈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 중 하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이었다. 음란한 짓을 사서 하는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다음 느낀 건……
‘주인이나 시종이나 끼리끼리 노는 군.’
셀기디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도 정을 통해서 나탈리아를 가졌지만 여전히 애정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었다. 루하다가 버트를 향한 마음, 버트가 루하다에게 향하는 마음이 같은지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루하다에게 의존하지 않는 법도 배워야 하니까요.”
“좋은 자세군. 그럼 계속하지.”
“네, 그럼……”
버트는 엔실라를 집어 들었다. 엔실라는 경악하며 꾸물꾸물 기어 들어오는 촉수를 보며 몸부림쳤다.
*
“간만이네.”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동혁과 세영은 카페에 마주 앉았다. 분명 은송과 함께 3명이서 절친한 사이였지만 최근 들어 SNS에서조차 연락을 안 하게 되었다. 몇 달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물론 그 정도 시간으로 서먹해질 사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자리를 갖게 된 건 은송 때문이었다.
“이제 마신에 대한 정보는 캘 수 있어?”
“응. 일단 ‘그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는 다졌어. 내부 알력 다툼도 끝났으니까 마신만이 아니라 마신 할아버지라 해도 전부 캐낼 수 있을 거야.”
“자신감 넘치네.”
“그러는 그쪽은?”
“일단 계속 찾아보고 있어. 그 흡혈귀한테서 받은 자료를 보니 씨앗을 추출하거나 옮기는 건 무리인가 봐. 오히려 그렇게 무리하게 뜯어내면 본체에 영향일 갈지도 모른데.”
“음……”
세영은 턱을 괴고 고민했다.
“알고 있겠지?”
“뭐를?”
“……위험한 거.”
세영은 가이람 백작에게 붙잡혔을 때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판타지아에서는 쇼크사를 막는 방지책이 있었다. 그걸 뚫고 불법 패치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은송이나 세영은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세영은 아직까지 피부를 꿰뚫고 근육을 가르는 감각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려웠다. 그 고통이 너무 무서웠다. 지금은 모든 걸 극복하고 백작과 함께 게임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은송이 어떨지 몰랐다.
솔직히 펠론의 지하에 갇히고 방에 쳐박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태연한 자신을 탓했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고 주변 정리를 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은송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상정하지 못했다. 다행히 심한 짓을 당했을지언정 우려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뜻 넘겨 봤지만 라피에 초원에서 늑대들에게 피를 나눠줬던 일도 있었고 메두사와 전투를 벌인 것도 있었다. 분명 은송도 고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씨앗이 발아하고 신이 깨어난 그 순간. 세영이 조직의 일로 바빴을 때 동혁이 정보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은 건 신이 부활했을 때 육체를 빼앗긴다는 것이었다.
밤 세트는 리아주크의 육신. 씨앗은 정신. 그렇다면 그 정신과 육신의 매개가 되는 버트의 몸이 빼앗기는 것이다. 근데 만약 이게 로그인한 상태에서 뺏긴다면? 쇼크 수준이 아니라 어쩌면 뇌사에 빠질지도 몰랐다. 로그아웃 상태에서라면 모를까, 로그인 중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단 게 문제였다.
“알겠지.”
동혁은 덤덤하게 말했다. 세영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은송이 학업에 전념하느라 게임을 제대로 못했다 뿐이지 은근히 게이머 기질이 있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게임을 할 가능성을 넘길 수 없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잘못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이야.”
“……바보는 아니니까.”
“엄청난 짓을 당하고도 다 용서해준다며? 그게 바보가 아니고 뭐야.”
동혁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세영은 시선을 살짝 깔았다.
“사실 내가 간섭할 자격이 있나 싶어서. 게임과 현실은 구분하라 해놓고 정작 본인보다 구분짓지 못하고 있고 말이지.”
“평소 같으면 위험 운운하면서 어떻게든 말렸을 거잖아.”
“행복해보였으니까. 그리고 아마 말해줬어도 계속 했을 걸? 네가 아는 은송이 얼마나 외고집인지 잊었어?”
“알지. 알아.”
동혁은 멋쩍은 표정으로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걸 모르겠냐. 내가 그러니 고백도 못하지.”
“걔는 너랑 내가 사이 좋은 줄 알더라?”
“미친 이 상황에서 개구라 치고 싶냐.”
“나도 구라면 좋겠다, 인마.”
세영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보면 진짜 무신경 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속 깊은 애야.”
“속 깊은 애가 곁에 있는 남자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몰라?”
“나 참, 언제까지 그걸로 꽁해있을 거야. 진실을 아니 속이 쓰려?”
“브라함의 상자를 연 거 같다.”
“너도 이제 판타지아 원주민이 다 됐네. 그런 말이나 쓰고 말이야.”
“원주민은 개뿔. 역사가나 아는 말이지 뭐.”
동혁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무래도 마신과의 분리를 위해서는 드래곤과 협상 할 필요가 있어.”
“드래곤?”
세영은 동혁의 말에 아니꼬운 반응이었다.
“그것들이 백신이랑 같이 마신 잡은 건 알고 있지? 근데 드래곤과 협상이라니?”
“그렇지. 하지만 녀석들 전부가 마신이랑 등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드래곤이 몇 개체나 된다고 생각해?”
“엄”
세영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한 오 백 정도”
“10마리도 안 돼.”
“……거짓말이지?”
세영의 반응은 진심이었다. 그것도 그럴 게 당장 베톰 왕국에 있는 만트라 대협곡에 널려있는 게 드래곤이었다. 그럼 그것들은 가짜란 말인가. 동혁은 세영의 반응을 예상하다 못해 생각까지 읽은 듯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 협곡에 있는 드래곤들을 생각하는 거라면…… 아니야. 그것들도 거대한 파충류고 7성 원소 마법을 무차별로 난사하는 괴물들이지. 비늘도 단단하고 생명력도 질겨. 가장 약한 개체를 잡는 데도 전문적인 사냥꾼이나 강자가 필요하지. 하지만 아니야. 그것들은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이 아니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몬스터가 마기에 변질된 짐승이란 건 알고 있지?”
“모를 리가 있나. 그리고 그 마기가 지금 버트의 뱃속에 있는 씨앗의 근원, 리아주크의 것이란 것도 알지.”
세영은 대답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오리지널 드래곤과 몬스터 드래곤이 나뉘어져 있단 거구나?”
“맞아. 몬스터라고 해도 뉴비나 초짜들은 공략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지. 하지만 원본에 대한 기록은 그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어쩌면 지금까지 봐온 보스 몬스터들을 아득히 넘어설 거야.”
“그것도 그 흡혈귀한테 들은 거야?”
동혁은 괜히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나도 나름대로 조사해봤다고. 데이터도 훑어보고 말이야. 이 정보만큼은 확실해.”
“설정 고증까지 따지는 네게 뭘 의심해. 그 외에 다른 건? 드래곤과 협상해야 하는 선택지 말고는 없는 거야?”
“……차선책은 몇 개 준비하긴 했어. 하지만 이상적이진 않아.”
“읊어봐.”
“대비책으로 준비한 것 하나는 내가 밤 세트 하나를 갖고 있는 것. 안타깝게도 이걸 지우거나 부술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여차하면 내가 이걸 갖고 잠수 타는 거지.”
“로그아웃 해도 캐릭터는 남아 있잖아?”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그건 걱정 마.”
“다른 차선책은?”
동혁은 턱을 긁적였다.
“그것 말고는 은송이 로그아웃한 타이밍에 마신을 부활시키는 것이랑…… 남은 2개는 좀 터무니 없어.”
“뭔데?”
“버트가 마신이 되는 거.”
“……다른 하나는?”
“백신을 완전히 제거하는 거.”
*
샤누흐는 셀기디어에게서 벗어나자마자 만트라 협곡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는 어찌나 급했는지 자신의 힘을 갈무리할 생각도 못했다. 그 바람에 협곡에 기거하는 드래곤들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에게 하위종을 걱정할 여력이 없었다.
“멜그라우! 어디 있어!!”
그는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으로 수색하고 싶었지만 지금 샤누흐가 찾는 자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었다.
“멜그라우!!”
퉁
샤누흐의 눈앞에 거체가 나타났다. 셀기디어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남자였다. 그는 우락부락한 몸뚱어리를 내놓은 채 무심한 얼굴로 샤누흐를 내려다보았다.
“뭔 일이야.”
“마신이 부활했다.”
“뭐?”
멜그라우. 그는 시뻘건 머리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나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신이 부활했다는 말에 표정이 급변했다.
“웃기고 있네.”
“정말이다. 내가 똑똑히 확인하고 왔다. 엔실라 그 녀석은 마신에게 붙잡혔어.”
“하암~”
멜그라우는 하품했다. 샤누흐는 그의 반응을 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지금 하품이 나와?!”
“마신이 나타났다면 백신이 왔을 테지?”
“그건”
“옛 망상에 사로 잡히지 마라. 마신이 갈가리 찢긴 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봐서 알 텐데?”
“확실하다! 그 자리에서 마신과 싸워본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
“백신이 안 왔다며~”
“그러니까 그건…… 무슨 착오가……”
“할 얘기는 끝이냐? 그럼 자러 간다.”
“멜그라우!”
“나머지 얘기는 마르가트 그 놈에게 전해. 실질적으로 가장 강한 건 그 놈이잖아~”
“멜그라우……!!”
그는 얘기를 더 듣지 않고 가버렸다. 샤누흐는 이를 빠득 갈았다.
차라리 착각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온몸의 비늘이 거꾸로 뒤집히는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마신의 기운이었다. 그러나 멜그라우의 질문처럼 의문이 피어올랐다.
정말 백신은 뭘하고 있는 걸까?
샤누흐는 엔실라가 거친 의문을 그대로 쫓고 있었다. 마신을 갈가리 찢어놓은 그들이라면 부활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몰래 했다고 하기에는 절대 모를 수 없었다. 백신은 세계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상자를 열어야 하나?’
브라함의 상자. 이 땅의 역사에서는 동화나 신화 정도로 알려진 지식의 보고였다. 하지만 수많은 지식은 오히려 독이 되어 서로 다툼을 만들고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찬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이 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 기록이 틀린 건 아니었다. 초대의 드래곤 브라함이 지식을 전수해준 것이 변질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샤누흐가 생각하는 건 그 상자가 아니었다.
브라함은 언제나 모두를 챙기고 대비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있을 위험에 대비해 많은 수단을 준비했다. 그게 바로 브라함의 상자였다. 그래서 이건 하나의 상징이었다.
드래곤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수단!
‘……엔실라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샤누흐는 몇 번이고 고민했다. 정말 멜그라우의 말대로 자신이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엔실라가 오지 않는 건 문제가 있었다. 붙잡혔거나 살해당했거나, 뭐가 됐든 드래곤을 위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일이었다.
이건 종족 보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래곤에 견줄 힘을 가진 건 지극히 드물었다. 기껏 해야 이모탈 중에 몇 명 정도, 그게 아니면 백신이 전부였다. 마신의 수족들조차 박빙을 이뤘다.
‘만일 계속 싸우고 있을 뿐이라면? 그것도 아니면 그 녀석이 변덕을 부려서 거기에 눌러앉은 거라면?’
마신에 대한 대책도 없이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잘못 하다가는 샤누흐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엔실라가 하는 일에 간섭하게 된다. 처음 투기장에서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때 한 언약, 그건 평범한 게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자존심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상자를 열 수 없어.’
차라리 엔실라가 죽고 그 시신을 발견했다면 고민 없이 열었을 것이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깜깜 무소식. 그것이 역으로 샤누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때 샤누흐의 머리에서 떠오른 게 있었다.
‘백신.’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물어볼 이유는 충분했다. 그들이 마신을 부활시키려는 게 순리대로 가는 게 맞다면? 그렇다면 드래곤들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볼 수 없었다.
‘리아주크가 부활한다면 첫 번째 표적은 드래곤이다!’
도저히 리아주크가 백신에게 복수를 하겠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나마 만만한 건 드래곤이었다. 백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리아주크의 사살은 불가능했다. 이 말은 즉, 리아주크 하나만으로 모든 드래곤이 멸족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젠장…… 접촉이 가장 쉬운 백신이 누구였지?’
샤누흐는 백신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아드레이 왕국 쪽을 보았다. 지금은 더 이상 엔실라에 대해 떠올려선 안됐다.
백신을 만나는 것. 그는 상자를 열지 않고 백신과의 만남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
엔실라는 숨도 못 쉬고 능욕당했다. 갑옷 안에서 보낸 시간이 차라리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수많은 촉수의 공격. 게다가 버트의 정성 어린 애무가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고문을 하면 했지 이런 식으로 애정이 가득한 스킨십은 엔실라의 정신에 괴리감을 심어주었다.
‘그만 둬! 제발!’
지금 입은 촉수가 들락날락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음부나 항문도 촉수가 가득했다. 그나마 촉수가 닿지 않는 곳은 버트의 손과 입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한편 엔실라에 집중하고 있던 버트는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몇 번 폭주와 셀기디어의 흡혈을 반복하다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은 폭주가 아닌,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엔실라를 몇 번이고 겁탈하고 능욕하는 동안 버트의 뱃속에 있던 씨앗이 반응하였다. 버트가 이성을 되찾았을 때 그 결과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
또 다른 버트. 머리색만 새까만 버트가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