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52화 (52/104)

〈 52화 〉 52 ­ 베즈웍 유적지 上

* * *

검은비늘의 폭주 상태는 진정되었다. 그의 말로는 머리가 몽롱해져서 이성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그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린베스가 사태를 파악하겠다고 나섰다. 책벌레로 살았던 그녀인만큼 근방에서 그 증상의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루하다가 버트의 심상 속에서 원흉을 말해주기 전까지 그저 발정기라고 결론내릴 뻔했다.

‘마신을 해친 사람과 셀기디어의 딸……?’

[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루하다는 웬일로 둘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해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많이 위험한 거야……?’

[ 안전을 장담 드리기 어렵습니다. ]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루하다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섬기던 상대를 찢어발긴 이들이라는데. 버트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미안.’

[ 괜찮습니다. 확실한 건 셀기디어의 딸이 저 뱀을 폭주시켰단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셀기디어 본인에게 따져도 문제 없습니다. ]

‘으음,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겠지……? 일단 다짜고짜 추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 알겠습니다. 그러면 위치만 알아두겠습니다. ]

‘혹시 지금도 지켜보고 있어?’

[ 네. 그냥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

버트는 루하다의 대답에 고민했다. 검은비늘을 폭주시켰다는데 그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해치려 했다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찝찝했다.

‘혹시 이상한 짓을 한다면 루하다가 제압해줄 수 있어?’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 네. ]

‘힘든 일이면 안 해도 돼.’

[ 아닙니다. 곁에 있는 백신이 얼마나 간섭하느냐를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닐 테니 덤벼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

‘다만?’

루하다는 자신의 염려를 털어놓았다.

[ 백신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릇, 당신을 노리고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

아직 버트는 자신을 찾아왔던 백신 3호와 지금 말하는 백신이 동일인이란 걸 몰랐다. 그래서 루하다에게 어떤 정보도 건네지 못하고 그저 그렇구나란 말로 넘겼다. 애초에 신을 제압한 녀석들인데 그녀가 뭘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트는 그저 조금 더 주의를 하자고 생각했다.

[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제 자신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되었군요. ]

‘그, 그래? 에헤헤, 나는 그냥 페이니가 알려준 대로 했을 뿐인데……’

버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럴 때마다 아직 뱃속에 잔류해있는 검은비늘의 정액이 툭툭 떨어졌다.

[ 어찌 보면 그릇에게는 첫 권속일지도 모릅니다. ]

‘응? 검은비늘이?’

[ 아뇨. 저기 누워있는 마법사를 말한 겁니다. ]

‘어어­?’

버트는 움찔대고 있는 린베스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그 모습에 검은비늘과 한창 몸을 섞던 중에 겪은 일을 떠올렸다.

‘아…… 혹시 그거…… 그거 때문인가?’

[ 그릇의 마기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마신 리아주크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렵기에 육체의 재구성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한 단계 진화를 이루는 셈이죠. ]

‘아­ 그럼……’

루하다는 버트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아챘다.

[ 걱정 마세요. 그저 다른 존재로 거듭날 뿐, 죽음 이후의 재탄생이 아닙니다. 다크나이트와 비슷한 결과물일 뿐이죠. ]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거야? 몸이 아프다거나……’

[ 지금 그녀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보이십니까? ]

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 지금 그녀는 생에 더없을 기쁨을 맛보고 있을 겁니다. 그릇에게 종속되고 그릇을 위해 봉사하는 기쁨은 남다르죠. ]

‘루하다 너도?’

[ 물론입니다. 그릇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저의 기쁨입니다. ]

그 말에 버트는 애써 웃었다. 부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길 빌었다.

잠시 후 검은비늘은 거리를 두고 똬리를 틀었다. 뒤늦게 린베스도 깨어났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보다가 버트를 보았다. 린베스는 버트의 얼굴을 본 순간 남다른 경외심이 깨어났다. 이건 길렌 백작의 상태와 비슷했다.

신성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버트에게 얽히고 싶단 욕망이 솟구쳤다.

“역시…… 탑주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요……”

린베스는 여전히 뱃속의 이물감이 남아있지만 감탄하기 바빴다. 기존의 사상까지 뿌리 뽑힌 건 아닌지 그녀의 두 눈에는 경외심이 가득 어렸지만 이유없이 추앙하진 않았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낀 버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과연 루하다의 말대로였다. 길렌 백작이 떠올라서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이런 건 조심해야겠어.’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린베스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금방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지금 저는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즉흥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당신에게 호감을 갖는 건 아닙니다. 나름대로 분별력은 있습니다.”

버트는 나름 안심했다. 린베스의 침착한 변호는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버트로서는 아직 린베스의 배려를 알지 못했다. 분별력도 있고 이성도 있지만 지금 그녀는 마성자보다 위험한 상태였다. 몸뚱이가 버트를 원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나로 합쳐져서 섹스를 나누고 싶었다. 그 본성을 막은 게 찰나의 이성이었다.

버트는 크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다. 덕분에 이 날의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교역로 개척은 무리 없이 진행됐다. 검은비늘이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서 몬스터들을 잡아먹으면서 밀림의 수호신 정도로 취급받게 되었다. 당연히 말이 통하니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어느 정도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드래곤이나 다름없군.”

“그러게. 저렇게 크고 강한데 말까지 통하는 몬스터가 어디 그냥 몬스터야?”

본래 검은비늘에게 붙은 종족명은 레비아탄이었다. 하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 검은비늘이라는 오리지널 이름이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검은비늘 본인은 이름에 조금 불만이 있었지만 버트가 지어준 것보단 낫다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교역로 개척이 마무리 지어질 때까지…… 버트는 종종 그와 섹스를 나누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마기는 점점 검은비늘에게 축적되고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검은비늘은 확연히 강해지는 힘에 감탄하는 한편 버트의 끝 모를 성욕에 놀랐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린베스의 몸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 역시 조금씩 강해졌지만 버트는 알아채지 못했다. 버트의 마기로 강해진 검은비늘이 다시 린베스에게 마기를 주입했단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버트가 교역로를 떠나가는 그때까지 검은비늘과 린베스가 섹스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였다.

멀지 않은 날 검은비늘은 버트가 낳은 알과 린베스를 통해 자신의 둥지를 꾸리게 된다. 그리고 린베스는 밀림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고 마탑을 탈퇴하게 된다.

어쨌든 라이의 긴급 퀘스트는 마무리 되었다. 검은비늘이 버트가 낳은 알을 품겠다며 기뻐하는 모습에 버트가 난처해하는 일도 있었다. 버트는 기뻐하는 그 모습에 민망함을 접어두고 알을 잘 보살펴달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살리마 왕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준비할 때 누군가 버트와 접선을 시도했다.

“안녕?”

새하얀 여인 두 명. 그 중 한 명은 작정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차려입었다. 그 한 명은 버트에게 몹시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버트는 처음 말을 건 나탈리가 아닌 3호를 보았다. 나탈리는 버트의 반응에 3호를 힐끔 보았다.

‘뭐야, 구면이었어?’

나탈리는 김새는 얼굴로 힐끔대다 말했다.

“나는 나탈리아 헬디스. 직접 만난 건 처음이지?”

“아, 네……”

버트가 루하다에게 정체를 물으려다 나탈리가 한 발 먼저 말했다.

“네가 만났던 셀기디어 헬디스 알지? 그 사람이 내 아빠야.”

“아~!”

버트는 그제야 두 사람이 루하다가 말했던 2인방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탑을 나설 때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간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상한 말을 하고 사라지더니……

버트는 무심코 배를 손으로 가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모습에 나탈리가 빙긋 웃었다. 요사스러운 눈웃음만 보면 페이니와 동류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면에 서린 건 색기가 아니라 장난기였다.

페이니가 성숙한 매력이었다면 나탈리는 악동과도 같은 매력이 있었다. 버트는 비슷하지만 다른 매력의 여인을 보며 생각을 달리 했다.

분명 종종 동성과 몸을 섞은 경력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친인 니스와 음란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처럼 동성을 주의 깊게 살핀 적은 없었다.

특히…… 성욕을 기반으로 한 관찰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현실에서 본 세영이나 발르틴에서 수발을 들어주던 하녀들, 여성 마성자들 정도가 끝. 이런 변화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꾸준히 벌인 동성과의 관계와 색욕에 잡아먹힌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지금 린베스를 통해 터져버린 것이다. 버트가 이런 세세한 내막까지 알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다른 여성들조차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었단 사실이 중요했다.

이렇게 버트가 내면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나탈리는 서서히 솟구친 루하다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둠워퍼의 장로께 인사드립니다.”

「흠.」

“구태여 자기소개를 2번씩이나 할 필요는 없겠죠? 아, 이쪽은 3호라고 해요. 인사해.”

“마신. 수족. 확인.”

3호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루하다는 탐탁지 않았지만 버트가 아무 말도 안 하니 나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일을 벌이지 않았다. 직접 그들과 조우했던 루하다로서는 위험한 경우를 잘 알았다.

아직은 하나다. 어쩌면 3호를 앞세우고 기습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루하다는 전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백신과 함께하다니…… 오해를 받을 수 있단 건 알겠지?」

“그들이 내건 조약에서 함께 다니지 말란 건 없었잖아요?”

「셀기디어가 이걸 알고 있나?」

“아마 모를 거예요. 가출 했거든요.”

「꽤나 맹랑하군.」

“후후,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나탈리의 능청스러움에 루하다는 콧방귀를 뀌며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나탈리는 그런 루하다를 보다 다시 버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어, 그릇?”

이제는 그릇이랑 호칭도 익숙했으니…… 버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나탈리는 한 걸음 다가와 자기 배를 쓰다듬었다.

“그릇의 뱃속에 신의 씨앗이 있단 걸 알고 있어. 그걸 보러 온 거야.”

그 순간 나탈리와 3호의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림자 속에서 주시하고 있는 루하다 때문이었다.

버트만 빗나가는 섬뜩한 살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압박감은 대기 중이던 골렘 마차조차 오작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버트는 갑자기 골렘 마차가 삐걱거려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탈리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고 3호는 덤덤하게 손을 들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물론 씨앗이 발아한 상태고 꺼낼 수 없단 것도 알고 있지!”

나탈리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던 버트는 뜨끔해서 다시 나탈리를 보았다. 그제야 루하다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씨앗을 노릴 생각이 없단 걸 밝힌 이상 더 압박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반면 나탈리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버지와 대등하겠어.’

백신에게 당해 갈가리 찢겼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힘이라니……

나탈리로서는 리아주크가 살았던 시절을 알 수 없었다. 루하다가 둠워퍼 일족의 장로이면서 힘을 대표했단 것도 알지 못했다. 강력한 백신들과 홀로 싸우면서 씨앗을 지킨 일도 알기 어려웠다. 당장 루하다가 자신과 3호를 훔쳐보고 왔단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조금 특별한 존재. 그렇게만 치부했다. 하지만 이번 조우로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했다.

‘상상 이상의 힘이야. 그러면 마신은 얼마나 강하단 거지?’

나탈리는 호기심이 들끓었다. 동시에 욕망이 솟구쳤다.

‘그런 마신을 내가 길들일 수 있다면……?’

그녀는 생글거리는 미소 위로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제안을 하나 하려고.”

“제안이요……?”

“그래, 밑질 거 없는 제안. 너도 나도, 거기 계신 둠워퍼 장로께도 흥미로운 일이야.”

나탈리는 가볍게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신을 모방하는 거야.”

*

“백신 3호는 왜 이리 연락이 안 돼?”

고경태 부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짓누르며 말했다. 드러커스의 미로 사태 이후 그는 골머리를 앓았다. 희정이 말한 대로 어느 누구도 운영부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상부에서 고생했다면서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겨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사고과에 반영해주고 유급 휴가도 지원했으며 회식비까지 넉넉하게 찔러주었다.

경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몇 번이고 회계 팀에 문의했다. 그만큼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그들이 하는 말로는 상부 지침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단기적으로 볼 때는 좋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힘든 일이었다. 특히 곳곳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보상은 죽기 전에 먹는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후우……”

경태로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래서 백신들을 호출하여 현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대부분 큰 문제는 없었다. 이따금 시련이랍시고 세계가 역동하긴 했어도 전부 백신의 해결 범위 안이었다.

다만 3호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 재계산. 확인. 검토. ]

이 문장만을 남기고 연락이 끊어졌다. 경태는 다른 백신을 투입해 상황을 확인할까 고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오류가 터질 수도 있었기에 함부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백신들이 종종 다른 짓을 벌이기는 해도 전부 게임을 위해서 행동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구태여 의심이 간다고 다른 변수를 기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경태는 한숨을 뱉으며 기존의 자료들을 검토했다. 이 일은 운영 부서가 이토록 높은 성과를 유지한 근원이기도 했다.

‘현재로서 변수가 일어날 건 최초의 이모탈 귀족 실버트리와 악몽의 성을 떠난 몽마, 신에 근접한 이모탈, 최초의 이모탈 마스터, 마지막으로 탑주가 된 이모탈이다.’

경태는 차분하게 그들의 정보를 되짚어갔다. 듀크 사는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듀크 사와 엮여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중에는 경태가 보고 있는 정보를 주로 다루는 집단도 다수 있었다. 신상 파악에 특화된 회사도 있었다.

‘어째선지 제대로 아는 인간들이 없어. 신의 권위를 얻은 공대장…… 어쌔신 마스터 에니스트……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벨…… 검은 기사 실버트리……“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그들의 활동 경로와 갖가지 정보뿐이었다. 그마저도 구체적인 건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그들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 듯 했다.

‘어떻게 접속 기기의 시리얼 넘버조차 알 수가 없지? 설마 전부 불법 이용 중인가? 그렇다고 해도 메인 서버로 접속하는 것조차 역추적이 안 되다니…… 해외 지사에서 접속하거나 우회하여 진입한다 해도 흔적이 남아야 정상이다. 근데 아무런 기록이 없어.’

경태는 심각한 얼굴로 게임 속 그들에 대한 정보를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그들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갔다.

‘설마 이모탈이 아닌가?’

비약적인 생각. 혹은 말도 안 되는 가능성. 오히려 그런 생각이 가로막힌 길을 뚫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때 경태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게임 개발 중에 일어난 수 십 가지의 해프닝. 그 중에서 누락된 몇 가지 정보가 계시처럼 내려졌다.

초대 판타지아 프로젝트. 그걸 인수해온 군사 기업에서 내린 주의사항.

‘천문학적인 확률로 벌어지는 단 한 가지의 가능성.

경태는 수많은 자료를 휘젓고 한 가지 문서를 꺼냈다. 그건 한 피험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자 모두가 시스템의 일부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마신 리아주크의 비밀. 그리고 마신 리아주크의 탄생 비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이자 말도 안 되는 가능성.

‘가상현실에 완벽 동화.’

경태는 심각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어 연락을 넣었다. 오픈베타, 클로즈베타를 통틀어 함께 했던 관계자들. 그들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

신의 모방.

어찌 보면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루하다는 평온했다. 나탈리는 그의 반응이 약하단 걸 알고 단숨에 버트에게 제안을 몰아붙였다.

“이건 혁신적인 일이야. 마신의 씨앗이 싹을 튼 이상 부활은 정해진 수순. 하지만 그 전에 온전히 부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나마 모아진 육신도 완전한 것도 아니고 씨앗 역시 완전히 깨어난 게 아니니까. 그러니 부활 전의 실험을 해봐도 나쁠 건 없지.”

그러자 3호가 고개를 삐걱거리며 반응했다.

“마신. 부활?”

“하지만 너희가 아는 마신 리아주크가 아닐 거야. 왜냐하면 저기 그릇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거든.”

“네? 저요……?”

나탈리의 삿대질에 버트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영향을 받는다니?

“신이라고 해도 그릇에게 아예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야. 너의 감정이 고스란히 양분이 되어서 싹을 트게 했으니 당연히 어느 정도 변화가 일겠지. 둠워퍼 장로께서 말해주지 않았어?”

“말해주진 않았는데……”

버트는 중얼거리면서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뭐, 해서 나쁘지 않을 거야. 아플 일도 없지. 네 긍정적인 감정에 반응하는 걸 아는데 억지로 옭아맬 필요도 없고 그럴 힘도 없거든. 부활의 초석만이 아니라 새로운 그릇을 만드는 일도 기대해봄직 하지.”

“아하……”

“어때, 해보지 않을래?”

“저는 괜찮아요. 루하다는 어때?”

[ 그릇의 뜻이 저의 뜻입니다. ]

“루하다도 괜찮대.”

“좋아~ 그러면 여기에서의 일은 3호에게 맡기고 나랑 가볼까?”

“어디로 가려고요?”

“가보면 알아. 그렇게 멀지도 않고.”

나탈리와 버트는 골렘 마차에 올랐다. 3호는 버트가 전해준 서신을 받고 그대로 떠나갔다.

*

골렘 마차는 나탈리가 몇 번 손을 보니 행선지를 바꿨다. 살리마 왕국에서 스카이 왕국으로 건너는 길목이었다. 원체 포근한 살리마 왕국의 기후가 본격적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곳이었다.

버트는 마차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숲지로 둘러싸인 살리마 왕국에서 손꼽히는 평지였다. 하지만 날씨가 이렇다보니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땅 역시 척박했다. 버트는 미니맵의 지형을 확인하다가 옆자리의 나탈리가 어깨를 두드리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가기 전에 확인해둬야 할 게 있어서. 이번 실험에서 둠워퍼 장로의 신체 일부도 얻어야 하니까.”

“루하다의 몸을…… 왜요?”

“그야 마신의 힘에 가장 근접한 육신이기 때문이지. 너도 마기를 다뤄봐서 알 거 아냐? 그림자 같은 그 형체와 마기가 크게 다를 것 없다 생각하지 않아?”

버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게 이유라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건 겉모습만 보고 내린 결과가 아니야. 기본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라고. 미로­ 아니 아드레이 왕국이지? 거기에 소속된 게르티몽의 제자들 중 한 명이 마신의 일부를 모방하려 했어. 그 결과가 전투훈련소 메일드로우였지.”

버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란 뜻이었으니 조금 더 들어볼 생각이었다.

“일단 어느 정도 성공은 했어.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을 모방하려하니 한계가 온 거야. 그래서 실험 기록이나 연구 성과는 남아있어도 진도를 뺄 수가 없었지. 그런데 마침 네가 온 거고 말이지.”

나탈리는 버트의 배를 삿대질 했다. 버트는 괜히 민망해져서 배를 가리며 말했다.

“일단 마기를 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굳이 루하다의 일부를 드릴 필요가 있나요?”

“조금 달라. 마기는 나도 있고 아버지인 셀기디어도 있었어. 실험의 주체인 타티샤 역시 있지. 애초에 리아주크의 은혜를 받은 이들 주에 마기가 없는 경우는 없어. 기껏 해야 빛을 잃어버린 늑대 새끼들 정도려나.”

라이칸슬로프를 말하는 듯 한데…… 어쩐지 나탈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으로 버트는 엠파이어와 라이칸슬로프의 관계를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둘이 직접적으로 충돌한 걸 본 적이 없었으니……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마신에게 가까운 상태인 루하다를 참고 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는 리아주크의 발걸음을 쫓는 자이자 그의 그림자였다. 루하다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을 한 건지 나탈리의 제안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버트가 거북해했다.

“그래도 루하다의 일부를 가져간다는 게 조금……”

“안심해. 어차피 일부를 가져간다고 해서 둠워퍼 장로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표본이 많아야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거든.”

“으음……”

나탈리는 여전히 망설이는 버트를 보며 한 가지 오해를 했다.

“망설이는 것도 이해해. 어떻게 보면 둠워퍼 장로와 그릇 너의 아이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

“네……?”

“그 거대한 뱀의 알을 낳았었지? 그게 일반적인 생물학에서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

“그…… 글쎄요?”

“불가능해. 유전자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종이 교배를 해서 유체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변종이 사람과? 그건 만드라고라에서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그릇 네가 가진 마신의 마기 때문이라 가능한 일이야.”

“그…… 래요……?”

“그래. 그걸 보고 나는 가능성을 본 거지. 창조의 힘을 말이야.”

나탈리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조금 아쉬워. 만일 마신을 모방하는데 실패한다 하더라도 어쩌면 멸족한 둠워퍼를 되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버트는 그 순간 검은비늘의 염원을 떠올렸다. 검은비늘이 소중하게 품던 알…… 버트가 낳았던 알들을 통해 변종인 자신의 종족이 늘어나는 걸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루하다는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그의 씨를 받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버트의 얼굴이 붉게 달았다. 그리고 베실베실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해볼게요……”

“응?”

“루하다가 좋다고 했으니……”

버트의 변심. 나탈리로서는 이해가 안 됐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마신을 되살리는 계획은 순조롭게 시작을 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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