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26화 (26/104)

〈 26화 〉 26 ­ 다시 라피에 초원으로 中

* * *

“여기서 끊어졌다.”

악몽의 성 앞. 이곳엔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벌떼. 대륙 3대 정보단체 중 하나였다. 이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블랙 남작에 대해 알기 위해서! 남작에 대한 흔적의 종착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아직 공략 중이겠지?”

“괜히 3대 공략불가 지역이겠어. 현지인들도 시련의 땅이라고 안 오는 곳이야. 걱정 마.”

말을 하는 사람도 영 자신이 없었다. 그는 마스터에 가까운 위치인 퀵스라는 유저였다.

블랙 남작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이모탈 최초의 귀족 작위. 왕실의 명예를 되찾아 준 자. 윙던 숲 최단 기간 돌파. 교단 블랙스타와의 접점.

거기다 지금은 누구도 공략하지 못한 성에 도달했다.

“여기 첫 번째 엘리트 몬스터가 뭐였지?”

“커프스 골렘. 물저(물리피해 저항력), 마저(마법피해 저항력) 전부 높아. 웬만한 스텟으론 뚫지도 못해.”

“나 참, 퍼즐 요소가 많다며? 왜 첫 판부터……”

“그래서 공략법이 있어. 근데 조금…… 아니 많이 귀찮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

“여기서 나오는 해골들을 전부 잡으면 골렘이 나타나. 그래서 보통은 일부러 안 잡고 스킵 하는데­”

퀵스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조용함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뭐지?”

“불을 밝혀봐.”

그 말에 벌떼 요원들이 불을 피웠다. 성 내부의 풍경이 보였다.

낡은 성의 내부. 박살난 해골의 잔해. 퀴퀴한 공기와 먼지가 깔린 바닥. 마지막으로……

“커­ 커프스 골렘?”

수많은 길드를 파괴했던 커프스 골렘! 그 악명 높은 골렘이 쓰러져 있었다. 거기다 골렘의 가슴 절반 이상이 함몰돼있었다. 골렘의 장비는 투박했다. 그러나 엄청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흔적을 보아 마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걸 물리력으로 이뤄낼 방법이 있을까?

“귀신도끼가 왔다 간 건가?”

“녀석도 이 정도는 아냐. 게다가 그 놈은 다른 나라에서 활동 중이라고!”

퀵스는 엄지를 씹어댔다.

“일단 앞으로 가자.”

“이미 공략이 끝난 거 아냐?”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해야지. 정보는 단순히 추측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증거를 바탕으로 한 추리가 있어야지.”

그렇게 앞장 선 퀵스는 망연자실했다.

유령 씌인 갑옷들의 행진. 무한히 재생하는 이 몬스터는 특정 순서로 파괴해야했다. 그리고 그 순서도 입장할 때마다 달라서 집중해서 싸워야만 했다.

그런데 그 갑옷들이 조각나있었다!

“이런……”

복도와 벽의 장치. 이건 리듬 게임과 유사했다. 특정 리듬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단숨에 압사 당한다. 그런 복도와 벽은 박살이 나있었다. 파괴할 수 있었다면 진즉 했을 것이다. 온갖 마법 면역에 물리성에도 저항을 갖춘 기관 장치가 전부 망가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부리는 초상화들! 이건 초상화들 배치에 따라 마법의 형태가 달라진다. 그리고 각 형태마다 또 공수 방법이 달라진다. 이 성에서 가장 귀찮은 곳인데…… 초상화는 전부 두 동강나있었다.

“말도 안돼!”

퀵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만반에 준비를 해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어버린 최상층을 보며 퀵스는 허탈해했다.

‘코알라 길드가 전멸했던 곳!’

베타 테스터 ‘꽐라소주’가 이끌던 길드. 하나의 영지에 맞먹는 전력을 가진 그 거대 길드가 묻힌 곳!

바로 이곳이었다.

보스 몬스터 ‘절명의 몽마’를 잡기 위한 전용 템도 준비했다. 길드 전체를 대동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실상 이 악몽의 성 공략법은 그 길드가 9할은 해낸 것이었다.

그러나 패퇴했다.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코알라 길드는 해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곳은 공략 불가 지역으로 선정되어 악명을 떨쳤다.

‘근데 단 한 번에?’

이쯤 되니 퀵스는 의심스러웠다.

블랙 남작은 플레이어인가?

판타지아는 놀라울 정도로 인공지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단순한 몬스터 무리라 해도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다. 세력권 다툼도 벌어졌다. 아주 좋은 사냥터가 황폐화되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보잘 것 없는 곳이 보물 지대가 되기도 했다. 아무 것도 없는 땅에 난데없이 몬스터 세력이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정보전은 중요했다. 그만큼 이 세계는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벤트 보스?’

알고 보니 귀족이었던 사람이 보스 몬스터란 전개.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시기도 적절했다.

판타지아에서의 이벤트는 분기 별로 벌어진다. 그리고 그 중 초대형 이벤트는 연마다 한 번씩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번 연도 대형 이벤트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방도가 없어.’

퀵스는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비상식적인 힘. 놀라운 업적들. 기상천외한 인맥!

“일단 이 성을 재차 수색해보자. 미래의 눈에서 동향이 보였나?”

규모로 따지자면 가장 작은 곳이 여기다. 그래서 가장 큰 규모의 벌떼와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긴 ‘시련’을 예측하고 있는 듯해.”

시련이란 판타지아에서 칭하는 이벤트의 또 다른 말이었다. 크든 작든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듀크 사는 이번 이벤트에 대해서 그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았다.

‘이 놈도 한 방에 보내는 놈이야. 게다가 블랙스타까지 엮이게 되면……’

퀵스는 생각을 정리하며 성을 나섰다.

*

라피에 초원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는 아직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로그아웃을 해놓을 법 했지만 버트와 니스는 그러지 않았다. 버트는 리버를 안기 위해, 니스는 그런 버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페이니와 루하다조차 잠시 쉴 정도로 이 시간은 지루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이 시간마저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는 어떻게 됐어?”

라이와는 연락이 뜸했다. 니스는 발르틴을 출발하기 전에 했던 걸 되새기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선물이 도착했을 거야. 그러면 연락이 더 안 될 걸? 하나하나가 레어템인데 그거 연구하느라 더 바빠질 테지.”

“그래서 과제나 시험은 뒷전이었다 이거지?”

“걔도 할 건 다 해. 너무 걱정 하지 마.”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리버의 턱을 간질였다. 니스는 뭔가 꽁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묻고 싶은 거 있지?”

니스의 질문에 버트는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응.”

“뭔데? 말해봐.”

버트가 기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니스가 바다하피의 깃털을 들어보였다.

~세트 아이템의 위치, 어떻게 아는 거야?

~잉?

니스는 직접적인 질문에 난처하게 웃었다.

~판타지아 운영진도 만능은 아니더라고.

~무슨 소리야?

~접속기기를 통해 직접 연결했다지만 기록을 전부 가져왔지. 그렇지?

~어어­

괜히 민망해진 버트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한테도 가능할 거고 말이야. 가상현실이랍시고 보안이 너무 허술하다 생각하지 않아?

그건 버트도 동의했다. 니스는 전문 해커가 아니었다. 딱히 이런 쪽의 지식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손쉽게 정보를 빼왔다. 이건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네 상태를 체크하지 않아. 이건 아주 치명적인 오류인데 말이야. 안 그래?

~아.

고객지원 센터에도 보낸 질문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거진 몇 달이 되어 가는가. 그런데도 잠잠하단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거야. 뭐, 라이가 한 건 버그라기보단 시스템을 정말 잘 파악하고 있단 거지.

그때 버트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마법.

아직까지 버트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법으로 위치를 확인했단 거야?

~정확히는 마법으로 산출된 개체값을 확인 후, 가장 근접한 것을 대조해서 같은 공식의 마법으로 변환한 거지.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으로 가장 유사한 데이터를 찾는 거고.

……

~미안. 나도 무슨 말인진 잘 몰라. 그냥 걔가 했던 말 그대로 한 거야.

~이과가 또……

~너도 이과 아니었니?

~그러는 너는­

둘은 깃털로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그러면 거의 맵핵인 거 아냐? 아이템이든 사람이든 찾기 쉬워진단 거 아냐.

~그건 아냐. 네가 가진 게 엄청 독특해서 그래. 안 그러면 진즉 다 휩쓸고 다녔겠지. 걔 템 받을 때 표정 잊었어?

~아­

둘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무슨 볼일이지?]

버트의 심상 세계. 그곳에서 페이니와 루하다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저 네 의중이 궁금해서 말이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대체 그릇께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페이니는 음흉한 얼굴로 으쓱였고 루하다는 으르렁댔다.

[진정하라구. 여기서 싸우면 그릇한테도 큰일 나는 거 몰라?]

[조심만 한다면 너 따위는 갈가리 찢어버릴 수도 있지.]

루하다가 갈쿠리 손을 펼쳐보였다.

[그럼 너도 애매하게 굴지 말고 제대로 말해. 네가 바라는 건 뭐야? 리아주크의 부활이야, 아니면 사사로운 욕심이야?]

[뭐?]

페이니가 날개를 뚜둑 펼쳤다.

[지금 씨앗은 발아한 상태야. 언제든 뽑아낼 수도 있고 부화시킬 수 있어. 그런데 넌 지금 뭘 하고 있지?]

[안정적이게 리아주크의 정신을 깨울 뿐이다! 무엇을 의심하는 거냐 페슈트!]

[왜 미적대냐 이 소리다!]

페이니가 소리를 치고 송곳니를 내보였다.

[이미 나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았어? 저쪽 세계에서 더 이상 이쪽 세계를 강제할 수단은 이제 없어! 끽해야 백신 정도지! 놈들은 결코 일망타진할 생각이 없어. 그랬으면 라이칸슬로프의 씨를 말리고 나를 잡으러 왔겠지! 그리고 리어페어리들을 그냥 뒀을까? 겁쟁이처럼 숨어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더라도 위험 요소를 그대로 둘까!]

[그건­]

[리아주크의 발걸음을 쫓는 자란 이름이 아깝군 그래. 나였다면 벌써 그릇을 희생시켰다. 그런데 넌 뭘하고 있지? 찢겨진 리아주크의 육신을 모으고 리아주크의 정신과 그릇을 공유시키려 하고 있어! 네가 추종하는 자는 누구냐 벨루그하!! 누굴 섬기고 누굴 쫓고 있느냔 말이야!!]

루하다는 쉽게 응답하지 못했다.

[너한테 씨앗을 맡기는 게 아니었어.]

페이니는 그대로 심상 세계에서 사라졌다. 루하다는 손을 접으며 생각에 빠졌다.

[리아주크시여.]

*

“그래서, 오늘도 할 거야?”

큽흡­

버트는 코로 수프가 나올 뻔해서 입을 가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건 리버 한 마리 뿐이었다.

“저기­ 그게­”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니스가 태연한 얼굴로 기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버트가 하자고 해서 했지만 그들도 강제로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지……”

“매일 밤이 아니라 틈만 나면 하니까요. 눈만 뗐다 하고 있는데…… 허리는 안 아프세요?”

니스의 걱정은 너무 진지했다. 그러자 이 사이에 참견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푸흡!

이번엔 니스가 수프를 뿜었다.

“어, 어디서 나온­”

“안뇽! 왜? 액세서리인줄 알았어?”

윙던 숲에서 본 페이니는 작았다. 그러나 지금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버트의 몸에서 빠져나와 코웃음을 쳤다.

“아, 그게­”

“그럴만해. 내가 워낙 귀여워야 말이지. 그치?”

페이니가 으쓱이면서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곱지 않았다.

“뭐, 네 걱정은 쓸데없는 거야. 오히려 얘와 몸을 섞을수록 저들은 강해지니까 말이지. 그건 본인들이 가장 실감하고 있지 않아?”

“맞는 말이다.”

엘도트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힘과 쾌락을 추구해서가 아니다. 우린 온전히 주군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가 바란다면 이루어줄 것이고 싫다하면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평생 그 뜻을 이어갈 것이다. 오직 그뿐이다.”

순간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엘도트의 발언은 뭔가……

“선배 지금 프로포즈 하십­”

브론트는 다급하게 이디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니스는 입을 가리며 붉어졌고 페이니는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저 녀석들은 그릇의 정신과 마기에 반응할 뿐이니까.”

“흐음.”

니스는 묘한 눈빛으로 페이니를 쳐다보았다.

“가만. 혹시 악몽의 성 보스……?”

“맞아. 내가 그 보스시지.”

그녀가 콧대를 세우자 니스가 경악하며 버트를 쳐다보았다. 버트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고 니스는 페이니를 보며 물었다.

“혹시 너 버트랑……”

“맞아. 실제로 한 건 아니었지만 신나게 했지.”

니스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페이니는 묘하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세 기사와 리버는 그저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다.

“그러시다 이거지? 뭐, 납득할만해. 생각해보면 버트가 공략한 곳은 전부 기승전섹이었지.”

“뭐, 뭐래!? 내 힘으로 쓰러뜨린 것도 있거든?!”

“그 힘이 뭘까. 정력일까?”

“야!?”

페이니가 눈썹을 까딱였다.

“질투하는 거야? 귀엽네.”

“질투라기보단 얘는 너무 약하니까 말이야. 누가 강하게 들어오면 내치질 못하거든.”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여인의 기싸움에 버트도 슬금슬금 기사에게 다가갔다.

탓­

버트를 붙잡은 건 니스였다.

“실제로 하지 않았단 건 아직 아무런 접촉이 없단 소리지? 이걸 어쩌나. 난 이미 얘랑 진하게 키스도 했었는데.”

“야?! 그걸 왜 말­”

그러자 페이니가 버트를 잡아당겼다.

“흐응. 아무리 허상이었어도 그건 엄연히 그릇이었거든? 난 지금 당장이라도 얘가 어딜 느끼고 좋아하는지 맞출 수 있다 이거지. 넌 그럴 수 있어? 아, 못하겠구나. 둘은 친한 친구 사이니까아?”

“하! 그래봐야 여기의 버트만 어쩔 수 있는 거지! 난 여기든 저쪽 세계든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어!”

“그런 거 자랑 하지 마!”

버트는 둘에게 붙잡혀 바동거렸다.

“어쭈? 이게 몽마왕에게 이기려고 들어?”

“몽마왕도 못하는 게 있단 걸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지.”

둘은 으르렁대다 동시에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세요!”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어!”

둘의 성난 기세에 셋은 헛기침만 했다.

“오늘은 나랑 자자.”

끙끙­

리버는 이디아에게 안겨 떠나갔다. 브론트는 망을 보겠다며 사라졌고 엘도트도 스리슬쩍 자리를 비웠다.

“아, 아냐 가지 마­! 돌아와요!”

버트의 절규는 얼마 가지 못했다. 페이니와 니스가 동시에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

“어쩌시겠습니까?”

가이람 백작. 아니 이젠 휴트란 가명으로 살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낯선 이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뭘 어쩌나?”

“대외적으론 블랙 남작을 쫓는 것으로 해놓았습니다만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지……”

“하하하­”

백작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미래의 눈이란 이름이 아깝군 그래.”

“예지가 아닌 예상입니다. 저희도 불확실한 미래는 볼 수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라?”

“블랙 남작의 행보 같은 것 말입니다.”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처음 보는 인간상이거든.”

“처음…… 백작님께서 말입니까?”

“말조심하게.”

“……죄송합니다, 휴트 님.”

“하여간 이번엔 알아서들 해보게. 언제까지 나한테 의존할 건가. 나도 이제 여생을 즐겨야 하지 않겠나.”

말을 하던 이는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백작을 두고 떠나갔다.

“그나저나 참으로 문란한 아가씨구만.”

백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곳엔 모닥불 앞에서 묘한 경쟁을 벌이는 두 여자가 있었다.

*

“우읍­ 프흐­”

버트가 꽉 막힌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어때? 누가 더 좋아?”

페이니가 입을 슥 닦으며 웃었다. 버트는 헤롱거리면서 니스와 페이니를 번갈아보았다.

“그게……”

“아직 망설이는 걸 보니 막상막하란 거야?”

“흥. 그럴 리가.”

니스가 늘어지려는 버트를 붙잡았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질척하게 엮인 혀. 처음 남았던 니스의 침에 페이니의 침이 섞인 결과물이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버트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엔 니스가, 그 다음은 페이니가, 다시 니스가. 버트가 더 좋다는 의견이 나올 때까지 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버트는 선택할 수 없었다.

둘의 키스는 묘하게 달랐다.

페이니는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기술적이었다. 거칠게 혀를 엮다가도 입술만 비비기도 했다. 중간중간 숨을 쉴 틈도 주었다. 때론 이를 핥거나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야말로 키스란 이름을 달고 입을 애무하는 기분이었다.

반면 니스는 차분했다. 오직 정석적인 입맞춤만 벌였다. 입을 포개고 혀를 뒤섞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이것이 키스란 걸 가르쳐주는 듯 했다.

기본과 심화. 그 둘의 갈림길에서 버트는 눈이 핑 돌았다.

번갈아가며 이루어진 애정 가득한 키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녹여버렸다.

“하악­ 흑­”

버트는 숨을 몰아쉬며 페이니에게 등을 기댔다. 그 옆에서 니스가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때?”

그 질문이 참 묘하다 느꼈다.

둘 중 누가 낫냐는 질문인가. 아니면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건가. 가슴이 뛰고 머리가 몽롱해진 버트에겐 생각하는 건 힘들었다.

“어때?”

니스가 몸을 붙여오며 은근하게 물어왔다. 그 사이 페이니의 손이 그녀의 옆구리와 배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체온과 물음. 후끈해진 몸을 조금도 식지 않게 해주었다.

“좋아……”

“응, 뭐가 좋은데?”

니스는 그렇게 속삭이며 귀를 살짝 물었다.

“둘 다…… 좋아……”

“친구가 더 좋지 않고?”

“내가 더 능숙했잖아?”

애매한 말이었지만 둘은 더 이상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저 헤롱거리는 버트를 보며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그럼 이번엔­”

페이니가 버트의 양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인가? 웬만하면 포기하지 그래? 보아하니 동성 섹스엔 경험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그럴 리가. 내가 버트의 모습을 얼마나 봐왔는지 알아?”

“흥, 꼭 이론에만 충실한 것들이 실전에 약하지.”

버트는 그 중간에 껴서 난처한 상황이 됐다. 기분은 좋긴 한데 참으로 애매했다.

“그, 근데 왜 둘이 그렇게 다투는 거야……? 그럴 필요가 없잖아……”

버트가 힘 빠지는 질문을 던졌다. 니스와 페이니는 서로를 보다 버트에게 말했다.

“모르면 깨달을 때까지 당해야지.”

“맞아. 넌 이상한 데서 너무 둔하더라. 아니, 항상 그랬지. 저쪽 세계에서 너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는 알고 있니?”

“좋아해……?”

버트는 니스의 마지막 말이 의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

“일단 이거나 벗어. 기사 아저씨들한테 으름장 놓고 아무 짓 안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거야아……”

“자, 그릇 씨.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구요?”

페이니는 뒤에서, 니스는 앞에서 집요하게 가슴을 주물렀다. 둘의 손길에 버트는 입술을 잘근대며 마지못해 갑옷을 걷어냈다.

“흐응, 언제나 좋은 촉감이라니까.”

페이니는 어깨 너머로 웃으며 속삭였다.

“처, 처음 만져보는 거잖아요.”

“나도 직접 보고 만지는 건 처음이네.”

니스는 코앞에서 쳐다보며 말했다. 동성 두 명에게 대놓고 가슴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둘이 바로 앞에서 평판을 내놓고 있으니……

“아으으­”

버트가 입술을 씹으며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 페이니가 먼저 버트의 가슴을 건드렸다. 우선 유방부터 만졌다. 그 말캉한 부분을 힘 있게 주물러 안쪽까지 압박을 주었다. 그러다 서서히 유륜까지 타고 갔다. 지금 그녀가 건드리고 있는 건 오른쪽만이었다. 페이니는 눈짓으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니스는 그 남은 가슴을 쥐었다. 손에 촉촉이 달라붙는 살갗. 아찔해지는 체취. 이쯤 되니 버트를 덮쳤던 사람들의 심정을 실감했다.

꾹­

“으응­”

그 사이 페이니의 손가락이 유두를 꼬집었다. 버트의 가슴에 취해있던 니스도 따라서 건드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차이가 갈렸다.

페이니는 검지로 유두를 받치고 엄지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그에 비해 니스는 살짝 살짝, 조심스럽게 집게손가락으로 유두를 집었다.

“아, 아!”

오른쪽에선 통증이 동반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극이 강했다.

왼쪽에선 잔잔한 쾌락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보단 약했다.

그래도 둘 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기분 좋아?”

이번엔 페이니가 귓가에 속삭였다. 버트는 할딱이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진짜? 얼만큼?”

그녀의 질문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 더 자세한 걸 물어왔다.

“으­ 으으­”

버트는 할딱이다 얼굴에서 손을 뗐다.

“지금까지 했던 것 중 세, 세 번째로……”

“세 번째?”

페이니가 콧소리를 내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더 물어오지 않았다. 그 내용이 궁금할 법도 하건만 그저 이렇게 속삭였다.

“그럼 첫 번째가 되게 해줘야겠네.”

페이니가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눈앞에 생생히 흔들리는 가슴을 덥썩 삼켰다. 니스도 질세라 그녀를 따라 가슴을 입에 머금었다.

두 여인의 가슴 빨기. 하나는 엄청난 경험자고 다른 하나는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버트의 기분 좋은 곳을 애무해주고 있었다.

“흐으­!”

버트의 신음. 둘의 콧소리. 쪽쪽 대는 소리. 숨 고르는 소리.

모닥불 소리는 하찮은 수준이었다. 셋이 뒤엉켜내는 소리는 모든 걸 압도하고 있었다.

“학­! 흐윽!”

페이니는 유두를 이를 세워 물다가 혀로 착 때리며 말했다.

“왜 소리를 참는 거야? 소리 들릴까봐 그래?”

그렇게 말하며 쭈웁 일부러 소리 나게 유두를 빨아댔다.

“이 거리면 들리고도 남을 텐데.”

이때 니스가 거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흥건히 젖은 유두를 손으로 굴려주었다. 땡땡하게 부푼 유두는 손가락 안에서 미끈거리며 이리저리 기울어졌다. 양쪽 귀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버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어서 소리 내. 괜찮아. 어차피 저 녀석들 전부 다 알고 있을 걸?”

“그러게. 어쩌면 숨어서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싫다아~ 우리 귀염둥이의 야한 모습을 훔쳐본다니~”

“걸리면 버트의 모습 보면서 딸치게 해야지.”

그녀들의 음담패설에 버트의 정신이 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페이니는 버트의 다리 사이로 손을 옮겼고 니스는 버트의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핥아댔다. 어느 샌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을 분담하고 있었다.

페이니의 손이 버트의 음부 위에서 춤을 추었다. 세 손가락으로 음핵 주변을 집요하게 눌러댔다. 애액이 질척하게 흐르는 음부에 니스의 손이 끼어들었다. 니스는 검지와 중지를 겹쳐 내부로 삽입했다.

“읏…… 흐윽……!”

“자아, 팔은 방해되니까~”

페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꼬리로 버트의 팔을 휘감아 올렸다. 머리 위로 올려진 버트의 두 팔은 이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버트의 가슴을 맛보고, 음부를 희롱하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버트는 자신에게 집중해오는 두 여인 때문에 숨이 막혔다. 섹스의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날이 새로웠다. 언제나 새로운 쾌락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으항……!”

“어라. 역시 내 손으로 느낀 건가.”

“그럴 리가. 내가 지스팟을 찔러줘서 그래.”

버트가 신음을 터뜨리자마자 둘은 다시 틱틱거렸다. 문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가득 띄우고 있단 것!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새도 없이 버트는 허리를 이리저리 틀어대며 몸부림쳤다.

“아으……! 안돼……! 그마안……!”

“누구 손이 더 좋으려나?”

“말해봐, 버트. 누가 더 좋아.”

“그건…… 그거언­”

버트의 하반신이 서서히 위로 치고 올라갔다. 니스의 손가락은 질을 바쁘게 쑤시고 페이니의 손가락은 음핵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서서히 몰아치는 오르가즘! 결국 버트는 애액을 시원하게 내뿜으며 소리쳤다.

“못 정해애­!!”

*

버트는 페이니의 무릎을 베고 늘어졌다. 니스는 손에 잔뜩 묻은 애액을 털어내며 말했다.

“나 참…… 역시나 몰아붙이는 거에 약하다니까.”

“왜? 오늘은 이걸로 끝내게?”

페이니가 눈웃음 치며 묻자 니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유혹을 잘 견디나 시험해보려 한 것뿐이야.”

“어머~ 진심일까~”

“무엇보다 구경꾼이 있는 것도 싫고.”

니스가 고개를 들어 옆을 보자 저 멀리서 누군가 흠칫했다. 니스는 손에서 뼛소리를 내며 히죽 웃었다.

“뒤졌어 넌.”

“뭐야, 뭐야. 비밀친구야? 비밀친구 아죠씨?”

“이상한 어감으로 말하지마!”

페이니는 떠나가는 니스를 보며 후후 웃었다. 그러다 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다보았다.

“위험한 아이야.”

그렇게 페이니는 달빛을 받으며 버트와 함께 밤을 지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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