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36화 (36/104)

〈 36화 〉 36 ­ 타티샤의 망루 下

* * *

대륙은 소란스러운 반면 플레이어들은 느긋했다.

“고작 가고일 갖고.”

이것이 대부분의 평가였다. 그랬기에 마법사의 탑에서 호출 받은 라이벨이나 키런 왕국의 부름을 받은 골드로츠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이 싸움에 끼지 않았다.

분명 초대형 가고일은 놀랄만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시련의 징조라기엔 너무 허접했다. 혹시라도 칼라 해변에서의 이벤트처럼 방심하게 만들려는 술수가 아닌가 싶어 근처에서 대기하는 플레이어들은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 진상을 확인하고 돌아섰고 최후의 믿음을 가진 자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갈래 번개.”

플래시 슈터란 별명으로 불리는 9성 마법사 마끼야또의 손에서 번개가 뿜어졌다. 그리고 이곳을 향해 날아오는 9마리의 가고일 중 5마리를 꿰뚫었다. 녀석들은 맥없이 바닥에 추락했고 뒤이어 다른 마법사들도 마법을 발휘했다.

그렇게 가고일들의 공격은 무리 없이 막아냈다. 처음 이상 징조를 발견하고 난리를 친 것 치고는 참으로 허무한 마무리였다. 게다가 가고일이 날아오른 것을 보고 급하게 지원군까지 요청했는데…….

“……이상해.”

라이는 마나타 요새에 모인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방심하지 마! 다른 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라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간 가고일들을 생각했다. 조금 가까운 곳으로 4마리가 날아갔고 나머지 7마리는 키런 왕국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버트가 있으니 문제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라이의 말대로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추락했던 가고일들이 포효하며 일어난 것이다. 그 모습에 마끼야또는 혀를 차며 다시 마법을 썼지만 이전과는 달리 녀석들은 가볍게 손으로 튕겨내며 달려들었다.

“허억……!”

녀석들의 크기는 요새의 성벽과 비슷했다. 당연히 성벽 위에서 대기하던 궁수나 마법사들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막아!”

“지원군이 온다고 했어! 방어 마법을 전개해!”

그들은 다급하게 화살을 쏘거나 방어 마법을 영창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빨랐다. 단숨에 요새 근처로 달려와 손을 휘둘렀고……

쩌엉!

투명한 벽에 공격이 튕겨나갔다.

“아……!”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는 한 손으로는 방어 마법을, 다른 손에는 새로운 공격 마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라이 특유의 멀티 캐스팅이 발휘되었다. 그 모습에 요새의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다. 물론 마법사의 탑에 소속된 몇 플레이어들은 질투심에 혀를 찼지만…….

‘지원을 가야하나.’

라이는 그 생각을 하며 선두의 가고일의 얼굴에 불덩이를 날렸다. 그러자 가고일은 마끼야또의 번개를 튕겨낼 때처럼 손을 휘둘렀지만…… 손이 폭발로 날아갔다. 그 모습에 요새의 사람들은 환호했다.

“최고다!”

“역시 올 클래스 매지션!”

“멋져!”

“먼치킨이야, 먼치킨.”

“어후, 운빨 좆망겜. 나도 마법 저렇게 배웠으면 똑같이 했지.”

몇 시기심 가득한 말을 뒤로 하고 라이는 저 먼 곳을 보았다. 버트가 있을 첸스터 산맥. 거기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모습에 라이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

“쏴라! 전부 쏴!”

요새 파틸카. 작은 요새라고 해도 투석기는 있었다. 하지만 마법의 힘이 가미되긴 했어도 이걸 운용하기엔 어느 정도 병력이 필요했다.

퉁­

3대의 투석기에서 줄이 끊어지자 사람만한 바위가 날았다. 그중 2개는 빗나갔지만 하나는 가고일 한 마리의 머리에 적중했다. 녀석은 비틀거리다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백작은 가고일 한 마리의 격추를 알리며 병사의 사기를 북돋았다.

“불화살은 쓰지 마라!”

“날개를 노려! 죽이는 게 아니라 추락시킨다고 생각해라!”

“투창!”

“다음 조 준비!!”

지휘관들이 바쁘게 독려하는 중에 백작은 이번에 창을 던지게 시켰다. 그냥 던지는 게 아니라 투창기의 도움이 있었기에 훨씬 먼 거리를 날았다. 그 덕에 가고일들 몇 마리는 날개가 벌집이 되었고 날아오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모습에 백작은 기사단을 대기시켰다. 녀석이 추락했을 때 육탄전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백작의 눈에 페이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부채질만 하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치려던 그때 페이니가 말했다.

“백작 각하.”

분명 지휘관의 외침과 병사들의 움직임 때문에 소란스럽고 거리도 있는데……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한 마리는 맡기겠습니다.”

“무어……?”

페이니가 부채를 탁 접었다. 그리고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푸른 늑대 투구를 쓴 경갑의 남자가 활을 들었다. 그 순간 활에서 빛이 난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눈부셨지만…… 부담스럽지 않았다. 빛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푸른 기사가 시위를 당겼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리고……

퓽­

시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쐐애액­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

그리고……

쾅!

뭔가 얻어맞고 터지는 소리!

키에에엑­!

가고일은 추락했다. 가고일 한 마리가 뭔가에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고 있었다! 처음 내려앉은 녀석과 달리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에 페멜로 백작은 어리둥절했다. 그제야 떨어지는 녀석에게 머리가 없단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퓽­ 퓽­

이어서 푸른 기사가 시위를 두 번 더 당기고 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은 가고일 2마리 전부 날개가 하나씩 터지면서 바닥에 내려앉았다.

“마, 맙소사……”

“혹시 저 멀리 서쪽 나라에서 왔다던 황금궁사란 이모탈인가?”

“아니……! 그 자는 금색 활을 쓴다고 했어! 하지만 저 자는 백색이야!”

“누구지……?”

“블랙 남작님의 기사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났다. 요새 밑에서부터 들려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곧이어 추락했던 가고일 셋이 나타났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했다. 그들은 마나타 요새의 가고일들처럼 흉포하고 난폭한 모습으로 돌진해왔다.

“모두들 충격에 대비해! 성벽에서 내려와라!”

녀석들은 곧장 성벽으로 달려왔다. 백작의 판단은 옳았다. 만일 그대로 위에서 항전했더라면 성벽과 함께 터져나갔을 것이다!

퍼엉!

성벽이 폭발하며 3마리의 초대형 가고일이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요새의 벽보다 높은 녀석들이었기에 이전부터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벽을 부수고 들어와 내려다보니 그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히아아악­!”

“우린 죽을 거야!”

“살려줘!”

가고일 중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녀석은 주먹을 움켜쥐고 병사들을 향해 뻗었다.

쾅!

가고일의 공격은 엄청났다. 충격만으로 병사들의 귀가 멀어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세…… 세상에……”

까드득­

회색빛 곰을 연상케 하는 판금갑옷의 기사가 가고일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드래곤이 그려진 방패를 든 이 기사는 가고일의 주먹을 막는데 그치지 않았다.

텅!

방패로 쳐올리고

쾅!

가고일의 주먹을 검으로 터뜨렸다.

그렇다. 말 그대로 터뜨렸다! 녀석의 주먹과 비교하면 이쑤시개같은 검을 휘둘러서 터뜨려버렸다!

졸지에 손 하나를 잃은 가고일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회색 기사는 방패를 세우고 돌진하더니 가고일의 배를 때렸다.

퍼엉!

회색 기사의 반격으로 가고일의 가슴과 배는 커다란 구멍이 났다. 녀석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남은 2마리가 성큼 달려왔다.

“허억!”

병사들이 기겁하는 사이 이번에 나타난 건…… 검은 빛이었다.

쐐액­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회색 기사 옆에 서있는 사람, 검은 호랑이 문양의 중갑옷의 기사가 무슨 짓을 벌였다는 점이었다.

“저, 저거……”

그리고 달려들던 가고일 중 한 마리가 우뚝 멈췄다. 그러자 옆에서 달려가던 가고일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키엑?

푸슉­

가고일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 뒤 팔이 달린 상반신이 떨어지고 그 다음은 허리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골반과 허벅지 쯤의 하반신이 떨어지면서 가고일은 절명했다.

모두가 경악하는 이때…… 그들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 남았을 텐데요?”

여인의 목소리에 모두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녀석은 여전히 거대했고 위압감이 넘쳤지만 누구도 겁먹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2명의 기사만 있다면……! 하지만 어째선지 그 둘은 물러나고 있었다. 병사들이 당황해서 쳐다보는 동안 가고일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다.

문제는 페이니에게 돌아가는 두 기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런, 여기가 아니야.”

가고일은 달려들던 그 자세로 우뚝 멈추었다. 부채를 살랑거리며 걸어오는 페이니의 모습을 본 순간 녀석은 하나 뿐인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페이니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싱긋 웃더니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가고일은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나더니 병사들에게로 달려갔다.

“히익!”

“너희가 병신이 아니라 병사라면 싸워.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서야 이 나라의 병사라 할 수 있겠어?”

그 순간 여인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린 병사들 중 일부는 눈을 부릅뜨며 검과 창을 쥐었다.

페이니는 사기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보다 페멜로 백작에게 까딱 눈인사를 했다. 백작은 그녀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 내게 이를 드러낸 벌은 받아야지.”

그들이 본 건 페이니가 부채를 옆으로 펼친 모습.

그리고 가고일이 팔 하나와 꼬리를 잃고 배에는 큰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이 정도라면 공정하지?”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세 기사를 데리고 요새 밖을 나섰다.

*

“멋지다.”

버트는 검은 기사의 모습으로 요새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가고일들의 공격으로 정신이 없었던지라 모두가 몰랐지만, 그녀는 가고일이 추락하고 요새를 덮치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페이니 때문이었다.

[ 맡겨 둬. ]

그 한 마디를 하고 버트를 이쪽으로 보냈다. 버트는 불만이 많았지만 계략으로는 페이니를 이길 수 없었기에 묵묵하게 따랐다.

“그래도 매번 이벤트 때마다 이렇게 방해를 하면……”

생각해보면 칼라 해변에서 메두사와 싸울 때도 정답에 근접했을 때 답을 알려주었다. 가고일들의 습격이 있는 지금도 자기는 따로 빼놓지 않던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버트를 향해 페이니와 세 기사가 다가왔다.

“기다렸어, 그릇?”

“너무해요.”

“우후후…… 아주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거든. 그리고 지금 이건 그 일부에 불과하지.”

“……제멋대로 구는 건 용납 못한다.”

페이니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답한 건 검은 호랑이 갑주의 기사 엘도트였다.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페이니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

“어디까지나 네가 남작님을 연기함으로써 남작님의 신변을 숨기기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넌 남작님이 아니야. 그 이상의 월권행위는 인정하지 못한다.”

그 순간 페이니와 엘도트 사이에서 묘한 기싸움이 돌았다. 그래서 버트가 두 사람을 말리려는 순간……

“나 참, 장난도 못 쳐? 그리고 그릇에게 위해를 끼칠 것이었으면 진즉 했어. 이게 다 우리 그릇 씨를 위해서라고.”

페이니는 부채를 접고 엘도트의 가슴팍을 콕콕 찔렀다.

“그럼 상관없다. 그리고 되도록 그릇이란 표현은 삼가라. 하다못해 이름을 불러드리도록. 네게 예의 같은 걸 기대하진 않으니……”

“왜애! 내 나름대로의 애칭이고 예의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네 생각일 뿐이지.”

“내 생각이 안 중요하단 거야?!”

“그 뜻이 아니잖나.”

왠지 모르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버트는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페이니는 엘도트에게 씩씩거리다 아차 싶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하여간 재밌는 일을 벌일 거야.”

“그게 대체 뭔데요……?”

“저기, 보이지?”

페이니가 부채로 가리킨 곳은 메일드로우였다. 낮일 때나 멀리서 확인할 수 있었지, 어두컴컴한 지금은 그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버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망루와 벽 위를 오가는 몬스터의 모습까지도 또렷하게 보였다.

“네. 얼추 보여요.”

“……저게 보인다고?”

“이디아.”

“저도 안 보이는 걸요. 저 눈 좋기로는 참수리 저리 가라잖아요.”

이디아의 불평을 뒤로 하고 페이니가 계속 말했다.

“저길 공격할 거야.”

“네? 어떻게요?”

“그야 버트가 해야지?”

“네? 그래요?”

버트는 그렇게 대꾸하고 메일드로우를 봤다가……

“네?! 제가요?!”

“응, 맞아.”

“제가 어떻게요!?”

“지금부터 알려주려고. 버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야.”

*

메일드로우는 장장 수 십 년간 무너진 적이 없는 곳이었다. 판타지아의 주민들이 이 외벽을 공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망루라도 무너뜨린다면 접근이 쉬울 거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시도했다.

땅굴 파기, 폭약 투하, 마법 난사, 투석 연발, 물량 공세, 공성 전차, 심지어 몬스터까지 이용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미약했다. 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망루는 부서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도로 인해 많은 병사와 물자가 소모되었다. 각 나라의 국력이 약해진 건 덤이었다. 이런 곳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서쪽 끝에 드래곤이 산다고 전해지는 ‘만트라 대협곡’이나, 기괴한 정령들이 생물을 갈가리 찢어 피로 절어있는 ‘젠카 사막’, 계속 해서 언데드가 되살아나는 ‘묘지기 헥실의 무덤’ 등…… 나라에 위협이 될 만한 장소는 쌔고 쌨다. 당장 판테스 왕국만 해도 라피에 초원과 다른 시련의 땅(악몽의 성, 샤만의 해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던가.

그곳의 경우 나라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였다. 구태여 먼저 건드릴 필요도 없거니와 이모탈들이 알아서 그곳을 탐험해주었다. 그 지역의 식생이나 환경, 지역 정보 등을 대신 가져와주는 이들이 있었다. 아니면 그곳의 자원을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러커스의 미로는 그러지 못했다. 이모탈이 잘 찾아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곳은 한 때 시련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공략 불가.”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11개의 지역 중 무려 8개를 뚫었던 베타테스터가 포기를 선언했다.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운에 맡기는 행태에 기가 찬 것이다. 베타테스트 기간 동안 무려 2달이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공략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전투 마을의 외곽은 모든 이들의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첫 걸음이었다.

파괴 불가에 막강한 화력을 지닌 망루…… 크리티컬 스나이퍼 타티샤가 전두지휘하는 무적의 방어탑……

그곳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엉?”

창백한 피부의 병사가 5개의 망루 중 한 곳에서 먼 곳을 보았다. 그곳은 가고일이 날아간 방향 중 하나였다.

백부장 터커는 뱀파이어로서 긍지를 가진 병사였다. 비록 완벽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지금 밖에 나간다면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꺾을 정도의 강자였다. 당연히 전투 경험도 풍부했기에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았다. 수 십 년 전부터 이곳을 지키던 백전노장 중 하나였기에 언제든 침착하게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터커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리며 놀라고 있었다.

“뭐가 날아오……”

쐐액­

뭔가가 바람을 가르고 지나갔다. 날도 어두웠고 그게 너무 빨라서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방금 그건……”

쐐애애액­

곧이어 뭔가가 다시 한 번 날아왔다. 그건…… 망루에 박혔다.

퍽!

“어엉?”

터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빼내니 망루 아래에 부러진 검이 박혀있었다.

“검이…… 박혀……?”

이건 상식을 부수는 일이었다. 망루가 벽에 비해 방어력이 낮다지만 지금까지 숱한 공격에도 흠집만 나는 것에 그쳤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그것도 박살난 검이 날아와 박히다니?

터커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어둠이 깔려 있더라도 메일드로우 근처라면 보여야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 번 뭔가 박히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반토막 난 방패였다. 이어서 부러진 창, 칼자루, 마차 바퀴, 견갑의 일부, 금속 파편 등 온갖 것이 벽과 망루에 박혔다. 당연히 다른 곳에서는 비상이 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타티샤 님의 망루에 고물이 박혔어!!”

“벽에도 공격이……!”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대체 어디서……”

그때 터커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검은 빛.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검은 섬광이었다. 그리고 그건 십 수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 저 멀리 있는 첸스터 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빛은 그대로 터커를 꿰뚫었다.

“컥­”

그의 상반신을 터뜨리고 지나간 건 후라이팬 손잡이. 1백의 기사들과 단독으로 싸움을 벌이고 10여 년을 외곽에서 살아온 그의 허망한 최후였다.

*

“오, 맞았어. 흡혈귀 하나가 터져 죽었는데.”

“페이니……!”

“아, 농담이야, 농담. 농담도 못해?”

“그릇께서는 심약하시니 인간 형태를 띈 것에는 그럼 표현을 삼가라.”

“알았다고! 어때? 이제 좀 힘 조절이 돼?”

버트는 자기 손을 쥐었다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던져보니 감이 왔다. 이 어두운 밤중에 보인다고 해도 거대한 전투 마을이 거의 점처럼 보이는 거리였다. 그런데 잡동사니를 던져서 맞춘다니 참으로 황당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페이니는 태연하게 망루에 맞았다, 빗맞았다 등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버트로서는 그저 점을 향해 던지기만 했을 뿐이었으니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연습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던지면 페이니가 맞췄다고 얘기해주는지 금방 감을 잡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라고요?”

“이번에는 그림자를 모은다고 생각하고 던져봐. 아까 쓰레기들을 던졌을 때처럼.”

라피에 초원에서 주워왔던 잡동사니를 전부 비우고 나니 버트의 ‘주머니’는 텅텅 비었다. 이제 연습 삼아 던질 것도 없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페이니의 말대로 해보았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버트의 손에 검은 뭉치가 만들어졌다.

“음……”

“생각보다 잘 하네? 하긴 그 모습을 조형한 것과 같은 원리니 할 수 있어야지.”

페이니는 버트의 머리통을 통통 두드리다 엘도트에게 크게 호통을 들었다. 버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손에 모인 마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마기고, 마기가 곧 그림자인가? 아니면 둘 다 별반 차이가 없나……?’

「밤」 세트의 아이템. 리아주크의 찢겨진 육신이자 그림자를 다룰 수 있게 하는 힘. 하지만 뭔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뱃속에 심어졌다는 씨앗이랑…… 이 세트 아이템은 묘하게 이질적이란 말이지.’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은 뭉치를 쥐고 한 번 탁 털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흉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창이 들렸다. 그게 얼마나 소름끼치는지 세 기사조차 잠시 주춤거렸을 정도였다.

페이니는 미묘한 표정으로 버트의 손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갑자기 웬 창?”

“아…… 요새에서 창이 날리는 게 묘하게 멋있어 보여서……”

파틸카에서 던져대던 창들을 보고 그녀도 한 번 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묘하게 들뜬 모습에 페이니는 싱긋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잘 조준해서 쏴. 괜히 애먼 사람 맞추지 말고.”

“사, 사람 있었어요?”

“일단은 몬스터지만­”

“겁주지 말아요……!”

“그만큼 주의하란 거지.”

“정말……!”

버트는 창을 꽉 쥐고 메일드로우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흉흉한 기세가 터져나왔다.

세 기사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버트를 쳐다보았다.

‘대체 이 힘은……’

띠링­

버트에게만 보이는 상태 이상. 히든 시스템 중 하나……

세 사람은 버트에게서 뿜어지는 마기를 맞으며 절로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페이니는 턱을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달라.’

리아주크를 보필해왔던 그녀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압도적인 마기……! 마신 리아주크의 씨앗이자 힘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분명했다.

하지만…… 달랐다. 아주 조금, 아주 미약한 차이로 진짜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마신의 힘이다. 그것이 변질된다? 아무리 조금이라고 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

펑­

페이니는 저 멀리 날아가는 검은 창을 보았다. 창은 수 킬로 미터를 날고서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을 머금으면서 더 빨라지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아간 창은 망루 하나에 적중했다.

*

“무슨 말이지?”

“타티샤 님이 올라오셔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성벽과 1번부터 3번 망루에 온갖 잡동사니가 박혀서……”

“……뭐라?”

타티샤는 혀를 차며 망루에 올라섰다. 이 외벽과 망루는 물론 미로까지 설계한 천재 설계사 타티샤! 그는 드러커스의 미로를 만든 게르티몽의 제자 중 하나였다. 물질 단련에 있어서는 스승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제련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랬기에 평범해 보이는 망루와 외벽이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던 것이다.

그런데 상처를 입었단다. 그것도 쓰레기 때문에! 그걸 던진 것은 여전히 확인 불명이란 말에 타티샤는 짜증이 일었다. 한창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 중이었건만 이렇게 불리다니……!

‘조금만 더 하면 마신의 일부를 모방할 수 있을지도 몰랐건만.’

타티샤는 허리춤에 들린 단궁을 들고 혹시 모를 적습을 대비했다. 그리고 망루에 올라온 타티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검?’

검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무구들이 벽 곳곳에 박혀 있었다. 잘 제련된 무기도 아니고 강력한 마법도 아니고 고작 이런 것에 손상될 만큼 벽은 약하지 않았다. 그때 타티샤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마기……’

그건 단순한 마기가 아니었다. 수 킬로 미터 밖의 군세 속에서 지휘관을 구별해내고 그걸 저격해내는 타티샤의 눈에는 좀 더 심층적인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이건……!’

타티샤는 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안 그래도 차가운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느낌을 단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젊었을 적 멋모르고 누군가에게 덤볐을 때 조우한 기운.

‘두려운 왕 셀기디어……!’

타티샤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 순간 검은 빛이 그의 옆을 휩쓸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대체 무슨 일이야!!”

“아아악!”

타티샤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순간 검은 폭풍이 불었고 그로 인해 성벽이 갈려나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은 아주 간발의 차로 그 폭풍에 휩쓸리지 않았지만 벽은 물론이고 그 안의 첨탑들로 이루어진 미로가 몇 겹이나 박살나 있었다.

타티샤는 이 기상천외한 상황에서 당황할 틈이 없었다. 방금 느꼈던 검은 폭풍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 개나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피해라아­!!”

타티샤의 외침을 끝으로 메일드로우의 외곽은 3분의 1이 박살이 났다. 그 중 망루 2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나머지 3채는 곳곳에 손상을 입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극악의 전투 마을. 수많은 지휘관을 앗아간 곳. 연합군을 수 십 번을 막아낸 요새.

메일드로우의 외곽 타티샤의 망루는…… 이걸 만들어낸 창조자와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 순간 판타지아의 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됐다.

*

“다시 말 해보거라.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뮬러 7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페멜로 백작의 보고는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메일드로우 외곽이 반파…… 그 내부의 미로도 상당수가 손상됐습니다.”

분명 초대형 가고일이 날아온다고 보고 받은 게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 새벽쯤에 돌아온 보고는 후퇴도 아니요 전투 보고도 아닌 허황된 소리였다.

뮬러 7세는 구슬 너머로 보이는 백작을 보며 물었다.

“페멜로 백작. 혹여 잘못 본 건……”

“아니옵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거짓을…… 이봐, 뭘 하는 겐가?!”

“옥체는 평안하신지요, 폐하?”

갑자기 구슬로 얼굴을 디민 건 페이니였다. 뮬러 7세는 잠시 눈가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을 테니 나와 백작의 대화를 끊은 것일 테지?”

“폐하께 중요한 걸 보여드리려 합니다.”

그 순간 구슬이 손바닥에 가려졌다. 그래서 들리는 건 다급하게 호통치는 백작의 목소리와 안절부절 못하는 기사들의 소란뿐이었다.

뮬러 7세는 머리에 핏줄이 돋아났다. 아무리 버트에게 움츠러들었다고는 하나 한 나라의 왕이었다. 버트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대리로 내세운 작자의 행태는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구슬의 화면이 보였다. 그런데 구슬이 보여주는 영상이 이전보다 더 또렷하고 넓어졌다. 마치 누군가 마법으로 간섭이라도 한 것처럼 선명해진 영상으로 보이는 건……

“저…… 저건……”

드러커스의 미로 지상에 있는 전투 마을 메일드로우. 그곳은 반파되어 있었다. 새벽 달빛 덕분에 수 백 년 간 기척이 없는 부서진 고성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보이십니까, 폐하. 저의 호위 기사인 리실버의 작품입니다. 분명 경계를 하라고 하셨지만 호위 기사의 호승심과 충성심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명을 잠시 어기는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부디 이 성과로 용서하여 주시기를……”

페이니의 말은 모순 투성이었다. 강력한 적을 경계하라고 보냈는데 그 적을 단숨에 빈사로 만들어놓은 셈이었다. 그건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뮬러 7세는 어버버 말도 못했고 그때 백작이 다급하게 얼굴을 들이댔다.

“죄송합니다, 폐하……! 남작이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자 무례를 범한­”

“돌아오거라.”

“폐하……”

“이번 일에 대해 국가 회의를 열어야겠구나.”

“폐하……! 블랙 남작은 본디……”

“걱정 말거라. 다그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자네의 눈에는 저게 보이지 않더냐?”

뮬러 7세의 손짓에 백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와 같은 시련이 내릴지도 모른다. 일단 그곳은 위험하니 최소한의 경계군을 놔두고 빠져나가거라. 키런 왕국에도 그렇게 알릴 테니 서둘러 오거라.”

“게이트를 이용하겠습니다.”

“그래.”

뮬러 7세는 통신이 끝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그는 알지 못했다. 구슬 너머로 전해지는 아주 희미한 마기. 버트가 몇 시간 전에 흘렸던 마기의 극히 일부가 구슬을 통해 전해졌다. 그로 인해 잊고 있던 공포와 두려움이 떠오른 것이다.

위험하다. 뮬러 7세는 본능적으로 이 일의 위험성을 느꼈다.

그러나……

‘가능하다.’

뮬러 7세의 얼굴에는 공포를 뚫고 나오는 흥분과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가능해!’

자신의 대에서 이룰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숙원. 그것이 버트라는 이모탈 하나로 감히 시도해볼 수 있었다.

‘최강국 베톰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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