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5 드러커스의 미로 下
* * *
“마, 말려야 해……”
전략가 히레이즈. 지금 그는 머리칼이 대부분 빠져버리고 창백해져 있었다.
버트와 길렌 백작이 상처 없이 왕성에 들어선 이유가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히레이즈가 대뜸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특기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관찰력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약점을 분석하고 급소를 찔러 절명시켰다. 그가 얇은 실을 택한 이유도 그거였다. 이거면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고 깔끔하게 급소를 관통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히레이즈는 실을 휘둘러 두 사람을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관찰력이 발목을 잡았다.
‘이게 무슨?’
길렌 백작은 인간 치고는 상당히 강했다. 엠파이어 일족으로 만들거나 노스페라투 기사단으로 편입하면 좋을 정도의 인재였다.
문제는 버트였다. 그녀의 속을 내다 본 순간 히레이즈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신……!’
그건 아주 깊은 심연이었다. 그 넓이도, 깊이도 모를 어둠이 히레이즈의 눈에 보였다.
‘아, 안 돼……!’
조금만 정신을 놓았더라면 그대로 영혼과 정신이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그걸 간신히 버텨냈지만 그 반동으로 히레이즈의 육신은 엄청나게 쇠약해졌다.
무려 마신의 씨앗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발아한 상태! 현재 버트의 뱃속에 있는 씨앗은 평범한 마신의 추종자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만일 히레이즈가 셀기디어의 힘을 받지 않았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아버렸더라면 악몽의 성에서 몽마가 그랬던 것처럼 씨앗에 흡수되엇을 것이다.
나약해진 히레이즈를 두고 두 사람은 바삐 길을 나섰다. 갑자기 약해진 그를 상대할 정도로 그들은 한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히레이즈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며 왕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왕께서 위험해지신다!!”
히레이즈의 절규와 함께 미로 전체가 격동했다.
“왕이시여……!”
*
“하암……”
셀기디어는 나른하게 하품하며 한 손에는 골드로츠의 검을, 다른 한 손에는 길렌 백작의 검을 잡고 있었다. 그것도 왕좌에 거만하게 앉아서 벌인 행동이었다.
지금까지 몇 십 번의 공격이 벌어졌건만 그는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방금 잡아둔 이모탈은 내게 상처라도 냈다. 허나 너희의 공격은 형편없구나.”
셀기디어는 두 사람의 검을 대충 뿌리쳤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거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골드로츠는 검을 든 손이 머리 위로 들쳐졌고 길렌 백작은 뒤로 쭉 밀려나갔다.
“크읏!”
골드로츠는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게르티몽의 치료로 회복된 지금 다시 한 번 그 절기를 쓸 수 있었다.
{빛뚫기}
순간적으로 뻗어지는 찌르기! 하지만 셀기디어는 그 검을 손끝으로 잡아내더니 검째 골드로츠를 팽개쳤다.
“어찌 이리 오만한가. 똑같은 ‘불사’라고 해서 네놈들과 우리의 격이 같다고 생각하는가.”
그 뒤를 이어 길렌 백작이 날아들었지만 셀기디어의 가벼운 손짓에 검이 튕겨져나갔다.
“하물며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인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던가. 보잘 것 없는 반항이로다.”
그 말에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보잘 것 없다!
판테스 왕국에서는 모두가 찬양했던 검술이다. 어느 누구도 받아내기 힘든 검이었다. 비록 노스페라투 기사에게 밀리긴 했어도 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강자는 그것을 박살냈다. 그것도 백작의 자존심이 바스라질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강자의 격이 다르다!
버트가 보여준 인자함. 그녀의 자비. 넘볼 수 없는 관대함! 그것을 겪은 백작은 결코 기죽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무시한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너 따위와는 다른 인품과 격을 지닌 사람이 있다고! 바로 곁에 있는 나약한 여인이 누구보다 강대한 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떠들어봐야 입만 아팠다.
그저……
“유한하기에 발악한다.”
백작은 검을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만난 해괴한 이는 싸우기도 전에 쓰러졌다. 그래서 별달리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자신의 각오를 보여야했다.
바로 버트에게!
샤악
쾅!!
이 순간 나자빠져있던 골드로츠는 물론 이 싸움을 주시하던 게르티몽과 그의 두 제자 역시 당황했다.
“폐하……?”
“어찌 이런……”
셀기디어는…… 왕좌에서 일어나있었다. 지금까지 손만 움직이며 방어만 하던 셀기디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백작의 검을 붙잡았다.
쩍
그리고 그의 뒤에 있던 왕좌와 벽에 금이 갔다. 셀기디어가 받아내고도 남은 검격이 벌인 잔흔이었다.
“감히……”
셀기디어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백작의 필사의 각오가 담긴 검. 그것은 잠재력의 폭발과 함께 셀기디어를 위협했다. 그의 손바닥에는 생채기 하나조차 안났다. 하지만 그가 반응해서 일어났단 게 문제였다.
그는 강하다. 하찮은 미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에게 위협을 받아서는 안됐다.
퍽
셀기디어의 가벼운 발길질에 백작이 뒤로 날았다. 셀기디어는 쓰러져있는 골드로츠를 집어던진 다음 백작과 함께 바닥에 메다꽂았다.
“커헉!”
“큭……!”
“쓸데없이……”
셀기디어는 땅에 박힌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버트를 보며 말했다.
“마신의 씨앗을 품은 자가 있을 줄이야……”
버트는 말없이 서서 셀기디어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나서지 않은 이유는 백작의 부탁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가 검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지금 길렌 백작이 쓰러졌으니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장 나서기에는 셀기디어의 힘이 대단했다.
‘보스…… 엄청난 보스급 몬스터.’
버트는 침을 꼴깍 삼켰다. 기사들은 ‘잡몹’이었으니 쉽게 이겼지만 최종 보스로 보이는 셀기디어는 혼자 쓰러뜨리기엔 힘들다 생각했다. 그래서 틈틈이 루하다와 페이니에게 정신 교섭을 시도하는 한편 어떻게 공략해야 하나 고민했다.
만일 버트가 라피에 초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상대가 셀기디어란 걸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즉 페이니를 통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고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트는 진즉 추종자들에 대한 얘기를 잊었다.
‘뭔가 끊긴 듯한 느낌인데…… 내가 알아서 해야 하나?’
셀기디어는 피식 웃으며 버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서니 그의 덩치는 상당했다. 분명 이제까지 거대한 존재를 제법 많이 봐왔다. 셀기디어는 그들에 비해서는 형편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위압감이 달랐다.
“페슈트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참으로 큰 실수로군. 씨앗을 품은 그릇을 내 앞에 대령하다니 말이야.”
“예에……?”
“마신을 부활시킨다는 계획…… 꽤나 나쁘지 않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나는 더 이상 리아주크의 부활을 보고 있지만 않을 것이다. 그의 뜻을 이어받아 새로운 신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씨앗을 내게 넘겨라.”
버트가 셀기디어에게 명령을 듣는 동안…… 게르티몽은 지도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생명 반응……”
“아앙? 아직 미로에 삼켜지지 않은 것들이 있나? 아니면 침입자라도 온 건가.”
게르티몽의 당황한 목소리에 우르간드가 다가왔다. 셀기디어가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미로를 다시 가동했다. 이제 미로는 살인 미로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그래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을 하나둘 도륙하기 시작했다. 물론 끈질기게 버티는 반응도 있었지만 그것들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히레이즈가 처리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게르티몽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우르간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녀석이 있군.”
“뭐?”
“살리마 왕국군이 있던 곳에서 강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것도 홀연히 말이야. 숨어 있던 놈이 있었나보군.”
“그럴 리가? 제법 강한 놈이 있었지만 진즉 패죽였는데……”
우르간드는 당황하더니 이를 꽉 물었다.
“내가 처치하지.”
“빨리 돌아와라. 그보다 히레이즈 이 놈은 어디 있길래 계속 안 보이는 건지…… 루번!”
“……왜 그러지?”
“히레이즈를 찾을 겸 가서 나머지 것들을 치워라.”
“……그러지.”
루번과 우르간드가 자리를 비우고 게르티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눈앞에 무언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그게 무엇인지 본 게르티몽은 소름이 쫙 끼쳤다.
“폐하……?”
다름 아닌 그의 눈앞을 지나간 건 셀기디어! 게르티몽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며 확인했지만 땅바닥에 널부러진 건 셀기디어가 맞았다.
“어, 어떻게……?”
*
“쯧……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우르간드는 혀를 차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분명 마법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왔다.
그런데 생명반응이라니? 숨어있는 녀석이 있을까봐 샅샅이 찾아낸 참이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없었다. 설사 누군가 있었다 해도 다시 기동된 미로에 삼켜져야 정상이었다.
피를 머금은 미로. 선왕 드러커스의 육신으로 만든 이 미로는 희생자를 집어삼키며 강해지는 괴물이었다. 공략 불가 지역으로 지정된 드러커스의 미로는 지형이 아닌 플레이어들이 공략해야할 진정한 최종 보스였다.
이런 사실은 개발자나 엠파이어 일족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미로가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존재란 걸 아는 것도 그들이 전부였다.
어쨌든 우르간드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게르티몽이 말한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만난 건…… 녹색 머리의 청년이었다.
“너는……”
청년은 분명 우르간드의 일격에 쓰러졌던 마법사였다. 설마 다시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모탈이라 해도 다시 살아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걸로 아는데……
“당황스럽구만.”
우르간드의 말에 라이가 피식 웃었다.
“왜? 죽은 줄 알았나 봐?”
“뭐, 다시 죽이면 되니까.”
우르간드가 달려들었고 라이는 이전처럼 마법을 쏘아댔다. 당연히 우르간드는 온몸으로 받아내며 달려들었다.
“캬하! 죽어라!”
쾅!
우르간드는 주먹을 내뻗었다.
그리고 라이는…… 막았다.
“뭐……”
라이는 그냥 막은 게 아니었다. 그가 뻗은 주먹을 잡고 있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을 상대가 있단 것 정도는 상정하고 있었어. 다만 이렇게까지 강한지 몰랐을 뿐이야.”
라이는 우르간드의 주먹을 비틀었다. 우르간드는 이를 악물고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라이는 그 다리마저 붙잡았다.
꾸드득
“끄으윽……! 이 피라미가……!”
“그거 알아? 전사나 기사, 투사, 권사 등 육체를 주로 다루는 녀석들의 강함이나 마법사, 정령사, 주술사, 성직자 등 마나를 주로 다루는 녀석들의 강함…… 그건 큰 차이가 없어. 그 기반이 무엇이냐의 차이일 뿐이야. 그 두 가지는 ‘일단’ 상생하거든.”
“헛소리!”
우르간드는 고개를 뒤로 뻗더니 라이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하지만 괴로운 소리가 터져나온 건 본인이었다. 라이는 머리가 불그스레해질 뿐 꿈쩍하지 않았다.
“카학!”
“그 둘을 하나로 엮는 것이 기술이고, 마법이고, 신성이며, 주술이다. 그러니 그 순서의 차이만 바꾼다면 검사도 마법을 쓸 수 있고 마법사도 격투를 할 수 있지. 물론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야. 그것들이 비슷하다고는 해도 메커니즘 자체가 틀려먹었거든. 그저 단순화한 공식만을 빼냈을 때 그런 것이지. 왜, 동력을 만들어내는 곳이랑 동력을 받고 움직이는 곳이 다르잖아?”
“뭔 헛소리냐!”
“아, 조금 말이 길어졌네.”
라이는 우르간드의 손과 다리를 놓았다. 우르간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라이에게 덤볐지만 갑자기 간격을 좁힌 라이의 정권에 몸이 반으로 뚝 접혔다.
“끄헉!!”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었단 거야.”
우르간드는 숨을 몰아쉬더니 서서히 육체를 바꾸어갔다. 근육이 부풀고, 등에는 날개가 돋아났다.
“워, 악마랑 비슷하게 생겼네?”
“악마? 푸하하! 우리의 모습을 모방하는 부스러기와 비교하다니! ‘진짜’ 힘을 일깨웠다. 인간놈에게 이 힘을 쓰는 것조차 자존심 상하지만 이제 네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말에 라이는 머리를 슥 쓸어넘기며 한숨 쉬었다.
“그러게. 쉽지 않겠네.”
라이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우르간드의 능력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하나 꺼내볼까……”
라이가 ‘주머니’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펼친 라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12성 마법, 존재하지 않는 세계.”
*
셀기디어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의 피부는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처음부터 끌어내고 있었다.
“강한 힘이로군.”
셀기디어가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나 눈앞에서 휘두르는 주먹을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버트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충격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감각을 넘어서 피부를 뚫는 충격까지 준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진심으로 싸울 생각을 했다. 다름 아닌 마신의 씨앗을 품은 그릇이다. 셀기디어 정도나 되는 강자가 아니고서야 그녀 안의 강대한 마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마기에 익숙해서 잘 갈무리한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더더욱 내가 가져야겠다.”
셀기디어는 가벼운 도약으로 버트에게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읏?!”
버트는 뼈아픈 충격에 헛숨을 들이켰다. 곧이어 셀기디어의 발길질이 쇄도했다.
퍽!
버트는 쭉 날아가 천장에 박혔다. 곧이어 셀기디어가 똑같이 날아들고 버트에게 난타를 가했다.
콰각! 콱! 콱! 콱!
미로가 쿵쿵 울릴 정도의 충격! 당연히 그 주먹에 얻어맞는 버트가 멀쩡할 리 없었다.
‘아파……!’
하지만 버트는 이 얼얼함 덕분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강대한 육신은 그 괴랄한 충격을 상쇄할 수 있었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놀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된다!’
판타지아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 게 얼마만인가!
검은 동굴 초입에서 잡은 몬스터나 라피에 초원에서 잡은 늑대 외에는 거의 없었다. 악몽의 성에서는 허무하리만치 몬스터가 나약했고 칼라 해변에서의 보스도 그렇게 재미를 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강력한 보스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할 만한 이유는 버트에게 알맞은 사냥터이고 그녀에게 적절한 상대이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턱
“응?”
계속 해서 두들기던 셀기디어의 손이 잡혔다. 버트는 그의 손을 잡더니 냅다 발을 내질렀다. 셀기디어는 한쪽 다리를 접어올려 버트의 발차기를 막았지만 그대로 천장에서 떨어져나갔다.
“좋아!”
버트는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이전에 노스페라투 기사를 베었던 마기의 검이 만들어졌다.
검을 쥔 버트가 천장에서 도약해 셀기디어를 향해 직선으로 날았다.
써억
한 번의 휘두름. 셀기디어는 무심코 한쪽 팔을 들어 방어했고 그의 팔에 큰 상처가 났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들이 있는 공간의 일부가 깔끔하게 베어졌다.
“맙소사!”
게르티몽의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셀기디어가 손을 뻗어 반격해왔다. 그의 손끝에 맺힌 붉은빛이 뿜어지며 버트의 몸을 때렸다.
쩌적
하지만 붉은 빛은 박히지 않았다. 마기가 정확히 빛이 적중당한 곳에 응집되어 막혔기 때문이었다.
“무슨……?!”
당황한 셀기디어의 눈앞으로 버트가 나타났다.
“하앗!”
쓰악
“크헉!!”
검은 빛이 궤적을 그렸다. 그건 검게 물든 초승달 같았다.
“아……”
셀기디어를 반쪽 낼 기세의 검기는 게르티몽이 보고 있던 지도와 함께 이 공간을 반으로 갈랐다. 그 모습을 본 백작은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워.”
골드로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가 천장에서 새어나오는 빛에 눈을 떴다. 이윽고 서서히 넘어가는 셀기디어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러다 다급하게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공대장이 잡혀간 방향을 기억해내고, 그곳에 왕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셀기디어는 싸우느라 바쁜 거 같고 게르티몽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습을 게르티몽이 놓칠 리 없었다.
“저놈이……?”
그 사이 셀기디어는 새로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의 육신은 뒤로 넘어가나 싶더니 수 천 마리의 박쥐로 흩어졌다. 그러다 버트의 뒤에 셀기디어가 나타나더니 손톱을 휘둘렀다.
쌰악
“읏……?”
버트는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셀기디어가 갑자기 공격해오니 반응하지 못했다. 뺨에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세 줄기의 흉터가 남았다. 버트는 검을 다시 휘둘렀지만 셀기디어가 다시 박쥐떼로 흩어졌다.
“건방진! 마신의 씨앗을 품었다고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박쥐떼는 소용돌이치더니 버트를 휘감았다. 그녀의 몸 곳곳에 긁힌 상처와 함께 피가 튀었다.
“아파……!”
버트는 짜증을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박쥐들 몇 마리나 나가떨어질 뿐 전부 쳐낼 수 없었다.
‘생각하자, 생각.’
우선 버트는 온몸에 마기를 뒤덮었다. 그런 뒤에 한 가지 연상을 했다.
‘고슴도치……!’
푸샥
버트의 몸에서 가시들이 뿜어져나와 박쥐들을 꿰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셀기디어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커헉……!”
셀기디어는 피를 한 움큼 뿜어내더니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둑한 밤이여! 이 땅에 내려앉아라!”
짧은 영창과 함께 어둠이 깔렸다. 모두의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셀기디어는 그 즉시 버트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바로 곁에 있더라도 소리가 나지 않는 움직임! 설사 들었다 하더라도 반응하기 어려운 속도의 주먹이 뻗어졌다.
텁
그런데 버트는 멀쩡히 셀기디어의 주먹을 받아냈다.
“어떻게……?”
“그렇게 물어도……”
버트는 셀기디어의 팔을 붙들고 내던졌다. 「밤」 세트의 효과 중 하나로 저주에 면역이 되면서 셀기디어의 마법이 먹히지 않은 탓에 그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버트의 강한 육체가 셀기디어의 마법을 튕겨냈을 것이다.
아무튼 셀기디어는 공중에 붕 떴고 버트는 그대로 날아들어 발을 내뻗었다.
퍽
셀기디어는 배를 얻어맞고 붉은 채찍을 만들어내 휘둘렀다.
쨕!
“앗 따가……!”
채찍은 뱀처럼 휘둘러져 버트의 팔을 때렸다. 드라큘 수호대조차 받기 힘든 {뱀의 채찍}을 맞고도 따갑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다니!
버트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마기로 단검을 만들어 투척했다. 셀기디어는 단검을 쳐내고 망토로 몸을 감쌌다. 그러자 눈앞에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버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크웃?!”
버트는 휘청거리다가 주먹을 뒤로 휘둘렀다. 하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투명? 너무하네……!’
버트는 인상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두 팔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물론 그냥 휘두르고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팔의 궤적을 따라 마기가 뿜어졌다. 그러자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셀기디어의 일부가 보였다. 그의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망토가 반으로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셀기디어는 다시 한 번 날아드는 버트와 술래잡기를 해야 했다. 분명 버트도 강하고 빨랐지만 숙련도 면에서는 셀기디어가 한 수 위였다. 그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으니 버트는 갑갑한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뭔가 방도가……’
그러다 페이니의 말을 따라 만들어낸 검은 창을 떠올렸다.
‘그 정도 거리를 던졌으니 가능할지도 몰라.’
즈으응
버트의 손에 검은빛이 모였다. 그걸 본 셀기디어는 경악했다.
“네년! 마신의 씨앗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품고 있었던 것이냐!?”
그저 씨앗을 품은 녀석이라 생각했다. 마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그럴 수 있었다. 마신의 마기라고 해도 어느 정도 적성만 있다면 쓸 수 있어서였다.
강한 힘? 씨앗을 품을 정도라면 그 정도 힘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마기가 크다 해도 그걸 품을 육신이 없다면 커다란 짐덩이에 불과하다! 아무리 육신이 있다고 해도 그걸 움직일 마기가 없다면 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 둘 전부를 갖고 있다면……!’
셀기디어는 버트의 손안에 모이는 마기를 보며 이를 까득 물었다.
‘그래! 이제야 설명이 되는 군. 타티샤의 망루가 무너진 이유……! 메일드로우가 반 이상이 박살난 이유……! 전부 이 년이 만들어낸 것이었어!’
현재 버트의 손에는 리아주크가 쓰는 힘이 모이고 있었다. 처음 메일드로우를 저격하려던 페이니조차 그저 겁만 주려 했었다가 화들짝 놀란 결과였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지만 이건 제법 큰일이었다.
‘마신이……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건가? 리아주크가 다시 한 번…… 일어날 수 있다는 건가!’
셀기디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버트의 손에 응집되고 있는 마기가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셀기디어는 결정을 내렸다.
‘아니! 눈앞의 이 여자는 그저 운 좋게 신의 일부를 가진 녀석일 뿐이다! 결코 리아주크는 재림할 수 없어!’
셀기디어는 그런 생각으로 버트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버트는 칼라 해변에서 보았던 라이의 마법을 떠올렸다.
육성으로 멋있다고 소리쳐버린 그 마법을 흉내내보고자 그것을 고스란히 마기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상당히 집중하고 있었기에 검은 창을 만들어내던 그때처럼 마신의 힘이 섞여들고 있었다. 그랬기에 셀기디어가 버트가 그냥 평범한 그릇이 아니란 걸 알아챈 것이다.
아무튼 버트는 계속 인상을 구기며 머릿속으로 마법을 구상하다가 셀기디어가 달려드는 걸 보고 손을 뻗었다.
“좋아, 됐어!”
버트는 그대로 손을 펼쳐 마기를 방출했다. 셀기디어는 그걸 보며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아무리 마신의 힘이라 해도 완전치 못한 힘이라면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버트가 하는 건 그저 마기를 뭉치는 것이 전부였다.
‘공격에 힘을 쓴 지금이 빈틈이다!’
셀기디어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
“쥐새끼 같은 놈.”
게르티몽은 중얼거리며 미로로 나섰다. 몰래 빠져나간 골드로츠를 쫓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흉하게 머리털이 빠진 머리…… 푹 꺼진 볼과 눈두덩……
게르티몽은 말없이 사슬을 꺼내들었다. 미로에는 이따금 적아를 가리지 않는 키메라가 돌아다녔다. 그래서 이번 녀석도 그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게르티몽은 당황했다.
“히레이즈……?”
히레이즈, 그는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스승인 게르티몽조차 순간 몰라볼 정도였다.
“스, 스승……”
히레이즈는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이내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누구에게 당한 것이냐!”
“왕께…… 왕께 전해야 해…… 왕께……!”
“무슨 소리냐, 히레이즈! 진정하고 말해라!”
“다 죽을 거야…… 우리 모두 다! 페슈트 그년이 새로운 마신을 책봉하고 있는 거야…… 아니, 리아주크를 되살려 조종할 생각인 거야!!”
“뭐……?”
“그러니 왕께 돌아가야해……! 그 괴물을 만나지 말라고! 그 괴물에게서 도망치라고 말해야해! 안 그러면 왕이 죽을 거야!”
히레이즈는 오열했다. 언제나 적아를 가리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하던 것이 장점이던 그가 애처럼 울고 있었다. 그의 충격적인 변화에 게르티몽은 말을 잃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레이즈의 말이 큰 충격이었다.
그는 전략가다.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며 말도 안 되는 변수까지 계산하는 남자다.
“왕께서 위험하시다.”
게르티몽은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만일 히레이즈의 말대로라면 셀기디어가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분명 강대한 왕이지만 그렇다고 신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생각으로 다급하게 돌아서려던 게르티몽의 앞에 무언가 굴러 떨어졌다.
“루번……?”
“어머나, 길 안내를 못하는 거 같아서 조금 손봐줬는데 제대로 알려줬잖아?”
멀리서 콧소리와 함께 얄미운 말투로 말하는 여인이 보였다.
“페슈트……”
“어머? 페슈트 님이라고 해야지, 건방진 흡혈귀야. 그래도 알아봐주니 다행이네. 얼굴도 모르는 녀석들이 태반이던데.”
페이니는 생글거리며 부채를 펼쳤다. 그 모습에 게르티몽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네 이년!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마신의 씨앗을 품은 그릇으로 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응? 씨앗만 본 거야?”
그녀의 말에 게르티몽은 창백해졌다.
“설마 육신까지……”
“완성된 건 아니지만 제법 모였거든.”
“아, 안 돼!!”
게르티몽은 아까와 달리 허우적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그 순간 엘도트가 게르티몽의 앞에 나타나 막아섰다.
“비켜라 이놈!!”
게르티몽은 사슬을 휘둘렀지만 멀리서 이디아가 쏜 화살에 걸려서 공격할 수 없었다. 게르티몽은 사슬을 놓고 엘도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빠르게 다가선 브론트에게 팔이 붙잡혔다.
“이익! 이런다고 리아주크가 기뻐할 것 같더냐! 아니 멀쩡히 부활하리라 생각하더냐! 꼭두각시 신을 만들어내어 섬기는 것이 어찌 추종자더냐! 이 뱀 같은 년…… 이 간사하고 극악무도한 년! 왕께서는 고심 끝에 리아주크의 뜻을 이어받아 신이 되기로 마음먹었거늘! 어찌 네년은 자신의 안위만 챙기더냐!”
게르티몽은 폭언을 하며 손을 빼내려했다. 하지만 브론트의 악력은 상당했다. 거스르기 어려운 거력에 게르티몽은 발악했다.
“나 참, 뭐라는 건지.”
페이니는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며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뒤로 에뉴다 백작이 벌벌 떨고 있었다.
“이, 이보게 블랙 남작…… 빨리 이곳을 나가야……”
페이니는 에뉴다 백작의 부름에 우뚝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히악?!”
세 기사는 백작의 호들갑에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페이니가 게르티몽에게 다가가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누군지 잊었어? 리아주크의 뜻을 헤아리는 자야. 그런데 뭐? 기뻐할 거 같냐고? 리아주크의 뜻을 이어받아?”
“그럼 지금 네년이 하고 있는 짓은 무엇이더냐!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던가! 진정 마신을 되찾으려 했다면 나머지 추종자들을 규합하면 되는 것이 아니더냐!! 그런데 뒤에서 몰래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다니!”
“아, 됐어.”
페이니는 부채를 접었다.
“벨루그하 그 놈은 멍청하긴 해도 최소한 우직한 충성심이라도 있었어. 자아조차 갈가리 찢겨졌어도 마신을 부활시키려고 했고 맹목적인 충성으로 씨앗을 품은 그릇조차 섬겼어. 그런데 너희는 뭐야?”
페이니는 깔보는 눈으로 게르티몽을 보았다.
“쓸데없이 대가리만 커서 손익만 구분하고 있어. 리아주크를 부활시키려는 조짐을 보이면 백신이 나타나 찢어 죽일테니 그건 무섭고. 그게 아니더라도 곳곳에 흩어진 육신을 되찾고 씨앗을 심을 적합자를 찾는 것도 귀찮을 테니 하지 않았어. 그런 주제에 내게 사리사욕을 채운다고?”
밝은 미소. 누구보다 깨끗해야할 미소건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끼치는 느낌을 주었다.
“넌 뒤졌어.”
*
“후우.”
페이니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 라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우르간드는 물론 미로의 일부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궁극의 마법!
하지만 이것의 대가는 컸다.
‘반동이 너무 심해.’
라이는 자기 몸을 살피다 한숨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를 키메라들이 쫓아오며 입맛을 다셨지만 라이가 미리 걸어둔 보호 마법에 갈가리 찢겨졌다.
‘일단 빠르게 돌아가야……’
그런 라이의 앞을 가로막는 게 있었다.
“안녕?”
여인. 그것도 당찬 미소가 아름다운 건강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판타지아 역사상 최흉의 미로가 아니던가! 이곳에서 조우한 사람이 평범할리 없었다.
“안녕이라니? 침입자에게 할 소리야?”
“내가 여기 관련자란 건 어떻게 알았대?”
“모르면 등신이지.”
“헤헤. 제법 거친 구석이 있네, 너?”
여인은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나탈리아라고 해. 마침 새로 구한 애완동물이 질려서 그러는데 새 애완동물이 되주겠어?”
“뭐?”
라이는 코웃음을 치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개소리는 정도껏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
“진심으로 한 소린데”
그 순간 나탈리아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신?”
빈틈을 노린 라이가 나탈리아를 향해 몇 가지 마법을 쏘아냈다. 3개의 원소가 한데 뭉쳐져 치명적인 피해를 줄 듯 했지만 나탈리아의 눈앞에서 전부 흩어졌다. 나탈리아는 그런 라이를 힐끔 보더니 그의 곁으로 날아가 목을 물었다.
“큭?!”
라이는 눈앞에 떠오르는 다양한 상태 이상을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고 나탈리아는 라이를 어깨에 들쳐메며 방금 본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단 피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