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19/22)

녀석은 욕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춥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사심이 없었던건 아니다. 녀석의 알몸을 보고싶다라는것도 은근히 내 신경을 자극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아프다는데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게 용서받을수 없다. 내 이런 마음가짐에 약간은 자괴감을 가지면서 녀석을 욕조에 앉혔다. 물은 온도는 괜찮은듯 싶었다. 어차피 같이 씻을거니까 볼사람도 없으니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씻는다기보다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것에 더 목적이 있었다.

녀석은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아파서 울었던 건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녀석이 지금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는것만은 알수 있었다.

녀석은 내 가슴에 등을 기대고 힘없이 늘어져있는데다가 얼굴이 열로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병든 애완동물이 주인에게 기대고 있는것같은 모습이어서 왠지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물속에 흩어져 부유한다. 힘없는 녀석의 몸을 살짝 끌어안으며 소름이 돋을정도로 선명한 맨살의 감촉을 느꼇다.

"괜찮아?"

대답은 하지 않는다. 단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대답을 대신한건지 내게 몸을 기대어온다.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면 그건 나쁜 일일까. 그것이야 어쨋든 간에 지금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하아…"

아픈건지 애타는건지 모를 신음성, 그게 내 욕망의 방아쇠를 당겼다. 애초에, 같이 들어오는게 아니었다고 문득 후회해 버렸다. 이대로라면 덮쳐버릴지도 모른다… 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해버렸다.

"아직도 추워?"

"아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대답을 바라는건 무리였을까, 내게 기댄 상태로 녀석은 멍하니 눈을 반쯤 감고 잠에 빠지려고 하는것 같았다. 안돼, 잠든다면, 분명히 덮쳐버릴것 같다.

살과 살이 접촉하는 축축하면서도 부드러운 기분은 정신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리고 미묘한 차이로, 녀석의 엉덩이와 어느새 딱딱해진 나의 사타구니가 닿자 형언할수 없는 느낌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꼭 망가진 인형같다. 힘없이 축 늘어진 녀석의 모습은 인공적으로 만들기라도 한건지 실제 사람크기로 만든 이상적인 형태의 인형 리얼 돌을 보는듯, 이세상의 것같지 않은 가냘픈 몸매, 그리고 외모, 

내가 이녀석과 같이 잔적이 있다는게 믿을수 없을정도로 심장이 뛰고 설레이고 있었다.

안고싶다. 그런 욕망이 자꾸만 마음 깊은곳에서 솟아나오고 있다. 볼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잠든건지, 지쳐서 눈을 감은건지 미동도 없는 녀석을 무드럽게, 하지만 내 몸에 최대한 밀착시키며 끌어안는다. 온몸에 가득한 충실감이 전해져 온다.

"하아…"

타는듯한 신음, 마치 뭔가 원하는듯한 소리에는 목마르는듯한 갈증이 배어있었다. 해소하고싶다. 당장이라도 녀석에게 삽입해 사정하며 그 쾌락을 뿌리깊은 곳까지 맛보고 즐기고싶다. 마력이라도 존재하는건지, 녀석은 간간히 움찔거리며 움츠러든다. 그 모습이 파멸적일정도로 사랑스러워서 이성을 잃을것 같았다.

수증기에 뿌옇게되어버린 욕실 속에 녀석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처음 대하는듯한 낯설음, 심장이 고삐 풀린 말처럼 미친듯이 뛴다. 숨을 쉬기 곤란해질정도로 나는 긴장해 있었다. 이상할정도의 흥분, 그리고 섬찟할정도로 뇌리에 박혀오는 감촉, 잠들어있는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의 고개를 살짝 돌려 입을 맞추었다. 

난 지금 뭐하는거지, 

그런 생각은 점점 옅어져만간다. 단지 지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녀석의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조금씩, 조금씩 녀석의 몸을 잠식해 들어가는것만을 생각했다. 이미 이성의 태반이 날아가버린듯 나는 부드럽게, 하지만 성급할정도로  빠르게 녀석의 몸을 탐했다.

"아…읍"

한가닥 남은 이성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는지 녀석이 살짝 몸을 비튼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도 미약해서 금방 무산되어버리고 이내 내게 몸의 제어를 빼앗겨 버린다. 사랑스럽다.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내 손 안에 넣고싶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소유욕을 느꼇다. 다른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소유욕이라는 감정을 녀석에게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잘 만들어진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하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주고싶지 않고, 나 혼자만 볼수있게, 그리고 완전히 내것이 되었을땐 자랑하고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다.

부드럽게,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녀석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가진다. 완전히 내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손으로는 녀석의 작지도, 그렇다고 너무 크지도 않은 가슴을 부드럽게 말아쥔다. 물속에 들어가있는 가슴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서 괜히 세게 움켜쥐고픈 충동을 만들어낸다.

이 쾌락이라는 녀석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녀석을 완벽히 내것으로 만들어야 고개를 숙이려는듯했다.

녀석의 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메마른 입안에 수분을 공급하듯 녀석의 입안을 탐닉한다. 녀석의 안은 한없이 부드러워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고 싶어진다. 몽롱한 표정의 녀석은 상기된 얼굴로 낮은 신음성만을 흘린다.

"아응…"

귀밑을 핥자 녀석이 몸을 살짝 떨며 낮게 교성을 낸다. 귓볼을 약하게 깨물자 마찬가지로 놀란것처럼 몸을 움츠리고는 다시 축 늘어진다. 조금 더, 이대로 등을 보이고 있는게 아니라 조금 더,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녀석을 느끼고 싶다.

움츠려진 사타구니를 팔로 살짝 벌리고는 음부를 쓰다듬는다. 이상을 느낀 녀석이 다시 다리를 움츠리려 하지만 그 힘으로는 제지할수 없었다. 질구에 손가락을 비비자 녀석은 낮은 신음성을 흘리며 내게 더 기대왔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녀석을 강하게 원할 뿐이었다. 무언가 손가락을 무는듯한 느낌, 조금 더 밀어넣자 그곳이 꽉 죄어오며 흡사 무언가가 깨무는것같은 느낌을 받게한다.

"흐으…아…"

탄성의 강도는 더더욱 높아지도 있었다. 괴로워하는건지 좋아하는건지모를 신음을 흘리는 녀석을 보니 더더욱 괴롭혀주고 싶어졌다. 손가락을 뺀다. 급했다.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하다간 사정해버릴것 같아서 나는 녀석의 몸을 내쪽으로 돌리고 내 위에 앉혔다. 녀석은 기대듯이 안겨온다. 마치 두려움에 떠는것처럼, 가슴의 탄력이 마찬가지로 내 가슴에 느껴진다. 조금 더, 녀석을 느끼고싶다.

"…아으…으…하아…"

반쯤 감긴 두 눈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듯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것같이 애처로워보였다. 그런 녀석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부드럽다. 부드러워서 입술을 떼기가 싫어진다. 영원히 이대로 있고싶다는 마음만이 내 몸을 지배해간다.

내가 이녀석을 가지는게 아니라, 이 녀석에게 내가 지배당하는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천천히 내 그것을 녀석의 음부에 댄다. 조이는 감각, 그건 소름끼칠정도로 기분좋은 것이어서 순간적으로 사정할것같은 쾌감에 이르렀다. 녀석의 입에서는 전처럼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이 아닌 탄성에 가까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처음 이녀석과 잣을때,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귀여워서 더 괴롭혀주고싶은 마음도 생겨났지만 지금은 아파서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는지 녀석은 작은 신음만을 아기고양이처럼 작게 내고이을 뿐이었다.

"아으…응…하…으…"

허리를 천천히 움직일때마다 녀석의 신음도 규칙적으로 흘러나온다. 사랑스럽다. 녀석은 내 어깨에 양손을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끌어안고 있는것 같아서 우리들은 더더욱 밀착된 상태로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전보다 그곳의 느낌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으…윽…으…"

물이 출렁거린다. 뇌수가 끓기라도 하는듯 당장이라도 사정해버릴것같다.내 위에 올라탄 녀석의 감촉이 말로 표현할수없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으응…응…흑…흥…아아…"

녀석의 눈엣 눈물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그리고 그곳의 조임이 갑자기 강해지며 녀석의 몸이 순간 쭉 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나도 절정에 달해버려서 녀석의 몸에 강하게 사정해버렸다.

녀석이 기절하듯 쓰러지고 나는 녀석의 몸에 사정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녀석을 임신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정현, 그녀석이 확실하게 포기하게 만들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기절하듯 잠든 녀석의 눈은 완전히 감겨있었다. 이미 녀석과 한번 잣을터이다. 그럼에도 이런 순결한 느낌이라니, 아니, 오히려 더더욱 소유욕을 증가시킨다. 나는 녀석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지금은 이 여운을 즐기고싶다.

불화, 곧 알게 되실겁니다

눈이 저절로 떠졌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까. 일어나자마자 나를 반긴건 날 인형이라도 안고있는것처럼 소중하게 끌어안은채로 잠들어있는 선우의 모습이었다.

깨끗하게 사라진 두통, 약간의 어질어질한 감각은 있었지만 전처럼 혀가 말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건 아니었다. 내 몸을 구속하는 팔을 치우고 일어난다. 문득 책상을 보니 그곳에는 만든지 꽤 오래되었는지 식어있는 토스트와 우유 한잔이 있었다.

배가 고팠다. 아무래도 저걸 먹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나에게 먹으라고 준비해둔 것일수도 있다.

아침식사인지, 얼마만의 식사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식사를 하며 창밖을 보자 아침인지 맑은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 얼마나 잔걸까.

손목시계, 아날로그와 디지털 혼합의 시계인지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디자인을 한 시계는 sat 토요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의 밤, 그로부터 나는 몇시간을 잔걸까. 총 이틀, 나는 그동안 잔것 같았다.

"……"

단지, 기분나쁠정도의 우울한 기분이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만든다. 하늘은 맑다. 단지 그것뿐으로 평화로움을 상징하는듯한 쾌청한 맑은 하늘은 밝은 빛을 뿌리며 내 이런 기분을 무시하기라도 하려는듯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륵

일어선다. 갑작스레 눈앞이 새까맣게 흐려져서 몸이 휘청거린다. 엉망이다. 뭐든 내 뜻대로 되는게 없다. 갑자기 또다시 한층 더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곳에 계속 있을수는 없다. 이곳은 내가 있을곳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갈곳이 있는것도 아니다. 며칠동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다시 녀석의 집에 들어간다는것도 우스운 일이다.

"저기 책상위에 있는옷 입어"

잠결에 말하는듯한 웅얼거림이었다. 책상 위에는 여성용의 옷이 한벌 놓여져 있었다. 어디서 구한걸까라는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예쁜 옷이었다. 하지만 새옷은 아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입던 옷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을것이다.

"고마워…"

내가 가리라는걸 알고있다는듯한 말이었다. 움직이려 하지않는 발을 움직여 느릿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옷은 내 몸에 딱 맞았다. 불편한것 없이 스커트 자락이 팔랑거린다. 단지 치마가 이제는 익숙해져버렸다느 생각에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며 방을 나선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라도 만날수 있으니까.

또다시 시내를 걷는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사람은 없어서 마치 세상에 나 혼자 괴리된것같은 묘하면서도 이상한 상쾌함과 동시에 몰려오는 고독함, 이건 한밤중의 아무것도 없는 시내를 돌아다닐때보다 더하다.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갈곳이 없다. 하지만, 어디론가 가고싶다. 이 지친 마음을 쉬게해줄곳이 너무나 필요했다. 쉬고싶어, 쉬고싶어서. 

하지만 갈수있는곳이 없다는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바보같이, 나는 지금 뭐하는거지. 괜히 나혼자만의 착각일수도 있다. 사실은 화도 나지 않았고 오면 그저 평상시처럼 '어 왔냐'라는 식의 특별할것도, 다를것도 없는 분위기로 날 맞아줄 것이다.

하지만,

두렵다.

-후우웅

차가운 바람이 귀끝을 스친다. 그대로 귀가 찢겨져나가버릴것같아서 몸을 떤다. 

사실 나는 전부터 소심했다.

뭔가 중대한 결정을 하려고 하면 늘 최악의 상황을 걱정한다. 그래서 99%25의 확률로 성공할 일도 1%25의확률로 실패할 경우를 걱정하는, 바보같고 한심한 녀석이다.

어찌보면 신중한, 어찌보면 바보같을정도로 소심한 성격이다.

그게, 지금 내 발목을 불잡고 있다.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 화났으면 어쩌지, 자고있으면 어쩌지 하는 바보같으면서도 어이없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된다. 가슴이 미친듯이 두근거린다.

어느새 집앞까지 와있지만, 오면서도 문고리를 잡을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안에서는 시끄러운 TV소리가 흘러나온다. 들어가고싶다. 쉬고싶다. 이 몸을 침대에 눕혀서 쉬게 하고싶다.

그런 바램이 불안감보다 컷던걸까.

-딩동

나는 벨을 눌러버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것같이 뛴다.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이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릴것만같은 기분을 난 내 나름대로의 노력으로 견디고 있었다. 

-덜컥

"……"

"어? 수현이네? 왜 이제왔어?"

나온건 정현이가 아니라 그 새엄마라는 사람이었다. 언제나처럼 기분좋아보이는 모습을 하고서는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몸이 차갑다며 내 볼에 손을 한번 가져다대더니 날 끌어당긴다. 정현이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니??"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TV를 보고있는 녀석을 볼수 있었다. 녀석은 느릿한 동장으로 내게 시선을 옮기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 아…"

안녕, 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입밖으로 나오기가 힘들다.

그리고

-슥

결국, 나오지도 못했다.

그걸로 끝,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것으로 녀석은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다. 화나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왠지모르게 저 분위기가 다가갈수 없게 느껴져서 나는 마실거라도 줄까하고 물어보던 그녀를 무시하고서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두근 두근

심장이 파열한다. 그럴정도로 뛴다. 화나있다 분명, 화나있었던거다.

이대로, 계속 화나있는다면, 난 여기에 계속 있어도 좋은걸까.

-덜컥

자고있었다. 그런데 문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버렸다. 창밖을 보니 이미 시간은 한밤중, 이렇게나 시간이 빨리가는 것이었던가.거실과 이 방의 사이, 그곳에는 녀석이 알듯말듯한 표정으로 날 보고 서있었다. 마치, 저건 뭔가를 원하는것같았다.

녀석이 내게 걸어온다. 침대 앞까지 걸어온 녀석은 내게 뭔가 할말이 있다는것처럼 내 귀에 자기 입을 갖다대고는 남이 들으면 안될 말이라는것처럼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

"뭐…뭔데?"

왠지, 나는 그 분위기에 기죽어있다고 표현해야 할것이다. 뜨거운 숨결이 귀에 와닿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질려있었다.

"섹스하자"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고 방금 녀석이 뱉어낸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재차 되물었다.

"뭐,뭐…뭐라고?"

"……"

녀석은 내 당황한 모습이 재미있다는듯이 웃는다. 그 미소때문에 녀석이 방금 꺼낸 말이 장난이었다는걸 깨달았다.

"뭘 그렇게 쫄고그래 내가 미쳤냐? 너랑 그걸 하게"

"이…이!!……놀랐잖아!"

-퍽!

"컥!"

허술한 턱에 직격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고개가 젖혀진다. 침대에서 잽싸게 일어나 허리를 제끼고 턱을 어루만지고 있는 녀석의 등을 발로 밟는다. 발에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살의 감촉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퍽! 퍽! 퍽!

"죽어! 이 변태새끼! 죽엇!"

"컥! 억! 이썅! 아퍼!"

놈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다. 조금 더 두들겨줄까 생각했지만 이내 관둬버렸다.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갑작스레 깜짝 놀라서인지 숨이찬다. 그리고

왠지모르게 생겨나는 안도감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죽는소리를 낸다. 젠장, 그런 악질적인 장난이라니,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진심이었다면 어땟을까. 내가 그런것에 민감하다는걸 알면서도 그런말을 하다니, 여전히 악질이다.

"이제 좀 기분이 풀렸냐?" 

"무슨…소리야?"

입은 묻고있어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꼭 머리에 뭔가 거대한게 부딪힌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한 소리였다는건가 그건.

화나지 않았을리가 없다.그 빗속에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결국엔 오지 않았고 다음날이 되서야 왔는데, 화나지 않았을리 없는데, 지금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그런 이상한 농담을 한거다.

하지만, 꼭 그런내용이 아니어도 되잖아. 아니, 어쩌면 그건 이녀석의 머리로 생각해낸것의 한계였던걸까. 녀석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가 할말을 계속했다.

"기분은 어때?"

"멍청아 그런말 듣고 기분좋은사람이 어디있어"

"그런가?"

하지만, 그런 기분이 아니라, 아주 잠깐이지만 생겼던 우리 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것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일에 삐쳐서 그런짓까지 하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갑작스레 내 자신이 한심해져버렸다.

하지만 녀석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나에게 손을 뻗어왓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어서 나도모르게 뒤로 물러서버렸다.

-턱

"뭐, 뭐하는거야!"

"B?A? 중간인가?"

녀석의 양손이 올려져 있는곳은 내 가슴께였다. 두말할 필요없이 봉긋하게 솟아있는 부분. 이런 몸이 되고나서 생긴 부위중의 하나였다. 마치 자기가 감정사라도 되는것처럼 만지작거린다. 나는 어이없게도 그 짧은 상황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면서 녀석의 손을 치워야 하는걸까? 아니면 그대로 놔둬야하나? 부끄러워한다는건 여자로서의 나를 인정하게 되는것이다. 최소한 그런 모습은 이녀석에게는 보이기 싫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건 나름대로 내 자신이 그걸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만들것같다.

하지만, 그 생각이 빠르게 스쳐간 뒤, 그런것보다는 일단 기분이 더럽다는게 중요했다.

-퍽!

"컥!"

또한번, 허술한 턱이 직격타.

"크으… 왜때려!"

"이게 미쳤나 무슨짓이야!"

"닳는것도 아니잖아!"

하기사, 닳는건 아니다만.

"내가 니꺼 만지면 기분 좋겠냐 그럼?"

역발상의 논리로 반박하자 녀석은 반론할 여지가 없다는듯 그런가? 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헤헤 웃어보였다. 그런데 쓸데없이 내 가슴에 흥미는 왜 생긴거지? 그 질문에 녀석은.

"그냥, 심심해서. 앞으로 만질거니까 예행연습삼아 그랬다고 해야하나…"

물론, 그 대상은 내가 아니다. 후에 녀석과 결혼하게될 누군가겠지. 그런데 날 예행연습의 대상으로 삼다니, 설마 나중에는 그렇고 그런것까지 부탁하는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최악이다.

하지만, 왠지모르게 나는 부끄러우면서도 물어보고 싶은게 하나 있었다.

"그…느낌……… 어때?"

"응? 궁금해?"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만질때는 기분 좋았지만 남이 만질때는 어떨까. 나는 나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는 하지 못하니까 은근히 평가해주길 바라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일단, 다른녀석들에게는 부탁할수 없는 일이니까 가장 편한 상대가 아닐까.

녀석은 은연중에 궁금하다는듯한 눈빛을 하고있는 날 쳐다보더니 이내 또다시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번 더 만져보면 알것같은……"

"에?"

녀석은 말하면서도 내 주먹의 위협을 생각했던건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본능적으로 튀어나갓어야할 주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야, 난 그만큼 그게 궁금했던건가.

녀석은 주먹이 날아오지 않은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낌건지 한숨을 휴 하고 쉬고는 또다시 의사를 묻는듯 날 쳐다본다.

"좋아"

"에? 정말?"

녀석은 내가 동의할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믿을수 없다는듯 보고 있었다. 방금은 내가 이겼다고 봐도 좋은걸까. 하지만 나도 그저 '궁금하다'라는것 하나때문이었다. 

"대신, 이따가 밥먹고 할래, 배고파"

"어? 어… 응…그래"

녀석은 아직도 얼빠진 얼굴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나도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별명이 太公望 아닙니까

사실, 밥이라고는 나도 모래알 삼키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그런말을 했을까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아무리 내가 남자였다는걸 아는 녀석이고, 친한 친구라고는 해도 가슴을 만져달라고 한다니, 변태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내 눈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뭐…뭐해…"

하지만 돌이킬수도 없다. 이대로 없던일로 하자고 하면 또 우리 나름대로 서먹서먹해져 버린다. 애초에 남자니까 순결이니 뭐니 따질것 없다고 녀석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하자고 내쪽에서 말한다면 부끄러워하는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내 입장이 난감해진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척하자.

어두운 방 안에서, 지금 무슨짓을 하고있는건지 나자신도 이해가 잘 안된다. 녀석의 손이 내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건 묘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누구에게든 만져졌다면 그때 그 감정은 흥분, 혹은 끔찍함 둘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 기분은 종잡을수가 없다. 좋아하고 있는건지 싫어하고 있는것지 그것도 아니면 뭔지…

모르겠다. 단지 심장이 터질것같이 뛰고있다. 우리 둘다 아무말도 없어서 처음같은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꼭 이대로라면 이상한 일이라도 벌어질것같다.

-슥

닿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처음 만져지는것도 아닌데 꼭 처음인것같은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녀석도 그건 마찬가지인듯 양손을 내 가슴에 놓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냥 손만 얹어놓고 있는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양 가슴을 꽉 쥐었다. 하지만 너무 세게 쥐지는 않아서인지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묘한 압박감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이상한 느낌만이 느껴졌다.

그래, 이걸로 끝이다. 한번 만졌잖아 느낌이 어떤지 말하고 그냥 끝내자. 조금만 더 있다간 이상해져버릴것같다.

"어……때?"

사실 난 궁금했던거다. 하지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단 아예 내 물음 자체가 너무 작은 소리라서 들리지 않았다고 해야 맞는말일 것이다. 녀석은 이젠 그곳을 말 그대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아까부터 사실 흥분되고 있었다. 만져지기 전부터, 아까 전부터 만져질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단지, 그걸 이상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서 억지로 억누르려 하고있었을 뿐이다.

아까 갈아입은 잠옷 위로 느껴지는 손의 움직임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자꾸만 소리가 나오려고 한다. 

"어때?…… 좋아?"

간신히, 용기를 내서 말했다. 녀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왠지 그럴 용기가 없었다. 눈을 본다면 흥분해버렸다는걸 들킬것 같아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상하다. 이대로라면 꼭 이상한 짓이라도 하려고 하는것 같잖아.

녀석은 갑자기 제정신이 든것처럼 머리를 한번 털더니 한마디 했다.

"최악이야. 크기도 작고, 빈약하잖아 탄력은 있는데 결정적으로 작아"

"악!"

그러더니 내 가슴을 쥐어짜듯이 꽉 움켜쥔다.

"아프잖아!"

내가 소리치자 녀석은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짓더니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소리 크게 지르지 마, 저기까지 들려"

"이…이… 뭐하는거야!"

작게 말할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내 양쪽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누르는 것이었다. 그 뜨끔한 고통과 동시에 묘한 느낌이 일어나서 몸을 뒤틀었지만 녀석은 무슨생각인지 놓아줄 생각을 안했다.

"아, 앗…으… 하, 하지마…하지마! 뭐하는거야!"

"이러면 기분좋아?"

"좋을리가 없…잖…"

하지만 사실이었다. 아까부터 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고 조금만 더 흥분한다면 나 자신도 제어할수 없게 되어버릴것 같았다. 내가 계속해서 반항하자 녀석은 그제서야 날 놓아주었다.

"하아…하아…하아… 놀랐잖아… 뭐하는거야…"

"확실히 맨살이 더 기분좋네"

"!!"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말을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진 탓이었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런말을 하고서는 내게서 떨어졌다.

"흥분했어? 거기가 바짝 서던데 여자는 원래 그렇구나… 흥분하면…"

"시, 시끄러!"

나는 녀석의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를수밖에 없었다. 남녀관계도 아니니 이런건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은거겠지만 너무했다. 

"젖었나 확인해볼까?"

"저, 저리가! 뭐하려고…"

나 아랫도리에 시선을 고정한 녀석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음흉한 표정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 어깨를 잡아 날 찍어누른다 움직일수 없다. 당연히 이 약해진 몸으로 뭘 할수 있을까. 

정말로 이건 장난이 아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새빨개진다. 녀석의 손이 그곳에 닿는순간 나는 말로 표현할수 없을정도의 느낌에 몸을 떨어야 했다.

"역시 젖었었……컥!"

-빠지직

순간 녀석이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쪽으로 픽 고꾸라져버렸다. 녀석의 옆구리에는 얼마 전에 녀석이 선물해줬었던 전기충격기가 들려져 있었다. 그 빗속에서도 용케 망가지지 않고 있었다.

"……"

뭐랄까, 자기가 선물해준것에 자기가 당하다니 아마 참 뭣같은 기분일거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 나는 녀석을 침대로 밀쳐버리고 몸을 추슬렀다.

"장난이 심하잖아… 개자식"

아무리 서로간에 허물없는 사이인데다가 남자였다는 사실까지 알고있다고는 하지만 수치심이라는게 있는거다. 게다가 요즘엔 이상할정도로 그거에 대해서 민감한 상태라서 조금만 건드려도 이렇게 이상해져버린다. 나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그 검은색 흉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 괴롭히던 불안감은 없었다.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가장 날 괴롭혔던 불안감과 소외감은 더이상 없었다. 거기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에 더없이 편안했다. 내 집이 아니지만 이제 내 집이 되어버린 친구의 집에 산다는게, 의지가 된다고 해야할까.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걸 부정하듯이 내 옆에 지금 이녀석이 있다.

그리고, 또다른 불안감이 날 괴롭게 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혼자가 되지는 않을까.

난 바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1%25의 실패의 확률을 두려워하는 멍청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이 안도감이 또다시 불안감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것때문에 편안해질수 없다. 녀석이 언제고 날 버릴지 몰라 하는 그런 불안감때문에. 버릴리 없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쉽게 생각할수 없는 그런 불안함.

잃고싶지 않다. 지금 내곁에 없는 다른 이들. 날 아는 이도, 내가 누군지 아는 녀석은 지금 눈앞의 이녀석밖에 없다. 아니, 지금 내 곁에는 이녀석밖에 없다. 어디있는지도 모를 혈육은 날 버리다시피했으니까. 그것때문에 한없이 불안하다. 언제고 사라져버릴지 몰라서.

아니, 그보단 혼자가 두려운 것뿐이다. 그저 외로운게 싫어서.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니까 외로우면 살아갈수 없는…

"……기분 이상해"

자고있는… 아니, 기절해있을터인 녀석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누우며 중얼거린다. 녀석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러고 싶었다. 같이있고싶다. 혼자는 싫다. 그런 생각만이 든다

이유는 없었다. 나도모르게 그곳에 손을 가져가자 뭔가의 액체에 의해 팬티가 젖어있었다. 그곳을 살짝 문지르자 형용할수없는 기분에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읏…으"

싫다 이런건, 자위라니. 게다가 옆에 기절해있는 녀석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당장 그만둬야 한다. 녀석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서먹해져버릴게 분명하다. 게다가 지금 자세라면 녀석을 보고 흥부해서 이런짓을 하는것 같잖아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손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새 그곳 안까지 깊숙히 들어가 있는 손가락은 점점 더 날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아읏, 응…으…우…"

손가락을 무는듯한 감촉과 이상한 뜨거움이 괴로울정도로 날 힘들게 한다.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내보지만 신음성이 터져나온다. 내 안이 이랬었나 싶을정도로 뜨겁다.화상이라도 입을것같은 그 뜨거움은 더욱더 강렬한 쾌감으로 날 자극한다.

"읏으… 앙…흐…"

하면 안된다고 소리치지만 내 몸이 욕망과 이성으로 나뉘어져있는것처럼 서로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쾌감은 어느쪽에게나 전해져오는 것이어서 참기 힘들정도로 괴로웠다. 이런 작은것에도 느껴버리는데 조금 더 커다란게 들어온다면 기절해버리는거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하지만 지금 들어와있는게 손가락이 아닌 다른 남자의 성기라고 생각하자 갑작스레 형횽할수없는 쾌감이 날 휩쓸었다. 나 자신을 변태라고 욕하며 경멸하면서도 그 쾌감은 참을수가 없었다.

"으읏! 아…으…"

순간 갑자기 강한 쾌감과 함께 마치 산비탈을 내려오는것처럼 두근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된다. 그리고 나서 사정하듯 엄청난 애액이 터져나와 속옷을 적셧다. 흥건하게 젖어버린 팬티는 갈아입어야할 정도로 심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움직이기도 힘들정도였다.

친구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이제 뭐하는 짓일까. 내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어지기도 싫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바보같다. 난 왜 이렇게 바보같은걸까.

하악하악

버스까지 타고서 도착한곳은 용인에 있는 한 놀이동산이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런곳에 갑자기 왜 오자고 한걸까.

어색함이 감돈다.

나는 말을 꺼낼수가 없었고 녀석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장착하고있는 사람같은 표정을 짓고있을 뿐이었다.

"……여기 비싸잖아, 왜 오자고 한거야?"

침묵을 깨기위해 한 말이었다. 물론 돈을 내가 내지는 않는다. 녀석이 다 내고 나는 그저 따라왔을 뿐이다.

"날씨도 풀렸는데 이런날에는 놀러와야지, 괜찮아 돈 많으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또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입이 아직 남은 추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건지 목에서 언어가 된 그것은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저거탈래?"

-꺄아아아아악!!

요즘세상에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오디오로 녹음된 비명소리를 내보내고있는 롤러코스터였다. 뭐 괜찮다. 놀이기구는 옛날부터 잘 탔으니까.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해서 그걸 또 즐기는편도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랬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이란 그 모든것을 포함한 것들이 재미없었다.

뭐랄까.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나는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저 옆에있는 이녀석이 무슨말을 할지 조마조마한것 뿐이었다.

하지만, 줄의 중간쯤에 오자 갑작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표정도 점점 더 불안감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왜그래? 무서워?"

"누, 누가 무섭다고그래! 하나도 안무서워…"

녀석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다시 말이 없어졌다. 계단 밑으로 보이는 땅까지의 거리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방금전의 두근거림과는 다른. 이제 곧 일어날 일에 대해 나는 그것을 견딜수 없다고 암시하듯 심장이 뛴다.

그리고 점점 내 마음속의 공포감도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뭔가 녀석에게 말을 하려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못타겠다'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전에는 잘만 타던 녀석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롤러코스터가 가까워져오자 그런 마음도 사라졌다. 안색은 파랗게 질려버렸고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날 안쓰럽다는듯 보고 있었다.

"나, 나 이거 안타면 안돼?"

"왜?"

"그, 그냥… 싫어…"

어째서 전에는 잘만탔던 롤러코스터를 지금에서야 무서워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살고봐야했다. 저걸 탔다가는 최소한 기절일것같다라고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나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냥 타, 기다린거 아깝지도 않냐"

그렇게 말했지만 녀석은 날 보며 재미있다는듯 웃고있었다.

"싫어! 무서워! 안탈래!"

본심이 드러나버렸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으려고 하는 내 말에 약간은 당황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른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날 붙잡았다. 이대로라면 난 혼자 뛰어내려갈 기세였다.

"예전에는 잘만타더니 왜그래"

"몰라 무서워 안탈꺼야!"

두려움에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른사람이 보건말건 상관없었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만인을 즐겁게 해주는 놀이기구인 롤러코스터가 악마의 화신으로 보였다.

제자리에 꼭 붙어있으려는 나를 녀석이 잡아당긴다. 어느새 우리들이 탈 차례가 되어있었다.

"안타실거에요?"

"네?……다음번에 탈께요"

"안타! 안탈꺼야!"

우리 뒤에 대기하고있던 다른 사람들을 태우며 놀이동산 직원이 재미있다는듯 나와 녀석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쪼그리고 앉아서 버티고 있는 나를 힘으로 일어나게 하며 녀석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 타, 뭐 어때 안죽어"

"시, 싫어… 무서워… 저거 안탄다고 죽는거 아니잖아아…"

"기다린거 아깝잖아, 그냥 타!"

내 목소리는 어느새 어린애가 칭얼대는것처럼 바뀌어있었다. 확실히 날 설득하는 녀석이나 타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나나 타인의 눈에는 어린애를 달래는 엄마와 딸로 보일것이다.

어느새 다음 열차가 준비되고 나는 가장 무섭다는 첫번째 자리에 앉게되는 영광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 타기 싫었다. 

"그냥 타!"

-털썩

"싫어!!"

녀석이 날 들어서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서는 안전바를 내려버렸다.단단하게 고정된 그걸 풀어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미 출발준비를 하고있는 열차는 내 노력을 간단하게 무산시켜버린 것이었다.

"무서워……싫어…내릴래…"

"가만히 있어"

정신착란증에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떠는 내 손을 꼭 잡으면서 녀석이 말했다. 눈을 감고 최대한 진정해보려 숨을 몰아쉰다. 예전엔 잘 탔잖아, 왜 지금와서 이러는거야 하고 침착해지려 했지만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덜컹 드드드드

체인에 이끌려 롤러코스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의지할건 안전바와 날 잡고있는 녀석의 손뿐이었다. 그 손을 으즈러지게 잡는다고 해서 공포심이 사라지는건 아니지만 난 온힘을 다해 그 손을 잡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

하강의 순간. 나는 그 오디오 사운드를 직접 내 목에서 재생했다. 소름끼칠정도로 강렬한 잠시동안의 부유감. 그리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내려가는듯한 추락의 기분.

나는, 그 10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10년은 더 늙었다.

"으으…으…"

-비틀

"괜찮냐?"

녀석이 쓰러지려는 날 붙잡아 일으키더니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나쁜놈…"

"왜그래? 전에는 잘 탔잖아?"

"나쁜놈……개새끼……"

세상이 어지러웠다. 내가 방금 뭘 한건지도 모를정도로 다른 세계에라도 다녀온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에있는 녀석에게 욕을 하면서도 나는 혼자 움직이지 못해 녀석의 부축을 받고있었다.

구토감은 들지 않았지만 정말로 기절할뻔했다.

"이번엔 저거타자"

녀석이 가리킨것은 그냥 보기에도 섬뜩한 놀이기구였다.

double rock spin

"으으…"

"괜찮아?"

지금까지 괴롭혀놓고 이제와서 걱정해주는척하지마, 개자식

"어지러워"

나무의 딱딱함이 엉덩이에 전해져오는것도 지금은 괴롭다. 어딘가 쓰러져버리고 싶지만 기댈곳도 없다. 단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속을 가라앉히는데 노력할 뿐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걸까? 분명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오히려 시시하다고 생각했던것들이 왜 이제와서 갑자기 무서워진걸까? 그걸 추측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전부 다 이 몸으로 바뀌고 난 다음의 일이다.

쓸데없는 두려움이 생겼고, 쓸데없는 공포심이 생겼고, 쓸데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아졌다.

너무나 희생한게 많다. 난 며칠전의 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요즘 너 기죽어있는거같아서 여기 데려온건데… 더 기죽은거같네"

"내가… 기죽어있어?"

그랬던가? 내가 기죽어있었나? 문득 오늘아침의 팬티 사건이 생각났다. 그것때문에 기가 죽었다고 생각한걸까?

아니, 기죽어있던건 사실이다.

두려웠다. 갈곳도 없는 나는 녀석이 날 내보내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점점 더 소극적이 되고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점점 더 나약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두려움이 생기고, 쓸데없이 눈물 흘리는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이 공포심이 생긴것이다.

"그랬……구나…"

녀석이 날 버리지 않을거라는 확신속에 살면서도 갑작스레 툭툭 던지는 말에 상처받고, 불안해지고, 언젠가는 혼자가 될거라는 불안감에 떨었다.나는 이 몸으로 변하면서 동시에 성격이 바뀐게 아니다.

내 스스로, 내가 알아서 바뀌어준것 뿐이다. 난 이렇게 바뀐 내가 싫다.

"너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어"

"응… 나도 그렇게 느껴"

예전의 나는, 뻔뻔하고, 쉽게 모든것에 질리고 다른 삶을 살고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과는 너무도 달라서 그게 나인지, 지금의 내가 나인지 알수가 없다. 그 며칠새에 사람의 성격이 바뀐다는게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생각하는것도 우스웠다. 이렇게, 지금 바뀌어 버렸는데

"정말… 많이 달라졌어…"

내 혼잣말에 녀석은 날 바라본다. 아직도 속은 울렁거린다. 그래, 예전으로 돌아가는거다. 기죽을 필요없다. 이렇게 녀석에게 빌붙어있는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거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마지막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난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 너무 유치하고 바보같아서 녀석의 눈을 마주치고서는 말하지 못할것 같았다.

"너…"

"왜?"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바보같이, 나는 바보같이 그런걸 직접 입으로 확인해야 아는 사람이니까 내 바보같음에 치를 떨면서도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나… 안버릴꺼지?"

갈곳이 없다. 하지만 녀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 버릴수 있다. 그런 마음먹을일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걸 불안해하고 있다. 녀석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볼 용기조차 없었다.

"네가…"

녀석은 입을 떼었다. 주변의 시끄러움은 모두 무언가에 먹혀버린듯. 녀석이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네가 갈곳이 생기기 전까진… 버리는게 아니라, 내가 못보내줘"

그 말에 나는 안심했다.난 그 말을 직접 입으로 확인해야 아는 사람이다. 아니, 알고있으면서도 불안함에, 두려움에 그 말을 입으로 하는게 너무 듣고싶었던거다.

그리고.

그래야 내가 전처럼 돌아갈수 있으니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그제서야 두근거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극도의 정신적인 피곤함 때문에 눈이 감겨왔다. 

-슥

나는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했다. 그 어깨가 따듯하기보다는 다른 무언가가 따뜻해져오는것 같았다. 이 편안함이, 이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리 없으니까. 멈춰버릴리 없으니까, 지금 이 시간처럼 행복하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야만 한다. 누가 내 인생을 가지고 노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행복해지고 싶다. 아니, 그런 소심한 마음가짐으로는 마우것도 할수 없다. 난 행복해질것이다.

"나 저거 사줘"

"또? 그만먹어, 여기서 먹는거 다 비싸다고"

"먹고싶어, 사줘"

놀이기구는 안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먹을것만을 사냥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이곳에서 먹는건 얼마나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돈만 쑥쑥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뭐 어때, 내 돈도 아니다. 게다가 녀석도 오늘만큼은 내가 하고싶은걸 뭐든 하게 해주려는 모양이니까 나는 내 마음 가는것마다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막대과자를 사주며 녀석이 그렇게 먹고도 질리지 않냐는 둥의 소리를 해댄다. 아직 추운 날씨에 녀석과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나 저거 사줘"

생각할 틈도 없이 날 유혹하는 무언가가 등장했다. 그건 토끼모양 머리띠로 평소에 가장 하고싶었지만 신체적인 조건으로 인해 하지 않았던(정확히는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쁜 여자로 변했으니 저런걸 해도 내 옆의 이녀석이라면 모를까 다른사람은 아무말 않겠지.

"질린다 질려"

그렇게 말한 녀석은 내 머리에 토끼모양의 그 머리띠를 씌워주며 별 생각 없는 표정이 되어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왠지 녀석보다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날 더 쳐다보는것같다. 괜히 헛탕친것같은 기분에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한창을 돈을 쓰며 나돌아다니던 찰나, 갑자기 녀석이 내 옷을 붙잡고 멈춰섯다.

"왜?"

"나 화장실…"

"갔다와"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가는 녀석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뭐 옛날처럼 돌아오긴 했지만 너무 돌아왔달까. 저러다가 아예 집주인이 되버리는건 아니겠지?

"응?"

-후다다닥

녀석이 뭔가를 두고온게 있다는것처럼 빠르게 뛰어왔다.

"어디 가지말고 기다려?"

그 말이 하고싶었던건지 숨을 헐떡거리면서 뛰어와서는 고작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가버렸다. 역시, 돌아왔다고는 해도 아직은 불안한가보다. 그 행동이 꽤나 귀엽게 느껴졌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는 롤러코스터였다.

저게 그렇게나 무서웠을까. 용케 토하지는 않았지만 바이킹을 탈때는 정말 눈물을 찔끔했다. 어째서인지 점점 더 나약해지는것같은 모습이 안타깝다. 그만큼 녀석을 아는 사람이 적어지고 기댈수있는 사람이 없어져가는 탓이겠지.

-툭툭

"왜또"

또다시 녀석일거라 생각하며 귀찮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것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헉!"

그건 에버랜드의 마스코트 옷을 입은 인형인간이었다. 그 거대한 머리에 당황하면서도 무슨 볼일이 있는건지 그건 날 보고는 그 거대한 머리를 벗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형?"

"오랜만이네"

옛날 피씨방을 자주 갈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형으로 하도 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져버린 형이었다. 아르바이트 건이 있으면 닥치지 않고 하는 타입이었는데 에버랜드까지 오다니, 대단한 근성이다.

"여자친구랑 온거냐?"

"어…뭐… 그냥"

같이 와놓고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친구라고 할수는 더더욱 없지 않은가. 그 형은 이 날시에라도 거기 들어가 잇으면 더운지 땀을 닦으며 일이 어렵다는둥, 애들이 발로 걷어찬다는 둥, 초딩들이 앵겨서 사진찍자고 하는게 귀찮다는둥의 말을 했다.

확실히 이런 먼곳에서 아는사람을 만난다는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선우도 여기 있던데, 같이온거냐?"

그렇게 일에 대해 불평을 하는도중 갑자기 들린 말이었다. 어째서? 그놈이 여기 왜 온거지?

"아니, 둘만왓는데, 여기 있어?"

"어, 좀 전에 온것같은데, 혼자온것같았어"

어떻게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여기에 오다니,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녀석과 수현이를 만나지 않게 하기로 마음먹엇으니 녀석과 수현이는 만나면 안된다. 그때의 그 사건으로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 많이 생겼지만 어쨋든 만나선 안된다. 녀석이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난 다시 일하러간다. 놀다가"

"어…응, 수고해"

형은 다시 그 거대한 머리를 착용하며 멀어져갔다. 아무래도, 아직 나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나가는게 좋을것같다.

"……"

그 형은 간지 오래였다. 그 모습을 하고 어린애들의 시비를 다 받아주며 속으로는 온갖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나저나 얘는 화장실에서 아직도 안오는 이유가 뭐야?

벌써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큰 볼일이라고 해도 끝마치고 나왔을 시간임에도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도 없다. 설마 길이라도 잃은걸까. 얼빵한 녀석이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아…귀찮게"

-멈칫

핸드폰을 꺼내 녀석의 번호로 전화하려는 순간 젖어버려서 먹통이 된 녀석의 핸드폰이 생각났다.

"……어쩐다"

아마도 이대로 길을 잃은게 확실했다. 전화가 고장났으니 전화도 못하고 지금 여기서 움직이면 여기로 녀석이 찾아올까봐 또 걱정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하는 일이라곤 고작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정도로 녀석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수 없다. 미아처럼 어딘가에 쭈그려 앉아서 징징거리고 있는건 아니겠지?

그렇게 막상 생각하니 정말로 그러고 있을 녀석이 생각나서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남는다. 

"찾으러 가야하는거 아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에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있었다. 순간의 안도감과 함께 왠지 화가 났다. 저렇게 멀쩡히 돌아올걸 걱정한게 왠지 손해라고 느낀걸까.

하지만

눈앞에, 수현이의 옆에는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만나기 싫어하는 녀석이 곁에 있었다.

"젠장"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게다가 그것도 수현이랑 같이 붙어서 오고있었다.

왜 저놈과 나는 이렇게 안좋은 상황에서 안좋은 때에 만나는걸까. 꼭 누가 장난이라도 친것같았다.

"여"

녀석은 왠지 뭔가 켕기는게 있는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선우를 만나지 말라고 했던 충고를 상기하고 있는듯 왠지 봐달라는듯한 애처로운 표정이 되어서는 고개를 내리깔았다.

"혼자왔냐?"

"어, 혼자오면 안되냐?"

안될건 없지. 하지만 혼자서는 재미도 없는 이곳에 왜 굳이 혼자서 온건지가 궁금하다. 우리가 여기있다는걸 누가 알려주기라도 해서 훼방놓으러 온것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었다. 녀석은 내 맞은편에서 능글맞게 웃고있는 녀석의 옆에 서있었다.

왜 거기 있는거지? 네가 있을곳은 거기가 아니야

-휙

"아…"

녀석을 내 옆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적잖게 당황한건지 녀석은 놀란 토끼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애도 아니고, 이런식으로 자존심 싸움이라니 유치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거지?

녀석은 이런 내가 우습다는듯 썩소를 머금었다. 한대 패주고싶어질정도로 재수없다.

"뭐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닥쳐, 너랑 같이다니는일같은거 없어"

내 독설에 수현이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뭐라 해도 상관없다. 난 이놈이 싫다.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행동과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다른 누구도 아닌 수현이를 망가뜨린다는게 죽이고싶을정도로 싫다.

"왜이리 까칠해? 내가 뭐 시한폭탄이라도 되냐? 멀리하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나도 너 필요없어, 수현이만 있으면 돼"

시한폭탄이 너보다 10배는 안전하겠지. 아마 로켓포와 콩알탄의 차이일거다.

"나랑 먼저왔어, 넌 빠져"

"……나랑 같이 다니는게 그렇게 싫으냐?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는것도 흔한기회 아닌데?"

그렇다면 오늘은 악운이 끝내주게 좋은날이다. 

"그럼 어때? 우리 둘 다 원하는건 이쪽이니까 이쪽에서 결정을 하는게"

"뭐 그런…"

"당연하잖아?누구와 더 같이있고 싶은지 당사자가 결정하는거야"

분명 날 선택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녀석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누가 딱히 좋다기보단 선택하는것 자체에 부담감을 느끼는듯 우리가 말이 없자 녀석은 점점 더 당혹스러워하는듯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마"

"왜, 자신없냐?"

"닥쳐,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애초에 선택같은걸 할수 있을리가 없…"

"그럼 다른걸로 바꿔보는건 어때? 너 여기 얘 애인으로서 데려온거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애인이라니, 난 그저 이녀석이 기분이 안좋아보여서 풀어주려고 데려온거다. 애인이니 뭐니 그런 감정 전혀 없이 친구로서 데려온것뿐.

"그럴리…"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친구로서 데려왔다고 하면 지는게 된다. 이녀석은 분명 애인으로서 같이있고싶다고 할거고 수현이는 아무말도 못할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안된다. 

"그래, 애인으로 데이트하려고 데려왔다"

"뭐?"

녀석이 있는대로 당황한 표정을 짓자 난 맞잡은 손을 꽉 쥐어서 가만히 있으라는 의사를 무의식적으로 전달했다. 

"그래? 너 그러면 얘한테 키스할수 있어?"

순간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가슴을 때린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키스?  그런게 가능할리가 없잖아.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데려온게 아닌데 일정에도 없는 키스라니, 게다가 저놈 할수있다고 하면 분명히 하라고 할것이다. 

"그걸 니가 알게뭐야, 얼른 저쪽가서 혼자놀아 자꾸 끼어들지 말고"

"못하는구만, 애초에 데이트가 목적이 아니잖아. 난 수현이랑 데이트 할테니까 넌 자리좀 비켜줘라 응?"

"뭐 그런…"

"그러면 여기서 당당하게 키스해 보던가. 우리는 애인입니다 하고"

저게 어딜봐서 중학교 3학년짜리의 대사인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뇌를 부검해달라는 요청을 해야할것같지만 그러기에는 낸 세금이 아깝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보려 햇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설마 우는거냐 너?

녀석을 달래기 위해 등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녀석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낮게 말했다.

"닥쳐"

"!!"

"!!"

녀석은 짜증난다는듯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혼잣말로, 하지만 혼잣말이 아닌듯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그지같은놈들이 누구 입술을 갖고 이래라 저래라야, 니들 둘! 내 몸은 내꺼야 어느 누구의것도 아냐. 알았어?"

"어? 어…"

"그렇…지"

녀석이 신경질을 내기 시작하자 갑자기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진것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오한이 들기 시작한 것이엇다.

"기분만 잡쳤네, 니들 둘끼리놀아 난 갈래"

"에?"

"안돼, 어디가!"

나와 녀석이 멀어져가는 녀석을 잡으려 어깨에 손을 대자 녀석이 휙 뒤돌아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냥 노려보는것 뿐이었지만 이렇게 바뀐 뒤로 화도 잘 안내던 녀석이 이러니까 굉장했다. 우리는 서로 그자리에 굳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져가는걸 보고만 있었다.

"나… 솔직히 좀 쫄았다"

녀석의 말이었다.

"나도… 좀…"

확실히, 너무 녀석의 의사를 무시했던걸까. 그지같은놈들이라니… 그나저나 방금전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그랬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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