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67 브라함의 상자 上
* * *
‘저게 뭐야?’
퀵스는 경악하며 소리를 따라갔다. 그리고 검은 기사와 은발의 여인이 싸우는 걸 목격했다.
퀵스는 제법 오랜 시간 판타지아를 즐겼다. 그래서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았다.
척 보기에도 위험해보이는 마법이 즉발로 나간다? 지금 뜨거운 감자인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벨이라 해도 불가능할 경지였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검은 기사의 대응이었다. 아무리 빠르게 발동되었다고 해도 강력한 마법을 덤덤하게 맞아 넘겼다.
‘역시 저 놈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야!’
퀵스는 속으로 환호했다. 악몽의 성에서 보았던 커프스 골렘의 잔해. 그것 역시 검은 기사가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칼라 해변에서 메두사를 상대하는 걸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강한 힘은 조명받지 못했다. 라이벨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후에는 리실버가 다른 사람이란 게 밝혀지면서 뒤로 밀려났다.
‘이걸로 실버트리와 검은 기사, 전부 버그 혹은 그 이상의 이상한 존재란 게 분명해졌어! 가만, 그럼 저 여자는 뭐지?’
그렇게 퀵스가 의문을 품는 사이 검은 기사가 은발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그녀를 흡수하는 게 아닌가?
퀵스는 입을 가리며 경악했다.
흡수라니? 지금까지 판타지아를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이건 결코 플레이어가 쓸 만한 힘이 아니었다. 전설의 플레이어 공대장이 선보인 ‘신의 힘’이라면 다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검은 기사가 신의 힘을 취한 것인가? 그를 부리는 실버트리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퀵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기사를 지켜보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저 먼 곳에서 벼락이 몰아치고 망령이 치솟는 모습이 보였다.
기어코 세상이 멸망하는가 싶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리치 레이드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땅이 뒤흔들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렇지만 퀵스는 그 자리를 지켰다. 꿈쩍하지 않고 서있는 검은 기사를 응시했다.
‘혹시 지금이 기회인가?’
퀵스는 침을 삼켰다. 현 어쌔신 마스터는 따로 있었지만 퀵스 역시 그와 비슷한 직업군이었다.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기술은 충분했다.
판타지아에서 PK는 금지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암살자란 직책이 있단 것만으로 설명됐다. 플레이어를 죽이고 아이템과 경험치를 강탈하거나, 자는 도중에 몰래 아이템을 훔치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높은 자유도……! 그러니 상대가 약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도 비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퀵스는 갈등했다. 왠지 그의 이성 건너편에서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암살업은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지만 본능을 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종종 육감이라고 하는 감각이 피어나는 경우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뭔가 건드려선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그렇게 퀵스가 경계하는 사이 무언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퀵스는 놀라서 본능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검은 그가 두른 망토에 닿아 튕겨나가버렸다.
“헉……!?”
퀵스가 놀란 건 자기 공격이 막혀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집어든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벌떼에서도 간부진들에게만 알려진 인상파기. 그건 바로 현 아드레이 왕국의 지배자인 셀기디어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들고 있는 노인이 그 얼굴과 똑 닮았다.
셀기디어는 퀵스를 들어올리고 내던지려다 버트를 보았다. 그는 어째선지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았다. 분명 또 다른 드래곤의 기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르티몽. 알아서 처분해라.”
“예.”
셀기디어가 퀵스를 내려두고 게르티몽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죽나?’
아무리 그들이 개국 선포를 했어도 흡혈귀였다. 심지어 3대 공략불가 지역을 담당하던 괴물들! 그래서 퀵스는 게르티몽이 다가왔을 때 죽음을 예감했다. 그가 부리는 가장 약한 병사라고 해도 퀵스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하물며 곁에 두고 있는 자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받아라.”
게르티몽이 무언가를 건넸다. 퀵스가 화들짝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가 그가 건넨 게 정체 모를 증서란 걸 보고 시선을 올렸다.
“보아 하니 이모탈이로군. 어찌 하여 저 자를 공격하지 않았는지 묻지 않겠다. 섣불리 건드려서 폐하의 노여움을 사지 않은 대가다.”
퀵스는 멍한 얼굴로 증서를 받았다.
“그러니 이제 사라져라.”
“예, 예……”
퀵스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하고 후다닥 달아났다. 그리고 게르티몽은 천천히 버트와 마주선 셀기디어에게 다가갔다.
“처리했나?”
“예. 키메라 교환 증서를 건넸으니 자연히 입막음 될 겁니다.”
“쯧, 지상으로 올라오니 신경 쓸 게 많군.”
셀기디어는 게르티몽의 수완에 별 말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 일부 정권을 맡겼으니 뭘 하든 믿어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단 게 맞았다.
“그릇. 드래곤과의 승부는 잘 끝났나?”
버트는 고개를 들었다. 마기로 덩치가 부풀려져서 그런지 셀기디어와 눈높이가 맞았다. 셀기디어는 그런 버트를 응시하다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듯 한데, 자리를 옮길 텐가?”
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기디어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게르티몽에게 턱짓했다. 게르티몽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갔고 셀기디어는 그 뒤에 말을 이었다.
“구태여 자리까지 옮길 필요 없겠지. 그래, 네 뜻을 존중하지. 어차피 이 근방에서 얘기를 엿들을 놈들은 없다. 그러니 편히 얘기할 테니 들어라.”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버트의 눈을 주시했다.
“방금 네가 만난 것들은 드래곤이다. 리아주크를 산 채로 찢어버리고 우리를 이 꼴로 만든 백신들의 동조자들이지. 결국 그놈들도 우리와 같은 꼴이 났지만 말이야.”
셀기디어는 작게 웃었다.
“네가 의도 했건, 의도하지 않았 건 리아주크의 육신과 정신을 취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백신은 물론이거니와 방금처럼 드래곤들도 간섭하려 들 거다. 그 전에 백신이 찾지 않은 게 이상하긴 하지만…… 위험성은 자각하는 게 좋을 거다.”
셀기디어의 말에도 버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셀기디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역시 이모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왔다.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는 이유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한순간의 유흥이란 것도 알고 있지. 너희가 이것을 게임이라 칭하는 것도 알고 있고. 너희가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이 세계에 왔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충격이 클 테지. 네 딴에는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온갖 위험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야.”
버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 얘기를 들으면 더 복잡해질 거다.”
……
“이제는 네가 좋든 싫든 마신을 완전히 부활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얻는 건 어려울 거다. 언제 백신이 나서서 중재할지도 모르고, 방금 내가 쫓아낸 드래곤이 훼방을 놓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우리의 종족을 보전하면 된다. 벨루그하처럼 유일한 일족이 아닌 이상에야 너를 따르기는 어려운 일이지. 당장 페슈트 그 년이 함께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셀기디어는 잠시 말을 쉬었다. 그러다 버트가 흠칫 떠는 걸 보고 말을 이었다.
“물론 아예 방관하는 건 아니다. 노스페라투 기사단 중 몇을 차용해서 그들에게 남은 육신을 찾게 시켰으니 곧 결과를 물어올 거다. 아니면 그 근방에서 널 도울 수도 있겠지. 비록 전 대륙 정벌은 실패했으나 웬만한 것들은 토막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셀기디어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버트의 갑옷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철퍽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체액으로 범벅이 된 엔실라였다. 눈을 거의 까뒤집고 나신이 된 엔실라는 바닥에 쓰러져서 바들바들 떨었다. 버트는 평소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 셀기디어를 마주하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셀기디어는 엔실라를 보고, 버트를 보다 잠시 다른 곳을 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한 마디 했다.
“……방금 왔다.”
*
셀기디어는 버트에게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하는 수고를 했다. 물론 대부분 압축해서 말했지만 버트는 어느 정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요. 어차피 나머지 몸이 어딨는 지 알고 있고…… 그걸 전부 다 모으면 제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요. 그 외에도 이것저것……?”
버트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셀기디어는 그런 버트를 보다 그녀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엔실라를 보았다. 셀기디어는 드물게 생각이 많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도마뱀은 어쩔 셈이지?”
“아.”
버트는 축 늘어진 엔실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점액에 뒤덮인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뒤이어 그녀를 능욕하고 싶었지만 셀기디어가 앞에 있어서 참아야 했다. 그래서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지금은 데리고 있으려고요. 주변에 위해를 끼치려 하면 제가 혼내주면 되구요.”
“……드래곤을 말이지?”
“예…… 근데 정말 드래곤이 맞나요? 마신의 힘을 썼다고는 해도 너무 허무하게 끝났는데……”
“내가 정면으로 마주하고 즉사할 정도면 위험한 것이지. 그나마 드래곤이었으니 그 정도로 버틴 거지.”
“아하…… 그때 죽었었어요……? 죄송해요.”
“사과가 담담하군.”
“지금은 살아계시니까요……?”
“어차피 내 목숨은 여럿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버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엉망이 된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셀기디어가 다시 대화를 재개했다.
“마신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러니까…… 마기 비슷한 걸 다룬다고만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마기는 부정적인 감정……? 그런 것에 반응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맞는 말도 아니고.”
“……네?”
셀기디어는 손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피어올랐다.
“나 역시 마기를 다룬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확장의 영역일 뿐이야. 하지만 네 마기…… 즉, 리아주크가 가진 마기는 전혀 다른 물건이지. 일종의 창조의 영역이다. 없던 걸 만들어내고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게 한다.”
버트는 그 말에 자기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보았다. 그러다 손끝에서 검게 일렁거리는 그림자를 뻗어냈다.
“이렇게요?”
“그래.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아마 그 물질을 부수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건 신의 영역에 이른 자만이 할 수 있다.”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를 쥐었다. 그림자는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나와 조우했던 그 이모탈이나 백신, 전력을 다한 드래곤 정도가 그 영역일 테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제는 천연덕스럽게 구는 군. 저번에 만났을 때는 마신의 대리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부정하더니. 이제는 거리낌 없이 마신의 힘을 사용하나?”
“으음…… 뭔가 쑥스럽기도 했고……”
버트는 멋쩍게 웃었다.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대답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그래야 당신도 저를 경계하지 않을 거 같았구요.”
“……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버트가 마신의 육신이 어딨는 지 알고 있다는 말과 엔실라를 단숨에 제압했단 사실은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분명 그녀의 힘과 마주했음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태인가.”
“네?”
“순진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소심하고 나약한 척. 꽤나 쥐새끼 같군.”
셀기디어는 버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버트는 그의 그늘진 얼굴과 살벌한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뭐, 상관없다. 무너지지 않는다면 어떤 수를 쓰든 상관없을 테지.”
셀기디어는 그렇게 말하며 앞을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한참 걸어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도달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 버트는 옆구리에 낀 엔실라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드러커스의 미로가 있는 곳이자 아드레이 왕국의 입구에 들어선 순간 셀기디어가 입을 뗐다.
“네가 쓰는 힘은 몹시 조잡하다. 그러니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한다.”
“네?”
“그것까지 의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금 네가 피워낸 마기는 조잡하기 그지없다. 분명 마신의 마기지만 결과물이 형편없어.”
“그, 그래요?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어낸 건데요.”
“내가 쓰는 마법이나 저주, 육체의 변형 전부 마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다. 네 몸을 덮었던 갑옷도 그런 식으로 했을 터인데?”
“그건…… 음……”
“본능인가.”
셀기디어는 콧방귀를 푹 뀌었다. 그러더니 버트의 손목을 잡았다.
“따라와라.”
*
아드레이 왕국은 드러커스의 미로가 받쳐주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미로는 미로가 아닌 지상을 받쳐주는 기둥이자 튼튼한 성벽이 되주었다. 그 증거로 셀기디어와 버트가 내려간 지하에는 거대한 벽 곳곳에 문이 뚫려 있었다. 모르고 이곳에 왔다면 이곳이 지하가 아니라 어둑한 지상이라 생각할 풍경이었다.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붉은 벽. 그걸 훑어보던 버트는 몇 미터나 되는 입구를 보았다. 그리고 그 입구 앞을 지키는 거인들을 보았다. 드러커스의 미로 공략을 절망으로 빠뜨린 원흉 중 하나인 드라큘 수호대였다. 그들의 강함은 노스페라투 기사와 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버트에게는 악몽의 성에서 보았던 커프스 골렘과 같아 보였다.
“크다……”
버트는 멍하니 거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셀기디어는 굳이 반응하지 않고 손을 휘적였다. 그러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사병대들이 달려와 벽면의 한 곳을 두드렸다. 벽이 일부 갈라지며 문이 열렸다. 셀기디어는 말없이 들어갔고 버트는 그걸 보다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이 모습은 아드레이 왕국으로 들어서려는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었다.
“방금……”
“아드레이의 왕 아니야? 그 뒤에 따라가고 있던 건 누구였지?”
“시종 아니야? 그보다 미로 벽이 저렇게 갈라지는 거 처음 봤네.”
“아씨 빨리 흡혈귀 찍어보고 싶은데.”
“참아. 한 번 종변(종족 변경)하면 다시는 못 바꾼대.”
“그나저나 개쩐다. 이런 미로에 갇히면 진짜 뒤지겠네.”
“어…… 야, 지상에서 테러 일어났다는데?”
“뭔 소리야 그게?”
“몰라. 지금 게시판 난리 났다고 지상에서 귓 날아왔어.”
“미친……?”
*
메일드로우의 테러. 아카람 투기장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대규모 마법 학살 사건은 이슈로 떠올랐다. 그들의 목격담은 은발의 여인과 금발의 남자로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선전포고 이후에 곳곳에서 벌어진 강력한 마법은 게시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애초에 이 일이 1시간도 안 되어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이슈가 뒤늦게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걸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마법사들의 정체였다. 강력한 흡혈귀를 압살할 뿐만 아니라 반경 수 킬로 미터를 초토화시키는 마법……! 그만한 위력은 10성 마법 이상만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의 탑에서도 10성 마법사는 흔하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메일드로우에서 벌어진 마법을 재현할만한 마법사는 많지 않았다.
“대체 누구야?”
“이번 마법사를 찾기 위해 현상금이 자그마치 3천 골드가 걸렸어요.”
“안녕하세요! 지금 아드레이 왕국 메일드로우의 테러로 핫하더라구요. 우선 10성 마법이 어느 정도 위력인지 확인해볼까요?”
“지금 마븝사의 탑에스도 말이죠, 10승 마법솨가 그렇게 많지 않그든요?”
“혹시 올 클래스 매지션이 아닐까 해서 찾아봤습니다. 한 번 보시죠.”
“이건 새로운 이벤트의 전조가 아닐까 합니다. 악몽의 성에 있던 절명의 몽마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죠.”
유X브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는 이 이슈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정보 조직의 힘을 합쳐 그들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자들임이 밝혀졌다. 또한 아드레이의 지배자 셀기디어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단 것 역시 다시 한 번 강조되었다.
“나 참, 마음에 안 들어.”
공대장. 판타지아에서 명실공히 1위 길드인 퍼스트 제네레이션의 길드장이자 온갖 던전을 공략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노스페라투 기사 르와이스와의 전투였다.
용신 공대장. 그에게는 많은 칭호가 붙었지만 그 날 싸움 이후로 이 칭호가 붙었다. 드래곤 형태의 갑주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남는 드래곤의 잔상이 만들어낸 별칭이었다. 그리고 그건 틀린 이름이 아니었다.
강력한 드래곤 하나를 처단하여 얻어낸 힘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것 역시 완전한 게 아니었다. 만일 이 세트 아이템을 완성했다면 셀기디어와 싸워도 지지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공대장의 위명은 판타지아를 한다면 누구든 알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드러커스의 미로가 지상에 드러난 이후로 무너졌다. 정확히 말하면 옮겨졌다는 게 맞았다.
바로 셀기디어 때문이었다. 따로 소문을 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뒤를 캐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왕국에 전달된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을 해버렸다.
다름 아닌 길렌 백작과 골드로츠에 대한 공치사 때문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그 당시의 상황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정보가 엇갈렸다. 길렌 백작은 정체 모를 여신께서 처단하였고 자신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골드로츠는 왕을 구하러 갔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공대장은 셀기디어 토벌 때 없었다! 공대장 역시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패배했다고 토로했다. 추측은 확신이 되었고 셀기디어의 입지는 폭발했다. 아드레이 왕국이 급부상한 건 공대장의 도움도 있었다.
가장 유명하고 강한 플레이어를 쓰러뜨린 괴물! 심지어 그 종족이 벌인 전 대륙 왕성 테러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사건이었다.
“뭐가요?”
공대장의 투덜거림에 서브 마스터 유진희가 대답했다. 공대장은 그녀의 사무적인 말투에 입을 삐죽였다.
“우리가 만트라 협곡을 공략했을 때도 이렇게 말이 안 나왔잖아. 근데 테러 한 번 당했다고 여기저기서 물고 빨아주고 있단 말이지.”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예요?”
드러커스의 미로는 공대장이 공략에 실패한 지역이었다. 심지어 그곳의 보스인 셀기디어한테도 졌다. 게이머로서의 자존심도 깎였고 남자로서의 체면도 구겨졌다. 유진희는 그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대장의 불만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이에요. 셀기디어는 모르는 사람에게 졌고, 미로 공략은 실패했어요. 그러니 그냥 지나가세요.”
“그게 안 되니까 그러지.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고.”
“그럼 그 자존심 챙겨서 ‘사냥꾼들’이나 ‘보스헌터’에서 제안한 단체 사냥이나 검토하시죠. 그게 아니면 베톰 왕국에서 요청한 헥실의 무덤이나 젠카 사막 안정화를”
“와아씨…… 잠깐 다녀온 사이에 일이 그렇게 밀렸어?”
“최강국의 협력 길드에 들어오는 일이 하루에 몇 건인지는 아세요?”
“알았어, 미안해, 미안. 어째 너는 잔소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냐.”
공대장은 고슴도치 수염을 슥슥 쓸면서 탁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곳곳에 가득한 서류를 하나하나 펼쳐보던 그는 보고서 하나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익숙한 얼굴이 있어서 말이야. 생각해보니 최초의 마스터 칭호도 뺏겼네.”
“그러니 이번 일 끝나고 바로 스카이 왕국으로 가세요. 거기에 마지막 세트 템이 있다고 하니까.”
“아냐. 주어진 일은 처리하고 가야지. 최초 타이틀을 뺏긴 판국에 한 발 늦게 마스터를 따면 뭐해.”
공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살폈다. 유진희는 그가 어린 애 같으면서도 업무로 힘들어하는 그녀를 배려한다는 걸 깨닫고 옅게 웃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메일드로우의 일로 시끄러울 때…… 아드레이 왕국 아래에서 일이 터지고 있었다.
*
“끄으으응……”
버트는 지상이 메일드로우로 시끄러울 때 셀기디어와 함께 마기를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분명 뱃속의 씨앗에서 마기를 뽑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생각처럼 다룰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군.”
셀기디어조차 그녀의 운용력에 감탄했다. 분명 그를 즉사로 이끌었던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드래곤 하나는 우습게 잡을 수 있었지만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한 힘을 뽑아내야 했다.
“대체 그때는 어떻게 쓴 거지? 신기할 정도군.”
지금만이 아니었다. 엔실라를 잡을 때 뿜어냈던 힘 역시 마신의 것이었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엄”
공통점. 버트는 셀기디어와 싸울 때, 메일드로우를 날려버릴 때, 엔실라를 겁탈할 때(?), 전부 떠올렸다. 그나마 감이 잡히는 건 무언가에 몰두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감각을 되살렸지만 셀기디어의 마음에 들지 않았은 듯 했다.
그건 당연했다. 셀기디어가 바란 건 100%였다. 버트가 끌어올린 건 9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뭔가 욕망이 가득했던 게 아닐까요……?”
“욕망이 가득해?”
셀기디어는 그 말에 한쪽 구석에 던져둔 엔실라를 보았다. 그녀는 마기 수련을 하는 며칠 동안 구석에 속박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식사나 휴식은 따로 필요가 없었기에 방치해뒀다. 버트가 무엇을 했는지 몰라도 마법을 쓰거나 본체로 변하는 건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전을 위해 시야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욕망.
셀기디어가 봤을 때 버트의 욕망이 향하는 건 엔실라였다. 그렇다면…… 그녀를 매개로 마신의 힘을 끌어올리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셀기디어는 엔실라를 버트의 눈앞에 가져다두었다. 그 모습을 본 버트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 있다.”
“카흑!”
엔실라는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내동댕이 쳐졌다. 사로잡힌 모습은 자칫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샌가 버트의 눈은 엔실라의 몸 구석구석 훑어보고 있었다. 엔실라는 그런 버트를 째려보더니 으르렁거리며 침을 탁 뱉었다.
“어디 좆같은 게 얼굴을 디밀어. 어?”
엔실라의 표독스러운 표정과 말투, 그걸 본 버트의 두 눈이 헤까닥 돌았다.
“하아…… 하아……”
버트의 입가에 미소가 끼었다. 곧이어 그녀의 주변에 마기가 넘실거렸다.
‘이건……’
셀기디어가 놀라고 있는 동안 버트는 숨을 헐떡이며 엔실라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엔실라는 창백해져서 발버둥 쳤다.
“저리 가! 꺼지라고!! 다가오면 죽여버리겠어!! 씨발 농담으로 보여?! 어!?”
“그만. 대강 알았으니 이제……”
엔실라가 발버둥치는만큼 버트의 얼굴이 붉게 달았다. 그 모습에 셀기디어가 버트를 부르며 제지했다. 하지만 버트는 계속 엔실라에게 다가갔다. 셀기디어는 핏줄기를 일으켜 버트를 사로잡으려 했지만 모래알처럼 부서졌다.
‘안 되겠군.’
셀기디어는 버트가 폭주했음을 깨달았다. 마기로 사로잡는 건 어려운 일. 그렇다고 힘을 썼다가는 역으로 그가 죽을지도 몰랐다.
단 한 가지 방법. 셀기디어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버트의 뒤로 다가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