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하아…"
지쳤다. 오토바이가 멈추고 나서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잠시동안 매달려 있다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보이는건 언제 왔는지 강가에 서 있었다. 아까 넘어온것같아 보이는 다리와 새벽별의 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강은 상당히 멋졌다.
아아,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헛온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왜 온거야?"
"그냥"
-털썩
블럭같이 생긴 곳에 오빠가 털썩 앉는다. 나도 따라 옆에 앉는다. 그나저나 아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춥다.
"추워?"
-끄덕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확실히 반양말과 마이 하나로 버티기에는 조금 무리였던 감이 있다. 역시나 어딘가에서나 나오는 전형적인 멜로물같이 어깨 위에 올라오는 옷의 감촉이 느껴진다.
물론 전혀 고맙지는 않았지만.
"하아…"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게 지금 얼마나 추운지를 말해준다. 뭐 춥다. 그 이상의 느낌은 별로 없지만 옆에 바싹 붙어있는 오빠의 느낌이 왠지 기분좋은 편안함을 만들어준다.
-턱
어깨에 손이 올라온다. 역시나 딴마음을 품은것 같다. 뭐 딱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거부해봐야 소용없다는걸 알고 있으니까.
"또 한번 나 잘때 건드리면… 죽일꺼야"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더이상 근친상간이라는 말도 안돼는 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러다가 오빠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는 그런 날에는??
아아, 그때는 진짜로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미안해"
고장난 인형처럼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 음성에 묻어나는 왠지모르게 절절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뭐야, 설마 반성하고 있는건가?
"미안해"
뭐 두번이라면 반복법이라는걸 통해 강조라는걸 할수 있지만 그정도로 용서될 정도의 얕은 죄가 아니라는건 알고 있을 텐데, 뭐 신고할 마음은 없지만… ㅁ반성하는 기미가 있다는건 좋다.
"후우…"
잠시 함숨을 쉰 오빠는 고개를 푹 숙인다. 왠지 씻을수 없는 죄를 지은 것처럼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오빠는 뭔가 할말이 있는지 입가를 달싹인다.
몇분이 지났을까, 추위에 입술이 말라가는걸 느끼고 있기가 너무 지루해서 나는 결국 말을 꺼냈다.
"할말…있어?"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오빠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는다. 지난 과거를 회상하는지 약간 흐리멍텅해진 눈동자에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이 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걸 알수 있게 했다.
"조금… 길려나, 들어줄래?"
-끄덕
내 무언의 대답에 오빠의 자조하듯 웃는다. 자학하듯… 아아, 우린 아직 남매라 하기에는 서로 모르는게 아직 많은것 같다.
원래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숨기는게 더 많은 법이니까.
극악연재에 대한 사죄부터 우선 드리겠습니다... 허얼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ㅠㅠ
륀느만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현의 과거가 시작됩니다.
"이 문장의 해석은…"
칠판에 요란하게 분필 부딪히며 글 써지는 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것 정도는 내 귀에 별로 들어오지 않고 한 귀로 들려오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그건 수업내용도 마찬가지.
승현이라고 했던가, 내 옆자리에 앉은 녀석, 그러고 보니 못생긴편은 아니다. 키도 크고…
하지만 그런것 정도는 지금 혼란스러운 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사각 사각
펜, 혹은 샤프심이 노트와 마찰하며 들려오는 부드럽고 날카로운 소리, 앞자리에 앉은 영은이라고 하는 반장은 공부는 꽤 잘하는지 필기에 정신이 없다. 오른쪽의 아현이라고 했던 그 예쁜 휠체어탄 아이는 수업내용을 듣고있는것 같기는 하지만 왠지 멍한표정…
그래, 흔한 말로 넋나간듯한 표정을 하고서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치밀어 올랐지만 바로 무시해 버렸다.
지금 나에게 닥쳐온 일도 견뎌내기 힘드니까 말이다.
"하아…"
작은 한숨, 학기초라 그런지 전부 수업에 집중한다. 뭐 그런 결심도 작심삼일이라는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지만 조용한게 나쁘지는 않다. 아직은 싸늘한 3월의 기온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 나서는 곧이어 느껴지는 햇살의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 싶다. 창밖을 바라보자 여름의 하늘색과는 다른 바다보다 깊어 보이는 암청색의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의 하늘은 언제나 그렇지만 좋아한다. 조금 쓸쓸한듯 무언가 비어있는것 같으면서도 바다같은 깊이감, 그리고 서늘한 추위가 선사해주는 고독함과 함께 오는 공허감.
늘 그런 감정을 즐긴다.
아… 순간 쓸데없이 다리를 오므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자였다는 자각과 함께 여자는 다리벌리고 앉으면 조심성 없어 보인다고 하는 말이 생각나 버렸던 것이다.
-피식
괜히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가자앉은 기분에서도 타인의 모습을 신경쓰고 내 자신을 고치려 드는 모습이라니…
정말 역겹다 못해 토해내고 싶다.
"무슨 일 있어?"
말을 꺼낸건 반장… 그러니까 영은이었다. 필기를 하다가 뒤쪽을 돌아보고선 왠지 멍한 내 표정을 보고 무언가 할말이 있었던듯.
"아니… 아무것도"
"그런데 왜 3교시 내내 우울한 표정이야?"
"응? 그,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엄청나면서도 믿을수 없는 일이, 하지만 믿을수밖에 없는 일이…
하지만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이녀석에게 알려줄 만큼 가벼운 성질의 것도 아니다. 좋은 녀석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신뢰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난 사람을 사귀는게 조금 껄끄럽다고 해야할까.
최소한 몇개월은 같이 다녀봐야 그 사람을 알수 있어서 내가 알수 있게 된 사람과느 사귀는걸 거부한다.
"전학생 있지 여기?"
"네~"
반 아이들 모두가 대답함과 동시에 날 바라본다. 뭐야… 이런 시선은 별로 기분좋지 않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듯한…… 하긴, 그런 느낌은 아니겠지만 어쨋든 기분 나쁘다.
"읽어볼래?"
"네? 네…"
-드르륵
사실 어디를 하는지도 몰랐지만 승현이를 슬쩍 보니 페이지 수를 알수 있었다. 시였다. 제목은 '배추의 마음'
지랄한다.
배추의 마음 -나희덕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보다
"잘 읽었다. 앉으렴"
-드르륵
국어 선생님은 여자였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 선생님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아침에 강가에서 오빠가 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그 말 한마디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오빠를 이해할수 있었다.
물론 날 강간한 걸 용서하겠다는건 아니지만.
수업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조용하고 또 침묵… 딱히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지금 답답한 이 심정을 모두 털어놓고 위로라도 받고 싶다. 그럴 사람… 아무도 없을까?
어제 만난 주변의 친구들은 아직 친하지 못하다. 선우에게는 별로 알리고 싶지가 않다. 다른 친구들은 내 정체조차 모르고… 정현이는… 정현이는…
사실 가장 친한 사이일수록 숨기고 싶은게 많은 법이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 거짓말하고. 꿇려 보이지 않으려 거짓말하고…
그래도 그걸 말할 사람이 정현이밖엔 없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딩동딩동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음악 멜로디처럼 운율감을 형성한다. 3교시임에도 지루한 국어 시간이라 그런지 뻗은 아이들이 많다. 수업이 끝나도 그 아현이는 단지 책상에 얼굴을 파묻으며 잠을 자는건지 우는거지 모를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옆의 진현이는 아현이를 바라보더니 틍을 토닥여 준다.
사이좋은 남매…
-피식
어차피 오빠와 나사이엔 절대 불가능할 모습이겠지.
"아나 지루해 죽겠네"
"짜증나!"
"4교시 뭐지?"
"영어"
"Fuck!!"
혀굴리지마
"God damn!!"
영어쓰지마
죄다 마음에 안드는것 투성이다. 아니, 기분이 안좋으니 모두가 마음에 안드는것 뿐이다.
"수민아~"
-우당탕!
순간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기울어짐과 함께 의자가 넘어지며 나는 승현이라고 하는 녀석의 몸에 어설프게 안기면서 뒤에서는 누군가가 날 끌어안고 있는 감촉이 느껴졌다.
"뭐, 뭐야?"
원래 꺄아아아악!! 이라는 비명소리가 나야 하겠지만 난 아직 여성 캐릭터와의 싱크로가 낮아서 뭐야? 라는 의문사로 꺄아아아악!! 을 대신하였다.
"미친놈앗!"
-퍽!
보지 않아도 알수있는 영은이의 발차기에 누군가가 날아간다. 그런데 내가 안겨있음에도 승현이는 날 일으켜준다. 그리고 먼지가 묻은 치마를 툭툭 털어준다. 딱히 사심이 없어 보이는 그 행동에 약간은 감탄했다.
"괜찮아?"
"으? 응… 괜…찮아"
순간 햇살이 눈부셔셔 녀석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눈부셧다. 역시나… 행색으로 보아 '노는애' 중의 한명으로 생각했었다. 머리스타일도 그렇고… 하지만 그다지 불량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자리에 다시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의 시선이 모두 사물함 쪽에 가있는걸 발견할수 있었다.
"자, 잠깐! 난 달려가다가 관성의 법칙에 의해 부딪힌것 뿐이야! 과학시간에 안배웠냐!!"
"아직 거기 진도 안나갔어"
-퍽! 퍽!
민정훈이라고 했던가… 귀찮은 녀석, 그저 무시할 뿐이다. 아까 고의적으로 날 끌어안았지… 강제적인 슼ㄴ쉽이라니, 성폭행으로 신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내가 신고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을리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잠깐이나마 당황해서 그런지 아침의 일을 잊었다. 아아, 게다가 어제의 그렇게나 당한것 때문에 걷기도 조금 힘들고…
지금 이렇게나 날 깨끗하고 순결한 아이로 보는 시선들이 내가 어제 오빠하고 열번이 넘게 그런짓을 했다는걸 알면 경멸과 혐오의 시선으로 바뀌겠지?
더러운 세상의 이면을 본것 같다.
칭찬해 주시는 분들에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리플이 많아 답을 못해드려 죄송하네요
선생님은 여느 학교와 다를바 없이 등하교길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내일은 저축이라는 그저 일상에서 조금도 다를바 없는 이야기를 하고 종례를 마친다. 반장… 그러니까 내 앞자리의 영은이가 차렷 경례를 하고 일상적인 학생의 일과는 끝이 난다.
"수민아, 어디가?"
"집…에"
집이라고 말하는 나의 행동이 전과는 많이 다른걸 느낀다. 어색함, 집이라는 그저 한 글자일 뿐인데 이렇게나 어색하게 느껴지는건 우울한 기분을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다지 친해졌다고는 볼수 없지만 그래도 안면이 튼 몇몇 녀석들과 인사를 하며 헤어진다.
-쿠르르릉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천둥소리에 왠지 비가 올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 3월이니 비가 올때도 되었다.
하염없이 걸어 계단을 올라 도착한 집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여느때와는 다른 이질감이 온몸을 휘감는게 느껴졌다.
"하아…"
아직 우중충한 하늘은 비를 쏟아내지는 않은 채 그저 연신 천둥소리만 되풀이할 뿐이다.문고리를 살짝 잡아돌리는 순간 날 미치게 만들것만 같은 괴로움이 내 머리에 박힌듯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찰칵
들었던 열쇠를 다시 문에 꽃아 돌려 잠가놓고 열쇠를 원위치 시킨 뒤 한걸음 물러선다. 내 시선은 그저 우울… 그뿐이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갈때 느껴지는 경련만이 내가 아직 정신차리고 있다는걸 실감하게 한다. 추위는 춥지 않고 얼어뭍은 입술은 이미 감각이 없어 당장이라도 온실의 따스함을 맛보고 싶은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문앞에서 뒤돌아 걸어가는데 왠지 물방울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쏴아아아아
역시나 내 예상은 틀리지 않고 하늘은 비를 내렸다. 차갑고 또 차가운 얼어붙은 겨울비가 살갛에 닿을때는 얼어붙는게 아닐까 할정도였겠지만 나는 지금 아무런 생각도 하고있지 않았다.
비오는 도심을 걸으며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스쳐지나가며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수도 없는 걸음으로 마치 세상 끝에라도 가려는 양 계속 걷는다. 걸음엔 힘이 없고 눈동자에도 힘이 없다.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주저앉아 이 싸늘한 몸을 뉘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홀로 비맞고 가는 여학생에게 꽃힌다. 하지만 난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 시선따위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교복은 꾹 누르면 물이 나올 정도로 젖어있었고 그건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구두,양말 할것없이 모두 젖어버린 상태였다.
난 뭘까, 무엇때문에 여기서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차가운 빗방울은 내 살갗을 죄어오고 내 마음은 그보다도 더더욱 큰 족쇄가 되어 내 마음을 조인다.
짧은 낮, 아직 겨울이라 낮이 짧아 어느새 졌는지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는 황혼을 밝힐 새도 없이 겨울비를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속옷이 비칠 정도로 젖었는지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꽃힌다. 이러다가 얼어죽으면, 죽으면… 그게 더 나을것 같았다.
어떤 건물의 벽에 달라붙어있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비를 맞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간신히 그 건물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는 모습은 누가보나 상당할 정도로 처량해 보일 것이다.
"하아…"
난데없이 겨울비라니, 미친짓도 정도가 있다.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는건… 이렇게 추운데 비맞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사람은 거의 100%25 감기에 걸릴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뭐 나는 이렇게 집안에 있으니 비맞을 일 따윈 없지만.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은 지금이 밤이라는걸 대변해주는듯 어두컴컴하다.
새엄마인지 뭔지는 무언가 급한일이 생겼는지 며칠 뒤에 다시 오겠다며 후다닥 나가버렸다. 뭐 그런쪽이 내겜 편하다. 어린애같이 요리도 못하는 주제에 냉동음식이나 먹어대는 것보다는 내가 요리해서 먹는게 나을테니까.
혼자 떠들어대는 TV를 켜두고 의미없이 실실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
소파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려퍼졌다.수현이 녀석 빼고 딱히 전화가 올정도로 친한 녀석은 없는데… 뭐 내 친하다는 개념은 집에 데려온적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다. 자주 노는 녀석은 많지만(주로 학교엔 문제아들로 알려진) 집에 데려온 적은 김수현을 빼고는 한명도 없었다.
[김성현]
핸드폰 액정에는 그렇게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성현이 형이 무슨일로 전화를 한걸까. 수현이 덕에 친분은 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어색한 사이는 아닌 그런 애매한 형태의 관계였는데
"여보세요"
[정현이냐?]
"어"
왠지 급한일이 있다는듯 다급한 어투의 목소리에 왠지모르게 나까지도 긴장하게 된다.
[거기 수현이 있냐?]
수현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코빼기도 안보이는데… 그럼 수현이 녀석이 아직 안들어왔다는 말인가? 지금 시각이 9시30분을 넘어가고 있는데… 비는 6시부터 내리기 시작했고… 어디서 뭘하고 있는거지?
"아니… 없는데"
[그러냐… 사실은 지금까지 집에 안 들어와서 말이지]
"핸드폰은?"
[두고갔어]
"…… 찾아볼꺼야?"
[당연하지… 그리고 거기 가면 연락좀 해줘라]
"알았어"
[그래… 잘있어라]
-뚝
이렇게 비오는데 어디서 싸돌아 다니는 건지… 개념이 참 이상한 데로 빠져나간 녀석이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안 찾으러 나갈수가 없잖아"
섹션분리는 제게 커다란 영향을 줄것으로 예상됩니다...
-쏴아아아아
역시나 겨울비가 내리는 밤은 엄청나게 추웠다. 새하얀 입김도 나오다 빗방울에 사라져 버리고 바지는 이미 온통 젖어 있었다.
여러곳을 다 돌아다녀봤지만 역시나 있을리가 없었다. 갈만한 곳이라곤 있지도 않을텐데… 그녀석은 피씨방 같은곳도 안 가서 그런곳에 있을 확률도 없었다.
"춥네…"
비가 오는 겨울 밤거리에도 사람은 많았다. 우산을 쓰고 어디를 바쁘게 가는지 차가운 비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내가 찾고자 하는 얼굴은 어디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번화가에 들어섯음에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를 맞고 있는다면 감기가 걸려도 아주 지독하게 걸릴텐데…
어느새 걷는데에 방해되는 우산은 접고 이리저리 뛰기 시작했다. 녀석도 어디선가 비를 맞고 있을거란 생각에 이렇게 편하게 찾을수는 없었다. 건물 방방곡곡 모두를 뒤지게 될것 같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를 때리고 바람에 살갗이 얼어붙는것 같아도 어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노래방이고 뭐고 들어가서 찾아봤지만 없었다. 피씨방에 들러서 잠시 찾으러 왔다가 역시나 없는걸 확인하고 나오는데 얼핏 보이는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서 뭘 하는거야…"
-찰박 찰박
이젠 뛸 힘도 없었다. 접힌 우산은 속까지 젖어서 무거워졌고 내 옷도 젖어서 그런지 피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젖어 있었다.
춥다.
"보이기만 해봐라"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친구… 뭐 그런건가? 하여튼 친구가 고생하는것 같은데 찾는 척이라도 하지 앟으면 많이 실망하겠지. 그저 친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찾는 척이라도 해줘야 내 마음이 편한 거다.
"……"
어둠에 물든 밤거리를 비맞으며 걸어가며 화려하고 눈아플 정도의 네온사인들이 날 자극한다. 그 환한 빛으로 주위를 둘러봐도 찾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어딘가 건물, 화려한 불빛이 번쩍이는 그곳까지 도달해서 대충 눈으로 훑어본 뒤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또라이"
그곳에 처량하게 마치 주인 잃은 고양이처럼 멍하니 앉아서 비를 맞고있는 녀석이 보였다. 건물의 처마는 그리 크지 못해서 녀석의 작은 몸을 가려줄순 없었는지 비는 계속해서 녀석의 몸을 때리고 있었다.
교복차림으로 무슨 생각으로 앉아있는건지 멍한 녀석의 눈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밟고가는 물 고인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멍청하게 그 사이에 턱을 고이고서…
"일어나"
-툭툭
천천히 다가가 녀석이 하염없이 바라보던 웅덩이를 지나쳐 우산 끝으로 녀석의 볼을 툭툭 친다.
"……"
아무런 말도 없이 눈동자만을 움직여 날 바라보는 녀석은 왠지 진짜 넋나간 사람처럼 다시 그 웅덩이로 시선을 돌렸다.
"또라이 같기는… 여기서 뭐하는거야, 가자고"
우리의 대화는 평상시와 별다를게 없었다. 약간 시비조의 어투와 귀찮은 내 모습, 단지 녀석이 반응이 없는게 평소와는 조금 달랐을 뿐.
"얼어죽는다 그러다"
"남이사"
차갑게 끊어 말하는 녀석을 보니 왠지 화가 치밀었다. 귀찮은걸 억지로 나와서 이렇게 찾아다녔는데 찾아냈더니 하는 말이 결국 남이사라니, 본래 고맙다는 감사를 받으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이런 왜 찾아왔냐는것도 아니고 그저 날 지금 떨어지는 빗방울 보는듯한 눈빛이라니.
"1시간 30분 찾아다녔어"
"……"
또 무반응, 역시나 무슨 일이 있는것 같았다. 이정도의 반응까지 나오려면 그냥 충격으로는 모자라지.
"가자"
-스륵
억지로 녀석의 젖은 몸을 일으키자 젖은 녀석의 머리가 내 얼굴에 닿는다. 차갑다. 닿은 녀석의 어깨도, 체온을 잠시 느끼기 위해 만진 녀석의 볼도 차갑다.지금 내 몸도 충분히 차가운데 차갑다고 느끼는건…
저항 없이 그대로 일어난 녀석은 내가 손을 잡자 저항 없이 따라온다. 접어두었던 우산을 펴고 드디어 비를 가린다.
"우리집 갈까?"
그 말에 잠시 날 바라본 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분홍빛이었던 입술은 병든 사람처럼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피부는 혈색을 잃고 하얀색이 아닌 창백한 빛으로 변해 있었다.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도 보통이 아니다. 얼마동안이나 비를 맞고 있었던 걸까.
"멍청하긴"
그저 마음과 입은 따로 놀고 있을 뿐이다. 내 손이 이끄는 대로 녀석의 몸이 따라온다. 곡 미아를 엄마에게 데려다주는 미아보호소 직원이 된 기분이다.
-덜컥
"얼른 와"
녀석의 손을 잡아끌어 집에 들이자 녀석이나 나나 할것없이 비에 잔뜩 젖어서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집안의 난방을 켜놓고 나갔기에 집안은 훈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끄는 그대로 신발을 신고 들어가려던 녀석을 붙잡아 구두까지 직접 벗겨주고 안에 들였다. 젖은 양말이 바닥에 자국을 새긴다.
우선은 목욕부터 하는게 나을듯 싶었다. 우선은 상태가 나쁜 이녀석부터
목욕실 문을 열고 녀석을 먼저 들여보냈다.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녀석은 날 바라본다.
"목욕해, 난 이따가 할테니까"
교복은 안에 벗어두면 되겠지, 옷이야 뭐 아무거나 꺼내주면 입을테고.
-달칵
목욕실 문을 닫은 뒤에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물기만 조금 닦아낸 뒤에 추위에 새파랗게 질린 내 입술이 거울에 비쳤다.
"……"
뭐 괜찮으려나, 이정도쯤이야 충분히 견딜수 있다. 극한의 상황은 인간의 한계를 한단계 더 올려주는 거니까(지금이 극한의 상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방금 전화가 왔었던 성현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찾았으니 전화는 해야하겠지.
[후우…후우… 여보세요?]
"어, 형 찾았어"
[수현이?]
"시내에서 혼자 비맞고 있었어"
왠지 지친듯한 목소리를 보니 나와 다를것 없이 이리저리 뒤어다닌 모양이다. 용케 핸드폰은 젖지 않은것 같다만…
[그래?… 후우… 어디 아픈것 같지는 않고?]
"지금 목욕하고 있어, 감기걸릴것 같아"
[그래… 어쨋든 다행이네, 따뜻하게 해줘]
"알았어, 그런데…"
[아, 잠깐, 수현이 오늘은 니네 집에서 재워줘라]
"어? 왜?"
[그게… 미안하다. 좀 사정이 있어서… 오늘은 그쪽에서 하루만 재워줘]
"어… 알았어 안될거야 없지"
[고맙다]
"어… 끊어"
-뚝
정말 무슨 일이 있는게 확실하다. 왠지 미안한 뉘앙스를 풍기는 음성이었다. 그나저나 전부터 약간 브라더 콤플렉스 비슷한게 있었던 성현이 형이니… 전의 그 키스마크를 보더라도 정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게 아닐까?
그렇다면 성현이 형이 반항하는 저녀석을 붙잡고 강제로… 그런 짓을 했다던지… 지금은 충격받아 가출한 거로 생각하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데…
괜한 상상은 정신건강에 안좋으니 그런 근친상간 스토리는 그만 쓰는게 낫겠다.
"뭐야…"
전화는 길지 않았다만 목욕을 하고 있다면 응당 들려야 할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설마 아까 그모습 그대로 멍하게 서있는 건가?
-덜컥
"하아…"
혹시나가 역시나라더니 그저 그상태 그대로 가만히 서잇을 뿐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비관적인 표정을 하고서… 마치 남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이라는걸 알게된 영화의 여주인공같은 표정이다.
저대로라면 추울텐데…
"하는수 없나"
결국 녀석의 마이 단추를 출고 벗겨주었다. 벗는데에 반항은 없었다. 아니, 그저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마이를 벗겨내고 와이셔츠 뒤로 비치는 흰색의 속옷이 왠지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나저나 이렇게만 입고 그동안 비를 맞은 건가? 춥지도 않았나?
와이셔츠를 벗기자 흰색 속옷이 드러났다. 역시나 흰색의 피부와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주름잡힌 교복 치마도 벗기자 팬티와 브래지어만을 걸친 모습이 되었다. 나도 옷을 죄다 세탁기에 넣었기에 팬티차림이었다.
뭐 남이 본다면 이상한 생각을 할법하지만 우선 나도 춥고 녀석도 춥기에 뭐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음화는 설마 정현이하고 수현이하고....(발그레)
하지만 그럴일은 없습니다. 정현이는 자제력이 굉장한 녀석이라서.
"갈아입어"
-툭
옷을 던져주면서도 갈아입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드는건 목욕을 끝낸 뒤에도 녀석의 상태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아서일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속옷 위에 입는다면 더더욱 곤란하지만 이 이상 건드리는건 아무리 이녀석이 남자였다 해도 실례가 될것 같다.
"……"
어쩌라고 그렇게 쳐다보면, 설마 갈아입혀 달라거나 하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어쨋건 간에 녀석을 안방에 가둬두고 나온 뒤 나도 나 나름대로의 목욕을 하기 위해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사실 저녀석을 씻기는게 다였다.
역시나 차가운 몸을 뜨거운 물로 씻는건 기분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을 또 겪고 싶은건 결코 아니다. 빗속에서 사람찾기는 정말 기분 뭣같다. 게다가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는 효과가 200%25
대충대충 씻고 나와서 수건으로 역시나 대충 닦고 옷을 또 대충 입었다. 이거 너무 대충대충 사는건가?
으음… 그러고 보니 저녀석 피부 정말 백인 저리가라 할정도로 하얗던데…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
그나저나 갈아입었을까.
-덜컥
"……"
꿀먹은 벙어리마냥 말없는건 처음 볼때랑 다른게 하나도 없었다. 침묵소녀는 너에겐 어울리지 않는 컨셉이야. 그냥 며칠 전처럼 방방 뛰어다니는게 더 어울릴 텐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건 아닐테고. 설마 길가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힌다거나 하는 사고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거
옷은 내가 준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조금 큰 티셔츠는 헐렁헐렁해서 어깨가 살짝 내려와 있었고 속옷이 없어서 사각팬티를 줫더니 반바지(라기보단 핫팬츠)처럼 걸치고 있었다.
아니 뭐 못봐줄 정도로 흉하지는 않고… 아니, 훨씬 더 보기 좋은것 같기도…
이런 에로틱한 모습도 나쁘지 않은건가?
"배고파?"
시간은 12시, 저녁을 먹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각이지만 그래도 왠지 아무것도 안먹은것 같아 보인다. 온몸에 힘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살짝 풀린 눈 하며… 설마 진짜로 아무것도 안먹은 건가? 아침부터?
내 말에 녀석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응대하며 고개를 보일락 말락하게 살짝 젓는다.
"저녁은?"
또다시 고개를 젓는 녀석, 하아, 뭐 이건 준다고 먹을것 같지도 않다. 그러고 보니 냉장고에 호빵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거라도 주면 먹으려나?
냉장고로 가서 전자레인지에 단팥호빵 두개를 넣고 가열시키면서 녀석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 게다가 안방에서 나오지도 않고있다.
"나와, 거기서 뭐해"
내 말에 녀석은 천천히, 진짜로 천천히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역시 굼벵이를 삶아먹은듯한 저 동작은 며칠 전보다 더 심하다.
녀석의 손을 잡아끌어 소파에 앉힌 다음 추워할까와 담요를 덮어준 뒤 TV를 틀었다.
[아항! 아! 아응, 오, 오빠! 내X에 넣어줘]
"허, 헉!"
-팟
그러고 보니 아까 성인채널 보고 있었던걸 깜빡했다. 물론 이녀석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같이 보기도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같이 보기엔 좀 그림이 안맞으려나?
녀석은 역시나 무반응
-띵
호빵을 가져와서 녀석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는게 좋을텐데… 허벅지에 담요를 덮고 헐렁한 티를 걸친 다음 김이 올라오는 호빵을 쥐고있는 모습은 뭐랄까… 하여튼 매니악했다. 그럼 내가 변탠가?
음음, 그건 아니야.
"먹어"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었지만 좀 느려터진 순한 양이 되었는지 녀석은 들고있는 호빵을 한입 깨물었다. 그 자세 그대로 스톱! 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물론, 저녀석이 남자라는건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이상한 마음같은건 먹지 않는다.
놀랍게도 호빵 하나를 다 먹는데에는 10분이 넘게 걸렸다. 뭔 생각을 그리 하는지 멍한 표정의 녀석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도중에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준것도 어찌어찌 다 마시기는 했지만 조금 더 줬다가는 안먹고 버릴것 같았다.
또다시 다먹고난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뭘 생각하는지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재우는게 낫겠지? 시간도 늦었으니…
-스륵
녀석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피부가 내 피부와 맞닿는다. 부드럽다. 진짜로 부드럽다. 내 방으로 끌고가서 녀석을 침대에 눕힌 다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주자 녀석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겨울비가 내리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두운 빛이 녀석의 얼굴을 비춘다.
달은 없지만 달빛을 받은듯 은은하게 빛나는 녀석의 눈빛이 이상하게 날 홀리는것만 같다. 은연중에 '가지 마' 라고 말하는듯한 이 느낌은 왠지모르게 이상야릇하게 만들어버린다.
-스륵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녀석은 내가 옆으로 끼어들자 별 거부감 없이 없으로 살짝 피하며 자리를 내준다. 아아, 난 절대 이상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냐, 이녀석이 잠들면 바로 나갈거다.
아마도.
그저 똑같이 천장을 보고 누운 모습인데 그저 혼자누워있다는 느김이다. 옆을 힐끗 보자 잠들 생각을 하지 않는 수현이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안자?"
"……"
여전히 침묵, 뭔일이 있었던 거냐 너 대체… 설마 실어증에라도 걸린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말을 못하는 실어증이라기 보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안하는 '싫어증'이 아닐까?
-스륵
녀석의 눈가에 손을 가져가 억지로 눈을 감겼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몸이 차다. 머리를 만지자 약간 열이 있는것 같았다. 역시나 감긴것도 소용없이 다시 눈을 뜬 녀석은 나에게 고개를 돌린다.
"추워?"
-끄덕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게 왠지 음흉한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아니, 난 그저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택한 것이다.
나는 녀석의 몸을 내쪽으로 돌려 끌어안았고 녀석은 저항하지 않았다. 두꺼운 한 이불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같이 느끼자는 뭐 그런거다. 전혀 이상한 마음 없어!
하지만 만약 이녀석이 넘자였을때라면 이게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지, 장담할수 있다. 어쨋든 녀석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 상황이다. 가슴에는 녀석의 가슴이 주는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고… 약간의 거리를 두자 드디어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또다시 숨막히게 되어버린건 녀석이 내 몸을 약하게지만 끌어안아서 그런 것이었다. 역시나 춥긴 추운건가.
눈을 감은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녀석의 팔, 왠지 놓치기 싫다는듯 내 몸을 붙잡은 녀석은 나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해온다. 자는척하려고 눈을 꼭 감은채로 말이지…
역시나 기대에 부응해주는게 좋을것 같아서 내도 녀석과 몸을 최대한 밀착했다. 맨살이 닿는 기운은 뭐랄까… 엄청 좋다. 은근하게 작은 체구인 녀석은 내 품에 안기듯이 들어온다.
무슨 생각이 났음인지 난 녀석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조금 더 만지고 싶기도…
-퍽
"컥!"
아직 죽진 않았구만 이렇게라도 반응하는거 보면.
그나저나…
진짜로 예쁘다.
은은한 빛에 가려진 조금만 힘을 풀면 바로 입술이 닿을것만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왠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런 하드한 취향따위는 없기에 일정한 선 이상을 넘을 생각은 없다. 친구는 친구로 남기를 원한다.
그나저나 얘 내일 학교는 보내는게 나을까?
다음화는 급박한 스토리 전개
"으음…"
-스르륵
졸리다. 눈꺼풀은 그 위에 뭐라도 얹어놓고 있는지 무겁게 내 눈썹을 짓눌러오고 당장이라도 다시 잠들고 싶다. 이런 상태인데 왜 깨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을 보니 어두컴컴한게 아직도 밤이었다. 몇시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아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전자시계는 3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졸려…"
누구나 알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점점 뭔가 잃어버린 기억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응?"
그러고 보니 옆에 있어야 할 뭔가가 없어져 있었다. 옆에 누워서 잠들어 있어야 할 김수현… 음, 어디간거지?
그러고 보니 거실쪽에서 뭔가 소리가 나는것 같기도 한데…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하자 켜져있는 TV와 소파에 앉아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귀신같아서 상황을 알지 못했으면 분명 기절했을거다. 게다가 TV는 그저 틀어놓기만 한 것인지 방송이 끝난 Tv에서는 치이이익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해?"
내 말에 녀석은 왠지 기운없는 슬픈 눈동자는 움직여 날 바라보더니 쓸쓸하게 한번 웃더니 중얼거렸다.
"TV…보잖아"
"아무것도 안나오는데?"
어쨋든 말은 하는구나, 잠은 잔건가? 뭔 충격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수면이 그런걸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는건 사실인가보다. 저렇게나가 말이라도 꺼내는걸 보면. 어이, 난 그리고 치이이이~ 거리는 소리 굉장히 싫어해
"난 옛날부터 TV가 내 친구였어"
왠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더니 녀석은 자조하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혼잣말이라도 듣는사람이 없으면 그건 무의미해져 버리니까 들어주는 역할은 해야할듯 싶었다.
"엄마랑 아빠는 회사에 가고 나랑 세살차이인 형은 학교에 가서 집에 혼자있게 되는 6시간동안 계속… 계속 TV만 봣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말야"
"그러냐?"
꽤나 삭막하고 건조한 어린시절을 보냈구만, 하긴, 나도 뭐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건 사실이다만.
내 속으로 하는 중얼거림은 뒤로하고 수현이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대로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컴퓨터, TV같은게 내 친구였어… 어쩌면 늘상 다람쥐 쳇바퀴같은 인생에 회의를 느꼇을지도 모르지, 반복이란 도태를 낳고 도태는 인간을 병들게 하니까, 가족과 같이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어, 형이나, 엄마나,아빠나 다같이 모이는 횟수는 손에 꼽을수 있을 정도지"
"그래서?"
"가족이라는건 이렇게 허무한거야, 그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도 학교에 있는 친구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적고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뭐 별다를것도 없는 그저 그런 관계일 뿐이야, 신경 안써도 괜찮고 없어도 별로 힘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어"
뭘 말하려는 걸까, 말하는 녀석의 눈에는 약간 물기가 맺혀있는것 같다. 목소리는 냉정한 평소의 말투였지만 그 말투에 배인 왠지 이상한 감정은 쉽게 읽혀졌다.
"내 몸이 이렇게 변해도 가족관계가 변하는건 아니야, 그저 평소대로 눈한번 마주치기 힘든 그런 관계잖아, 있으니 마나한, 그저 사회적인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
"……"
녀석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치이이이
TV의 잡음과 함께 녀석의 울먹이는 소리가 합쳐진다. 무슨 뜻일까, 무슨 의미일까. 결국 난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녀석의 옆에 앉았다.
"엄마 아빠가… 죽었어… 아니, 자살"
"뭐?"
갑작스런 말에 순간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죽다니, 이녀석의 부모님이? 장난이겠지… 설마. 게다가 자살이라니? 어째서?
"형이 말해줬어…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전에 사업하다가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빚쟁이들에게 많이 시달렸대, 그동안 아빠 찾으러 다니다가 결국 들켜서 찾아올거래, 이번에 잡히면 끝이라고… 그러니까 우리보고는 잘 도망치라고… 어떻게든 살 길이 있을 거라고… 무책임하지?"
"……"
뭐야… 이런 어이없는 얘기는… 죽어? 뭐가 죽어? 빚?
"그런데 형이라는 놈은 그걸 알면서도 날 강간했어… 미친놈… 병신새끼, 집에 안 들어가. 다시는, 절대… 어차피 빚쟁이들이 지금쯤 찾아와서 문열라고 별짓 다하고 있을걸? 형도 지금쯤이면 어디로 도망쳤을 거고, 그새끼 어떻게 되든 상관 안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녀석은 계속 울었다. 정리해 보자면 사업상 진 빚때문에 수현이 부모님들은 동반자살… 아마도 형은 상속포기를 해서 빚을 물려받지 않으려 할테고 빚쟁이는 수현이 모습이 바뀌었으니 알아볼 리가 없다.
무책임하다. 부모가 그정도의 책임도 지지 않고 나몰라라하다니.
하긴, 원래 사람이란 다 그런거다. 자기 자신의 안위 앞에선 친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제 살길만 찾는게 사람이라는 생물이다.
"그런데…"
그녀석이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쥐어짜내듯이 이야기한다. 힘겹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왠지 놔두는게 나을것 같았다.
"엄마아빠는 날 버리고… 형은 날 따먹고… 그런 놈들인데…"
녀석은 계속해서 운다. 해줄수 있는 말이 없다. 위로한다던지 하는 그런 말들을 할수가 없다.
"앞으로 못본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녀석은 말을 거기까지밖에 하지 못했다. 눈물이 말을 삼켜버린 것이다. 형식적인 관계… 그저 친분도 가족이라는 혈연관계에 의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가 부모님이 죽었다는걸 알고 나서 이런 모습이라…
아무리 만나는 시간이 짧다 해도 그건 10년 이상을 함께한 가족이다. 그런 존재가 다시는 볼수 없게 되는 거니 슬플만도 하다…
하지만 아빠에게 애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보단 지금 내 눈앞에서 수현이가 사라진다고 하면 그게 더 슬플것 같다.
"꼭 이렇게 된게 내가 변해서 이렇게 된것 같잖아…"
모두 자기 탓이라는듯 고개를 숙이고 우는 녀석의 등을 조용히 두드려준다. 이제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견디지 못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살수도 없잖아 바보자식아.
"난 위로같은거 할줄 몰라"
"……"
녀석은 조용히 흐느낀다.
"운다고 해서 달라지는건 없어, 지금 눈물 한방울 흘리는 것보다 당장 닥쳐올 내일을 위해서 한시간 더 자두는게 더 좋아, 네가 이렇게 포기한다고 해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건 아냐, 살아남을 생각을 해, 빚쟁이들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널 찾을수는 없을거 아냐, 이렇게 모습이 바뀌었는데"
나도 알고 있다. 이건 확실히 위로가 아니다. 질타, 어찌보면 비난… 하지만 위로따위 할줄 모르기에 그저 이렇게라도 말하는 것 뿐이다.
우는 아이 뺨때리는 격이라고 하던가.
"잊어, 그런 부모는, 널 버리고 도망쳤잖아, 나는 부모를 믿지 않아, 그저 사회적 필요관계에 의해서 아직 같이있는것 뿐이야, 아버지가 없으면 살아갈수 없으니까 같이있는것 뿐이야, 그런 역겨운 사람 곁 따위 독립할수 있다면 어서 독립할거야, 그러니까 너도 잊어, 계속 떠올린다고 해서 좋을것 없어, 성현이 형도 마찬가지야, 생각할 필요 없어 그런 상황에서도 널 그렇게까지 할 정도라면 제정신이 아닌거야"
내 말이 심한 것도 있기에 잊으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와닿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말해줄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해줄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녀석의 울음은 점점 잦아들었다.
"건방지게… 훈계야?"
녀석이 눈을 치뜨고는 날 바라본다. 그녀석은 울음을 멈추려 입술을 깨물면서 말한다.
"나도 알아, 잊을거야, 형이고 뭐고 다 잊을거야, 그런 되먹지 못한 인간들 죄다 잊어버리고 상관 안할거야, 어디서 뭘하던 간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역시 슬픈지 녀석은 어깨를 들썩거린다. 더이상 심한말을 할 마음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울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 줄까?… 젠장, 이런 상황같은거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데 어쩌라는 거야
"그만울어"
"흑…으…끅!"
급기야는 딸꾹질까지 시작하는 녀석을 보니 안쓰러움이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가 준 옷에 뚝뚝 떨어졌다. 어느새 나는 옷서랍 속에 사용하지도 않고 처박아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왔다.
"흑…끅! 흐…"
손수건으로 녀석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눈물로 빨갛게 불거진 눈가를 닦았다. 숙인 녀석의 고개를 들게하고 허벅지에 묻은 눈물과 얼굴에 묻은 눈물들을 차례로 닦는다.
애처롭다라는걸 이런걸 말하는 걸까, 어느새 비가 그쳐 드러난 밤하늘의 별빛처럼 빛나는 녀석의 눈은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예쁘다.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에 왠지 안아주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당분간은… 여기에 있어"
어차피 갈곳도 없겠지, 빚쟁이인지 뭔지가 집을 다 때려부수고 있을게 분명하니까. 만약 돌아간다고 해도 부모님이 돌아가셧는데 있을 의미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일주일정도 전에 수현이 엄마를 본 일이 있었다. 별로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런 표정이었는데… 원래 자살같은걸 꾸미는 놈은 표정이 어둡고 당장이라도 사라질듯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경험해보기도 했는데… 게다가 수현이가 여자로 변했을때 이곳에서 하룻밤 잤을때, 전화했을때의 목소리에는 왠지 기쁜 기색까지 있었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끅…흐으…"
울고있는 녀석의 눈물을 재차 볼을 쓰다듬듯이 닦아주며 살며시 끌어안는다. 하긴, 내가 자살같은걸 생각해본 일이 없으니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리가 없다. 뭐 그런건 순식간의 충동으로도 일어나는 거니까.
녀석은 흐느낀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끄으윽… 흐으… 윽… 으…"
이렇게 우는녀석은 아이나 어른이나 할것없이 안아주면 잦아들게 된다. 뭐 내가 우는아이 달래본건 아니지만 어쨋든 그런것 같았다. 전에 새엄마가 질질 짤때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안아주니 잦아들었던것도 사실이고
"흐으… 으… 끅…"
이제 이녀석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호적상에 등록은 되어 있지만 그건 이녀석의 남자 모습이니까. 주민등록증같은것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 취직같은것도 힘들겠지.
하지만 아직 그런걸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지금 내 앞에 이녀석이 울고 있고 나는 그걸 달래주어야 한다. 그것뿐이다.
"그만 울어"
"흐끅…흐…"
울음은 잦아들었다.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귀여웠다. 아직 물기있는 목소리로 안 울어라고 말하는건 왠지 묘하게 야릇하다. 머리도 그러고 보니 허리 아래쯤까지 내려온다. 자고로 긴 생머리는 남자가 원하는 3대 덕목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뚜렷한 이목구비,잘빠진 몸매,긴 생머리 게다가 추가적으로 뽀얀 피부까지 더해지면 최상 아니던가.
하지만 너는 왜 그걸 다 갖추고 있는거냐, 가슴쪽은 좀 빈약하긴 하다만… 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작다고 하기엔 볼륨이 조금 있는 애매모호한 형태…
뭐 좋은게 좋은거다.
게다가 내가 남중에 다니니 이런 모습은 꽤나… 거시기하다.
"자…두는게 좋아"
"응…"
흐끅!흐끅! 하는 딸꾹질 소리를 내며 녀석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저긴 내방인데… 난 어디서 자지? 여기서 자기는 좀 추운데…
TV는 방송도 하지 않고 있고 케이블을 보자니 지금 시간대로서는 그렇고 그런것밖에 하지 않는다.
그래도 TV는 켜놓는게 나을것 같았다. TV를 끄게 된다면 약하게 귓가에 어른거리는 녀석의 울음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것 같으니까.
끈다면 아마 울면서도 눈치를 보느라 바쁘겠지. 작은 배려라고나 할까.
사실 부모님을 죽이는건 많이 생각을 했었습니다. 스토리 진행에 방해가 되고 껄끄러운 요소라서 이민을 보낸다던가 하려고 했지만 결국 죽이는걸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독자라 생각하고 봐도 조금 구색이 안맞는 점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생각해 놓았으니 문제는 없을듯 합니다.
그저 복선이니 무시하시고 보셔도 괜찮습니다.
앞으로는 수현이와 정현이가 동거(?)를 하게 됩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쿵!
"으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쑤시는데가 없다. 난 역시 소파에서 잠드는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허리도 약간 아프고… 잠버릇이 심한 나로서는 이렇게 소파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단 말이다.
아무래도 저녀석은 저런 모습인데 한침대를 쓸수는 없었다. 어제는 조금 정신이 나간것 같아 보여서 그냥 끌어안고 잣지만 또 울고 자러 갔는데 저녀석 옆에 비집고 들어가서 또 잠들수는 없지 않은가.
"썅… 머리아퍼…"
절로 욕이 나온다. 언제나 똑같은 설정에 똑같은 이야기의 아침드라마를 내보내는 TV의 전원을 꺼버린 뒤 고개는 방쪽으로 돌렸다.
"잘 자고 있으려나"
아무래도 침대 위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며 또 잠못들었을게 확실하다.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문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눈이 빨갛게 부어서 잠들어 있는 수현이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놈은 뭘 해도 저렇게 예쁜거냐… 아침햇살을 받은 녀석의 하얀 피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보송보송했다.
-부스럭
뒤척거리는 녀석이 아침햇살이 눈에 일직선으로 들어오자 눈이 부셧음인지 잠시동안 계속 이리저리 뒹굴거리다가 결국 눈을 뜨고야 말았다.
"으으으으으!!"
피곤한지 기지개를 켜는 녀석은 쳐다보는 날 발견하고 나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니가 왜 여기……"
하지만 이해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는지 금새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망할, 이런 화창한 아침부터 우울해하지 말라고, 일진 사나우니까.
"그만 질질짜, 밥먹고 학교가야지, 빠질수는 없잖아"
"어?, 어… 그렇지"
왠지 나사 하나가 빠진것 같은 모습이다. 왠지 멍하다고 해야하나. 이번엔 백치미인거냐, 너의 한계는 어디까지냐 김수현!
하지만 전혀 관심없다. 이녀석이 내 앞에서 홀딱 벗고 스트립쇼를 한다 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기본적인 정신세계에는 이녀석이 남자라는 기본관념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문에 필요 이상의 그런 느낌을 갖게 되지 않는건지도 모르겠다.
왠지 뭔가 하나 잊고있는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나 먼저 씻겠다는 말을 하고 세수를 한 다음 머리를 감고 나서 이빨을 닦으면서도 왠지 뭔가 잊고있는것만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 잊고있었던 것은 이빨을 다 닦고 나서 물을 한잔 마심과 동시에 떠올랐다.
"푸우웃!!"
"……개그해?"
입에 들어갔던 물이 마치 분무기처럼 앞으로 뿜어짐과 동시에 내 앞에서 같이 물을 마시던 수현이 녀석의 얼굴에 고스란히 뿌려졌다. 매우 기분나쁘단 표정을 하고선 약간 치켜뜬 눈은 당장이라도 나에게 한방 먹일 기세였다.
씩씩하게 돌아온건 기분좋긴 하다만 우선 나는 그런건 상관할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시간이 몇시지?"
아침 드라마라는건 원래 9시 이후에 하지 않나? 등교 제한시간은 8시20분이고… 설마…
"지각해도 한참 지각했네"
무덤덤한 표정으로 수현이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중얼거린 첫마디였다.
"으… 선생님, 제가 어제… 쿨럭! 쿨럭! 비를 맞아서 감기몸살에 걸린것 같은데… 에엣취!"
[음…그러니?]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나가면 안될까요? 지금 움직이기도 힘들어서요…"
[허어… 많이 아픈가 보구나]
"네에…"
한껏 침체된 목소리로 아픈 소리를 흉내내려니 목이 다 아플 지경이다.
[그럼 병결로 처리해줄 테니까 내일부턴 나와라, 알겠지?]
"쿨럭! 쿨럭!… 네… 감사합니다"
-뚝
망할, 무한 등교기록에 오점이 생기다니, 이것도 저녀석 때문에…
"망할"
"학교 빠지는 거야?"
"당연하지, 시간이 이렇게나 늦은데다가 니가 이모양인데 어떻게 놔두고 가냐?"
시간이 아무리 늦었든 간에 병원갔다왔다고 대충 둘러대면 될것이다. 지금 시간이 9시 30분… 그럼에도 내가 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눈앞에서 침대에 누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끙끙 앓고있는 김수현 이자식 때문이다.
"그렇게나 비를 맞았는데… 감기 안걸리는게 이상하지"
"그런가…"
뭐가 그런가냐, 나도 은근히 감기기운이 보이는게 아무래도 아까 그게 연기가 아닌 실제가 되어버릴것 같다. 온몸에 힘이 안들어가고 자꾸만 드러눕고 싶어지는게… 감기 확실하다.
"나 얼마동안이나 찾았어?"
전에 말했던걸로 기억하는데
"1시간 30분"
그 말에 녀석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마치 겁먹은 고양이같이 동그란 눈을 하고선 말했다.
"그렇게나 오래? 안추웠어?"
"추웠지, 그럼 더웠겠냐 멍청아"
"으응… 나 걱정해서 찾은거야?"
도대체 이녀석은 뭘 물어보고 싶은걸까, 어쨋든 간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걸 보니(열때문인지 다른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제정신은 아닌것처럼 보였다.
"뭐… 그렇다고 봐야하나? 원래는 니 형한테 너 있냐고 물어보는 전화가 와서 찾으러 나간 거였어"
"그래?"
녀석은 잠시 생각을 하는건지 자려는건지 눈을 감는다. 조금 달아오른 녀석의 볼에 손을 가져가자 예상 외의 뜨거움이 전해져왔다. 이마에 손을 가져가니 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뜨거움이 또다시 전해져온다.
"하아…으…"
"머리아프냐?"
"으…"
녀석은 고개를 젓는다. 그런말해도 소용없다. 죽을상을 하고 힘빠진 모습으로 헥헥대는데 그게 아픈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멍청아, 아플땐 아프다고 말을 하라고.
"밥은?"
"몰라… 먹기싫어"
녀석은 말하기도 귀찮다는듯 고개를 젓는다. 녀석은 지금 마음도,몸도 많이 아프니까… 그래도 뭐라도 먹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역시나 감기 환자에게는 죽이 최고이려나?
녀석은 졸린지 자꾸만 눈을 감는다. 자도 괜찮은데 잠들기 싫은지 자꾸만 눈을 멍하게나마 뜨고서는 내 눈치를 살핀다. 뭔가 원하는게 있나?
"나… 이제 어떻게 해?"
"뭘?"
"호적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인데다가 나중에 직장같은거 가지려면 이력서도 못쓰잖아"
"하긴…"
아무것도 할수없는 몸이 되어버린 건가… 하지만… 그런 상황까지 가지는 않을거라 믿는다. 직업따위 가지지 않아도 지낼만큼 하게 해줄수도 있으니까. 돈으로 친구관계를 유지하려는건 아니지만 고생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집에도 못가니까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면 될거고… 뭐 편하게 있어"
"……"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왠지 기분 이상해진다. 약간 멍한 눈빛의 녀석은 이 방의 약간 서늘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괜히 안아주고 싶어지는 그런 병약한 미소녀의 모습이었다.
"고마워"
녀석은 다른 의미에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서는 말했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아버리는게 꽤나 귀여웠다. 가까운 친구사이일수록 고맙다는 말이 나오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볼때 녀석은 용기를 낸 것이었으리라.
뭐 죽이라도 해주는 편이 나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