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 칼라 해변 中
* * *
“레비아탄?”
“써펜트 아냐……?”
“뭘 감안해도 엄청 큰데…… 저 정도면 드래곤이라고!”
해변은 멀리서 다가오는 바다뱀 때문에 소란스러워졌다. 녀석이 이벤트 보스가 아닐까라는 추측과 함께 플레이어들이 장비를 챙겨 입었다. 하지만 판타지아의 이벤트 보스라기엔 바다뱀의 등장은 너무 초라했다. 본래 이곳에서의 이벤트는 ‘시련’이라 불릴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 정석이었다.
하나하나가 대륙을 떠들썩하게 하는 명성과 힘을 가졌고, 그들이 부리는 부하는 전부 엘리트 몬스터였다. 그렇게 힘든 만큼 보상은 확실했다. 그 예로 ‘악몽의 기사’ 레이드에서 골드로츠는 이모탈 중에 처음으로 귀족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고 ‘지옥 파수견’ 레이드에서는 귀신도끼가 엄청난 수준의 힘을 손에 넣었다.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대표! 그랬기에 바다뱀의 등장이 위압적이었지만, 대부분이 엘리트 몬스터라고 결론지었다. 녀석이…… 물을 뿜어내기 전까지!
푸화악!
플레이어 수 십이 물의 격류에 휩쓸렸다. 그 중에는 로그아웃 된 플레이어도 있었다. 이곳에 모인 전부가 명성을 떨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어느 길드에서 모셔가도 이상하지 않은 강자들! 그런데 단 한 방에 이런 처참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미친! 또 온다!”
“천혜 방벽!”
“안티 배리어!”
“빛이여……!”
주술, 마법, 신성 할 것 없이 방어 형태의 힘이 전개되었다. 몸이 무거운 대신 방어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은 방패를 앞세웠고 이도저도 아닌 이들은 그들 뒤에 숨거나 빠르게 몸을 피했다.
콰르르
바다뱀은 숨 한 번 들이키지 않고 물을 토해냈다. 다시 한 번 엄청난 분사에 모두가 얼이 빠졌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팽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그 화살은 황금빛 궤적을 그렸고 바다뱀의 얼굴을 때렸다.
콰앙!
도저히 화살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 그걸 쏘아낸 건 ‘황금궁사’였다. 활을 쓰는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클로즈베타 때부터 해온 그는 화살 한 발로 몬스터 서넛을 꿰뚫으며 유명해졌다.
그의 활약에 질 새라 엄청난 크기의 도끼를 든 남자가 달려갔다. 그는 ‘귀신도끼’로 근접 전투에 있어서 한 번씩은 언급되는 플레이어였다.
“츠하악!”
그는 꿋꿋하게 해변으로 달려가 바다뱀의 몸 근처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녀석의 몸을 노리고 도끼를 찍었다.
콰앙!
하지만 그의 공격은 헛방이었다. 바다뱀은 덩치에 맞지 않게 날렵하게 피했고 도끼는 애꿎은 땅만 때렸다.
파학!
순간 물과 흙이 솟구치면서 십 수 미터에 이르는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바다뱀의 기동성에 놀라기도 전에 귀신도끼의 힘에 다시 한 번 놀라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다뱀은 귀신도끼를 물어뜯기 위해 머리를 디밀고 있었다.
“안 돼!”
그때 다시 한 번 황금빛 궤적이 날아들었다. 귀신도끼는 바다뱀이 얼굴을 얻어맞은 틈을 타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황금궁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즈아아아!!”
“오!”
“보상은 무엇이냐!!”
“와아아아!!”
귀신도끼를 선두로 다른 근접 플레이어도 돌진했다. 그렇게 바다뱀이 모두와 싸우고 있을 때……
[저런 저급한 거랑 싸우려고 안간힘이야……? 진짜 대단하다.]
바다뱀의 등장으로 세 기사는 버트에게 돌아왔다. 페이니는 토라져서 버트의 몸에 들어가서는 잔뜩 불만을 늘어놓았고 루하다는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판타지아에서 처음으로 하는 이벤트예요! 초치지 말아요!’
버트는 웬일로 기죽지 않고 말했다. 페이니는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버트에게 이번 이벤트는 신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벤트 이상의 상황들이 있었지만 하나 같이 음란하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녀가 잊고 있었지만 이건 야겜이 아니라 엄연히 RPG였다. 그것도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한 최고의 RPG! 끽해야 검은 동굴이나 라피에 초원에서나 사냥을 했지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싸움조차 못했다.
그렇게 아쉬운 찰나 이번 이벤트는 버트에게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 기사는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나도……”
[지금은 안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응?”
루하다의 만류에 버트가 멈춰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보시면 압니다.]
루하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다뱀이 발광했다. 녀석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었고 금방이라도 죽을 듯 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첨벙
바다뱀의 곁에서 나타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또 다른 바다뱀들이었다. 그것도 어림잡아 스물이 넘는 수! 한 마리를 잡는 것도 오래 걸렸는데 그 이상이 나타나니 베테랑 플레이어들도 당혹감에 굳어버렸다.
쿠오오오!
그 모습을 보던 버트는 전율했다. 멀리서 구경하는 그녀에게도 전해지는 압박감! 그것은……
호승심을 부르는 기운이었다!
‘갈 거야!’
[물론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버트는 행여 세 기사가 다칠까봐 주의를 주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엘도트는 그녀가 달려가는 걸 말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 음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해변가로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그 경이적인 육체 능력에 이디아가 한 마디 했다.
“……걱정할 필요 없겠는데요.”
브론트는 한 술 더 떴다.
“돌아오시면 쉴 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겠군.”
그들의 태도에 엘도트도 자연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
타타타
버트가 눈 깜짝 할 사이에 해변가에 다다르자 바다뱀들의 압박감이 확 와닿았다.
히든 시스템 중 하나이자 널리 알려진 상태이상 압도. 그것의 하위호환이라 알려진 상태이상이었다. 하지만 버트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으로 힘이 떨어졌다 해도 그녀는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앗!”
버트는 예전 검은 동굴에서 입수했던 「단단한 묵철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해변에서부터 바다뱀 한 마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모두가 혼잡했기에 이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아마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지금 버트의 움직임은 웬만한 육체파 플레이어들을 뛰어넘었으니 말이다!
퍼엉!
검으로 벴다고는 믿기지 않는 폭음이 울렸다. 질기디 질긴 바다뱀의 비늘에 버트의 괴력이 만나서 이루어낸 하모니였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검은 그대로 분쇄되었다. 폭발하는 소리는 바다뱀이 얻어맞은 충격에 검이 터지는 소리가 섞인 것이었다.
크아아아!
바다뱀은 꾸물거리더니 그대로 몸통으로 버트를 후려쳤다. 버트는 날아갔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모래에 처박혔다.
“아구구……”
버트가 모래를 파헤치고 나오며 인상을 구겼다. 바다뱀의 반격이나 무기가 터졌다는 변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버트의 몸을 휘감는 반투명한 방어막과 그림자 때문이었다.
‘너무해.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습니다.]
[우리 그릇이 너무 무모해서 말이야. 아무리 너라도 방금 그거 맞았으면 큰일 났을 걸?]
버트는 모래를 털어내며 ‘주머니’에서 다른 검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바다뱀을 향해 달렸다. 물론 이번에도 검은 폭발했다. 그렇게 다시 바다뱀에게 반격을 당했고 새로운 검을 꺼냈다. 지금까지 ‘주머니’ 속에 쟁여둔 아이템은 끝도 없었다. 그나마 추리고 추려서 남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버트의 공격으로 산화되었다.
‘무기가 너무 약해……!’
버트가 발을 동동구르며 불평하자 루하다가 말했다.
[그림자를 쓰시는 게 어떨는지……?]
‘그건 안 돼! 치트잖아!’
[치트?]
‘비겁한 수라는 뜻이야. 아무튼 안 돼!’
[저……]
루하다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버트가 앞으로 내달렸다. 그러더니 악에 받쳐 주먹을 내질렀다.
퍼엉!
크엉!
검으로 때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였다. 실상 검 때문에 충격을 온전히 싣지 못했을 뿐이지 버트는 충분히 강했다. 그 증거로 바다뱀은 그 일격으로 몸이 꺾여서 바다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버트는 그 반동으로 다시 해변에 처박혔다.
“뭐야 저거?!”
“뭐지? 황금궁사가 쓰러뜨린 건가?”
“역시! 뭔가 있을 줄 알았어! 좆 되잖아!”
버트는 비교적 작았기에 괜찮았지만 훨씬 거대한 바다뱀이 쓰러지니 이목이 쏠렸다. 다행인 점은 버트가 힘 조절을 못해 뒤로 튕겨졌단 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모두가 그녀를 인식했을 것이다.
“아구구……”
[그릇의 몸은 그 어떤 생물보다 강합니다.]
‘그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튕겨질 줄 몰랐어……’
[헌데 어째서 그림자는 쓰지 않고 육체는 사용하시는지요?]
‘어? 그야…… 쓸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어째서인가요?]
‘말했잖아. 그림자는 비겁한 수고……’
버트는 말하다보니 어폐를 느꼈다. 니스에게 듣기로 자신의 스텟은 비정상적이었다. 그림자는 분명히 사기적이긴 하지만 지금의 몸보다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몸으로 밀어붙이는 짓은 서슴없이 하고 있던 걸까.
‘무엇보다 이건……’
버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가 손을 뒤덮더니 이내 건틀릿의 형상으로 변했다.
‘내가 직접 모은 거잖아……?’
이걸 모아서 육체의 힘이 강해진 건지, 아니면 마신의 씨앗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밤’ 세트야말로 버트가 정당하게 쌓아올린 힘이란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상하긴 했네.’
버트가 어색하게 웃더니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림자는 서서히 버트의 몸을 휘감았고 이내 거구의 검은 기사로 변했다.
‘기왕 쓰기로 했으니……!’
버트가 손을 내밀자 그림자로 빚어진 검이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온힘을 다해 해보자!’
버트는 전력으로 뛰었다. 처음 달려왔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힘차게 나아갔다. 그러더니 바다뱀 한 마리에게 날아가더니 몸통을 가로로 갈라버렸다.
*
한순간 모두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기사가 바다뱀을 양단하는 모습! 그건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저게……”
“저, 저…… 저……”
“뭔일이야 대체?”
플레이어 몇 명이 한눈 팔다 바다뱀에게 공격당해 죽었다. 그렇게 어이없게 접속이 끊긴 이들은 냅다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자신이 본 걸 풀어놓았다.
‘저 자가 바로……’
‘최초의 이모탈 귀족, 실버트리!’
정보직에 몸담고 있거나, 아니면 이름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녀에 대해 단번에 알아챘다. 거구의 검은 갑주, 엄청난 힘! 이것만으로 그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다가 나타난 걸 보면 이번 레이드가 그만큼 대박임이 분명했다.
크아아아!
바다뱀 셋이 격분하며 허공에 떠있는 버트에게 달려들었다. 버트는 세 방향에서 공격해오는 바다뱀을 보며 있는 힘껏 몸을 휘둘렀다.
퍽!
버트가 휘두른 검면에 바다뱀 하나가 그대로 바다에 처박혔다. 나머지 두 마리는 버트를 물어뜯는가했지만 어째선지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이건 검은 기사로 변할 때 크게 변신하는 버트의 습관 덕분이었다. 그러니 사지가 공격당해도 피할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바다뱀 두 마리가 헛방질을 하는 사이 버트는 바다에 첨벙 빠졌다.
‘이제 어떡하지?’
버트는 허우적거리며 바다뱀의 몸통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바다뱀들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들의 몸이 어느 한 곳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끝을 찾아가다, 바다뱀 하나가 집어삼키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칫……”
버트는 바다뱀의 입속에서 검 대신 창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창은 녀석의 입천장에 박혔다.
크아아!
바다뱀이 입을 벌리자 버트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 문득 버트는 녀석의 입안이 신경쓰였다.
‘뭐지……? 원래 저렇게 튜브처럼 생겼나……?’
그리고 버트가 해안에 안착하자마자 몇 플레이어가 다가와 알은 체를 했다.
“당신이 실버트리 맞지!?”
“젠장! 어떻게 귀족이 될 수 있는 거야? 알려줘!”
“방금 그건 어디서 얻은 템이야? 파밍 장소 좀……!”
버트는 그들을 바라보다 변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 묵직한 목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바다뱀 하나가 그들을 향해 내리찍고 있었다.
“우왁?!”
“도망쳐!”
모두가 흩어지고 있을 때 버트는 유유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바다뱀의 몸통박치기를 맨손으로 막아냈다. 그 모습을 본 플레이어들은 눈이 터져라 크게 떴다. 버트는 바다뱀에게 완전히 깔려버렸다.
“젠장! 가오 잡다가 저게 뭐야?!”
“개허무하네.”
그들이 보기엔 일격에 죽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래 바닥에 파묻혔을 뿐이다. 만일 버트가 서있는 땅이 단단했다면 바다뱀을 무리 없이 막아냈을 것이다. 버트는 민망해하며 모래에서 기어 나왔다.
‘창피해.’
[솔직히 고작 이런 녀석을 상대로 고전하는 게 우스운 일이지. 게다가 왜 다리만 상대하고 있는 거람.]
‘어?’
페이니의 말에 버트는 입을 삐죽였다.
‘스포일러 금지!! 거의 맞출 뻔했는데……!’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아! 정말……! 로망을 몰라!’
버트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달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공격대와 합류하여 바다뱀과의 전투에 임했다.
*
“아까 그 기세는 어디갔대.”
“필살기 그런 게 아니었을까?”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바다뱀과 사투를 벌였다. 분명 하나하나가 보스 몬스터에 필적하는 괴물이었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니 하나둘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도움이 된 건 검은 기사 버트였다. 처음 몇 마리를 죽이고 기세가 줄었지만, 그로 인해 사기는 충분히 높아졌다. 게다가 간간이 플레이어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인 덕분에 호평이 대부분이었다.
아닌 사람도 있었다. 기사 골드로츠를 선두로 그를 시기하는 눈빛도 있었다. 그들은 버트를 고깝게 보면서도 무슨 비밀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한편 공중에서 바다뱀을 견제하던 라이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생명 반응이 하나지?’
라이는 바다뱀들의 체력을 확인하기 위해 마법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체력 게이지가 90%를 넘기고 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좀 더 세세한 탐색을 시작했다. 그러자 확인된 건……
‘이런 미친’
라이는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
라이는 지금까지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았다. 공중을 날고 있는 지금도 그 흔한 공격 마법 하나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라이의 명성이 과하게 부풀려진 거라는 말까지 돌았다. 그런 와중에 난데없는 경고라니! 사람들은 그가 나머지 바다뱀을 노리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바다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떠오르기 전까지!
촤아악
바다에서 나타난 건 바다뱀보다 거대하고 둥근 무언가였다. 그것이 문어의 머리이며 바다뱀이 그 문어의 촉수란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이 경악했다. 게다가 기껏 쓰러뜨린 바다뱀이 재생하고 새로운 바다뱀이 추가로 나타나기까지 했다.
“이걸 잡으라고 만든 거냐!”
“운영자들 일 안하지!!”
“아오씨발!”
그때 라이에게서 빛이 뿜어졌다. 그가 마법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거대한 마법을 준비하기 위해!
사실 이것 역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바다뱀을 잡는 것으로 끝이 나고 다음 날로 사냥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이벤트가 아예 끝날 수도 있었다. 라이가 이런 판단을 한 건 니스와의 상의 때문이었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 가능성. 이대로 이번 싸움이 끝나면 다행이지만 아니게 된다면 피해가 막심해진다.
그리고 지금은 그 대비가 빛을 발휘했다!
지이이잉
“희망을 짓밟는 악몽을 밝혀, 떠오른 멸망을 가라앉히라…… 겨울이 흐르고 나면 빛과 봄바람이 돌아올 것이니. 허나 속지마라. 그것은 이기적인 들개의 안광이며 달을 삼킨 늑대의 숨결이다.”
라이의 손에 응집된 빛은 한 자루의 창이 되었다.
“심판을 가장한 연극을 부수어라. 그건 심장을 포식한 괴물일지니. 나약한 가지를 들어 괴물들을 꿰뚫어라. 그로써 멸망을 좇는 기형을 깨부숴라.”
라이가 창을 던졌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문어의 머리로 창이 날고 있었다. 그리고 창에 직격당한 문어는 그대로 짜부라졌다. 이윽고 터져나온 빛의 문양은 라이를 신성하게 비춰주었다.
“라그나로크.”
콰앙!!
*
라이의 마법으로 레이드 보스 ‘메두사’는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엄청난 바람이 플레이어들을 나뒹굴게 만들었고 파도가 넘실거리게 했다.
처음 나타난 검은 기사의 등장조차 묻혀버릴 강렬한 공격! 메두사의 등장에 당황했던 이들은 이번 마법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오아아아?!”
“지린다악!!”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구 제엔자앙~!!”
“스샷 찍은 사람?!”
네임드 플레이어조차 시선을 떼지 못할 임팩트! 하지만 라이는 그들의 환호에 정신 팔지 않았다.
“지금 공격해!”
그의 외침에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재생된 바다뱀들은 본체가 큰 충격을 받으니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그 틈을 타 근접형 플레이어는 메두사의 몸에 올라타 무기를 휘둘렀다. 원거리형 플레이어는 그들을 지원해주거나 급소를 노리며 공격했다.
“윽……! 엄청 질겨……!”
“이거 잡히기는 하는 거야?!”
“물저랑 방어가 미쳤잖아!”
그들 생각대로 메두사의 본체는 웬만한 물리 공격이나 마법 공격에도 먹히지 않았다. 그나마 라이의 마법 {라그나로크}의 특성 덕분에 어느 정도 공격을 할 수 있던 것이었다. 버트는 그들 틈에 끼어서 메두사의 몸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난동을 부렸다.
캬아아아!
크아아아!
바다뱀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라이였다!
“이런……!”
라이는 간신히 배리어를 만들었지만 물대포의 집중포화는 견디기 어려웠다. 하나하나가 위력적인 공격! 그리고 배리어가 깨지기 직전 엄청난 빛과 함께 흐릿한 방패가 생겨났다.
“이건……”
~방금과 같은 마법, 또 쓸 수 있어?
바다하피의 깃털을 통한 귓속말. 그 말을 들은 라이는 멀지 않은 곳의 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네임드 중 하나로 지금까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축복을 거느라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가 최고의 공격수란 걸 안 이상 그를 보호해야겠다고 나선 것이다.
“3분!”
라이는 그렇게 외치더니 눈을 감고 주문 영창을 시작했다. 본래 마법은 다양한 계산이 뒷받침한다. 주문 영창은 오히려 그런 계산을 방해하는 행위였다. 물론 아예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미리 계산해둔 마법 술식을 영창으로 풀어놓는다면 계산을 생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은 정말 큰 마법이 아닌 이상 비효율적이었다. 그랬기에 주문을 외운다는 건 둘 중 하나.
마법에 생초보이거나……
말도 못할 정도로 괴랄한 마법을 준비하거나.
라이는 네임드 플레이어에게 방어를 맡기고 주문에 전념했다. 바다뱀은 끝없이 물대포를 쏘아댔지만 그녀의 가호를 뚫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처럼 다른 플레이어들도 활약에 나섰다.
“츠하앗!”
귀신도끼가 바다뱀 하나를 때렸다. 그러자 그 녀석이 귀신도끼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틈에 황금궁사가 세 마리의 바다뱀을 때려 성질을 긁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기사 골드로츠나 암살자 퀵스, 방패병 돌무더기 등의 네임드가 바다뱀을 툭툭 건드렸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메두사의 본체를 때려댔다.
크르!
그들의 공격은 하찮았다. 지금 주의해야 할 건 비행하는 마법사뿐!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들의 공격에 메두사는 천천히 상처입고 있었다.
메두사는 생각했다.
큰 공격을 벌이는 한 녀석을 먼저 처치하느냐 아니면 자잘한 공격을 해대는 여럿을 먼저 처치하느냐. 둘 다 시간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한 녀석을 노리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메두사는 표적을 바꾸었다. 잔챙이들부터 제거한다! 메두사가 촉수를 놀려 다른 플레이어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됐어! 어그로 끌렸어!”
“근데 방금 그게 {신성 방벽}이야? 기본 스킬이 저렇게 셌던가……?”
“으익! 피해!”
그렇게 아래쪽에서 난리가 일어나는 동안 라이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죽음을 좀먹고 방황하는 망령들이여…… 아픔을 갈취하는 시체들이여…… 저주를 흩뿌리는 기괴한 마녀들이여…… 미쳐버린 신아으이 광신도들이여…… 그 무엇보다 어둡고, 그 무엇보다 깊으며, 그 무엇보다 기괴하고, 그 무엇보다 짙은 광기를 맞이하라……”
라이는 본래 영창으로 변화해둔 계산은 물론, 다른 마법 술식의 계산까지 동시에 이루고 있었다. 소위 말해 멀티태스킹이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보통 마법사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시도하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는 그걸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3분 동안 주변의 그 무엇도 인식하지 않고 마법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그 동안 수많은 네임드 플레이어가 그를 지켰다. 그 중 몇 명은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탈진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라이의 두 눈이 떠졌다. 검게 변한 그의 두 눈은 메두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라앉아라……”
메두사의 머리 위로 검은 구체가 떨어졌다. 그건 메두사의 덩치보다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훨씬 거대했다. 추락하기 직전 검은 구체의 안쪽이 보였다. 그 안에는 도시가 있었다. 그리고 밤하늘처럼 별이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건 그야말로…… 추락하는 도시였다.
“르뤼에.”
*
메두사의 레이드는 끝났다. 아직 보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모두가 메두사의 시신을 해체하며 추가적인 보상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라이의 이슈였다. 판타지아 공식 카페에서는 그가 쓴 마법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아크메이지 귀르디가 쓰던 {라그나로크}, 블랙매지션 구느하르의 장기 마법 {르뤼에}. 이 두 가지로 라이는 단숨에 네임드 중에서도 으뜸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그와 친분을 나누기 위해 접촉을 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라이는 어떻게든 그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륙 3대 정보 조직까지 가세하니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게 메두사를 해체하는 무리와 라이를 쫓는 무리 외의 나머지는 해수욕을 즐겼다. 가상현실이라지만 피서를 떠나기엔 돈과 시간이 부족한 그들에게는 참으로 아까운 장소였다. 그랬기에 이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버트와 니스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말로……?”
버트가 받은 건 니스의 귓속말이었다. 그녀가 한 말은 짧지만 굵은 말이었다.
~저기 근처에 안 보이는 동굴이 있던데.
그 한 마디로 버트는 오만가지 상상을 했다. 그리고 니스가 눈웃음치며 배꼽을 꾹 누르는 순간 그것이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머, 어머. 둘이서 무슨 짓을 하려고……?]
그때 페이니가 그녀의 심상에서 장난스레 말했다. 버트는 화들짝 놀라더니 엘도트와의 시간을 마련해줄테니 빨리 가버리라 말했다. 페이니는 좋다고 실체화해서는 엘도트의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보던 브론트와 이디아는 버트를 쳐다보았다.
“자, 잠깐 놀다 올게요……?”
버트가 그렇게 말하며 니스가 알려준 장소로 후다닥 달아났다. 니스는 킥킥 웃으며 바다하피의 깃털을 만지작거리다 그걸 ‘주머니’에 던져 넣었다.
“나도 놀다 올 테니 여기 지키고 있어.”
“너무 하는구료. 약혼자를 따돌리다니……”
“아무튼 그냥 있으라니까!”
니스는 으름장을 놓고 버트가 향한 절벽가로 달려갔다. 휴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났다.
“정말 못 말리는 아내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