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4 타티샤의 망루 上
* * *
여인과 마주한 버트는 검을 손에 쥔 채 꿈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색의 여인이 손을 뻗은 자세로 멈췄기 때문이었다.
“오류.”
여인은 눈을 껌뻑이더니 손을 거두었다.
“표적?”
여인은 갸우뚱거리며 버트를 보았다. 그녀에게 배정된 표적과 버트는 조금 괴리감이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일처리를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사소한 변수는 달갑지 않았다. 분명 멀리서 인지했을 때는 표적이 맞았지만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많이 달랐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무엇으로 인지해도 그 기준에 맞춰 변했다. 모든 카테고리를 포괄하는 버트의 존재는 여인에게 큰 혼란을 안겨주었다.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표적이 아니라면? 구태여 여인이 마법사의 탑에서 버트를 기다린 건 필요 이상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역할은 이 세계의 안정과 균형! 만에 하나 자신들이 알려지거나 마법사의 탑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그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계산.”
여인은 멍하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보류.”
여인은 버트가 표적임을 확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 생각을 갖고 물러나니, 버트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뭐야 대체?”
간혹 이상한 플레이어들이 있다는데 그녀도 그런 부류인가 싶었다. 혹시 몰래 스샷(스크린샷)이라도 찍은 건 아닐까 싶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버트는 니스에게 수면 중 녹화처럼 판타지아 내에서 쓸 수 있는 기능을 전부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어쩌면 스샷만이 아니라 더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버트가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한가한가봐? ]
“어……?”
버트는 주변들 두리번거리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페이니였다!
“어……!”
페이니의 뒤로는 델폰 남작의 수하였다가 지금은 다크나이츠가 된 세 명의 기사가 있었다. 네 사람의 등장에 버트는 싱긋 웃으며 다가가려다 주변에서 기척을 느꼈다. 버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페이니만 보며 눈을 깜빡였다.
‘느껴져.’
자신이 아니라 페이니와 세 명의 기사를 훑어보는 시선…… 적어도 일곱 이상이었다. 그걸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페이니가 감시를 받고 있단 점이었다. 그것도 그럴 게 버트가 페이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혹시……?’
버트는 뭔가 찔리는 게 있었기에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멀리서 봤을 때 몰랐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페이니의 변장. 그녀는 거의 귀부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오프숄더 드레스에 잿빛 캐미숄, 검정 하이힐에 켈트 문양으로 마무리 된 긴 장갑, 마지막으로 곳곳에 걸린 보석까지……! 은은한 미소를 띄우니 판타지아의 주민들도 시선이 갈 정도로 눈부신 외모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뿔과 꼬리, 날개는 숨겼기에 그저 평범한 여귀족의 모습! 그런 와중에 강인해보이는 세 기사를 대동하고 있었으니 소문의 ‘블랙 남작’과 그 모습이 겹치고 있었다.
‘……플레이어랑 분간하는 스킬이 있다니 금방 눈치 채겠지만.’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페이니에게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왜 그들이 여깄냐는 것이었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예요……? 발르틴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야 우리 기사님들이 그릇이 보고 싶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말이지.”
페이니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세 기사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그릇께서는 여기서 뭘 하고 계셨나? 이번에는 마법사라도 따먹은 거야?”
“그건”
버트는 곧장 부정하려다 말을 바꿨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시면서 무슨 일은 없었어요?”
페이니는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물론 있었지. 나를 어느 귀족분이라고 오해하는 바람에 말이야…… 귀찮게 됐어.”
“하하…… 죄송해요. 그러기에 거기서 기다리라니까……!”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서 말이지. 루하다가 자리를 비우면서 부탁하더라고.”
“아.”
버트는 루하다의 마음씀씀이도 고마웠지만 이렇게 한 걸음에 달려온 페이니도 고마웠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끝까지 따라와주는 기사들 역시……
하지만 감사함을 느끼기 전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나에 대한 소문이 쫓고 있어.’
니스가 소속된 조직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계속 해서 블랙 남작을 추적하고 있었다. 지금 이 존재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누구도 확정 지을 수 없었고 어렴풋이 틀이 잡힌 것조차 없었다. 그랬기에 여러 조직은 간절히 그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엄청난 무력, 장래적으로 보장된 권력, 상상할 수 없는 재력, 무엇보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안성 역시 뛰어났다. 이만한 존재를 섭외하거나 하다못해 안면식이라도 익힌다면……?
그랬기에 대륙 곳곳에서 특히 판테스 왕국에서 그의 동태에 예의주시했다. 누군가는 이미 드러커스의 미로에 잠입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또 다른 공략 불가 지역인 샤만의 해저로 탐사를 갔다고도 말했다. 또 누군가는 키런 왕국으로 가 최고위 기사직인 ‘알카이드 나이트’를 노리고 있다고도 말했다. 아니면 살리마 왕국에서 120층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리도 있었고 블랙스타에 의해 멸망한 크로수스 교단과 사라진 왕국을 찾는다는 소리도 있었다.
하나 같이 허황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만 그것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소문조차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어서였다. 애초에 지금까지 그의 행보는 정상적인 게 없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천만 분의 하나라 해도 그들은 달려들었다. 오죽하면 일상 플레이의 공간이라 부르는 머나먼 왕국 스카이에까지 정보원이 투입되었을까.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버트는 이렇게 주목 받는 게 달갑지 않았다. 블랙스타의 대대적인 추앙이야 그렇다 쳐도 이렇게 누군가 뒤를 밟는 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그녀의 고민을 풀 기회가 찾아온다.
*
판테스 왕국의 수도 크람스. 이 나라의 최고 지배자인 뮬러 7세. 그는 한 문서를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드러커스의 미로.’
이 땅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던 곳 중 하나. 그것 때문에 이 근방에 대해서는 모든 나라가 임시 동맹을 체결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계속 해서 시련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으니 처음 이걸 발견한 살리마 왕국에서는 각 나라에 전령을 보냈다.
바로 전쟁 준비의 협조! 살리마 왕국에서는 마법사의 탑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시련의 땅(공략 불가 지역)을 노리고 있었다. 특히 수많은 마법사를 학살한 마수가 탈출했던 드러커스의 미로는 마법사의 탑의 원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기적절하게도 미로에서 이상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게다가 현 마법사의 탑은 역대 마법사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벨을 선두로 화이트 디스트로이어 쉴리드, 코발트 키퍼 딸기빙수, 플래시 슈터 마끼야또, 블랙 스트라이더 칼트릭 등…… 그 외에도 다양한 마법사 인재가 가득했다.
명분은 충분하다. 병력도 있다! 지금이라면 마법사의 탑의 위세를 높임과 동시에 그간의 숙원을 풀 수 있었다!
이건 비단 살리마 왕국만의 이익이 아니었다.
미로의 규모는 상당했다. 특히 지상에 드높게 솟아난 수많은 탑과 벽 외에도 지하에는 엄청난 수준의 대도시가 건축되어 있다고 했다. 이건 전설이나 소문이 아닌 이미 확인된 정보였다. 그리고 드러커스의 미로란 이름은 지상이 아닌 바로 이 지하를 명명하는 것이었다.
‘영토의 확보. 미지의 힘 획책. 무구와 온갖 보화.’
잃는 것은 많겠지만 얻을 수 있는 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이런 기회를 다른 나라에서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독식이 최고겠지만 그러면 탈이 난다. 애초에 연합을 하면 잃는 것은 적어질 것이고 아무리 보상을 나눈다 해도 그 가치가 작지만은 않을 것이다.
‘손해 보는 건 아니다. 문제는 누구를 보내냐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귀족 중에서 공로를 노리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라피에 초원에서 토벌군이 대패한 시점에서 판테스 왕국의 입지는 낮아졌다. 실질적으로 일곱…… 아니, 여섯 국가 중에서 상위권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뮬러 7세가 생각하기에 판테스 왕국의 국력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장기간 이어진 평화, 토벌군의 패배로 인한 사기 저하, 마지막으로 그의 계산적인 태도……!
물론 이건 순전히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왕국의 국력은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쪽에서 교류 없이 자급자족하며 건재하고 있는 최강의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 비하면 판테스 왕국은 약소국이었다.
‘아, 그래.’
뮬러 7세의 머릿속에서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애초에 지금 살리마 왕국에서 청하는 건 전쟁의 준비…… 즉, 아직까지는 경계에 불과했다. 그러니 순찰과 경계를 위해서 파견군을 보내는 것이라면 입지가 높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뮬러 7세가 보낼 사람은 결코 이름이 가벼운 이들이 아니었다.
‘가이람 백작이 은퇴를 선언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틈틈이 왕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말했지만 대대적으로 백작의 죽음이 알려졌으니 대놓고 그의 힘을 빌릴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마침 위치가 확인되었으니…… 공문을 보내야겠군.’
그렇게 뮬러 7세는 살리마 왕국에 보낼 서신을 적어내렸다. 그렇게 완성된 서신은 하나가 아니라 2장이었고 그대로 전령의 손에 쥐어졌다.
*
“그럼 다음 행선지는 정해지지 않은 거야?”
“네. 당장 세트 아이템에 대한 행방도 묘연하고…… 무엇보다 루하다나 퍼드롬 할아버지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서 어디로 갈지는 생각 못했어요.”
페이니는 근처 식당에 자리를 잡고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세 명의 기사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었기에 왠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반면 버트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이 좀 반반한 것 빼면 그저 머리가 붉은 검사일 뿐이었다.
‘뭐지? 저 자도 수하인가?’
‘아니면 오프라인 지인?’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모두가 그녀에 대해 추측하고 있을 때 가게에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가게에 들어선 이 남자는 경무장을 했는데 몸에 판테스 왕가의 깃발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대뜸 버트와 페이니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루마리를 펼치며 소리쳤다.
“블랙 남작은 들으라!”
그 순간 손님이나 알바생으로 위장했던 모든 정보원들의 털이 쭈뼛 섰다.
“현 시간 부로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견제로 경계군을 파견할 예정이니 그대는 속히 왕궁으로 돌아와 폐하의 명을 받들어라! 기한은 1달! 모든 경비는 왕가에서 지급할 터이니 최대한 신속하게 복귀하길 바란다! 이상!”
전령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 순간 정보원들은 이 1급 정보를 전달하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누군가는 이미 바다하피의 깃털을 품에 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페이니는 그 모습을 힐긋거리더니 버트를 향해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가야…… 겠죠……?”
“내 말은 이 떨거지들을 어쩌겠냔 거야.”
페이니의 말에 버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대놓고 블랙 남작이란 이름이 사용됐으니 빼도 박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페이니가 사념을 보내왔다.
[ 나를 너로 확정지은 모양이야. ]
버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사념에 대한 대답이었지만 그게 묘하게 앞서 한 말과 이어졌기에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페이니는 피식 웃더니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자 펑퍼짐한 가슴이 테이블에 얹어지며 잠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귀찮게 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묻는 말이지.”
[ 생각만으로 전달할 수 있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봐. ]
그 말에 버트는 끙끙거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페이니는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 하고 싶은 거 말고…… 그보다 이상한 상상을 많이 하는 구나? ]
[ 엿보지 말아요……!? ]
[ 이거 봐, 잘 하네. 그리고 엿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자꾸 잡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
[ 으으…… ]
페이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 일어났다.
“그럼 대답은 다음에 듣는 걸로 하고…… 일단 움직이지. 폐하의 말씀도 있으니까 말이야.”
“아, 네……”
그렇게 페이니가 앞장섰고 그 뒤를 세 기사가 따랐다. 버트는 머뭇거리다 페이니의 옆을 따라갔다. 버트는 세 기사가 자기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걸 보고 뒤늦게 페이니의 의도를 깨달았다.
[ 혹시 제가 아니라 페이니를 의심하고 있는 거예요? ]
[ 맞아. 전령이 네 쪽이 아니라 우리 둘 사이를 두고 왕명을 전달했잖아? 그것 때문에 헷갈려하던데 지금 너랑 나 중 누가 더 귀족의 모습에 어울린다 생각해? ]
[ 아…… ]
페이니는 하얀 깃털로 끝이 마감된 검은 부채를 펼쳤다. 그렇게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니 영락없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속눈썹도 길고 선명한데다 은은하게 뜬 눈과 희미한 미소는 색기가 가득 했다. 그런 데다 부채질로 눈만 은근히 보이면서 그 밑의 얼굴을 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까지 흘려댔다.
[ 역시 페이니는 대단해요. ]
[ 후후…… 하지만 가능성은 그릇이 더 있다고 생각해. 일단 계속 따라와.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줄 테니까. ]
그렇게 두 사람이 한가로이 사념을 나누는 동안…… 대륙은 새로운 정세에 접어들었다.
*
“블랙 남작이었다고?”
“예……”
퀵스는 속속들이 들어오는 정보들을 받아들이며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의 통찰력으로 보았을 때 세 명의 기사를 대동한 페이니는 결코 블랙 남작이 아니었다. 애초에 블랙 남작은 이모탈인데 그녀는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래서 후보에 제외하고 형식 상 정보원을 보낸 것인데…… 판테스 왕가의 왕명이 뒤통수를 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퀵스의 머릿속에서 온갖 술수가 떠올랐다. 뮬러 7세의 연막작전이었나? 아니면 자신이 실수를 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시스템 오류인가?
짚이는 게 너무 많았지만 속단해서는 안 된다. 아직 벌들이 전부 모이지 않았다. 꿀이 만들어질 정도로 충분한 정보가 있단 게 아니란 뜻!
퀵스는 침착하게 보고를 올리는 사람을 물리고 상부에 보고를 위한 마법 메시지를 준비했다. 원래 간부 쯤 되면 이런 마법 문자는 기본적으로 지급됐다. 하지만 퀵스는 임시로 마법 단말기를 지급받았다.
‘그만큼 비싸고 만들기도 어려워. 하지만 보안성과 속도 절감은 확실하다.’
퀵스는 단말기로 보고를 올린 뒤 이를 뿌득 갈았다. 베타테스터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올드 유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도시의 담당자가 전부였다. 그런데 누군가는 마스터의 칭호를 달고 있고, 또 누군가는 마법사의 탑의 고위직…… 심지어 귀족의 작위까지 취득한 플레이어도 생겨나고 있었다.
설마 그 셋이 친구일 거라고 생각도 못한 퀵스는 열등감에 불타올랐다. 그저 하루 빨리 도시의 관리자가 되고 나아가 한 나라의 지부장이 되기를 염원했다.
*
블랙 남작의 행보에 귀를 기울이는 조직이 있는가하면 새로운 것에 집중하는 조직도 있었다.
바로 미래의 눈과 그림자를 쫓는 별! 이 두 조직은 벌떼와 달리 블랙 남작이 아니라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쫓는 별의 경우 이미 니스가 블랙 남작에 대해 완벽히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을 볼 여유가 있었다. 미래의 눈의 경우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전투가 줄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판테스 왕가의 왕명으로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전투가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상황! 이미 한 번 이벤트를 겪은 플레이어들은 듀크 사에서 주최한 연속 이벤트라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대륙의 정세가 한 곳에 집중되기란 어려웠다.
“어쩌면 이번에도 스펙업의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라.”
“듣자하니 지하의 미로에는 온갖 보화가 있다는데……”
“그것만 얻으면 현질이 필요 없겠지……!”
“칼라 해변은 서브 이벤트라는 말도 있어.”
“솔직히 얻은 게 별로 없잖아!”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운데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사단이 일어났다. 바로 미로 위에 설치된 수많은 탑 사이사이에서 정체불명의 괴수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생긴 것은 변종 박쥐처럼 생긴 ‘가고일’이었지만 그 크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족히 십 수 미터는 넘는 크기! 그런 것이 무려 스물……! 누군가는 드래곤의 재림이라고 떠들어댔지만 그건 판타지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의 소문일 뿐이었다. 그것이 그저 가고일이라고 판명한 이유는 생김새도 차이가 있었지만…… 진짜 드래곤은 이렇게 ‘작지 않았다’.
하여간 대형 가고일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난리였다.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옥의 파수견의 크기는 가고일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배가 되는 크기의 가고일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나타났으니 모두가 날카롭게 촉을 세웠다.
이때가 버트가 직접 왕명을 받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질 무렵에는 버트와 페이니가 왕궁에 들어서 있었다.
“……다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네.”
“그래?”
버트는 중얼거리다 알현실 앞에 섰다. 그러자 문지기가 창을 교차하며 그들을 막았다.
“신원을 밝혀라.”
이것은 일종에 의례였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의 신원은 왕성에 들어서자마자 알려지는 게 당연했다. 버트는 이런 방식이 처음이었기에 당황했다. 그때는 왕국의 보물이 돌아온 데다 압도적인 기세의 검은 기사의 모습이었으니 다이렉트로 알현실에 왔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페이니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희는 기다리거라.”
세 기사는 페이니의 말에 고개만 꾸벅 숙였다.
“허나 이 아이는 나의 호위 기사이니 함께 하겠다. 문제없겠지?”
“무장은 해제하셔야 합니다.”
페이니는 싱긋 웃으며 버트를 보았다. 그러자 버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건넸다.
그렇게 해서야 알현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그는 칙칙한 회색빛 머리칼과 염소수염을 달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왠지 모르게 깐깐한 느낌이 가득한 그의 모습에 버트는 일단 시선을 깔았다. 하지만 페이니는 당당하게 걸어들어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까딱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콧방귀만 뀌고 다시 앞을 보았다.
“잘 왔구나, 블랙 남작.”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페이니는 능숙하게 몸을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버트는 한 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페이니가 일어난 뒤에도 버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이미 사전에 얘기된 행동이었다. 페이니는 블랙 남작을, 버트는 그녀의 호위 기사 역할을 철저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버트로서는 왕의 앞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지금부터 그대들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고자 한다.”
뮬러 7세는 당연하단 듯이 넘어갔다. 덕분에 곁에 있던 남자는 그녀가 소문의 블랙 남작임을 확신했다.
‘이렇게 여려 보이는 자가 악몽의 성을……?’
악몽의 성은 플레이어들에게 악명은 자자했으나 정작 판타지아 주민들에게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오히려 성에 가기 직전의 윙던 숲이 더 유명했다. 하지만 아예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보여도 일단 시련의 땅 중 하나이다. 윙던 숲의 악명에 묻혔어도 무시무시한 곳이란 건 변함이 없었다. 그랬기에 버트가 악몽의 성을 클리어했단 소문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남자는 이전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왕명을 듣고 있었다.
“하여 그대들이 미리 루스타 동쪽에 있는 첸스터 산맥으로 이동 하거라. 그곳에는 키런 왕국과의 공동 요새가 있으니 주둔군이 있을 터. 군사 지원은 5백으로”
그때 마법사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의 등장을 꾸짖는 사람은 없었다. 왕이 말하는 도중에라도 난입해야 할 만큼 긴급하단 것이 표정에서부터 전해졌다. 마법사는 뮬러 7세의 앞에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큰일이옵니다 폐하……!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초대형 가고일이 나타났습니다……!”
“무어라……?”
대형 몬스터의 등장 소식에 뮬러 7세는 두 사람을 보았다.
“서두르거라.”
“네!”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그대로 물러났다. 뮬러 7세는 잠시 버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회의가 시작될 것이다. 그에 대해 어떤 이득을 취할지 생각해봐야했다.
*
“그대가 블랙 남작이로군.”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페멜로 백작 각하. 폐하의 앞인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최근 안 좋은 일도 있으신데 이렇게 함께해주시니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합니다.”
페이니는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페멜로 백작은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귀족의 뒷조사를 한 건가?’
백작위는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었다. 귀족에서도 서열이 갈리는데 백작부터는 작은 나라를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어지는 영토도 크고 사병도 상당수 키울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기사를 서임할 수 있단 점이었다. 준귀족에 해당하는 기사직을 입맛대로 배정할 수 있었으니 그 힘이 작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페멜로 백작은 이미 정계에서 밉보여 물러난 인물이었다. 이번 군사 파견에 그가 배정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미로로 원정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 경계일 뿐! 만에 하나 미로에서 빠져나온 강력한 몬스터가 덮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사병을 쓰거나 돈을 써서 목숨을 부지하는 게 아니라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살기 위해서 힘을 쓰면 약해진다. 어찌되든 이 파견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미로가 정복됐다는 가정 하에 그 공로를 논하게 되어도 발언권은 낮다.’
이런 곳에 떠밀려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페멜로 백작의 입지는 좁았다. 그만큼 정보의 우선도나 유명세, 전부 낮았다. 그런데 이 블랙 남작이란 여인은 자신을 한 번에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최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점까지 꼬집었다.
‘마냥 뒷조사가 아니다. 어쩌면 무시 못 할 수준의 정보력을 갖춘 것일지도 모른다.’
무려 최초의 이모탈 귀족이다. 보통 귀족들보다 숨겨진 힘이나 비장의 수가 많을 것이다.
“신경 써주어서 고맙군. 하나 지금 상황에선 불필요한 말일세.”
“죄송합니다. 귀족으로서의 예절을 아직 익히는 중이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알겠네.”
페이니는 정중하게 사과했고 백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방심하지 말아야겠군.’
‘제법 절제할 줄 아는 남자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파악하기 위해 기싸움을 벌였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버트와 세 명의 기사는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첸스터 산맥 근방에 세워진 요새 파틸카. 바로 그곳에서 드러커스의 미로 지상에 있는 최악의 전투마을 메일드로우를 경계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