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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1 검은 동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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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송이 ‘이 게임’에 대해 솔깃해 한 이유는 그저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극찬과 언론의 홍보로 얼핏 들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은송에겐 그저 잘 만든 게임으로밖에 안 보였다. 특히 누굴 낚으려고 내민 캐치 프레이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성형 대신 게임을!’ 이란 문구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헌데 그런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게 있었으니…… 바로 화려한 마법과 검술, 괴물과 검사, 중세 건축물들! 그리고……
귀엽게 꼬리를 치고 있는 강아지였다.
“귀엽다…….”
은송의 집안사정 상 애완동물은 키울 수 없었다. 동물이라면 질색하는 부모님 때문에 길가를 누비는 길냥이나 강아지들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 은송에게 포동포동한 다리로 걷는 강아지의 모습에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앙증맞은 녀석들의 모습은 지루한 그녀의 삶의 활력소였다.
물론 이것이 게임의 첫 걸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애들과 함께 한 건 스터디 그룹도 아니요, 운동도 아닌 바로 게임이었다.
여자애가? 이런 반응이 적잖이 있었고 그때마다 은송은 동성친구인 세영과 함께 많은 남자애들을 실력으로 눌러주었다. 당연히 그녀들은 친구들 사이에선 이슈가 되었고 은송도 그걸 싫어하진 않았다.
지금은 옛 영광이었다. 학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게임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즐거움마저 잊진 않았기에 오랜만에 마주한 게임 앞에 선 은송은 한껏 들떠있었다.
“……흐음.”
은송은 괄괄했던 과거를 떠올리며눈앞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판타지아’ 라고 쓰인 커다란 로고. 그 안엔 플라스틱 헬멧 같은 것이 하얀 완충제에 싸여있었다.
‘이거 뿐이야?’
과장된 광고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고작 밥통만 한 이게 어떻게 가상현실을 만들어내고 또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건지.
가격은 가격대로 엄청났다. 치킨 10마리는 우습게 뜯을 정도였나. 그래서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가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은송은 자칭 게임전문가라 하는 동혁에게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헬멧 하나만 달랑 왔는데? 이게 끝임?
게임 몇 년 안 하더니 완전 일반인 됐네. 그래 봬도 듀크 사에서 정식 발매하고 인증까지 완벽하게 마친 제품임. 의심ㄴ
ㅇㅇ...
뒤이어 동혁은 듀크가 20년 동안 게임회사 부동의 1위라는 둥, 판타지아는 오픈 베타, 클로즈 베타를 포함해 15년 넘게 별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자세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예전부터 세영이나 동혁과는 같이 게임을 해왔지만 전부그들이 하자는 걸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스스로 시작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게임에 소극적인 건 아니었다. 그저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굳이 말하자면 주관성과 객관성이 혼합되어있다 해야 하나. 아무튼 대부분의 선택과 조사는 동혁의 몫이었다. 경력이 있는 만큼 그의 정보는 믿을만했다. 그래서 은송은 별 의심 없이설명서를 읽으면서 상자 안의제품을 꺼내들었다.
“본 제품은 듀크에서 만든…… 시간 감각은 최대 8배까지 확장시킬 수 있고 알람에 수면보조기능에…… 음…… 영양 결핍 건강 문제 발생 시 제품에서……. ……뭐라는 거야. 그냥 해보는 게 낫겠다.”
은송은 설명서를 고이 접어 던지고 조잡해 보이는 플라스틱 헬멧을 착용했다. 생각 보다 머리가 답답하지 않았다. 앉아서 하는 것보단 누워서 하는 것이 좋다는 동혁의 말을 떠올리며 냅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문자가 눈앞에 떠올랐다. 정확힌 헬멧의 반투명한 눈덮개 쪽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문자가 보이고 얼추 비춰지던 방 천장이 새하얀 빛으로 덮여졌다. 눈을 깜빡여 본 은송은 고개를 내려 보곤 깜짝 놀랐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자신의 눈에 비친 두 손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꼼지락거리는 건 물론 호흡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다.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곳에 온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정도였다.
은송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을 살폈다. 몸에는 달랑 순백의 원피스 한 장. 그리고 자신은 원피스 색보다 더 하얀 공간 위에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판타지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은송은 눈앞에 나타난 꼬마를 바라보았다. 어린이 정장을 입은 귀여운 꼬마는 은송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곤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처음 시작하는 분들을 인도해주는 안내자, 파트라고 합니다.”
“예…… 어…… 안녕?”
귀엽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는 파트를 보며 은송은 존대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인사를 받은 파트는 기다렸단 듯이 판타지아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았다. 제국이 어쩌구, 대륙이 저쩌구…… 그녀도 가끔 소설 정도는 읽어 보았기에 뻔한 얘기는 듣지 않고 넘어갔다. 보나마나 이 세계에 위험이 닥쳤으니 그대가 용자가 되어…… 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말들을 내뱉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게임 소개에 대한 건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넘어갔다.
그 다음 캐릭터의 외형과 성향을 결정하는 부분에서 눈을 깜빡거렸다. 정면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배경 위에 전신거울처럼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알몸이었다!
“어, 어? 어?!”
은송은 놀라서 손을 막 휘저어댔다. 그러자 눈앞엔 은송의 손으로 변형된 괴물체(?)가 서있었다. 그녀는 침칙하게 그 괴물체를 바라보다 손을 갖다댔다. 이렇게 하니 딱 그 부분만 조금씩 변형이 되었다.
그녀는 이것이 판타지아에서 사용할, 일종의 아바타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은 뒤 고민에 빠졌다.
게임을 시작하는 대부분은 게임 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게임 내에서 거액을 주고 외모 변경도 가능하기도 해서 의외로 외모에 많은 투자를 하는 사람은 적었다. 외모에 고민할 시간에 하루 빨리 게임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물론 외모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범죄를 저질렀거나 잦은 변경으로 NPC들이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있었기에 제한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외모와 관련된 사건이 몇 개 터진 이후로 투자를 하는 경우는 적었다. 그래서 대부분 원판에서 약간 바꾸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면……”
아무튼 은송은 고민 끝에 단발이었던 자신의 머리칼을 길게 늘리고 머리색을 붉은색으로 바꾸었다. 여기에 약간의 곱슬거림을 추가. 이러니 칙칙했던 학생에서 제법 고급스러운 자태의 여인이 되었다.
겸사겸사 고민거리였던 배와 옆구리의 군살을 쭉 빼고 지지부진한 발육상태를 키웠다. 거기에 얼굴도 좀…… 이렇게 탄생한 자신의 두 번째 모습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은송은 그걸 보며 한숨 섞인 웃음소리를 냈다.
“그보다 여드름이나 주근깨, 피부색 손발톱 길이는 그렇다 쳐도……유두색이나 음모 길이까지 지정할 수 있어……? 너무 세심하잖아!!”
은송은 은근슬쩍 음모를 한 올도 안 남기고 유두 역시 손때도 안 탄 선홍색으로 골랐다. 그러더니 거북스러울 정도의 상세한 게임의 배려에 입을 불퉁거렸다. 대체 이런 걸 정해서 어디다 쓴다고 그러는 건지. 이 게임에선 성적인 요소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캐릭터 외형 설정이 끝나고 성향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로 많은 고민을 거듭하였다. 이때 생각 이상으로 이 게임에 빠져들었단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흥미가 무럭무럭 솟아버렸다.
커스터마이징이 이정도인데 본 게임은 대체 얼마나 리얼할까!
본인의 성격을 작성한 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선 선택지가 존재했다. 마치 심리테스트처럼 질답에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었다.
‘뒤에 있길 좋아하냐고? 아니고…… 앞서 싸우길 좋아한다면…… 조금 그럴 것도 같네.’
그렇게 결정된 것은 ‘기사’였다. 선택한 이유는 가장 무난해서였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번쩍이는 판금 갑옷을 입은 제 2의 자신을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말을 타며 질주하는 기사! 휘황찬란한 갑옷과 검으로 적군을 종횡무진하는 장군! 은송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닌, 자기가 백마를 타고 왕자를 구해내는 기사를 상상하며 작게 웃었다.
은송이 캐릭터를 다 만들고 완료 버튼을 누르자 환한 빛과 함께 그녀의 시야가 가려졌다. 그리고 게임에 접속했을 때처럼 새하얀 공간에서 눈을 떴다.
파트는 검은 공간에서처럼 전신 거울을 만들어냈다. 이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한 은송은 감탄했다. 이번엔 방금처럼 보여주는 게 끝이 아니었다. 몇 번 움직여본 은송은 방금 만들어낸 아바타의 모습이 똑같이 행동하는 게 보였다.
은송이 까만 눈동자로 거울을 세심하게 훑어보았다. 자기가 봐도 예쁘장한 게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성형을 할 바엔 판타지아를 하란 광고가 가슴에 쏙 박힌 순간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어 외모 중에서는 평균 이하란 걸 아직 알지 못했다.
“외형은 마음에 드십니까?”
“응!”
파트는 좋아라하는 은송을 보며 덩달아 들떴는지 맑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럼 판타지아에서 사용하실 이름과 시작할 마을을 선택해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 떠오른 녹색 직사각형과 그 안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미리 생각해두었던 이름과 마을을 외쳤다.
“실버트리! 그리고 판테스 왕국의 로디아 마을!”
실버트리란 이름은 본명인 은송을 한자어에서 영어로 단순 해석한 것이다. 이 닉네임은 무슨 게임을 하든 같았고 의외로 중복되는 경우가 없어서 애용했다. 로디아 마을은 동혁과 세영이 그녀에게 적극 추천해준 마을이었다. 여긴 둘이서 주로 활동하는 장소고 시작하기 무난한 곳이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리아주크의 가호가 함께하길…….”
‘리아주크?’
은송은 파트가 눈앞에서 사라진 자리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자 녹색 빛이 터져 나오면서 순식간에 로디아란 이름이 눈에 떠올랐다. 주변을 보니 제법 큰 마을에 홀연히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빵집에서나 맡을 법한 빵 굽는 냄새였다. 구수한 향이 코를 간질였고 은은히 풍겨오는 풀냄새에 취했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건 낡은 옷차림의 사람들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집들이었다. 집 군데군데 먼지와 거미줄이 끼고 벽돌이 어긋나 있었다.
실제 시골 가옥 저리가라 할 정도!
거기다 문을 열 때마다 시끄러운 경첩 소리를 냈고 똑같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생생했다.
냄새는 물론 피부에 닿는 모든 감각이 굉장히 현실적이었다. 가상이란 게 믿겨지지 않아은송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다.따가운 햇빛마저도 구현되는 게임이라니!거기다 손을 쥐었다 피면서 느껴지는 근육의 느낌마저 살아있었다.
“우와…….”
은송은 놀라운 기술력에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곳이 바로 판타지아인가!
그때남녀 한 쌍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송!”
“예……?”
그녀가 놀라서 돌아보자 주근깨가 가득한 녹색머리의 청년이 웃으며 서있었다.
“역시…… 나야 나, 동혁. 어째 넌 뭔 게임을 하딘 닉네임이 죄다 실버트리냐? 이제 좀 바꿀 때도 되지 않았냐.”
머리색만 다른 동혁의 모습에 은송이 어색하게 웃었다. 굳이 머리색만 다른 게 아니었다. 챙이 넓은 푸른 고깔모자에 바닥까지 늘어지는 로브와 지팡이. 아마 마법사인 듯 했다.
‘25살까지 동정이면 될 텐데 왜 굳이…….’
은송은 많은 말을 삼키며 동혁에게 물었다.
“뭐 어때. 외우기도 쉽고 정도 붙었는걸. 그보다 혹시 옆에는 세영이야?”
주홍빛 머리의 여인은 대답 대신 빙긋 웃곤 빙글 돌아보았다. 그러자 짧은 치마가 살랑이면서 속옷이 훤히 보였다. 은송은 그녀의 과감한 자태에 깜짝 놀랐다. 속옷이 보이는 건 둘째 치고, 거의 반라나 다름없는 복장은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수준이었다.
역시 게임이라 이건가. 그 생각을 하던 찰나 세영과 은송은 서로의 얼굴과 가슴께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서로의 ‘변형’을 묵과해주었다.
“에휴…… 그보다 처음 시작하는 거라지만 이게 뭐야. 갑옷은 어디가고 가죽옷만 홀랑…….”
은송은 불평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캐릭터의 직업을 선택할 때 본 멋들어진 갑옷이 아닌 몸에 딱 붙는 가죽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이래봤자 어깨와 가슴 어림만 두텁게 덧댄 것이지 배나 팔다리는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았다. 하의는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바지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
세영은 은송의 투정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도 처음엔 새까만 옷 입고 살벌하게 노려보는 모습 보고 암살자를 선택했는데 시작하니까 나시티에 반바지가 전부더라.”
“으이구, 게임 한두 번 해봐? 원래 시작은 별 볼일 없는 법이야! 그래야 차차 성장해가는 내 아들을 보며 뿌듯해지는 거고”
두 여인은 자기만의 게임론을 펼치는 동혁을 뒤로 하고 말을 나누었다.
“넌 캐릭터 이름이 뭐야?”
“나? 영희.”
“엉?”
“아하하, 농담이야. 난 에니스트. 동혁인 라이벨이야. 줄여서 니스와 라이!”
“흐음…… 그보다 날 이렇게 찾아와 준 건 도와주려고 그런 거지?”
“당연히 얘기 좀 나누고 아이템도 주고…… 응원해주러 왔지!”
순간 은송의 얼굴이 멍해졌다.
“무슨 소리야?”
“판타지아는 처음엔 혼자 해봐야 돼. 그래야 실력도 늘고…… 센스도 붙고, 재미도 보고, 아무튼 다들 처음엔 다 그래~”
세영의 너스레에 은송은 샐쭉하니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생초짜에게 혼자 해보라고 할 줄이야.
이 게임엔 튜토리얼이라든가 그런 게 없어서 곤란했다. 설명서에도 게임에 대한 건 간략한 설명이 고작이었다.
“자, 네가 바라고 마지않던 기사 장비야. 네가 실망해 있을까봐 미리 구매해뒀지! 이거면 마을 근처에서 싸우기엔 충분할 거야.”
세영이 건네준 건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보았던 갑옷에 비할 바 아니었지만 제법 튼튼해 보이는 흉갑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갑옷에서 재질만 쇠로 바꾼 형태였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만한 걸 지금 그녀에게 구하라고 한다면 매우 힘들 테니까! 은송은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며 갑옷을 착용해보았다.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었지만 몸을 단단히 보호해주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좋아?”
“흠흠, 뭐 그럭저럭…….”
문득 캐릭터를 만들기도 전에 어떻게 미리 준비 해두었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세영은 너라면 이걸 고를 것 같았어, 라고 말하며 그녀의 단순함을 지적했다.
“아참, 이것도 받아. 그리고 나머지는 라이가 주는 거.”
그렇게 말하며 내민 건 날이 잘 선 장검과 갑옷의 다른 부분이었다. 검은 무게가 묵직했지만 휘두르기엔 문제없었다(생각보다 무거워서 상당히 놀랐다). 그 다음으로 라이가 준 것들은 팔꿈치까지 보호해주는 건틀릿과 정강이까지 덮어 보호해주는 그리브, 마지막으로 눈에서부터 입까지 Y자로 구멍이 뚫려있는 투구였다.
나머지 것들을 전부 착용한 은송의 모습은 기사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제 막 검을 잡기 시작한 전사 정도가 적당했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멋스럽게 서있는 은송을 향해 동혁은 웃으며 말했다.
“똥폼 잡긴.”
동혁을 한 대 쥐어박아준 은송은 둘과 헤어졌다. 세영은 빈말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은송에게 그녀의 실력에 맞게 적당한 던전을 소개시켜주곤 휑하니 가버렸다. 동혁은 전투에 대한 팁은 몇 개 주곤 힘내란 말과 함께…… 역시 가버렸다.
은송, 아니 이젠 버트(실버트리란 이름을 줄였다)는 끝없이 동혁의 팁을 되새기며 동굴에 진입하였다.
*
판타지아에서 절대적 강함은 없었다. 고수도 최하위 잡몹에게 죽을 수도 있고 힘없는 초보자도 상위의 실력자를 이길 수 있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완전히 몰입하게 된 버트는 ‘검은 동굴’이라 불리는 던전에 대해 곱씹었다.
이 던전은 초행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습 장소라 들었다. 초보자가 잡기에 무난한 몬스터와 약간의 생각만으로도 파헤칠 수 있는 함정과 미로. 전투만이 아닌 던전의 튜토리얼이라 해도 좋은 곳이었다.
버트는 검을 꽉 쥐고서 깜깜한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두컴컴한 내부는 시야가 보정되면서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이끼가 껴있고 버섯이 자라나는 이 암굴은 마치 거대한 무언가…… 가령 뱀 같은 것이 파고들면서 만든 것 같았다.
들어갈수록 빛이 사그라지는 곳에서 버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검의 무게감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이런 긴장감이라니…… 꼭 치과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 같잖아…….’
시야가 보정되어 있다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그저 새까맸다. 그로 인해 근원적인 공포가 자극되어서 몸은 배로 긴장했다.
무엇보다 동굴 내부이다 보니 발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는데, 그것이 펄떡이는 버트의 심장을 두드렸다.
쿠루룩
조심조심 나아가던 버트의 눈에 멀리서 느릿하게 기어오는 큼지막한 개구리가 보였다. 볼을 부풀리며 괴상한 소릴 내는 녀석은 동공색이 매우 혼탁했다. 몸 곳곳엔 뿔처럼 생긴 돌기들이 가득했다.
버트에겐 이 게임에 접속 하고나서 처음으로 만난 적이었다. 그랬기에 단 한 점의 방심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두 손으로 검을 말아 쥐었다.
판타지아에선 스테이터스(스텟)가 존재했다. 다만 레벨이 없고 생명력도 포인트가 아닌 퍼센티지로 표기된다.
그렇기에 이곳에서의 전투는 까다로웠다. 눈으로 보이는 절대적 수치가 한정되어 있어서였다. 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고 매 전투마다 몸으로 직접 부딪쳐봐야지만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정말 튼튼하게 방어를 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고 가벼운 공격으로도 즉사를 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정확했다 해도 조금만 삐끗해도 빗나가고 힘이 강하다 해서 마구잡이로 내려치면 제대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발사체 같은 경우는 더했다. 까딱해서 바람이라도 잘못 탔다간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십상이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매우 난해했고 방심이란 곧 죽음이었다.
“후웃……!”
버트는 앞으로 있는 힘껏 뛰어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개구리는 뒤로 풀쩍 뛰어서 피하더니 돌기가 박혀있는 혀를 쭉 내밀어서 버트의 팔을 가격했다.
퍽
욱신거리는 느낌에 버트가 한 발 물러섰다. 갑옷으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에 맞아서 그런지 제법 아팠다. 그런데 눈앞에 표시된 생명력을 보니 피해는 크지 않았다. 버트는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이번엔 가로로 검을 그으며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개구리가 뒤로 뛰었으나 내리찍는 걸로 그쳤던 버트의 처음 공격과는 달리, 휘둘러진 검을 온 힘을 다해 반대쪽 방향으로 꺾어 공격을 이어나갔다. 개구리는 후속타에 대처하지 못하고 버트의 공격에 얻어맞았다.
“얍!”
벽에 날아가 처박힌 개구리가 바들바들 떨다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혀를 내뱉었다.
버트는 이번 공격을 한쪽 팔로 맞고 그대로 개구리의 머리통을 검으로 찍었다. 주춤거리지도 않고 그대로 치고 들어올 줄 몰랐던 개구리는 크게 한 방 먹었다.
쩍
결국 개구리는 버트의 검에 의해 절명했다.
개구리는 그대로 머리가 깨져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모자이크 하나 없이 피가 튀고 으깨진 모습. 역겨울지도 모르지만 버트는 축 늘어진 개구리를 보며 숨을 고르다 방긋 웃었다.
어차피 게임일 뿐이지 않나. 심각할 정도로 리얼했지만 방금 전투는 그녀의 모든 감각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아…… 하아…… 재밌다……!”
「악의 기운에 물든 개구리의 뒷다리」를 ‘주머니(인벤토리)’에 넣은 버트는 이 게임이 생각 외의 긴장감과 즐거움을 주자 정신을 못 차렸다.
혹시나 싶어 부모님이 안 계실 때, 그것도 황금 주말에 해본 것인데 그녀의 선택은 최고의 한 수였다. 왜냐면 그녀는 이 게임에 온종일 시간을 쏟아 붓기로 했으니까!
버트는 이 던전을 최단 시간에 돌파하리라 마음먹으며 한 발 내딛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개구리를 잡은 이후로 희한한 짐승들이 하나둘 나타나 버트를 습격했다. 사람 머리만 한 박쥐 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커다란 쥐, 날지 않고 뛰어다니는 까마귀…… 그때마다 버트는 능숙하게 검을 휘둘러 짐승들을 물리쳤다.
마지막으로 두꺼비 하나를 쓰러뜨리고 난 뒤 버트는 전투를 멈추었다.
“후우…… 후우…….”
피부에 닿는 동굴의 습기와 흐르는 땀방울. 그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숨이 턱까지 찼다. 지친 줄도 모르고 몰입하며 싸운 것이다. 버트는 땀을 닦아내며 ‘주머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고소하고 새콤한 샌드위치의 맛을 느끼며 배를 채우던 버트는 이 게임의 규칙을 다시금 떠올렸다.
절대적 강함은 없다!
강해보이는 큰 짐승들이랑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약해보이는 작은 짐승들에겐 제법 위험한 싸움을 벌였다. 그때 이 문구가 크게 와닿았다.
방심하면 안 된다! 그 생각을 하며 샌드위치를 전부 씹어 삼킨 버트의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새까만 덩어리…… 라고 생각되는 것이 가만히 서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버트는 그게 무엇인지 잡아보려고 손을 뻗었다가 녀석이 보라색 가루를 확 내던지는 걸 맞아버렸다.
“케헥…… 켁!”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그대로 주저앉았다. 당황한 버트가 자신의 상태창을 띄웠다.
<중독/>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방심했다. 설마 이렇게 작은 녀석에게 중독이 되다니?!
점점 검게 물드는 시야. 버트는 조마조마해하다 시야가 완전히 꺼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죽은 건가? 아니면 단순히 앞만 보이지 않는 건가. 전신의 감각이 서서히 꺼져가더니 몇 초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잠시후……서서히 돌아오는 시야에 버트는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분명히 쓰러져 있어야 할 그녀가 벽에 기대어 앉혀져 있었다. 어두워야할 시야엔 녹색 빛이 가득한 벽이 보였다.
그것보다…… 족히 수십 마리는 될 법한 새까만 무언가가 그녀의 주변에 있었다!
‘뭐…… 야……?’
갑작스런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던 버트는 침착하게 눈을 굴려 까만 덩어리들을 확인했다.
녀석들은 손바닥만 한 난쟁이들이었다. 커다란 머리에 작은 몸을 가진 난쟁이! 녀석들은 전부 머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랗고 텅 빈 두 눈으로 버트를 보고 있었다.
뭐랄까…… 마치 검은 오뚝이 두 눈에 성냥불을 킨 것처럼 생겼다.
아무튼 그들을 살핀 버트는 괜히 섬찟해서 몸을 움직이려했다. 하지만 ‘중독’옆에 ‘마비’란 단어가 추가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생각할 때.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씨앗이 만들어졌고 그 제물이 잡혔다!”
“이야아아아~”
짓궂은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녀석들 중 하나가 높은 곳에 올랐다. 그리곤 손가락만 한 길이의 검은 결정을 들어 올렸다. 나머지 녀석들은 짤막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버트의 귀로 녀석의 연설이 들렸다.
“위대한 리아주크 님을 받들 그릇이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림자들이여! 이제 이 씨앗만 심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신의 지배가 도래할 것이다!”
“마신! 마신!”
“우아아아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