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64화 (64/104)

〈 64화 〉 64 ­ 아카람 투기장 上

* * *

상단은 아무런 피해 없이 아드레이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널따란 평원을 지나 도착한 그곳은 참으로 웅장했다.

“와아……”

반파된 전투마을 메일드로우. 그곳을 통해 길이 내어져 있었고 곳곳에 변이된 생물과 흡혈귀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본다면 그냥 던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흡혈귀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엠파이어 일족을 희망하시는 분은 지하 시청으로 내려가 4번 길목으로 꺾어가시면 됩니다.”

“교역은 이쪽입니다.”

“전투 실험 희망자는 여기로 오세요.”

“관광이 목적이신 분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버트를 실은 상단은 그대로 다른 길로 향했다. 셔터킴은 사진집을 정리하며 메일드로우의 내부를 촬영했다.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네.”

“아, 그러네요.”

버트는 구경하다 말고 셔터킴을 돌아보았다. 교역로에 있는 내내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버트는 슬쩍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처음 그가 몸을 요구했을 때 찍은 사진. 음경을 물고 V를 그리고 있는 버트 자신의 얼굴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입에 물려 있는 음경은 셔터킴의 것이었다. 그 후에도 얼굴에 정액을 듬뿍 끼얹은 모습이라든지 혀로 귀두를 날름대는 모습도 신나게 찍었다. 인부들과의 난교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집은 무려 5종류에 이르렀다. 그 중 순수한 일상을 찍은 건 단 하나뿐, 나머지는 섹스나 섹시 코스튬 등이 주를 이루었다.

“덕분에 새로운 즐거움을 깨달았어. 용기내서 너에게 말을 걸기 잘 한 거 같아.”

셔터킴은 사진집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문란하긴 해도 좋은 추억이었다. 이 원본들은 셔터킴의 ‘주머니’에 잘 보관될 것이다.

“저도 즐거웠어요. 제 모습은 항상 동영상으로만 봐왔는데 사진으로 보니 신선했어요.”

“이것들은 내가 철저하게 관리해둘게.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퍼져나가면 곤란해지잖아.”

버트가 폰타지아에 올린 동영상은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그렇게 영상이 남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 셔터킴의 제안 때문이었다. 버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내리기로 했다. 그때는 동영상 촬영보다는 사진이 찍히는 게 더 좋아서였다. 특히 사진으로 볼 때는 그때의 기억도 상상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버트는 사진집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렇게 추억에 빠져있던 버트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거 팔 수 있을까요?”

“엉?”

기껏 동영상도 내렸는데 이런 야한 사진집을 팔다니?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기에 얼굴도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잘못 하면 엄청난 시선을 받아야 할지 몰랐다. 그 부분을 지적하니 버트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꼬며 말했다.

“괜찮아요. 믿을만한 분들에게 보여드리는 거니까요. 그분들끼리만 보게 할 거예요.”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버트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블랙스타 신도들에게 이 서적을 나눠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감상평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아, 친추 해놓을게요.”

“나야 좋지.”

그렇게 친구 추가까지 끝낸 셔터킴은 정말로 헤어지게 됐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상단을 나선 버트는 루하다를 불러 사진집들을 블랙스타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루하다는 성실하게 알았다는 말과 함께 곧장 사라졌다.

간만에 즐기는 솔로 플레잉. 아는 사람도 없고 동료도 자리를 비웠다. 버트는 홀로 아드레이 왕국을 탐사하기로 결정했다.

*

아드레이 왕국 개국 이후, 지상으로 드러났던 드러커스의 미로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그 후 악명 높은 관문 메일드로우는 아드레이 왕국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되었다. 처음 버트가 박살냈던 자태 그대로였지만 아직 남은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요새의 역할을 해냈다. 그래서일까, 아드레이 왕국은 이 메일드로우를 완벽히 개조하였고 지금은 다른 나라와 연결되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기념품은 여기서 사가시면 됩니다!”

안내를 받고 이동한 버트는 호객 행위를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와 몇 가지 도시를 다녀봤지만 아드레이 왕국만큼 특이하고 세련된 곳은 없었다. 특히 호객을 하고 있는 사람들 면면만 봐도 판타지아의 보통 사람들보다 수준이 높단 걸 알 수 있었다.

말끔한 의복에 몇몇은 얼굴에 화장기도 있었다. 무엇보다 굶은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세련되기로는 왕국의 수도 못지않았다.

버트에게는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섹스와는 별개로 게임에서의 모험은 즐거웠다. 그녀는 라이가 종종 말한 리얼 플레이라는 말에 적합하게 행동했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이런 요소조차 제대로 즐기지 않았다.

전투 아니면 의상 착용. 대부분 실감나는 전투나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만지기 바빴다. 그녀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건 웬만한 컨텐츠를 즐기고 새로움을 탐방하는 사람들…… 소위 고인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이었다.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버트에게는 상당한 기행이었다.

바로 이 행동이 버트가 블랙 남작임을 의심받지 않는 이유였다. 그녀는 베톰 왕국으로 방문하고 그곳에서 유흥을 즐기고 왔음에도 주목받지 않았다. 이미 페이니가 블랙 남작이라고 확신받고 훨씬 윗 계급인 샬론 백작이 있었기에 식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좋은 위장이었다.

‘특이한 생물들이 많이 있구나.’

버트는 자기도 모르게 완벽한 카무플라주를 선보이며 아드레이 왕국을 구경했다. 특히 그녀가 많이 보게 된 건 합성 생물이었다.

한 때 시련이라 불리며 강림했던 세 머리의 개 케르베로스.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탈출한 이 합성 생물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케르베로스의 사체를 갖고 마법사의 탑에서 연구를 하다 사고가 난 적도 있었다.

여러모로 위험하다 알려진 몬스터가 이곳에서는 비슷한 게 가득했다. 고개만 돌려봐도 머리 둘 달린 뽀송뽀송한 강아지가 서로의 얼굴을 핥아주며 놀고 있었다. 버트는 그걸 한참 지켜보다가 다른 곳을 보았다.

꽈아아악­

독수리 머리를 한 사자가 울부짖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녀석이란 건 곁에 있는 녀석들 덕분에 알았다.

삐익­ 삐이익­

똑같은 형태인데 훨씬 작고 노란 솜털을 한 독수리 사자가 뒤를 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쏠릴 정도로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귀여워.’

모두가 한 마음이 돼서 솜뭉치들을 보는 동안 버트는 리버를 떠올렸다. 어찌 보면 변이된 동물로서 접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라이칸슬로프란 일족, 그들과 이들과 다른 점이 뭘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트의 걸음은 진열장에 멈췄다.

방금 본 독수리 사자를 선두로 온갖 종류의 새끼 괴물들이 전시된 가게였다. 그걸 보고 있던 버트는 잠시 리버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물론 다르지.’

버트는 미소 지었다. 다음에 만나면 얼마나 자라 있을까. 얼마나 대견해있을까 상상했다. 그러면서 리버를 애완동물로 생각한 자신에 대해 반성했다.

‘그래도 귀엽긴 귀엽다.’

“뮤턴트에 관심 있으신가요?”

가게를 구경하던 버트에게 누군가 말을 붙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의 엠파이어 일족 사람이었다. 그가 건넨 건 작은 명함이었다.

“오늘 저녁에 큰 이벤트가 있습니다. 한 번 놀러오시죠.”

버트는 명함을 받고 뒤에 적힌 지도를 확인했다.

‘합성생물 실험장…… 아카람에서 대규모 실험을 시작합니다……?’

*

아카람은 본디 합성생물을 임시로 가둬두는 장소였다. 메일드로우 공략 당시에는 이곳을 피해 갔기에 정보는 없었지만 만일 이곳에 왔다면 수많은 합성생물에게 습격 받았을 것이다. 근방에 있는 건물로는 드라큘 수호대의 단련장인 콕텐 감금소, 금속을 가공하는 마그나타 공방, 크라녹스 병기창고 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카람이 유일했다. 일전에 버트가 쏘아댄 검은 창으로 거의 무너졌거나 반파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카람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이곳은 개조되어 원형 투기장이 되었다. 지하에는 드러커스의 미로와 연계되어 이전에 수용했던 합성생물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 백, 수 천의 관중을 수용할 공간이 마련되었다.

챠캉­

넓은 흙밭. 그곳에서 다섯 명의 검사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뱀의 머리가 여럿 달린 사자가 있었다. 사자가 한 번 울부짖을 때마다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요동쳤다.

“씨발……!”

그들은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다. 사자의 육체 능력도 대단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갈기처럼 자라난 뱀들이었다. 뱀에게 한 번 물린 검사 하나가 단숨에 썩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싸움은 사자, 아니면 검사 둘 중 하나가 끝장나야 했다.

“이야아악­!!”

검사 하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덤벼들었다. 그러자 사자가 검사의 머리를 집어삼키더니 그대로 물어뜯었다.

푸샷­

머리는 사라지고 피분수만이 남았다. 그 모습에 나머지 검사들이 겁에 질린 비명을 내며 달아났다. 사자는 그들을 하나하나 쫓아 사냥했고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이 모습은 층층이 마련된 관중석에 고스란히 중계되었다.

“우엑……”

버트 역시 이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모습을 즐기진 않았다. 다른 사람의 경우 경기 결과를 통해 내기를 하거나 불법 패치로 관람을 하는 듯 했다.

“와씨, 존나 실감나네 이거.”

“그치? 이 정도는 몰래 깔아도 티도 안 난다니까.”

“진짜 옛날 사람들이 왜 콜로세움에 열광했는지 알겠다.”

버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새삼스럽게 어째서 판타지아는 성인 패치를 막은 것일까란 부분이었다. 아마 많은 인과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버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듀크 사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인륜. 가상현실에 빠져드는 건 둘 째 치고 성관계를 통해 낳은 가상의 아이에 대한 인권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물론 기타 다른 문제도 많았다. 도박성, 잔혹성, 심의 문제, 화폐 거래……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정식 패치를 하기 위해 10년의 시간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버트로 인해 이 시기가 앞당겨졌고 그 안에 숨겨진 모든 컨텐츠가 해방되었다. 눈앞에 벌어진 아카람의 전투 실험도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여러 인질이 고통받는 걸 보고 해방시키거나 흡혈귀의 편에 서는 등의 분기점이 생기는 퀘스트를 진행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의 내깃거리나 오락거리가 되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버트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연속으로 잔혹한 장면만 나오니 심드렁할 뿐이었다.

‘뭐, 특별 이벤트가 있다니까……’

버트는 대규모 실험이 무엇인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사회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전투 실험은 잘 보고 계신가요? 저희가 자랑하는 키메라들이 여러분의 눈을 즐겁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같이 아드레이 왕국에서도 독특하다고 할만한 녀석들이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하려는 것에 비할 바는 안될 겁니다!”

사회자는 창백한 피부에 핏기가 돌 정도로 목청껏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관중석 곳곳에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마법 구동으로 만들어낸 화면에는 여러 괴물과 사람들의 프로필이 있었다.

“이번 대규모 실험은 총 7회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여러 참가자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건 아드레이 왕국에서 내놓은 키메라와 흑사병대 지원자들입니다! 저희가 엄선한 이들인 만큼 당연히 실력은 보증합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인원이 적어보이죠?”

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사회자가 서있는 곳은 전투실험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이곳에 대형버스만한 사자가 한창 돌아다녀도 될 만큼 넓었다. 하지만 화면에 있는 이들은 끽해봐야 서른 남짓…… 이 넓은 장소를 가득 채우기는 부족해보였다.

“여기서 추가 참가자를 받을 겁니다. 참가비용은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자신이 있다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험은 보겠지만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종족, 출신, 소속, 조건, 크게 따지지 않겠습니다! 모두 환영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다음 실험이 시작됐다. 팔다리가 길쭉한 인간과 거대한 벌레와의 혈전이었다.

“음.”

버트는 심드렁했다. 애초에 그녀가 여기로 온 건 귀여운 동물을 보기 위해서였다. 직접 괴물들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었다. 물론 그 녀석들로 음란한 짓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버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버트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아아, 들리나?”

누군가 사회자의 발언을 가로챘. 반짝이는 은발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사회자를 밀쳐내며 뱉은 청아한 목소리가 투기장을 울렸다. 돌아서려는 버트조차 무심코 돌아볼 정도였다.

꽤나 호쾌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꽤나 재밌는 짓거리를 하고 있어. 이봐, 고작 이런 걸로 만족해? 좀 더 재밌게 놀아보자고!”

관중은 무슨 이벤트인가 싶어서 웅성거렸다. 반면 사회자를 포함한 흡혈귀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이 공간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텔레포트 마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투기장 내부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없었다. 아니, 지금 이 투기장이 있는 메일드로우 자체에 허가되지 않은 텔레포트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흡혈귀들의 동체 시력을 속일 정도로 날렵한 존재란 것. 다른 하나는 마법적인 간섭을 뛰어넘는 괴물이란 것. 무엇이 됐든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래서 사회자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이ㅂ”

사회자가 뻗어진 손은 금발 남자의 손에 붙잡혔다. 그 역시 은발 여인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금발 남자는 씩 웃더니 사회자를 내던졌다. 사회자는 투기장 끝까지 날아가 벽에 처박혔고 축 늘어졌다.

“샤누흐~ 내가 먼저 할 테니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직 시작하지 않은 줄 알았지. 그 다음은 네 마음대로 해, 엔실라.”

샤누흐라 불린 남자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엔실라는 피식 웃더니 다시 관중을 향해 소리쳤다.

“7회에 걸쳐서 대규모 실험을 한다고 했지?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한은 일 주일! 그때까지 나, 아니면 여기 이 녀석을 쓰러뜨리는 놈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땅을 잿더미로 만들 거다! 알겠나!”

이건 완벽한 도발이었다. 관중은 몰라도 흡혈귀들은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힘이 약해진 라이칸슬로프나 숨어 지내는 리어페어리, 나이트피어, 거의 멸족한 둠워퍼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 자존심은 위험해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꺾이지 않았다. 흑사병대나 노스페라투 기사가 아닐지라도 접히지 않았다. 그래서 흡혈귀들은 곧장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엔실라는 그걸 보며 손가락을 뻗었다.

“냉광(?光).”

쩌적­

흡혈귀…… 아니, 그 근방에 열 다섯 줄기의 하얀 광선이 뿜어졌다. 이 광선은 스쳐 지나간 흡혈귀만이 아니라 투기장의 벽까지 단숨에 얼려버렸다. 극저온의 냉기는 단순히 얼어붙기만 하고 끝이 아니었다.

“캬학!!”

흡혈귀 하나가 단숨에 하얗게 질리며 얼어붙었다. 다른 하나는 옷 끝만 살짝 스쳤지만 그게 얼마나 대번 깨달았다.

‘마력 유동이……?’

그는 경악했다. 냉기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마법적인 모든 요소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증거로 광선이 지나간 자리는 마력이 얼어버린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던 흡혈귀는 뒤이어 뿜어진 광선에 맞고 얼음 동상이 되었다.

“크히히히~ 정말이지 하찮아. 너희 피 빠는 것들은 대체 왜 이리 콧대만 높지 결과물은 없어?”

엔실라의 도발적인 음성은 투기장 곳곳을 울렸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녀가 뿜어낸 광선을 다른 흡혈귀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미치겠군.”

“모두 물러나라.”

그때 누군가의 잔잔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어느 대머리 흡혈귀였다. 그는 게르티몽의 제자 중 하나이자 전략가라고 불렸던 히레이즈였다. 본래 그는 게르티몽, 루번과 더불어 왕을 보좌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버트를 통해 심연을 보았던 히레이즈는 더 이상 평소와 같은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

우르간드도 죽은 시점에서 그의 전력이 빠지는 건 큰 소실이었다. 하지만 셀기디어는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히레이즈가 바라던 이 곳 투기장의 관리를 맡게 했다.

히레이즈는 버트를 꿰뚫어 보았던 눈으로 샤누흐와 엔실라를 보았다. 대번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히레이즈는 손에서 투명한 실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지고하신 분들께서 어쩐 일이신지요? 저희는 분명 인과율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아, 여기가 싸우는 곳이라 들어서 한 번 놀아보려고 했지. 그리고 말이야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엔실라가 목을 벅벅 긁으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다 쏘아냈던 냉기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하에서 굴이나 파고 놀아야 할 개미가 왜 땅 위로 나온 거야?”

엔실라는 그 말과 동시에 광선을 뿜어냈다.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도 모르는 광선은 이전과 달리 곡선을 그리며 히레이즈를 포위했다. 히레이즈는 눈을 몇 번 굴리더니 두 팔을 위아래로 펼쳤다. 그러자 그에게 쏘아지던 광선이 반짝이는 눈가루로 흩어졌다.

엔실라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흩어진 눈가루가 회오리처럼 빙빙 돌더니 날카롭게 변하여 히레이즈를 향해 좁혀왔다. 히레이즈는 손을 가볍게 털더니 어느 샌가 회오리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단숨에 실로 바람을 가른 뒤 아주 짧은 시간을 이용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히레이즈가 멀쩡하니 엔실라는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엔실라의 마법을 쉽게 떨쳐낼 정도는 아니었다. 엠파이어 일족의 전력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과 더불어 리아주크의 추종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공조했다. 누구보다 충동적이지만 어느 정도 계산이 깔려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히레이즈가 계산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보인다.’

히레이즈는 버트와 조우 후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힘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당장 셀기디어의 힘만 해도 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버트라는 심연을 만났으니 도저히 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겸손해졌다. 그런데 이것이 역으로 히레이즈를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해주었다.

촤자작­

엔실라는 히레이즈에게 여덟 번의 광선을 쏘아냈다. 이번에는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닌, 이동 경로와 반격 행동을 예상하며 쏘았다. 투사체를 피해도 광선이 지나간 흔적에도 극저온의 힘이 담겨 있었다. 엔실라는 이걸 이용해서 히레이즈가 몸만 날려서 피해도 후속타를 맞출 수 있게 이중 삼중으로 뒤덮어왔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겨누며 그 끝에 빛을 집중했다.

즈으응­

히레이즈가 빠져나온다면 곧장 요격할 기세로 준비 중이었다.

쩌억­

어지럽게 주변을 돌던 광선이 히레이즈에게 쏟아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탈출하지 못했다. 그걸 본 엔실라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거두었다. 그때 샤누흐가 시선을 살짝 내렸다.

“저쪽의 사고가 더 유연하군.”

“뭐?”

촤작­

엔실라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 순간 땅에서 히레이즈가 솟구쳐 나와 보이지 않는 실들을 휘둘렀다. 조금만 늦었어도 팔이나 다리 하나가 날아갔을 정도로 날쌔고 예리한 공격이었다. 엔실라는 관자놀이에 핏줄을 세우며 거리를 벌렸다.

히레이즈는 공격이 실패하고나서 곧장 샤누흐를 곁눈질 했다. 그는 엔실라에게 말한대로 정말 간섭할 생각이 없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딜 한 눈 팔아!!”

엔실라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빛이 휘감겨있었다. 분명 주변을 얼어붙게 만든 광선과 같은 힘이었다. 그래서 히레이즈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물러났다. 그러더니 엔실라가 뻗어온 주먹에 손가락 하나를 찔러 넣었다.

파핫­

히레이즈의 손가락이 엔실라의 주먹에 닿는 순간…… 빛이 사라졌다. 엔실라는 주먹을 뻗은 그대로 멈췄다. 엔실라는 놀란 얼굴로 보는 사이, 히레이즈가 주먹에 닿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엔실라의 몸이 뒤로 확 날아갔다.

“오호.”

샤누흐는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히레이즈가 방금 한 건 엔실라의 마법과 힘을 전부 가장 약한 힘으로 되돌려 받아친 것이다. 이건 엄청난 통찰력과 세심한 기술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엔실라가 완전히 물러나지 않게 정확히 50대 50의 힘으로 나누어 받아쳤다. 그 후 여분의 힘을 전부 모아 튕겨낸 것이다.

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심지어 샤누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떤 생물이든 꿰뚫어보는 시력과 머리카락 몇 올 차이로 움직일 수 있는 정교함이 있어야 했다. 물론 한다면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실전에서, 그것도 엔실라의 엄청난 속도에 맞춰 하는 건 불가능했다.

‘굉장하군.’

샤누흐는 턱을 문지르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이 새끼가……”

엔실라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벌써 끌어내려는 거냐?”

“이 좆만한 쥐새끼가 빡돌게 하잖아.”

“마음대로.”

엔실라가 한 걸음 내딛자 그녀의 뺨에 오돌토돌한 은색 비늘이 돋아났다. 그녀의 손끝은 파랗게 질리나 싶더니 손톱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동공은 세로로 쪼개졌고 송곳니가 점점 비대해졌다.

엔실라의 몸에서 힘이 점점 흘러나왔다. 그걸 본 히레이즈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녀의 모습을 본 히레이즈는 단숨에 그 힘의 정체를 깨달았다.

‘본래 가진 힘의 2할 정도.’

방금까지 엔실라가 발현한 힘은 1할…… 아니, 거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그 상태였기에 히레이즈가 비등하게 싸운 것이지 지금은 절대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아니, 왕이 올 때까지 버틸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히레이즈는 천천히 걸어오는 엔실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