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56 페이니 외전 中
* * *
페이니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엘도트의 근육이 듬뿍 차오른 몸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페이니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엄청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저 이목구비와 턱선, 눈썹이 선명한 정도였다. 눈도 엄청 크지 않고 눈매도 사나웠다.
그야말로 밖에 나가면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의 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에는 참으로 남자답게 보였다.
튼튼한 팔뚝이 휘감은 상태로 강렬한 체온을 뿜어냈다. 평온한 소리에 비해 가슴골을 간질이는 강렬한 숨결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의 탄탄해보이는 가슴 근육 너머로 박동도 느껴지는 듯 했다.
아.
페이니는 뒤늦게 둘 다 알몸이란 걸 깨달았다. 그의 품에 안겨있단 것에 놀라는 바람에 무슨 상황인지 아는 게 늦었다.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 눕긴 했어도 잠은 따로 잤다. 처음부터 이렇게 안고 잔 게 아니란 소리였다.
그래서 적잖이 당황했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그가 깨어나서 떨쳐낼 거라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게 의식하니 조금 뒤척이게 됐고 엘도트가 눈을 떴다.
페이니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을 들킬까봐 뚱한 눈으로 말했다.
“뭐야, 넘어오지 말라니까……”
“네가 넘어왔다.”
“응?”
페이니는 고개를 돌려 뒤에 한참 남은 여백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페이니가 엘도트의 영역까지 침범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기껏 비아냥댔더니 이게 뭔가.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빈틈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왜 그의 품으로 기어들어왔단 말인가. 엘도트의 성격 상 절대로 농담이나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너무 굶주렸나?’
잠결에 들러붙었을 수도 있었다. 페이니도 오래 살기는 했어도 성욕은 있었다. 거기에 자기 취향의 남자가 있으니 몸이 먼저 반응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왜 그는 페이니를 떨쳐내지 않았냐는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눈을 뜬 지금도 오히려 품에 안기게끔 팔로 조여왔다.
대체 왜? 눈을 뜬 지금은 떨쳐낼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포근히 안아주다니? 페이니로서는 알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버트를 마음에 두고 있는 인간이다. 이디아처럼 개방적이지도 않고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남자다. 그런 그가 알몸으로 페이니를 끌어안고 있다?
페이니는 무슨 생각인지 정말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품으로 끌어안은 엘도트를 올려다보았다. 엘도트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진한 눈빛에 페이니가 먼저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랬어?”
“그래.”
그 후로 별다른 말은 없었다. 특히 페이니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이 상황도 낯설고…… 엘도트의 체취와 체온도 강렬하고…… 그의 딴딴한 몸도 확 와닿고……
결국 페이니는 흔들리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내가 왜 안겼더라~ 잘 모르겠네. 혹시 몸이 달아서 붙어버렸나~?”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으로 엘도트의 가슴을 눌렀다. 말랑하기 그지없는 부드러운 젖가슴이 근육으로 꽉 찬 가슴을 짓눌렀다. 그 작은 움직임으로 체온과 체취가 뒤섞인 바람이 흘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장난에……
“……으, 응?”
엘도트는 말없이 페이니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수치심을 자극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갑갑했다. 이건 비단 가슴이 눌리면서 호흡이 제한되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더 심층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엘도트가 머리를 숙였다. 페이니는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
그런 생각이 들 때 두 사람은 어느 샌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페이니가 몸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엘도트 역시 멈추지 않고 입술을 맞댔다.
‘이게……’
페이니는 의문이 잠깐 들었으나 그와의 키스로 모든 생각을 멈췄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맞물린 입술.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혀까지 뽑혀나와 뒤엉켰다.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페이니야 그럴 마음이 있었다지만 엘도트가 그렇게 키스를 해올 줄 몰랐다.
그의 입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어쩌면 서로의 열기가 뒤섞이며 높아진 건지도 몰랐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엘도트의 숨결이 섞여 입 안을 간질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혀가 비집고 들어와 이를 훑었다.
두 눈이 감겨진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왠지 눈을 뜨면 엘도트의 시선과 마주할 거 같았다. 꼴깍거리며 끈적하게 섞인 침을 삼키고 하나가 된 숨을 마셨다.
쪽……
몇 분 간의 키스…… 그 후 잠시 입을 떼고 숨을 골랐다. 페이니는 고개를 숙여 엘도트를 볼 수 없었지만 그는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이니가 작게 숨을 고르니 엘도트가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었다.
가슴이 안정되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들뜬 마음도 단번에 진정될 듯한 의지하고 싶은 손이었다. 페이니는 그 손길에 숨을 고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입을 맞추었다. 엘도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끌어안아 자기에게 더 붙게 하고 키스를 나누었다. 찐득하게 엮이는 혀와 입술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번 키스는 생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채 들어가지 못한 서로의 침이 입가로 흘러내려 말라갈 때까지 입이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쪽
“하아……”
“후……”
그렇게 긴 키스를 끝내고 둘은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입을 맞추고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서로의 몸을 조금씩 더듬었다. 예정된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페이니의 손이 엘도트의 어깨와 팔뚝을 더듬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살결. 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탄탄한 근육질 몸이 페이니의 손을 자극했다. 조금 더 힘을 줘볼까? 말랑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근육이 그녀의 손가락을 튕겨냈다. 오기가 든다.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손가락에 힘을 줘도 살이 눌리지 않았다. 그러다 포기하고 그의 어깨로 넘어가더니 등을 쓰다듬었다. 평평한 등 대신 잔잔한 굴곡이 만져졌다. 같은 사람 몸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오죽하면 악몽의 성에 있을 때의 언데드가 떠오를까. 그것들처럼 딱딱하면서도 그것들과 달리 따스했다. 그 이질적인 느낌이 페이니의 손을 계속 이끌었다.
엘도트 역시 페이니의 부드러운 몸을 마음껏 만지며 음미했다. 우선 키스로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과 혀를 즐겼다. 커다란 손에 비해 보잘 것 없을 정도로 귀여운 몸을 주물렀다. 팔뚝은 너무 가늘었고 살은 심각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대로 손에 힘을 주면 뼈가 부러지고 살이 녹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쓸 데 없을 정도로 엘도트의 손길은 섬세했다. 행여나 손톱에 긁힐까 뭉툭한 부분으로만 문질렀다. 혹시라도 부러질까 손 안에 살이 차오르되 넘치지 않게 쥐었다. 여차하면 멍이 들까 뼈가 조금이라도 눌린다 싶으면 손에 힘을 뺐다.
그의 손길은 몸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어루만졌다. 키스에 정신을 팔 틈이 없었다.
쪽
“하아……”
키스와 함께 이루어진 손의 탐색전은 끝났다. 두 사람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
“아.”
페이니는 멍한 얼굴로 일어났다. 가볍게 눈을 비비면서 배 위에 얹어진 두터운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엘도트가 잠들어 있었다.
“……흥.”
페이니는 뾰로통한 얼굴로 엘도트를 보더니 그의 옆구리를 찰싹 때렸다. 곤히 자던 엘도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일어날 시간이라서 깨웠어, 잠탱아.”
엘도트는 덤덤한 얼굴로 보다가 일어났다. 페이니는 입을 삐죽이며 반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심통을 부린 이유는 전날 밤 때문이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엘도트는 페이니를 건드리지 않았다. 길고 긴 키스가 끝나고 그냥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페이니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섹스까지 가지 않고 잠들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은근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발기한 주제에.’
엘도트의 몸은 성실하게 반응했다. 그런데도 섹스도 하지 않고 그냥 잠만 자다니.
괜히 버트와 몸을 섞던 그 모습이 떠올라 심통이 났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어째서 키스를 벌인 건지 의아했다.
그래서 페이니는 기지개를 키고 씻으러 가는 엘도트의 손을 붙잡았다. 엘도트는 말없이 페이니를 바라보았다. 페이니 역시 아무 말도 않고 엘도트를 뾰로통하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엘도트가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페이니의 손에 힘이 사르르 풀리며 떨어졌다. 엘도트는 태연하게 욕실로 들어갔다.
‘진짜……!!’
페이니는 얼굴이 벌개져서 침대를 퉁퉁 때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베개까지 두들겨패고 나서야 침대에 널부러졌다.
‘왜……’
페이니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베개를 끌어 안았다.
‘왜 헷갈리게 하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 물을 수도 없고…… 이대로 넘길 수도 없었다.
혹시 키스 한 번이면 잠잠해질 거라 생각한 걸까? 그게 아니면 이 정도면 충분한 여자라 생각한 걸까? 뭐가 됐든 페이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페이니는 제대로 도발하기로 했다.
“후우?”
몸을 씻고 나온 엘도트는 알몸의 페이니를 보았다. 페이니는 뒷짐을 지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더니 몸을 착 붙이며 올려다보았다.
“어제 못한 거 지금 할래?”
엘도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페이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감싸 안고 욕실에 밀어넣었다.
“타이밍을 보고 말해라.”
“뭐!? 누가 봐도 지금이 적기 아니었어?!”
“아니다.”
페이니는 엘도트의 부드러운 거절에 짜증이 치솟았다. 안 하면 안하는 거지 타이밍을 보라니? 엘도트는 으르렁대는 페이니를 뒤로 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이니가 씻고 나올 때 쯤에는 갑옷 차림으로 서있었다.
“……종기사도 없이 혼자 입었어?”
“해보니 되더군.”
“그래, 그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차림인 거려나.”
“계획을 바꿀 생각이다. 이대로 다른 녀석들과 합류해서 도시를 벗어날 생각이다.”
“갑자기?”
“이대로 가만히 있어봐야 달라질 건 없다. 무엇보다 주군이 돌아올 시점에 여전히 추적자가 남아있다면 곤란해. 어쩌면 우리 자체를 감시하는 게 목적일 수도 있으니까.”
페이니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맞았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는 판테스 왕국에서 직접 보낸 염탐꾼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블랙 남작을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페이니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도 했고 그의 마음도 대강 확인했다.
‘뭐, 포기한 건 아니니까.’
아직 버트를 마음에 두고 있단 걸 확신한 페이니는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확실히 확인해봐야 할 게 있긴 하지. 나도 그냥 잠만 잔 건 아니니까.”
그녀의 손짓과 함께 페이니의 전신이 검은 빛으로 감싸졌다. 검은 오프숄더 드레스와 잿빛 캐미숄을 걸어둔 모습…… 그녀의 모습은 흡사 스스로를 잘 가꾼 귀부인 같았다. 안 그래도 미색이 짙은 그녀가 우아하게 꾸미니 아름다움이 한 층 깊어졌다.
페이니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엘도트를 보았다. 그의 덤덤한 시선에 페이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제 와서 새삼 예쁘다고 생각한 거야? 반해버렸어?”
“……그다지.”
“흥, 그렇겠지. 빨리 입으라고 재촉 안 한 게 다행이네~”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숙소를 나섰다. 엘도트는 말없이 한 걸음 떨어져서 뒤를 따랐다.
이디아와 브론트와의 만남 역시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페이니가 미리 그들의 장소를 수배해두고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브론트는 싹 바뀐 페이니의 모습에 잠시 적응을 못했다. 반면 이디아는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눈치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페이니의 차림새만 보고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챈 것이다.
그에 비해 브론트는 어리둥절하며 인사를 올리는 이디아를 보았다. 그나마 엘도트가 한 발 늦게 이디아의 반응을 통해 그녀의 목적을 깨달았다.
“인사를 올려라, 브론트.”
“아, 아, 예……”
브론트는 그제야 한쪽 무릎을 꿇었다. 페이니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살리마 왕국으로 갈 거야. 게이트를 좀 타긴 할 건데 그래도 관광을 위해 움직이는 게 낫겠지?”
“……버트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디아의 질문에 엘도트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페이니는 곁눈질로 엘도트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걔가 우리를 찾는 것보다 우리가 걔를 찾는 게 더 빨라. 보나마나 어디에 잡혀서 야한 짓 하느라 늦을 테지. 그러니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음……”
“흠……”
세 명은 특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버트의 평소 성생활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러지 않다고 해도 버트가 일을 만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버트는 큐엘에게 붙잡혀 온갖 실험을 시작했다.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행선지는 정해졌다. 애초에 그들이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페이니는 우아한 여인이었다. 누가 봐도 ‘귀족 같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랬기에 그들이 반발해서 일을 터뜨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월권 행위를 한다면 그 즉시 떨쳐내겠지만…… 아무래도 페이니가 버트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발르틴에서 다음 마을로 건너갈 때 전달되었다. 이디아가 채찍을 잡고 마차로 이동하는 사이 페이니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해. 마신의 밑에서 일할 때도 참모의 역할을 했던 몸이니 믿어도 좋을 거야.”
“구체적인 계획은?”
“우선 앞서 말했던 다크나이트의 규모 확산과 관련된 일이야. 허수아비 귀족을 잡기에는 그릇이 너무 여려. 무엇보다 이목이 집중받기를 싫어하니 이 부분은 내가 해결할 생각이야.”
“어떻게?”
이번에는 브론트가 물었다. 페이니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블랙 남작이 될 거야.”
이건 듣기에 따라 귀족사칭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속단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지?”
엘도트가 먼저 물었다. 페이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이름 있는 귀족들이 종종 쓰는 ‘대타’가 되려는 거야. 무엇보다 지금 그릇에 대한 신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 그러니 대리 역할을 하기 좋은 상황이야. 나랑 그릇이 일일이 역할을 바꾸고 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음……”
브론트는 별 생각이 없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반면 엘도트는 페이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흥, 어차피 귀족 자리를 노리는 건 아니야. 맘만 먹으면 누구든 홀려서 골려줄 수 있는 걸. 그냥 우리 그릇을 위해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가.”
엘도트가 일단 수긍하니 페이니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그릇의 익명성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야. 그러니 최대한 연기에 힘써줘야겠어.”
“……흠.”
“뭐, 싫으면 말고. 나야 귀찮은 일 안 해서 좋으니까.”
“구체적인 계획은 있나?”
“저번에 말했다시피 큰 전쟁이 아니고서야 작위를 올리기는 힘들거든. 딱히 업적도 없는 마당에 땅을 요구하기도 파렴치하니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려고. 여차하면 내가 있던 성에서 다크나이트를 양성하면 되니까 말이야.”
“그 외의 의심은 어떻게 피할 생각이지?”
“잘 했잖아. 어젯밤 기억 안 나?”
페이니는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지만 이건 역효과였다. 숙소에서 있던 일이 떠올라버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않았다. 브론트의 반응 때문이었다.
“어젯밤……?”
“별 일 아니다.”
“정말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브론트는 엘도트를 빤히 보다가 페이니를 보았다. 페이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없었다고?”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의심을 피한단 거야?”
말을 끌던 이디아가 창문을 통해 물었다. 페이니는 부채질을 하며 대답했다.
“이모탈의 특성을 이용할 거야. 일정 주기로 수면에 든 척 하고 숨거나 그들의 성향을 흉내내면 될 일이지. 너도 잘 알지?”
페이니가 다시 엘도트를 보자 브론트가 빤히 바라보았다. 엘도트는 브론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다 발각될 경우 어떻게 할 셈이지?”
“그럴 경우 의심은 다른 곳으로 튈 거야. 그래봐야 그릇한테는 의심이 튀지 않아. 아마 끽해봐야 너희, 아니면 다른 관계자를 의심하겠지.”
“어째서지?”
“네가 생각했을 때 그릇이 귀족 같다고 생각해?”
그 질문에 모두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디아는 아예 마부 창문을 닫아버렸다.
“애초에 그럴만한 행동을 안 하니까. 오히려 그 점이 의심을 피하기 쉽지. 기사직을 얻은 이모탈이 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거든.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어. 여차하면 내가 몽마들을 동원해서 막을 테니까.”
“알았다. 믿고 있겠다.”
페이니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브론트는 제법 놀란 눈으로 엘도트를 보았다. 페이니는 별 신경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했다.
그렇게 살리마 왕국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됐다.
*
살리마 왕국으로 향하는 동안 페이니와 세 기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디아와 브론트는 페이니가 생각보다 박식한 것에 놀랐다. 예상 외로 검술에 대해 조예도 깊었고 병기술에도 지식이 있었다. 의외로 용병술 역시 대단했다.
그랬기에 여정은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의아한 건 그녀의 끝 모를 지식이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는 겁니까?”
브론트의 질문에 페이니가 잠시 주춤거렸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이랑 자주 얘기하다보니 알게 되더라고.”
“그렇군요. 겉으로 보이시는 것보다 경험이 깊어서 놀랐습니다. 그보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후후……”
“선배.”
“왜……?”
“일단 오시죠……”
엘도트는 잠시 페이니를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페이니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
살리마 왕국의 수도 라트베아. 페이니와 세 기사는 이곳에 도착하고 숙소를 잡았다. 페이니는 버트의 위치를 확정지었지만 쉽게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백신.’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백신의 존재. 다른 이들은 몰라도 페이니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가. 페이니는 백신을 감지한 뒤로 세 기사들에게 주변 관광을 제안했다. 이디아는 기다렸단 듯이 브론트와 함께 마법사의 도시를 탐방했다. 그에 비해 엘도트는 페이니의 곁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군이 계신 건 확실한가?”
“아무렴. 너희를 속여봐야 뭐가 좋다고.”
“그때도 그랬었지?”
“흥, 너희가 그릇이랑 같이 다니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호위가 주인보다 약하면 체면 안 서는 거 몰라?”
“그런가.”
“그래.”
엘도트는 페이니를 힐끔 보다 다시 탑을 보았다.
“추적은?”
“물어보는 걸 보니 숨어있는 녀석이 있을까봐? 예상대로 기척 숨기고 보는 녀석들이 있어. 하지만 걱정 마. 그 중 반은 판테스의 왕이 보낸 거니까.”
“일단 안심해도 된다는 건가?”
“그래. 그러니 너무 그릇 걱정은 하지 말고.”
두 사람은 탑을 한참 지켜보다 돌아섰다. 그리고 이디아와 브론트가 노느라 늦는단 소식을 접하고 미리 숙소를 잡았다.
“이제는 같은 방 쓰는 게 거리낌 없나 봐~?”
“그럴 리가.”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의문도 없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 있었다.
페이니는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앉았다. 발르틴에 있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큰 긴장은 없었다. 페이니는 이미 마음을 놓고 있었다. 당장 엘도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오로지 버트만 걱정하는 그 모습이 페이니를 흔들었다. 여기로 오는 동안에도 말없이 있던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 버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엘도트는 갑옷을 벗어두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을 보다 문득 발르틴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꿈.’
라펠튼. 이름 없는 몽마였던 페이니의 연인이었던 다크나이트. 그리고 불리한 싸움이란 걸 알면서도 자처해서 다크나이트를 이끌고 백신과 싸웠던 기사. 그에 대한 그리움이 터지면서 무심코 엘도트에게 안긴 모양이었다.
페이니는 그제야 자신의 어리광을 깨달았다. 애초에 엘도트에게 관심이 간 것도 올곧은 태도 때문이었다. 닮은 점이라고는 꽉 막힌 기사란 것 정도인데……
페이니는 자신의 미련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쁘다거나 후회는 없었다.
이 미련한 남자. 자신이 섬기는 사람 말고는 보지 않는 딱딱한 남자. 그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이 싫지 않았다.
그때 엘도트가 페이니의 앞에 섰다. 페이니는 그림자가 지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간편한 차림이 된 엘도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이니는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어차피 그릇 기다리려면 시간이 좀 걸”
엘도트가 페이니를 일으켜 세웠다. 페이니는 영문 모를 얼굴로 끌려 일어났다가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그때와 같았다. 페이니는 그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몸을 떨었다.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엘도트가 그녀의 뒷목을 누르고 허리를 감싸 안아버렸다. 페이니는 그의 품에서 옴짝달싹도 못했다. 혀와 함께 숨까지 빨려나가면서 몸이 힘이 탁 풀려버렸다.
쪽
엘도트는 그렇게 키스를 해대며 페이니를 침대로 밀쳤다. 페이니가 조금 꿈틀거리니 엘도트가 팔에 힘을 주며 꽉 끌어안았다. 조금 숨이 막힐 정도로 안긴 상태에서 키스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페이니가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던 건 10분 가량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페이니는 숨을 할딱거리며 엘도트를 올려다보았다. 엘도트는 힘차게 발기한 아랫도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페이니를 내려다보았다.
페이니는 시선만 내려서 올곧게 발기한 음경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도트가 몸을 서서히 겹쳐왔다. 페이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서서히 내려오는 그를 쳐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