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6화 (6/104)

〈 6화 〉 6 ­ 라피에 초원 下

* * *

며칠 뒤, 은송은 평소처럼 판타지아에 접속했다.

“흐윽!”

아래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쾌락. 라이칸들은 자신…… 그러니까 로그아웃 된 버트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축 늘어져있으면 엎어져서 해야 하는데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을 벌이는 것인가?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버트의 배 밑에 설치된 구조물이었다.

윗면이 좁고 아랫면이 넓은 사다리꼴 형태의 이 물건은 사람 하나가 편히 엎드릴 수 있었다. 거기에 밑에 부분은 바닥에 고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고 미세하게 앞뒤로 흔들리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축약하면 머리없는 목마와 같았다. 덕분에 이건 라이칸들과 성교하기 편해졌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아냐면…… 이미 써보았기 때문이었다. 맨몸으로 당하는 것보다 이 구조물에 묶여서 당하는 게 더 편했다.

과거 인간들을 잡아다 아이를 낳게 했었다던 말이 사실인 듯 했다. 이 장치엔 도망칠 수 없게 쇠사슬에 연결된 가죽 수갑이 달려있었다. 당연하게도 버트의 손목엔 이게 채워져 있었다.

이런 장치에 묶여 밤낮없이 쑤셔 박히게 된 계기는 바로 버트의 자궁 속에 심어져있는 리아주크의 씨앗(혹은 마신의 씨앗)이란 것 때문이었다.

실신한 버트를 데리고 성교를 했던 라이칸들은 그녀의 진액을 먹었을 때보다 더 많은 마기를 취하고 강해졌다. 라이칸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석했다. 그리고 생식기를 통해 씨앗과 좀 더 가까워진 것 때문이란 가설이 나왔다. 이것이 사실로 굳혀지자 키퍼가 이 장치를 끌고나왔다.

버트는 그 후 돌집으로 돌아왔고 이 장치에 묶여서 쉴 새 없이, 하루 종일 라이칸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수갑을 풀어주는 건 식사와 목욕 때만. 쉬는 시간도 그때뿐인데 그마저도 감시 격인 라이칸들에게 엉덩이를 내밀어줘야 했다. 그래서 버트의 음부엔 하루 종일 라이칸의 정액으로 가득 했다. 이제는 진짜 늑대를 임신할 것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정말 위험했다.

“응? 이 년 깼는데. 푸흐흐…… 자는 동안 얼마나 상대했는지는 알까.”

버트는 입을 우물거리면서 몸을 틀어댔다. 뱃속이 가득 찬 이 느낌. 접속할 때마다 느껴졌다. 백여 마리가 쉴 새 없이 치고 들어오니 그럴 만도 하지만…….

삽입하고 있던 라이칸이 사정을 하고 빼나자 다음 녀석이 곧바로 차례를 이어받았다. 그렇게 다음 차례, 다음 차례. 버트가 의식을 갖고 있을 때만 일곱 마리의 라이칸과 교미를 했다.

“흐…… 흐으에……”

버트는 눈을 반쯤 뒤집은 채 혀를 빼물고 웃고 있었다. 아무리 축축하고 육체가 튼튼하다지만 십수 개의 남성기가 들락날락하니 그녀의 질은 한계에 다다랐다. 저릿한 느낌을 떠나 뻑뻑해져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야말로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쉴 시간이라도 만들어볼 요량으로 베베 꼬인 혀로 부탁했다.

“시게 해주세여…… 졔발…… 너므 힘드러여…… 졔발……”

“네 처지를 잊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넌 그냥 먹이라고. 언제라도 뜯어먹을 수 있는 먹이. 그러니 아무리 빌어봐야 들어줄 이유가 없어. 게다가 스스로 수갑을 차는 주제에 이제 와서 봐달라고 하면 봐줄 것 같나, 멍청한 암컷.”

라이칸은 그렇게 답해주며 음경으로 힘껏 올려쳤다. 그의 말대로 수갑을 푸는 건 라이칸이 해줄 수 있었지만 채우는 건 그녀의 협조가 필요했다.

버트는 스스로 속박된 것이다.

버트는 발끝을 세우며 맛이 간 표정이 되었다. 그녀에게 보이는 건 라이칸 뿐이요, 들리는 건 질척대는 교미 소리와 자신의 신음 뿐, 느껴지는 건 오르가즘이었다. 버트는 헤실거리면서 넋이 나간 사람마냥 혼잣말을 지껄였다.

“기분 좋아…… 히흐흐…… 힘든…… 데…… 너무으 좋아…… 그림자들이 해주는…… 것보다 더 좋아…… 으이히…… 나가야 하는데…… 나가기 싫어…… 여기서 계속…… 당하고 싶어…….”

버트는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온갖 음담패설을 뱉어낸 것이다. 그리고 라이칸들은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버트는 가끔 오밤중에 수갑을 풀고 일어났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의 뜀박질이라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데도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앉아 휴식을 취하기만 했다.

그럴 때면 감시 중인 라이칸이 슬금슬금 다가왔고 버트는 순순히 결합을 허락했다. 이쯤 되니 종족이 달라도 그녀가 얼마나 음란한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수컷의 정복욕도 묘하게 자극하고 만족감도 충만할 정도로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이 일을 계기로 라이칸슬로프의 전력이 크게 올랐다. 못해도 이전보다 4배 가까이 상승한 것이다.

성욕도 풀고 힘도 강해지고. 잘하면 번식으로 개체까지 늘릴 수 있었으니 라이칸들은 신이 나서 허리를 흔들어댔다. 덩달아 버트 역시 행복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 이상 줄이 없고 감시 격으로 남은 라이칸들이 근처에서 엎드려 쉬었다. 버트는 엎어진 채 바들거리고 있었다. 그런 버트의 하반신이 정액으로 뒤범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괜찮아진 버트가 수갑을 풀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라이칸들이 귀를 쫑긋거렸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치려고 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흐우.”

예상대로 버트는 자기 잠자리(건초더미)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버트는 휑한 다리 사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뻥 뚫린 구멍으로 매끈한 음부에서 정액이 줄줄 흐르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니 괜히 민망해진 버트는 입을 우물거리며 다른 생각을 했다.

‘어떻게 수리는 해야겠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장비는 수리가 안 됐다. 안 그래도 벗을 수 없어서 곤란한데……. 하지만 이 사실을 알기까진 아직 한참 남았기에 여기서 벗어나면 가장 먼저 수리공을 찾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정액이 줄줄 흐르는 음부를 가릴 만한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라이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녀석들의 진한 시선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 실컷 농락당한 뒤여서 그런지 부끄러움이 더했기에 다리를 오므렸다.

라이칸들은 그저 지들끼리 킬킬거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구경거리. 버트는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부끄러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만큼 민망한 상황이 없었다. 다리를 좁혀 치부를 가린 버트는 시선을 흐렸다.

“이봐 암컷. 이런 짓 당하는 게 그렇게 좋아?”

“네엑!?”

버트가 해괴한 소리를 내며 반응하자 라이칸들이 폭소했다. 그리곤 슬금슬금 버트를 향해 다가갔다.

“도망칠 수 있을 텐데도 달아나지 않고…… 좋다고 그렇게 엉덩일 흔들어대니 우리야 응해줄 수밖에.”

라이칸 하나가 슥 붙어서 목덜미를 핥았다. 음식이 되어서 맛보여지는 기분에 버트는 질겁한 눈으로 라이칸을 보았다.

나머지 라이칸도 피부가 드러난 부분엔 혀를 디밀었고 버트는 부드럽게 애무해주는 라이칸들의 행태에 어리둥절했다.

왜 이러는 것일까. 평소 같으면 그냥 쑤셔대기 바쁜 녀석들이. 아니 그보다……

어째서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걸까.

정성스럽게 핥아줘서일까. 지금은 녀석들과의 섹스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버트가 꼬물거리며 좋아하니 라이칸들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혀로 몸 구석구석 닦아주고 버트는 잠깐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서 한다는 건 허겁지겁 착용하고 있던 장비 중 벗을 수 있는 건 다 빼버리는 것이었다.

출렁이는 젖가슴과 함께 상반신의 매끈한 속살이 드러났다. 딱딱한 껍질 안의 부드러운 육질을 본 것 마냥 라이칸들이 군침을 흘렸다. 녀석들의 혀는 상체 쪽으로 몰려들었고 버트는 벗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녀석들에게 마음껏 시식 당했다.

라이칸들은 땀에 젖어있는 버트의 살결을 맛보면서 이런 식으로도 마기를 취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체액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살은 어떨까!

라이칸 하나가 그 맛 좋아 보이는 유방의 살덩이를 살짝살짝 물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버트의 아랫도리를 향해 라이칸이 음경을 디밀었다.

버트는 늦은 새벽이 되고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

다음 날, 더 이상 버트는 구조물 위에 엎드리지 않았다. 이젠 건초더미에 앉아 늑대를 향해 팔을 벌리며 안겼다. 다른 자세여서 낯설긴 해도 라이칸들은 곧잘 적응했다.

버트는 섹스를 하면서 팔다리로 라이칸을 끌어안았다. 졸지에 매달린 꼴로 일을 치렀지만 녀석들도 체온과 함께 맨살을 느끼니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버트는 녀석들을 안으며 푹신한 게 기분이 좋아 귀에 대고 아첨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의외로 매혹적인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한 번 사정하고 나서도 다시 허리를 흔들어대는 놈들도 나타났다.

그렇게 십여 일. 이젠 노리개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버트가 도망치는 걸 포기했단 걸 알아주는 걸까. 이따금 녀석들은 버트에게 기분 좋은 서비스를 해주었다.

버트가 그렇게 나날이 적응해갈 때…… 한 라이칸과 섹스를 하고 있었고 다른 라이칸들이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귀에 거슬리는 소란스러움이 훼방을 놓았다. 라이칸들이 일제히 달려나가는 것을 보며 버트는 멀뚱히 있다가 장비를 챙겨 입고 따라나섰다.

「하찮은 똥개들이 잘도 까부는구나!」

초원을 달리면서 들은 소리는 그야말로 괴물의 목소리였다.

쩍쩍 갈라지며 땅을 울리는 그 소리에 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서 새까만 형상이 라이칸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주변에는 몇 라이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검은 형상은 마치 먹물로 만든 채찍처럼 달려드는 라이칸 하나를 유연한 팔로 후려쳤다.

한 번에 하나씩.

그 형상의 손속엔 자비가 없었다. 일격에 안 죽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형상은 계속 해서 라이칸들을 쓰러뜨려나갔고 이쯤 되니 키퍼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키퍼가 나타나자 그림자 형상은 그를 쳐다보았다. 새까만 몸 중에서 유일하게 색이 다른, 초승달처럼 휘어져있는 하얀색 일색의 눈이 키퍼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리아주크 님의 그릇을 어디에 숨겼나 잡종!」

형상의 외침에 라이칸들이 분개했다. 유서 깊기로는 리버화이트 다음인 키퍼에게 저런 막말이라니! 하지만 생생한 모독에도 라이칸들은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놈이 보인 힘도 힘이지만 위압감 탓에 기가 죽어버렸다.

키퍼는 특유의 거대한 함성을 질렀다. 영향권 밖인데도 버트는 일시적으로 마비가 왔고 라이칸들도 공포에 빠졌다.

버트는 상상 이상의 위력에 놀라는 한 편 경악할만한 장면을 목격했다. 형상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키퍼와 대치하는 모습이었다. 더 나아가 형상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꾸물거렸다.

「시끄럽게 짖을 줄만 알지 실속이 없구나. 압도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마!」

형상의 크기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녀석은 버스와 견줄 정도로 거대한 키퍼가 머리를 들어야할 정도로 자라났다. 급기야 그 거대한 키퍼가 쥐새끼로 보였다.

그리고 모습이 바뀌었다. 녀석의 모습은 마치…… 악마와 같았다.

높이 솟은 뿔 다섯 쌍, 뾰족한 꼬리, 비대하게 발달한 상체와 역발형 다리, 염소 발굽. 특이한 점은 눈을 제외한 전신이 칠흑빛이란 것이었다.

악마의 그림자.

그렇게 생각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변화가 온 건 외견이 아니었다. 녀석은 방금보다 기세가 더 강해졌다.

숨쉬는 것조차 힘든 압박감.

키퍼는 선제공격을 가했다.

커엉!

포효와 함께 달려든 키퍼는 녀석의 손등에 얻어맞았다. 그리고 피를 뿜으며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한 방!

그 강한 키퍼가 단 한 방에 쓰러졌다. 라이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혼비백산 했다.

“키퍼를 지켜라!”

“싸워!”

그때 형상은 라이칸들을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분노하며 소리쳤다.

「이익…… 이 놈들…… 비정상적으로 마기가 많아서 이상하다 했는데…… 그릇을 해하였구나! 이 미천한 들개들아! 과분한 힘을 얻은 대가가 뭔지 보여주마! 감히 리아주크 님의 그릇을 건드린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형상의 꼬리가 십수 갈래로 갈라져선 라이칸들을 꿰뚫었다. 그리곤 그들에게서 빨아들일 수 있는 모든 걸 가져갔다.

덕분에 라이칸들은 털이 푸석푸석해지면서 점점 말라갔다. 키퍼는 안타까움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라이칸들은 서서히 죽어갔고 형상은 그렇게 라이칸의 힘을 뺏어가…… 다가 멈추었다.

녀석은 발치에서 느껴지는 여린 공격과 라이칸의 냄새에 손톱을 세워 휘둘렀다. 키퍼는 형상의 다리를 공격하는 게 무엇인지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토막 날 위기에 처한 것도 보았다.

버트!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죽을까……?’

버트는 {참격} 스킬을 써보았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어서 날아오는 공격에 이젠 끝이라 생각했다.

그 순간 형상이 멈추었다. 그리고 곧장 버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의를 차렸다.

「죄송합니다 그릇이여, 들개들의 노린내가 심하여 미처 알아 뵙지 못 하였습니다…… 모쪼록 이 실수는 놈들을 전부 죽이고 나서 처벌 받겠습니다…….」

“무, 무…… 무슨 소리야……?”

형상은 버트의 말에 유심히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의문을 알아챈 형상이 점점 작아지더니 곧이어 여러 개의 난쟁이들로 바뀌었다.

그림자들이었다! 동굴에서부터 함께 했던 녀석들이었다!

버트가 얼이 빠져있는 사이 그림자 하나가 말하였다.

“그릇의 일부 덕에 제 힘을 어느 정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 들개들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아, 아냐! 그만해! 쟤들도 풀어주고!!”

그림자가 의도를 파악할 새도 없이 버트는 울상이 되어 재촉했다. 그러자 꿰뚫려있던 라이칸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버트가 그중 가장 가까운 녀석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쉭쉭거리며 힘겹게 숨을 쉬는 걸 보며 버트는 안절부절 못하였다.

“얘 어떡해…… 치료해줄 수 없어……?”

버트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먹이고, 상처에 부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희 역시 방법은 없습니다. 온전히 힘을 되찾은 것이 아니어서 빼앗은 걸 돌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놈들이 그릇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은데……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난 괜찮아!! 애들이 나한테 한 건 상관없으니까 어떻게 좀…….”

정이 들어서 그런 것인가. 늑대들을 쉽게 베어버렸던 그녀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몬스터를 동정하고 있었다. 눈물 방울을 떨구면서 힘겨워하는 라이칸을 살리려고 고뇌하다니.

“마기다.”

키퍼가 입을 열었고 그림자들이 사납게 돌변했다. 그들도 대강 버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 충만한 이질적인 기운…….

그래놓고 뻔뻔스럽게 나서는 키퍼가 혐오스러웠다.

“이 염치없는 잡종! 주제 넘게 나서지 마라! 함부로 그 분의 힘을 탐내고 씨받이로 사용한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어 나서는 것이냐!”

“살리고 싶은 거다.”

키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버트를 향해 다가가더니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에 다른 라이칸들이 굴욕감에 울부짖었다. 이제껏 족장 외의 존재에겐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키퍼가……

라이칸슬로프들의 우상이자 영웅이던 그가!!

“부탁한다. 이들을…… 이들을 살려다오. 너의 일부면 무엇이든 좋으니 먹여다오. 마기를 잃어 죽어가는 놈들이다. 마기만 충족된다면 스스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니…… 부탁한다.”

“능멸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잡종! 죽는 건 똑같으니 되살려도 무의미하다!”

키퍼는 비장하게 말하였다.

“그러면 내가 대신 죽으마. 수백 마리의 동포가 뒤섞인 힘이다. 나를 죽인다는 건 곧 라이칸슬로프의 긍지를 죽이는 것. 나 하나로 대처해주었으면 한다.”

그림자가 분개하며 다시 입을 열기 전 버트가 말을 받았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일부면 된다 했지?”

“안 됩니다. 그릇이여! 몸을 보존하셔야……!”

“……읏, 따가워.”

버트는 그림자가 말릴 새도 없이 팔을 그어 라이칸들의 입에 피를 흘려주었다. 그러자 라이칸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얼마 안가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 회복됐다.

되살아난 동족들을 보며 라이칸들은 환호하였다. 되살아난 녀석들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를 마주하며 면목 없는지 눈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환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뒤늦게 키퍼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살아난 것임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랬기에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버트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림자들은 그녀의 팔의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 흐른 피를 모아두었다. 그리고 버트에게 섭취의 허락을 구했고 흔쾌히 수락을 받았다. 녀석들은 기뻐하며 피를 삼켰다.

그러자 몇 그림자들이 서로 합쳐지더니 전체적인 수가 줄어드는 한편 색은 좀 더 짙어지고 몇 녀석들은 지적인 분위기까지 흘렸다.

그리고 이 일이 대충 마무리 되자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지더니 흉측한 손을 뽑아냈다. 키퍼의 목숨을 취하려는 것이다. 라이칸들이 그 모습에 절규할 때 버트가 그를 제지했다.

“죽이는 건 너무 심하잖아.”

그녀에게 라이칸슬로프는 이제 단순한 몬스터가 아, 하나의 생명체이자 지성체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처벌이 없는 건 그릇을 욕보인 놈들에게 너무 과분한 처사입니다. 무슨 짓을 당하였는지 떠올려주십시오, 그릇이여.」

그림자는 마기를 강탈당하고 막 대해진 것을 지적했다. 버트는 겁탈 당하고 괴롭혀진 걸 떠올리며 홍조를 피워 올렸다.

확실히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심한 짓을 당했다. 버트도 좋다고는 했지만 이건 엄연히 범죄였다.

“그…… 그럼.”

버트는 키퍼의 앞에 서더니 녀석에게 목을 낮춰보라 했다. 그리곤 그대로 발끝을 세워 키퍼의 목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푹신한 털. 햇빛에 잘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한 털가죽에, 버트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얼굴을 비볐다.

“으…… 한 번 이렇게 해보고 싶었어…… 기분 좋다…….”

키퍼는 버트의 호감을 받고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입장이 애매했다.

처벌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러자 버트는 길길이 날뛰는 그림자에게 놔주고 가버린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림자는 아무 말도 못했고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걸 참작시켜준단 말로 잠재웠다. 그리고 녀석들이 대피시킨 라이칸의 족장 리버화이트는 버트의 품에 안겼다.

“귀여워……”

그녀는 리버와 얼굴을 비비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푹신한 키퍼의 몸에 기대어 앉기까지!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헤벌쭉한 버트의 앞으로 라이칸들이 뭔가를 하나둘 물어왔다. 그건 바로 창고에 쌓여있던 물건들이었다. 이게 웬 거냐는 물음에 라이칸들은 눈치를 보다 상납품이라며 창고의 물건들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버트는 고맙다며 헤헤 웃곤 리버와 함께 아이템들을 구경하였다.

“진짜 많다…… 정말 다 받아도 되는 거야?”

뒤에서 살벌하게 노려보는 그림자들 때문에 대답 못하는 라이칸들 대신 키퍼가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가 갖고 있어봐야 쓸모없는 것이다.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것들이지. 게다가 더 이상 보관할 장소도 없었다. 차라리 거길 다른 용도로 쓰는 게 낫지. 그러니 마음껏 가져가라.”

버트는 아이템을 뒤져보다가 자신이 원하던 걸 찾아냈다.

「밤바다의 허리띠」

다른 것도 있나 찾아보았지만 허리띠가 전부였기에 일단 착용해보았다. 그러자 허리띠가 하갑과 서서히 융합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단순한 검은 가죽 벨트에서 철판을 여러 개 덧대 만든 철갑 치마가 솟아났다. 하나의 장비로 합쳐진 것이다.

버트는 덕분에 다리 사이에 뚫린 구멍이 가려져 좋아했다. 비록 여러 겹의 철판을 이어서 만든 것이어서 틈이 보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당장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었으니까. 다리 사이의 구멍이야 일단 이 철판 치마로 가리면 될 일이었다.

버트는 위기(?)를 극복하자 다른 아이템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기사의 장검」 「그림자 추출검」 「잃어버린 왕국의 보물」 「귀르디의 마법서」 「고목 방패」 「양피지」 「낡은 판금갑옷」 「녹이 슨 장창」 「퓨실의 보석」 「부러진 레이피어」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보던 버트는 ‘주머니‘가 가득 찼단 메시지를 보며 아쉬워했다. 그러자 키퍼가 자신이 옮겨주겠다 말했다.

버트는 니스와 라이를 떠올렸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혼자 옮기는 것보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게 나으리라. 버트는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을 받았으니 떠날 채비를 했다. 라이칸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던 힘의 원천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버트는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어떻게 할 거냐 물었다. 키퍼는 족장이 클 때까지 세력을 비축해둬야 하니 조용히 있을 거라 답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떠나는 걸 굉장히 아쉬워했다.

버트는 순간 나쁜 생각이 들어 침을 삼켰다가 그림자를 힐긋 보며 고민했다.

‘할까?’

결국 실천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림자에게는 어느 지점에 갈 테니 가서 기다리라 말하고 키퍼에게 이곳에서 더 머무르고 싶다고 하였다.

이유를 묻는 키퍼를 향해 버트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버트는 라이칸들의 힘을 더 키워놓아야 안전하지 않겠냐며 말을 더듬었다. 키퍼는 고마워하면서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럼 피나 살을 주겠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 동포 전부에게 주기엔 힘들 텐데.”

“그……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으음…… 막…… 핥고…… 넣…… 고…….”

키퍼는 되물으려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라이칸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언제라도 다시 온다면 동포들에게 힘 좀 써 달라 말해놓지. 신경도 좀 쓰라 하고.”

“아, 아니…… 그런 의도로 남겠다는 게 아닌데……!”

그의 대답에 버트가 민망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키퍼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고 버트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

며칠 뒤, 라피에 초원.

니스와 라이가 두런거리며 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보스는 어떻게 하지? 버트가 모으는 걸 갖고 있잖아.”

“그러게. 만만치 않은 녀석이긴 한데.”

라이의 말에 니스가 고민했다. 보스라고 해봐야 보스급 엘리트 몬스터에 불과했다. 그렇긴 해도 단 몇 명으로 공략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정말 여기에 있는 거야?”

“데이터 상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어. 좀 더 계산해야 자세한 위치까지 나오겠지만…….”

이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뭔가 거대한 동체가 그들 주변에 미끄러지며 멈춰섰다. 그게 무엇인지 라이가 확인한 순간…… 둘은 말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새하얀 털에 거대한 덩치. 샛노란 눈에 흉악한 송곳니들. 그들은 이 거대한 늑대를 보며 떠올렸다.

방금까지 공략법을 토의하던 보스급 엘리트 몬스터! 초원의 지배자.

키퍼 화이트슈트!

난데없이 나타난 이 초대형 몬스터 때문에 니스와 라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곧장 전투에 돌입하려는 그들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니스! 라이!”

정확히 자기들의 이름을 지목하며 부르는 여인의 음성. 시선을 올려 근원지를 확인했다. 그러자 키퍼의 등에서 자루들이 쿵쿵 떨어졌다. 그 안에선 아이템이 와르르 쏟아졌다.

둘은 그걸 보다가 마지막 자루와 함께 내려선 버트를 확인하고서 상황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버트……?”

“미안, 급하게 온다는 게 놀라게 했네…… 고마워!”

버트가 키퍼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감사인사를 보내자 그가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안아달란 듯이 두 팔을 벌리는 버트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머리를 숙여 안겼다.

버트의 행복한 포옹이 끝나고 키퍼가 떠나자마자 니스와 라이는 버트를 들볶았다. 대체 엘리트 몬스터를 어떻게 타고 왔는지, 무슨 관계인지, 어떻게 한 건지, 저 아이템들은 무엇인지 속사포처럼 물어대는 통에 버트가 둘을 먼저 진정시켰다. 그리고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연찮게 대화를 하게 됐는데……”

버트의 설명은 조잡했다. 워낙 부분부분 얼버무리려는 게 많아서였다. 그래서 라이도 반신반의하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니스는 라이를 간신히 달래고 버트를 묘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버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템들로 관심을 돌리려했다.

~같은 방법으론 안 넘어가.

귀를 간질이는 니스의 목소리. 버트는 진실을 말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니스가 한 아이템에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추출검」

바로 그녀가 찾던 세트 아이템의 마지막이었다.

“이거 내가 찾던 거야! 마지막 세트 아이템이라고!”

버트는 좋아라하는 그녀를 향해 손뼉을 쳐주었다.

“퀘스트의 끝이 여기였나보네. 운이 좋다, 그치?”

“응? 그러게. 우후후…… 이제 이걸 가져가서 보여주기만 하면…… 기대해. 플레이어 중 최초의 '마스터'는 내가 될 테니까!”

그녀 말고도 라이 역시 아이템들을 뒤지며 행복에 빠져들었다.

“우오오! 들짐승의 원혼이랑 뼈장식 지팡이에 제물이 된 자의 일부까지?! 컥…… 귀…… 귀르디의 마법서?! 이게 왜 여기 있어?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연금술 개론에 벼락을 부르는 주술서적……? 이야 맙소사! 이건 대박이야!”

그렇게 서로 가질 아이템을 나누고 있을 때…… 니스가 자루 안에 정신이 팔린 라이를 힐긋 보더니 버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의 하반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버트는 시선을 느끼고 허리띠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 여기에 내가 찾던 게 있었어. 착용하니까 바로 이렇게 합쳐지더…….”

철그럭­

"라……?"

니스는 버트의 허리띠와 연결된 철판 치마를 붙잡고 번쩍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버트의 동공이 수축됐다. 얼굴색의 변화도 없이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사고가 멈췄다.

니스는 그대로 몇 분 간 다리 사이를 보다가 치마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버트를 조용히…… 정말 주변의 소리가 죽어버린 것처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안하고 라이의 곁으로 가서 함께 아이템을 분류하였다. 버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후 버트는 니스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귓속말을 해보았으나 그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체 왜……?’

뭔가 눈치 챈 것일까?

니스가 치마를 올려서 본 것은 그림자의 몸으로 구멍이 막힌 바지였다. 혹시나 해서 가려둔 것인데 니스가 이렇게 확인해버릴 줄이야.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서 하는 행동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버트가 지레 겁을 먹었다.

만약에 알고 있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고, 그걸 즐겼단 걸 알았다면?

아무리 부끄러운 비밀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친구인 그녀에게까지 고의적으로 숨기려든 걸 알았다면……?

버트는 두려움에 떨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람에게 겁을 먹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