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7 도시 발르틴 上
* * *
버트에서 은송으로 돌아왔을 땐 온통 세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할지……
강의시간 내내 은송은 세영의 생각만 했다.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미묘한 거리감이 신경 쓰였다. 처음 그림자들에게 당할 때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지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교수들도 평소답지 않게 허둥대는 은송을 걱정할까.
결국 은송은 세영과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혹시나 해서 메신저를 해보니 먼저 접속해있겠단 말만 남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은송은 안절부절 못하여 11시까지 기다리다가 바로 침대에 누웠다.
*
버트와 니스, 라이 이 셋은 어떻게든 ‘주머니’에 아이템들을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도 한참 남아서 남은 아이템은 도시 '발르틴'에서 처분하기로 했다. 로디아처럼 작은 마을에서 전부 팔기엔 너무 양이 많았다.
그렇게 발르틴으로 가는 중 버트는 몇 번이고 깃털로 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번번이 무시. 그렇게 길을 향하다 하루 야영을 하기로 하고서 자리를 만들었다. 잠을 잘 때까지 셋은 수다를 떨고 라이가 먼저 침낭 속으로 파고 들어 곯아 떨어졌다.
“저기…….”
“으으차…… 나도 그럼 자야겠다. 잘 자~”
니스가 침낭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버트는 퀭한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며칠을 노숙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의 눈에 웅장한 성벽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중세의 느낌이 점철된 장면이 보였다. 높은 성벽 위로 활을 들고 있는 병사들. 어떤 곳에선 대포가 빠끔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펄럭이는 판테스 왕국의 문양! 버트는 이런 걸 볼 새도 없이 머리를 푹 숙이며 그들을 따라갔다.
버트 일행은 도개교로 사용되는 성문을 지나 폴암을 든 문지기들에게 검문 받고 입장하였다. 보통 같으면 버트도 신기해하며 구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잘 지어진 건물도, 깔끔한 길바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이가 흩어져서 아이템을 처분하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라이가 니스에게 버트를 이것저것 가르쳐주라며 붙여놓고 가버리고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니스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말을 걸면 곧잘 답해주는데 귓속말은 무시했다.
마치…… 그냥 아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상점에 들어서기 전까지 계속 ‘왜 무시해~’, ‘그림자 세트는 어떻게 됐어?’, ‘저건 뭐야?’ 등의 일상적인 말들을 해댔다.
그리고 마지막 말까지 무시당하자 버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물을 터뜨렸다. 훌쩍이는 소리에 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울음을 꾹 참으며 바들거리는 버트. 그녀를 보며 오히려 니스가 놀라 안아서 다독여줬다.
“은ㅅ…… 아니, 버트 왜 그래?”
“흐끄윽…… 비밀 숨겨스흐윽…… 미안해윽…… 끄으…… 잘못…… 했…… 윽…… 흐윽…… 윽……”
버트의 목소리는 울음에 파묻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애써 눈물을 참으며 사과하는 모습에 니스가 미안하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좀 괘씸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을 줄이야. 괜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시는 비밀 같은 거 안 숨긴다는 언약을 받는 것으로 대충 넘어갔다. 니스는 아직도 훌쩍이는 버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
“그치만…….”
“정말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화 안낼게. 그래도 기왕이면 해줬으면 좋겠어. 무슨 비밀이든 그걸로 널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응?”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얘기해주니 버트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밝게 웃는 얼굴. 그 모습에 버트는 결단을 내렸다. 비밀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이야기를 다 한 버트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니스를 살펴보았다. 검은 동굴에서부터 라피에 초원까지…… 절대 밝히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들을 털어놓았다.
니스는 팔에 턱을 괴며 진지하게 듣더니 다짜고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가 자는 동안 했던 건 왜 얘기 안 해?”
“어? 어!? 어어어?!”
버트의 반응에 니스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질문에 버트가 울상이 되었다.
그녀의 모습에 니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라이칸들에게 붙잡혀 한창 빨리던(?) 때까지 영상으로 생생히 봤다는 말에 버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어떻게……?
“에헴. 그거야 내 재능이지. 그냥 기기에 남아있는 기록을 옮기는 작업을 한 것뿐이야. 그 장치가 일종의 뇌의 역할을 하는데 거기에서 기억 부분을…… 아아, 됐다. 어려운 말은 넘어가가자. 그리고 너가 자고 있을 때 했던 짓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지? 사실 안 하려고 했는데…… 너가 하도 수상해서 수면 녹화를 해놨어.”
“수면녹화……?”
“아, 몰랐구나? 그러니 그렇게 대담한 걸 했겠지. 수면 녹화는 로그아웃한 캐릭터가 무방비할 때 도둑질이나 암살을 당하기 쉽잖아? 그래서 만들어진 시스템이야.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서 쫓으란 거지. 리얼리티 살린다고 안 하는 사람도 많은데…… 아무튼 혹시나 해서 그걸 해놓았지. 그리고 으후후……”
니스의 음흉한 웃음에 버트는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럼 기록을 옮겼단 건…… 해킹을 했단 거야?”
“네 게임 기록은 그때 너네 집에 놀러갔을 때 몰래 복사해왔지.”
“그때?!”
의미심장한 말 흐리기에 버트가 부끄러워 투정을 부렸다. 더불어 그녀가 한 게임의 기록을 편집까지 했다하니…… 포르노를 보는 줄 알았다는 우스갯소리에 버트가 눈물을 보이자 니스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으휴…… 이럴 때 보면 천상 여자라니까. 그래서 어떡할 거야? 그 그림자는? 설마 지금도?”
니스가 아랫배를 지긋이 보자 손사래를 쳤다. 이젠 여기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에 있단 말을 했고 라이칸들과 좋게 해결했다고 말했다.
“흐응. 그게 끝?”
“응? 아 나머지는……”
니스는 중요한 주제를 피하는 버트를 보며 벽으로 밀쳤다. 버트는 자신을 밀치고 눈앞에서 바라보는 니스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니스……?”
니스는 버트를 슬며시 안아 귓바퀴를 물고 빨아주었다.
버트는 이렇다 할 대처를 못하고 귀를 빨리며 니스의 손이 상갑 안쪽으로 기어들어오는 걸 느꼈다. 니스는 좁은 틈으로 손을 넣자마자 푹신한 유방을 주물렀고 혀로 귓바퀴를 긁어주었다.
버트는 그녀의 팔을 잡고 밀어내려 했지만 니스가 더 힘을 주어 애무해주니 금세 스르르 힘을 풀었다.
도시 길거리에서 이런 짓이라니!
버트는 너무도 대담한 그녀의 행동에 어쩔 줄 몰랐다. 니스가 귀에 입김을 불어주며 애무를 멈추고 마주보았다. 니스는 취한 듯이 벌개진 얼굴로 자신을 보는 버트를 보며 머리를 쓸어주었다.
“정말 걱정 된다…… 진짜 큰일 당하면 어쩌려고? 지금 당장 나도 거부 못하면서.”
“아으…….”
“걱정 마.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뭐 가끔 네 게임 기록이나 보내줘~ 그때 늑대들이 할짝할짝~ 한 거 뒤론 못 봤네”
“이 능구렁이……!”
“으응~?”
니스가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입술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두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버트가 입술을 꼼지락댔고 니스는 싱긋 웃으며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걱정 마~ 난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니까. 이상한 짓은 안할 거야.”
버트는 니스의 말에 뺨을 문지르며 뾰루퉁해졌다, 그러다 말이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잠깐…… 이성애자가 아니라?”
“쉬이잇~ 더 이상 말하면 그거 라이한테 보여준다?”
버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록 보내달란 건 진심이니까 지울 생각은 하지 마. 뭐, 지우는 방법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았지? 아, 말 나온 김에 내일 놀러갈까!”
“으으…….”
그렇게 둘이서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되었을 때. 라이는 쓰지 않는 물품들을 흥정하면서 버트의 「밤」 장비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소득은 없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악몽의 성, 끝없이 좀비가 몰려오는 묘지, 피로 젖어있는 사막 같은 지역 정보나 귀신 도끼, 암살자 퀵스, 기사 골드로츠 등의 인물 정보가 전부였다.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아이템들을 팔아 모은 돈을 보았다. 그러고서 여유롭게 버트와 니스에게 줄 선물을 찾아다녔다.
라이가 이러는 동안 니스는 실랑이를 끝내고 버트와 그녀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했다.
“지금 너한테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일종의 '버그'야. 보통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지. 그 조건은 대체 뭔지 모르겠어. 그리고 이게 또 어떻게 전염되는지도…….”
“전염?”
“엉. 나도 너랑 비슷한 상태거든.”
그 말을 하며 니스가 버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가죽옷 아래로 느껴지는 말랑함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덕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판타지아엔 이런 기능이 없어. 너가 만지고 내가 만져지는 이런 성적 기능은 애초에 막혀있거든. 만져도 나무토막을 만지는 느낌이 나야 정상이야. 그런데…… 너와 만나고 얼마 안 있어서 나한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어.”
그녀의 말에 버트는 고민했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생각난 것은 리아주크의 씨앗이었다. 이것에 대해 설명했더니 니스가 그녀의 아랫배를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아보겠단 말을 하고 수다를 시작하려는 그때 라이가 돌아왔다. 라이는 의기양양해져서 버트에게 새까만 토시 한 쌍을 건냈다.
버트가 그걸 받아보니 밤 세트 중 하나였다. 「밤 풀을 엮어 만든 다리보호대」라 명시된 이것을 받자마자 착용했고 그 순간 하체가 까맣게 감싸지게 됐다.
그리고 처음 허리띠가 변경되었을 때처럼 하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토시와 신발이 합쳐져서 타이즈 하의처럼 변하였다. 여기에 하갑까지 융화되어서 착 달라붙는 가죽바지에 롱부츠를 착용한 듯 한 모습의 검은 하갑이 됐다.
군데군데 가시가 돋아나있는 펑크한 하갑은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견고했다. 또 움직임에도 큰 지장은 없었다. 입은 듯 안 입은 듯한 착용감을 가진 튼튼한 갑옷이라니!
「밤 기사의 갑옷(하)」로 통합된 걸 니스와 라이에게 알려주니 둘은 세트를 전부 모으면 하나의 완성품으로 변할 거라 장담했다. 특히 니스는 이걸 묘하게 부러워했다. 장비의 효과를 물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방어 효율성 30% 상승, 근접 전투능력 10% 상승, 회피율 3% 추가, 마법 저항력 15% 상승, 상태이상 저항력 15% 상승…….
온갖 능력치가 상승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귀속, 자동 수복, 파괴불가수복에 한계가 올 시 그림자로 돌아가 재생 등…….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효과뿐이었다. 니스는 힐긋거리며 다리 사이를 봤다가 버트보다 크게 안심하곤 그녀의 천운을 시기하였다. 버트는 헤헤 웃더니 나머지 아이템의 처분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
그렇게 버트 일행은 이 가게 저 가게 다니며 발르틴에서 하루를 보냈다. 라이는 은화 몇 개를 꺼내 근처에서 '블루윙'이란 숙소에 방을 잡고 다음 날을 기약했다.
버트는 판타지아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침대에 누워 밤을 보냈다. 마른 풀을 뭉쳐놓은 잠자리도 아니고, 퍽퍽한 침낭도 아닌 진짜 침대였다! 침대에 누워서 다시 침대에 눕는 아이러니함에 버트가 혼자 웃다가 냉큼 잠을 청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졌다.
*
버트의 방으로 누군가 침입했다. 그들은 머뭇거림 없이 주머니에서 가루 한 줌을 꺼내더니 버트에게 뿌렸다.
버트가 기침을 하며 일어나자 괴한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버트의 발길질에 과한 둘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고 다른 하나는 주먹질에 고꾸라졌다.
남은 괴한들이 주춤거리면서 경계했다. 버트는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검을 들어 위협했다. 그리곤 큰 소리를 내려던 찰나 갑자기 버트가 검을 놓쳤다.
그 모습에 괴한들이 움직였고 버트는 삐걱거리는 몸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뿌옇게 변하는 시야는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버트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버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차가운 돌침대 위였다. 그녀의 뿌연 시야에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잡혔다.
하나는 눈을 제외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와 비슷한 모양새로 검은 거적때기를 두르고 있는 자였다. 버트는 새까만 인물이 '그림자'란 걸 알아채고 푹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림자야……?”
「일어나셨습니까?」
라피에 초원을 떠나기 전. 키퍼에게 피를 주면서 그에게도 일부를 나눠준 이후로 좀 더 공손하게 변했다. 그림자는 마음속으로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는 버트에게 다가왔다.
「리아주크 님의 신도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듣자하니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울 방법이 있다합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건 그림자와 얘기를 나누던 검은 로브의 인물이었다.
주름이 잔잔히 남아있는 노년의 남성. 그는 자신을 '퍼드롬'이라 소개하며 '블랙스타'의 교주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림자 이상으로 공손하게 버트에게 말하였다.
“실례했습니다. 모셔오는데 불손한 점 사죄드립니다.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려다보니 납치라고 오해한 듯 합니다…….”
“아, 괜찮아요……. 그런데 씨앗을 키우다뇨……?”
버트는 다른 것도 궁금했지만 우선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러자 퍼드롬은 머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그릇의 몸에 심어진 씨앗은 무한한 마기의 결정이지만 성장을 위해선 마기가 필요합니다. 바다에 물을 붓는 격이지만 그 방법이 저희 블랙스타의 성전에 있는 기록과 비슷했습니다. 성전의 기록이 틀리지 않다면 저희 마성자들이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마성자에 대해 물어보니 성신 리아주크를 섬기는 신도들이라 설명했다.
이번 대화를 통해 버트가 안 것은 두 가지.
하난 그림자의 이름이 ‘루하다’란 것과 리아주크란 존재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단 것이다. 루하다도 그렇고 초면인 퍼드롬조차 리아주크의 씨앗을 품고 있단 이유로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주지 않는가.
“그렇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버트가 문득 고마움이 들어 둘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둘은 잠깐 벙쪘다.
「그릇께서는 마땅히 받아야할 대우를 받는 것뿐입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그런 감사 인사는 기꺼울 따름입니다.”
버트는 헤헤 웃으며 씨앗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이것이 성장하면 자신은 어떻게 되고 씨앗은 무엇으로 변하는지. 그거에 대해선 퍼드롬이 대답을 망설였고 루하다가 대신 답해주었다.
「씨앗이 발아하면 마신의 힘이 깨어납니다. 당연히 신의 힘이니 그릇께선…… 아마 육체가 붕괴될 겁니다.」
버트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러다 루하다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왠지 헤어진단 말로 들렸기에 섭섭한 마음에 맞잡은 손을 꼼지락댔다.
“그렇구나…… 그럼…… 난 뭘 하면 되는데……?”
그녀의 말에 퍼드롬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희생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는 태도에 절로 경외심이 들었다.
“그저 마성자들의 힘을 받아들여 주시면 됩니다…….”
버트는 알겠다고 하며 언제 할지 물었다. 퍼드롬은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기다려 달라 말했다. 그러면서 실례한단 말과 함께 준비가 될 동안 푹 쉬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버트는 루하다와 둘만 남겨진 상황에 겸연쩍어하며 머리를 긁어댔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에 루하다에게 물었다.
“나한테 씨앗이란 걸 심은 이유가 뭐야? 굳이 나 말고도 있었을 텐데…….”
그 말에 루하다는 동그란 두 눈으로 버트를 바라보았다.
「마신의 씨앗을 받아들일 그릇이 온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씨앗을 심으라고 했습니다. 밤을 품은 검사가 나타날지니…… 아, 이 부분은 블랙스타에 내려진 예언입니다. 저는 불과 몇 달 전에 받았지만 블랙스타는 뒷 구절까지 더해서 다른 예언을 10년 전에 받았다고 합니다.」
예언? 그보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되다니. 마치 운명적으로 이 게임을 하게 된 기분에 싱숭생숭했다.
판타지아의 시작과 씨앗의 결합, 「밤」 장비의 수집과 기사로의 선택. 마치 누군가 뒷공작이라도 한 것 같은…….
“아.”
버트의 머릿속에 그려진 건 캐릭터의 외형을 만들 때 안내자라 했던 NPC였다.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무심코 파트라고 중얼거리곤 루하다에게 리아주크에 대해 물었다.
「저를 만들어주신 존재이자 이 땅에선 성신이라고 불리는 신격화 된 분이십니다. 몬스터의 시초이자 그들의 근원인 마기의 시작점이신 건 저 아니면 그분과 관련된 자들만이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조금 어려운데…….”
「이 땅을 더 돌아다니시다 보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다만 이곳에 알려진 것과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이 다른 듯하니 때가 되면 차차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버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어갈 말이 없자 머쓱해하며 손을 꼼지락 댔다.
그렇게 십 분 정도 지나고…….
“그…… 어…… 혹시 내 피를 먹기 전의 일들…… 기억나?”
루하다가 그렇다고 하자 버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음…… 그때 막 내 몸 풀어준다고 주물렀을 때는…….”
「물론 기억합니다.」
버트는 그 대답을 듣고 침을 꼴깍 삼키며 뜸을 들였다. 그리고 없는 용기를 다 짜내 말하였다.
“그, 그럼 말야……!! 나, 나…… 몸 좀 풀어줄 수 있어……? 그 막…… 어깨도 뻐근하고, 다리도 아프고…… 어…… 그리고…….”
루하다의 눈이 웃는 것처럼 휘어진 건 왜일까. 그는 특유의 잠잠한 움직임으로 다가가선 버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꾹꾹 눌러지며 시원하단 느낌이 점점 들뜨게끔 만드는 손길로 이어졌다. 바로 버트가 원했던 그 감각이 깨어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버트의 황홀한 신음이 퍼져나갔다.
*
동혁은 세영과 은송에게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그전에 갑자기 사라진 은송을 추궁했다. 은송은 갑작스레 일이 터져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세영은 킥킥 웃더니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또 아이템 복이 터졌다며 동혁의 속을 긁었다. 동혁은 몇 번이고 부럽지 않다는 걸 강조했다.
“가지러 갈게.”
세영은 동혁 몰래 은송에게 속삭였다. 은송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만 까딱였다.
“우와~”
세영이 놀러와서 가장 먼저 한 건 접속기기에 장치 하나를 부착한 것이었다. 그녀는 뭔가를 기다리는지 은송에게 여타 잡다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은송은 세영의 감칠 나는 말솜씨에 감탄했다.
단 한 순간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어쌔신의 아찔한 모험담! 은송의 심장이 절로 뛰었다. 마냥 듣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직접 하는 그녀는 어떨까!
내심 기사 말고 암살자를 택했어야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보니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다른 암살자 플레이어랑 마주쳤는데”
한창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던 순간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세영이 달아놓은 접속 기기에서 난 소리였다. 세영은 은송을 향해 손짓을 하고 침대에 폴짝 올라앉았다. 세영은 은송을 옆에 앉혀두고 리모컨을 꺼내 눌렀다. 그러자 펼쳐지는 허공의 영상, 바로 버트의 모습이었다.
은송이 놀라서 도망가려 하자 세영이 어깨를 꾹 눌러 저지하고 영상을 보게 했다. 은송은 민망해하며 앞을 못 보다 점점 버트의 음탕한 몸부림에 정신이 뺏겼다. 그래서 베개를 끌어안고 땡그란 눈으로 집중하게 됐다.
세영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은송을 자신의 품에 넣고 관람하였다. 은송은 버트의 모습에 경악했다.
정말 몰랐는데 이렇게까지 야했다니……!! 그녀 말마따나 완전히 포르노가 아닌가.
그것도 방영불가 수준!
은송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세영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곤 귀에 대고 야하다고 속삭였다. 은송은 시뻘개져서 주먹으로 그녀를 두들겼다.
세영은 미안하다며 웃더니 영상의 한 부분을 지적했다. 바로 라이칸들에게 처음 겁탈당한 때였다.
은송은 버트가 로그아웃을 할 수 있음에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달달 떨면서 세영을 보았다. 세영은 능청스럽게 히죽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은송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더니 이어지는 세영의 코웃음에 장난스레 한 번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감상을 끝내고 세영은 은송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접속기기에 부착된 장치를 뽑아가면서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은송은 뭔가 단단히 목줄이 걸린 느낌이었다. 물론 불편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려놓을 수 없지 않은가. 이왕 알게 된 거 잊어버리자는 듯 고갤 세차게 저으며 판타지아에 접속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