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6 아카람 투기장 下
* * *
버트가 엔실라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샤누흐는 또 다른 존재와 조우하고 있었다.
“셀기디어.”
“몇 백년 만인가.”
거대한 덩치, 중년의 외견과는 어우러지지 않는 풍성한 수염. 드러커스의 미로를 지배하며 아드레이 왕국을 선포한 셀기디어가 샤누흐의 눈앞에 있었다.
샤누흐는 셀기디어를 향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꽤나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었더군.”
“무슨 소리지?”
“마신의 부활이라…… 역시 너희 수족은 절멸하는 게 맞았건만…… 백신들만 아니었다면 너희는 진즉 죽었을 것이다.”
셀기디어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도통 모를 소리를 하는 군. 그리고 리아주크를 해한 것도 백신이다. 그것들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마신을 되살려서 어쩔 셈이지? 게다가 지상으로 꾸득꾸득 기어올라 와서 왕국을 만들다니 말이야.”
“구태여 말해줄 필요가 없지. 오히려 이쪽에서 이런 난장을 벌인 이유를 묻고 싶군.”
“이쪽도 말할 필요가 있나?”
둘의 기싸움은 강렬했다. 셀기디어를 따라나온 게르티몽조차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하나는 리아주크의 혈족 중에서도 강한 개체였고 다른 하나는 그 신을 죽이는데 일조한 드래곤이었다. 둘 다 온 힘을 끌어내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 여파만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콰작
샤누흐가 한 발 전진했다. 동시에 그가 내뻗은 정권에서 빛무리가 일렁였다.
쩌엉
그의 주먹에서 뿜어진 번개가 셀기디어를 관통했다. 셀기디어는 망토로 몸을 덮어 번개의 경로를 틀어버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망토에서 {뱀의 채찍}을 발현하여 샤누흐를 공격했다. 샤누흐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공격을 막아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벌어진 공방! 그 후 둘은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짙게 깔린 원념이여……”
“창공에서 휘몰아쳐라.”
주변 일대의 땅이 검게 물들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잔잔하게 우레가 퍼졌다.
10성 마법 {역류하는 원혼격}
10성 마법 {번개 소나기}
끼아아아악!!
쩌저적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는 혼이 솟구쳤다. 하늘에서 샛노란 번개가 수 백 발이 떨어졌다. 혼과 번개가 충돌하자 곳곳에서 피부가 저릴 정도의 파장이 터졌다. 그렇지 않은 곳은 영혼에 휩쓸려 미쳐버리거나, 번개에 직격당하고 새까맣게 익어버렸다.
어찌 보면 끔찍한 파괴 현장이었다. 물론 샤누흐는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려 했으니 틀린 건 없었다. 하지만 셀기디어는 아니었다. 샤누흐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마법을 썼을 뿐이었다. 셀기디어가 대처하지 않았더라면 이 곳 생명체들은 물론 지하의 드러커스의 미로도 위험했을지 몰랐다.
“조잡하군. 너희 파충류는 발전이 없나?”
“지하에 쳐박혀 사는 놈들이 보이는 게 있을까.”
“아무렴 백신들에게 휘둘려 사는 것들보다는 자유로울 테지.”
“지저분한 날짐승 새끼가……”
둘은 신랄하게 비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승리한 건 셀기디어였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 데 발끈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봐서 어쩌려는 거냐. 여기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그러지 못할 걸 알고 있다. 우리가 지하에 유배된 것처럼 말이지.”
셀기디어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샤누흐는 물론 엔실라조차 본래의 힘을 전부 끌어내지 못했다. 그것이 백신과 맺은 계약이었다. 그리고 드래곤들처럼 리아주크의 수족들 역시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했다.
샤누흐가 이걸 모를리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사단을 일으킨 것이다.
백신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수 백 년이 지났다. 백신들의 간섭이 느슨해졌든 그들이 사라졌든 이건 좋은 기회였다. 자존심 강한 드래곤들에게 억제된 삶은 힘겨웠다. 그런 찰나에 리아주크의 수족이 세계를 뒤흔들 소동을 벌였다. 그런데도 백신은 나서지도 않았다. 엠파이어 일족은 지상으로 나타나 개국까지 선포했다. 그들은 리아주크의 수족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부류였다. 그런 녀석들이 행동에 나서는 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너희가 올라왔으니 우리가 그 힘을 발휘해도 관계 없을 테지.”
샤누흐가 히죽 웃었다. 그의 입 안에는 비대해진 송곳니가 삐져나왔다. 과도한 흥분으로 인해 변신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과연 네가”
셀기디어가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샤누흐 역시 같은 곳을 보았다. 둘 다 그 순간 꼼짝할 수 없었다. 한순간 느껴진 파장, 그건 결코 정상적인 힘이 아니었다. 그리고 둘 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마신이 살아났어?”
샤누흐는 크게 뜬 눈으로 셀기디어를 보았다.
“기어이 일을 저질렀구나!!”
샤누흐의 외침. 셀기디어는 그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여 힘을 모았다. 그러나 샤누흐는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온몸에 금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셀기디어는 샤누흐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게르티몽을 보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두 사람이 보던 곳을 보고 있었다.
“왕이시여. 이게 대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몰랐겠군. 내 일곱 번 째 죽음을 가져간 자의 힘이다.”
“말도 안 됩니다! 이게 ‘고작’ 그릇이라니요?! 이건 마치……!”
“그래.”
셀기디어는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신 리아주크, 그의 힘과 같다.”
*
엔실라는 버트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버트는 그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엔실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거…… 꼭……’
엔실라의 두 눈이 떨렸다. 이건 분명 그의 힘이었다.
존재감만으로도 대륙을 뒤덮을 거인의 형상을 만들어낸 존재. 마신 리아주크의 힘이었다. 이건 그저 마신을 모방하거나 만들어낸 수준이 아니었다. 뒤늦게 엔실라의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위험하다!
처음에는 장난이 반이었다. 하지만 싸움을 거듭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힘을 완전히 개방했을 때는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불과 몇 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탓
버트는 느릿하게 뒷걸음질 치는 엔실라에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반격할 기세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엔실라는 공격은커녕 계속 뒤로 피하기만 했다.
‘뭐지……?’
버트는 혹시 자신이 끌어낸 힘이 잘못 된 건가 싶었다. 셀기디어를 즉사시키고 엔실라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힘! 하지만 그 힘이 너무 큰 나머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이전에는 씨앗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현했다지만 지금은 순수하게 모든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마기를 끌어내고 형상화하던 훈련. 그것이 마신의 힘까지 만들어냈다. 애초에 둘이 큰 차이는 없었으니 문제는 없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버트가 이 힘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알고 있는 게 있었다.
‘갖고 싶어.’
마기는 잠식된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를 일으킨다. 그건 버트라고 해서 면역인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마기에 침식되면서 버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화했다. 그 증거로 로그인을 하기 전과 후의 버트는 눈에 띄게 달랐다.
버트는 이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인 후부터는 마기가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마기에 스스로 먹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버트는 손을 뻗었다. 엔실라를 보는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감정을 느낀 것일까, 엔실라는 당황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그때 버트가 손을 쥐었다. 그러자 엔실라가 허공에 묶였다.
‘이건’
엔실라가 당황하여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엔실라가 처음 느낀 건 마법과 같은 형식의 속박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건 분석이 끝난 뒤였다.
‘수식이 없어.’
주문이나 술식이 없는 힘. 그러나 엔실라를 손쉽게 묶어버릴 수 있는 힘. 12성 마법이라고도 알려진 궁극의 규칙.
‘명령어……?’
엔실라가 당황하는 사이 버트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덩치의 검은 기사의 형태였지만 투구 아래로 그녀의 욕망 어린 표정이 그대로 보이는 듯 했다.
“갖고 싶어.”
버트는 웃었다. 섹스와 쾌락으로 길들여지고 흥분과 열락을 추구하며 살던 그녀가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취하고 싶었다. 발르틴에서, 악몽의 성에서, 밀림에서, 여러 형태로 동성과 몸을 섞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자의적인 건 없었다. 있다 해도 섹스 자체에 적극적인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버트는 엔실라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넘쳐흐르는 소유욕은 성욕으로 바뀌었다. 몇 번이고 실신할 정도로 해오면서 단련된 버트의 정욕이 그저 단순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강렬하게 발정하고 있었다.
“뭐, 뭐……?”
엔실라는 화조차 내지 못했다. 헤까닥 돌아버린 듯한 그녀의 기세와 마신의 힘이 겹쳐졌다. 곧이어 그녀의 내면의 욕심이 엔실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엔실라는 소름이 쫙 끼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위협을 당해본 건 손에 꼽았다. 당연히 두려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공포였다. 소름이 끼치고 머리털이 쭈뼛 섰다.
지금 버트는 엔실라를 겁탈하려 했다. 그것도 단순히 번식을 위한 게 아니었다. 버트의 욕심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집어삼킬 기세였다.
잡아먹힌다!
집착. 광적인 흥분. 비정상적인 감정. 그것들이 엔실라의 몸과 머리로 스며들었다.
사르륵
버트는 손을 뻗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취해버리고 싶었다. 남자들에게 느끼는 정욕이 동성에게도 느껴졌다. 자신이 페이니와 섹스했을 때처럼 이 여자와도 섹스하고 싶었다. 완전히 집어삼켜서 자신처럼 이성이든 동성이든 가리지 않고 발정하는 변태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아…… 하아……”
버트의 맛이 가버린 두 눈이 엔실라를 응시했다. 엔실라는 그 눈을 볼 수 없었지만 죽음 이상의 위협을 느끼며 숨을 들이쉬었다.
엔실라는 자신에게 박힌 봉인을 풀었다. 백신이 걸어둔 봉인이었고 당연히 이걸 풀면 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무슨 처분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봉인을 풀었던 드래곤 하나가 사라진 걸 보면 즉각 사살할 게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봉인을 풀어야만 했다. 고작 20퍼센트도 안 되는 힘으로는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빠지직
봉인을 풀면 원래 형태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의 육신은 강대한 힘을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어?”
엔실라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몸에 변화가 없었다. 혹시 봉인이 풀리지 않았나?
아니다. 풀렸다! 힘은 제대로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변신이 풀리지 않았다.
설마?
엔실라는 버트를 보았다. 변신을 하지 못하게 억제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체가 조금 무너지겠지만 그렇다고 힘을 못 쓰는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는 행위다!
‘빙결.’
엔실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까지 동작을 동반한 마법은 생각만으로도 발현할 수 있었다. 그 위력은 이전과 비교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버트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드래곤의 마법을 정면에서 돌파할 수 없었다.
쩌적
얼어붙는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빙결의 힘은 시간과 공간조차 붙드는 극강의 힘. 엔실라가 작정하고 이 힘을 쓰면 어떤 생물도 그대로 고착되어버린다. 죽기 직전의 인간이라도 그 상태로 수 백 년 동안 멈추게 된다.
엔실라는 버트가 멈칫거리는 걸 보며 환호했다.
통했다! 아무리 신의 힘을 다룬다고 해도 진짜 신이 아닌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리아주크가 아니고서야 드래곤이 전력으로 발휘한 마법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엔실라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엔실라가 아니라 해도 누구도 상정할 수 없었다.
투둑
버트가 움직였다. 엔실라는 순간적으로 사지가 고정되어 있단 것도 잊고 몸부림칠 뻔했다.
드래곤의 마법에 저항했다. 봉인으로 약해진 어정쩡한 마법이 아닌 온전한 힘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버트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엔실라의 머릿속에서는 그 가정이 맞지 않았다.
‘리아주크의 힘이 부활했어? 왜? 그러면 백신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엔실라는 상황이 이상하게 됐음을 확신했다. 그것도 그럴 게 그들이 가한 봉인을 풀면 백신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들이 오지 않았다. 엠파이어 일족이 지상으로 드러났음에도 제지하지 않았다. 마신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있는 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백신들 전부 사라진 거야? 아니면 직무유기?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뜻.
‘인정 못해!!’
엔실라는 눈을 부릅 떴다. 그녀가 가진 힘은 빙결만이 아니었다. 고유한 능력이 빙결일 뿐, 인간들이 10성, 11성 마법이라 하는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걸 전부 발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엔실라의 시야가 꺼져버렸다.
‘뭐야?’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버트가 눈앞에 있었다. 사지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온몸이 뭔가에 뒤덮인 것처럼 갑갑했다.
“어……”
엔실라는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버트는 엔실라를 빨아들였다. 사지가 속박된 엔실라를 그대로 덮쳐 갑옷 안으로 이끌어 들인 것이다. 그래서 엔실라는 버트와 마주 보며 딱 붙게 되었다. 본래보다 덩치를 불린 갑옷 안이었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니 꽉 끼어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검은 기사가 엔실라를 흡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틀리지 않았다. 갑옷 안에서 두 사람은 하나가 된 것처럼 밀착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버트는 크게 뜬 눈으로 엔실라를 보고 있었다. 코가 맞닿는 거리에서 보고 있었지만 엔실라의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백발과는 달리 반짝이고 윤기가 흐르는 은발. 크고 선명한 은색 눈동자와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머리칼이 가지런히 자리 잡은 깨끗하고 넓은 이마, 잘 정돈된 눈썹, 홍조가 옅게 물든 뺨.
정말 미인이었다.
탐하고 싶다. 범하고 싶다. 삼키고 싶다. 따먹고 싶다. 덮치고 싶다. 취하고 싶다.
버트의 두 눈은 엔실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했는지, 왜 공격한 건지 생각하지 않았다.
아
버트의 입이 엔실라의 입을 덮었다. 엔실라는 상황 파악 중이라 버트의 키스를 인지할 새도 없었다. 오직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다 입술이 맞물려버렸다. 엔실라는 버트의 혀를 깨물었다. 자기 입을 파고드는 혀를 그냥 둘 그녀가 아니었다.
쮸웁
그러나 엔실라는 버트의 혀를 씹을 수 없었다. 머리를 뒤로 빼지도 못하는 데 질긴 고무를 씹는 것처럼 혀를 끊어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버트는 자기 입맛대로 엔실라의 입술을 탐했다. 엔실라가 손을 꼼지락거리자 버트의 손이 붙잡았다. 깍지손을 끼어 버리니 그나마 움직일 수 있던 손목조차 봉쇄되어 버렸다.
“으웁! 우웁!!”
키스라니? 세상에 어떤 미친 여자가 동성이랑 키스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방금까지 죽일 듯이 싸운 데다 인간도 아닌 드래곤과 키스라니?
엔실라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이번 사태로 정신에 이상이 생길 거 같았다. 이렇게 엔실라가 당황하는 와중에도 버트는 계속 혀를 움직이고 있었다. 버트가 아쉬워하는 건 갑옷의 틀과 자세 때문에 정면에서 끌어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버리면 엔실라의 팔이 꺾여버릴 것이다. 그래서 버트는 키스밖에 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쯔욱
하지만 버트가 누구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섹스와 능욕을 경험한 여장부(?)였다. 그녀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으웁?!”
엔실라는 버트의 혀를 씹어대는 와중에도 이상한 짓거리를 감지했다. 몸 곳곳을 찔러대는 물컹하고 불쾌한 촉감……! 버트는 갑옷 안에서 손을 대지 않고 엔실라를 능욕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바로 촉수였다. 갑옷 자체도 마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거기에서 촉수를 뽑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촉수에 감각을 연결하는 게 어려웠다. 여러 방향에서 엔실라의 모든 걸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촉수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리고 벌어진 기적……! 촉수를 써본 적도 없는 버트가 수 십 가닥의 굵직한 촉수로 엔실라의 몸을 훑어댔다. 그것도 엔실라가 소름이 끼쳐 질색할 정도로 끈적한 움직이었다.
촉수는 엔실라의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더듬으며 팔을 타고 올라갔다. 사지에 네다섯 씩 붙기도 하고 배나 옆구리에는 여러 촉수가 끝으로 문질러댔다. 그 중 절반은 옷 속으로 파고 들어 맨살을 탐했다. 엔실라의 피부의 8할 이상은 촉수가 뒤덮게 되었다.
“하아…… 후웁…… 웁……”
버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버트는 본능 반, 이성 반으로 촉수를 움직였다. 촉수는 꾸물꾸물 기어 올라와 엔실라의 귀를 만져댔다. 그러다 머리와 목을 잡고 고개를 살짝 틀게 해서 입술을 완전히 맞물리게 했다.
숨결조차 빨아들이는 키스……! 엔실라는 이대로 영혼까지 뽑혀나간다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째서 자신의 전력이 해방되어도 빠져나갈 수 없고, 혀를 씹을 수조차 없단 말인가. 버트는 뭐가 좋다고 이렇게 키스를 해대며 촉수는 언제까지 자신의 몸을 훑어대는 건가.
‘생각보다 좋아. 서늘한 느낌도 들고…… 촉촉하고 부드러워……’
반면 버트는 좋아 죽었다. 엔실라의 입 안은 정말 향기로웠다. 촉촉한 혀도 좋았고 입술과 입 안의 부드러움도 좋았다. 촉수에서 느껴지는 미끈한 피부 질감도 환상적이었다. 특히 여러 개의 촉수가 한 번에 받아들이는 행복한 감각은 버트의 뇌가 애무받는 느낌이었다. 분명 엔실라를 더듬는 건 버트였는데 느끼는 것 역시 버트였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사정하고 싶었다. 남자들이 자신에게 정액을 뿌리는 것처럼 엔실라도 더럽히고 싶었다. 내면의 모든 색욕을 배출하고 싶었다.
그 바람과 욕망은 고스란히 새어나왔다. 그저 엔실라를 더듬고 문지르던 촉수는 이제 진액을 뿜어냈다. 물컹하고 불쾌한 촉감은 질척해지면서 한 층 더 끔찍해졌다.
쯔덕 쯔덕
버트는 키스를 멈추고 입을 뗐다. 그리고 헤벌쭉한 얼굴로 엔실라를 보더니 그녀의 코를 깨물었다.
“으웃…… 큿……! 무슨 짓…… 카흑……!”
엔실라는 입이 떨어지자마자 표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도 금세 삼켜지고 말았다. 어째선지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이런 고양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엔실라가 이런 낯선 감각을 느끼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마기의 침식. 엔실라를 집어삼키려는 버트의 욕망이 고스란히 마기에 반영되었다. 특히 색욕으로 빚어진 마기는 엔실라의 모든 감각을 폭주시키고 발정시키게 만들었다. 이건 거의 재창조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마신의 마기를 여과 없이 사용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나마 엔실라가 미치지 않은 건 그녀의 정신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육신 역시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단숨에 변화하여 몬스터가 됐을 것이다.
“읏…… 흐읏…… 당장 놔……! 이 미친……!”
엔실라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촉수들이 행동에 나섰다. 살짝 벌어진 입에 침투한 것이다.
쯔걱
그리고 엔실라에게 침투한 촉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으우웁?!”
옷 속을 비집고 들어가 난리를 치던 촉수들. 그것들은 음부와 항문에까지 꿰뚫었다. 그 어떤 애무도 없었다. 하지만 삽입이 그렇게 난해하지 않았다. 촉수가 엔실라의 피부를 찢기 직전까지 유연하게 뭉개지며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살이 찢기는 게 아니라 버트가 정신줄을 놓고 촉수를 삽입했단 점이었다.
질에 삽입된 촉수는 단숨에 자궁까지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 가닥으로 분리 되어 자궁과 질벽을 미친 듯이 휘저어댔다. 항문에 삽입된 촉수는 내장 곳곳을 긁어대며 요동쳤다.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간 촉수는 목구멍으로 침입하여 목젖까지 압박해버렸다.
그래서 엔실라는 온갖 감각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구토감이 치미는 상태에서 배가 쑤시고 배설욕이 자극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토할 수도 없었고 배설도 못했으며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저 질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촉수에게 수없이 찔려대는 게 끝이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촉수들은 엔실라의 육신을 한계까지 능욕했다.
버트는 엔실라가 눈을 뒤집을 때 쯤 입에 박힌 촉수를 빼냈다. 엔실라는 침과 점액을 뱉어내며 기침했다.
“커흡……! 케헥……! 크흣……! 흐읏……! 으흑……! 흑……!”
하지만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입에서 촉수가 빠졌다고 해서 음부와 항문을 찔러대는 촉수가 멈추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엔실라는 발을 버둥거리면서 버트에게 붙잡힌 손을 꽉 붙잡았다. 아랫도리가 근질거리다 못해 폭주하는 감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만……! 그만해……!”
엔실라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엔실라도 지금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되었다가는 그녀의 존재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버트가 그걸 들어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발악하는 게 버트를 더욱 발정시키는 꼴이 되었다.
“귀여워.”
“뭐……? 이 미친 새끼……! 끄윽……! 멈추라고……!!”
푸걱 푸걱
촉수는 더욱 난폭하게 날뛰었다. 배 위에 촉수의 움직임이 보이고 엔실라의 몸이 들썩일 정도였다. 고작 몇 분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몇 번을 찔렸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빠르고 폭급하게 엔실라의 구멍을 찔러댔다. 그러면서 그녀의 몸에 억지로 쾌락을 주입하고 각성시켰다.
변질된다……!
변이한다!
변화한다!!
엔실라는 서서히 차오르는 위기감에 정체 모를 고양감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그것이 오르가즘이란 걸 알기까지 길지 않았다. 엔실라는 눈을 까뒤집으며 조수를 뿜어냈다. 그 뒤를 이어 오줌 줄기가 뿜어지며 갑옷을 가득 채웠다.
버트는 웃었다. 갑옷 안에 갇힌 채 능욕 당하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촉수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엔실라는 갑옷에 사로잡힌 채 버트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