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8 지하도시 라존 上
* * *
나탈리의 실험은 끝났다. 그녀는 낙담한 얼굴로 버트와 루하다를 보내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쯧. 그래도 성과는 있어.”
“붙잡을까요……?”
“그걸 생각하고 묻는 거야? 총력을 기울여도 못 잡아. 그러니 그냥 둬.”
나탈리는 마뜩찮은 얼굴로 손톱을 씹었다. 신을 모방하는 게 마냥 순조로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변수가 일어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너무 많았다. 오히려 방해할 거라 생각했던 백신이나 셀기디어는 잠잠했다.
그래도 나탈리는 낙담하지 않았다. 실험 기록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분 뒤, 루하다가 모든 기록을 가져갔단 걸 알고 절규하게 된다.
*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아니……”
버트는 골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루하다를 보고 있었다. 루하다는 심상을 통해 그녀의 뜻이 흘러들어왔지만 모른 척 하고 물었다.
그녀의 눈은 쉴 새 없이 인간으로 변한 루하다를 보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종족이 아예 바뀐 게 아니라 그저 겉모습만 바뀐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무색하게 루하다의 인간 모습은 잘생겼다.
정면에서 봐도 멋지다 생각했는데 옆모습도 보기 좋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실험체들의 장점만을 총집합했다고 봐도 좋았다.
그윽한 눈. 선명한 코. 굳건한 입술. 단단한 이마. 단정한 머리칼. 깨끗한 피부.
무엇 하나 모난 데가 없었다. 버트가 바쁘게 눈을 굴리며 바라보니 루하다는 결국 한 마디 했다.
“다시 리아주크의 육신을 모을 겁니다.”
“세트 아이템 말이지?”
“네. 지금까지 단서가 없어서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지만 무심코 마신의 부활을 고대한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죄송합니다. 그 실험체에게 씨앗을 옮긴다면 그릇의 몸은 무사했을 텐데……”
버트는 루하다의 사과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좋다는 뜻이잖아.”
언제나 순진한 듯 하지만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지금도 그랬다. 루하다가 무심코 넘기려고 했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루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어색한 인간의 육신임에도 자기 것처럼 사용했다.
“버트, 당신이 좋습니다.”
“아.”
버트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묘하게 고백을 받은 듯한 상황인지라 버트는 어찌할 줄 몰랐다. 루하다는 그녀의 당혹감에 잠시 주춤거리다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릇 당신을 좋아합니다. 마신이 부활한다면 당신을 기반으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헤헤……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 좋다.”
“그러니…… 최대한 괴롭지 않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고마워, 루하다.”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그의 한쪽 팔을 안았다. 가슴을 꾹 누르면서 어색한 스킨십을 했다.
루하다는 그런 버트를 곁눈질 했다. 버트는 살짝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애교에 루하다가 주춤거렸다. 그러다 손을 뻗어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버트는 커다란 손이 머리를 뒤덮으니 눈웃음을 지으며 비비적거렸다.
그 눈빛을 조우한 순간 루하다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순간 버트에게서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분명 루하다 역시 마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렇지만 마기에 큰 영향을 받진 않았다. 언젠가 델폰 남작이 마신의 일부를 착용했을 때도 버트의 마기에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루하다는 자신이 지금까지 버트가 거쳐온 사람들처럼 되고 있단 걸 알았다.
마신의 수족이 마기에 침식된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인간의 육신을 얻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딱 한 가지의 가능성. 그걸 떠올린 순간 루하다는 버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은 버트는 눈을 조금씩 굴리며 다른 곳을 보았다.
“그릇이시여.”
“응……”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버트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도.”
“그렇기에 말씀 드립니다. 저의 임무는 리아주크의 부활. 그렇기에 언제까지 지체할 수 없습니다.”
루하다의 말은 당연했다. 그는 이미 섬기는 몸이 있었다. 버트를 섬기는 건 잠깐이었다.
“응.”
“돌아가는 대로 육신을 찾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응.”
“물론 지금이랑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릇께서 원하시면 저는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버트는 선뜻 기뻐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원하면 따른다.
원하지 않으면……
원해주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버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그저 루하다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가는 동안…… 버트는 처음으로 루하다와 함께 있으면서 변태 같은 짓을 하지 않았다.
*
“그냥 몬스터만 잡아주면 됐던 건데 교역로 개척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헤헤……”
“그 덕에 몬스터 조련사라는 이명이 돌고 있는 건 알아?”
“몬스터 조련사? 나 말하는 거야?”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냐. 일단 이거 받아.”
라이는 가볍게 지도를 던져주었다. 버트는 지도를 받자마자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노력을 했어. 그렇게 찾아보니 앞으로 남은 건 3개. 각각 키런 왕국, 베톰 왕국, 스카이 왕국에 있어.”
“방방곡곡에 널려있네.”
“그리고 그 3개 외에는 더 잡히는 건 없어.”
“그렇단 건…… 이게 끝이구나.”
“맞아. 그러니 곧 있으면 완성 된다는 소리지.”
버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기뻐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뭔가…… 허심탄회한 웃음이었다. 그걸 본 라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루하다를 보았다. 루하다의 시선이 오래 머무른 걸 느낀 라이는 고개를 기울여 버트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응? 아, 라이는 본 적 없겠구나. 루하다야. 나랑 같이 다니는”
버트는 선뜻 누구라고 소개할 수 없었다. 시종이라기에는 뭔가 어감이 이상했고 파트너라기에는 수상했다. 그렇다고 APC라고 부르자니 진짜 사람 같아서 망설여졌다. 그때 루하다가 말했다.
“그릇을 섬기는 추종자다.”
그의 한 마디로 라이는 나름대로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일단 지도에 표기해준 게 끝이고 대략적인 형태나 이름 같은 것도 코드 따놨어. 그러니까 나머지는 네 몫이야. 찾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너의 노력에 달려있어.”
“고마워. 그럼 일단 어디로 먼저 갈까……”
“키런 왕국으로 가는 게 좋을 거야. 베톰 왕국은 고렙들이랑 만렙들 천지고 스카이 왕국은 고인물들 끝판왕이 모인 곳이거든.”
“스카이 왕국……”
버트는 언젠가 블랙스타의 본단이 거기 있단 걸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걸 떠올린 버트는 간만에 퍼드롬에게 인사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좀 더 모험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괜찮지, 루하다? 좀 더 돌아다녀도 되는 거지?”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충분히 원하시는 대로 즐기시면 되는 겁니다, 그릇이시여.”
“헤헤…… 알았어. 아, 톡으로 기프티콘 보내놨으니 맛있게 먹어”
“오냐, 고맙다. 저번에 내가 말한 건 귓등으로도 안 들었나보구나.”
“골드 환전? 알아, 알아. 남자들 허세 부리는 거 한 두 번인가. 진짜 간다~”
버트가 손을 흔들며 그 공간을 벗어났다. 루하다 역시 버트를 따라갔다. 그러다 직전에 다시 한 번 라이를 보았다.
‘……숨기는군.’
루하다는 말없이 사라졌다. 라이는 그의 시선을 받고 침체된 시선으로 사라진 두 사람이 있던 곳을 보았다.
*
버트는 신중하게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기사의 나라 키런 왕국으로 갈지…… 아니면 라이의 말을 넘기고 다른 나라를 고를지 생각했다.
“루하다는 어디로 가고 싶어?”
“그릇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움.”
버트는 지도를 계속 노려보았다. 스카이 왕국에 있는 눈 덮인 고원은 마지막에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그 편이 좀 더 낭만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베톰 왕국에 있다는 지하도시와 키런 왕국의 영지 둘 중 한 곳을 골라야 했다.
“으으음……”
버트가 쉽게 결정하지 못하자 루하다는 한 마디 거들기로 했다.
“어디를 가든 즐거울 겁니다.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고르시면 됩니다.”
그제야 버트는 루하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묘하게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이든 좋다, 어떤 거든 괜찮다. 어찌 보면 성의없어 보이는 말. 하지만 루하다는 버트이기에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루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좋아, 그러면 다음 행선지는……”
*
몇 주 후.
“지상 최대의 유흥가! 앙고라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방팔방 터지는 폭죽. 요란한 효과음 뒤로 여러 사람의 방문이 이어졌다. 이곳에 온 건 버트와 루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하다……!”
몇 주에 걸쳐서 도착한 베톰 왕국. 이곳은 판테스 왕국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국경에 높이 솟아있는 성벽과 엄격한 검문이었다. 이모탈이라는 특성 덕분에 지나가는데 제한은 없었지만 제법 놀라운 일이었다.
판테스 왕국이 다른 나라랑 통할 때 검문이 엄격하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곳곳에 보이는 눈에 띄는 사람들…… 이들은 누가 봐도 플레이어였다. 언젠가 발르틴에서 본 사람들이랑은 또 달랐다.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하나 같이 실력 발휘를 하게 생겼다.
소위 말하는 고인물들! 컨텐츠 덩어리라 할 수 있는 판타지아에서조차 대부분을 즐긴 이들이었다.
“이봐, 조심 좀 하라고.”
“죄송합니다. 당신은 출입 금지입니다.”
물론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현실의 도박장에 출입을 금지당하거나 불법을 피해온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들은 골드 환전에 세금도 먹이는 데 여기로 와서 도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경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판타지아에 잠복 수사 중인 경찰에게 붙잡혔다.
버트는 그런 것도 모르고 곳곳에 벌어지는 해프닝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화려한 조명이었다. 지하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두컴컴한 배경과 반대되는 반짝이는 광고판이었다.
포커나 슬롯머신처럼 이름을 들어본 도박장에 듣도보도 못한 도박장 광고도 있었다. 어찌 보면 인터넷 광고가 건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버트는 일직선으로 늘어진 광고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신기하다. 그치?”
“네. 이제까지 지나온 곳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버트는 참으로 어수룩한 먹잇감이었다. 그래서 호객을 하는 사람들은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려 했다. 하지만 곁에 있는 루하다가 만만치 않았다. 곳곳에 배치된 라존의 가드와 기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애초에 가드들이 그의 기세에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쩌면 큰 손 고객일지도 몰랐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영업장에 들이려 했다. 하지만 한 발 빠른 사람이 있었다.
“버트!”
“아……!”
솔란의 탑에서 만났던 큐엘. 그가 버트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
큐엘의 가게는 초라했다. 라존의 아홉 번 째 지구 앙고라트에서도 가장 눈에 안 띄는 곳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가게에서 전시한 물건들은 싸구려가 아니었다. 하나 같이 훌륭한 제품이었다. 특히 버트의 눈에 띈 건 강아지 꼬리가 달린 마개 같은 물건이었다. 이런 특이한 섹스토이가 한둘도 아니고 수 십 종류가 있었다.
어떻게 쓰는지조차 궁금한 것들을 보던 버트는 시선을 떼고 큐엘을 보았다. 그제야 큐엘이 웃으며 말했다.
“간만이에요. 버트.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큐엘은 낡은 테이블과 의자에서 버트를 맞이했다. 간식조차 없는 초라한 자리. 가게에 걸린 상품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큐엘은 마법사의 탑에 있을 때는 지하에 있긴 했어도 그 위치가 낮지 않았다. 뭔가 나락에 떨어진 듯한 격차를 느낀 버트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는 잘 지내요. 근데 큐엘은…… 괜찮은 건가요?”
버트의 질문에 큐엘은 가게 안을 둘러보며 너털 웃음을 흘렸다.
“하하, 어차피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 걸요. 아직까지는 마법사의 탑 소속이기도 하고 지원금도 받고 있으니 금방 좋은 가게를 찾을 겁니다. 아니면 이곳을 좀 더 발전시켜도 될 일이죠.”
“아하……”
“그런데 버트는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저야 섹스토이 판매를 위해서 왔다지만 버트는 앙고라트에 연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 이것 때문이에요.”
버트가 보여준 건 방패의 이미지였다.
“여기 어딘가에 이걸 구할 수 있다고 해서요.”
“흠, 저도 처음 보는 물건이긴 합니다만…… 어디에서 얻은 정보인가요?”
“라이 라이벨이요.”
버트가 스스럼없이 익숙한 이름을 부르니 큐엘이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탑주랑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친구예요.”
“……그런 인연이라니.”
큐엘은 미소 지었다.
“언제나 열등감을 갖고 온 상대에게 저도 모르는 은혜를 받았군요.”
“네……?”
“아닙니다. 일단 저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겠습니다. 여기는 지하도시 라존, 돈과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 쟁취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곳입니다. 베톰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자유 지역이니 아마 찾게 된다면 얻는 데는 문제없을 겁니다.”
“지금 가게 살피는 것도 꽤 힘드실 텐데……”
“괜찮습니다. 저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큐엘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버트는 영 불편했다. 조금이라도 그를 돕고 싶었다.
‘홍보라도 할 수 있다면……’
버트의 머리에서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마법사의 탑에서 했던 시연회가 떠올랐다. 그때 반응은 어떤지 몰랐지만 음란성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그리고 남자들이 생각보다 야한 것에 대한 집중력이 엄청나단 것도 떠올렸다.
“아.”
버트는 루하다를 보았다. 베즈웍 유적지에서 보았던 영상 녹화 큐브. 그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의 감정이 막연하게 들어온 루하다는 그들에게서 압수한 걸 몇 개 꺼내놓았다. 버트는 루하다가 내놓은 큐브를 바라보았다.
“이거……”
“유적지에서 얻은 물건입니다. 선뜻 건네주더군요.”
루하다의 말에 버트는 방긋 웃으며 큐브들을 받았다. 큐엘은 그녀가 건네는 큐브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이걸로 영상을 기록할 수 있어요. 이걸로 홍보를 하면 어떨까요……?”
“홍보……”
영상 기록 장치는 희귀한 게 아니었다. 다만 홍보라는 것이 큐엘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는 버트가 내민 큐브를 받고 투명한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법에 조예가 있으신 줄 몰랐네요. 혹시 탑주가 준 건가요?”
“아, 아뇨. 개인적으로 얻은 곳이 있어서…… 그 어디지, 아드레이? 거기 사람이 준 거예요.”
“그렇군요. 확실히 이걸 소형화해서 가게의 위치를 알려주고 한다면 위치가 안좋은 건 커버할 수 있겠어요.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이러면 더더욱 도와드려야겠는데요?”
“에헤헤…… 서로 돕는 게 좋은 거니까요.”
그렇게 버트와 큐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버트는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 생각했다. 큐엘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대단한 기술이네요. 역시 아드레이 왕국…… 살리마 왕국이 그간 은원을 잊고 교역을 시도할만한 곳입니다.”
큐엘은 그렇게 말하며 버트에게 받은 큐브를 내놓았다. 손바닥보다 훨씬 작아진 큐브는 휴대성이 훨씬 좋아졌다.
“영상 녹화는 잘 될까요? 너무 작은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영상은 1분 내외로 끝낼 생각입니다. 크기를 줄이고 영상의 강렬함만을 전하려 합니다.”
“오……”
“일단 이건 주변에 배포하도록 하고…… 방패에 대해 찾아봤습니다만 비슷한 건 다섯 군데에서 팔고 있었습니다. 근데 두 곳은 출입조차 어려운 곳이라 확인이 어려워서……”
큐엘은 각각 물건이 걸린 곳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버트는 그곳에 출입하는데 제한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되었다. 소위 VIP라고 부르는 고객층이 되면 들어갈 수 있단 소리였다.
“아……! 아니에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저야말로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무슨 소린가요.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큐엘의 말에 버트가 방긋 웃었다. 그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아서였다.
“그래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홍보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조사를 하면서 큐브를 나눠줬으니 곧 반응이 올 테죠. 그러면 조금 더 조사의 여유가 생길 겁니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유명해진다면 출입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잘 됐네요……!”
버트는 아직까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의 귀족이다. 심지어 최초의 이모탈 귀족인데 자격이 부족할 리 없었다.
큐엘의 경우 10성 마법사의 지위가 있었다. 하지만 이걸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이곳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최대한 그곳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법사 탑의 지원도 거의 퇴직금이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번거롭게 돌아가는 듯 해서……”
“아니에요. 큐엘이 스스로 일어나시려는 것처럼 이것 역시 제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인 걸요.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곧장 찾으러 가볼게요. 이것부터 빨리 해결하고 큐엘을 도와드릴게요.”
버트는 다음을 기약하고 앙고라트로 나섰다. 그렇게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묘하게 많이 보는 거 같지?”
“그릇이 아름다워서 그런 겁니다.”
루하다의 아부에 버트는 싫은 척 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버트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
“이봐.”
버트를 불러세운 건 뇌쇄적인 여인들이었다.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은 곰방대로 버트를 삿대질했다.
“이곳에도 상도덕이란 게 있어. 기품도 있고. 그런 식으로 천박함을 보이려면 다른 나라에서 창부나 하는 게 어때?”
버트는 갑작스러운 비난에 화들짝 놀랐다. 그녀들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그녀들이 사라지고 그 눈빛과 말이 잊히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거지……?”
“음…… 아무래도……”
루하다는 자신의 추측을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버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꺄앗?!”
“뭐야. 직접 광고하려고 나선 거야? 언니 가게 어디야?”
음흉한 표정의 남자는 입술을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의 끈적한 눈빛에 버트가 어리둥절해했고 루하다가 앞을 막아섰다.
“꺼져라.”
“아, 뭐야. 존나 비싸게 구네.”
남자가 투덜거리며 떠나가고 버트의 의아함은 증폭되었다.
“광고……”
그리고 어딘가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 아앙! 쟈지 더엇!! ]
버트가 후다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남자 셋이서 작은 큐브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버트가 남자 연구원들에게 둘러싸여 섹스에 미친 모습이 있었다. 약물에 취해 녹아내리는 얼굴로 할딱이는 그 모습을 보며 남정네들은 버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버트가 루하다를 보았다. 버트는 자신의 모습이 녹화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빛만으로도 루하다는 그녀의 의문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전부 퍼졌을 겁니다.”
버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때 세 명의 남자가 스리슬쩍 다가왔다.
“혹시 여기에서 나오는……”
“직접 손님 유치하려고 하는 거야?”
“이러면 견제 심하게 당할 수 있는데 괜찮아?”
그들의 질문에 버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이 접촉을 해오자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아, 아니 이건 그게……”
“그래서 가게가 어디인데?”
“보니까 성인 기구라는 걸 판다는데……”
“그게 뭐지.”
다른 건 몰라도 홍보는 확실한 듯 했다. 그들이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버트는 무의식적으로 큐엘의 가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가시면…… 알 수 있어요……”
수줍어하면서도 대담한 행동. 그 모습이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버트는 큐엘이 자신의 영상을 쪼개 뿌렸다는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몸이 반응해버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고 있다. 베즈웍 유적지에서도 느꼈던 노출증. 판타지아 초기 때부터 각성하기 시작하던 성벽이 폭발해버렸다.
버트는 그대로 손님들을 이끌고 가게로 향했다. 그 와중에 몇 이들이 버트를 알아보고 뒤를 쫓기 시작했다. 큐엘은 갑자기 들이 닥친 손님들과 수줍어하는 버트를 보며 상황파악을 했다.
“아.”
큐엘은 일단 가게에 내놓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버트를 힐끔 보며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시범 사용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큐엘의 제안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