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20/22)

버스는 만원이었다.

늦게탄것때문인지 서서가야해서 다리가 아프다. 연약해진 몸은 오래 서있는걸 원치 않는건지 조금씩 통증을 호소한다. 

"그지같은놈"

방금 전의 일을 상기한다. 둘이 싸우는걸 볼때도 별로 기분나쁘진 않았다. 물건취급 당하는게 싫은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런일은 익숙하다. 하지만 뭐랄까.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고 화가났다. 뭐때문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지금 내가 그지같은놈이라 칭하는것도 누군지 불분명하다. 괜히 속상했다. 그래서 그 둘을 남겨두고 지금 버스에 올라있는 것이다.

창문을 보고, 아니, 본다기보다는 거의 붙어서 스쳐가는 풍경을 본다. 달리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는것도 사실이지만 자꾸만 누군가가 엉덩이를 만지는것같은 느낌에 기분이 나쁘다.

그렇다고 해서 뒤돌아서서 그 냄새나는 손길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놔두는게 나은거 아닐까. 그저 불편하다는듯 몸을 비트는것만으로도 그 소심한 손길은 떨어져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 생각한걸까. 손은 이젠 내가 즐긴다고 생각하는건지 조금씩 조금씩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 위험하다. 이런건 싫다. 버스 치한이라니, 이런건 생각도 안해봤고 경험해본적도 없었다.

갑작스레 위기감이 느껴졌다. 만약에 사진같은걸 찍히고 인터넷같은데에 그게 뿌려진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치마 속으로 들어오려는 손을 고의적으로 탁 치면서 뒤돌아보고 한번 째려봐주는것으로 그 행위를 제지했다. 꽤나 쪽팔렸던지 그 손길은 더이상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생각하기도 싫다. 잊고싶다. 문득 떠오른 '처음'의 기억은 도려내버리고 싶을정도로 아프다.

바보같이 울면서 발버둥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등신"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심한, 적극적이지 못한,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 난 끊임없이 속으로 자학하고있었다. 

-슥

또다시, 그 변태적인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엉덩이가 아니라 허리쪽이었다. 내 허리를 슬며시 휘감은 그 손은 날 껴안았다. 당혹감에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방금전의 변태가 아니라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너…?"

"왜그렇게 놀라?"

"여긴 왜…"

"니가 가는데 거기서 뭐하냐, 그냥 왔어"

하긴, 이녀석 성격에 선우랑 같이 놀고있을리도 없지.

"선우는?"

"내가 버스 다른번호로 알려줬어, 아마 그거타고 신나게 가는중일걸"

"나쁜놈이네"

"골탕을 먹어봐야돼 그놈은"

녀석은 꼬시다는듯 큭큭거리며 진짜로 변태같이 웃더니 눈을 꼭 감았다.

"이거 안놔?"

"왜?"

녀석은 날 끌어안은 손을 풀지 않고있었다. 뭐랄까, 기분이 묘했다. 다른사람들도 있는데 이러고있는건

"내가 이러고있으면 다른 변태가 너한테 못오잖아, 저놈같이"

선우가 쳐다본건 얼마 옆에서 방금 전까지 날 마음껏 만져대던 놈이었다. 우리의 시선을 느낀느건지 녀석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등신같은놈"

야동을 보면 그걸 직접 실천하는 또라이들이 있다니까. 변태가 들러붙지 않아서 좋긴한데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허리를 끌어안고 있다니, 꼭 뭔가 각별한 사이같잖아.

"다 좋은데 이거 놔, 얼마짜린데"

"내가 오늘 너한테 쓴돈이 10만원이 넘는데?"

"어쩌라고, 다 니가 사준거잖아 쪼잔하기는… 생색내려고 여기 데려온거야?"

녀석이 손을 풀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서로 아침에 뭘 먹었는지 알수있을정도로 입냄새가 날것같았다. 그러더니 녀석은 내 머리에 씌워져있는 토끼 머리띠를 채갔다.

"이건 받아야 쓰겠다"

"넌 쓸데도 없으면서, 바니컬 코스프레라도 하게? 변태자식"

"사람들 다 듣잖아, 날 함부로 변태로 만들지 마라"

-덜컹!

"앗!"

"괜찮아?"

순간, 버스가 크게 진동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것같이 비포장 도로를 들어선건지 덜컹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자 날 지탱해주며 그 진동이 끝날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멋있는척이라는건가. 하지만 그걸 나한테 하다니, 타겟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어.

"너 이런식으로 여자 꼬시지"

"뭔소리야?"

"이렇게 걱정해주는척하면서 서서히 접근하는거 말야, 이 작업남"

"……넌 왜 호의를 받아들여도 이따위로 받아들이냐 응?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 아까워?"

"그건 평상시에 많이 하잖아"

했었나? 했겟지…

녀석은 기가 차다는듯 피식 웃더니 날 옷걸이에 걸어놓듯이 창문쪽으로 딱 붙여버렸다. 정류장에 서면서 사람들이 우루루 내린다. 우리가 내릴곳은 다음 도시다. 그나저나 꽤나 오래걸린다.

"다리아파"

"어쩌라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즉각 자리를 만들어야 할거아냐, 근성이 틀려먹었어"

"업어줄까?"

"넌 여기에서 업으면 그게 얼마나 웃길지 모르는거지?"

급정거라도 하면 대참사다.

사람들이 꽤나 적어졌기에 우린 조금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왠지모르게 그 거리감이 좋았다. 녀석은 내가 올려다보다 기분나쁘게 웃는다. 왜 볼때마다 쳐웃는거야. 미친놈같이.

-치이이이익

한명이 내린다.

그 말은 한자리가 났다는 뜻이다. 나는 기다렸다는듯이 그 자리에 앉았다. 녀석은 그럴줄 알았다며 썩소를 지어보였다. 니가 내 입장이 돼봐라 안아픈가.욱씬거리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피곤함에 젖는다. 녀석은 내 옆에 서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회에는 김선우(가명)군이, 까메오로 특별출연 해주셧습니다 고생하셧습니다

수현이 이제 까칠해집니다

"으응…"

눈꺼풀이 무겁다. 별로 하고싶지도 않은짓을 해서인지 온몸이 지쳐버려서 그런걸까. 왠지 버스안에서 잠들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는것보다 더 어렵다. 희끄무레한 시야가 돌아오고 지금 어디쯤인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본다.

"어?"

멈춰있었다. 주변 풍경이 고정된듯 그자리에 멈춰서서 그대로. 버스는 달리지 않고있다.

"……뭐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승객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운전하는 기사까지 모두, 어두컴컴한 길 한켠에 멈춰서서 종점에까지라도 온건지 그대로였다.

정현이도 없었다, 먼저 내린건가? 날 두고? 갑작스레 두려움이 물밀듯이 생겨났다. 버스 안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다. 바다 한가운데의 무인도처럼 버스는 어둠속에서 자기 혼자만 빛을 발하고 있는것 같았다.

-끼이익

버스 문을 열고 내리자 주변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인기척도, 아는 얼굴도. 마치 이곳에 버려지기라도 한 양, 나는 불안감에 주변을 자꾸 살펴보고 있었다.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단 한명도 남지 않았다.

"어, 어디갔어"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불안감이 가득했다. 설마 날 버리고 먼저 내려버린건 아니겠지?

"어디간거야!!"

울어버릴것만 같았다.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흑!"

-움찔

순간, 모든게 환상처럼 부서지며 모든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꿈…을 꾸고 있었던건가. 옆에는 정현이 녀석이 있었다. 난 왜 그게 안심되었던걸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녀석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있었던걸까.

"왜그래?"

내 옆에서 녀석이 무슨 일이냐는듯 약간 놀란 눈빛으로 쳐다본다. 버림받는 꿈,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게된 꿈. 생각 자체만으로도 소름끼쳤다. 그리고 그게 꿈이라는것에 대한 안도감이 터질것같이 뛰던 심장을 가라앉혔다.

"아무것도 아냐… 버스는?"

"옛날에 도착해서 내렸다"

여기는 학교 근처의 그 공원이었다. 언제 도착한건지 나는 벤치에 앉아서 자고있었던 모양이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집에 안가고 뭐하고 있는거지 이녀석은?

"여기까지 업고왔어?"

"그래, 너무 잘자서 깨우기가 미안하던데"

녀석이 내 볼을 잡아늘리며 씨익 웃는다. 오랜만에 착한척모드 발동인건가. 오늘 뭐 잘못먹은 모양이군.

"착한척하기는, 집에 안가? 나 추워"

"조금만 여기 있자"

"……할일없는놈"

벤치에 앉자 차가운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몸을 부르르 떨며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신다. 이제 따뜻해지고는 있지만 너무 춥다.

"춥냐?"

"더럽게 추워"

어색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뭐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만데 어색함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멍하니 있는것도 재미없다.

"너… 김선우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

그냥 싫다라는건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녀석을 그렇게 싫어하고 나와 같이있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건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일것이다. 난 모르겠다. 

"그냥… 만나지 마, 후회할꺼야"

"왜?"

"그냥 만나지 마 지금부터, 아는척해도 무시하고 어쩌다 봐도 그냥 모르는척해. 알았지?"

"이유를 말해야 대답을 할거아냐, 무작정 그냥 만나지 말라니"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저런 명령조의 말투는 거북했다. 조금이지만 화가났다. 녀석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만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하며 내 질문에 대한 답은 해주지 않는다.

"왜, 내가 좋아? 그래서 다른 남자랑 만나게 하기 싫은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좋으니까 만나지 마"

"에?"

뭐야, 장난에 왜 이렇게 반응하는거야, 정말 뭔가 있기라도 한것처럼 

갑작스레 분위기가 싸해졌다. 내가 대답을 회피하자 녀석은 나에게서 확답을 얻어내고 싶은건지 내 어깨를 붙잡고는 대답을 독촉했다.

"만나지 마, 지금 대답해 안만나겠다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만나든 안만나든! 참견하지마"

"안돼! 왜 다른놈도 아니고 하필이면 그자식이야"

딱히 선우를 만나지 않는다고해서 안타깝거나 하는 감정은 없다. 단지 날 이렇게 다그치는 이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퍼! 놔! 이 그지같은놈아"

-슥

어깨가 저리다. 녀석은 더이상 말해도 소용없겠다는듯 손을 풀더니 내 손을 잡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운 날씨에 녀석의 손도 차갑게 얼어있었다. 

"집에 가는거야?"

"…그래"

"삐졌냐?"

"……"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으로 묵묵히 걸어간다. 확실히 삐쳤다. 소심한 자식, 소리한번 질렀다고 삐치기는. 붙잡은 손은 아플정도로 세게 쥐어져 있었다. 

"어쨋든 넌 못만나. 내가 못만나게 할거야"

"대체 왜그러는데?"

녀석은 집에 도착할때까지 대답이 없었다.

"하아…"

따뜻하다. 지금껏 몸이 꽁꽁 얼어있어서 그런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그지같은놈… 이유를 말해줘야 할거아냐"

그도 그럴것이, 이유만 말해준다면 그걸 들어보고 내가 만나든 만나지 않든 할텐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그냥 만나지 말라니, 설마 진자로 질투해서 그러는걸까?

"아니… 아니지"

그럴리가 없다. 녀석의 기준에서 보면 날 좋아하게 되는건 남색이라고, 그런 일은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없다. 그럼 뭔가 선우에게 안좋은 습관이라던가 취미같은게 있는걸까?

저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은 물어봐도 절대 대답 안해줄게 뻔하다. 지금 집에 와서도 아무말도 안하고 밥도 안주는걸보면 단단히 삐졌다. 새엄마라는 사람은 오늘 어딜 간 모양이다. 며칠 후에나 온다는데… 뭐 이리 외출이 잦은거지?

"으응…"

-출렁

수면이 일렁인다. 확실히 따듯하고 온몸이 노곤노곤해지는게 기분좋다.새하얀 욕조와 새하얀 내 피부가 소름끼칠정도로 예쁘다. 내 몸을 보고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정말 예쁘다.

하아, 왠지모를 묘한 기분에 점점 더 이곳에 있기가 힘들어진다.

"배고파 밥내놔"

"나한테 밥 맡겨놨냐"

넌 언제나 나에게 식량을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쌀가게같은 녀석이니까.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다면 넌 바보다.

"그나저나 소파가 니꺼냐, 왜 드러눕고 지랄이야"

"넌 바닥에 앉아서 봐, 알게뭐야"

소파를 전부 차지하고 누워있는 내 앞에 앉으며 녀석이 투덜거린다. 밤 9시, 내일이면 또 학교를 가야한다니, 가고싶지 않다. 무엇보다 날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부르르

그 기분나쁜 시선을 생각하자마자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 그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능욕하는것같은 그 기분을 아는사람이 몇이나 될까. 눈앞의 이녀석은 알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걸.

아니, 애초에 날 여자로 보지도 않는놈이니까 그런건 생각도 안할게 분명했다.

"그지같은놈"

"뭐?"

"아냐 아무것도"

뭐랄까, 화가 난다고 해야하나. 그런 기분이었다. 뭣땜에 화가 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빳다. 뭐 짐작이 가지 않는건 아니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썻다.

집에는 녀석과 나밖에 없었다.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새까만 밤이 창밖에 가득했다. 뭐랄까, 묘한 기분이었다. 저 하늘은 지금껏 봐오던 하늘과 전혀 다를게 없는데 어째서 나만 이렇게 바뀌어버린걸까.

이렇게 바뀌어버린 나를 기억하는사람은 없다. 바뀌기 전의 나를 아는사람도 거의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일상속에 섞여있지만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녀석은 뭐가 그리 웃긴지 TV를 보며 자지러지려고 하고있었다. 난 갑작스레 녀석에게 뭔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남자하고 여자가 하나씩 있어"

"뭐가?"

"닥쳐봐, 묻는거에 대답이나해"

녀석은 귀찮은듯하면서도 내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는 얼마 전까진 여자였지만 성전환을 해서 남자가 됐어, 그런데 널 좋아해. 여자는 얼마 전까지 남자였지만 성전환을 해서 여자가 됐어, 그 여자도 널 좋아해, 너라면 어느쪽을 선택할거야?"

"뭐?"

"얼른"

녀석은 어이없다는듯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랄까, 딱히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궁금했다. 녀석의 생각이 어떤지.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뭐 그런게 다있어"

"너라면 어느쪽?"

외형상으로 보자면 여자쪽을 선택하는게 나을것 같지만 속은 남자다. 그렇다고 속을 보자면 남자쪽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쪽은 겉이 여자다.

"너 미쳤냐? 다른 여자가 쌔고 쌧는데 왜 하필이면 그 둘이야?"

"세상에 사람이 그 둘밖에 없나보지, 얼른 대답해봐"

"뭐야, 결국엔 둘다 남자잖아"

"그래도 결국엔 둘다 여자지"

모순이다. 이런 상황이 있을리가 없지만 최소한 한가지의 경우는 이미 나한테서 실현됐으니까. 나머지 경우도 없으란 법이 없다.

"너 그게 왜 궁금한데? 설마…"

녀석의 시선에 갑작스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야! 내,내가 뭐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난 서둘러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등뒤에 시선이 꽃히는것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침대에 누우며 잠들려고 노력하지만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누워있기를 계속했다.

"으음…"

얼마나 누워있었던걸까, 정신이 몽롱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부유감에 주변을 둘러보자 녀석이 날 안아올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뭐, 뭐하는거야 너?"

"……"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단지 묵묵하게 걷고있었다. 뭐라고 표현할수 없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힘이 빠진건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줘… 뭐하는거야"

"알았어"

-쿵!

"악! 으으…! 뭐하는거야!"

"침대는 내자리야, 넌 여기서자"

녀석이 날 내려놓은곳은 안방 바닥이었다. 이불이 깔려있었고 여기서 자라고 말하려는것 같았다. 그렇게 말한 녀석은 문을 휙 닫고 나가버렸다.

"그지같은놈… 으으! 엉치야"

뭔가를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난 베개를 베고 누우며 생각했다.

"그런데 난 뭘 기대한거지?"

그 생각에 놀랄새도 없이 난 수면제라도 먹은것처럼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흐음… 자나?"

녀석이 자는걸 확인하고 거실로 나온다. 요즘 저녀석 잠이 부쩍 많아진게 아직 한밤중도 아닌데 저렇게 잠들다니. 몸이 바뀐것과 관련이 있는걸까?

"그럴리가…"

그냥 오늘은 지쳤을 뿐이다. 그렇게나 소리를 질러댔으니 피곤할만도 하겠지. 

녀석과 같은방을 쓰지 않는건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젠 그러면 곤란하다. 저녀석도 이젠 여자다. 다시 남자로 돌아올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생각엔 저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수는 없는 일이다. 저녀석도 자존심이 강하니까 평생 눌러앉을거라는 생각은 안할테니까.

다만 내 역할은 녀석이 나쁜쪽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것 뿐이다. 김선우같은 녀석과 만나지 않게 하는것, 그것과 녀석이 여자일수 있게 해주는것, 그게 내 역할이다.

이젠 남자취급하면서 장난치는일도 자제하고 최대한 여자로서의 녀석을 존중해줘야만 한다. 그래야 녀석이 나중에 여자로서 세상에 있을수 있도록 말이다.

하긴, 그래도 그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건 아니다.남자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갑자기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힘없이 저항하는 녀석, 그리고 그걸 무시하고 강제로… 

"안돼… 후우…"

그건 없었던 일이다. 그저 환상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녀석은 어째서인지 잊었다. 그리고 나도 잊는다. 그러면 자연스레 없었던 일로 되는 것이다. 그게 내 처음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하기 싫어도 그때의 장면은 단편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쾌감도 다시 살아났다. 그 끔찍한 유혹에 나는 안방을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휘저어야 했다. 속으로 나를 제어하면서 견뎌내려 노력했다.

"너 하형주 기억나냐?"

"아니, 왜"

아침을 먹으면서 녀석이 하는 말이었다. 하형주? 그게 누구지?

"너 기억안나? 성일중학교 다니면서 그놈을 모른다는게 말이 돼?"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알아, 모르는건 모르는거야. 그리고 오늘 아침이 왜이렇게 찌질해? 주방장 실격이야"

흰접시에 잼을 바른 빵 한조각, 그게 아침식사로 내놓아져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먹지 않을수는 없었기에 입에 물고는 있던 터였다.

"야, 모를리가 없잖아, 2학년때 같은반이었는데"

"그래서 걔가 뭐"

"그놈 못생긴건 다 알아주잖아, 그런데 여자친구 생겼대"

"나 2학년때? 그때 하형주라는애 기억 안나는데?"

지나봐야 몇개월 지나지도 않았다. 벌써부터 전부 다 잊어버릴리가 없다. 하지만 분명 기억에 없었다. 얼마나 못생겼길래 전교에 소문이 자자했던거지? 그리고 왜 난 그걸 모르는걸까?

"너 몇번 걔랑 짝도 했었잖아, 왜그래? 부분기억상실이냐? 하형주는 우리반을 넘어서 다른 학년에도 소문났을정도로 꼴통에 오크라고, 너 진짜 몰라?"

"몰라! 그 오크가 어떻게 여자친구가 생겼든 어쨋든 내가 뭔상관이야, 얼른 밥이나 내놔, 난 빵만먹고는 못사니까"

"……이상하네"

"이상하고 자시고 간에 밥이나 내놔"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걸 어떻게 하라고. 아침은 이걸로 참아, 원래 아침은 간단하게 먹는거야 임마, 대신 저녁에 맛있는거 해줄께"

"……찌질한놈"

맛없는 식빵을 먹으며 궁시렁거리고있자 녀석이 식탁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날 응시한다. 그게 뭐 어쨋다고,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흰색 용기였는데 약병같이 생겼다. 그리고 그 위에는 두통,치통,생리통에 좋습니다. 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게…뭐야?"

"너 전에 머리 깨질것같다고할때 먹인건데… 이거 니가 사온거야? 난 이런거 산적이 없는데, 새엄마한테도 물어봣는데 그런적 없다고해서"

"아니, 내가 머리아플줄 알고 두통약까지 가져올것같냐?"

"하긴…"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테이블 한쪽에 그 통을 놓아두었다. 그러고보니 그 두통.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그 두통은 정말 죽을것같이 괴롭다. 머리가 부서지는듯한 괴로움과 함께 머릿속이 뜯어져나가는 기분,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르는 최악의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런 두통이 생기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이유는 아닐게 분명했다.

"아, 그건 그렇고 나 돈좀줘"

"왜?"

"나도 돈쓸데 많아, 나중에 갚을테니까 조금만 줘봐"

"이젠 의식주를 넘어서서 부식비까지 달라는거냐? 이 돈귀신, 언제값으려고?"

"언젠가 값을께, 이자도 톡톡히 쳐서"

물론, 그때쯤이면 난 병상에 누워서 오늘내일 하고있겠지.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교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만원짜리 두장을 꺼냈다.

-휙!

"어?! 야, 하나 잘못꺼낸거야 다시내놔"

"줫다뺏는놈이 제일 치사한놈인거 모르냐? 쪼잔하게 굴지말고 그냥 넘겨, 보너스로 쳐둘테니까"

"이 썅! 안돼! 내놔 오늘 살거있다고!"

녀석이 허공에 손을 휘젓는다. 내가 줄것같냐. 나는 요리조리 피하며 나머지 식빵을 입에 밀어넣고 거실로 도망쳤다.

"드러운놈… 나중에 꼭 값아라"

"꼭 값을게~"

돈이라, 뭐 있어서 나쁠건 없다. 사실 쓸곳이야 딱히 정해져있는건 아니지만 있어서 나쁠건 없는게 돈이라는 녀석이다.

"얼른 처먹어, 빨리가야지 차린것도 없는데 뭘 그리 느려터져가지고"

"니가 차리는 입장 아니면 입다물고 있어라~ 응?"

그지깽깽이같은놈, 얹혀산다고 밥도 설렁설렁 주는거냐?

난 투덜거리며 신발을 신었다. 아직 날씨가 추운 날씨대문에 코트를 입을지 그냥 갈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코트를 입기로 결정했다. 신발장 위에 있는 장갑도 꼇다. 아직 이정도는 해줘야 춥지 않으려나.

그러고보니 이 장갑 저녀석이 사준거였지. 지금 내 물건중엔 녀석이 사준게 꽤나 많았다. 나보고 돈귀신이라고 하는게 어찌 생각하면 거짓말도 아니다.

"뭘 그리 보채?"

녀석이 뭐라고 씨부렁거리며 마이를 주워입는다. 학교라, 정말 오랜만에 가는것같은 느낌이었다.

"너 그런데 정말 기억 안나냐?"

"그래! 기억 안나"

"상진이는 기억나냐?"

"오상진? 그 아나운서?"

"장난하냐? 박상진 말하는거잖아, 2학년때 너랑 나랑 상진이랑 자주 놀았잖아"

기억난다. 그런데 그 하형주라는 녀석이 대체 뭐길래 기억 안나는거가지고 뭐라고 그러는걸까? 내가 알바는 아니지만  정말로 기억이 안나는걸 어쩌냔 말이다.

"어째 형주만 기억이 안나냐 넌, 부분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거 아냐?"

"이게 누굴 장애인으로 만들어?"

"그게 왜 장애인이야? 누구나 다 걸릴수 있는거야"

"시끄러! 그지깽깽이같은놈"

나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코트를 입고나오길 잘했다고 생각될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하얀 입김도 그대로였다. 등교길을 걸으며 녀석이 따라오는걸 느낀다. 주변의 시선도 같이 느껴진다. 기분이 묘하다. 필요없는 시선따위는 받고싶지 않다. 오직 내가 필요로 하는것만 있으면 되는데 내 인생엔 왜이리 쓸데없는것들이 끼어드는걸까.

"그 짧은 발로 어딜가려고?"

어느새 내 걸음을 따라잡은 녀석이 비아냥거린다. 그다지 짧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들 사이에선 이게 평균이라고, 단지 내 옆에서 걷는 녀석이 상대적으로 긴것 뿐이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니네 학교로 찌그러져"

어느새 교문 가까이까지 도착해 있었다. 녀석은 나와 헤어지기가 아쉬운지(순전히 내 생각)날 계속 쳐다보더니

"일찍 들어와, 다른데로 새지 말고"

그런 명령조의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대로 이행할 나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참고할 뿐, 어디까지나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거니까 누구의 간섭도 받을 필요는 없다.

"어, 수민아"

"어… 안녕"

아현이였다. 뒤에는 휠체어를 밀고있는 아현이의 사촌오빠 진현이라는 녀석이 서있었다. 하나같이 잘생기고 이쁜것들이다.갑자기 바뀌기 전의 내가 생각나버렸다.

"그지같이… 쳇"

"응? 뭐라고 했어?"

"아, 아니… 아무것도"

그러고보니 이렇게 되기 전의 나는 참 별볼일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평화로웠던 거라는걸 이제서야 깨달아버리다니, 역시 인간은 후회하는 동물이라는걸 다시금 깨달았다.

뭐 어쩌리, 인터넷 배너 하나 클릭한것만으로 이렇게 될줄은 아마 귀신도 몰랐을거다.

"주말에 뭐했어?"

"어… 응… 그냥 집에 있었어"

"저기 방금 옆에 있던건 누구야? 남자친구?"

"사촌오빠야… 같은데에 살아서 바래다주고있어"

설정으로 따지자면 이쪽이나 나나 같다. 들은 소문에는 아현이쪽은 부모님이 없다고 하니까 성진현의 집에 얹혀사는 셈이군, 뭐 나라면 이렇게 예쁜 여자애가 사촌동생이라면 뭔가 묘한 생각이 들것같기도 한데…

"……"

역시, 야한걸 너무 많이봣나. 뭐 이제는 필요없지만 후유증이 크게 남을것같다. 나는 학교 안으로 들어서며 조금씩 그 지긋지긋한 두통이 시작되는걸 느꼇다.

92화째, 시간 2주일정도 지남.

이제 슬슬 메인 스토리가 나와야 할 시점인데...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여기선 이 식을 대입하면 해를 구할수 있다. 이렇게…"

"으음…"

내 인생에 도전한다고 봐도 좋은 수학문제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선생님의 말도 뭐라고 하는건지 이해가 도무지 안되고 그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꿰뚫어버릴듯이 펴다보며 도대체 왜 풀리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최근들어 공부 이외의 것에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감각이 떨어진건지 쉬운문제도 풀기가 힘들다.

그러고보니 선우 녀석이나 정현이 녀석이나 둘다 공부는 끝내주게 잘했지.

젠장, 신은 불공평하다.

-딩동 딩동

"자, 그러면 34페이지는 다음시간까지 다들 한번씩 풀어봐"

-탁

책을 소리나게 덮으며 이마가 훤히 까진 수학선생님은 교실을 나섯다.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숲속의 공터같이 훤하게 까져있는걸 보니 축구라도 하고싶어지는군.

하지만 이몸으로 축구라니, 축구공도 무거워서 못들것같은 몸 아닌가 그래.

수업이 끝나자 여자애들이 전부 작은 가방을 하나씩 챙기고선 어디론가로 가기 시작했다. 그래, 다음시간이 체육이었나? 그런데 그러고보니 나 아직 체육복 안삿다. 뭐 안가도 문제 없겠지.

-드르륵

"……"

"저기…"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말을 건 것은 내 옆에 앉아있는 녀석이었다. 키는 큰주제에 쓸데없이 소심해가지고는. 녀석은 내가 쳐다보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차마 말하기 힘든지 우물쭈물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도 옷갈아입어야돼"

"응?…아, 아차! 미, 미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보니 남자는 남자용 탈의실이 없다고 했었지 그래서 교실에서 갈아입는다고… 아니나다를까, 반 녀석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개중엔 옷을 반쯤 벗다가 멍한 표정으로 날 보는 녀석도 있었다.

아, 도망치고싶다.

"하아… 하아…"

"왜그래 수민아?"

"아니… 그냥 좀 뛰어오느라고…"

탈의실로 도망치듯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이미 안에는 옷을 갈아입고있는 녀석들이 많았다. 몇번 봐서 그런건지 이젠 별 감흥도 일지 않았다. 단지 어느 학교를 가나 있는 남녀차별에 대해서 약간 분개할 뿐이었다. 난 왜 이런 상황에선 여자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걸까.

"수민이 너 체육복 없지? 나 두갠데 빌려줄까?"

"어? 응… 고마워"

영은이의 말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 번호의 캐비닛으로 가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실 여자가 되어서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는건 처음이라 부끄러웠다.

"사이즈는 어떻게든 맞을거야, 우리 키 비슷하니까"

그 말에 나는 무언으로 웃어보이며 상의를 입었다. 사실 상의라기보단 이 학교 체육복은 점퍼같이 지퍼를 올리는 형식이다. 바지는 고무줄 쫄쫄이 바지였던 옛날 우리 학교와 달리 합성수지로 되어있어서 밑단은 따로 고무줄때문에 딱 붙는 스타일이 아니라 끈으로 조일수 있는 그런거였다.

그런데 이걸 두개나 가져오다니, 아무래도 날 줄 생각을 미리 했던것같다. 역시 전부터 생각해왔던거지만 착한 녀석이다.

"우와, 피부 하얀거봐, 깨물어주고싶어~"

"앗! 왜, 왜그래?"

몇몇 여자애들은 내 맨살을 꼬집어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당황스럽다, 당황스럽다구, 그러니까 그만해. 

"속옷 이런거 입는거야? 흐음…"

내 브래지어를 쳐다보면 다른 여자애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확실히 내 나이대의 여자가 입기에는 좀 야하다 싶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티팬티도 아니고 그냥 브래지어일 뿐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을 하고있는 나로서는 얼른 옷을 입고 그런 손길을 피하는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맑았다. 언제나 맑지만 끝을 모르는 깊은 하늘은 내겐 너무나 크다.

난 하늘을 동경했다. 무엇보다 넓고, 무엇보다 푸르고, 무엇보다 다채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하늘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그중에서도 난 겨울의 하늘을 가장 좋아한다. 엷은 푸른빛이 아닌 진한 파란색을 띠는 겨울의 하늘은 보는것만으로도 아찔하고 깨끗하다.

내겐 이러한 일상 모두가 감사해야할 대상이며 사랑스러웠다. 두번은 없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일상이 너무나 행복하다. 일상에 감사한다. 누군가의 목숨으로 대신 얻은 이 삶은 행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난 언제나 나는 행복하다라는 단어로 나를 설득한다.

나를 세뇌하여 얻는 행복함이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나에게 최면을 걸며 나는 행복하다고 느낄것이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뭐가"

갑자기 날 찾아온 녀석이 한 말이었다. 예상되는 대답은 있다. 하지만 굳이 그걸 아는척 해서야 좋을게 없었다. 쉬는시간의 교실에는 시끄러움이 가득했다. 우리들의 대화는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것이다.

"너는 김수현이랑 같이살잖아"

"그게 뭐"

"불공평하지, 경쟁은 공평한 조건에서 해야하는건데 니가 먼저 유리한조건을 손에 쥐고있잖아 게다가 나랑 김수현이랑 만나는것도 못하게하고, 방해공작 하기냐?"

녀석은 내 앞자리 의자에 앉아서 떫은표정을 지어보였다.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다가오지 못하고있다. 하긴,남자에게는 성격이 워낙 지랄같은놈이다. 미친개한테 물리기 싫으면 피해야지. 저 녀석들의 마음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아마도 이런 느낌일 것이다.

"여기서 그런얘기 하지마, 얼마전까지만해도 우리만이었으니까 의심하는녀석들 생긴다"

내 속삭이는 말에 녀석은 뭐 어때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갓 체육시간이 끝난 녀석들이 들어오고있다.

"너 걔 핸드폰도 뺏었냐? 전화를 안받아"

"원래 전화 잘 안받아, 와도 모를걸? 그리고 얼마전에 고장났어"

"…난 또 니가 수신거부라도 해놓은줄알았지"

"핸드폰 고치면 그렇게 해야지"

"개새끼야, 그거 비매너다"

녀석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걸 나는 창밖에 시선을 옮기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핸드폰이 고장났다. 그건 꽤나 귀찮았다. 녀석이 없어지면 찾을수가 없다.

녀석은 듣지도 않는 나에게 화를 내더니 이내 포기했다는듯 한숨을 푹 쉰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냐"

"그러게…"

사실 우리는 친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친했다. 녀석이 첫경험을 했을때 고민을 들어준것도 나였고 녀석이 집안일로 가출했을때 받아준것도 나였다. 그 6년의 우정이 지금 그녀석 하나때문에 금이 가버렸다. 아니, 금이라기보다는 이제 한조각도 남지 않은것같다.

하지만 그럴수밖에 없다. 녀석이 여자를 다루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있고 어떻게 괴롭히는지도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수현이를 망쳐놓게 놔둘수는 없었다. 그게 설령 친구를 잃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너 현지 알지?"

"어, 그건 왜"

"헤어졌어"

"알았어"

내 심드렁한 대답에 녀석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내게 말했다.

"최소한 왜? 라고는 물어봐줘야 되는거 아니냐?"

"왜?"

내가 생각하는 가장 불안한 대답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나오지 말아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바램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말했다.

"수현이때문이지 임마, 이번엔 나도 진지하다"

"넌 늘 진지했지,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깡통 걷어차듯 차버리고"

"에이~ 내가 언제?"

늘, 항상, 언제나.

그리고 녀석이 진지해져봐야 나에게는 걱정이 될 뿐이다.

"이번에는 전처럼 안할꺼야, 그러니까 너도 진지하지 않다면 그냥 포기해"

그것도 언제나처럼의 대답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포기할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녀석이라면 절대 안된다. 차라리 다른 녀석과 만난다면…

"나도…"

"뭐, 너도 진지하다고? 웃기지마, 너 좋아해? 그녀석 좋아할수 있냐고, 난 충분히 가능해 옛날에 어땟건 그런건 상관없어"

이녀석은 전부터 그랫지만 생각이 너무 편해서 좋다. 나처럼 잡생각이 들끓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걸 한다. 그 후환이나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

"대답해봐, 넌 안좋아하잖아? 그냥 친구잖아?"

대답할수 없었다. 그렇다고도, 또 아니라고도 대답할수 없었다. 그저 단지.

"안돼, 어쨋건 너는 안돼"

라는 대답밖에는 할수 없었다. 녀석은 열받기 시작했는지 점점 더 자신을 제어할수 없게되는것같이 보였다.

"이…… 개새끼 도대체 왜그러는데? 이번에는 아니라고 날 좀 믿어봐"

"이번에는이라니? 이번에도라고 해야지, 널 잘못 믿었다가 내 친구가 망가지는건 두고볼수 없어, 저번에도 그랬잖아?"

생각하기 싫은 과거가 생각나버렸다. 내 말에 녀석은 찔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지… 그래, 그만큼 넌 확고하다는거냐?"

"그래, 이제 종치겠다. 가봐"

녀석은 질렸다는듯 일어서더니 그냥 가려는듯 하다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명심해라, 마지막에 결정하는건 김수현이야"

"그래"

날 선택해야만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서는 녀석의 입가에 있는 미소가 내 마음을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하늘 더럽게 맑네"

녀석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들려온다.

만약 선택을 해야한다면 녀석은 날 선택할까? 수업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난 체육복을 입는 녀석들을 따라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친구인 날 녀석이 선택할수 있을까? 분명 녀석의 감정이라던지 가치관같은건 지금 많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할것이다. 그때에는 친구로 잇는 나보다는 남자로 다가간 녀석이 선택받을것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곧 끝이다. 녀석은 선택을 후회하게 될것이고 나는 친구가 그렇게 다친 모습을 보고서는 행복할수 없다.

전부터 그랬다. 난 행복해야만 했다. 

[넌 행복하게 살아]

"……"

그래, 난 행복해져야만 하니까 친구의 불행은 두고볼수 없다.

정현이는 정현이만의 대답을 얻어냅니다. 그게 뭘까요?

이런날엔 괜히 뭔가 기분이 들뜨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것같은 환상에 빠지고는 한다. 그래서일까, 하늘이 맑은 날에는 뭐든지 좋아보였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주변에는 하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뭐랄까, 변하기 전의 내 인생은 어땟을까?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아니, 그냥 이도저도 아니었을 것이다.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루했다. 지겨웠고, 짜증났다. 이게 불행한 걸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니는 학교도, 내 몸도, 마음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새로웠다. 내가 지긋지긋하게 여겨왓던 식상함이 사라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지금 행복한걸까?

단지, 조금 다른 방식의 불행이 찾아왔을 뿐이다. 생각하기도 싫엇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 몸으로 변한 뒤 희생해야할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난 이제 행복해지려고 한다.

그동안 불행했던 것들은 모두 잊고싶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 지금 난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 행복해야만 이렇게 변한 내 삶에 만족할수 있을테니까.

교문 밖으로 걸어나서며 마음가짐을 더욱 단단히 한다. 

-턱

그냥 집으로 가려던 찰나 갑자기 어깨에 내려오는 손길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처음보는 남자가 나를 보고 웃고있엇다. 마치 나랑 아는 사이이기라도 한것처럼.

"뭐야?"

"오랜만에 만낫는데 한다는소리가 그거냐?"

그 남자는 살짝 기분이 나빳는지 인상을 찌푸렷다. 처음이었다. 그족에서 오랜만이라고 해도 난 당신 누군지 몰라.

"뭐야, 왜 아는척이야?"

"……장난치지마, 화낫냐 너?"

당연히 처음보는놈이 아는척을 해대면 화나는게 당연하지. 아니, 화라기보단 짜증일까, 나는 왠지 기분나쁜 이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도망치듯 걸었다. 

가슴이 미약하게 뛰고있었다. 스토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왔다

"야, 김수현 왜그래 너, 예전일땜에 삐진거야?"

그 남자는 비밀얘기라도 하는것처럼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기분나빠, 처음보는 남자가 아는척을 해대면 누구라도 기분나빠, 게다가 이 남자는 왠지모르게 특히 더 기분나빳다.

"누군데 그래? 난 너 몰라"

"……장난해?"

"당신이나 장난하지마 난 모른다니까 왜자꾸 엉겨붙어?"

나는 적잖이 놀랐다. 스토커는 아니다. 그렇다면 내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알고있을리가 없다. 나는 최소한 학교에서는 김수민이니까. 누구지? 난 정말로 모르는 남자였다. 키는 정현이보다 조금 더 컷다. 나이도 나보다 더 많을것 같았다.

"너 진짜 모르겠냐? 김성현이 누군지 몰라?"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나를 아는것 같은데 나는 분명 이 남자를 모른다. 김성현인지 뭔지하는 사람 분명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처음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내가 장난치고있는거라고 생각하는건지 인상이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모른다니까!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거야, 스토커야?"

"이게 진짜…"

그 남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때리기라도 하려고 했던것 같았는데 이내 그 손을 내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왔더니만…"

그 남자는 왼쪽 손목에 채워져있는 시계를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망할놈이지……젠장"

알수없는 소리를 하며 가버렸다. 뭔가 급한일이 있는것 같았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서… 이 날씨에 춥지도 않은지 저렇게만 입고있다니, 그냥 평범한 회사 직원같아보이지는 않는데…

"미친놈…"

다짜고자 처음보는사람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녀석이라니 오래살고 볼일이다. 아마 한번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어서 접근했던걸까? 세상엔 참 별 거지같은놈도 다 있구나.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너 하형주 기억 안나냐?]

[안난다니까!]

뭐, 느낌일 뿐이다. 그냥 왠지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분나쁜 저주에라도 걸린것처럼 갑작스레 기분이 확 나빠져버렸다.

"별 그지같은게 따라와가지고 기분만 잡쳣네"

젠장젠장을 연발하며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날 와락 겨안앗다.

"수민아! 어디가?"

"어? 응… 집에"

영은이였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또 어떤 변태인줄알고 적잖게 놀라잇던터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특별히 할일 없으면 놀자"

"응?"

남는게 시간이니 잠깐정도는 놀다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하지만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영은이는 내 팔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짧습니다.

뭐임마 다툴래?

기분이 나빳다.

왠지모르게 이 칙칙한 기분은 정말로 나도모르게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뚜……뚜……

기분나쁜 신호음, 뭔가를 알리는것같기도 한 이 소리는 내 신경을 있는대로 거스르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하얀 세계였다. 

"병원…인가"

손목에 꽃혀있는 링거바늘을 보고 재차 확인한다. 누워있는곳은 하얀 병원침대였다. 옆에 있는 서랍장 위에는 꽃병이 놓여져 있었다.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간것인지 선물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빳다.

"크으…"

갑자기 머리가 찡해져왔다. 깨질듯한 고통에 다시금 몸을 침대에 눕힌다. 머리가 아프다. 기분이 나쁘다. 이 기분은 머리가 아파서 느끼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뭔가, 잃어버렸다.

난 모르고 있다.

어째서 지금 내가 병원에 있는거지?

이 고통은, 이 통증은, 어째서 난 여기에 있는것인지 아무것도 알수가 없다. 마치 희뿌연 안개에 가려진것처럼 기억이 희끄무레했다.

-덜컥

"아… 일어나셧군요?"

"……"

문을 열고 들어온건 간호사옷을 입고있는 여자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호사였다. 그 여자는 내가 일어난걸 보더니 담당의에게 알리러 가는건지 병실을 뛰어나갔다.

"1인실인가?"

그 1비싸다는 1인실에 어째서 들어와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엔 나밖에 없었다. 심박수를 측정하는, 아까부터 내 신경을 거슬리고 있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일단은, 뭔가 내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것처럼 비어있는 느낌이다.

-덜컥

"일어나셧군요"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의사를 확인하는것으로 일어났다는 표시를 해두었다. 그 의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아…뭐, 머리가 조금 아픈정도를 빼고는 괜찮습니다"

"지금 뭐 기억이 안난다거나 하시는건 있습니까?"

"내가 왜 병원에 있는건지, 그리고 뭔가 또 잊어버린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올것이 왔다는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랄까 이해하기 힘든 그 표정은 아마도 일이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당신의 이름은 김성현입니다. 기억납니까?"

난 고개를 끄덕여보이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은 부모님, 그리고 동생이 한명 있었죠?"

이번에도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의사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 있었다라… 그렇다면 지금은 없다는 소리라도 하려는건가.

"일주일 전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보이는것으로 대답했다.

"그럼 이주일 전은?"

역시나, 기억나지 않았다.

"한달 전은?"

"한달 전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난 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과거형의 투가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학교를 자퇴했다는걸 알고있었던걸까.

"당신은 현재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그렇…군요"

내가 학교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의사의 말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음에 분명했다.

"당신의 부모님 두분과 동생이 실종된 것은 기억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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