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 솔란의 탑 上
* * *
“대체 어디 있다 온 거야? 한참 찾았잖아.”
“응…… 미안……”
“그런 일이 좀 있어서……”
라이는 버트와 니스를 보며 씩씩거렸다. 어째선지 두 사람 다 허리를 잡고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큰 신경은 쓰지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레이드 몬스터의 해체 및 연구에 관련해서 마탑으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너희도 같이 갈래?”
그 말에 니스가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거긴 약품 냄새가 나서 싫어. 게다가 마법사 샌님들과는 맞지도 않고……”
“샌님이라니! 어디까지나 학문과 술식에 집중하는 멋들어진 사람들이”
“버트는 어쩔 거야?”
“응?”
버트는 니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밤」 세트의 행방도 묘연해졌고…… 라피에 초원으로 돌아간 것도 리버를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 굳이 말하면 지금 그녀는 할 게 없었다. 목적을 잃은 것이 아니라 쉬어갈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까지고 야한 일만 할 수 없지 않은가.
…… ……
……물론 아예 안하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가도 괜찮을까……? 난 마법사도 아닌데…….”
“물론이지. 내 초대 손님이라고 하면 괜찮으니까. 가자.”
“한 번 가봐. 마법사의 탑은 한 번은 들러봐야 할 명소라고. 물론 대부분 출입 제한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말이지.”
니스까지 이렇게 말하니 버트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가볼까……?”
그렇게 버트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판테스 왕국의 이웃 나라 중 하나인 살리마 왕국. 그곳의 수도인 라트베아!
*
“후아!”
라이는 한숨을 쉬며 마법진 위를 걸어 나왔다. 버트는 지극히 평범한 모험가 차림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찰랑이던 붉은 머리도 질끈 묶으니 어느 정도 숙련된 모험가처럼 보였다. 그런데 버트의 뒤를 따라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면서 세 명의 기사들도 두고 온 것이었다. 그 이유는 복장을 바꾼 이유와도 겹쳤다.
바로 블랙 남작…… 실버트리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번 이벤트 레이드로 가장 유명해진 건 라이였지만 버트 역시 만만치 않게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언급되지 않았던 건 구체적인 인적 사항도 몰랐고 그 발자취도 희미해서였다. 그런데 첫 등장에서부터 인상적인 모습을 남긴 탓에 모두가 블랙 남작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다크나이츠는 용병 정도로 넘겼겠지만 정보원들이 촉을 세우는 이때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버트는 그들을 블랙스타의 성지가 있는 판테스 왕국의 도시 발르틴에 두고 왔다. 당연히 엘도트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니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한 명이라도 데려가라는 것을 뜯어말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페이니는 세 기사들과 남겠다고 했으니 실질적으로 다시 루하다와 둘만 남게 되었다.
‘간만이네.’
[ 그렇군요. ]
버트는 방긋 웃으며 앞서가는 라이를 따라갔다. 라이는 라트베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흘려들은 게 많았지만 살리마 왕국은 판타지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고 이 나라에서 마법사의 탑은 국력 외의 집단이라고 했다. 자세한 이유는 듣지 않았지만 큰 나라에서 악용할 우려가 있다나 뭐라나……
“자, 저기가 바로 마법사의 탑…… 다른 말로는 ‘귀르디의 의지’, ‘귀르디의 탑’이라고도 하지.”
라이가 가리킨 곳에는 주변 건물들이 자그맣게 느껴질 정도로 높이 뻗은 탑이 있었다. 버트가 감탄하며 눈을 떼지 못하자 라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흠흠! 이제야 내 진가를 아는 군! 참고로 마탑은 총 120층이고, 높은 층으로 가려면 그만한 자격이 주어져야 하는데”
라이는 언제나 그렇듯 설명을 시작하자마자 무시당했다. 버트는 가만히 탑을 바라보다 루하다에게 물었다.
‘저기에는 루하다의 친구가 없을까?’
[ 없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군요. 지하에 생각 외의 것들이 가득한데…… ]
‘지하?’
버트가 되물었지만 루하다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버트는 그를 다시 한 번 불렀다.
‘루하다?’
[ 죄송합니다. 누군가 제게 연락을…… ]
‘무슨 일인데?’
[ 그릇께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굳이 들으시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
그 말에 버트는 자신에게 걱정 끼치기 싫다는 걸 알았다.
‘가봐야 하는 거지?’
[ 아닙니다. 굳이 당신을 두고 갈 필요는…… ]
‘다녀와.’
[ 하지만 그릇이시여. ]
‘괜찮아. 어차피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
루하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버트가 왜 그러나 싶어서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니……
[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큰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
지하에 감금당해 모욕을 당했던 일…… 그건 버트에게 여전히 좋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리고 루하다가 없는 사이 벌어진 최초의 사고이기도 했다.
[ 똥개들의 능욕은 제가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그때는 아닙니다. 버트……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지만 그 힘을 능숙하게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하기 싫은 일은 떨쳐내야 하지만 모질지 못하시니…… ]
버트는 루하다의 걱정에 방긋 웃었다.
‘미안……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걱정하게 만들었네.’
[ 아닙니다. 그러니…… ]
‘그러니 더더욱 가야해. 루하다가 없어도 괜찮다는 걸 보여줘야지! 내가 강한 건 나도 이제 아니까 괜찮아!’
[ 음…… ]
‘나 믿지?’
…… …… ……
‘……생각하는 시간이 긴 거 같은데.’
[ 솔직히 조금…… ]
‘아아! 됐어!’
버트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루하다는 잠깐 가만히 있다가 버트에게 사정을 말해주었다.
‘퍼드롬 할아버지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블랙스타의 교주이자 버트와도 안면이 있는 노인. 분명 그도 제법 강하다고 알고 있었다. 게다가 블랙스타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발르틴에서 찾아온 신도들은 엄청 많았는데……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네.’
[ 그건 당신께 민폐 끼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거리에서 2천이 넘는 수의 신도를 만났습니다만…… ]
‘그렇게 많았어……?!’
[ 네. 그래서 일부러 저희 쪽에서 알은 체를 하거나 위험하다고 보지 않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
버트는 다시 한 번 블랙스타의 위상을 실감하며 말했다.
‘그보다 정말 큰일인 거 아냐? 퍼드롬 할아버지가 약한 것도 아니고 블랙스타가 작은 것도 아닌데……’
[ 아마 그런 위상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인 듯 합니다. ]
‘알았어. 그럼 다녀와.’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괜찮대도! 어서!’
[ 음. ]
루하다는 뜸을 들이다 서서히 사라졌다. 버트는 루하다가 간 것을 확인하고 잠시 적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버트도 이제 하면 한다는 걸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루하다와의 대화가 끝났을 즘에 라이도 설명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그런 귀르디의 뜻에 의거, 이런 탑이 세워졌다 이거야. 다만 그의 타락으로 인해 마탑의 폐쇄가 건의되기도 했지만”
“저기, 마법사들 아니야?”
버트는 라이의 말을 끊고 치렁치렁한 로브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어차피 저렇게 로브를 끌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건 하위 마법사들이나 하는 짓이야. 아마 이제 막 캐릭터를 생성한 플레이어겠지!”
“분명 몇 달 전만 해도 네가 그랬던 거 같은데……”
“어허! 과거는 잊어버려! 진정한 마법사는 아무 것도 없이 경지를 이루어내는 것! 그 증거로 날 봐! 얼마나 가벼운 모습이야?”
확실히 라이는 버트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장비가 단순해졌다. 지팡이는 온데 간 데 없고 로브 역시 환기가 잘 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고대의 귀족이 입을 법한 의복! 버트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라이를 보며 말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그야, 개구리는 올챙이가 될 일이 없으니 생각하지 않는 거지! 엣헴. 자, 일단 가볼까?”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당당하게 탑의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문지기가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멈추십…… 어? 라이벨 님?”
“안녕? 오늘도 고생하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내 친구. 같이 들어가려는데 괜찮지?”
“물론입니다.”
문지기는 옆으로 물러났고 두 사람은 쉽게 탑 안으로 들어갔다. 버트는 그저 문지기도 마법사라는 사실에 주목했지만 방금 그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 건지 몰랐다. 마법사의 탑은 경계가 심해서 외부인의 경우 잘 들여보내지 않았다. 들인다고 해도 몇 개월에 거친 조사 기간이 있고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도 감시하는 마법사가 붙는다. 물론 관람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런데 버트는 라이와 함께 어떤 제지도 없이 탑에 들어왔다. 그 뿐만 아니라 이거저거 물어보면서 구경하는 데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이 100층 이상을 방문할 수 있는 마법사의 특권! 플레이어 대부분이 50층은커녕 30층까지 갈 수도 없는데, 라이는 그 몇 배가 되는 110층까지 방문이 허락되었다. 탑의 주요 인사만이 방문할 수 있는 111층과는 1층 차이!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인데 차기 탑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례적이고 독보적! 외부인에다 이모탈이기까지 했던 라이의 벼락출세인 셈이었다. 물론 탑에 한정된 출세였지만 이것조차 이루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대부분이었다.
라이는 콧대를 높이며 주변을 구경시켜주었다. 어느 마법사가 마법 연습을 하는 모습이나, 새로 만들어지는 마법 물품의 테스트, 지금까지 마법사들의 업적 등……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군침 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버트는 하품을 하며 그의 말을 대충 넘겼다. 지금 그녀가 관심을 갖는 건 마법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라이는 이 부분에 대해서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버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법에 대해선 얘기해주지 않는 거야?”
“어?”
라이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혹시 물어선 곤란한 질문이었나 싶었는데……
“못 알아들을 게 뻔하잖아.”
“엥……”
“기초적인 마법 술식도 못하는데 더 어려운 걸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냔 거지. 너 사칙연산은 할 줄 아니?”
“뭐?! 이게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원주율도 알거든?!”
라이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발끈하는 버트에게 물었다.
“오오. 그래? 원주율이 뭔데?”
“3.14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냔 거지.”
“파이?”
“……하여간 이런저런 설명을 해봐야 귀찮아지거든. 듣는 사람도 피곤하고. 그러니 안 알려주는 거야. 니스한테도 마법에 대해서는 얘기 안했어.”
“뭔가 내 말을 피한 거 같은데.”
“착각이야.”
라이는 그렇게 말하며 탑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상시에 경우 이곳에서 몇 년은 상주할 수 있다는 둥, 전투용 골렘이 배치되어 있다는 둥, 보존식이 생각보다 맛있다는 둥, 버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얘기만 계속 했다.
분명 판타지아란 게임 자체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라이는 설명을 재미없게 하는 재주가 있었기에 집중해서 들어봐야 그녀만 피곤해졌다. 만일 승강기가 아닌 계단으로 이동했다면 버트는 진즉 로그아웃을 했을지도 몰랐다.
“투 머치 토커……”
“응? 방금 뭐라고”
“혹시 비밀 연구같은 건 없어? 막 전설의 괴물을 해부한다거나……”
버트는 루하다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지금 그들이 다니고 있는 건 ‘지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버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되지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없을 리가.”
“응?”
“있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승강기도 그 연구의 산물이거든. 근데 보기 안 좋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이는 곰곰이 생각하다 근처 의자에 앉았다. 버트는 뭘 하나 싶어 바라보다가 얌전히 라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라이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서 니스한테 물어봤는데, 보여줘도 상관없을 거라네.”
“응? 로그아웃 했던 거야?”
“아니. 너를 거기로 데려갈지 말지 니스와 상의했지. 겸사겸사 그쪽 사람들에게 양해도 구하고……”
“엉? 니스가 근처에 있어?”
“아니. 걔는 ‘그별’ 일 때문에 다른 나라에 가있어.”
“뭐?”
플레이어 전용 귓속말 아이템인 바다하피의 깃털. 그건 분명 특정 지역 내에 있지 않으면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 가있으면 결코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판타지아가 플레이어와 게임 사이에서 타협한 거리감이었다. 그런데 라이는 멀쩡하게 다른 곳에 있을 니스와 귓속말을 한 것이다.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라이는 묘한 표정으로 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가도 괜찮을 거 같다더라. 거기서도 손님 한 명 정도는 와도 상관없다고 하니……”
“왜 말 돌려!? 내가 이해 못할 거 같아!?”
“그래서 안 갈 거야?”
“……가야지. 재밌을 거 같은데.”
“엄청 재밌지. 니스도 처음 보고 좋아했으니까.”
니스는 버트보다 게임을 깊숙하게 파헤칠 뿐 버트 못지않게 흥미에 휘둘리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버트는 니스가 인정한(?) 비밀 연구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럼 가자.”
라이가 버트와 함께 향한 곳은 1층이었다.
띵
1층에서 내려온 라이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창고에 들어서고 문까지 닫으니 두 사람이 딱 붙어야만 했다. 버트는 라이가 벽면을 몇 번 두드리는 걸 보았다. 그리고 빛이 잠깐 휘감나 싶더니 어느 새 지하 통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역시 신기해……”
“넌 텔레포트 할 때마다 촌스럽게 반응이 왜 그래? 이런 거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응? 이 나라로 온 거랑 여기로 온 거 해서…… 딱 두 번인데?”
“……진짜?”
“응. 나머지는 다 걸어 다녔어.”
“진짜배기였구나 너. 니스한테 얼핏 들었던 거 같았는데…… 너야말로 게임을 즐기는 유저다.”
“갑자기 웬 칭찬이래.”
“비꼬는 거야.”
“뭐?!”
라이는 통로 끝을 가리켰다.
“여기는 100층 이상 출입할 수 있는 마법사에게만 공개되는 장소야. 마법사의 탑 바로 아래에 있는 곳이지. 여기도 탑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깊어. 지상으로 세운다면 탑의 3분의 1정도의 높이일 거야.”
“그렇구나.”
“또, 또. 대충 흘려듣고 있지? 잘 들어. 여기는 아크메이지 귀르디에게 가려진 비운의 마법사를 기리기 위해서 만든 곳이야. 지상에서는 허락하지 않는 생체 실험이나 금기시되는 모든 것이 허락되지. 여기 덕분에 지상의 탑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굳이 비유하자면 탑은 나무, 이곳은 뿌리인 셈이지.”
버트는 뚱하니 통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나타난 유리 재질의 통로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입을 딱 벌렸다.
생체 실험. 그건 단순히 해부학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약물에 주입받아 발버둥치는 몬스터가 보였고,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뒤섞인 융합체도 있었다. 무엇보다 버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인간으로 보이는 실험체였다. 그들에게 칼이나 기괴한 도구를 쓰는 등 밖에서는 19금 딱지가 붙어도 상영되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런 버트에게 라이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더러운 짓을 한다고 말이 많아서 이곳의 통제는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이곳이 없으면 마법사의 탑이 존재하지 않는단 걸 알지. 그래서 이곳을 세운 그를 기리기 위해 ‘솔란의 탑’이라고도 불려. 혹은 ‘귀르디의 이면’이라고도 하지.”
*
“잔인해.”
버트는 팔의 절단면을 만지작거리는 마법사들을 보며 말했다. 라이는 한숨을 쉬더니 버트의 머리를 퉁 때렸다.
“아무리 비인간적인 실험도 있다지만 대부분 왕국이나 다른 나라의 승인을 거치고 있어. 실험체와 재료 공급도 마찬가지지. 녀석들은 마법사의 탑은 이곳에서 알아낸 기술을 은밀하게 거래하는 조건으로 이걸 묵과하고 있어. 애초에 이들 대부분은 돈 때문에 자원했거나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녀석들이야. 그러니 동정할 필요는 없어. 이건 게임이잖아?”
게임이라는 말에 버트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지금까지 겪어온 게임 속 사람들은 전부 현실과 같았다. 니스도 게임과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래서 게임 구매 전 계약서에 갖가지 정신 질환 문제에 대한 포기 각서를 쓰는 모양이었다. 물론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니스에게 얼핏 들어서 알고 있을 뿐…… 이용 약관을 자세히 읽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어쨌든 이 사실을 잊고 살았지만 잔혹한 실험 장면에 새삼 떠오르게 되었다. 라이는 버트의 표정을 보며 괜히 보여주었나 싶었다. 마법사의 탑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덤덤한 모습에 조바심만 내지 않았어도……
“……뭐, 어쩔 수 없지.”
“응?”
“이게 게임이라서 받아들이는 거지만…… 설사 게임이 아니었다고 해도 받아들일 거 같아. 확실히 어디에서든 일어날 법한 일이고 그나마 이상적인 방법이니……”
“이해해주니 고맙네.”
“그래서 저 뭉쳐진 건 뭐야? 혹시 잔혹한 병기를 만든다거나 그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물 결합 실험에 쓰고 있는 거야. 잘린 팔을 붙인다거나 그런 거. 마법이 만능은 아니니까.”
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의 뒤를 따랐다. 사실 버트의 기분은 그렇게 나아진 게 아니었다. 그저 라이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심정인지 눈치 챘을 뿐이었다. 라이 나름대로 버트를 위해준답시고 구경 시켜주는데 언제까지 시큰둥해서야 되겠는가!
버트의 배려 덕분에 라이는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그래서 묻지 않은 것도 이것저것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재미없는 라이의 설명이어도 이곳의 실험들은 대부분이 독특한 것이었다. 잔인한 것 외에도 식물을 말하게 하거나, 음식을 분열하거나, 전자동 기기 등 편리하고 재밌는 것도 많았다. 덕분에 버트는 이 비밀 연구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나나를 말하게 하는 건 아닌 거 같아.”
“어딜 가나 특이한 사람은 있으니까. 플레이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여기 토박이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라이라고 해도 플레이어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는 어렵구나?”
“아냐, 척 보면 알지.”
라이가 어딘가를 향해 턱짓했다. 그곳에서는 투명한 유리관에 기괴하게 생긴 벌레 2마리가 싸우는 걸 지켜보는 마법사가 있었다.
“저렇게 실험이랍시고 가끔 자기 욕구를 채우는 인간들이 있거든. 저건 예전에 끝난 실험인데 몇 번이고 결함을 찾아야 한다며 계속 하고 있어.”
“아하…… 그럼 저 사람도?”
버트가 가리킨 건 구슬에 여러 가지 색을 넣는 마법사였다. 라이는 그걸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사람도 기억 나. 예술과 마법은 일맥상통하다고 주장 했던가…… 저런 식으로 물질 내부를 염색하는 건 오래 전에 끝난 건데……”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람들을 훑어보며 어느 새 지하 20층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다양한 실험들을 구경했고 버트는 기왕 온 거 아래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라이에게 온 연락이 관광을 방해했다.
“미안. 아무래도 가봐야 될 거 같아. 급한 일이 생겨서……”
“급한 일?”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무슨 사단이 났나 봐. 알지? 3개 공략 불가 지역 중에 하나. 이제는 2대 공략 불가 지역인가…… 아무튼 가봐야겠어.”
“아쉽네. 좀 더 구경하고 싶었”
“그래?! 구경하고 싶었지? 너도 관심이 팍팍 생기지?”
라이는 버트의 말을 놓칠 새라 그녀의 목에 무언가를 걸어주었다. 버트는 얼빠진 얼굴로 목에 걸린 작은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내 손님이라는 인식표야. 그것만 있으면 지하 44층까지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 그래도 너무 방해하거나 하면 안 된다?”
“흠…… 알았어.”
“그럼 나 갈게! 사고치지 말고!”
“알았대도!”
라이는 당부에 당부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버트는 덩그러니 남겨져서는 이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당장 버트가 본 것만 해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게 많았다. 그랬기에 가장 호기심이 느껴지는 건 좀 더 아래층이었다. 라이에게 얼핏 들은 바로는 좀 더 아래쪽은 이렇게 개방되지 않고 개인 연구실이 주어진다고 했다.
‘거기를 구경해도 괜찮겠지.’
버트는 승강기에 올라 개인 연구실이 보일 때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 안가 도착한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복도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문뿐이었고 그것마저도 엄청나게 튼튼해보였다.
‘여기가?’
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복도를 걸었다. 문 앞에는 마법사의 초상화와 함께 아래쪽에 무슨 실험을 하는지 적혀 있었다. 어떤 문은 초상이 가려져 있었고, 또 어떤 문은 바닥까지 닿을 정도의 실험 기록이 있었다. 그 중 버트가 주의 깊게 살핀 건 ‘쾌락성 연구’였다.
“오오……”
버트는 눈을 반짝이며 실험 기록들을 살폈다. 하지만 아직 실험을 하기 직전인 건지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그래서 문 쪽을 기웃거렸지만 안쪽은 보이지도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트는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노크도 해보았지만 마찬가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버트는 갸웃거리다 인식표를 갖다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은 쉽게 열렸다.
달칵
안은 밝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 여자가 눈이 가려진 채 의자에 사지가 묶여 있었다. 척 보기에도 미인이란 느낌에 버트는 무심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퍽!
“어”
여인은 갑자기 속박을 풀고 버트에게 달려들었다.
*
찰각
잠시 후 문이 닫히고 버트가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에 걸어둔 인식표를 한 차례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녀가 들렀던 방 안에서는……
“뭐, 뭐야 이거!?”
‘진짜’ 버트가 당황한 얼굴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