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15/22)

"아~ 해봐"

"먹기 싫은데…"

"주면 처먹어 입 안벌리면 억지로 쑤셔넣는다"

사실 나라고 해도 이런 흰죽은 먹기 싫을 것이다. 게다가 뜨겁기까지 할테니… 하지만 뭐라도 먹어둬야 낫지 않을 거 아닌가?

억지로 입을 벌려 뜨거운 죽을 받아먹는 녀석은 꼭 어미새한테 벌레를 받아먹는 끼새 같았다.

"뜨거워, 맛없어"

"닥쳐"

투덜거리는 녀석도 주면 잘 먹는다. 역시나 배가 고팟던 걸까, 어느새 죽 한그릇을 다 비운 녀석은 다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는다. 볼과 입술에 약간 묻어있는 밥알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자 녀석이 실눈을 뜨며 말한다.

"애취급하는것 같다 은근히"

"애잖아"

"……"

녀석은 삐졌는지 몸을 돌려 누웠다. 저렇게 변하더니 설마 소심해진거냐…

죽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닦은뒤에 정리하고 돌아오자 녀석은 힘겹게 일어나서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은근히 졸리다. 몸살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쨋든 몸에 힘이 없어서 한숨 자야될것같다. 게다가 어제 몇시간밖에 못잔것도 그렇고…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덮을 이불과 베개를 꺼내 베고 누웠다. 좁은 침대에 둘이나 자려면 조금 비좁을테니 말이다(절대 감기 옮을까봐 하는짓이 아니다).

-달칵

녀석이 들어오더니 누워있는 날 보고는 약간 놀랐는지 흠칫한다. 왜 놀라는 건데?

그녀석은 문 반대편에 있는 침대로 가기 위해 침대 바로 밑에 깐 이불을 넘어가서 침대에 올라가… 는게 아니라 침대에 올라가다 말고 내 옆에 드러누웠다.

"뭐해"

"그냥… 바닥이 좋아, 침대는 불편해"

별 고상한 취미가 다 있으십니다그려

"내가 침대에서 자지 그럼"

-스륵

내가 일어나려 하자 녀석은 내 옷자락을 붙잡는다. 왜그러냐고 묻자 녀석은 의외로 간단하게

"손난로는 옆에 붙어있어야지"

라는 아주 간단하고도 의미불명한 말을 함으로써 날 손난로로 전락시키고선 날 다시 눕히고 내 몸에 매달렸다.

"더워"

"난 추워"

그렇게 말한 녀석은 더더욱 내 몸에 밀착하며 다리 하나를 내 배에 올려놓았다.

"족(足) 치워"

"……"

잠든척 연기하는걸 보니 올라가려는 생각은 포기한것같다. 사실 나도 춥기에 뜨거운 난로가 옆에 붙어있는건 좋다. 하지만 너무 밀착하면 답답하다.내 팔을 베개로 삼고 누운 녀석은 내 품에 안기듯 작은 모습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는데 이녀석은 언제부터인지 내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너, 뭔생각을 하는거냐

"좀 떨어져"

"싫어어"

녀석의 취한듯 달뜬 목소리가 귀삭에 어른거린다. 새빨간 녀석의 볼이 내 팔에 닿으며 뜨거움을 선사하고 내 가슴을 끌어안은 녀석의 팔에선 왠지모를 나약함이 느껴진다.

"윽!"

갑자기 느껴지는 야릇한 감촉에 놀랐다. 귀에서 느껴지는 이 감촉은 녀석이 내 귓볼을 이빨로 살짝 물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뭔짓이야"

"배고파"

"죽 먹었잖아"

"그래도…"

아무리 배고파도 내 귓볼을 먹으면 안돼 이자식아.

내껏도 먹어줘

"으응…"

머리가… 아프다. 그것도 많이, 견딜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깨질것만같은 아픔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이상태라면 잠든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하아… 하아…"

하지만 지쳐서 당장이라도 잠들어버릴것만 같이 머릿속은 몽롱하다. 눈앞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것은 형체가 희미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정현?"

이윽고 상이 뚜렷해지자 정현이가 왠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많이 아파?"

"응… 조금"

내 바로 앞에 있는 녀석의 모습은 왠지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이마에 맺혀있는 식은땀을 손으로 훔치고 내 눈앞에 들어찬 녀석의 왠지 이상한 모습을 응시한다.

"뭘… 그렇게 봐?"

"그냥"

녀석은 얼굴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날 쳐다본다. 이래서야 부담스러워서 뭘 할래야 할수가 없다. 아직도 두통이 가시지 않고 감기끝 미열처럼 달라붙어 있다. 몸은 축축하게 젖어서 왠지 기분나쁘게 만들었지만 눈이 자꾸만 감겨온다. 졸리다… 라는 느낌만 든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이 날 끌어안더니 눕혀준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이상하게 친절하다.

하지만 날 눕혀주고 다시 고개를 들었어야 할 녀석은 내 눈앞에서 그대로 멈춘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저 눈빛, 저 애매모호한 감정을 띤 저 눈빛… 익숙하다.

맞아, 그때… 분명 그때…

하지만 내 생각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읍…"

녀석이 거칠게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온 것이다. 당황할 겨를도 없이나는 밀려들어오는 녀석의 뜨겨운 혀의 야릇한 감촉에 몸을 떨어야 했다.

"으읍! 으!"

두통은 계속해서 머리를 압박했지만 그보단 당황함이 앞서 난 몸을 뒤틀며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썻다. 하지만 녀석은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있었기에 달아나지 못했다. 그때 오빠가 내게 했던것과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이녀석은 뭔가 다를줄 알았는데 역시나 같았다. 가장 믿고 있었던 이녀석이… 이런 짓을 하다니…

"하아… 하아…"

"무슨… 짓이야… 미쳤어?"

녀석은 내가 남자였다는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다. 내가 저녀석은 같은 동성으로 느끼듯이 녓거도 나를 동성으로 느낄 것이다. 그걸 알면서 왜… 나는 내 모습을 느낄 시간이 그다지 없어서 모르겠지만 내가 남자였다는것 정도는 쉽게 무시할수 있을 정도로 내 모습이 그런 건가?

녀석은 말도 하지 않고 갑작스레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속옷도 입지 않아서 얇은 옷 한장 사이로 느껴지는 손의 감촉은 인정사정없이 내 가슴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아, 악… 하지…마"

녀석은 말이 없었다. 어느새 날 위에서 깔아뭉개듯 짓누르기 시작한 녀석은 상의를 반쯤 벗겨 내 가슴을 드러냈다.

"그만해! 흐윽!"

비명을 질러대는 내 입을 틀어막은 녀석은 새하얗게 웃으며 자신을 밀어내는 나의 약한 손짓을 뿌리친다. 망할, 망할…

녀석의 손은 한참동안 내 가슴을 어루만지다 점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눈물이 괜히 솟아오른다. 녀석의 얼굴과 오빠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난 눈을 감아버렸다. 아래쪽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의 느낌이 섬뜩할 정도로 뇌리에 스치는 순간.

"허억!!"

-벌떡

"뭐…지?"

이상한 감각이 몸을 스치는 순간 그 모든게 사라지며 다시 일어나자 눈앞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감촉과 깨질듯한 두통은 그대로인데 날 짓누르던 정현이 녀석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너야말로 뭐야, 갑자기 꿈틀거리다가 아악! 싫어~♡라고 말하면서 몸을 비비 꼬더니 갑자기 울고 지랄이야 지랄이"

"에?"

고개를 돌리자 왠지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정현이가 날 이상한 물건 보듯이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헉!"

-스슥

나는 순간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해내며 뒤로 물러서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뭐하냐?"

"응?……아… 꿈인가?"

황당했다. 하지만 녀석은 더 황당했는지 기도 안찬다는듯 마치 집안에 들어온 더러운 도둑고양이 보듯 날 보기 시작했다. 설마 꿈이었던 걸까…

"아… 꿈이구나"

"이게 감기걸리더니 돌았나"

확실히 그런 이상야릇한 꿈을 꾸게 되다니… 내가 미친건가? 평소에 꿈은 꾸는 사람이 생각하던게 나온다고 철썩같이 믿고있었던지라 내가 내면적으로는 그런걸 원했었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자 마자 얼굴에 피가 몰리는게 느껴졌다.

"뭐해, 표정은 멍해가지고"

역시나, 녀석은 빵을 먹은 다음에 그 빵이 유통이한이 삼일쯤 지났다는걸 알게된듯한 저 떫은 표정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아까처럼 탐욕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녀석의 차림이 이상했다. 아깐느 그저 편한대로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옷을 죄다 차려입고 점퍼를 입고 있는게 아마도 지금 밖으로 나갈사람 아니면 나갔다 온 사람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녀석의 몸에서 발산되는 한기를 생각해 볼때 녀석은 나갔다 온게 확실하다.

"어디갔다왔어?"

게다가 녀석이 들고있는 꽤나 커다란 크기의 가방은 내 의혹을 더더욱 증폭시켰다.

"나갔다 왔어"

"그건 뭐야?"

내 질문에 녀석은 별것 아니라는 양 대수롭지 않게 옷가방이라고 말했다. 누구의 옷가방이라는 거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집요하게 늘어지는 것은 저 가방과 약간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고 저건 우리집에 있는 거란 말이다.

"너네 형 만나고 왔어"

낚이신 분들 계신가요?

"네가… 그건 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인간… 아니, 개새끼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놈

"이거"

-툭

그러면서 녀석이 내려놓은 그 가방을 열어보자 안에는 속옷과 저번에 삿던 옷들이 들어 있었다. 설마 뭐 자살하기 전에 입을 옷 없을가봐 사준건 아니겠지?

억측이다 억측…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왠만하면 생각하지 않는게 좋을것 같았다.

"뭐… 다른 말은?"

"……"

녀석은 잠시 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없어라고 딱 끊어 말한 뒤에 밖으로 나갔다. 분명 무슨 말을 했을거다. 분명히 나한테 말하기는 어려운 건가? 알고싶다. 그자식이 나한테 뭐라고 하고 도망갔는지, 

"뭐라고 그랬지? 그런거지! 알려줘"

"어어…"

-툭

일어서는 순간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그런걳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정현이의 팔에 팔을 잡힌 채로 들려 있었다. 망할, 머리는 아직도 아파오고… 미치겠다.

"아무말도 안했다니까"

"거짓말 하지만! 분명 뭐라 그랬을 거야… 분명…"

단지 듣고싶은 말이 있는게 아니었다. 미안하다라느니 그저 말뿐인 사과를 받고싶은게 아니었다. 듣고 싶었다. 간접적으로라도 좋으니까…

"미안해"

"어?"

눈물이 나오려는걸 꾹 참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사과를 해왔다. 뭐가 미안한게 있는지 녀석은 정말로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히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한건 확실하다. 하지만 뭔가… 나에게 알려줄수 없는건가?

"입이 찢어져도 못 말해"

"……하아"

사실 듣고싶었다. 날 이따위로 만들어놧어도 엄마아빠가 돌아가셧으니 남은건 김성현… 형이 아닌 오빠가 된 내 하나뿐인 혈육인데… 그렇게 한순간만에 헤어지는건 옳지 않았다. 아니, 싫다.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녀석의 뭔가 건넸다.

"이건…"

"감기약"

그걸 두고 어디론가 가더니 녀석이 가져온건 물이었다. 빈속에 약먹으면 속쓰린데… 하는 불만은 잠시 접어두고 성의가 고마워서라도 먹어야겠지?

알약 두개를 넘기고 물을 마신다. 효과가 강한 약이었는지 시가닝 조금 지나자 온몸이 나른해져온다. 졸려…

"자둬, 밥해줄테니까"

"으응… 고마워"

진짜 친구란 말이 있다. 나는 사실 그것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잘은 모른다. 하지만 이녀석… 평소에는 시비와 쌀쌀맞게 굴던 녀석이 내가 이런 상황이 되니까 이렇게 대해주는구나… 다행이다. 이녀석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딘지도 모르는 뒷골목을 떠돌면서 떨고 있겠지…

친절하게도 자기 전 내 눈까지 감겨주는 녀석이었다.

"하아…"

찜찜하다. 마치 숙제를 덜 끝내고 제출한것만같은 이 기분…

"씨팔"

내가 어째서 이런 일을 떠맡게 된건지… 딱히 저녀석이 부담스러운건 아니다. 추악하고 더러운 세상의 뒤끝을 다시 본 것이 더러워서 그렇다. 얼마든지 맡아놓을수 있다. 아니, 가능하다면 같이 있는게 좋을것 같다. 외모가 저런 녀석이니 밖에 혼자 놔뒀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김선우 그놈하고의 관계도 의심이 간다.

여러모로 애물단지를 안고있는 셈이 된다. 요즘들어 정서도 많이 불안해진것 같은데… 그런 커다란 변화에 적응하기에는 녀석의 이성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장난으로 시작한게 돌이킬수 없는 결과를 낳을수 있다.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도 엄청난 문제다. 그걸 낳을수 있을리가 없고 만약 낳는다면 녀석의 정서적 혼란은 엄청날 것이다. 그렇다고 또 낙태를 한다면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릴수도 있다.

"하아…"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옆에만 있으면 되는건데… 이상한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나저나 저녀석 생리는 할까?

사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그걸 듣는다면 녀석이 받는 충격이 클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았다.

방금 전 봤던 김수현의 형 김성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사실… 걔… 나랑 친형제 아니야'

별게 다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브라더 콤플렉스가 유난히 심했던 성현이 형이었다. 수현이 녀석은 그걸 모르는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때 녀석이 3학년들한테 삥뜯긴 바로 다음날 3학년 속칭 노는것들이 학교를 나오다가 잡혀서 박살이 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 혼자가 아니라 5명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사실 팬건 성현이 형 하나였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는 퉁명스러운척 별로 관심없는척 하면서도 뒤에서는 나한테 학교에서 맞고 다니는건 아닌지 확실해 달라는 말도 많이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을 강간한게 합리화되는것도 아니고 형제의 우애가 사랑으로 바뀔리는 없으니까 성현이 형의 행동은 약간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것이었다.

"후우…"

어쨋든 걱정이 심하다. 성현이 형은 결국 고등학교 3학년을 자퇴하기로 했다고 한다. 앞으로 먹고살길이 없으니 일이라도 해야 한다면서… 뭐 내가 돕자면 도울 방법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걸 싫어할게 분명한 형이다.

난 최대한 내방에 지금 잠들어있을 수현이 녀석이나 잘 보살펴 주다가 나중에 찾아올지 안 찾아올지 모르는 성현이 형한테 돌려줘야 한다. 최소한 그렇게 하자는 명목으로 데리고 있으니까

사실 성현이 형이 데려간다는걸 억지로 데리고 있겠다고 했다. 딱히 전처럼 그런 일을 당할까봐 걱정되는것도 있겠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형제가… 아니, 이제 남매라고 해야하나? 남매가 힘들게 될것이 자명하니 녀석 하나라도 편하게 해줘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친구는 중요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녀석이 망가지는 꼴은 보기 싫다. 정신적 충격같은걸로 자폐증이나 실어증에 걸려버린다면 더더욱 귀찮다. 소중하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핸드폰을 열어 저장되어있던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답게 핸드폰은 울림이 세번 이상 가지 않았다.

전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중저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퍼졌다.

[예 도련님]

"어… 오랜만이야"

[9개월 만입니다]

"목소리는 변함이 없네"

그 사람과는 다른, 믿을수 잇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직속, 그러니까 내 독자노선상에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사람의 손이 뻗치는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을 쓰고 싶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탁할 일이… 좀 있어"

[미행,보복,납치,사채,빚 등등 뭐든 말씀만 하시면 일주일 안에 해결해 드리죠]

그건 좀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 더욱이 중3 학생에게는 말이지…

하지만 이번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줘야겠다.

"미행해줄 사람이 좀 있어"

[미행 말입니까?]

"그래"

[신상정보를 말씀해 주신다면 바로 타겟팅 가능합니다. 신상정보 없이 인상착의만 알고 계신다면 한달 안에 찾아드리죠]

"그런 미행이 아니야, 관찰이야, 내가 말하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어디에 가는지, 누구랑 가는지, 어떻게 있는지는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해서 편지함에 매일 넣어놔"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영중학교"

[네?]

"태영중학교라고"

[아, 예]

이사람은 쓸데없는걸 안 물어봐서 좋다. 뭐 궁금한것 같기는 하지만 무시한다. 미행이라… 이래도 되는걸까

아니, 모두 다 수현이를 위한거다. 녀석을 위해서… 녀석이 몇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만 알려준다면 괜찮겠지

"3학년의 김수현"

[네 알겠습니다. 기간은?]

"한달, 그럼 끊겠다"

[네 도련님]

-뚝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서늘한 베란다에서 나와 뒤쪽의 베란다로 가 녀석의 교복을 세탁기에서 꺼냈다. 얼른 말려야 내일 입고 갈텐데… 뭐 교복이라는게 학생부실에 가면 있는거라 거기서 몇벌 사는것도 좋으려나?

빨았던 옷들을 꺼내 건조대에 널면서도 왠지 머리가 아프다.

"감기는 다 나았어?"

"멀쩡해"

그렇게나 심하게 걸렸는데 하루만에 다 났다니… 괴물인가, 나도 지금 슬슬 심해지려 하는 참인데…

왠지 전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것 같은 녀석의 모습을 보니 어느정도 안도감이 든다. 아침밥도 말끔하게 비우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왠지 이제는 2인분의 아침을 차려야 하는게 당연해질 정도다.

시간은 7시 20분, 등교제한이 8시 20분이니 시간은 충분히 이른 셈이다. 녀석과 나는 학교에 가는 방향이 다르다. 서로 약 20분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학교지만  서로 반대방향이나 등교방향이 같을리는 없다.

"벌써가냐?"

"응"

왜 그렇게 이르게 출발을 하려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차피 추울텐데…

교복 마이 위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 녀석은 어제 빨아서 말린 구두를 신으며 등교준비를 한다. 까만색의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양말을 걸친 녀석은 여느 여중생이랑 다를게 없다.

"여자 다됐네"

"오호호홋~!"

녀석이 간드러지는 웃음을 낸다. 한대 콱 쥐어박아 주자

-콱!

"악! 왜때려" 

"애교부리지마, 주먹에 힘들어가"

"나느은~ 니 얼굴만 보면 주먹에 힘이 들어가"

녀석의 시비는 무시하고 수건을 가져와 녀석의 버리카락 끝을 문질러 준다. 이렇게 물기가 있으면 나가자마자 머리카락이 얼어버리기 마련이다

"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비단처럼 부드럽다. 물기를 닦아주는것뿐만 아니라 결국 빗기까지 하고 나서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에? 넌 안와?"

"뭐가 이쁘다고"

나는 왜 안따라오냐는듯한 황당한 눈빛이 날 더 황당하게 만든다. 아아, 독재 체제를 갖출 셈인가. 한동안은 녀석에게 휘둘릴것만 같다. 교복은 이미 입어두고 있지만 출발은 조금 있다가 하려고 했는데…

"그럼 먼저 나가있어"

"얼른나와"

언제 꺼낸건지 저번에 사줬던 장갑을 끼고 있다.

-덜컥…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듯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어제 전화를 걸었었던 '그'의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도련님]

"무슨 일이지?"

[태영중학교 3학년에 김수현은 없습니다]

"뭐?"

없을리가 없는데?

잠시 당황함에 가방을 가지러 가면서도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냥 막 쓰는거닷

"뭐해? 안나와?"

녀석이 오른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선 짜증을 낸다. 아, 잠시 멍해져 있었나. 그런데 이름이 없다니 무슨 소리지?

-탁

핸드폰을 서둘러 닫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걸 본 녀석이 무슨 생각이 난건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하더니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방에서 다시 나온 녀석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다. 어제 형이 준 가방 속에는 핸드폰도 들어있던 모양이다.

핸드폰을 교복 마이 주머니에 넣고 다시 나가려는듯 하더니 멈칫한다.

"뭐해? 안나와?"

아까와 똑같은 질문, 상당히 귀찮다는듯한 표정이다. 뭐 모습은 많이 바뀐것 같지만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다. 평소의 짜증과 귀찮음이 약간씩 묻어나던 녀석의 모습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귀찮은거하고 짜증나는건 죽어도 안하는 평소의 모습과 다를게 없었다. 뭐 나쁠것도 없나.

"나가야지"

문을 열고 나서면서 이녀석 이름이 학생부 명단에 없는건 잠시 잊기로 했다.

"흐으… 춥다"

확실히, 이제 봄에 막 접어들긴 했지만 추운 날씨다. 게다가 엊그제는 비도 왔고 하니 추운게 당연하다 싶을정도로 싸늘한 날씨였다. 얼어붙은 길 모퉁이의 얼음이 왠지모르게 더 체감온도를 하락시키는것 같다.

확실히, 내 학교와 이녀석 학교는 다르니 교복 디자인도 많이 다르다. 뭐 교복이라는 이름이 붙는건 같지만 나름대로 디자인은 다르니 뭐 그게 그거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나.

내 바로 옆에서 걷는 녀석의 모습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베이지색의 코트를 곤색 교복 마이 위에 걸치고 아래에 똑같은 곤색의 주름치마, 그리고 검은색 스타킹인지 뭐지 명칭은 자세히 모르지만 양말 비스무리한게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뭐 오버니삭스라고 알고있긴 하지만 그거에 비해선 많이 짧은 길이다. 어쨋든 실루엣으로만 본다면 최고일까.

"춥지 않아?"

녀석이 날 올려다보며 하얀 입김을 뿜으며 묻는다. 아니, 뭐 실루엣뿐만 아니라도 이 모습은 얼마든지 예쁘다고 할수 있겠지만 이녀석의 일주일정도 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나인지라 얼굴이 예쁘다고 해서 그런쪽으로의 마음이 드는건 아니다.

생각해보라, 며칠 전까지 남자였던 놈을 단지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안을수가 있는지.

"춥네"

녀석은 내가 사준 장갑을 끼고 있어서 손이 시리지는 않은것 같았다. 젠장, 내 장갑도 살걸 그랬나.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어쨋든 시리다.

녀석은 연신 입에서 흰 입김을 불어내며 걷는다. 아무래도 녀석에겐 이 추위가 단지 짜증나고 귀찮은 상황에 불과한 모양인지 그 눈동자에는 짜증이 가득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중학생이 하기에는 조금 안 어울리겠지만 뭐 단발로 해도 예쁘려나, 쇼트 컷으로 잘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문득 들었다.

"으으으으으…추워"

연신 추워만 연발하는 녀석은 아파트 정문으로 향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 여성은 기본적으로 피하지방층이 두꺼워서 사실 남자보다 추위를 덜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들은적이 있었다. 수업시간때였나? 하여튼 그렇다는 거다.

"네가 그렇게 추워하지 않아도 원래 내가 더 춥다는 얘기가 되는거잖아, 참을성 없기는"

"그래도 추운건 추운거야"

"이제 봄이니까 조금만 더 참아라"

"어느세월에?"

그렇게 투덜거린 녀석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불어오는 늦겨울의 칼바람을 피하려고 한다. 이봐, 솔직히 그렇다고. 사실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건 나에게 손해되는일은 아니지만 왠지 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날로먹는것 같다고.

사실 난 이런면에는 왠지모르게 손익을 따져서 이런 얌체같은 짓은 환영하지 않는다.

내가 슬쩍 떨어지자 녀석은 아차하는 표정을 하더니 내 옆에 다시 달라붙었다.

"추워, 바람좀 막아"

"뭐가 이쁘다고"

"전부"

그 말에 녀석은 손가락 찌르기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이 기술이란 정말로 대단하면서도 공격성이 강렬한 것이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상대방의 옆구리 부근에 가격해주면 끝내주는 데미지와 지속적인 충격을 줄수 있다.

크리티컬 히트였는지 녀석은 나에게서 두발자국정도 물러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주체하지 못하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쯧쯧, 그러길래 자뻑은 자살의 지름길이라는걸 왜 아지곧 깨닫지 못하고 있을까.

사실 저녀석은 알게모르게 왕자병이 조금 있었다. 이제는 공주병이라는 거냐, 징그런놈

"끄으으으…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든 녀석은 똑같이 공격을 하려다가 내 손에 그 작고 가는 팔을 잡혀버려 아주 쉽고도 간결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아아, 힘도 많이… 아니, 지나치게 약해졌구나 너.

"뭐야 이건, 똑 부러질것 같네"

"크으… 가녀린 숙녀를 폭행하다니, 넌 지금 전 우주적 범죄를 한거야!"

"까셈"

가운데손가락을 펴고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려준다. 흔히 썩소라고들 하지 그걸 본 녀석은 못볼걸 봣다는 양 양쪽 미간을 귀엽게 오므리더니 다른데를 쳐다본다.

"너땜에 내 눈이 나빠지는거야"

"넌 그런말할 처지가 아닐텐데"

그 말에 녀석은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서로가 서로는 너무나 잘 아니까, 뭐 굳이 현실성에 관계를 두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인신공격은 끝이 없었다. 서로의 면상이 어떻든 간에 네가더 못생겻어! 라는 어이없는 주제를 바탕으로 싸운게 셀수도 없을 정도니까.

뭐 우리는 은연중에 자기자신을 '대한민국 평균이하'페이스로 단정짓고 있었던 걸지도.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녀석은 나한테 눈빛을 찌릿 하고 주더니 걸어간다. 아직도 옆구리가 아픈지 인간을 찌푸리면서 말이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칼이 눈앞에 춤추듯 어른거린다. 확 잡아당겨보고픈 충동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지만 참아낸다. 잡아당겼다간 후속타를 견뎌낼 재간이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저녀석 자존심 상한건 아닐까. 힘이 많이 약해졌으니 이제 '이젠 정현이 녀석한테 어느모로보나 진다는 건가'하는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 있을지도.

먼저 가는 녀석을 따라잡아 옆모습을 보니 내 예상이 맞았는지 시무룩해져있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봐, 그런걸로 실망하지 말라고 계집애도 아니… 계집애구나.

왠만한 계집애라는 칭호가 붙은 것보다 훨씬 더 계집아이같은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였지만 나보다 키가 머리하나정도는 더 작아진 녀석을 보고 잇노라니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말을 더 해주고 싶어지는건 전혀 이상한게 아닐지도…

한참 걸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멈춰섯다.

"왜?"

"여기서 헤어져야지, 반대방향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정문쯤까지는 같이올수 있어도 학교가 완전히 반대방향이니 같이가는건 조금 무리이려나. 뭐 서로가 학교까지 대략 십오분 거리, 태영중학교가 조금 더 가까이 있으니까…

녀석은 왠지 조금 시무룩해져 있어서 이대로 놔두면 계속 저상태일것 같다. 의외로 속좁은 A형인데다가 내성적이기까지 하니까 뭐 역시나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될까. 뭐 이젠 내가 보호자인 셈이니까.

아니 순간 내가 삼십대 아저씨로 느껴졌던건 착각일까.

"뭐 시간도 많은데 같이가자"

나는 태영중학교 방향으로 녀석을 끌고갔다. 뭐 우리학교쪽으로 먼저가면 좋겠지만 거기로 가는 날 아는 녀석이 보기라도 한다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테니 수현이네 학교부터 가자는 거다. 뭐 이녀석이 오해를 받게 되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뭐 사실 그 이전에는 내가 있으니 접근마시오라는 가짜 커튼 하나정도는 치자는 생각도 있었다. 진자 사귀는건 아니지만 남자친구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이녀석에게 다른놈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것도 있었다. 쓸데없이 이상한 놈들이 꼬이면 난처해지는건 이녀석 뿐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난 머리가 좋은걸까.

자뻑 계속하면 댐프쉬롤을 갈겨버릴테다

"수민아아~"

춥지도 않은지 커다란 목청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가 앞에서 달려든다. 태영중학교엔 이미 거의 다 도착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곳을 비잉 돌아가는 중이었다. 저거 너무 가까이 붙어서 오는게 부딪힐 기세다.

"어, 응… 안녕?"

뜻밖에 인사를 한건 내 옆에 있는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었다. 뭐지, 이 속은것같은 기분은, 설마 너 가명같은걸 쓰고있었던 거냐, 젠장. 그러니까 이름이 없지.아무래도 다시 연락을 해야겠다.

"오랜만, 어제는 왜 학교 안나왔어?"

"어? 그냥… 몸이 좀 아파서"

발랄해 보이는 여자애였다. 꽤나 밝은 성격인듯 수현이의 등을 팡팡 치며 걱정 많이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리 싫은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하루만에 벌써 이런 친구가 생긴건가. 왠지 손해본 느낌이다. 난 이녀석하고 친해지는데 두달이 넘게 걸렸는데…

"그런데…?"

그렇게 말한 내 머릿속에 수현이 친구라고 새겨져 있는 여자애가 날 쳐다본다. 아무래도 나와 동갑인가. 딱 의문의 빛을 띠고있는 것이 설마 날 남자친구로 오해한다거나 하는 상상을 하는걸까.

"으, 응? 사, 사…"

녀석은 뭐라 중얼거린다 내 눈치를 살피는게 왠지 머뭇거리고 있는것 같다.

"사 뭐?"

"사촌오빠"

왜 하고많은 것중에 오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어색해하는것 같아서 내가 대신 말해줬다.

"응, 맞아 사촌오빠"

무엇에 납득하는 건지 녀석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거린다.  그 말이 나오자 그 여자애는 눈빛이 의심에서 호의로 바뀌더니 이내 안녕하세요라고 꾸벅 인사를 한다. 이봐, 내가 중학생이라는건 교복때문에 알고있을텐데 존댓말까지 할필요는 없잖아?

-딩동댕동

아무리 신식 건물이라도 싸구려 종소리는 변하지 않는가보다. 익숙한 음률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나는 누군가의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듯한 소리를 들었다.

"헉!"

"왜그래?"

청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 장면이라도 봤는지 여자애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나에게 내 이름은 서영은이라고 소개한 뒤 수현이에게 주번이라서 빨리 가봐야겠다고 말한 뒤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러다 팬티 보일라.

"너 가명쓰고 있었냐?"

"어, 이상해?"

별로, 그곳에 김수현이라는 녀석을 알고있는 녀석이 있을테니 이름을 바꾼건 잘한 일인것 같다. 뜻하지 않게 눈치채는 녀석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오빠라고 불러 이제"

"엑?!"

장난이었는데 녀석은 못볼걸 봤다는듯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내 녀석은 먼곳을 보는듯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런 취미가 있을줄은… 설마 일본 애니에서 나오는 오니짜앙~ 이런걸 바라지는 않겠지? 저질"

"닥쳐, 하여튼 사촌오빠로 모셔라"

"사촌동생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젠장. 선수치기는"

은연중에 녀석의 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꿇리는건 싫으니까, 사회적으로는 이게 귀속지위면에서 녀석의 위에 서게 된건가? 어쨌든 빠른놈이 이기는 세상이다.

"그런데 너 안 서둘러도 되는거야?"

"뭐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지 녀석은 고개를 갸웃한다. 추운 날씨라 그런지 빨갛게 물든 녀석의 피부가 왠지 안쓰럽다. 그런데 서둘러야 한다니 무슨 소리지?

녀석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비웃는듯한 저 웃음은 뭐냐

"아니야 아무것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녀석은 내 앞에서 걷는다. 사실 등교하는 인원도 많은데 나만 다른학교 교복이라 그런지 시선이 집중되어서 X팔리다. 

문득, 왠지모를 위화감이 생겨 녀석을 불렀다.

"김수현"

"응?"

"핸드폰 꺼놓지마"

"응? 왜?"

그냥, 왠지모를 위화감이었다 그건

"꺼놓지 말라면 꺼놓지 마, 알았지?"

"내맘이지"

불안하다. 왠지모르게 불안하다. 이녀석은 혼자 놔두면 무슨짓을 할지 모르니까 내 옆에 잡아둬야 한다고 내 가슴이 소리치고 있다. 이러다가 여기로 전학오고 싶어지게 될수도 있다.

"어쨋든…"

"알았어"

성현이 형의 그 말도 그렇고… 어쨋든 보호가 필요한 녀석이다. 혼자 있게 놔두면 무슨일이 생길지 모른다. 김선우 녀석하고 아는사이일지도 모른다는것도 한몫 하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놈하고 같이있게 할수 없다.

"음… 도착했네"

교문에 도착한 녀석은 주변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채 내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간다. 그리고는 검지를 치켜들며 마치 마법을 부리려고 하는듯이 속가락을 뱅글뱅글 돌리더니 학교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 정중앙에 있는 대형시계

"저게 뭐 어쨋다는………헉!"

시계는 7시 5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제한시간은 8시10분, 지금 가면 늦는다. 아니, 늦는것따위는 지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반 선생은 지각한다는건 학생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거라고 판단해서 운동장 5바퀴를 돌리는 지독한 인간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정신을 차려보니나는 어느새 미칠듯한 스피드로 뛰고 있었다. 분명 아까 일부러 말 안한거야 저녀석

"휴우…"

3학년 4반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교실로 향한다. 신식건물이라 그런지 구조가 늘 익숙해져있던 곳과는 조금 달라서 교실이 어디있는지 조금 헤맸지만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서자 1/3정도의 인원이 있는 교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가 분명 창가쪽 맨뒤 옆자리였던걸로 기억한다. 내 짝, 이름이 승현이였나? 그녀석은 나보다 일찍 와서 자리에 않아 책을 보고 있었다. 공부하는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데.

익숙한 얼굴이 몇 보인다. 아현이라고 했나? 그 휠체어를 탄 여자애도 있었다. 물론 그 옆에는 성아현의 사촌오빠로 알고있는 성진현이 날 보더니 안녕이라고 말했다.

"안녕"

"응"

"어제는 왜 안나왔어?"

"어… 감기가 좀 심해서…"

"그래? 다 나은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반장은 주번활동을 하고 있으려나, 옆자리에 앉은 녀석을 보고 안녕이라고 말하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들은척도 안한다. 뭐야 이거, 이건 쌀쌀맞은 정도가 지나치잖아?

하긴 뭐, 내가 상관할바 아니다.

"응?"

칠판을 보자 그곳에는 이상한 영어단어가 쓰여져 있었다. 칠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크게 쓰여져 잇는 그것은 선명한 흰색의 분필로 MASTURBATION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마…스터…베이션?"

뭐지? 어디선가 들어본말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그 뜻을 모르는건 나뿐만이 아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저게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함부로 지웠다가는 선생님이 쓴것일수도 있을테니 선뜻 지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언가의 달인을 지칭하는 마스터는 'master'이다. 하지만 저건 mastur이다. ~의 달인이라는 뜻은 아니게 된다. 반 아이들 거의다 모르는 말인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게 무슨 단어야?"

아현이에게 묻자 아현이는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고 거의 모든 의자에 아이들이 채워졌음에도 단어의 뜻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젠장! 너무 궁금해지잖아. 이렇게 되었으니 설마 알지도 모르는 내 짝이라는 녀석한테 부탁해 볼까? 그러고 보니 이녀석이 읽는 책이 보는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었다. 너 문학소년이었냐

"저기… 승현아"

젠장. 남자자식을 이렇게나 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게 될줄이야. 하지만 성을 모른다고 성을. 성을 모르니까 이름으로 불러야지 별수있냐.

내 부름에 녀석은 날 쳐다본다. 젠장. 날 내려다본다. 내가 좀 작긴 하지만 이녀석 키 크구나.

"저게 무슨뜻이야?"

"……"

내 질문에 녀석은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없는건 알겠는데 얼굴에 붉은빛이 돈다. 뭐냐, 너 설마 쑥스러워하는거냐? 제거 뭐 이상한 뜻이라도 있는건가?

"알지?"

"어? 응…"

고개를 끄덕인다. 뭐냐, 좀 알려달라고. 아니면 이녀석이 쓴것일수도 있다. 녀석은 차마 알려주깃 뭣했던지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를 쳐다보는 내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한다.

잠시동안 내가 이상하다는듯 쳐다보자 녀석은 한숨을 내쉬더니 포기했다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알고싶어?"

-끄덕

녀석은 차마 입으로는 하기 뭐했던지 샤프를 꺼내 책상에 무언가를 적었다. 게다가 한글도 아닌 한자였다.

   手淫

"수…음?"

수음이라… 수음… 수음… 손 수자에 음란할 음자… 음… 손으로 음란하다?……… 

헉…

녀석은 끝내 내 시선을 피하고는 다시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녀석을 보고 다른 말이 떠오를 법도 하지만 나도 당황스러웠다.

수음이라면 자위잖아!

대충 뜻을 아는것같아 보이는 몇몇 녀석들은 차마 아는척은 못하고 속으로 웃음을 죽이고 있는것 같았다. 이 극도의 어색한 상황에서 무슨말을 할지 모르는 그 찰나에 침묵을 깨는 아무 고마운 목소리가 있었다.

"이봐 조군"

'조군'이라 함은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을 부른것 같았다. 그 부름에 녀석이 목소리가 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니까 말이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 보니 왠지 스마일 페이스의 웃는얼굴의 왠지 짗궃어보이는 인상의 남자녀석이 서있었다. 성은 몰랐지만 아무래도 '조승현' 인가보다.

"왜"

"매점가자, 따라와"

"싫어"

"형님께서 같이 가주시겠다는데 튕기는거냐 지금?"

"까고있네"

그렇게 말한 녀석은 별수없다는듯 일어서더니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매점에 가자고 했던 녀석은 교실에 딱 붙어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그 눈빛은… 거슬린다고

"매점 어디있는지 모르지? 알려줄께"

"어?"

"어차피 한번쯤 들려야 할거 아냐"

그렇게 말한 녀석은 서둘러 나가버렸다. 뭐야, 저녀석 아무래도 지나칠 정도로 마이페이스인것 같다. 저렇게까지 했는데 따라가지 않기도 뭐하고…

교실 밖에는 멀찍이 걸어가고있는 '조군'이 있었고 내 앞에는 이름모르는 반 학생1이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대충 매점이 2층에 있다는건 알고 있다고.

"얼른 가자"

"어, 응…"

서둘러 걸어가는 녀석의 걸음에 맞춰 걷는다. 여긴 3층, 그러니까 한층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서 어느새 앞서가는 내 짝녀석을 따라잡자 내옆의 그 이름모를 녀석은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난 지성준, 너는?"

"김수…현, 아니 김수민"

"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은 의아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예전에 여기살았었어?"

"응? 아니, 왜?"

순간 철렁했다. 뭐야, 내가 남자일때 같은반을 한적이 있는 녀석이었나? 그러고 보니 이름도 얼굴도 왠지 낯이 익은것 같기도 하다.

"아니, 뭐 별거 아니고 예전에 같은이름을 한 녀석이 생각나서"

"아아…"

확실히 나랑 뭔가 인연이 있는 녀석인가?

매전에 도착하자 녀석은 빵 하나와 우유 하나를 집어들더니 봉지를 뜯어서 빵은 자기가 먹고 딸기우유는 내게 건넸다.

"사실 매점건 죄다 비싸. 이건 자유경제체제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독과점은 결코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지 않아, 하지만 소비자보호위원회는 이런 구석진 동네 학교 매점까지는 신경을 안쓴단 말이야 젠장할"

이왕이면 기분좋게 먹지그래? 늘 먹으면서 투정부리다가는 마음에 드는 음식이 없을거다.

그 조군이라 칭해진 녀석은 별로 먹고싶은게 없는지 사탕을 하나 사서 빨고 있었다. 

"이봐 조군, 안그런가? 우리 함께 대한민국의 꿈나무로 자라나기에 이런 독점의 폐혜는 정말로 어려운 시련중의 하나라고,나는 이런 시련을 통해 우리 앞으로 조금 더 성숙해나가서 장차 교육부 장관이 될거란 말야,넌 비서로 써주지, 그러니 충성하도록"

"되고나서 말해"

왠지 넌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우리나라 교육체계가 상당히 문란해질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딸기우유를 마시는데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흰 피부, 허리쯤 내려오는 긴 머리, 뭐야, 남자하고 있는게 덜 어색하긴 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사실 남자가 좋다고,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조금 더 자연스럽고 가까워지기 쉽단 말이야.

"이봐, 김양, 아니, 이건 좀 그런가? 김씨? 아니, 이것도 좀 그렇고… 미스김? 이런 젠장! 어쨋든 좋아, 수민 군, 이 일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

내가 어딜봐서 '군'이냔 말이야, 이 무개념아. 물론 내 정체를 눈치챈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너 나한테 뭘 물어본 거였지?

"잘 못 들었는데…"

"후우, 김수민 자네는 이런 교내의 독점횡포사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고있다네, 일반 슈퍼마켓에서의 20%25DC는 이곳 매점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너는 그게 불마스럽지도 않은거야?!"

"벼, 별로…"

화낼필요까진 없잖아, 그런 이상한거에 열내다가는 화병으로 일찍 죽는다 너

"이런 젠장! 왜 내 주위에는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녀석들만 있는거지?! 전학생 넌 조금 더 다를줄 알았는데! 비판적 사고방식이 세상을 바꾸는 거란 말이야!"

그건 비관적인게 아닐까 생각해 승준아. 게다가 그렇게 열낼 필요 없잖아 겨우 몇백원따위에

"후우… 관두자, 지금은 빵한조각의 여유를 갖는게 좋겠지"

가만히 있으면 정상적으로 보이는 녀석인데 왜 저런 히스테릭한 이상한 면을 가지고 있는걸까. 설마 별똥별이 떨어질때 세계정복을 세번 비는 그런놈은 아니겠지?

"흐음, 그런데 학교생활은 괜찮아?"

"며칠 안되서… 잘 모르겠어 뭐 괜찮은것 같아"

그래도 이런 히스테릭한 기질이 있어도 왠지 싫지는 않은 녀석이다. 귀엽다고 해야하나? 게다가 주변 사람들 다 우릴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어서 자리를 뜨고 싶다.

"지군, 가자, 이제 곧 조회시간이야"

"음? 벌써 그렇게 되었나?"

그렇게 말한 녀석은 마지막 남은 빵 한조각을 먹으며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너무 자연스럽게, 친구 손을 잡아 끌듯이 녀석은 내 손을 잡아끈다. 뭔가 흑심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잡아끈 느낌이다. 맞아, 정현이가 내 손을 잡아끌때 이런 느낌이다.

왠지 느낌이 좋은 녀석이다. 뭐 친해지는건 고려해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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