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46화 (46/104)

〈 46화 〉 46 ­ 달의 신전 上

* * *

“귀환하라 하였다고? 에뉴다 백작이?”

“예. 그 이전에도 길렌 백작이 후퇴를 명했습니다.”

“으음……”

릴본 자작의 말에 뮬러 7세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드러커스의 미로를 공략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나보다. 이렇게 되면 납치된 왕들을 구한다는 선택지 역시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손실을 메꾸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루하다가 뮬러 7세를 보며 말했다.

“끝났군.”

릴본 자작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침울해하고 있는 왕의 면전에 대고 이런 조롱이라니…… 그가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루하다가 말했다.

“모든 공적은 길렌 백작, 혹은 다른 귀족에게 넘겨라. 이것이 전언이다.”

루하다는 그 한 마디를 하고 사라졌다. 릴본 자작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보았고 뮬러 7세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루하다의 말은 정확히 1시간 후…… 전령이 전한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죽었나?”

버트는 손을 뻗은 채 굳어있는 셀기디어를 보며 갸우뚱거렸다. 분명 마법은 실패한 거 같은데 그가 꼼짝하지 않으니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때마침 페이니가 이 공간에 들어섰다.

“엄청 난리쳤네, 버트.”

“페이니! 왜 연락 안받았­ 그건 뭐예요……?”

“아? 이거?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여기 안에서는 원래 얘기가 잘 안 돼. 미로가 솟구칠 줄은 상상도 못했어.”

페이니는 피범벅이 된 고깃덩이 같은 걸 끌고 와 내던졌다. 그러더니 셀기디어의 눈앞에 다가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헛……?”

“이제 깨어났어, 잠꾸러기?”

“페슈트!”

“쉿.”

페이니는 셀기디어의 얼굴을 잡았다.

“마신의 앞이야. 경솔한 행동은 삼가도록.”

셀기디어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버트를 한 번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셀기디어는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 똑똑히 기억해냈다.

순수한 힘의 충돌. 마신의 씨앗에 잠들어있던 리아주크의 힘이 방출되었고, 셀기디어는 거기에 휩쓸렸을 뿐이었다.

그 결과 셀기디어는 쇼크사.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마신의 정신과 육체를 전부 가진 존재다. 당연히 마신과 그 격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떻게 이 정도까지 ‘복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백신의 견제를 받았을 텐데……?”

“이 애, 이모탈이거든.”

“이모탈이라고? 이모탈이 어떻게 마신의 힘을……”

셀기디어는 작게 중얼거리다 피식 웃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차피 패배한 몸, 이제 와서 무엇을 따지겠나.”

“뭐, 그렇다는데 어쩔래 버트?”

“네?”

버트는 말없이 얘기를 듣다가 눈을 끔뻑였다.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더니 뜬금없이 질문이 들어왔다. 버트는 잠깐 주춤거리다 말했다.

“어쩌다뇨? 제가 뭘 해야 하나요……?”

“그야 패배자에 대한 처분이지. 무려 마신을 배반한 녀석이라고? 일단은 마신의 씨앗을 품고 있는 네가 마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 되는 거야.”

“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지.”

버트는 우물거리다 셀기디어를 힐끔 보았다. 회색빛 피부는 다시 하얀빛으로 돌아왔고 적의는 조금도 없어보였다.

“그러면…… 음…… 일단은 봐줄까요……?”

버트의 말에 페이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일어나도 되겠어.”

“……당황스럽군.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건가?”

“안 넘어간다 해도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셀기디어는 고개만 들어 버트를 보았다.

어찌 이리 단순한가. 어쩌면 셀기디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가 자비로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알고 있는 리아주크는 결코 자비와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마신이다. 모든 걸 냉혹하게 뿌리칠 줄 아는 존재였다.

“정녕 그대가 마신의 대리인인가.”

“그런 것까진 아니고…… 그냥 페이니가 거창하게 말하는 거예요. 저는 그저 평범한 게임 플레이어일 뿐이에요.”

“게임……?”

“아, 음. 아무튼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거창한 건 아니니까요.”

“아저씨……”

셀기디어는 충격에 빠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럴 때는 오빠라고 해줘야지. 우리 버트는 아직 남자 마음 알려면 한참 멀었네~”

“으잇, 놔요……!”

페이니는 버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멍하니 버트를 보고 있는 길렌 백작을 발견했다.

“용케 이 싸움에 휘말리고도 멀쩡히 살아있네. 좋아, 공로는 전부 떠넘겨볼까.”

“여신……!”

백작이 소리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야말로 모든 기사들이 꿈꿔왔던 강자의 모습……! 강한 힘을 내비치지 않으며, 압도적인 힘을 가졌음에도 억누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쉬이 얕보이지도 않으며 누구보다 고결한 태세를 취하니…… 강자에겐 자비가 없으며, 약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롭다……!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던가!”

백작의 속사포 같은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벙쪘다.

“결정했습니다! 나, 고른 드 길렌 백작은 작위를 내던지고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이 부족한 검사에게 가르침과 함께 곁에 머무를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백작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버트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페이니를 보았다. 마신의 마기에 직격한 셀기디어와 달리 백작은 그 여파만 살짝 닿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신의 힘이다. 그것에 노출되고서 정상적인 모습이 되리란 어려웠다.

‘근데 지금까지 잘 버텨왔던 녀석이 왜 갑자기?’

페이니로서는 버트가 백작을 구해주면서 그의 마음에 빈틈이 생긴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신의 힘에 닿으면서 마음의 방벽이 깨졌다는 생각만 할뿐이었다.

“축하해, 버트. 추종자가 한 명 늘었네?”

“네에?! 갑자기요?!”

“그러게. 나도 놀랐네. 일단 저렇게 엎드려서 비는데 받아주는 게 어때?”

“아,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여신이시여.”

“여신이요?! 그냥 버트라고 불러줘요……!”

“여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아아아……?!”

*

드러커스의 미로가 등장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현실 시간으로는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드러커스의 미로가 국가를 선포했다고?”

처음 이 소식을 전해온 건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해 열변을 펼쳐놓던 유튜버였다. 그는 외국 출신으로 방대한 정보망을 바탕으로 이번 미로 사태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그것도 생방송으로 그때에 맞는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시청자는 몇 만에 이르렀다. 대부분 직장이나 개인적인 일 때문에 판타지아를 못하는 이들이었고 그들의 갑갑함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를 받았던 유튜버가 당황하여 앞서 말한 내용을 소리쳤다. 그 순간 채팅창이 폭발했다.

새로운 국가라니?

이제까지 판타지아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기껏 해야 플레이어들에게 큰 보상을 안겨준 시련(이벤트)이나 공략되지 않았던 지역 정도나 판타지아의 메인이었다.

사실상 판타지아는 이런 걸 제외하더라도 다른 매력이 압도하였기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일 뿐, 대부분 다시 판타지아에 접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변화가 벌어진 것이다.

“일곱 번째 국가…… 아니, 멸망한 곳을 포함한다면 여덟 번째 국가가 나타났답니다! 그 이름은 아드레이 왕국! 판타지아에 신규 국가가 나온 겁니다!”

한편 아드레이 왕국으로 개명된 드러커스의 미로에서는 로이첸 왕국과 키런 왕국의 왕이 해방되었다. 동시에 각 나라에 노스페라투 기사가 전령 역할로 찾아가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다.

[ 우리는 그저 생존을 위한 대처를 했을 뿐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고 적대하여도 상관없다. 다만 이번 일에 대한 것을 논의하는 것은 추후 있을 교섭에 좋은 영향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의 반격에 대해 불편함이 있다면 그때 내게 말하라. ]

참으로 건방지다 못해 오만하기 없는 전령이었다. 물론 이 내용은 각 국의 수장들만이 알고 있었기에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건방진 말이다.’

‘허나 그들의 전력은 상상 이상.’

‘우리가 이번 일을 끌어들여서야 손해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국가 선포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셀기디어가 국가 선포에 앞서 새로운 얘기를 전했다.

“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나를 꺾을 수 없었으나 그들의 미래를 기대하는 바이다. 판테스 왕국의 길렌 백작, 키런 왕국의 기사 골드로츠, 이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인간들과의 교류를 결정하였다.

신규 국가의 등장에 이어 이번 선언도 상당한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공략 불가 지역의 최종보스(?)였던 이의 언급. 심지어 이건 외교에도 크나큰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골드로츠가 공적을 먹어치운 건가.”

“블랙 남작의 뒤를 이어 귀족이 되나?”

“어쩌면 평범한 포상을 받을지도 몰라.”

그러나 모든 이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가 벌어졌다.

“골드로츠, 그는 이모탈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보여주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미로의 중심부로 전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를 구출하기 위해 희생을 보였다. 그러고서도 공적을 뒤로 미루며 죽은 황금늑대 기사들을 추모하고자 하였다. 그 품격은 마땅히 귀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모두가 그저 남작위나 주어질 줄 알았다.

“골드로츠에게 ‘샬론’의 성을 내리며 백작위에 봉하겠노라. 또한 황금늑대의 일원으로 부단장의 위치로 선정하겠다.”

백작! 그것도 왕실 기사단장의 자리였다! 모두가 경악했고 블랙 남작에서 골드로츠에게로 시선이 쏠리게 됐다. 길렌 백작이야 원래 판타지아의 주민이었고 어느 정도 정보가 있었으니 신규 이모탈 귀족에 대해 모두의 관심이 모이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블랙 남작에 대한 여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트는 이것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오……! 나의 아름다운 기사, 버트……!”

길렌 백작이 꽃다발을 가득 채운 마차와 함께 나타났다. 본래 그는 드러커스의 미로를 정벌한 업적과 더불어 공작위 계승식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모든 걸 제치고 루스타르 궁에서 편히 쉬려는 버트를 찾아와 괴롭혔다.

버트는 물론 그를 말리는 푸른비늘 기사들 역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어떻게 안 될까……?”

“네게 현혹된 이상 나도 어쩌지 못해. 마신 정도나 된다면 모를까……”

“그럼 이쪽은?”

버트가 가리킨 건 방의 한 켠에 앉아있는 공대장이었다.

“신세 좀 질게. 같은 플레이어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런 거면 골드로츠 씨한테 가면 됐던 거 아닌가요……? 그 나라의 왕도 포상을 내린다고 했었는데……”

“끽해봐야 금화 몇 푼 주고 끝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모탈에게 얼마나 높은 작위를 주겠어?”

아직 골드로츠가 백작위를 받았단 소식이 퍼지기 전이었기에 공대장은 태연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버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찬양 중인 길렌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돌아가주세요……! 기사분들도 곤란해 하고 있잖아요……!!”

“아니. 그때 네가 보여준 힘은 백작님께서 흠모하기 충분하다. 나는 백작님의 구애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장인 네르딜의 말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 정도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드리는 게 어떤가.”

“싫어요……!”

버트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백작에게 그 뜻은 전해지지 않았다.

“역시 지금 나 정도의 수준으로는 닿을 수 없다는 건가. 닿을 수 없는 창공에 핀 꽃이여…… 언젠가 날개를 달아 날아오르는 그 날까지 기다리리라.”

버트는 백작이 물러나고 나서야 안도하며 주저앉았다. 그때 페이니가 버트의 어깨를 잡으며 속삭였다.

“이번 공로, 적지 않은 모양이야. 그래서 이번에 보상을 제법 크게 받을 듯 해.”

“보상이요……? 어떤 건데요?”

페이니는 대답해주려다 귀를 기울이고 있는 공대장을 노려보았다.

“여자끼리의 대화를 엿듣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아니 뭐, 경사는 나누는 게 좋다잖아. 안 그래?”

“밖에 나가 있어~”

“거 참, 매정하네.”

“리실버~”

루하다는 페이니를 힐끔 보다 공대장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둘이 나가고 나서야 페이니는 버트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영지요?”

버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래. 일단 작위는 그대로 굳혀 달라 말했더니 ‘작전’의 보답으로 영지를 하사하겠다는 거야.”

“작전이라뇨……?”

“어쨌든 그거 때문에 땅을 받았으니~ 우리 버트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된다 이 말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 해도……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요?”

페이니는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버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 그래봐야 변방의 영지니까 말이지. 그래도 버트나 벨루그하에게는 익숙한 곳일 거야.”

*

“정말 플레이어가 맞나?”

밖으로 쫓겨난 공대장은 루하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루하다는 묵묵히 공대장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거 참…… 나름 같은 목표를 갖고 싸운 사이인데 매정한 거 아냐? 황금궁사도 너희보다는 말주변이 있었단 말이지.”

공대장은 루하다가 반응하든 하지 않든 제 할 말만 떠들어댔다. 하지만 이미 페이니를 상대로 단련이 된 루하다는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칼라 해변에서 있었던 일…… 아니면 귀족 작위를 받은 일 등…… 리실버와 연관된 질문을 쏟아내도 루하다는 묵묵부답! 하지만 공대장은 무언가 건진 게 있는지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뭐, 이걸로 인연이 닿으면 좋겠는데…… 혹시 친추는?”

루하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대장은 머쓱한 얼굴로 바다하피의 깃털을 꺼냈다.

“알겠어. 신세 져서 미안했다고 전해줘. 만일 서쪽에 오게 되면 퍼스트 제네레이션의 ‘유진희’를 찾아.”

공대장은 그렇게 왕성을 나서며 바다하피의 깃털에 대고 속삭였다.

~미안, 기다렸지?

~뭘 하고 있었길래 계속 귓을 씹어요?

~초대 이모탈 귀족님을 떠보고 있었지.

~성과는 있었어요?

~아니.

공대장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적어도 블랙 남작이 이모탈이 아니란 건 알았어.

~판테스의 왕이 사기를 쳤단 건가요?

~그런 건 아닌 듯 하지만…… 일단 가자고.

*

“와아……!”

버트는 말에서 내려와 감탄하기 바빴다.

“여기가 정말 우리 땅이에요?”

“정확히는 네 영지지.”

“어디, 어디……”

버트는 ‘지도’를 펼쳤다. 검은 동굴과 로디아 마을, 라피에 초원을 포함한 이 넓은 땅이 그녀의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인구수와 수입, 토양의 상태, 영지민의 행복도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신기하다.”

“영지의 넓이만 보면 백작위에 준하는 곳이지만 대부분이 라피에 초원에 할당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은 3할 정도뿐이야. 게다가 대외적으로 이곳의 영주는 네가 아니라 ‘마룬 자작’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통치하고 있다고 되어 있어. 그래서 영지의 수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대부분 국고로 갈 예정이거든.”

“와아……”

그래도 이만한 넓이가 어디인가. 버트는 방긋 웃으며 기뻐했다.

하지만 버트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하우징은 저 멀리 스카이 왕국에서나 가능한 컨텐츠였다. 특히 집짓는 것만이 아니라 땅 전체를 관리한다는 건 어느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당연히 공략은커녕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처음 블랙 남작에 대해 관심이 쏟아졌던 이유도 영지를 다스리느냐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일부 거물은 블랙 남작에게 영지가 없단 걸 알고 시선을 뗐다.

“집이라……”

버트는 조금 오랫동안 고민했다. 일단 집이란 게 짓고 싶다고 해서 뚝딱 나오는 게 아닐뿐더러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 물어볼까…….”

“물어보다니?”

“땅도 넓으니까 무엇을 지으면 좋을지 모두에게 물어보려고요.”

“너는 뭘 지으려고?”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결정하려고요.”

“흐응, 비용은 충분히 있고?”

“으음…… 지원해주지 않을까요?”

“정말~ 아무 생각 없다니까.”

“헤헤…… 그래서 말인데 페이니는 뭘 먼저 짓고 싶어요?”

“나?”

페이니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뭐랄까…… 신혼집이 생겼으면 하지?”

“헤에……”

“자그마한 오두막이면 좋을 거 같아. 그 왜, 보통 사람이 지내는 집 있잖아?”

“으흠……”

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루하다에게 물었다.

“루하다는 어때?”

“저는 그릇께서만 있으시다면 만족합니다.”

“……그게 뭐야. 다른 분들은 어때요?”

세 기사는 버트의 질문에 고민하다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나는 뭔가 즐길거리가 많이 있으면 좋겠어. 번화가라든지?”

“식당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페이니가 정했으니 됐습니다.”

마지막 엘도트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엘도트는 묵묵히 있다가 괜히 이디아를 노려보았다.

“아, 왜 저한테……”

“네가 제일 빤히 쳐다봤으니까.”

“으음…… 역시 잘 모르겠네.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버트는 로그아웃한 뒤에 세영과 동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 만들었으면 하는 건물? 글쎄, 마침 암투도 끝났으니 새로운 지점 하나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보다 갑자기 그건 왜? 땅이라도 생겼어? ]

[ 나만의 탑이 생겼으면 하긴 했는데…… 일단 당분간은 바빠서 연락 안 될 거야. 미로에서 귀찮은 게 들러붙어서…… 내가 미로에 온지도 몰랐다고? 너무하네 진짜! 난 네가 있는 거 알고 있었는데! ]

버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라피에 초원이랑 가까웠지?”

버트는 다시 로그인해서 라피에 초원으로 향했다. 루하다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초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초원에 발을 딛자마자 무언가 달려왔다.

차악­

“그릇이로군.”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의 늑대…… 인데 두 발로 서있었다. 버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늑대를 쳐다보았다.

“너는……?”

그는 라이칸슬로프 중 하나인 코이팡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발로 다니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덩치도 이전보다 커져 있었다.

“네게 받은 은혜 덕분이지.”

“내 은혜? 에헤헤……”

버트는 초원에 다시 돌아왔을 때 뽑아낸 마기의 결정을 떠올렸다. 그것을 먹고 강해진 듯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끊어졌던 종족의 핏줄이 태어나게 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간 했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코이팡은 버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는 분명 버트를 다그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버트를 강제로 억류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버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코이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슬쩍 쫄깃쫄깃한 귀도 만졌다.

“난 괜찮아. 리버랑 슈트한테 안내해줄래?”

“네. 여기서부터는 제가……”

코이팡이 루하다를 힐끔 보았다. 루하다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버트는 잠시 다녀오겠단 말과 함께 코이팡의 등에 업혔다.

그리고 예의 그녀가 잡혀왔었던 숲지로 오게 됐다. 그곳에는 코이팡과 같은 라이칸슬로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화이트슈트가 그 틈에서 특유의 거체를 돋보이며 근엄하게 앉아있었다.

“그릇.”

“안녕.”

버트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전에는 곧장 교미하자고 들러붙던 라이칸들이 이제는 그윽하게 버트를 보고 있었다.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버트는 자신의 용건을 털어놓았다.

“……건물?”

슈트는 귀를 파닥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동족들이 거처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원하던 게 있지.”

“커다란 개집……?”

“……신전이다.”

“신전?”

“예전에는 달빛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지. 우리는 리아주크의 형상을 비추는 자, 마신인 리아주크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을 해치지 않을 적절한 빛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달빛이지.”

뭔가 상징적인 말들이 많은 것 같아 버트의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그런 건물도 없으니…… 흠.”

슈트의 아쉬운 한 마디에 버트는 무엇을 지을지 결정했다. 겸사겸사 다른 이들의 의견을 추가적으로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리버는?”

“아, 족장님께서는 지금……”

슈트가 말을 끝내기 전에 어딘가를 보았다. 그곳을 따라 본 버트는 눈을 크게 뜨며 함박 미소를 지었다.

*

몇 달 후……

현실 시간으로는 몇 주가 흘렀다. 아드레이 왕국이 선포된 이후로 이곳에 관심이 집중적으로 쏠리게 됐다.

그중 가장 큰 관심은 ‘종족 변경’이었다. 인간 이외의 종족은 절대 할 수 없었던 판타지아에서 ‘흡혈귀’로 종족을 바꾼다는 건 큰 매력이었다. 그저 그런 변화가 아닌 눈에 띄는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우선 육체가 강대해지며 새로운 마법에 대해 깨우치게 된다. 그 대신 신성 마법에 약해지며 특정 종족과 적대하게 됐다.

이것 말고도 강화 약물이라든지, 신체 개조의 기술이라든지, 독특한 컨텐츠가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끔찍한 지옥의 요새였던 메일드로우는 본래 목적대로 실전을 위한 훈련장이 되어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아드레이 왕국과 교류를 하기 위한 여러 나라의 움직임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드레이 왕국과의 수교를 원했다. 왕이 중상을 입었던 살리마 왕국에서조차 말이다. 여기서 마법사의 탑의 입김이 닿았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내분이 일어났단 소식도 있었다. 물론 이건 전부 해결이 됐으며 1할에 달하는 인원이 갈아치워졌다고 했다.

여기서 골드로츠…… 이제는 샬론 백작이 된 그가 영지의 한 달 수입을 공개했다. 현금으로 환전했는데 순이익만 봐도 게임만 하며 놀고 먹어도 될 정도였다. 아니, 웬만한 건물주 뺨치는 수준의 수입이었다.

이 정보를 확인한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영지가 딸린 귀족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미 판테스 왕국과 키런 왕국에서 이모탈 귀족이라는 선례를 만들었으니 다른 나라 혹은 같은 나라에서 귀족이 될 확률이 높아진 셈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영지 하나 없는 블랙 남작에 대한 조롱도 오갔다. 마룬 자작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귀족의 밑에 들어가 라피에 초원을 낀 땅에서 일하게 됐단 소식에 대부분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도 모자라 작지 않은 건축물들을 지으려는 움직임까지 보여 모두의 웃음을 샀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렇게 하고……”

“이봐! 여기 못이 모자라!”

“그쪽에 하수도 묻어야하니까 공간 충분히 남겨둬!”

“기초 마무리한 거 누구야?”

버트는 로디아 마을 곳곳에 세워지는 건물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하얀 머리의 귀여운 남자아이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바로 리버화이트였다. 버트의 마기를 완벽히 소화해낸 리버는 이제 인간화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늑대귀와 꼬리를 가진 귀여운 소년의 모습이 되었다.

곱슬거리는 하얀 머리칼에 반으로 접힌 늑대귀와 큼직한 눈망울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엉덩이에서 살랑대는 꼬리는 털이 빵빵해서 버트의 허벅지보다 두꺼웠다. 손은 또 어찌나 작은지…… 가슴께에나 오는 키에 걸맞게 앙증맞았다.

버트는 리버의 손을 조물거리며 로디아 마을을 바라보았다.

“굉장하네……”

처음 건축 문제로 페이니와 갈등이 잦았다. 특히 제법 큰 규모의 신전을 짓겠다는 말에 현실 감각이 없다며 크게 혼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신전을 포함한 번화가나 다양한 건물의 기초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블랙스타의 마성자들 때문이었다. 드러커스의 미로 원정에서 살아남은 마성자들은 버트가 자신들을 기억해주고 있단 걸 전해주었다. 그냥 넘겨도 좋을 신도들을 하나하나 기억해주고 몸까지 섞어준 그녀의 은혜에 모두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건축 자재? 기부!

장인? 파견!

자금? 모금!

지형 문제? 공사!

그렇게 우르르 모인 사람들이 단숨에 거리를 만들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버트의 추가 요구가 있음에도 건물은 뚝딱 만들어졌다.

“굉장하다, 그치?”

“응!”

리버는 귀엽게 웃었고 버트는 잠깐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이 비슷한 느낌을 리버와 함께 새끼 라이칸들을 둘러보았을 때도 느꼈다. 그때는 정신을 놓고 새끼들에게 파묻혔다가 슈트에게 따끔하게 혼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리버를 온전하게 독점할 수 있었다.

“귀여워~”

버트는 방긋 웃으며 리버를 꼭 안아주었다. 리버는 이따금 버트를 보기 위해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여느 때와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

“응, 버트 누나 여깄어.”

“나, 누나랑 교미하고 싶어.”

“으, 응?”

“누나를 암컷으로 대하고 싶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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