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38 루스타르 궁 中
* * *
수도 크람스.
판테스 왕국의 수도인 만큼 발전도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당연히 그만큼 많은 사람의 왕래가 일었고 자연스레 경비의 수나 질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감시의 눈길이 많았다.
기사, 병사 할 것 없이 거리마다 배치되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경계하는 건 판타지아의 주민들만이 아니었다.
‘역시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어.’
‘미친…… 메일드로우가 반파 됐다는 게 진짜였어? 그게 아니고서야 귀족들을 맞이하는 패턴을 보일 리가 없잖아?’
‘젠장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야 하는데……!’
‘이만한 특종을 놓칠 수 없지!’
플레이어들의 촉각은 날카로웠다. 귀족들이 왕성으로 집결한다는 정보는 진즉 얻었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모이는지도 알았다.
문제는 드러커스의 미로로 원정군을 보내냐 마느냐였다. 그곳이 여러 나라의 골칫거리란 건 알고 있었다. 특히나 시련을 부른 장소인 만큼 다른 공략 불가 지역과 달리 처분하고자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웬만한 정예가 아니고서야 공략하기 어려울 터! 그렇다면 국가에서 나올 방안은 딱 두 가지였다.
전력으로 치거나 아니면 전력을 보존하거나.
설사 다른 나라의 압박으로 인해 떠밀려서 병력을 보낸다고 해도 정예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모탈을 내보내자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 이유는 사망 패널티였다.
‘죽었을 때 아이템이나 소지금을 잃어버리는 건 기본……’
‘그 끔찍한 느낌하며, 불쾌한 감각……’
‘게다가 재수 없으면 부활 장소가 그곳이 될 수 있어!’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메일드로우에서 죽으면 그곳이 부활 장소로 지정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건 베타테스터들이 괴소문이라 입증했지만 아직까지 이걸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에 덜컥 믿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상쇄하는 단 한 가지의 정보……
‘골드…… 골드가 넘치는 곳이랬어……!’
‘온갖 재화는 물론 미녀도 가득……’
‘그 안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천국이라 했다!’
‘어쩌면 블랙 남작을 뒤따라 귀족위를 노려볼 수도 있어!’
이 미지의 장소는 그야말로 욕망의 집결지였다. 플레이어들조차 이런 지경이었으니 다른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많군.”
“쫓아낼까요?”
왕성으로 향하는 마차…… 커튼을 젖힌 사내의 옆으로 기사 한 명이 말을 끌고 다가왔다. 마차 안의 인물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모탈이잖나. 놔둬라.”
“……알겠습니다.”
마차 행렬 대부분은 이런 반응이었다. 이모탈을 무시하고 넘기면서 그들을 외면하려 들었다.
딱 이 정도가 그들에 대한 인식의 평균이었다. 게이트가 침공의 이유로 왕성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면 그들을 피해 왕성으로 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플레이어들에게 직위를 주지 않으려는 이유! 바로 죽음조차 불사하는 무모함 때문이었다. 분명 목숨을 사리는 플레이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사이에서의 인식일 뿐이었다.
무모하고 건방지다. 이모탈에 대한 편견은 깨지지 않았다. 목숨을 바친다면 괜찮을 거다 NPC이니 이렇게 하면 공략될 거다. 단순히 게임으로만 보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 때문에 그들의 인식은 나아질 수 없었다. 오죽하면 서방의 최강국 베톰 왕국에서조차 이모탈에게는 직위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을까.
그 편견을 딛고 일어난 게 바로 골드로츠! 버트 이전에는 최초의 귀족 작위를 따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키런 왕국의 기사로서 준귀족의 위치였고 귀족 사회에서는 ‘고작’이었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달랐다.
극찬!
그들에게 있어서 골드로츠의 행보는 파격적이었고 혁명이었다. 오죽하면 오프라인에서도 팬 카페가 생겼을까!
하지만 인기인에게 늘 그렇듯이 안 좋은 말이나 나쁜 소리도 오갔다. 특히 이번 블랙 남작 사태는 두고두고 그의 조롱거리였다.
“마음대로 떠들라지.”
의외로 골드로츠는 이런 시기를 쉽게 넘겼다. 분명 분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째선지 블랙 남작을 꺾고 싶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라이벌인가.’
골드로츠는 팔짱 낀 채 마차 행렬 중 하나를 보았다. 귀족들을 실어 보내는 암막이 쳐진 마차. 그 중 하나에는 분명 블랙 남작이 있었다.
‘반드시 널 넘고 말 것이다.’
*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데……”
“나라도 이런 마차 행렬을 보면 신기해서 보게 될 거야. 자, 준비하자고 아가씨?”
“네.”
루스타르 궁.
본래 파티와 귀족의 숙식을 위한 장소였지만 지금은 한 층 더 꾸며져 있었다. 시종과 경비가 더 많아진 건 물론 정원이나 장식품도 이전보다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대 귀족 회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귀족이 모이는 자리였다. 무려 수 십에 이르는 귀족들이 있는 만큼 실수는 없어야 했다.
“제르디 백작님이 행차하셨습니다!”
“로반 공작 각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에뉴다 백작님이 행차하셨습니다!”
“슈레반 자작이 행차했습니다!”
마차가 들어올 때마다 궁내로 이동하던 귀족들이 멈칫거렸다. 개중에는 왕과 긴밀히 닿아있는 귀족도 있었고 다른 귀족들을 끌어 모아 권력을 누리는 이도 있었다.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이들!
그런 와중에 낯선 이름이 들렸다.
“블랙 남작이 행차했습니다!”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블랙 남작?’
‘이모탈 귀족?’
‘근본도 없는 것이 어딜……’
‘고작 남작위를 부르다니. 이 나라도 말세로군.’
모두가 노려보는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빛이 나왔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생각했다.
아름답다. 그저 그런 표현으로 그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얹은머리를 관통한 비녀. 검고 단아한 머리카락은 분명히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가닥…… 아니, 몇 갈래의 머리칼이 그녀의 반들반들한 이마나 귀 옆으로 흐드러지고 있었다. 서투른 솜씨……?
아니다! 그건 아주 교묘한 함정이었다. 물에 젖은 것처럼 흩어진 머리칼은 청초한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색기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희고 고운 피부는 창백하지 않았다. 얼굴 곳곳에 희미한 붉은 기운 덕분이었다. 여기에 짙은 속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그야말로 미인상이었다. 어디 하나 모난 데가 없었다.
분명 미인이라고는 질리게 봐온 귀족들조차 한 순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우아하게 손을 뻗으며 부채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바로 마차를 인도한 시종이었다.
“착실하구나.”
“가, 감사 합니다 남작님.”
“내 너를 특별히 할 수는 없으니,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전할 수 없구나.”
“아닙니다……! 충분히 기쁩니다……!”
“그래?”
탁 펼쳐진 부채, 나긋한 목소리와 도톰한 입술이 가려졌다.
“고맙구나.”
또각
이런 페이니의 뒤를 따라온 건 붉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분명 그녀도 제법 미인 축에 속했지만 블랙 남작의 등장이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그렇게 눈이 가지 않았다.
뒤이어 기사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간혹 아끼는 호위기사나 몸시종과 함께 탑승하는 경우가 있었다. 호위대를 꾸리지 못하는 이들이 그러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그들에게 눈길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 블랙 남작에게 집중된 시선을 뺐는 이가 있었다.
압도적인 체구. 어떻게 마차에 탔는지조차 의문인 검은 기사가 내렸다.
그는 왕성에서 왕과 알현했던 자, 왕국의 보물을 되돌려준 자! 검은 기사 리실버였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리실버와 붉은 머리의 여인이 블랙 남작의 뒤를 바짝 쫓았다. 나머지 세 기사는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저 자가 바로……”
“헌데 보물을 찾아준 것은 저 흑기사인데, 어찌 작위는 저 여자가 받은 거지?”
“듣기로는 저 흑기사의 은인이라는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작위를 양도하고 따르는 거라고……”
“대체 어디서 저만한 인재를 끌어온 건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블랙 남작…… 페이니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은인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해, 루하다?”
“흥……”
본래 흑기사 리실버는 버트였지만 지금은 루하다가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걷게 되었고 어느 누구도 리실버와 버트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
게이트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 버트 일행은 페멜로 백작과 함께 어느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버트는 이곳에서 의외의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루하다!”
버트는 반가운 얼굴로 루하다를 맞이했다. 페이니와 단 둘이서 대화하던 중에 루하다가 그림자에서 솟아난 것이다. 루하다는 특유의 휘어진 눈으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평안하셨는지요?」
“응! 일은 잘 해결됐어?”
「물론입니다. 성가신 녀석들이 있었지만 금방 해결했습니다.」
“……아하, 그래?”
버트는 미묘한 얼굴로 루하다를 보다 시선을 옮겼다. 루하다의 등장은 반가웠지만 지금은 페이니와의 대화를 마무리 할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설명해주실래요?”
버트의 말에 페이니는 질린 얼굴로 말했다.
“3번째 설명해주는데도 모르는 거야……?”
“이름도 그렇고, 세력도 어렵다고 해야 할지……”
“좋아, 좋아. 이해하기 쉽게 말해줄게. 왕당파, 귀족파, 중립파인데…… A팀, B팀, C팀. 이렇게 외워둬.”
페이니는 버트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A팀, 페멜로 백작이 소속 된 왕당파는 수가 가장 많지만 애매한 위치의 귀족들이 많아. 고위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낮은 쪽도 아니지. 그에 비해 B팀, 귀족파는 수가 가장 적지만 요직에 있는 이들이 많아. 후작가와 백작가의 수도 가장 많지. 마지막으로 C팀, 중립파인데…… 여기가 제일 중요해.”
페이니의 말에 버트는 초상화를 들었다.
“길렌 백작. 그 남자가 중립파의 우두머리 격 인물이야. 대부분 어느 편에 서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니 우두머리라고 불리기엔 뭣하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인물임은 틀림없어. 왕국 내에서도 몇 없는 독자적인 지휘 체계의 왕국군을 담당하고 큰 규모는 아니지만 상단도 운영하고 있어서……”
물론 페이니의 정성 가득한 설명은 얼마 못가 끝났다. 버트가 더 듣지 못하고 탈진해버린 탓이었다.
버트는 루하다의 마사지를 받고나서야 기운을 차렸다.
“하여간 다른 누구보다도 이 자를 포섭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보면 돼. 솔직히 이 자보다 더 쓸 만한 자는 많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 성향 때문에라도 왕당파로 끌어 들어야 해.”
“성향…… 이라뇨?”
“음…… 그건 직접 겪어보는 게 좋을 거야. 일단 이 남자를 꼬시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그러니까 왜 제가 꼬시냐는 거죠…… 이런 건 페이니가 더 잘 하잖아요?”
“아아~ 나야 거기서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대놓고 꼬리쳐봐야 그 녀석이 넘어올 거 같지도 않아서 말이지.”
버트는 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알았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
“아, 그래서 말인데 루하다가 그 흑기사 역할을 해줘야겠어.”
「흑기사?」
“아, 루하다는 그때 없었지?”
버트는 대략 왕성에 입성할 때의 일이나 파틸카 요새에서의 일 등을 얘기해주었다. 루하다는 페이니의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게 불만이었지만 그녀의 한 마디로 설득당했다.
“그릇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싫잖아?”
그래서 루하다는 버트의 설명대로 육체를 조형해나갔다. 완성된 루하다의 모습을 본 버트는 턱을 괴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여기, 여기있는 돌출부가 쓸데없이 튀어나와 있어. 그리고 덩치도 조금 더 부풀려야 해. 인체 비율이 잘 맞지 않잖아. 옆구리랑 어깨의 장갑은 한 꺼풀 늘리고 팔쪽은 한 꺼풀 줄여.”
“……이상한 데서 깐깐하구나?”
그렇게 버트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흑기사의 형태는 이전보다 훨씬 흉악해졌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오싹할 지경인데 흉흉한 기세까지 풍기니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아무튼 너는 내 또 다른 호위기사인 버트로서 그 남자를 왕당파로 끌어들여야 해. 알았지?”
“……역시 어려워요. 그러다 일이 잘못 되면 어떻게 해요?”
“일이 잘못 되면……”
페이니는 몇 초 고민하더니 히죽 웃었다.
“글쎄? 어떻게 해야 되려나?”
“……열심히 할게요.”
*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 버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특유의 유약한 모습과 자신감 없는 표정이 더해지면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뒤늦게 버트를 발견한 귀족들은 그녀의 행태를 보며 혀를 찼다.
‘어찌 저런 자를 곁에 두지?’
‘아, 종기사로군.’
‘아니면 몸을 팔아서 저 자리에 있는 건가? 뭐가 됐든 한심하군.’
버트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고 있는 건 길렌 백작이란 남자 한 명 뿐! 하지만 어디에도 비슷한 인상착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양한 사람이 있단 것만 알게 됐다.
‘전형적인 악당 타입인가? 척 보기에도 뚱뚱해보이네…… 저쪽은 엄청 우락부락하고…… 아, 되게 말랐다. 저렇게 생긴 애가 우리 과에도 있던 거 같은데……’
작고, 크고, 젊고, 늙고, 두툼하고, 늘씬하고, 각양각색의 귀족들을 보던 중 버트의 눈에 든 사람이 있었다.
“아.”
“음……?”
그녀의 삿대질에 다른 귀족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버트를 보았다.
델폰 남작! 한 때 기사 코르크의 간계에 넘어가 버트를 심문했던 귀족이자, 「밤」 세트 아이템 중 하나를 갖고 있던 남자였다. 그는 잠시 어버버거리며 다른 귀족들을 제쳐두고 버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시오, 블랙 남작. 멀리서 시종의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설마 당신인 줄 몰랐군요.”
“아, 그……”
“반가워요, 델폰 남작.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페이니가 교묘하게 델폰 남작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자 델폰 남작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춤대는 버트와 페이니를 번갈아보더니……
“이거 몰라보겠군요. 잠깐 다른 사람과 헷갈렸을 정도로 미모가 눈이 부셔졌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호호, 남작께서는 여인에게 칭찬이 후하시군요. 그때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다 잊었으니까요.”
“실수는 엄연히 실수. 무엇보다 제가 남작에게 귀속된 이상 어찌 감히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편히 말씀하시지요.”
“후후, 그래도 작위는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게 더 편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사양할 수는 없겠죠. 그러겠습니다.”
델폰 남작은 자연스레 페이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최하위 귀족이라고는 하나 그도 귀족이었다. 당연히 눈치는 있었다. 특히 약소 영지로서 주변을 살피는 데 도가 튼 델폰 남작은 무슨 상황인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대리인을 내세웠군. 어떻게 왕을 구워삶은 모양인데, 정말로 왕의 권위가 약해진 건가? 역시 벨리오 공작에게 붙어야……’
“델폰 남작?”
“아, 예.”
“남작은 이곳 크람스와 펜체트 중 어느 곳의 경치가 더 좋다고 보시는지요?”
남작은 무심코 곧장 대답하려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펜체트는 벨리오 공작령의 중심도시였다. 그리고 그는 귀족파의 수장격 인물이었다.
난데없이 첫 만남에서 경치 얘기를 묻는다니? 그것이 무엇을 시사 하는 지 안 봐도 뻔했다.
‘떠보고 있다.’
블랙 남작을 자칭하는 여자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가벼운 거짓말로 넘어가긴 어려울 것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여자는 결코 허수아비 같은 게 아니었다.
‘실세? 아니면 조력자?’
델폰 남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페이니가 부채를 탁 접고 입을 열려던 순간……
“본디 정통적인 도시 양식이 가득한 크람스가 좋긴 하나…… 최근에는 펜체트에 신설된 건축물에 눈이 가더군요. 이거야 원, 뭔가 그럴싸한 구경거리라도 있다면 마음이 떠나지 않을 터인데 말이죠.”
델폰 남작은 말을 교묘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왕당파이나 귀족파에 마음이 간다고 피력했다. 만일 페이니가 왕당파로서 질문을 던진 거라면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있거나 파벌에 불안함을 느낀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반대로 귀족파라면 언제든 그쪽으로 넘어갈 의향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페이니가 단순한 질문을 던진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진짜’ 블랙 남작의 눈이 그만큼 낮은 것이니 언제든 갈아탈 준비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가요?”
페이니는 부채를 탁 펼쳤다. 그러더니 나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본디 경관에 대한 것은 본인의 마음에 따라 달린 것. 남작은 왠지 모르게 남의 말에 잘 휩쓸리는 것 같군요.”
“……그런가요?”
“가벼운 농담입니다. 그런 건 전부 개인 취향 아니겠습니까? 우선 회의까지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편히 쉬시지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군요.”
“아닙니다. 간만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이니는 눈웃음 치더니 델폰 남작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전 이 수도가 마음에 들더군요. 조만간 같이 구경거리라도 찾아나서지요.”
페이니가 배정된 방에 갈 때까지 델폰 남작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하긴…… 페이니는 성에만 갇혀 있었죠?”
“응?”
버트는 루스타르 궁에 들어오자마자 페이니에게 말을 붙였다. 뜬금없는 말에 페이니는 갸우뚱거렸다.
“그게 무슨……”
“뭔가 박식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아까 경치 얘기할 때 알겠더라고요. 우직한 기사가 첫 사랑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렇고……”
페이니는 궁에 들기 전 델폰 남작과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그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보다 왜 꿈속에서 덮칠 때 한 얘기를 여기서 꺼내는 걸까? 응?”
“아우우”
페이니는 험악한 기세로 버트의 뺨을 꼬집었다.
“그치만 외로우실 거 같아서 어차피 여기서 하실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엘도트랑 데이트라도 다녀오는 거 어떨까 싶어서”
페이니는 버트의 뺨을 탁 놔주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 버트는 정말 순진해서 괴롭혀주고 싶다니까?”
“힉……?!”
“귀족 사회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내가 방금 델폰 남작에게 세게 나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 자가 내 밑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9할은 내 위야. 준자작 급으로 주어진 남작위라 해도 고위 귀족의 밑에 있거나 특수한 직책으로 등급이 높은 이들이 태반이란 소리지.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
“모, 모르겠어요.”
“우선 이곳에서 얼굴 도장을 찍고 돌아다녀야 한단 소리야. 대부분의 귀족이 모인 지금, 인맥을 만들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 오오……”
“하지만~”
페이니는 대뜸 버트의 이마를 딱 때렸다. 버트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페이니는 킥킥 웃었다.
“그것도 꽤나 건방지고 좋은 행동인 거 같아. 그리고 의외의 효과도 줄 거 같기도 하고 말이지.”
“제 머리는 왜 때린 거예요……?”
“아, 그냥 비밀 까발린 게 짜증나서.”
“어차피 엘도트랑 깊은 사이까지 가셨잖아요……! 말하면 어때서……”
“……와하? 알았어?”
페이니가 얼빠진 표정을 짓자 버트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쭉 폈다.
“여자의 감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어쭈. 이게 좀 놀아줬다고 건방지게 구는 거봐?”
페이니는 음흉하게 웃으며 검지를 세웠다. 그러더니 버트의 양쪽 가슴의 정확한 포인트에 손가락을 찔렀다.
“어헉?!”
“아하하! 그거 무슨 소리야!”
“하지 마요!”
“어디 여길 찌르면 무슨 소리가 날까!”
“흥학!! 하지 말라니까요!”
“좋아…… 그럼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볼까?”
“으하앙……!”
*
“그럼 다녀올게~ 집 잘 봐~?”
페이니는 넓은 챙 모자를 눌러쓰며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왕국의 대소사에 대한 회의를 하기 하루 전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 지금 그녀는 휴양지로 떠나는 젊은 귀족의 차림이었다.
당연히 그 모습으로 궁을 나서는 모습은 귀족들에게 퍼지게 됐다.
“미치겠군.”
왕실 기사단장 릴본 자작. 그는 왕에게 따로 얘기를 들어 페이니를 블랙 남작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궁을 나서기 전 그를 통해 전해진 보고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시기에 놀러 간다고? 대리인 자격이 있긴 한 건가……?”
릴본 자작은 건방지기는 해도 박력 있던 버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인복이 없기에 그런 여자가 들러붙은 게 아닐까 생각하며 버트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가 동정하는 버트는……
“안녕하십니까……! 블랙 남작님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인 버트라 합니다!”
“……엉?”
루스타르 궁 뒤편에 마련된 연무장. 본래 이곳은 기사나 귀족이 가볍게 검을 맞대며 몸을 풀거나 검무를 보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곳을 점거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길렌 백작이었다.
백작은 버트를 바라보다 자기 휘하의 기사들을 보았다. 분명 이곳은 백작 개인 소유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많은 귀족이 모인 자리! 당연히 경계를 세워두고 가볍게 출입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당장 검을 쓰는 귀족이라 해봐야 길렌 백작 외에는 이미 죽은 가이람 백작이나 국경선 경비를 책임지는 시미어 백작 외에는 없었다. 나머지는 취미로 배우거나 호신용으로 익혔을 뿐이었다.
‘방해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백작은 기사들을 턱짓으로 물렸다. 소문도 자자한 블랙 남작! 그녀의 호위 기사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은밀히 전할 말이 있어서가 분명했다.
“무슨 일이지? 블랙 남작이 보낸 건가?”
“아, 비, 비슷합니다.”
버트의 말투와 행동, 그것을 조우한 백작은 크게 실망했다.
‘엉망이야.’
단련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근육의 행방은 보이지 않았고, 동작도 해이했다. 게다가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있고 기세도 약했다.
도무지 기사는커녕 누구를 지켜주기도 어려운 모습! 전형적인 무인인 백작에게 버트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혹여 제게 검을 가르쳐 주실 수”
“꺼져라.”
백작의 단호한 말에 버트의 사고가 정지했다. 우선 페이니의 말대로 길렌 백작을 찾아왔지만, 마땅히 그를 유혹할 방도가 없었다. 그 전에 어떻게 그를 왕당파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버트는 아직까지 페이니의 과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일이 꼬이려 했다. 버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오래 전부터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만나서……”
“내가 백작위에 오른 게 몇 년도지?”
“예?”
백작은 냉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버트는 눈이 빙빙 돌았다.
“사, 삼 년……”
“5년도 더 된 일이다. 이 이상 내 시간을 뺏는다면 아무리 블랙 남작이 보냈다고 해도 일의 책임을 묻겠다.”
“그……!”
버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야겠다 생각했고……
“가, 강해지고 싶습니다! 남작님 곁에서 남부끄럽지 않게 보필할 수 있게 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기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작님이 쇼핑하시러 간 지금, 백작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버트는 될대로 되란 식을 말을 뱉었다. 그러자 길렌 백작이 버트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게? 여기 머무는 시간은 고작 하루다. 그것도 회의 시간까지 더한다면 한 나절도 되지 않겠지.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을 배우겠단 거지?”
“그건……”
“가소롭구나.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아. 지금 내가 너랑 말을 섞는 것도 블랙 남작의 비호가 있어서지, 결코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유약해, 강직하지도 못해, 네게서 그 어떤 장점도 느낄 수 없다. 차라리 지나다니는 병사에게 검을 쥐어주는 게 나을 정도다.”
신랄한 비판! 하지만 버트는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그 모습에 백작은 그냥 돌아서려 했다. 그러다 잠시 그대로 우뚝 멈추더니 돌아가려는 버트를 향해 말했다.
“그보다 방금 뭐라고?”
“네?”
“블랙 남작이 뭘 하러 갔다고?”
“쇼핑을…… 하러 갔는데요……?”
그 순간 백작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렇군. 내게 떠넘긴 건가.”
“그, 그런 건 아니……”
“따라와라.”
“네……?”
“검에 대해 가르쳐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