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5 페이니 외전 上
* * *
“꼭 돌아와.”
“물론이지.”
털컹
페이니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몽롱한 얼굴로 잠시 허공을 노려보았다. 서류 작업을 하던 중에 잠이 들었나보다. 아직 잠이 덜 깨서 흐릿한 눈을 비비적대며 일어났다. 그러자 무언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엉?”
페이니가 돌아보니 엘도트가 덤덤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급한 서류는 다 처리했어.”
“앉아라.”
“나 참……”
페이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엘도트가 그녀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큼직한 손은 페이니의 어깨를 뒤덮기 충분했다. 손은 상처와 굳은살 때문에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손놀림은 참으로 부드럽고 점잖았다.
근육의 뭉친 곳을 노곤노곤하게 풀어주니 몸이 절로 늘어졌다. 페이니는 잠에서 깨려던 몸이 다시 늘어지니 나른한 소리로 말했다.
“할 일은 해야지? 다크나이트의 증원은 다 했어?”
“물론. 이미 수배도 끝난 참이다. 훈련 매뉴얼도 준비 됐다.”
“그럼 한가하겠네?”
페이니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엘도트의 손등을 간질였다. 짙은 색의 거친 손 위로 밝은 색의 부드러운 손이 얹어졌다. 그녀의 오묘한 유혹에 엘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일은 아직이잖나.”
“딱딱하긴. 대리라고는 해도 대외적으로는 귀족이거든? 너보다 위에 있다 이 말이야.”
“그럼 블랙 남작으로서 명령을 하면 되겠군.”
“연인으로서의 부탁은 안 들어주려고?”
“피곤해서 말이지.”
“능청스럽긴.”
페이니가 고개를 들자 엘도트가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은 연인처럼 키스를 나누었다.
이런 관계가 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 쪽은 버트를 위협했던 몽마고 다른 한 쪽은 버트를 섬기는 기사였다.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진척되었다.
*
“떡치는 거 좋았어~?”
페이니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때는 악몽의 성에서 나오고 라피에 초원으로 향하는 시기였다. 조금씩 성적인 것에 개방되기 시작한 버트는 시도 때도 없이 기사들과 몸을 섞었다. 오죽하면 동행했던 니스가 꾸짖었을까.
엘도트는 물가에 나신으로 서서 페이니를 노려보았다. 특별히 그렇게 보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워낙 차가운 인상인지라 경계하는 느낌을 주었다.
“주군의 몸이다. 싫을 리가.”
“좋으면 좋은 거지 돌려 말하기는.”
페이니는 하늘을 유영하며 엘도트에게 다가갔다. 엘도트는 버트와 몸을 섞고난 후 몸을 씻기 위해 이곳에 와있었다. 그래서 근육이 얽혀있는 탄탄한 몸이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브론트만큼은 아니지만 근육질 몸매에 페이니는 음흉하게 웃었다.
“어때, 아직 모자른 거 같은데 내가 한 판 진하게 놀아줘?”
페이니는 물기에 젖은 엘도트의 몸을 끌어안았다. 엘도트의 몸은 겉보기보다 더 단단했다. 거기에 몸 곳곳에 희미한 흉터는 까슬까슬해서 야생동물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페이니의 문란한 손길에도 엘도트는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지?”
“흐응, 뭐가?”
“남작님께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거냐.”
엘도트는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페이니는 그저 엘도트의 허리를 안고 등 뒤로 숨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보지 그래? 아니면 그릇한테 물어보던가. 왜 나를 데리고 다니냐고 말이야~”
“남작님께서 동행을 허락하셨으니 의미가 있을 테지.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그저 네가 남작님을 속이고 흉계를 꾸미지 않게 막으려는 것뿐이다.”
페이니는 코웃음을 치면서 엘도트를 훅 밀었다. 엘도트는 그대로 물 속에 빠졌고 머리부터 푹 젖은 채 일어났다.
“뭐만 하면 남작님~ 남작님~ 애도 아니고 그게 뭐야?”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뿐이다.”
“본분? 그게 뭔데? 개처럼 할딱이면서 주인님을 부르짖는 거? 그건 애완동물이 더 잘 할텐데 구태여 그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하는 건가.”
엘도트는 페이니의 비아냥에도 무심하게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가려 하자 페이니가 그를 붙잡았다.
“정곡이었어?”
“사랑이다.”
엘도트의 덤덤한 대답에 페이니의 손에 힘이 빠졌다.
“뭐?”
“군신의 관계는 명령자와 복종자다. 하지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이지. 너는 절대로 이걸 이해하지 못할 거다.”
페이니는 벙찐 얼굴로 엘도트를 바라보았다. 엘도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몸을 대강 털어내고 옷을 입었다. 페이니는 그때까지도 물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엘도트는 야영지로 돌아가기 전 한 마디 던졌다.
“내 말을 이해하려거든 누군가를 섬겨라. 그게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흠모할 정도로 추앙해라. 그러면 달라질 테지.”
그 말을 끝으로 엘도트는 자리를 떴다. 페이니는 잠시 그의 말을 곱씹더니 으르렁거리며 이를 갈았다.
“사랑하고는 하나도 안 어울릴 인간이 무슨……”
그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지독히도 닮았다. 얼굴이나 그런 게 아니라…… 분위기나 사상이 ‘그’와 너무 비슷했다.
‘……이미 죽었잖아.’
페이니는 콧방귀를 뀌며 날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니스와 버트의 쟁탈전을 벌이면서 씁쓸했던 마음을 되새겼다.
*
이때가 변화의 시작점이었지만 전환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엘도트는 여전히 페이니를 경계했고 페이니는 엘도트의 깐깐함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버트라는 연결점 때문인지 누가 먼저 떠나거나 하지 않았다.
칼라 해변. 판테스 왕국의 관광지 중 하나지만 지금 이곳은 플레이어들이 점거했다. 바로 시련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언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 버트 일행 역시 있었다. 그리고 페이니와 엘도트는 태연하게 파라솔 아래에 앉아있었다.
“날씨 좋네~”
“계속 맑은 날씨였지.”
“오늘따라 바다도 예쁘고~”
“바다가 쉽게 변하나.”
페이니는 텁텁한 대답에 엘도트를 쏘아보았다. 엘도트는 편히 앉아있었지만 눈빛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페이니가 으르렁거리며 그의 머리를 콱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분위기 망치는 건 그렇다 쳐. 바로 옆에 이런 미녀가 있는데 어딜 보는 거야?”
“주군을 보필하는 게 기사의 일이니까.”
“얼굴 뭉개져서 잘도 말하네. 응?”
“놔라.”
“싫어~ 이쪽 봐 그럼.”
“왜 그래야 하지?”
“딱딱하긴!!”
두 사람이 티격거리는 모습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아주 그냥 커플끼리 잘 노네.”
“뒤져버렸으면~”
“아니 인싸놈들 현실로 안꺼지나 진짜.”
그 말이 들리자 페이니가 눈웃음 지었다.
“우리가 연인처럼 보이나 보네?”
“……그런가.”
이번에도 무미건조한 반응. 페이니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는 여전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릇이 그렇게 좋아?”
“좋은 게 아니다. 섬기는 것일 뿐이지.”
“저번에는 사랑의 다른 형태라면서? 그렇게 말해도 결국 연심을 숨기려고 말하는 거 아냐.”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군.”
“이해하지 못해? 내가 얼마나 살아왔다고 생각해? 겉으로 보기에는 싱싱한 미녀라고 해도 살아온 시간이 있어. 지금의 너처럼 솔직하지 못하게 변명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꾹꾹 눌러두고 살아올 때도 있었어. 내가 그 정도도 간파하지 못할 거 같아?”
엘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오히려 페이니의 속을 긁어놓았다.
계속해서 한 눈 팔고 말까지 무시하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까. 아무리 오래 살았고 몽마 위에 군림하고 있다지만 그녀 역시 여자였다. 일방적인 무시와 외면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런 그릇의 어디가 좋다고 그래? 어수룩하고 멍청하고 자기주장도 뚜렷하지 않은데 말이야.”
페이니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홱 고개를 틀었다. 그때 갑자기 손목이 당겨졌다.
“어?”
엘도트가 페이니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눈앞에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네가 저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그러지?”
그 기세는 순간적으로 페이니조차 움츠러들 정도였다. 하지만 페이니는 나이트피어 일족을 총괄하는 수장이었다. 잠깐 주춤했을지언정 두려워하진 않았다.
“왜? 좋아하는 마음 들키니까 찔려?”
“아니. 너의 의미없는 비난이 싫을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흉보는 게 싫다 이거지?”
“그래.”
엘도트는 반론하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페이니의 속을 긁었다.
“결국 인정했네?”
“그 분은 경험이 없을 뿐 어수룩하거나 어리석은 게 아니다. 이모탈로서 현 귀족 체제와 이곳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 멍청하거나 바보 같은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뜻에 귀기울여주고 존중해줄 뿐 자기주장이 없거나 뜻이 없는 게 아니다.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쓸 데 없는 비난은 삼가라.”
페이니는 그의 일장 설교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애초에 사람을 먼저 무시한 건 엘도트가 아니던가! 어째서 자신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아, 그러셔? 그렇게 목석 같으니 그릇이 널 안 돌아보지. 네가 작정하고 떡치고 싶다고 하면 저쪽도 좋다고 반길 걸? 아니면 이대로 다른 두 녀석한테 뺏기든가. 남의 자지가 들락날락거린 보지를 잘도 쓰고 싶겠”
페이니는 말을 하다 멈추었다. 엘도트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은 놀라우리만치 냉정했다. 분노는 없었다. 그렇다고 짜증도 없었다. 그저 페이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조차 곁눈질이었다. 여전히 얼굴은 페이니를 향해 돌리지 않았다. 그 시선이 페이니의 마음을 흔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접해온 그녀였기에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저 궁금할 뿐이다. 그렇게까지 주군을 깎아내려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평소의 너답지 않군. 그저 성적 수치심을 자극한다기에는 대상이 잘못 됐어. 무엇이 그리 불만인 거냐.”
“그야”
페이니는 자기가 하려던 말을 꿀떡 삼켰다. 엘도트가 대번에 자신의 기분을 파악했단 점도 그렇고 구질구질하게 자기 입으로 이유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마신의 부활을 뒤로 제쳐두고 태연하게 보기 싫은 거지.”
“그래, 너는 마신을 섬기고 있었지.”
엘도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니는 그의 혼잣말에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너 역시 나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랑 내가 같다고……?”
“그래. 섬기는 자를 추앙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그 마음. 아주 잘 알았다. 그러니 조급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 다만 그 말은 주군의 앞에서는 하지 마라. 쉽게 상처받으리란 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테지.”
페이니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기분을 파악하는 것도 그렇고 잘 아는 듯이 말하는 태도도 그렇고……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페이니는 쉽사리 부정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도트의 신봉과 자신의 신봉은 확연히 달랐다.
‘그저 미련일 뿐이야.’
만일 페이니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진즉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루하다가 산산조각나고 씨앗만 덩그러니 남은 시점에서 그녀가 주도권을 얻을 수 있었다. 엠파이어와 셀기디어는 유독 백신들의 견제를 많이 받았고 리어페어리와 슈어드는 의지가 없었다. 라이칸슬로프는 거의 명맥을 잃었고 다크나이트는……
페이니는 인상을 구겼다.
어쨌든 이 모든 건 미련일 뿐이었다. 루하다를 꾸짖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른 이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다크나이트의 유지를 이어버린 것도 미련 중 하나였다.
“달라.”
……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모른다. 그래서 묻는 거다.”
엘도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직 너와 내가 만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상대에 대해 알려면 충분한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지. 그걸 위해서라도 묻는 거다.”
엘도트가 처음으로 페이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시선만 주던 그가 제대로 그녀를 돌아봤다.
“페이니.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거지?”
“……뭘 안다고.”
페이니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일어났다. 그녀가 성큼 돌아서자 엘도트가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페이니의 가슴이 뛰었다. 괜히 머리가 저릿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하는……”
“벗어나지 마라.”
중후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페이니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쾅!
그때 멀리서 바다뱀이 솟구쳤다. 칼라 해변에서 모두가 기다리던 이벤트 보스 메두사가 나타났다.
엘도트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홱 돌렸다. 그는 자기보다 월등히 강한 버트를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그 모습에 페이니가 얼빠진 얼굴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졌다. 자신을 두고 떠나가는 강인한 기사의 뒷모습.
자신보다 강한 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가지마.”
페이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술을 깨물며 날아갔다. 그리고 버트와 합류했다.
*
메두사와의 레이드 이후 버트는 살리마 왕국으로 향했다. 눈에 띄면 안 된다는 이유로 세 기사는 페이니와 함께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크나이트의 규모를 늘리는 계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먼저 적합한 사람을 선별하고 그 인원을 거두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을 거둘 땅이 없었다.
“흐음……”
페이니는 턱을 괴며 고민에 빠졌다. 대놓고 어느 지역을 점령해버리면 백신이 간섭할지도 몰랐다.
“역시 승작밖에 없으려나.”
“하지만 주군께서는 번거로운 걸 싫어하신다. 남작위로도 충분히 기사를 거둘 수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눈에 띌 거야.”
엘도트의 지적에 페이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누구들처럼 단순한 줄 알아? 일단 허수아비로 세울 귀족이 한 명 필요해. 그러려면 공을 세워야 하는데 지금 시기에서 그럴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작위를 올리는 데는 전쟁만한 게 없지.”
“그 말에는 동의해. 하지만 지금 전쟁이 날 껀덕지가 없잖아?”
페이니는 이디아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아, 모르겠다. 일단 단 거나 먹고 기운 보충이나 할까? 어때, 여기 발르틴도 제법 놀 곳이 많다구?”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엘도트와 팔짱을 꼈다. 엘도트는 덤덤한 얼굴로 앞만 보았고 이디아와 브론트는 슬쩍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 나는 브론트 선배랑 같이 주변 산책 좀 다녀올게.”
“응? 난 왜……”
“아, 선배 같이 가요. 이 참에 제가 돈 쓰는 법도 알려드릴 테니까.”
“큼……”
이디아가 눈치껏 빠지고 난 뒤, 페이니는 가슴으로 엘도트의 팔을 꾹 눌렀다.
“아직도 그릇 일편단심이야?”
“이상한 질문이야.”
“흐응, 그야 네가 이상하니 질문도 이상해질 수밖에.”
“흠.”
엘도트는 갑자기 페이니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벽으로 밀치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이런 짓을 할 줄 몰랐기에 페이니는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미행이다.”
“어, 어?”
“주군과 헤어진 후 붙은 녀석들이다. 아마 이디아도 그것 때문에 따로 행동한 거겠지.”
그제야 페이니의 귀에도 기척이 느껴졌다. 구태여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희미한 기척이었다.
“그래서 어쩌려고?”
“일단 목적을 알아야지. 단순 관찰인지 아니면 기습인지. 관찰이라면 무엇을 위한 관찰인지 전부.”
그래서 엘도트는 페이니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자연스레 길가의 먹거리나 볼거리 등을 보게 되었고 데이트처럼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행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짐작 가는 건 있나?”
“하얀 놈들이라면 내 짐작이 맞을 텐데.”
“하얀 놈들?”
“근데 그건 아닌 거 같네. 그 녀석들이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거든. 이렇게 대놓고 기척을 알리는 경우도 없었어.”
“그러면 너와는 관계없는 부류로군.”
엘도트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페이니는 대강 이유를 알아챘지만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뭐, 당분간은 따로 활동해야겠네? 괜히 합쳐봐야 그것들 눈에 보이기 좋아지니 말이야.”
“확실히……”
둘은 각개격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엘도트의 경우 버트가 없었고 스스로 지킬 수 있어서였다. 페이니의 경우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그녀는 그들이 염탐꾼이고 공격할 의사가 없단 걸 알아챘다. 자세한 건 다른 몽마를 통해 알게 되겠지만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무력에 자신감이 있는 건 덤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그쪽도 여비는 충분할 테니 요 며칠은 따로 지낼까?”
“일단 이디아와 브론트에게도 말해둬야”
“쫓기는 동안에 부하 하나 시켜서 말 전해뒀어. 그건 넘어가도 돼.”
“우리 돈은”
“내가 챙겼으니 걱정 마.”
“머물 데”
“아까 알아봤는데 블루윙이랑 골드락이란 여관 둘이 유명하대. 둘 중 하나 아무데나 골라서 묵으면 될 거야.”
엘도트는 페이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다렸단 듯이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에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왜? 난 누구들과 달리 준비성이 철저할 뿐이야.”
“……그런가?”
“좀 돌아다니다가 여관으로 가자. 어차피 저녁도 거기서 해결하면 될 거고.”
“저들의 목적만 알아내면 곧장 행동으로 옮기지.”
“행동으로?”
엘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힘을 좀 쓸 뿐이다.”
“어련하시겠어. 잡든 말든 신경은 안 쓰겠지만 심문은 나한테 맡겨.”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앞서 말한 여관 중 한 곳에 숙박했다. 저녁은 가볍게, 그 후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왜 2인실이지?”
“1인실 2개를 원했어? 이걸 어째, 마침 남은 방이 그것밖에 없었다더라~”
“침대는 왜……”
“2인실이 대부분 커플이니까 하나 뿐이겠지.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좀 마. 어차피 침대도 넓고 너도 크게 곤란한 건 없잖아. 아~ 나랑 같이 잔 거 그릇한테 들키면 곤란해져서 그러려나~?”
“후우”
엘도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페이니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잠깐 희미한 기척들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이모탈과 우리의 다른 점.’
페이니는 그들이 소문을 물어서 쫓아온 것으로 결론지었다.
바로 최초의 이모탈 귀족 블랙 남작! 그들이 자신과 엘도트 일행 중 하나를 그로 의심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버트의 위장 형태인 ‘리실버’의 용모파기까지 얻은 이들도 있었다.
‘이걸 최대한 활용해볼까. 우리 그릇한테 서비스도 해줄 겸 말이지.’
페이니는 느긋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마신의 추락 후와 전, 모든 시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물렀다고 자신했다. 당연히 이모탈의 행태는 물론 제약까지 섭렵했다.
자연스럽게 연기해볼까.
*
쏴아아아
페이니는 수건을 몸에 두르고 나와 엘도트를 힐끔 보았다. 먼저 몸을 씻은 그는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그 덕분에 팔뚝이나 정강이의 근육이 도드라진 게 보였다. 페이니 역시 뿔이나 날개, 꼬리가 없어서 이종족이라기보다 평범한 미인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훈남훈녀,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뒷배경을 모른다면 그저 여관에 들어온 커플이라 오해했을 것이다. 어쩌면 불법 컨텐츠를 다운받은 플레이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때, 둘만 있으니 긴장 돼?”
엘도트는 침대에 앉아 힐끔 보았다. 페이니는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리며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입욕제 향기가 확 풍겨왔지만 엘도트는 앞만 보고 있었다.
“으응~? 긴장 했어~?”
“쓸 데 없는 소리 할 거면 잠이나 자라.”
“농담도 못해? 깐깐하긴.”
페이니는 입을 삐죽이며 속삭였다.
“잘 맞춰.”
그 한 마디로 페이니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때, 오빠? 예전이랑 좀 다르지? 오빠는 모르겠지만 비싼 돈 들여서 다운받은 거라구. 아마 진짜랑 비교해도 손색없을 거야.”
“그래……?”
페이니는 어색하게 굳어진 엘도트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참았다.
“이거 봐. 살도 진짜 같다니까? 만지는 느낌도 나고~”
페이니는 손을 잡아 자신의 팔을 잡게 했다. 크고 거친 손에 비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이 만져졌다. 엘도트는 시선만 돌려 팔에 얹어진 손을 보았다.
“후후, 오늘 밤 기대해?”
그녀의 말이 끝나고 페이니가 엘도트를 밀치고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향기가 수렁처럼 엘도트를 뒤덮었다. 배와 옆구리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엘도트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페이니를 보다가 침대 옆으로 밀쳤다. 페이니는 꺄르륵 웃으며 침대 위에 폭 넘어지면서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엘도트는 흠칫 떨더니 그녀의 두 손을 잡꼬 깔아버렸다.
페이니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올림머리도 풀어서 침대 위로 흐드러졌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가 은은하게 빛났고 예쁘게 빛나는 두 눈이 엘도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자신이 있는 당찬 미소와 수건이 흐트러지며 드러난 색기 충만한 몸……!
엘도트는 그런 페이니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페이니는 눈을 감았고……
“언제까지 연기해야 하지?”
엘도트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페이니는 뚱한 얼굴로 눈을 뜨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이제 됐어. 엿듣던 녀석들 다 가버렸으니까.”
“그런가.”
“아후~ 아까워라. 이런 극상의 미인이 다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왜 안 건드리나 몰라?”
“……극상의 미인?”
엘도트의 되물음에 페이니가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흥, 됐어. 건드리기만 해봐. 아주 그냥……”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밤, 두 사람은 선을 넘게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