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9 루스타르 궁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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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 훙
길렌 백작은 버트를 불러놓고 주구장창 검만 휘둘렀다. 연무장 위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버트는 그저 멍하니 구경만 할뿐이었다.
‘뭐지……? 일단 1단계는 넘어간 건가……?’
버트는 자각하지 못했다 뿐이지 이건 상당한 특혜였다. 아무리 블랙 남작의 기사라고는 하나 일개 남작일 뿐! 남작과 백작의 차이는 평민과 귀족의 차이만큼 월등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렌 백작이 직접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 산하의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이건 다른 플레이어들도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만일 버트가 조금이라도 이 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녹아들었다면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굉장한 자리인지 알겠지만…… 아쉽게도 버트로서는 이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의 권위? 귀족의 명예? 기사도? 그런 모든 것이 버트에게는 어려운 말이었다. 게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대부분이 음란한 일이었고 정작 판타지아에 대해 명확하게 알아갈 기회는 적었다. 그리고 버트에게는 권력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다.
최흉의 교단 블랙스타! 리아주크의 신하들! 마신의 파편이라 할 수 있는 세트 아이템! 그것 외에도 다양한 세력과 힘이 있었다. 날 때부터 힘을 가지고 태어난 그녀에게 권력이란 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랬기에 크람스에 처음 방문해서 왕과 조우했을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지금 버트는 이 자리에 대한 추측과 더불어 페이니의 과제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어떻게 왕당파로 끌어들일까. 어떻게 여기서 진도를 나가나. 그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백작의 검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1시간 정도 진행된 백작의 연습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
백작이 땀에 흠뻑 젖어 연무장에서 내려오자 버트는 ‘소지품’에 넣어두었던 물과 수건을 건넸다. 백작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으로 버트를 보며 물었다.
“이제 됐나?”
“네? 무엇을……”
“쯧……”
백작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 뒤를 기사들이 따랐고 버트도 자연스레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
“이봐, 어디까지 들어가려는 거야?”
“네……?”
루스타르 궁은 귀족이 머물기 위한 장소! 당연하게도 숙소의 넓이는 여타 여관에 비할 수 없었다. 숙소 한 칸의 크기만 해도 웬만한 가정집을 웃돌 정도였다. 당연히 욕실이나 화장실 등의 편의 시설 역시 마련되어 있었다.
땀에 젖은 길렌 백작은 곧장 방에 들어가 몸을 씻으려 했고 버트도 무심코 그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 길을 백작의 휘하 기사인 푸른비늘 기사단이 막아섰다.
이건 당연한 처사였다. 귀족의 처소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불경죄! 초대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처형까지 할 수도 있었다. 그저 막아 세운 것은 백작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연무장에 들여보냈거니와 블랙 남작의 가신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어서였다.
“아, 그…… 배, 백작님께 볼일이 있어서……”
“백작님께서 한가하신 분으로 보이나? 호의를 베풀어주셨으면 그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지.”
“네? 호의라뇨? 무슨……”
“이 이상은 아무리 블랙 남작의 신하라고 해도 넘어가지 않겠다. 돌아가라.”
“하지만 전 해야 할 일이……!”
달칵
“무슨 소란이지?”
“죄송합니다, 백작님 당장……”
“……들여보내라.”
기사는 그 한 마디에 곧장 물러났다. 버트는 주춤거리며 백작을 힐끔 쳐다보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지?”
“아, 네…… 실례하겠습니다.”
백작은 버트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욕실 문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버트는 어리둥절해했고 백작은 덤덤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시중을 들어라.”
“네……?”
“어차피 검을 잡기엔 유약한 몸…… 네 취급이 어떨지는 이미 파악했다.”
버트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 그가 옷을 벗어던지자 당황하며 허우적거렸다.
“들어와라.”
백작은 조금의 수치심도 없이 나체가 되어 유리문을 젖히고 들어갔다. 버트도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따랐다.
‘넓다.’
증기가 가득 찬 공간. 곳곳에 대리석과 황금 장식이 가득한 욕실은 버트가 살고 있는 집보다 넓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백작이 목욕용 침대에 엎어졌다. 그 모습에 버트는 당황해서 주춤거리다 조심스레 다가갔다.
옆에 잔뜩 놓인 오일들. 그것을 본 버트는 병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아마 몸을 씻기 전에 바르는 용도인 거 같은데…… 그것이 무려 일곱 가지나 있었다.
‘뭐야…… 자동 번역 기능이……’
병에 쓰인 글귀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본래 지능 스텟이 읽기 어려운 글이나 암호 같은 것을 해석하거나 번역해주곤 했다. 이것은 판타지아의 기본 기능 중 하나였다. 버트의 지식이 낮은 편은 아닌데도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게 한 글자도 없었다.
“뭘 하지?”
“아, 죄송합니다!”
버트는 손을 꼬물거리다 첫 번째 병을 열어 내용물을 부었다. 뭔가 끈적한 것이 느낌이 안 좋았지만…… 일단 그것을 백작의 몸에 펴발랐다. 버트는 우선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그의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마사지해나갔다. 이건 전날 세 기사에게 받은 마사지를 응용한 것이었다. 생각 외로 육체에 새겨진 감각이 강렬했기에 곧잘 따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몇 분 간의 마사지로 느낄 수 있었다.
‘싫어해?’
버트는 아차 싶었다. 귀족이 말하는 시중. 델폰 남작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며 버트는 황급히 옷가지를 벗어내렸다. 그리고 이제야 페이니가 말했던 것을 깨달았다.
‘나의 마기로 상대를 유혹하란 뜻이었어!’
추후에 들어보니 마기에 내성을 가지는 이는 드물다고 했다. 특히 버트의 마기는 마기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마신의 것! 아무리 버트가 미숙하다고 해도 압도적인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누구라도 정신이 함락될 거라 말했다.
델폰 남작의 경우 세트 아이템 중 하나를 갖고 있었기에 멀쩡했을 뿐 지금은 잘 먹힌다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어째서 이렇게 쉬운 길을 알지 못했을까.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엎드려 있는 백작의 등 위로 몸을 포갰다.
“흡?”
버트의 부드러운 육탄 공세가 벌어지기 몇 초도 안 되어서…… 백작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쾅!
“이게 뭐하는 짓거리지?”
내동댕이쳤다.
“어……?”
“쯧…… 나가 있어라.”
“예? 하지만……”
“두 번 말 않는다.”
백작은 싸늘한 눈초리로 버트를 노려보았다.
버트는 처음으로 마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다.
*
‘원래 이런 건가……?’
버트는 욕실에서 쫓겨나 침실에서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마신의 마기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고 했다. 혹여 버트 자신이 마기를 쓰는 게 서툴러서 그런가 싶어 손을 움직였다.
치르륵
버트의 손끝에서 피어난 검은 마기는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세세한 움직임마저 할 수 있었으니 결코 그녀가 미숙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럼 대체……’
버트는 지금까지 겪어온 것에 힌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백작은 깐깐한 기사의 타입이었다. 몸을 포갠 순간 거절했고 마기의 유혹조차 먹히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엘도트였다.
‘엘도트는 주군과 신하였기에 단호히 경계했어. 그렇다면 백작은……?’
애초에 마기가 통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기껏해야 델폰 남작 정도였다. 그마저도 「밤」 아이템 때문이었지 남작 자체가 면역을 갖고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마기는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했어.’
버트는 몇 번이고 루하다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마기의 유혹보다 버티는 마음이 더 큰 건가?’
이건 즉 배는 고프되 아직은 가려먹는 처지란 소리였다. 이럴 때 버트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길밖에 없었다.
우선 백작이 굶주려서 아무거나 집어먹는 상태, 즉 기아 상태까지 몰고 가거나……
아니면 그의 입맛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아.’
버트는 눈을 크게 떴다.
‘페이니는 이걸 노린 건가?’
상대를 공략하는 법을 배운다! 버트는 분명 레이드를 포함한 게임에 대한 어느 정도 동경이 있었다. 물론 니스나 라이에 비하면 그 깊이는 얕았지만, 열정만큼은 뒤지지 않았다.
‘이것 역시 게임.’
길렌 백작의 공략!
철벽같은 그의 마음을 녹여내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트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모든 수단, 마지막으로 추측을 토대로 그를 당겨야 했다.
‘마기는 통하지 않아. 하지만 마기를 동반하여 그의 취향에 맞춰 유혹한다면……?’
깐깐한 기사가 보일 법한 취향. 지금 이 자리에 엘도트가 없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이 우직한 기사가 또 있을까. 지금까지 만난 이들은 숙맥이거나 분위기가 가볍거나 비리투성이었다.
그렇게 버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욕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버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다급하게 옷가지를 준비했다.
솨아아
길렌 백작은 가운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 백작의 앞에는…… 메이드 복장의 버트가 가지런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중을 들겠습니다.”
백작은 가만히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버트의 복장은 단정함과 섹시함의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분명 노출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옷이 몸에 꼭 맞다보니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슴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굴곡은 물론 둥그런 가슴의 형태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그에 비해 아래쪽은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긴 치마는 발목까지 가려버렸지만…… 얇은 재질인지라 무릎을 꿇고 있는 지금 예쁜 각선미가 한 눈에 보였다.
청초함 속에 보이는 섹시함! 버트는 지금 자신의 육신과 그림자의 힘을 아낌없이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그저 바라만 볼뿐 건드리지 않았다. 유혹하고 있는 버트 쪽이 이상해 보일 정도로 덤덤한 태도만 보였다.
‘혹시 이게 그건가……? 나는 검과 결혼했어요, 그런거……?’
백작은 말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버트는 그때까지 꼼짝하지 않았고, 백작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아무래도 블랙 남작이 나를 꼬드기려 하는 모양이군. 맞나?”
“네?”
버트가 놀라서 바라보자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기사라면서 검에 대한 것도 모르고 시중을 드는 것도 어설프다. 외견은 조금 봐줄만한 정도이며 그렇다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백작의 박한 평가에 버트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이건 마치 내게 조공을 하는 듯 한 데.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미숙한 기사를 내게 보내면 화만 돋운다는 걸 모르는 건가?”
“결코 그런 뜻이……”
“나를 동경한다는 것이 내 즉위식 날짜도 모른다. 그런 어설픈 거짓말이나 늘어놓고 나를 속일 생각이냐? 말해라. 네 본 목적은 뭐지?”
버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미 백작은 페이니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를 우리 편으로 만든다는 계획은 진즉 실패했다!
어쩌면 솔직히 말했을 때 그 부분을 높이 사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건 정확한 선택을 요구하는 일! 섣불리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실패하면 페이니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고작 몇 초도 안 되는 시간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버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버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귀족을 속이는 건 불경죄에 해당했다. 그녀가 이렇게 백작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조차 기적이나 다름없는 상황!
물론 버트는 왕에게도 크나큰 불경을 끼친 경력이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저는 블랙 남작의 뜻으로 길렌 백작님을 포섭하러 왔습니다. 다만 제가 미숙한 탓에 백작님의 기분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본디 죽음으로 사죄해야 저는 남작을 보필해야 합니다. 부디 제게 노여움을 거둘 기회를 주시옵소서.”
“어떻게 블랙 남작과 함께 하게 된 것이지?”
“그분과 함께 한 건 지극히 우연입니다. 다만 이건 개인사이기 때문에 밝히기 어렵습니다…….”
백작은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아랫것들의 이야기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지. 다만 궁금할 뿐이다. 어찌 블랙 남작이 너 같이 어수룩한 것을 내놓았는지 말이야.”
버트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본디 저는 검을 쥐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밤 시중을 들고 나서는 이름뿐인 기사직만 주어지고 저를 백작님께 바침으로서 어느 정도 호감을 두려 했습니다.”
“밤 시중이라.”
백작은 무릎에 팔을 걸치며 상체를 숙였다.
“창부든, 시녀든 너보다 훌륭한 이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 역시 몸을 파는 직책이라 하나 전문적인 지식을 위해 엄격한 교육을 받는다.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머릿속에 든 생각과 마음가짐부터가 다른데 어찌 내가 너 같은 걸 쓰리라 생각한 거지?”
백작은 자신의 침소를 가리켰다.
“극진한 대접을 위해 깨끗하게 씻은 몸으로 잠자리를 데우는 건 물론이거니와, 체질을 확인하여 엄선한 계집만이 귀족의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 비단 섹스만이 아니라 그 전과 후의 케어 역시 완벽해야 귀족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거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왔는지 모르겠으나 검조차 제대로 못 잡는 네년이 이 일을 우습게 보고 있으렷다? 그게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저? 무엇이지?”
지금 버트가 내놓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몸으로 꼬시는 게 통하지 않았으니…… 그가 흥미를 가질만한 걸 보여주어야 했다.
“한 가지 재주가 있습니다. 백작님이 지루하지 않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백작은 흥미가 동했는지 침대에 도로 앉았다.
“좋아. 어디 한 번 볼까.”
버트는 이때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자신의 행동에 후회했다.
백작은 침대 옆 탁상에 놓인 벨을 울렸다. 그러자 시녀 한 명이 들어섰다.
“단장과 부단장들을 호출하라.”
“네.”
그녀가 나가고 잠시 후…… 푸른비늘 기사단장을 포함해 여섯의 부단장이 들어섰다.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일렬로 서서 부동자세를 취했고 백작은 버트를 향해 말했다.
“어디 한 번 재주를 보여봐라.”
버트는 그 말에 그림자를 피워 올렸다. 사람들이 늘어나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보다 부끄러운 상황은 수없이 많았고 버트는 금세 냉정을 찾았다.
부단장들은 그림자를 보며 잠시 움찔했고 기사단장만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작은 새들이 되어 퍼덕거렸다. 그저 그런 흉내가 아니라 진짜 새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잘 되고 있다……!’
사실 버트가 말한 재주는 반쯤 도박이었다.
그림자를 피워올려 원하는 형상을 만든다…… 이게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페이니의 도움을 받아 메일드로우에 마기를 날릴 때와는 달랐다.
상상하고,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한다.
여러 마리의 새를 만든 버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새들이 예쁘게 날아다니게 하는 건 상당히 고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천히 몸짓을 하니 더욱 힘이 들었다.
그래도 슬쩍 본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도는 걸 보며 희망을 가졌다. 조금 더…… 조금 더 열심히 하잔 생각에 춤을 추었다.
그때…… 백작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정말 대단하군!”
버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페이니의 과제를 끝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블랙 남작은 첩도, 기사도 아닌 광대를 신하로 두고 있었구나!”
아?
버트는 놀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 줄 아는 건 자존심도 없이 머리를 굽히는 것이고 실전에조차 쓰지도 못하는 해괴한 마법이나 쓰는 계집이 기사라니! 대체 언제부터 기사란 이름이 이렇게 격하되었나! 네르딜 단장!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이 과연 왕국에서 기사란 이름을 부여받은 자의 올바른 모습인가?”
“아닙니다. 이건 천한 광대놀음일 뿐 결코 기사가 아닙니다.”
순간 버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들의 조롱에 뱃속이 쓰려오면서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음란한 능욕과는 전혀 다른 놀림에 눈물이 뿌옇게 끼었다.
“나는 네가 기사의 자존심을 굽혀서라도 주군을 위해 일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려 하는 것도 모자라 놀림거리를 만들려는 데도 웃으면서 좋아하는 꼴이라니! 지금 이곳이 동냥을 하던 길거리더냐? 아니면 구걸을 하던 땅바닥이더냐? 그런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내가 동정이라도 해주길 바란 것이냐?”
실수했다……! 버트는 정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선택지……! 그곳에서 재주를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기사로서 깨끗하게 물러나야 했었다!
버트는 갑갑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작의 신랄한 비판과 기사들의 비웃음이 섞인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아라. 아니면 이런 너를 고른 블랙 남작의 안목을 비웃기라도 해야 하나?”
버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그림자를 거두고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딜 가려는 거지? 밤 시중을 든다고 하지 않았나? 스스로의 입으로 시중은 잘 든다고 한 거 같은데?”
버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겠습니다……”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기사를 입에 올리지 마라.”
버트는 대답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버트를 보던 네르딜 기사단장이 말했다.
“이대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남작이라 하나 이모탈이다. 이곳에 땅 한 조각 없는 허울뿐인 귀족이지. 아, 델폰 남작을 복속시켰다고 했었던가? 그럼 또 모르겠군. 귀족인 척 하는 귀족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어.”
“백작님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군요.”
“저런 풋내기가 검을 든 것도 짜증나고 그런 풋내기를 내게 보낸 블랙 남작도 짜증이 난다. 듣자하니 왕당파라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신경을 거스르면 나도 파벌을 고를 수밖에 없겠어.”
백작의 말에 네르딜은 다른 이들을 전부 밖으로 물렀다.
“허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번 원정군을 결정하는 자리…… ‘아틸가의 검’을 노리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자네는 어쩔 셈인가?”
“저는 백작님을 따를 뿐입니다.”
네르딜은 고개를 숙였고, 백작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된 것이다, 네르딜. 고귀한 기사, 나는 그것이 좋다. 이리 오거라 네르딜.”
“예.”
*
“파하하”
페이니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버트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불만을 표했다.
“그만 웃어요……!”
“걱정 마. 힌트도 주지 않고 보낸 건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거니까.”
“혹시 그들이 그릇을 욕보인 겁니까?”
버트는 루하다를 힐끔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건 아니야. 그냥…… 부탁한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해서 자괴감이 들었을 뿐이야.”
“일단 길렌 백작은 넘어가야겠어. 어차피 내가 바란 건 원정군의 최고 지휘권이 아니니까. 애초에 남작위로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면 저를 왜 보낸 거예요……!”
“각인.”
페이니는 버트의 코를 톡 건드렸다.
“오만방자한 이모탈 귀족이란 것을 각인할 셈이야.”
“어째서……”
“그래야 녀석들이 나를…… 우리 그릇을 쉽게 넘보지 못하거든. 그저 그런 허세뿐인 귀족이란 타이틀, 그건 잡다한 녀석들을 끌어들이긴 해도 정작 실세들의 관심을 주지는 못할 거야. 버트 네가 바라던 조용한 게임 플레이를 위한 포석인 셈이지.”
“아……!”
“뭐, 동시에 왕국의 내부에서부터 점령할 계획이기도 하지만……”
“네?!”
페이니는 버트의 놀란 얼굴을 보며 방긋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 짓을 하면 ‘그것들’이 쫓아온단 말이지. 그저 기사에게 사랑에 빠진 몽마가 변덕을 부린다…… 그 정도만 할 거야. 그러니 걱정 마시지요, 우리 진짜 남작님?”
“……쯧.”
루하다는 혀를 찼지만 차마 페이니를 쳐내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가 버트의 생활에 안락함을 주고 있었고, 자신에 비해 운영 능력이 뛰어나단 걸 알고 있어서였다.
“자, 그럼 준비해볼까?”
페이니는 버트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며 어딘가를 보았다.
‘조만간 보자고 셀기디어.’
*
피비린내나는 붉은 옥좌. 그곳에 앉아있는 건 정갈한 수염의 노인이었다.
실상 노인이라 부르기도 이상했다. 2m는 족히 넘을 듯한 덩치…… 창백한 피부에는 주름 하나 없었고 눈빛이나 골격만 본다면 정정한 장수와도 같았다.
두려운 왕, 셀기디어 헬디스.
리아주크를 섬기는 종족들 중 하나이자 드러커스의 미로를 지배하는 위대한 통치자였다. 그런 셀기디어가 불편한 얼굴로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타티샤를 죽인 것이 페슈트라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몽마의 성에서 자리를 비운지도 꽤 됐고 이만한 마기를 가질 수 있는 건 그자밖에 없습니다.”
셀기디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고를 올리던 수하는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고 셀기디어는 한참 지난 뒤에 입을 열었다.
“지상의 나라는 어떤가.”
“이곳을 침공하기 위해 세력을 꾸리고 있습니다. 밀정들이 막아보려 하고 있습니다만……”
“두어라.”
셀기디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신들의 간섭을 피해 지하에 숨어살았다. 그들이 내건 약조는 리아주크의 부활을 도모하지 않으며 이 땅을 정벌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엄연히 우리의 땅을 지키기 위한 방위…… 정당한 반격이다.”
수하는 잠시 몸을 떨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 공간…… 드러커스의 미로를 울릴 정도의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어떠한 명이든 따르겠습니다.”
“들어라.”
셀기디어는 손을 들었다.
“엠파이어 일족들이여. 리아주크의 권위를 상징하는 우리가 땅바닥에 처박혀 산지 얼마나 되었던가. 지저분한 똥개들은 리아주크께서 내려주신 빛을 잃었고 저급한 창부들은 곳곳에 흩어져서 모기처럼 정기를 빨아먹을 뿐이다. 그렇다면 날파리들은 어떠한가. 리아주크를 잃은 후에는 하위종들에게 엉겨붙어 살지 않던가! 리아주크를 수호하던 이들의 계보는 끊어졌고 마지막 시종은 갈기갈기 찢어져 흩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러나 힘은 여전했다.
조용한 폭풍……! 이 소리를 듣고 있던 흡혈귀들 전부 가슴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리아주크를 따르는 이들 중 남은 건 우리뿐이다. 이걸 뜻하는 게 무엇인가? 리아주크를 상징하는 것이 우리란 뜻이다! 긍지를 가져라. 너희 자신을 믿어라. 그리고 우리 일족의 피를 믿어라!”
셀기디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나 셀기디어 헬디스. 리아주크의 뜻을 이어 새로운 마신으로 왕림할 것이다. 그리고 엠파이어 일족은 마신의 일족이 되어 이 땅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