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8 칼라 해변 上
* * *
“으음……”
입을 우물거리던 버트는 뺨에 닿는 복슬복슬한 털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 수군수군 들리는 말소리에 서서히 눈을 떴다.
“그건 고맙지만 사양하지. 나까지 그릇과 함께 한다면 안 그래도 힘없는 동포들이 위험해진다.”
이건 슈트의 목소리였고……
「아쉽군. 그렇게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건 루하다의 목소리……
“나흘 내내 떡치던 똥강아지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이건 페이니의 목소……
“나흘이요?!”
버트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녀를 등에 태우고 잠시 쉬고 있던 늑대가 화들짝 놀라 귀를 세웠다. 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던 슈트, 페이니, 루하다 셋은 버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군 그릇. 욕망에 취하는 바람에 너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다.”
「약재로 체력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진즉 실신하셨겠지.」
“얼마나 좋았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거야. 어땠어. 개자지 맛은 좋았니?”
버트는 시뻘개져서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혹시 다른 연락은 없었나요……?”
“없었어. 끽해야 초원에 온 이모탈들이 전부였지. 대부분 늑대들을 피해서 달아났지만.”
“늑대가 아니라 라이칸슬로프다.”
“……약해빠진 것들이.”
“크릉……”
페이니와 슈트가 대치할 때 버트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제 마기를 나눠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릇께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
버트는 페이니의 허벅지에 누워있었다. 루하다는 버트의 배에 손을 얹고 한 손에서 검은 경단을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마기의 결정체로 늑대들에게 먹일 것이라고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리아주크의 씨앗을 일부 뜯어내 더 작은 씨앗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페이니가 버트를 안정시키고 루하다가 그녀의 몸에서 마기를 추출하는 식으로 분담하고 있었다.
신의 힘을 뽑아내서 정제하는 일이었기에 하나를 만드는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나……”
「불편하시다면 당장 그만두셔도 됩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이대로 있을게. 그냥 심심해서 물어봤어.”
「네.」
페이니는 눈웃음치며 내려다보았다.
“야한 거 해줄까?”
“네? 그게 가능하…… 아, 아니 굳이 지금 하실 필요는……”
“그럼 야한 기분만 들게 해줄게.”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버트의 가슴을 주물렀다. 물론 그냥 주무르는 게 아니었다. 피부를 자극하려는 것처럼 손가락 끝으로 감질나게 쓸어대거나 손의 체온을 전해주었다. 버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에 두른 갑옷을 열었다. 하지만 페이니는 피부 외의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았다. 자연히 몸이 달아올랐고 버트는 애가 탔다.
“어때…… 이런 은근한 것도 좋지?”
“우웅…… 네……”
언제나 직접적인 자극에 익숙해졌던 버트였기에 페이니의 손길이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5분 정도 지나자 온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처음 받아보는 마사지란……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페이니말고 다른 사람은 얼마나 있나요?”
“응?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루하다나 슈트와 같은……”
버트는 차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얼버무렸다. 페이니는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아채고 말했다.
“난 ‘리아주크의 뜻을 헤아리는 자’로서 나이트피어 일족을 대표해. 말하자면 책략가와도 같은 위치지.”
페이니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아있는 슈트를 쳐다보았다. 슈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는 ‘리아주크의 형상을 비추는 자’다. 지금은 임시로 라이칸슬로프 일족을 대표하지. 우리의 위치는 그를 찬양하고 신봉하는 역할이다.”
「전 ‘리아주크의 발걸음을 쫓는 자’입니다. 지금은 멸족한 둠워퍼 일족을 대표하지요. 저는 시종과도 같은 위치입니다.」
각자에 대한 입장을 들으니 그들의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특히 루하다가 시종이었다는 말에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잘 보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크나이트…… 라고도 있었지?”
페이니가 버트의 기사들을 바꾸어 놓으며 했던 말이었다. 페이니는 그것 역시 설명해주었다.
“다크나이트는 ‘리아주크의 의지를 수호하는 자’로서 무력을 대표해. 군사력이라고 보면 되지. 원래 마성자라고 불리는 녀석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조금 변질됐더라. 뭐, 질이 낮은 대신 수가 많으니 괜찮겠지.”
만일 누군가 페이니의 말을 들으면 까무러칠 것이다. 다름 아닌 교단 블랙스타의 마성자들이 질이 낮다니! 그들 중 가장 약한 마성자도 웬만한 기사들을 압도하는 힘을 가졌다. 수까지 엄청난데 장점이 고작 물량이라니! 하지만 버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은 이 세상의 정세도 모르거니와 지금은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서였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나요?”
“음…… 어디 보자. 엘슈어드는 리어페어리 일족을 대표, ‘리아주크의 미래를 축복하는 자’고…… 남은 건 둘이네. 엠파이어 일족과 웰프 일족.”
버트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럼 그 둘은 어떤가요?”
“……음, 안 듣는 게 좋을 텐데.”
그 말에 버트가 슈트를 바라보았다. 슈트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 루하다를 쳐다보니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엠파이어 일족을 대표하는 녀석은 셀기디어 헬디스란 놈입니다. 녀석은 ‘리아주크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로서,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하죠. 다만…… 조금 오만합니다.」
“조금? 쥐새끼들이 감투 쓴다고 더러운 병을 옮기던 게 달라지지 않지. 그것들은 자기들의 분수를 넘어서서 행동하고 있어.”
슈트는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다. 그래서 버트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으며 토닥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손바닥 육구를 만졌다.
“알았어. 그럼 마지막 사람은?”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응?”
「죄송합니다. 다만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말해줄 수 있습니다. 웰프 일족의 대표는 ‘리아주크의 행적을 기록하는 자’로, 일대기를 남기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말해줄 수 없는 거야……?”
「그건 나머지 추종자들이 건 암묵적인 룰입니다. 이것만큼은 방금 말한 셀기디어도 지키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기억하지만 잊은 척, 설명할 수 있지만 못하는 척. 그래야만 해. 그래야 녀석도 부담 없이 객관적으로 쓸 수 있지.”
버트는 더 이상 그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니 페이니의 손길에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시 초원에서의 일상이 지나갔다.
*
방학이 시작되면서 은송은 하루 종일 판타지아를 잡았다. 다행히 부모님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라며 판타지아를 하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해주었다. 다만 은송의 아빠는 종종 밖으로 다니는 걸 좋아했기에 약간 아쉬운 눈치를 보였다.
“하아……”
은송이 개운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빗었다. 이렇게 종종 로그아웃하여 현실의 일상도 챙기고는 있지만 점점 괴리감이 들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늦게 접속했다. 게다가 지금은 버트의 몸에서 마기를 추출하고 있었기에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빗던 은송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을 살짝 비춰보니 은은히 붉은기가 돌고 있었다.
‘뭐지……?’
화장과 피부 관리를 위해서 종종 거울을 보았다. 하루에 한 번은 로그아웃을 해서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씻고 난 뒤에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머리카락이 눈에 밟혔다. 그래서 그 부분을 손으로 집으려던 순간……
삐링
은송은 핸드폰을 들었다. 판타지아에 접속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전화보다는 문자를 위주로 한 연락이 많았다. 지금 이것도 세영이 은송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세영:개쩌는 정보 알려줄게 이따 저녁에 문자해!!
은송은 갸웃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은송:뭔데 그래?
세영:뭐얔ㅋㅋㅋ 들어와 있었넹ㅋㅋ
은송:ㅋㅋㅋㅋ 뭐 하루 종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이벤트?
세영:안알랴쥼
시간 날 때 칼라 해변으로 오면 알려줄게.
기다리고 있겠음 ^^7
은송:ㅊㅅㅊㅅ^^7
실없는 문자 주고받기가 끝나고 은송은 잠시 멍때렸다.
“뭐하려 했더라.”
별 거 아니니 잊었겠지. 그 생각을 하며 머리를 마저 빗고 가벼운 스트레칭 후에 판타지아로 접속했다.
접속해서 눈을 떠보니 어느 새 슈트의 옆구리에 몸을 묻고 있었다. 잠깐 쉬는 사이 추출이 끝난 모양이었다. 버트는 곧장 일어나지 않고 슈트의 따스한 옆구리에 비비적거리며 늑장을 부렸다. 10분 내리 그러고 있으니 참다못한 슈트가 꼬리로 버트의 얼굴을 덮으며 말했다.
“웅약”
“일어났으면 저쪽으로 가봐라. 널 만나러 온 손님이 있다.”
“날?”
슈트가 말한 곳으로 가니 평범한 복색의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신입니다.”
그는 버트에게 편지를 주고 곧장 가버렸다. 편지를 꺼내 읽어보니 이번 이벤트 장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물론 이건 듀크 사에서 정식으로 공지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림자를 쫓는 별에서 곳곳에서 퍼진 소문을 조합하여 도출해낸 결과였다. 편지 맨 끝에는 그 장소로 인도해주는 마크가 있었다. 그걸 활성화시키니 버트의 눈에 보이는 지도에 ‘칼라 해변’이 표기됐다.
‘오오……’
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다 뒤따라온 슈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방방 뛰놀고 있는 리버를 보았다. 그런 리버와 놀고 있는 늑대들 중 두 발로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었다. 버트에게서 분리한 종자를 섭취하면서 나타난 변화 중 하나였다. 그 변화에 슈트는 얼마 안가 라이칸슬로프가 힘을 찾을 것이라며 희망적인 말도 했다.
“아쉬워……”
“말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머물 수도 없지 않나.”
“그렇지……?”
버트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 눈으로 슈트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무사해야 해?”
“물론이다.”
그렇게 버트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그 곳을 떠나갔다.
다음 목적지는 이벤트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 칼라 해변이었다.
*
“칼라 해변은 판테스 왕국 최고의 휴양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근처에 위험한 것은 많지만 왕국에서 엄격히 관리하고 있죠.”
이디아의 설명에 버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이 대륙 전도는 판테스 왕국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지형까지 보여주었다. 게다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어서 어디가 위험한 지역인지 잘 표기되어 있었다.
‘칼라 해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샤만의 해저…… 여기가 3대 공략불가 지역 중 하나랬지……? 여기서 좀 더 가면 위니아 평원…… 여긴 인기 사냥터였다가 최근 외면 받는 곳이랬고…… 조금 더 가면 첸스터 산맥…… 여기서는 국경을 넘어가는 곳이니 주의하라 했고……’
버트는 혹시 몰라서 지도를 꼼꼼하게 읽었다. 세 기사는 그녀가 집중하는 듯하자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맞다!!”
버트는 지도를 읽다 말고 소리쳤다. 잠깐 생각에 잠겨있던 엘도트를 빼고 나머지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그러십니까?”
“대체 무슨……”
“수영복 준비해놨대요!”
“수영복……?”
버트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렴 바다인데 그런 갑옷 차림으로 계시게요?”
세 기사는 그녀의 지적에 고개를 숙여 자신들의 차림을 보았다. 버트는 손뼉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 가족이라 여행갈 때 빼고는 바다 같은 데 갈 기회가 없어서…… 헤헤…… 왠지 좋네요. 게임에서 휴양이라니.”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엘도트의 덤덤한 말에 버트가 뭔가 생각났단 듯이 말했다.
“거기 가서 주군이라고 부르시면 안돼요. 꼭 이름으로 불러주셔야 해요.”
“무슨 이유라도……”
“일단은 저도 귀족이잖아요. 하지만 플레…… 이모탈 중에는 귀족이 없었죠? 제가 귀족이란 걸 알게 되면 뒤를 캐고 다닐 거예요. 그러니 버트라고 불러주시고, 말도 편하게 해주세요. 의심받지 않게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야지. 알았어, 버트.”
이디아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엘도트가 잠시 노려보았다가 한숨 쉬며 말했다.
“대신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일 겁니다. 알겠지, 버트?”
엘도트의 중후한 목소리에 버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브론트는 둘이 말하는 걸 보고 헛기침 하며 말했다.
“버, 버트……”
“……브론트는 뭔가 어색하네요.”
“……죄송합니다.”
“아, 존댓말! 하면 안된다니까요!”
“……미안합”
“또!”
*
칼라 해변. 이곳에는 이벤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모탈이 한가득이었다. 도시나 다른 곳에는 섞여있어서 몰랐지만 대부분이 미남미녀거나 특색이 있게 생겼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네임드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이 힘스텟 최고치 경신한 ‘귀신도끼’지? 어깨 벌어진 거봐.”
“맞아. 어, 저기…… 저 사람. 골드로츠 아냐?”
“따지고 보면 최초의 귀족은 골드로츠인데…… 기사 직위라서 좀 애매하긴 했어.”
“잠깐, 저 사람은 ‘올 클래스 매지션’ 아냐?”
“정말? 라이벨이라고?”
“황금 궁사도 있는데!”
모두가 수군거리는 사이 한 무리의 사람이 해변에 도달했다.
“와아……!”
버트는 붉은 장발을 둥글게 말아 목 뒤쪽에 놓았다. 그리고 밀짚모자를 쓰고 바다를 만끽하고 있었다.
끝에서 끝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넓은 해변! 모래와 바다는 깨끗했고, 곳곳에 절벽이나 암초의 경치도 대단했다. 게다가 해변을 메운 인파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뿐이었다.
“다들 예쁘네요.”
“버트가 훨씬 예쁜데 뭘.”
이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버트의 옆에 섰다. 그녀의 곁에 있는 세 기사 역시 이곳에 있는 이모탈 못지않았다. 우선 이디아는 잔근육이 슬쩍슬쩍 보이게끔 하와이안 셔츠만 걸치고 속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 옆의 브론트는 빵빵한 근육과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엘도트는 이디아와 브론트의 중간 정도 되는 체격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의 얼굴이었다. 셋은 눈에 확 띄는 미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생기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특색이 강한 미남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한데. 우리는 반말을 하고, 너는 계속 존댓말이라니……”
“저쪽 세계에서는 이게 예의에요. 계급이 아니라 나이가 우선시 된다고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렇게 나아가려던 순간 버트의 옆에서 새로운 사람이 솟아났다.
“이건 벗고 가야지!”
“꺄악?!”
페이니는 지나가는 모두가 쳐다볼 정도로 아찔한 차림이었다. 그 풍만한 몸매에 마이크로 비키니를 입어서였다! 하지만 페이니만이 아니라 버트에게도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가 두르고 있던 겉옷을 벗겨내자 페이니 못지않게 폭력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볼륨은 최대로, 라인은 매끄럽게! 그야말로 미인상을 대표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봐도 좋았다. 여기에 가슴과 엉덩이 밑살이 은근하게 드러난 검은 비키니! 눈이 한 번씩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뭐예요……?! 주세요……!”
“기껏 이런 걸 선물 받아놓고 뭐하는 짓이람! 자, 모두에게 보여주라고! 아니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에요……!”
버트가 페이니에게서 겉옷을 뺏으려고 다가갔다. 하지만 키는 페이니가 훨씬 컸기에 그녀가 머리 높이 겉옷을 들자 버트는 몸을 딱 붙여서 손을 뻗어야 했다. 그러는 바람에 서로의 가슴이 뭉클 눌렸고 팽팽하던 수영복 어깨끈이 살짝 늘어졌다. 두 여인의 캣파이트에 행인들은 물론 세 기사들조차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중간에 니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싸움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나 참, 그렇게 시선을 끌고 싶었어?”
니스는 보라색 모노키니를 입고 있었다. 몸매가 눈에 확 띌 정도로 풍만한 건 아니지만, 체구에 맞게 슬림한 몸은 ‘예쁘다’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게 아니라 페이니가……”
“걱정 마. 너보다 더 대담한 차림을 한 사람도 있는 걸. 잠깐 보고 말 거란 소리지.”
니스가 그렇게 말하며 버트의 팔짱을 꼈다. 페이니는 히죽 웃으며 겉옷을 집어던지고 반대쪽 팔을 끌어안았다.
“자, 갈까?”
“이러니까 우리 그릇, 돈 많은 귀족님 같네~”
버트는 두 사람과 팔짱을 끼고 해변으로 나섰다. 해변의 반 이상은 돗자리였다. 아무리 해변이 넓다지만 판타지아를 플레이하는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니스는 명당이라 할 만한 가운데 자리에 파라솔과 돗자리 전부 깔아놓았다. 이곳에 영역을 설정해놓았기에 다른 이모탈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다.
“여기 선점하느라 고생 좀 했지~”
“우리 니스 힘 좀 썼네?”
“아무렴 북적대는 휴양지에서 사람들 틈에 낑길 수는 없잖아?”
페이니는 생글 웃으며 돗자리 하나에 엎드렸다. 그러더니 비키니 끈을 풀고 다리를 흔들거리며 유혹하듯 말했다.
“선크림 발라줄 사람……?”
그녀의 은근한 눈빛에 세 기사는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버트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엘도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엘도트가 도와주세요.”
“제…… 내가?”
“네.”
엘도트는 얼떨결에 지목 당했어도 버트의 명령이라 인식했는지 별말 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두 사람이 의아해하며 버트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이분들도 꽤 참하네. 버트가 군침 흘릴만 해.”
“무슨 소리야……?!”
니스가 음흉하게 웃었고 브론트는 멋쩍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디아는 오히려 니스도 제법 귀여운 스타일이라며 받아쳤다. 그렇게 그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드는 동안 저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소란의 주범이 라이란 걸 알게 된 버트는 갸우뚱거리며 니스에게 물었다.
“라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네?”
“물론이지. 마법 계통의 직업에 있어서 라이는 이단아라 할 수 있어. 지금 라이가 못하는 마법이 없을 걸?”
“진짜?”
“보여준 게 반도 안 되는데 저 난리라니까.”
라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간신히 버트 일행에게 도달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아쉬워하며 라이를 보면서도 함부로 진입하지 않았다. 이만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건 나머지 사람도 상당한 수준일 것이 분명했다. 괜히 함부로 굴었다가 그들에게 찍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한 명만 빼고.
“안녕하시오. 본인은 키런 왕국의 기사, 골드로츠라고 하오.”
특유의 오만한 말투. 그건 준귀족으로서 당연한 행태였다. 게임이지만 판타지아는 현실감이 있었고, 그만큼 몰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몇 사람들을 빼고 그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버트라고 해요.”
“니스.”
“어…… 라이벨이라고 해요.”
골드로츠는 특유의 빛나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혹시 합석해도 되겠소? 본인도 자리를 맡아놓기는 했지만, 많이 적적해서 말이오.”
버트가 어물쩍거리며 거절하려 할 때 니스가 치고 들어왔다.
“아뇨~ 죄송해요~ 사람 한 명이 더 오기로 해서……”
“그게 누구……”
골드로츠의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놀라서 돌아보니 넓은 어깨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중년 사내 휴트가 서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하나씩 칵테일 잔을 들고 있었다. 잠시 그의 등장에 놀란 골드로츠는 기행에 가까운 묘기에 입을 떡 벌렸다.
“길 좀 비켜주겠나?”
그의 말에 골드로츠가 무심결에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휴트는 생글거리며 니스와 버트에게 잔을 넘겼다.
“미안하군. 사람이 많이 붐벼서 말이야.”
“꼭 그렇게 눈에 띄게 가져와야 해?”
“허허 그래도 한 번에 가져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네.”
골드로츠는 니스와 휴트의 대화를 보다가 물러나기로 했다. 휴트에게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기사 직위를 얻기 위한 전투 중에 획득한 스킬 {오감}. 그것이 골드로츠에게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온라인 원교인가. 뭐, 이상할 것도 없지.’
간혹 돈 많은 중년인들이 판타지아에서 만남을 가지곤 했다. 특히 판타지아에서는 골드와 현찰을 환전할 수 있으니 이런 식의 교제가 종종 보였다. 그래서 휴트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란 생각에 일단 자리를 피했다.
골드로츠가 가버리자 니스가 한숨 쉬며 버트에게 말했다.
“너 어정쩡하게 거절할 거면 나한테 맡겨.”
“어, 어?”
“괜히 여지를 주지 말란 거야. 끊을 때 팍 끊어야지.”
버트는 시무룩해졌고 라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놔둬. 얘가 뭘 알겠어. 그보다 예정 시간은 언제쯤으로 예상하고 있어?”
“몇 시간 내로 레이드 보스가 나타날 거야.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놀면 돼.”
“워후. 하마터면 지각할 뻔한 거네? 너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
라이가 능청스레 웃으며 버트에게 말했다. 버트는 차마 이곳에 오면서 여유를 부렸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웃으며 넘어가려 했다. 그 모습에 니스가 버트의 등을 짝 때리며 말했다.
“좋아, 그럼 놀아볼까.”
니스는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더니 바다에 풍덩 몸을 던졌다. 라이 역시 질 수 없다며 달려갔고 휴트는 껄껄 웃으며 돗자리에서 벗어나 니스가 보이는 곳에 자리잡아 구경했다. 버트는 덩그러니 돗자리에 남게 되었다.
“아, 놀고 싶으면 가셔도 돼요.”
버트는 페이니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엘도트를 한 번 보다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브론트는 이디아를 한 번 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디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버트의 옆에 벌렁 누웠다.
“난 이대로가 좋아. 편하고.”
“어……”
버트는 잠깐 이디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다시 옆을 보니 페이니는 어느새 엘도트와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엘도트는 버트와 눈이 마주치고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버트는 그저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가롭네.’
그렇게 버트 일행은 저마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서 사건이 터졌다.
*
“헉…… 흐윽……!”
칼라 해변의 암초 지대. 그것도 은밀히 가려진 곳에서 짐승들이 낼법한 신음이 들렸다. 지금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두 남녀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지금 판타지아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섹스를 벌이고 있었다.
남자는 히죽 웃으며 여자의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들춰진 비키니 아래로 흔들리는 젖가슴을 손으로 움켜쥐고 배를 끌어안고 허리를 흔들었다. 서로 연결된 하반신에서 들리는 질척한 소리가 파도 소리를 밀어냈다. 두 사람은 숨을 고르기 위해 입을 뗐다. 그러다 한 번 시선을 맞추고 다시 격정적으로 키스했다.
“어때, 죽이지? 응? 오빠 말대로 섹스 패치 받길 잘했지?”
“아앙……! 응……! 어떻게 이런 아앙! 하앙……!”
여자는 질문도 못 던지고 섹스에 심취했다. 실제 하는 것 이상의 쾌감! 그 이유는 게임으로 보정된 체력과 감도에 있었다. 현실보다 훨씬 예민한 몸은 그저 음경을 박아대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남녀 둘 다 만족스러운 쾌감! 게다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자세도 이곳에서는 쉽게 해냈다.
“꺄앗?!”
남자가 여자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다리에 두 팔을 걸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정시킨 뒤에 온전히 허리힘만으로 올려쳤다. 여자는 조수를 내뿜으며 헐떡였다. 질 안을 쿵쿵 때리는 묵직한 음경의 맛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나 참, 전체 이용가로 하기 위해서! 서비스의 일부를 막아놓다니! 지랄 맞다니까!”
남자는 중얼거리며 여자의 귀를 앙 물었다. 정보통에 따르면 이벤트는 몇 시간 뒤에 시작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을 그녀와의 관계에 쏟아붓기로 했다.
‘모텔비 굳어, 콘돔 안 껴, 시간 아껴, 이만한 3중주가 또 어딨어.’
그렇게 섹스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째서 듀크 사에서 섹스 패치를 막았는지, 그리고 그걸 무시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말이다.
쿵!
한 번의 진동이 울렸다. 섹스에 열중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니 바다뱀 하나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수 십 미터에 이르는 크기의 바다뱀!
“어……”
판타지아에서도 보기 드문 대형 몬스터의 등장에 남자는 얼이 빠졌다. 여자는 오르가즘에 취해 있느라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콰앙!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다뱀의 몸에 깔렸고 즉사했다. 그렇게 플레이어 둘을 처리한 바다뱀은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해변가로 헤엄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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