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6 윙던 숲 上
* * *
「괜찮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 이번에도 꿈이라 생각했던 버트는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그녀의 흐릿한 망막에 맺힌 건 분명 루하다였다.
“루하다……?”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버트는 눈물을 주렁주렁 매달고 루하다의 품에 안겼다. 루하다는 버트를 안아주며 등을 쓸어주었다.
*
펠론의 집무실. 이곳에서 델폰 남작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명령서는 왕실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걸 가져온 자는 자작의 작위로, 준백작에 달하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인 릴본 자작이었다.
델폰 남작 감히 넘볼 수 없는 것들이 동시에 찾아왔다. 더 가관인 건 명령서에 적혀있는 내용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귀족모독죄라니요? 전 여태까지 다른 귀족들과 마찰 없이 잘 지냈습니다.”
릴본 자작은 단정히 정리된 수염을 쓸다 검 손잡이를 잡고 호통을 쳤다.
“네놈이 이번에 작위를 받은 블랙 남작을 감금하고 핍박한단 사실이 이미 알려졌거늘! 계속 발뺌할 셈이야!!”
기사단장이란 직위에 걸맞게 릴본 자작의 기세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델폰 남작은 이 황당한 사실에 되려 목청을 높였다.
“여태까지 영지민이나 농노 외엔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최근에도 절 죽이려 했던 이모탈 하나말곤……!”
뒤늦게 머리를 때리는 단어가 떠올랐다.
최초의 이모탈 귀족.
델폰 남작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 모습에 릴본 자작이 목을 긁으며 말했다.
“그래, 네놈이 잡아넣은 이모탈, 실버트리가 블랙 남작이다!”
이 한 마디로 버트는 펠론의 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두고 괴롭힌 대가를 치르기 위해 델폰 남작과 그의 수하들에게 소환장이 내려졌다.
그런데 그녀를 겁간한 병사들과 코르크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덕분에 델폰 남작이 죄를 전부 뒤집어썼고 결국엔 처형대에 올랐다.
버트가 상황을 알게 된 건 루하다의 시중을 받고나서였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버트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릴본 자작의 부름으로 처형대에 올랐을 땐 뭔가 이상하다 느꼈다. 그리고 델폰 남작과 다른 사람들 여럿이 묶여있는 걸보고 상황을 알아챘다.
“저기, 이게 무슨 일이죠……?”
릴본 자작은 이제껏 코르크가 저지른 감금, 겁탈, 협박을 비롯한 온갖 죄를 나열하며 버트에게 확인을 받았다.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버트가 얼떨결에 그렇다고 답했다.
“지금부터 모든 권리는 블랙 남작에게 귀속되며, 델폰 남작과 그 일가 그리고 가신들은 처형 후…….”
판테스 왕국의 규율의 엄격함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고 있을 때. 버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릴본 자작님? 처형이라면……?”
턱짓으로 가리킨 건 병사 넷이 낑낑거리며 가지고 올라오는 단두대의 날이었다. 그 두꺼운 날이 처형대에 끼워 맞춰지자 버트가 입을 떡 벌렸다.
그냥 분위기를 맞추려고 있는 건줄 알았더니 진짜 목을 자르려는 건가?
순간 버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요? 저도 무사히 풀려났고 지금은 멀쩡한데…….”
“그대는 분하지도 않는가? 없는 죄를 만들어 겁박하였는데?”
“그건 그렇지만”
“더군다나 작위가 같다 해도 위치는 그대가 더 높다. 아랫것이 이유 없이 윗사람을 억압한다는 건 왕께서 하사하신 작위를 무시한단 소리이며 더 나아가 왕국의 규칙을 뒤흔드는 일일세.”
비약이 심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버트는 오기가 생겨 외쳤다.
“하지만 전적으로 실종된 그 사람의 잘못 한 거지, 이 아저씨는 잘못이 없어요!”
아저씨란 호칭에 릴본 자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적극적인 변호에 델폰 남작은 고마움보단 의구심이 솟구쳤다.
“수하의 잘못은 지도자의 잘못이기도 하네.”
“그럼 델폰 남작님의 실수는 국왕님의 잘못인가요?”
맹랑하다 못해 모순적인 말에 릴본 자작의 눈에 불이 터졌다. 왕실 기사단장으로서 이 실언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년이!”
“왜요?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수하의 잘못은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그러면 국왕님도 처벌을 받아야 하나요!”
“궤변이다! 아무리 그대가 피해자라고는 하나 헛소리를 넘겨줄 수는 없다!”
릴본 자작이 뿜어내는 살기에 델폰 남작이 컥컥 숨을 토해냈다. 그 주변의 기사들도 파랗게 질렸다. 그런데 정작 버트는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멋대로 사람 목숨을 빼앗는 것보단 말이 되죠! 이거야말로 궤변이 아닌가요? 감형은 못해줄망정 처형만 밀고 나가시는데 그게 어디 맞는 일인가요!”
이쯤 되니 릴본 자작도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국왕이 신신당부의 말을 남겼음을 기억하고 용케 검을 뽑지 않았다.
절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
그래서 릴본 자작은 이를 갈며 노려보기만 하였다.
“그래도 없는 죄는 사라지지 않네. 그대의 말대로 감형은 해줄지언정 면죄는 할 수 없어.”
“그래요……?”
버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면서 델폰 남작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죠?”
“나한테 뭘 바라는 건가?”
“예?”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델폰 남작은 쓰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뭔가를 원하는 게 있으니 이렇게 열렬히 편을 들어주는 것이지.
“여인의 몸으로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복수를 하려들지 않고, 되려 날 구하려 하지 않나. 그러니 의심스러운 게지.”
“그, 그렇다고 처형은 심하잖아요. 남작님이 직접 저한테 뭘 하신 것도 아닌데…….”
버트의 대답에 그는 고갤 숙였다. 이 정도 자비심이라면 그가 알고 있는 가장 거대한 교단 블랙스타의 성녀가 되고도 남겠단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결정했나?”
릴본 자작의 재촉에 버트는 더 묻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번쩍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남작님의 자산과 권리를 전부 갖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제가 쥐겠습니다.”
미묘하게 다른 말에 릴본 자작이 의문을 표하려 할 때 뒤이어 나온 설명이 모두의 할말을 앗아갔다.
“그리고 제 재산을 남작님과 가신들이 관리하게 할 겁니다. 제가 권리를 갖는 것이니 언제 죽이든 상관없겠죠?”
버트는 당당하게 말했다가
“……안 될까요?”
소심하게 덧붙였다. 릴본 자작은 못마땅해 하며 그 처벌을 수락했다. 말이 달라졌을 뿐 결국 생사여탈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버트는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일이 잘 풀렸다고 좋아라했다. 릴본 자작이 왕에 대한 모독은 따로 처벌하겠단 말을 듣기 전까지.
*
판테스 왕국의 국왕, 뮬러 7세.
그는 눈앞의 문서들을 보며 참담함에 빠졌다. 하나같이 쉽게 넘어가기 힘든 것이었다. 덕분에 이전에 찾아온 흑기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4장의 문서.
그중 첫 번째.
‘그림자를 쫓는 별.’
이 땅의 3대 정보단체 중 하나로 암살직과 암상행을 겸업으로 살아가는 조직이다.
그들의 암살은 짙은 정보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그림자를 쫓는 별에게 찍히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인맥과 단절해야 하고, 평소 행동 습관을 바꿔야 하며, 한 번이라도 찾아갔던 곳을 가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영문도 모르고 죽어버릴 테니까!
그런데 판테스 왕국 부지부장의 공문이 날아왔다. 블랙 남작과 연관된 일에 대해선 모든 거래를 최우선으로 임해줄 뿐 아니라 일 할의 에누리까지 제시했다.
심지어 그녀가 작위를 유지하는 동안 왕국과의 거래에서 지속적으로 할인을 해주겠다 말하였다.
이 다음도 만만치 않았다.
‘마법 협회의 올 클래스 매지션.’
아크메이지 귀르디의 유지를 가져오고 광신교 데마스의 신성 마법과 온갖 흑마법을 구해온 자. 그러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법에 통달한 자! 올 클래스 매지션의 축하의 말이었다.
어쩌면 마법 협회의 자리까지 넘볼지도 모르는 이 만능의 마법사가 흑기사의 친우라니!
세 번째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서였다.
‘가이람 백작.’
이건 판테스 왕국의 숨겨진 실세라 할 수 있는 남자의 탄원서였다.
그가 보낸 문서엔 왕국의 은인에게 소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개 남작이 가두어 핍박하게 만든 걸 꾸짖고 있었다. 이 문서야말로 그녀가 작위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누군가. 소드마스터란 이름으로 초인의 힘을 발휘하여 이모탈조차 쉽게 넘보지 못했다. 왕국을 강건하게 만든 건 당연한 소리였다. 현 왕실 기사단장 릴본 자작을 선두로 많은 제자를 만든 게 그였다. 당연히 그의 입지는 백작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현 직위를 고집하였고 나서기를 싫어하였으니 대신 그에게 숨겨진 권한을 일부 넘겨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압권이었다.
‘블랙 스타……!’
이 대륙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왕국 못지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 이걸 꼽으라면 백 중 백은 성신 리아주크를 섬기는 교단 블랙스타를 꼽을 것이다.
그만큼 이 군집의 규모는 굉장했고 어느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무력을 갖추었다. 그걸 증명한 사건이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왕국이 이름 모를 종교를 믿고 덤볐다. 그 후 마성자들의 시꺼먼 마기에 덮여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러 종교 단체에서, 조직에서, 왕국에서 도전해 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누가 이런 막강한 자들을 거부할까.
그러나 사사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못 먹는 감이 되어버렸다. 헌데 이곳의 사제도, 주교도, 추기경도 아닌 교주의 편지가 왔다. 게다가 그냥 지인도 아니고 교단의 은인이란다.
결국 이 4장의 편지 때문에 뮬러 7세는 예정에도 없는 이모탈 귀족화를 시행했다. 그리고 준자작의 작위를 줌으로서 이들의 편지에 답하였다.
“허.”
허나 감당하기 힘든 복은 되려 독이 된다. 지금의 블랙 남작이 그러할 수 있었다. 분명 그의 배경은 탄탄했지만 자칫 그것이 왕국에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비록 버트와 정면에서 덜덜 떨긴 했으나 한 나라의 왕이었다.
뮬러 7세는 나직하게 말하였다.
“뒤를 밟아라.”
*
버트는 기분 좋게 길을 나섰다. 리버는 한동안 떨어진 뒤로 이제 계속 안고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화가 복이 된 셈이었다. 거기에 원하던 아이템도 받을 수 있었다.
「밤 이슬의 목걸이」는 목에 걸자마자 「밤 도깨비 투구」, 「밤 거미의 실로 짠 머플러」와 뒤섞이더니 완성된 「밤 기사의 갑옷」과 합쳐졌다.
「밤 기사의 갑옷(강화형)」
도대체 이 아이템은 얼마나 더 모아야 하는 걸까. 아직까지 전부 모았다는 말도 없었다. 이렇다 할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효과만 잔뜩 있을 뿐.
버트는 상태창을 가득 채우는 부가 효과들을 넘겼다. 지금 그녀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발치에 있는 사랑스러운 생명체였다.
리버는 곳곳에 털이 하얗게 새있었다. 얼룩덜룩한 녀석은 이제 안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커버렸다. 감금당할 땐 몰랐는데 그동안 무럭무럭 자랐다고 했다. 바로 뒤를 따르는 3인방 중 하나가 말한 것이다.
그들은 남작의 가신이었던 기사들로 그녀를 따르고자 나섰다.
한 명은 얍삽하게 생긴 여우눈의 청년으로 이름은 이디아 오즈. 활쏘기와 사냥이 특기며 ‘레인저’ 출신이라고 했다.
다른 한 명은 브론트 갈디락. 등에 묵직한 방패를 지고 약식 갑옷을 입은 사내로 방패를 잘 다룬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도 만나보았던 자였다. 엘턴을 종기사로 두었던 엘도트 그라이버였다.
졸지에 세 기사를 수하로 두게 된 버트는 거부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뜻은 너무 완고했다. 주군인 델폰 남작의 상급자라면 당연히 그들에게도 상급자란 말을 내세우며 호소했다.
버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뜻이 완고한데 강제로 꺾을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나마 다섯 중 셋만 오게 된 것도 버트가 통사정을 한 덕분이다.
아무튼 그들 덕분에 적적한 숲길은 제법 사람 냄새가 나게 되었다.
"그보다 그곳으로 꼭 가야하는 겁니까?"
세 기사 중 가장 젊은 이디아가 물었다. 그 어투는 정중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엘도트와 브론트가 동시에 눈을 부라렸다.
“험험…… 제가 안 가겠다고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저 저희의 목적지인 ‘악몽의 성’은 온갖 언데드들이 득실거리고, 그 전에 지나야하는 ‘윙던 숲’도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위험지인데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말에 걸어가던 버트의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폐 끼치기를 죽을 만큼 싫어하는 그녀에게 꽤 큰 상처의 말이었다.
엘도트가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심성을 얼추 알고 있어서였다.
“상급자의 명에 의문을 가지는 건 이유 없는 파면을 당할 때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찌 감히 부하로서 명을 받는 입장인데 그런 말을 하나?”
그의 면박에 이디아가 입맛을 다시며 머릴 긁었다. 버트는 차가운 분위기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아, 아니에요.”
“말씀 낮추셔야 합니다.”
엘도트의 말에 버트가 입을 삐죽였다. 예의를 강조 받으며 살았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한두 살만 높아도 말을 놓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을 낮추라니.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젊은 이디아에겐 할 만 했다. 하지만 엘도트와 브론트는 힘들었다. 이웃집 어른 같은 외모와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얘기도 해보았다. 말을 놓기 어렵다. 그러자 그건 계급 체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말했다. 도리어 그녀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고지식한 엘도트 때문에 숨이 막혔다. 문득 이들과 얼마나 다녀야할지 의문이었다. 그녀의 성생활이 보장될지 몰라서였다. 모진 짓을 당한 주제에 참으로 앙큼한 고민이었다.
꽤 오래 다닐 것 같은데 딱딱한 엘도트라면 기어이 그녀를 제지할 것이다. 그럼 버트는 연장자의 말을 못 넘겨서 답답하게 살 것이다.
‘그건 싫어.’
루하다도 돌아왔는데 참아야 한단 말인가! 버트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사이 이디아는 묘한 눈빛으로 버트를 보았다. 사실 그는 버트를 따라가는 걸 반대했다. 왜냐하면 델폰 남작에게 버트의 문란 행위를 보고한 게 이디아이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여자를 따라야 하는 거지?’
그는 평소처럼 숲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저 멀리 길가에서 이상한 걸 보았다.
젖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처자라니. 수백 걸음 밖의 동전도 구분하는 그조차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했다.
갑자기 길가에 주저앉아 수음을 시작했을 땐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물론 엘도트의 결정을 듣고 이 사실을 얘기 했다. 고지식의 대명사인 그가 이 사실을 알면 결정을 철회할 거란 생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가?”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수발을 들기 위해 숲에서의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디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불을 피우기 위해 잔가지를 주우러 갔다. 엘도트와 브론트는 돕겠다는 버트를 앉혀놓고 땅을 다지고 바람막이를 깔며 야영지를 마련했다. 버트는 리버를 끌어안고 그들을 지켜보다 말하였다.
“……고마워요.”
“부하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 낮추셔야 합니다.”
엘도트의 말에 버트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괜히 리버의 귀를 간지럽혔다. 듣자하니 기사의 직위는 귀족이나 다름없다 들었다. 당장 버트도 판테스의 왕이 기사 작위를 준다하니 만족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잡일을 맡기니 많이 불편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오가는 가운데 야영지가 마련되었다. 버트는 슬슬 식사시간이 되었기에 ‘주머니’를 열어 요리도구와 음식 재료를 꺼냈다.
“오오.”
셋은 이모탈의 신비한 힘을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보니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요리는 제가 할게요.”
“아닙니…….”
바로 거절하려던 엘도트는 이디아의 눈짓을 보았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버트의 표정. 엘도트는 곧장 말을 멈췄다.
버트는 주군이기 이전에 기사도에서 늘 언급하는 ‘레이디’였다. 단호하게 무안을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본 버트는 전혀 작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가 얼마나 불편한지 어림짐작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요리로 풀려고 하는 것이리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 한 마디에 버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모습에 엘도트는 때때로 고집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맡겨주세요!”
“말씀 낮춰주셔야 합니다.”
“으…….”
그러나 이건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일단 이거에 이걸 썰고……”
요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숭덩숭덩 썰린 야채는 전부 냄비로 들어갔다. 물과 밀가루는 ‘주방 보조’ 시스템을 이용해 끓여진 상태로 들이부었다.
자동 시스템이 성행하는 이 때 버트처럼 보조 시스템만 쓰는 유저는 드물었다. 심지어 요리 외엔 전부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희소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잘 된 거겠지……?’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 기사는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밖에서 먹기엔 매우 힘든 것들이었니까.
푸석하고 딱딱한 빵이 아닌 부드럽고 따뜻한 빵. 건더기도 별로 없는 묽은 수프 대신 진하고 맛좋은 수프. 그들은 만족스럽게 배를 채웠다.
“휴…….”
포만감이 차고 버트는 냄비를 씻어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물론 엘도트가 말렸지만 특유의 기운 빠진 얼굴로 넘어갈 수 있었다.
리버는 이디아에게 맡기고 조금 걸으니 작은 개울이 나왔다. 버트는 풀썩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녀의 발치에서 루하다가 불쑥 솟아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루하다를 보는 버트의 눈엔 복잡함이 어렸다.
후회? 실망? 슬픔?
그 감정을 얼추 느낄 수 있는 루하다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 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해서. 파트너는 처음 가져보거든. 세영이랑 동혁이도 모를 텐데…….”
버트는 무심코 옆에 손을 뻗었다. 리버가 이디아에게 있단 걸 떠올랐고 괜히 허공만 주물렀다.
「저들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너가 죽였지……?”
머리 없는 말이지만 루하다는 수긍했다.
「지하의 떨거지를 말씀 하시는 거라면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 말에 버트가 몸을 떨었다. 루하다는 수프가 말라붙은 냄비에 눈을 두고 있는 버트를 보다가 고갤 돌렸다.
꿈뻑.
그리곤 다시 그녀를 바라봤고 버트가 말을 이었다.
“그…… 빨간 두건 쓴 사람들도……?”
「예. 제가 그랬습니다.」
그제야 레드윙이 왜 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가 가져온 건 일종의 ‘드랍템’인 셈이었다. 버트가 울상이 되어 루하다를 보았다. 그녀의 감정을 아는 루하다는 가만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
「그릇의 감정을 흔든 놈들입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낯설다.
분명 라이칸들에게 당했을 때도 그가 이런 식으로 나왔었다.
그땐 몰랐는데…….
버트가 아무 말이 없자 루하다가 연이어 말하였다.
「그릇께선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피를 묻히는 건 저고, 그런 판단을 한 것도 제 스스로입니다. 그릇께서 하신 건 아무것도 없으니, 평소처럼, 오로지 행복만을 추구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럼 싫어도 좋은 척 해야 하잖아…… 이 사람들은 내 안의 씨앗 때문에 그러는 거라며? 반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건데 내가 불쾌해한단 이유로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 난 다시 살아나지만 그 사람들은 끝이잖아…… 그냥…… 그냥 죽는 거잖아…….”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진한 순수함은 루하다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목숨을 담보로 얻는 쾌락. 코르크가 리버를 붙들고 저지른 만행. 버트의 마음에 큰 흉터로 남은 사건이었다.
그 후 그녀의 마음을 더욱 여려졌다.
「그럼 심하게 손을 쓰지 않겠습니다.」
루하다의 손이 훌쩍이는 버트의 눈가로 갔다. 눈물과 콧물을 슥 닦아주곤 이어서 말했다.
「그릇께 해가 되지 않는 이상, 겁을 주거나 쫓아내기만 하겠습니다.」
그리곤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버트가 멀뚱히 보다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괜찮아지셨습니까?」
“응…….”
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레드윙의 두건」을 전부 꺼내 묻었다. 그리곤 손을 모아 꾸벅 인사하였다.
루하다는 그 모습에 맹세했다.
이제 다시는 자신이 한 일을 버트에게 들키지 않겠노라고. 그리곤 은근슬쩍 화제를 바꿨다.
「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평소랑은 달리 하루에 다섯 번은 커녕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하셨…….」
“쉿!”
버트가 빨개져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더니 차근차근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싫어할 게 분명해. 그렇게 고지식한데 음…… 란 한 걸 좋게 보겠어……?”
숙제 못한 걸 들킬까봐 조마조마해하는 아이처럼, 버트는 찡그린 얼굴로 입을 쭉 내밀었다.
「그렇다면 몰래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때 두 사람 앞에서처럼…….」
“그, 그 얘긴 왜 꺼내?! 그리고 걔넨 아예 접속을 끊어서 괜찮았지만 저 사람들은 깰 수도 있단 말이야.”
기사의 전투력은 상당하다고 들었다. 버트로선 사소한 변화도 알아챌 그들의 기감을 경계했다. 아마 귀신같이 감지할 것이었다.
「그러면 꾹 참으셔야 되는데, 할 수 있겠습니까?」
“으으…….”
버트는 빨개진 얼굴로 눈치를 봤다. 루하다는 시간을 끌지 않고 바싹 붙었다.
「빨리 끝내드리겠습니다.」
버트와 루하다가 은밀한 만남을 가질 때. 이디아는 다급히 달려와 둘에게 엿들은 사실을 말했다.
아무리 밉상이었다지만 기사 코르크를 죽이고 병사들까지 싸그리 해치운 게 그녀였다니!
그런데 이 말을 듣고도 둘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이디아를 나무랐다.
“주군을 보필하라 했더니 쥐새끼처럼 귀만 쫑긋 세우고 돌아온 거냐?”
“주군이요?" 병사들을 죽이고 색을 밝히는 그 마녀가요?!”
“이디아 오즈!”
엘도트의 호통에 이디아가 더 목청을 높였다.
“전 도저히 못 있겠습니다! 아무리 레인저가 기사 작위에서 최하층이라지만 저도 기사입니다! 그런 명예도 모르는 괴물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말이면 단 줄 아는가!”
“엘도트. 이디아.”
이 싸움을 멈춘 건 브론트였다. 잔잔하고 굵직한 목소리는 덩치와 어울려 위압감을 주었다.
“만일 네 연인이 병사들에게 수십 번 깔리고, 코르크에게 농락당하면 어찌하겠나?”
욱해서 소리치려던 이디아는 버트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브론트는 더 말하지 않고 엘도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기사도라지만 누구든 무조건적인 충성을 할 수 없어. 하물며 이유도 모른 채 강요만 한다면 더더욱…….”
브론트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뜻을 표했다. 둘의 싸움은 대강 마무리 된 듯 했으나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근데, 만약에 남작님이…… 몸을 요구하면…….”
“이디아.”
“아, 아니…… 이건 헐뜯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맨정신으로 길가에서 반라로 수음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점을 꼬집자 엘도트도 할 말이 없었다.
“요구하신다면 듣는다. 그뿐이다.”
평소에 정절과 절제를 강조한 엘도트로선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가 여색을 밝힌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과 마음가짐을 쉽게 내버리는 태도에 입이 떡 벌어질 뿐이었다.
술집에서 창부를 부르잔 말에 무서운 표정을 지어댄 게 엘도트란 사내였다.
“대체…… 대체 무엇이 선배님을 끌어당긴 겁니까? 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아니면 그녀가 귀족이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한 눈에 반해서?
어떤 명제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과한 충성심. 그 어떤 것도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용기를 보았다.”
“예?”
엘도트가 깊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내가 보이지 못한 용기를 보였다. 그리고 무식한 나를 일깨워주었지.”
이디아는 국왕을 거론하며 자기 주장을 펼치던 버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이모탈이라지만 반역이 될 수도 있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다. 엄청난 상황이라 느끼지 못했을 뿐 그건 확실히 대단했다.
“그리고 그분은 쉽게 그런 걸 요구할 분이 아니다. 말조차 어렵게 붙이지 않나?”
“그래도…… 그 성습관은 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엘도트가 시선을 피했다.
“차차 해결되겠지…….”
그렇게 윙던 숲으로 향하던 길. 세 기사와 버트의 하루가 지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