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40화 (40/104)

〈 40화 〉 40 ­ 노스페라투 기사단 上

* * *

다음 날 아침.

국가 회의는 뮬러 7세의 주도 하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른 나라 역시 드러커스의 미로를 향해 진군할 예정이었기에 출정 날짜는 빠듯했다. 다행히 모든 물자와 병력이 준비된 상황이었으니 병사와 지원금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이번 지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을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에틸가의 검…… 그건 달리 보검 같은 걸 수여하는 게 아니었다. 국가의 보물이라 불리는 장식을 폼멜에 장식해두면 그것이 에틸가의 검이 된다. 그리고 이 검을 든 사람은 국가를 대표하는 총사령관의 지위를 얻으며 귀족 작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그랬기에 총사령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눈치 싸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바로 라피에 초원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초원의 토벌을 명받고 떠나간 원정군이 죽으면서 에틸가의 검에는 미묘한 소문이 끼었다.

국가의 영광이자 저주.

이 소문은 판테스 왕국 측에서 억제하려 했지만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이런 헛소문에 귀족들이 나부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려 드러커스의 미로로 향하는 일이었다.

누가 쉽게 나설까. 이 자리에 참여한 대부분의 귀족들이 후방에서 보급을 하거나 지원격인 중앙군을 노리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방이나 총사령관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맹독을 품은 검. 강하기는 하나 나 자신에게도 위해를 끼칠 수 있다.’

뮬러 7세는 섣불리 나서지 않는 이들의 눈치 싸움을 지켜보았다.

“우선 이번 원정은 최대한 빠르게 전개해야 할 터 저는 페멜로 백작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마르판 후작이었다. 그는 벨리오 공작과 은밀하게 통하고 있는 귀족이며 당연히 귀족파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왕당파의 대표격인 페멜로 백작을 추천한 것이다.

페멜로 백작으로서는 그 추천을 거절할 수 없었다.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위치지만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덤터기를 쓸 수 있는 자리기도 했다. 어쩌면 백작 혼자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뮬러 7세는 이걸 알고 있었기에 막아야만 했다.

“빠른 전개와 페멜로 백작이 무슨 연관이 있는가, 마르판 후작?”

“현 원정군의 대부분은 왕국군입니다. 귀족들의 사병과는 달리 잘 단련되어있고 무엇보다 지휘 체계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왕국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이들 중 가장 적합한 이가 페멜로 백작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요새 파틸카에서 공적을 세운 경험이 있습니다. 정계에서 밀려난 그에게 국가에 공헌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마르판 후작은 교묘하게 귀족들을 깎아내리면서 왕국군을 추켜세우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본심이 아니란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너희가 가라. 속내는 결국 이거였다. 하지만 이걸 부정했다가는 왕국군이 귀족 사병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페멜로 백작에게 주어진 회생의 기회마저 뿌리치게 된다.

허나 뮬러 7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휘 체계가 조금 다르다고는 하나 어찌 왕국군과 그대들의 사병을 따로 볼까. 어차피 원정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부대를 새로이 개편할 터. 대부분 왕국군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세세한 소속까지 따지면 모두가 다른 이들이다. 그러니 이건 나라와 귀족이 다름이 아닌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통솔할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분명 페멜로 백작의 지휘 능력은 높이 사는 바이다. 허나 이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터 그대의 말은 잠시 보류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뮬러 7세는 초점을 왕국군과 사병이 아니라 지휘 능력에 잡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마르판 후작의 의견을 묵살하는 게 아닌 잠시 넘어가는 것처럼 말하여서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야말로 유연한 대처! 하지만 그걸로 끝나진 않았다.

다른 귀족파의 수장들이 연신 왕당파의 귀족들을 추천함으로서 뮬러 7세는 물론 왕당파 귀족들도 난처해지고 있었다.

모두가 미루는 전방과 총사령관의 자리……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저는 에틸가의 검을 누가 수여받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나라의 기사이자 검을 든 무장으로써 최전방에서 싸울 것입니다.”

길렌 백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불장군과도 같은 행태를 보였지만 의외로 따르는 이들은 많았다.

젊고, 강하며, 유능하다. 이 세 박자가 여기저기 떠돌며 간을 보던 귀족들을 규합했고 결국 그를 중립파 귀족의 수장으로 이끌어냈다. 물론 길렌 백작 본인은 이 부분을 아니꼬와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기사도를 따르는 것. 그게 전부였다.

백작의 발언에 몇 귀족들이 술렁였다. 길렌 백작은 고고하기도 고고했으나 상당히 강했다. 특히 그가 이끄는 푸른비늘 기사단은 왕국 기사단과 견줄 정도로 강했다. 그런 백작과 함께 싸운다면 적은 희생으로 공적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백작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회의의 분위기는 전방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중앙과 후방 배치에 대해서는 왕당파와 귀족파가 나누어 갖게 되었다.

‘단순하다. 허나 올곧다.’

뮬러 7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분명 길렌 백작은 기사로써, 남자로써 경외를 품을만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했다.

목적지는 미지의 공간이라 불리는 드러커스의 미로! 지상이 반파되어서 상당히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그 곳 역시 시련의 땅 중 하나였다.

‘도대체 어찌 해야……’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블랙 남작. 최초의 이모탈 귀족이자 여성 귀족인 그녀의 거수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말해보아라.”

“세 가지를 건의 드리고자 합니다.”

그녀는 우아한 손짓으로 부채를 펼쳤다.

“첫 번 째, 벨리오 공작 각하를 선두로 고위 귀족이라 지칭될 분들을 후방으로 밀어드리는 것.”

그 말에 벨리오 공작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두 번 째, 에틸가의 검으로 길렌 백작님을 추천하는 것.”

이번에는 길렌 백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세 번 째…… 제가 백작님의 부관이 되고 싶습니다.”

*

그녀의 발언에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이건 왕당파든, 귀족파든, 중립파든 가리지 않고 모두의 경계심을 끌어냈다.

우선 첫 번째 건의. 고위 귀족의 대부분은 귀족파다. 그들을 후방 보급로에 배치한다는 건 나머지는 왕당파와 중립파 귀족을 앞으로 내몬다는 소리였다. 중립파는 이미 길렌 백작을 따르기로 했으니 전방, 중앙을 가리지 않겠지만 왕당파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안전한 위치를 이제 갓 귀족이 된 하위 녀석에게 뺏긴 것이다. 그랬기에 왕당파 귀족들은 그녀의 발언이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리고 두 번 째 건의, 이건 길렌 백작과 중립파의 신경을 건드렸다.

에틸가의 검은 총사령관의 위치, 즉 최전방에 나설 수 없는 자리였다. 지휘관의 자리만으로 중요할진데 원정군을 이끄는 자가 앞에서 나섰다가 희생되면 큰 혼란이 빚어진다. 무엇보다 전황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조금 더 먼 곳에서 봐야 했기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당연히 길렌 백작은 물론 중립파 귀족들의 신경을 긁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세 번 째 건의…… 자신을 부관으로 삼아달라는 것에서 모든 귀족들의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게 순수한 의도든 아니든 간에 블랙 남작의 발언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길렌 백작의 눈에 들겠다는 행동처럼 보였고 그를 총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건 정말이지 어설픈 밀어주기였다.

당연히 모두의 견제를 받는 지금 뮬러 7세는 혼란스러웠다.

‘어찌 이리 경솔한 발언을?’

그때 그는 페이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뮬러 7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 느낌…… 처음 버트와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는 달랐다. 그때는 압도적인 공포와 중압감에 빠졌지만 지금은 발목부터 잠기는 늪과 같았다.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페이니는 잠시 뜸을 들이며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고위 귀족들을 후방에 배치하고자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드러커스의 미로는 시련의 땅, 언제 어디서 변수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특히 병사가 대거 빠져나가는 지금 시점에서 왕국은 빈틈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톰 왕국과 경계를 대고 있는 병사를 빼올 수도 없지요. 그렇기에 인재의 보존을 하는 한 편 고위 귀족을 주둔시킴으로서 남은 병사들의 사기를 챙기고 뒷날 또한 견고히 다질 수 있습니다.”

분명 그럴싸한 말이었다. 하지만 왕당파에게는 참으로 안 좋은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전력 보존을 톡톡히 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귀족파에게 안전한 입지를 제공하다 못해 견고히 다지는 꼴이었다.

“그럼 어찌하여 길렌 백작을 에틸가의 검으로 추천하였나.”

“첫 번째 건의와 연계되는 것입니다. 드러커스의 미로로 떠나는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길렌 백작으로 임명하시고 왕국 수비를 하는 이 역시 같은 지위를 주는 것입니다.”

이 발언에 모든 귀족들은 물론 뮬러 7세조차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에틸가의 검을…… 반으로 쪼갠다는 뜻인 건가?”

“아니, 군 지휘에 대해 뭘 알기를 하는 거야?”

“이 대체 무슨 헛소리를……”

뮬러 7세가 손을 들어 모두를 침묵시켰다.

“발언의 의도가 무엇인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드러커스의 미로를 공격하는 와중에 그들이 반격을 해올 것을 가정했습니다. 원정군이 떠난 상태에서 왕도의 수비는 왕궁 기사단장인 릴본 자작이 맡게 되겠지만 고위 귀족이 이곳에 남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지휘 체계에 불안정이 올뿐더러 공적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에틸가의 검을 공격군과 수비군으로 나누자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네는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반격하리란 걸 상정해두고 있군. 확실히 이번 파틸카 요새에서의 일도 있었고 이전에 세 머리의 괴수가 나타난 일도 있었다. 그런 위험을 생각해두는 건 당연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왕국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에틸가의 검의 지위를 나누다니……”

“파격적 행보, 그리고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전진입니다.”

페이니는 싱긋 웃었다.

“공격 못지않게 수비 진영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에틸가의 검은 지위를 막론하고 지휘만을 보며 정하는 일. 사상 최대의 위험을 가진 땅으로의 원정이며 이제껏 없었던 일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당연히 그에 맞춰 왕국도 유연한 대처를 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페이니는 에틸가의 검이 가진 본래의 뜻을 정확하게 찔렀다.

“무엇보다 길렌 백작은 유능하고 강성한 장수.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닌 앞에 나서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전장을 휩쓰는 타입입니다. 그렇기에 총사령관으로서는 그 의미가 퇴색될지는 모르나 사기만큼은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황을 보는 능력이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정군의 두 사령관을 두기란 어불성설, 그렇기에……”

페이니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제가 부관으로 최선을 다해 보필할 것입니다. 길렌 백작의 공백을 완벽히 메울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

“이제 끝이네.”

페이니는 개운한 얼굴로 내일 출정이란 소식과 함께 돌아왔다. 버트는 루하다와 카드 게임을 하다가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귀족파 대부분이 후방 보급을 맡게 됐어. 그리고 길렌 백작은 총사령관으로 임명됐고 나는 중앙군에서 보필하는 게 끝. 덤으로 모든 귀족들에게 찍히게 됐지.”

“그래요?”

버트로서는 그게 잘 된 건지 아닌지 모르니 그저 그런 반응을 보였다.

“아, 길렌 백작이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해서 허락했어.”

“그렇군요.”

탁­

“왜요!?”

“반응이 한 발 느리네~”

“제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아세요?! 기사란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 놀렸다고요!”

“……그랬습니까?”

루하다가 들고 있던 카드패를 전부 일그러뜨리며 살기를 흘려냈다. 버트는 루하다를 진정시킴과 동시에 페이니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다가 그런 얘기가……”

“글쎄? 네가 재밌었나 보지.”

“말렸어야죠……!”

“아니, 생각보다 너무 재밌게 될 거 같아서 그만……”

“제가 전부 치우고 오겠습니다.”

“루하다는 가만히 있어……!”

버트는 입을 삐죽이더니 페이니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를 위해서 그런 거겠죠?”

“응?”

페이니는 눈웃음을 지었다.

“글쎄, 어떨까?”

“능글맞아……! 일단 저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알아두시라고요!”

“그래, 그래. 알겠어. 네가 뭘 하든 내가 뒤를 돌봐줄 테니까~”

*

결국 페이니의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출정 당일 버트는 종기사들과 함께 짐을 잔뜩 짊어지게 됐다.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이 어떤 짐도 지지 않는 걸 보면 참으로 박한 대우였다. 그런 데다 다른 나라에서 보낸 원정군과 기한을 맞추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기에 행군 속도도 느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종기사들은 물론 짐말들조차 강행군에 지쳐서 헐떡였다.

물론 그것이 버트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구나.’

현재 버트의 힘 스텟은 700대를 넘어서 800대에 근접하고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마기를 따라 그녀의 육신도 강해져있었다. 지금 들고 있는 짐들만이 아니라 행군 중인 2만의 군세가 가진 짐을 모두 끌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

버트는 이런 쪽으로는 참으로 둔감했다. 타고난 게임 센스 덕분에 전투에서는 임기응변이 뛰어났으나 가진 바 능력을 이끌어내는 건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둔감함 덕분에 버트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랬기에 단 한 명만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통이 아니군.’

푸른비늘 기사단장 네르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 페이스대로 행군할 수 있는 최전방 1군이라지만 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버트는 다른 종기사보다 더 많은 짐을 지게 되었다.

그런데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내심 하나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네르딜 역시 타고난 무장. 나약하고 자존심 없는 이는 싫어하지만 의지가 강하고 열정이 깊은 사람까지 싫어하지 않았다.

‘분명 그때의 대처는 블랙 남작의 압박이 있어서가 분명하다.’

네르딜은 이 사실을 다음 휴식 때 길렌 백작에게 보고했다.

“조금 더 혹독하게 대하라.”

“알겠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네르딜은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백작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휴식이 끝나고 버트에게 더 많은 짐이 부과되었다. 응당 기사라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분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버트는 그걸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백작의 지시니 일단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드러커스의 미로로 가기 위해 산을 타고…… 정상에서 휴식을 취할 때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단하네? 어디 출신이야?”

그는 종기사 중 하나였다. 버트는 땀에 흥건히 젖은 종기사를 보며 방긋 웃었다.

“로디아 출신이에요.”

“로디아? 라피에 초원 근처에 있는 마을이지?”

“네, 맞아요.”

“나는 거의 반대편 땅인 노르 출신이야. 저기 저 녀석은 이웃 마을인 갈토 출신이고.”

종기사는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도 잊고 버트와 재잘재잘 얘기를 나누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민 출신이었다. 버트와 같은 미녀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이쁘다는 아가씨조차 버트의 미색에는 빛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다른 종기사나 짐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묵묵하게 짐을 나르는 모습…… 뭔가에 집중하는 듯 이따금 인상을 쓰는 걸 보면 가슴이 절로 설레였다. 병사들 역시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다만 체면이 있기에 먼저 버트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버트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힘들 텐데도 곧잘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었다. 특유의 예쁜 미소라든지 털털한 말투 덕분에 모두의 귀가 쫑긋 섰다.

어쩌다 보니 버트는 1군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몇몇 이들은 버트에게 슬쩍 배식 받은 음식의 일부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혹시 블랙스타의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

버트는 난처한 생각을 하며 웃었다. 발르틴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신도들과 몸을 섞었는가. 물론 난교나 다름없는 행위가 대부분이었기에 모두를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컵수프를 나누어주는 종기사도, 빵을 떼주는 짐꾼도 전부 마성자들처럼 보였다.

‘궁금하다.’

그렇게 생각한 버트가 누군가에게 음식을 받았다. 그리고 손이 맞닿은 순간…… 왠지 모르게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흘러들어왔다. 그 기억의 일부가 자신과 만났던 것이란 걸 알게 된 버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세네르?”

“응?”

세네르라 불린 짐꾼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그녀가 이름을 불렀을 때 흠칫 놀란 이들도 몇몇 있었다.

“아, 갑자기 떠오른 이름이라서……”

“아, 네…… 그렇습니까……?”

세네르는 분명 방금까지 버트에게 말을 놓고 있었는데 돌아갈 때는 말을 높였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모포를 나누어 주러 온 병사라든지, 백작의 말을 전하러 온 기사라든지, 스쳐 지나가던 척후병도…… 버트에게 희미한 기억과 함께 익숙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마성자들은 꽤 많다고 했었지.’

버트는 혹시나 자신을 위해 모른 척 해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버트는 꽤 이전부터 상당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다만 버트 본인이 음란한 상황에 처하느라 언제 나서야 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당장 잠자리를 준비하는 지금도 곳곳에 숨어있는 마성자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성녀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보잘 것 없는 마성자인 나를……’

‘허나 신성 모독을 당했을 때가 아니고서야 힘을 쓰는 건 교칙에 위배.’

‘현 직위에서 최대한 성녀를 보필한다.’

‘이 은혜를 다 갚는다!’

버트는 유독 달이 밝은 자리에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길렌 백작은 촛불 하나만 켜놓고 문서를 살피고 있었다. 그건 메일드로우에 대한 정보와 주변 지형, 마지막으로 천인장들을 선두로 지휘관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진즉 파악해둔 지 오래였지만 한 번 더 암기함으로써 완전한 전투를 하기 위해서였다.

“백작님.”

“네르딜.”

네르딜은 말없이 천막에 들어왔다.

“그 여자를 스카웃할 생각이십니까?”

네르딜의 질문에 백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싫은가?”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모욕을 주고서 받아들이려 하시는지……”

네르딜은 백작의 독특한 버릇을 알고 있었다. 푸른비늘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백작 본인도 겪어왔던 ‘수난’. 지금 그것을 버트에게 주고 있었다.

기사로서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홀대. 무관심이나 다름없는 대우. 게다가 힘겨운 행군까지…….

바닥을 알아야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것이 백작의 신조였고 푸른비늘 기사들만의 신념이었다.

헌데 그런 관습을 일개 계집에게 행하고 있으니 네르딜로써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기회를 줄 뿐이다. 눈앞에서 제 1의 기사라 불리는 나 길렌 백작의 검술을 보고서도 무지한 그 계집에게 검을 쥘 기회를 주려는 것이지.”

“백작님의 말씀대로 종기사들처럼 대했습니다만 별다른 불평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다른 이들이 그녀를 대우를 해주고 있으니……”

“참 호기심이 가.”

백작은 웃으며 촛불을 쳐다보았다.

“입김 한 번 불면 쓰러질 거 같은데 그대로 힘없이 꺼져버릴 정도로 하찮아보이는데…… 계속 해서 보고 싶어져.”

“……그렇습니까.”

네르딜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론 내 취향이 바뀌는 건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그 누구보다 고결한 기사. 그렇기에 네르딜, 그대를 내 곁에 두는 것이지.”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뭐라 한 적은 없다만?”

“죄송합니다.”

“일단 지금은 자둬라. 내일 분명 격전이 벌어질 테니…….”

*

하루의 야영이 끝나고 다시 한 번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저 멀리 오래된 고성 같은 건축물이 보였고 양옆으로 여러 군세가 보였다.

‘키런 왕국…… 본디 내가 이 나라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더라면 의탁하고 싶었을 나라다.’

길렌 백작은 망원경으로 군세를 하나하나 살폈다.

‘키런 왕국에 로이첸 왕국의 깃발이 섞여있다. 살리마 왕국의 마법사 진영에는 스카이 왕국의 깃발이 끼어있군. 그러면 베톰 왕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이곳에 모인 건가?’

백작은 메일드로우로 시선을 옮겼다. 역대 최강의 요새는 반파되었고 곳곳에 몬스터가 보였다. 그것들은 왕국에 기록된 몬스터들 중 흉포한 녀석들 뿐이었다.

‘위험하다.’

백작은 망원경을 접었다.

‘위험하기에 우리가 나서야 한다.’

그는 검을 들었다. 폼멜 장식에서 반짝이는 왕국의 보물이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모두 들어라!”

백작의 외침은 2만의 군세 곳곳에 울려퍼졌다.

“현재 눈앞에 각종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시련의 땅이 있다! 과거 왕국의 영광을 뺏어갔던 라피에 초원의 늑대들보다 위험한 녀석들이 수도 없이 있을 것이다! 이미 한 번 대륙에 시련을 안겨준 곳이다! 죽는다 해도 결코 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는다 해도 멀쩡히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백작의 검이 메일드로우를 향했다.

“그렇기에 가야 한다! 지금 그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무엇을 위함인가! 살기 위해서인가? 돈을 위해서인가? 진출을 위해서인가? 살려거든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라! 돈을 위해서라면 쟁기를 들어 밭을 갈아라! 진급을 위해서라면 붓을 들어라! 무기를 든 그대들은 시련의 땅을 정복하고 이 땅에 평화를 부르기 위해 온 것이다! 결코 하잘 것 없는 이유로 희생되는 것이 아니며 하찮은 이유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북이 울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는 북과 함께 곳곳에서 판테스 왕가의 깃발이 솟구쳤다.

“우리가 가야 다른 사람들이 안전하다.”

잔잔한 한 마디. 병사는 물론 기사들조차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군, 진격하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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