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60 지하도시 라존 下
* * *
블루 로즈.
바니걸 연합 ‘토끼장’이나 이상성욕 집합체 ‘아가씨의 왕좌’, 마약 판매기구 ‘인젝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조직이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우두머리이자 ‘라존의 6개의 빛’ 중 하나인 알라나 스레인은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지하도시 라존은 그저 그런 이들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하나 같이 범죄면 범죄, 기술이면 기술, 힘이면 힘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가장 아랫계층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고서야 기본은 해내는 이들이었다.
그건 알라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방중술은 어릴 때부터 갈고 닦아온 환상의 기술이었다. 그랬기에 창부들로만 이루어진 블루 로즈라는 이색 집합체가 손꼽히는 거대 조직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몸을 파는 게 아니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심리학, 육신에 대한 탐구 및 해부학 등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었다. 알라나가 솔선수범해서 배우고 가르쳤으니 그 밑의 창부들 역시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버트의 존재는 어지간히 거슬렸다. 똑같이 몸을 팔더라도 이쪽은 품위가 있었다. 하지만 버트는 저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브루트 서클과 접촉하여 그녀를 철저하게 망가뜨리라 의뢰했다.
애초에 큐엘은 모난 돌이었다. 이미 라존의 대부분이 큐엘을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더 미움을 받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알라나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공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어도 큐엘과 버트에게 다른 형태로 린치가 가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쑤셔 박히는 게 좋다면 한평생 박히게 해주지.’
블루 로즈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성적 체벌. 알라나는 그 중에서도 최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마 브루트 서클에게 당한 이후에는 구멍이 헐거워지도록 수많은 손님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죽는 것이 버트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주기적으로 미약을 먹여줄 테니 고통은 없겠군.’
알라나는 콧방귀를 뀌며 옷을 챙겨 입었다. 앙고라트를 포함한 라존의 모든 지구로부터의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각각의 창관에서 벌어들인 수익과 특이사항을 보고 받은 알라나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로 했다. 특히 이번 큐엘의 가게와 관련된 정보는 직접 듣고 싶었다.
탓
그러던 중 알라나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지나온 길은 낮에는 조용한 거주지였다. 그 중에서도 골목길을 통해 걸었으니 조용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침묵이 너무 어색했다.
알라나는 허벅지 안쪽에 숨겨둔 비도에 손을 댔다. 그리고 차분히 고개를 돌리고 언제든 비도로 찌를 준비를 했다.
……
없다.
알라나는 눈만 돌려서 골목길의 벽쪽을 보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앞쪽을 보았을 때도 비도로 찌를 준비를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10초 가량 더 경계를 한 알라나는 비도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서도 몇 분 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여자의 촉이었다. 중간중간 알라나가 심어둔 호위가 있기에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본능이 지금은 조심하라 일러주고 있었다. 근방의 호위를 부를 수도 없었다. 괜히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여봐야 좋을 것도 없고 진짜 암습이 있다 하더라도 나약한 모습으로밖에 비추지 않을 것이다.
알라나는 그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했다. 그랬기에 버트와 같은 추태를 넘어가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죽어도 품위있게.
위험해도 기품있게.
그것이 알라나의 방침이자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단숨에 으깨지는 일이 벌어졌다.
탁
누군가 알라나의 어깨를 잡았다. 알라나는 잽싸게 비도를 꺼내 휘둘렀다. 특별히 정제해서 만든 독이 듬뿍 묻은 비도였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썩어 들어가며 잘해야 반병신, 잘못하면 사망에 이르는 독……!
그러나 비도는 괴한에게 닿지 않았다. 괴한은 단숨에 알라나의 두 팔을 제압하여 벽으로 밀어붙였다. 알라나는 그 순간 체면을 차리지 않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적어도 스물에 달하는 정예병이 구하러 올 것이다.
텁
이 시도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알라나의 입에 무언가 가득 채워졌다. 그것이 어느 샌가 벗겨버린 자기 팬티란 걸 알았을 때는 두 눈에 귀기가 서렸다. 곧이어 괴한이 막대기 같은 걸 디미는 걸 보았다.
그건 알라나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큐엘의 가게에서 파는 딜도였다.
쯔푹
그 어떤 전희도 없이 딜도가 질구멍을 꿰뚫었다. 살면서 괴한에게 칼이 아니라 성인기구에 찔리게 될 줄이야. 알라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부드럽게 미끄러져오는 딜도의 성능에 감탄했다.
“웁……!”
알라나는 입에 가득 채워진 팬티를 오물거리며 뱉으려 했다. 적어도 대화를 통해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만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소리를 내서 호위병을 불러야 했다. 이렇게 다급하게 일처리를 한다는 건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어서일 것이다.
여기까지 은밀히 온 건 칭찬해줄만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알라나의 이런 생각은 단숨에 무너졌다. 괴한은 어느 샌가 딜도를 자연스럽게 움직여 그녀의 질 곳곳을 자극해주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애무 없이도 안쪽의 성감을 직접 자극해버리니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알라나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괴한을 노려보았다.
그는……
잘생겼다. 어쩌면 어둑한 뒷골목이어서 그림자가 가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여성만이 아니라 수많은 남성도 접해온 알라나가 보기에도 괴한은 눈을 사로잡는 매력이 넘쳤다. 예상 외의 얼굴을 접한 순간 알라나의 마음이 흔들렸다.
괴한은 잠깐의 방심을 비집고 들어왔다. 딜도의 끝부분이 질의 한 곳을 집요하게 눌러댔다. 그곳은 알라나가 찌를 때마다 허리를 움찔거리며 반응한 부분이었다. 알라나가 놀라서 엉덩이를 뒤로 빼려 했지만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알라나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단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존심이 긁혀 짜증이 일었다.
쯔퍽 쯔퍽
딜도가 찌르는 소리가 음란하게 울렸다. 그것과는 별개로 알라나의 표정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해 괴한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속을 후벼팠다. 그 침착함이 알라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외간 여자의 아랫도리를 능욕하면서 정작 본인은 표정변화가 없다니……!
쯔퍽
알라나는 입술을 깨물고 괴한을 노려보았다.
쯔퍽
그러다 점점 눈에 힘이 풀렸다.
쯔퍽
자존심은 둘 째 치고 질에 가득찬 쾌락은 부정할 수 없었다.
쯔퍽
결국……
푸슛
알라나는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절정해버렸다. 알라나는 눈을 조금씩 까뒤집으며 주저앉으려 했다. 괴한은 딜도를 쭉 뽑아내고 물러났다. 알라나는 애액을 질질 흘리면서 주저앉아버렸다.
“헉…… 헉……”
괴한은 그대로 물러났다. 알라나는 무슨 수작을 부릴까 싶어서 누구도 부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라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바로 입었다.
‘뭘 노리는 거냐……’
알라나는 누가 괴한을 보냈는지 추측했다. 그리고 이 행동의 의미를 생각했다.
구태여 큐엘의 가게에서 쓰는 섹스토이로 기습을 해온다? 어쩌면 이간질과 혼선을 위한 수작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보다 더한 짓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냥 물러났다. 그 점이 알라나의 추리를 복잡하게 꼬아버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알라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자 호위병들이 은밀하게 거리를 좁혔다. 그들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다 못해 능욕까지 해버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괴한에게 절정을 맛보았단 점이었다.
‘반드시 찾아내서 처단해버리겠어.’
알라나의 머리에는 더 이상 큐엘의 가게가 남지 않았다. 오직 그 괴한에 대한 생각과 집착만이 남게 되었다.
*
알라나는 블루 로즈의 힘을 동원해 괴한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슷한 인상 착의는 보이지 않았다.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마법이나 주술을 썼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흔적이 안잡히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꼭 하루가 지났을 때 알라나의 앞에 괴한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녀가 처소에서 잠을 자기 위해 누웠을 때였다.
“웁?!”
괴한은 알라나의 몸을 깔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딜도를 디밀었다.
알라나는 높은 지위에 있는만큼 호위도 물 샐 틈 없이 깔아놓았다. 당연히 무방비해지는 잠자리에는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마법 장치도, 특수 기관도 상당해서 침입자 두셋은 단숨에 갈아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괴한이 침입해왔다. 그것도 모자라 알라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미지의 힘으로 옭아매기까지 했다.
쯔걱
알라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쯔퍽
잠옷과 침상이 단숨에 더럽혀질 정도로 애액이 흘러 넘쳤다. 딜도는 끊임없이 그녀의 속을 들쑤시더니 뱃속이 저릿거릴 수준까지 공격해왔다.
“으웁……! 웁……!”
알라나의 다리가 쭉 펴졌다. 발끝이 꼿꼿하게 선 채로 꼬물거리다가 허리가 조금씩 휘어졌다.
푸슛
이번에도 절정하고 말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감각까지 짓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괴한에게 겁탈당하는 이 상황이 알라나의 무의식에 담긴 쾌락을 일깨우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알라나가 오르가즘을 느낀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크웁……”
알라나가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괴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척하게 젖어든 질을 딜도로 휘저어댔다. 그러더니 다시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다. 알라나는 머리칼이 산발이 되어서 허망한 얼굴로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대체…… 대체……!”
알라나가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헛수고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괴한은 끊임없이 나타나 알라나를 괴롭혔다. 규칙성 있는 괴롭힘은 알라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호위를 깔고 경계해도 괴한이 나타났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딜도로 가랑이를 농락해댔다.
한 번은 24시간 호위병을 밀착시킨 일도 있었다. 하지만 홀로 화장실을 간 틈을 타서 괴한이 나타났다. 괴한은 알라나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벽에 짓누르게 하고 딜도를 박아댔다. 알라나는 체면이고 뭐고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이 그 한 마디를 막았다.
그렇게 10일이 지났다.
큐엘의 가게는 당분간 문을 닫겠다고 했다.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됐지만 알라나는 기쁘지 않았다. 괴한의 습격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알라나의 몸은 괴한이 오기 직전부터 반응했다. 이제는 그의 등장을 기다리는 듯 싶었다. 물론 알라나는 자신의 반응을 외면했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야……!”
알라나가 탁상의 서류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짧은 시간 동안 알라나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져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비밀이었다. 각오하고 밝힌다고 해도 괴한을 잡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블루 로즈의 힘을 동원해도 그의 꼬리를 잡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알라나 님…… 자이든 님이 연락을……”
“지금 그딴 연락이 중요해!? 당장 나가!!”
자이든 역시 라존의 6개의 빛 중 하나였다. 당연히 높은 지위를 가진 만큼 그를 막대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하지만 알라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를 놓치지 않고 능욕해오는 괴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보고자는 모르고 있지만 지금도 불과 10분 전에 괴한에게 습격당한 참이었다. 알라나는 축축해진 허벅지를 내려다보다 이를 빠득 갈았다.
“후우…… 대체 이게 뭔……”
알라나는 보고자를 내쫓고나서 단서를 되짚어갔다. 높은 위치에 있는만큼 경쟁자는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괴롭힐 원한 관계를 꼽자면 몇 개 없었다.
‘섹스토이 가게.’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할 곳은 생각나지 않았다. 문을 닫은 지 제법 지났는 데도 습격은 끝나지 않았다. 뒤가 없는 이들이 돈을 끌어 모아 공격했다는 가정밖에 할 수 없었다.
“알라나 님……”
그때 보고자가 다시 찾아왔다. 알라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를 갈았다.
“내가 나가라 했지?”
“자이든 님이 꼭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비켜.”
“엉?”
보고자의 뒤로 자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강직해 보이는 사내는 보고자를 밀치고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알라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브루트 서클의 우두머리이자 강직한 육신을 자랑했다. 게다가 강한 힘과는 달리 어딜 가도 나서는 경우가 없었다. 말을 전할 때도 반드시 부하를 시키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직접 온 것이다.
“……무슨 일이야?”
“꺼져라.”
자이든이 보고자를 노려보자 황급히 달아났다. 그의 심기를 조금만 거스른다면 다진 고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자이든은 보고자가 나가고 알라나를 보았다. 그의 험악한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알라나.”
“무슨 일이냐니까?”
알라나는 심각성을 깨닫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이든은 작게 숨을 내뱉고 말했다.
“담판을 지으러 갈 생각이다.”
“담판? 누구와?”
“새로 생긴 가게.”
“새로 생긴……? 그게 한 둘이어야지. 그보다 새로 생긴 곳인데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물론. 트레닐과 세느트로 역시 기다리고 있다.”
자이든이 말한 두 사람 역시 라존의 6개의 빛이었다. 이쯤 되니 알라나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가면서 듣지.”
“좋은 생각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했으니 출발하지.”
알라나는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이든이라면 어떤 호위도 필요 없었다. 지금 그녀의 호위병 전부 덤벼도 자이든을 꺾을 수 없었다. 그만큼 힘에 관해서만큼은 강대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알라나가 자이든을 따라 간 곳은 앙고라트에서도 한적한 자리의 가게였다.
“여긴……”
“들어가지.”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가게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밀 회동을 위해 문을 닫은 가게로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별 의심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응?”
알라나가 이상함을 느낀 건 조촐한 테이블이었다. 그 자리에 먼저 와있는 트레닐과 세느트로가 앉아있었다. 검소한 테이블은 보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마련한 거라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곁에 있는 남자였다.
매일 같이 알라나를 괴롭혀온 괴한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알라나가 다급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자이든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자이든!!”
자이든은 입을 꽉 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알라나가 떨리는 눈으로 다른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대체 괴한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러는 것인가. 라존에서 힘깨나 쓰는 그들이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위축되어 있는 것인가. 알라나가 괴한을 바라보자 그가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뒤에서 큐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특이한 의상을 보이며 발랄하게 얘기하다 화들짝 놀라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알라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직접 브루트 서클에게 이 여자를 린치해달라고 의뢰한 게 알라나 본인이었다.
“너……”
“얘기를 하려고 불렀어요. 어때요? 큐엘의 물건들 하나 같이 좋지 않나요?”
“뭐……? 지금 무”
알라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려 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괴한에게서 뿜어지는 지독한 살기가 알라나를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1초도 안 되는 순간 알라나는 수없이 많은 두려움을 느꼈다. 전신이 무력해지고 속이 뒤틀리며 머리가 짓눌리는 괴랄한 감정……! 그 감정은 단숨에 알라나의 모든 공포를 자극했다.
갈가리 찢긴 몸뚱이. 피에 절여진 고깃덩어리. 힘없이 늘어진 핏덩이. 알라나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광경이 그녀의 의식에 각인되었다. 동시에 그 끔찍한 환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이건 알라나 본인의 촉이 더해지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아.
알라나는 한순간 주저앉을 뻔했다. 괴한에게 처음 당했던 쾌락성과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그나마 그녀의 정신력이 강했기에 꼴사납게 오줌을 지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위기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찐득한 살기는 당장이라도 숨통을 조일 듯 했다.
알라나의 눈이 빙글 돌아갔다. 그녀의 머리가 고작 몇 초 사이에 필사적으로 생로를 찾았다.
“혹시 그 남자 것처럼 생긴 거 말이니……?”
“네, 맞아요……! 딜도라고 하는 건데…… 괜찮았나요?”
버트의 순수한 질문과 루하다의 압박. 알라나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하고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불렀어요. 거기 계신 분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셔서요.”
“자이든……?”
알라나가 힐끔 보니 자이든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랬구나.”
알라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그도 알라나와 같은 일을 겪은 듯 했다. 이쯤 되니 두 사람에 대한 의문이 솟구쳤다.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서 왔는가. 그 의문을 풀기 전에 버트의 부탁을 먼저 들어주어야 했다.
*
큐엘의 가게는 정상적으로 문을 열 수 있었다. 큐엘로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린치를 당한 이후 버트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계속 이렇게 방해를 받는다면 일이 틀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번 일의 배후와 실세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큐엘은 크게 우려를 표했다. 베톰 왕국에서도 어느 정도 힘을 가진 라존은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라존이 가진 힘만 뽐내더라도 웬만한 대영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런 라존의 실세들이 버트의 말을 쉽게 들어줄까.
버트는 루하다와 조금 상의를 하더니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큐엘이 걱정하는 동안 버트는 그가 다른 생각은 못하게 새로운 부탁을 했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안될까요?”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큐엘은 그녀의 부탁을 이루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웬 걸, 몇 주만에 라존의 실세가 한둘도 아니고 넷이나 모였다. 심지어 그들은 큐엘의 가게를 허가해주었고 다시는 방해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큐엘은 버트의 부탁대로 영상 큐브를 내놓았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죠……?”
“네, 물론이죠.”
“그럼 이걸……”
버트의 부탁. 브루트 서클의 깡패에게 겁탈 당했던 때의 영상이었다. 본래 사용회를 녹화하려고 영상 큐브를 설치해두었다. 당연히 그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큐엘은 그걸 폐기처분하려다가 버트의 부탁으로 배포용으로 널리 퍼뜨리기로 했다.
버트는 자신이 무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며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심지어 다음 사용회 때 입을 옷까지 상의하기도 했다. 버트의 대담함은 큐엘을 놀라게 했다.
‘대단한 분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이상한 광고나 해대는 가게가 여기야?”
바니걸 복장의 여인들. ‘토끼장’에 소속된 바니걸이었다. 그들을 본 버트는 루하다를 보았다.
히죽.
장난기 가득한 미소. 그 웃음을 접한 루하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일 있었어?”
알라나의 말에 자이든은 대답이 없었다. 나란히 걷고 있던 알라나가 갑갑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말문이 탁 막혔다.
울고 있었다. 사람 하나는 무참하게 두들기고 패죽이던 그가…… 눈물, 콧물을 질질 쏟고 있었다.
“너 대체……”
“굴욕이다.”
자이든은 울음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섹스토이의 시연이라며 단숨에 제압당했다. 그곳을 지키던 호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서 친절하게 어디는 어떻고, 이 부분이 장점이라며 설명을 들었다. 나의 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식이었지.”
자이든의 말에 알라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괴한 루하다의 힘이 이 정도였다니. 그러나 뒤를 잇는 말은 알라나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런 굴욕을…… 고작해야 계집애한테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계집?”
자이든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알라나를 보았다. 한순간 버트에게 제압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과 부하들을 단숨에 때려눕힌 걸로도 모자라 원통형 섹스토이로 음경을 애무해댔다. 버트의 막무가내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다.
자이든은 난생 처음 강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강자로서 무력함을 느꼈고 남자로서 좌절을 맛보았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크냐면…… 알라나가 자이든을 덮친 사람이 버트라고는 상상도 못했단 걸로 설명이 됐다. 그만큼 말이 안 되고 가정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남자가 아니라?”
“……너와 대화를 나누던 그 계집이다.”
자이든의 떨리는 목소리에 알라나의 두 눈이 커졌다.
“어……?”
“나는 그 계집에게 제압당해 능욕당했을 뿐만 아니라…… 공포까지 느꼈다. 나는…… 나는…… 나는 힘없는 병신일 뿐이었어!!”
자이든의 절규에 알라나는 비난할 마음조차 사라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니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가자.”
“크흡…… 흑…… 크흑……”
알라나가 자이든을 토닥거리며 길을 떠났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람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영상 큐브를 집어들었다. 그 안에는 무참히 능욕당하는 버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에는 큐엘의 가게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며 맑게 웃고 있었다.
“역시 같은 플레이어였나.”
의문의 인물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사라졌다. 고고한 베톰 왕국의 지하도시 라존. 이곳은 의문의 인물처럼 고요한 폭풍이 몰아치다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