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65화 (65/104)

〈 65화 〉 65 ­ 아카람 투기장 中

* * *

“뭐?”

엔실라는 히레이즈가 손을 뻗는 순간 그대로 굳혀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웬걸, 히레이즈는 갑자기 손가락 3개를 펼치고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그쪽과 저희 아드레이 왕국의 대표, 3:3 대장전을 요청합니다.”

히레이즈의 말은 당돌했고 터무니 없었다.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제안을 하며, 무엇보다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3:3이라니? 우린 둘 뿐인데?”

“그래서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승자는 계속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패자는 거기서 탈락. 그렇다면……”

“둘 뿐인 우리는 둘 다 지면 끝이란 거냐?”

“맞습니다.”

차라리 2:2를 제안했더라면 그냥 내쳐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히레이즈는 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 들었다. 다소 지루한 듯한 느낌에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 그걸 토대로 그들에게 몇 가지 함정을 걸었다.

어차피 이건 그들이 선포한 거랑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그저 말을 교묘하게 비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둘에게는 잘 먹혀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째는 아드레이 왕국이 작정하고 내보내는 정예를 볼 수 있다는 기대 심리, 둘 째는 둘이 아닌 셋이라는 여백을 만들면서 만들어진 허점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을 언급한 순간 그들의 관심은 거기로 쏠렸다. 그야말로 충동 어린 아이를 달래는 수단이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하나를 더 데리고 오면 어때?”

“그러셔도 상관없습니다. 당신께서 이 제안을 받지 않고 저와 계속 싸우셔도 저는 그걸 억제할 힘도, 반항할 위치도 아니니까요.”

엔실라는 히레이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섰다. 그녀의 모습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언제? 지금 당장 그 셋을 불러올 형편은 아닌 거 같은데?”

“물론입니다. 그래서 하루 정도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하루? 너무 길어. 무슨 수작을 부리려­ 으흥­ 그래, 하루로 하자.”

엔실라는 말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히레이즈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곳에 지내시는 동안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이용하든 비용 청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흡혈귀들 동네에 뭐 놀 데가 있겠냐만. 그래, 까짓거 들어주지. 하지만 그 3:3, 너희가 지면 멸국이야.”

“알겠습니다.”

히레이즈는 대답과 동시에 물러났다. 그는 둘이 투기장을 떠나기 직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히레이즈 역시 지하로 가기 직전 관중석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 속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자신에게 공포를 깨우치게 해준 사람. 마신의 부활을 이루어줄 그릇.

*

“네……?”

“부탁드립니다.”

버트는 이 광경을 다른 관중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러다 금방 자리를 떴다. 그녀가 바란 건 귀여운 합성생물을 보는 것이지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게 아니었다. 돌발 이벤트 느낌도 들긴 했지만 지금 그녀는 이런 곳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 게임을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끼어 들지 않고 키런 왕국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머리 남자가 그녀를 막아섰다. 자신을 히레이즈라 밝힌 그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버트에게 한 부탁이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같이 싸워 달라 하시면……”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릇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릇. 생각해보면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이상했다. 페이니의 말대로라면 이들의 왕인 셀기디어도 리아주크의 신하고, 자연스레 그를 따르는 엠파이어 일족 역시 리아주크의 권속이 됐다. 물론 그의 딸인 나탈리처럼 별종이 아닌 이상 버트의 정체를 알면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진 힘은 무궁무진 했으니까!

“그래도……”

“바라시는 걸 드리겠습니다. 이미 첫 만남에서 당신의 심연을 꿰뚫어 본 바…… 그릇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버트는 히레이즈의 말에 마음이 혹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음심을 들킨 것일 테고…… 성욕을 충족시켜줄 요소는 충분히 많았다. 아무리 버트가 사람 좋고 충동적이라고 해도 귀찮아질 일에 선뜻 발을 들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충분히 만족시키리라 장담합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히레이즈의 단언은 버트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버트는 조금 고민하면서 슬쩍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쳤다.

솔직히 말해 이 게임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편법이지만…… 아예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일에 휘말려보기로 결정했다.

“뭐…… 부탁은 대강 알 거 같은 데요. 근데 제가 그렇게 강하진 않아요.”

“농담이시죠……?”

히레이즈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버트는 그의 반응에 오히려 머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를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시는지는 모르겠는……”

버트는 말을 하다 말고 히레이즈의 얼굴을 보며 경악했다. 뒤늦게 버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한 사람이 떠올랐다.

드러커스의 미로 공략 때 만났던 사람!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나 갑자기 머리털이 우수수 빠지며 쓰러졌던 사람! 버트는 히레이즈를 떠올리자마자 식은땀을 뽈뽈 흘렸다.

‘이거 실수한 거 아니지……?’

버트는 라이칸의 일족을 학살한 전례가 있었다. 비록 셀기디어와는 전투까지 벌였다지만 제법 강해보이고 신임하는 부하로 보였다. 버트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지만 악몽의 성에서 몽마들의 반응도 있었고…… 그녀가 가진 씨앗으로 사단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설마 그녀로 인해 셀기디어의 부하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버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 혹시 여기 왕이랑 어떤 관계신가요?”

버트는 말을 하다 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히레이즈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본래 게르티몽의 제자로서 셀기디어 님을 보필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 이곳 투기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버트는 그의 대답에 방긋 웃었다.

‘나 때문이야? 그래서 은퇴한 거였어?!’

버트는 히레이즈의 대답으로 자신의 실수를 확신했다. 니스나 라이였다면 그냥 모른 체 넘어갔을 테지만 버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작스레 사과를 던지진 않았다. 그저 이곳에 머물 구실이 히레이즈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아하…… 그렇군요…… 근데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아까 투기장에서 본 두 사람이랑 싸워달란 건 아니죠?”

“맞습니다.”

“으으음­”

역시나. 버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분명 싸울 게 뻔했고 이 일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신경 쓰였던 문제가 하나 있었다. 셀기디어와의 싸움에서부터 느꼈던 이질감. 일단 그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버트는 일단 히레이즈에게 알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 뒤 시간을 약속받고 자리를 떴다.

*

버트는 투기장 근방에 자리잡은 술집에 와있었다. 음주 자체는 문제가 없었고 이곳에서의 식사는 실제 식사와 동일한 느낌을 주었다. 맛이나 온기, 식감 전부 생생했다. 판타지아가 게임 산업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게 된 강점 중 하나였다.

버트는 맥주와 조각 치킨들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여기는 합성생물로 유명했으니 치킨도 이상한 생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입 먹을까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안녕?”

서늘한 느낌. 이 사람이 지나갈 때 느껴지는 한기로 대강 정체는 알았다.

은발의 미녀, 엔실라였다. 그녀는 허락도 않고 치킨 한 점을 집어먹었다. 그 옆에는 금발의 미남 샤누흐가 앉았다.

“정말이지, 음흉한 새끼라니까. 설마 흡혈귀 놈들 지하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저기, 무슨 소린지……”

콰삭­ 콰삭­

엔실라는 치킨을 씹었다. 바삭한 튀김옷 소리가 울렸다. 버트는 그냥 먹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 엔실라는 치킨을 두 어점 더 먹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를 낼름 핥으며 말했다.

“마신을 되살리려는 거잖아. 그렇지?”

마신. 버트는 부정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뱃속에 마신의 씨앗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엔실라는 다른 오해를 하고 있었다.

“꽤나 정교하네. 마신의 힘을 여기까지 끌어냈을 줄이야.”

엔실라는 솔직한 심정으로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마신을 이 정도로 구현을 하다니. 그리고 심심하고 지루한 그녀의 일상에 동기 부여를 해주다니.

그래서 웃었다. 엔실라는 미친 것처럼 웃었다.

버트는 엔실라가 갑자기 낄낄 웃다가 폭소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다 넘실대는 한기에 시선을 내렸다. 어느 샌가 바닥이 얼어붙고 버트의 두 다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흡혈귀처럼 도망치진 못할 거다!”

엔실라가 손을 활짝 펼치며 할퀴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냉기가 극한으로 응집되었다. 조금만 스쳐도 살이 찢기고 피가 얼어붙을 것이다.

쩌억­

그러나 엔실라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버트가 팔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막은 것이다.

진심이었다. 비록 힘이 억제되었다고 해도 보고 피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히레이즈의 경우 특수했다고 쳐도 설마 버트까지 이렇게 막아버릴 줄 몰랐다.

그러나 엔실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

암살자 퀵스. 그는 마스터 위치에 가까웠지만 최초의 마스터 자리는 엉뚱한 사람이 낚아챘다. 시프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좀도둑 세트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런 퀵스는 지금 이곳 메일드로우에서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블랙 남작의 행보를 계속 쫓아야 했지만 이제 그에 대한 이슈는 없는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골드로츠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플레이어 최초의 백작위! 일개 남작위가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퀵스가 생각하기에 최고의 이슈는 블랙 남작이 분명했다. 벌떼는 이미 파틸카 요새에서 벌어진 일의 배후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블랙 남작과 그녀의 기사들이었다. 특히 갑작스레 메일드로우가 반파된 원흉은 그들 중 기사 리실버의 소행임이 분명했다.

그들에 대해 캐물으면 엄청난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리실버는 판테스 왕국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었다.

‘다른 벌떼 녀석들도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특히 그 꽉 막힌 지부장!’

퀵스는 단독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벌떼의 강점은 많은 머릿수와 정보였다. 그 모든 이점을 버리고 개별 행동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퀵스는 악몽의 성 이후로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블랙 남작의 수하였던 기사들의 전 근무처인 델폰 남작의 영지도 들렀다. 블랙 남작을 수하로 두고 있는 마룬 자작이 다스리는 땅도 가보았다. 당연히 블랙 남작의 다크나이트도 염탐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기껏 해야 왕왕 라이칸슬로프와 교류를 한다 뿐이지 일반적인 귀족과 다를 바 없었다.

정말 같은 플레이어가 맞나? 그녀가 해낸 업적을 떠나 하는 짓이 이해할 수 없었다. 워커홀릭이 아닌 이상 업무에만 치중하는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은 즐기는 것인데 누가 일을 하고 싶어 할까.

‘설마 위장한 MPC?’

퀵스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세웠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블랙 남작은 가짜, 진짜는 정체를 숨기고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마뜩찮은 가정이었다. 구태여 자신을 숨길 필요가 뭐가 있을까. 물론 초창기에 최초 귀족이라는 아명을 쫓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해할 수 없는 플레이가 된다.

“전혀 모르겠어.”

퀵스는 저 멀리 보이는 투기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아드레이 왕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대규모 실험 소식을 듣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가장 큰 목적은 지하에 숨겨져 있는 아드레이 왕국의 본거지였다.

분명 거기에 블랙 남작에 대한 단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판타지아에 있어서는 거의 신화인 ‘공대장’이 찾아온 장소였다. 아직 캐내지 못한 정보가 많았다.

지금 그의 목적은 두 가지. 블랙 남작의 정보와 승진을 위한 엑기스였다.

콰앙­!!

그러나 이런 퀵스의 의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방금 그 소리는……?’

퀵스는 폭음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보게 된 건 은발 미녀와 조우하고 있는 검은 기사였다.

*

엔실라는 공격이 막힌 직후 함성을 내질렀다. 그 압력이 어찌나 강한지 버트를 밀어낼 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까지 파괴했다. 샤누흐는 덤덤히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반면, 버트는 벽을 박살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정체를 들키면 안 돼……!’

버트는 아직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유명하지 않았다. 귀족계에서는 종기사로 알려져 있으니 일을 벌려선 안됐다. 가장 큰 이유는 페이니에게 혼나기 때문이었지만……

츠츠츳­

공중으로 날아온 버트의 몸이 그림자로 뒤덮였다. 두터운 갑주가 만들어지고 몸 곳곳에 뾰족한 돌기가 솟아났다. 덩치는 갑주가 겹쳐지며 훨씬 커졌다. 그렇게 땅에 내려앉을 때는 2미터가 넘는 덩치의 검은 기사가 되었다.

쿵­

버트가 내려앉자마자 엔실라가 날아들었다. 눈 깜빡할 새에 거리를 좁힐 정도의 속도! 버트는 손을 들어 엔실라의 공격을 막았다.

빠작­

엔실라의 주먹이 버트의 손바닥에 닿았다. 엔실라의 거력이 담긴 주먹은 버트의 그림자 갑주를 깨뜨렸다. 그 틈으로 냉기가 침투했다. 버트가 손이 시렵다고 생각할 때 엔실라가 몸을 휙 돌려 버트의 턱을 차올렸다.

뻑­

이 공격 역시 제법 강했다. 버트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질 정도였다. 뒤이어 엔실라의 솟구친 다리가 버트의 어깨를 찍었다.

콰작!

버트의 발목이 땅에 파묻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연속기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텁­

그러나 버트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찍은 다리를 붙들고 뒤로 휘둘렀다.

후욱­

엔실라의 몸이 뒤로 날았다. 이어서 버트는 머리 뒤로 넘긴 엔실라를 통째로 휘둘러 바닥에 메다꽂았다.

꽈앙!

엔실라의 몸이 바닥에 쳐박혔다.

쾅! 쾅! 쾅!

버트는 엔실라를 몇 번이고 바닥에 휘둘렀다. 엔실라는 돌바닥이 박살나도록 버트의 손에 휘둘러졌다.

빡!

그렇게 한 번 더 땅에 쳐박으려는 순간 엔실라가 반대쪽 뒤꿈치로 버트의 손목을 찍었다. 아릿한 느낌에 주춤거리는 순간 이번에는 팔목에 뒤꿈치가 쳐박혔다. 버트가 다리를 놓친 그 순간, 엔실라는 바닥에 내려앉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콰아아아­

버트가 이렇다 할 대처를 하기도 전에 엔실라의 입에서 냉기 광선이 쏘아졌다. 버트뿐만 아니라 주변 수 십 미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버트는 두 팔로 몸을 막은 상태로 꽁꽁 얼어붙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근방에 있던 플레이어나 엠파이어 족들도 휩쓸렸다.

퉤­

엔실라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쳐박혔던 땅이 조금 얼어붙었다.

“흥.”

엔실라는 콧방귀를 뀌며 버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힘껏 뒤로 당긴 주먹을 내뻗었다.

콰작!

그때 얼음이 깨지며 버트가 엔실라의 주먹을 잡았다. 처음 공방을 나누던 때와 같은 구도였다. 공격의 형태만 달라질 뿐, 흐름은 비슷했다.

쉬릭­

엔실라의 왼주먹이 버트의 옆구리로 쇄도했다.

퍽­ 퍽­ 퍽­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3연타. 그러나 버트에게 닿은 일격은 없었다. 처음 공방과 달리, 이번에는 버트가 정확히 반댓손으로 엔실라의 주먹을 쳐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엔실라가 도망치지 못하게 주먹을 그러쥐고 공격을 막아냈던 손으로 엔실라의 배와 옆구리를 때렸다.

퍽­ 퍽­

“크훕­”

엔실라는 제법 묵직하게 들어오는 공격에 기침했다. 땅에 쳐박힐 때도 멀쩡했던 그녀가 버트의 공격 몇 방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뭐야 이 년? 분명 느껴지는 힘은 하찮은데……’

엔실라는 방심하지 않았다. 분명 엔실라는 버트가 가진 힘을 완전히 파악했다. 그리고 공격과 방어 전부 그 힘에 맞춰서 발휘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버트가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도 막을 수 없었다.

당황하는 엔실라의 눈에 보인 건 희미하게 넘실대는 마기였다. 히레이즈와 비교해도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왜?’

당황하는 엔실라의 눈앞에 버트의 주먹이 날아왔다.

빠각­

분명 버트가 공격을 준비하는 걸 봤다. 하지만 그걸 인지한 순간 이미 주먹이 날아오고 있었다. 엔실라는 코피를 뿜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두 눈에 살기가 흘러넘쳤다.

죽이고 말리라. 버트에게 잡힌 주먹을 뒤로 당기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뻑!

그러자 엔실라의 복부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버트의 주먹이 엔실라의 배에 꽂혔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고 반으로 접혔다. 엔실라는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떴다.

“카흡!”

엔실라는 새어나온 냉기를 다시 들이켰다. 그리고 뒤로 날아가면서 다시 버트를 향해 냉기를 뿜어냈다.

콰자작­

꽁꽁 얼어붙은 얼음지대 위로 새로운 냉기가 뒤덮였다. 버트도 그 위에 있었지만 냉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부여된 저항력은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다. 7성 마법은 정면에서 맞아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엔실라의 냉기는 조금 쌀쌀했다.

퍽­ 빠각­

냉기 가득한 숨결 이후 버트가 거리를 좁혔다. 버트의 오른주먹과 왼주먹이 차례로 엔실라의 옆구리와 겨드랑이를 타격했다. 엔실라는 몸속 깊숙하게 박히는 충격에 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엔실라의 몸이 뒤로 뜬 상태로 무언가에 붙잡혔다. 버트의 발치에서 솟구친 그림자였다.

쉬리릭­

그림자는 엔실라의 사지를 속박했다. 그리고 뒤로 피하려던 그녀를 끌어 당겼다.

“크읏­!!”

엔실라는 그림자 촉수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힘을 주려는 방향에 맞춰 촉수가 이동했다. 대신 다른 부분이 힘을 주어 속박하는 바람에 떨쳐낼 수 없었다. 엔실라는 버둥거리다 버트가 눈앞까지 버트가 오는 걸 보며 마법을 발현했다.

{격동하는 얼음 결정}

{백광의 눈}

{용련창}

{멈춰버린 공간}

새하얀 빛이 주변을 옭아맸다. 무엇이든 꿰뚫는 비늘의 창이 쏘아졌다. 머리 위에는 무엇이든 단숨에 얼려버리는 새하얀 구체가, 주변에는 강철조차 찢어발기는 눈결정이 휘몰아쳤다. 하나하나가 9성, 10성 마법에 이르는 강력한 것들이었다. 단숨에 발휘했다지만 하나하나가 웬만한 마법사가 전력으로 발휘한 정도와 비슷한 위력이었다.

쩌억­

버트의 몸 곳곳을 노리는 창은 갑옷에 찌그러졌다. 버트의 두 주먹이 엔실라의 몸 곳곳을 두들겼다. 주변을 옭아매는 빛은 버트의 공격을 조금 약하게만 할뿐, 묶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빠바박­

버트의 난격은 도합 27번이 작렬했다. 엔실라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버트는 새하얀 구체가 떨어지는 범위에서 이미 벗어난 뒤였다.

“크훕……!”

엔실라는 피를 게워내며 괴로워했다.

‘무섭네.’

버트는 손을 쥐었다 폈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공포감이 마비되었다. 분명 처음에는 인간형 몬스터를 해치는 데 두려움을 느꼈다. 이후에는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점점 이 감각에 무뎌지고 있었다. 특히 메일드로우 공략 당시에는 살상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와서는 엔실라를 두들겨 패는 이 느낌도 조금 역할 뿐 피하지 않게 되었다.

점점 이상하게 바뀌는 느낌이었다. 처음 음란함을 자각한 그때와 비슷했다.

‘정말 게임인가.’

버트는 말없이 엔실라에게 다가갔다. 엔실라는 내부의 상처를 회복하며 몸을 추슬렀다. 그러더니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굉장하네. 이 정도인데 제대로 인지할 수 없다니…… 하지만 이걸로 확신할 수 있게 됐네. 너, 셀기디어 그 놈이 만들어내려는 마신이 분명해.”

엔실라의 몸에서 소름끼치는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 힘의 정체는 분명 겪어본 적 있었다.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세! 그렇다는 건 엔실라가 자신의 힘을 숨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버트가 지금까지 거친 게임이 몇 개던가. 공부로 전향하지만 않았어도 니스와 더불어 이 게임을 주름잡고 있었을 것이다.

버트는 말없이 엔실라를 노려보았다. 엔실라는 등에서 날개를, 엉덩이에서 꼬리를 뽑아냈다. 몸 곳곳에 은색 비늘이 돋아났고 덩치도 조금 커졌다. 소위 용인이라고 말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히레이즈를 상대로 변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도 버트는 긴장하지 않았다. 셀기디어와의 싸움에서 언뜻 자각했던 불안감…… 그리고 버트와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발생하는 위험성.

‘잘못 하면 쇼크로 죽을 수도 있다.’

버트는 덤덤한 얼굴로 생각했다. 루하다가 말했던 마신의 부활, 그것 역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할지도 몰랐다. 그걸 확신할수록 어째선지 두려움이 커지기는커녕 냉담해졌다.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어서일까. 그게 아니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일까. 스스로도 답을 낼 수 없었다.

버트는 그저 무심하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지금은 이 녀석을 공략할 시간이야.’

버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섹스도 좋고, 애무도 좋았다. 음란한 상황은 더 좋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대를 공략하는 싸움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일은 즐거웠다.

그렇게 엔실라가 자신의 힘의 일부를 개방했다. 버트는 마음을 전부 정리하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마신의 힘. 마기. 단순히 그림자를 뽑아내거나 장비를 구현하는 걸 넘어서는 힘.’

셀기디어를 즉사로 이끌었던 힘. 그 강대한 힘이 버트의 뱃속에서 조금씩 흘러나왔다. 엔실라조차 순간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게 만든 힘……!

‘그러니까……’

버트가 엔실라를 보았다. 이때 발아된 마신의 씨앗이 하나의 형태를 띄웠다. 버트가 뻗은 손에서 무형의 기운이 뒤덮였다. 이윽고 껍질을 뒤덮은것처럼 버트의 몸을 서서히 감쌌다. 버트는 그 힘을 온전히 느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신 강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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