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8/22)

"증명사진 찍으러 왔는데요"

"아, 네 이리로 오세요"

"이거 입어"

수현은 엄마가 건네주는 교복 마이를 코트를 벗고 셔츠 위에 걸쳤다. 처음보는건 아니지만 볼때마다 신기한 사진찍는 도구들이 신기하다.

"조금 더 옆으로… 아니 너무 많이 갔어요…오 그래 딱좋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겟다.

"하나…둘…셋"

-파앗

플래시가 터지면서 눈앞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눈이 너무 아프다.

"다시한번, 하나…둘…셋!"

-파앗

다시한번 플래시가 터지면서 실내가 환하게 빛난다. 수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눈가에 손을 가져간다.

수현은 일어나서 사진이 기록되는 컴퓨터 앞으로 갔다. 이상하게 딱딱하게 굳은 낯선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게 자신의 모습… 앞으로도 가지고 살아야 할 모습이다.

"학생, 이름이 뭐죠?"

"예…예?"

"이름이요"

사진기사의 물음에 수현은 순간 당황했다. 그대로 수현이라는 이름을 써야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별거 아니었던듯 잼싸게 엄마가 말을 가로챘다.

"김수민이요, 김 수 민"

"네… 그럼 이따가 찾으러 오세요"

돈을 주고 사진관을 나오는데 수현이 말했다.

"수민은 뭐야?"

"예전부터 딸 낳으면 지으려고 했던 이름~"

"하아…"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현은 차에 올라탔다.

"또 어디 가?"

"이제 집에 가야지, 학생증은 월요일날 만들고"

"으음"

수현은 수파에 깊숙히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겨울태양이 따사롭게 빛난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 약해서 그 누구도 따뜻하게 감싸주질 못한다.

"흐으으… 춥다"

수현이 몸을 부르르 떤다. 희디흰 볼이 빨갛게 터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운 모습이다.

양손을 비비며 지나가는 주변 경관을 보다가 문득 스친 것이 있었다.

"아…"

김선우였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석이 딱 눈에 띄었다. 왠지 그 녀석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자신이 이상해진것 같았다.

-풀썩

"졸려…"

"엄마 어디 나갔다 온다"

"으응…"

집에 돌아오자 수현은 푹 쓰러져 버렸다. 졸린 탓도 있겠지만 왠지 자도자도 피곤하다.

엄마는 어제 사온 속옷과 옷들을 가지고 갔다. 바꿔오려는 거겟지.

이틀… 겨우 이틀만에 많은 일이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과 왠지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 일…

수현은 그 자세로는 수면을 취하기가 좀 힘들었는지 일어나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치고 셔츠를 벗었다. 새하얀 가슴이 노출된다.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왠지 만지고 싶다라는 느낌을 주는 가슴이었다.

다시 반팔 셔츠를 걸치고 소파에 엎드려 누운 수현은 무얼 생각하는지 눈을 감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에 문자나 전화가 와 있을지도 모르는 터였다. 수현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4통]

전부 다 수신자가 이정현으로 표시되어 있다. 문자는 없었다. 다시 소파에 가서 드러누운 수현은 이번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원래 시간있으면 자는게 좋은거라는 지론을 갖고있는 수현이다.

-텅텅텅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수현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원체 방해받는걸 싫어하는 수현이니 문을 열어주는 손길이 고울리가 없었다.

-덜컥

"에?"

"어?"

문을 연 사람이나, 열어달라고 한 사람이나 둘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명은 자신의 오랜 친구가 있으니 놀랐고 한명은 갑자기 여자가 튀어나오니 놀란 탓이었다.

"여기… 수현이 집 아닌가요?"

"마, 맞는데요… 우선 들어오세요"

어색한 존댓말이 서로 오가고 수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정현… 어지간히 내가 걱정됐나? 집까지 찾아오고…'

수현이 집을 알려준 녀석들은 몆몆 없다. 그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이정현… 이녀석이고 말이다.

"수현이… 어디 갔어요?"

'미치겟네… 뭐라고 말하지?'

비밀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만 이녀석에게는 왠지 말해줘야 할것같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오래 알아온 사이인 데다가 둘도없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맞다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 너같으면 믿겠냐 어?"

역시나 믿지를 않는구만… 에효, 내가 내 무덤 팟지 쓸데없이 괜한 얘기를 꺼내가지고…

에라잇 씨발…

"믿기싫으면 말던가, 아니면 엄마한테 전화걸어줄까?"

뭐 이놈이랑 나만 아는 에피소드라도 있으면 그걸 알려줘서 경각심을 일깨우는 방법도 있는데… 

"후우… 전에 김수현한테 전화걸었을때 받은것도 너였냐? 사촌누나라며?"

녀석은 지금 내가 장난치는걸로 착각하고있는 모양이다. 씨발롬아 나도 이게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뭐라고 말할지 헷갈려서 그런거지, 나 김수현 맞다니까 또라이야"

"누구보고 또라이라는겨 지금… 니가 벌레 유충이냐 변태해서 여자로 진화하게?"

이런 개쉐이가 지금 날 뭐에 비유하는 거여… 끓어오르는 분노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흐흠… 이제는 옛 추억을 되살려주는 수박에 없나.

"맞아, 나 예전에 니네집 갔을때 야동만 40기가였던거 다 기억하고 있어!"

훗, 이래도 다른놈이라고 생각할 거냐, 그때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근데… 왜 얼굴이 빨개지는겨

설마… 내가 사촌누나한테 얘기해서 알고있는걸로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여자한테 그런일 발려지니까 쪽팔려서??

"이 개새… 아무한테도 말 안한댔으면서"

"아이 씨발! 나라니까! 학교 안간겄도 몸이 이따위로 변해서 그런 거라고 똘추색키야!"

"이 씨발! 너 어따대고 욕질이야 자꾸"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나는 내 존재를 입증하려, 녀석은 내 존재를 극구 부인했다. 아나…

"후우…"

"너… 여자가 뭔 욕을 그리 잘하냐?"

"내가 너한테 욕 배웠잖아 새꺄"

중학교 1학년때까지만 해도 순진했던(?)… 나를 이렇게까지 타락시킨게 누군데 뻗대고 있는거야 저자식은!

X알을 뽑아서 똥꾸멍에 처박을 놈이라는 욕도 니놈이 알려준 거였잖어… 아나, 그러고 보니 더 열불이 치솟는다.

"아나, 그만좀 하지? 담탱이가 김수현 결석한거 아퍼서라고 했거든? 지금 뭐 어디 병원에라도 있을거 아냐! 너 지금 짜고 이러는 거냐?"

아나… 담임인지 뭔지는 그따위로 얼버무리냔 말이야… 1년 결석하면 나 죽었소 이럴꺼야?

"당연히 구라지"

"아나… 미치겟네 이거 이 씨발… 나 장난할 기분 아니거든?"

"나도 장난하는거 아니거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건… 이렇게나 X나게 짜증나는 거였나…

"후우… 나 니 아버지 무슨일 하시는지 알아"

"!!"

이런 말까지 하고싶진 않았는데… 씨발, 니가 안 믿은게 잘못이지

"이 개새끼… 그것까지 말했냐… 아오 씨발"

"나라니까 병신아! 왜 사람말을 못믿어!"

이렇게까지 안믿는건 니가 처음이다… 녀석의 눈이 순간 멍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장난…"

"장난 아니라고"

녀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녀석이 내 눈에 담긴 진실을 읽었는지 입가에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은채 날 바라본다.

"진짜냐?"

"진짜라고… 너 지금까지 내가 그런거 다른사람한테 말하는거 봤어?"

난 원래 비밀같은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고 다니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는 내가 가장 짜증스러워하는 행위일뿐 아니라 그런 놈들은 상종조차 하기가 싫다.

"…… 솔직히 니가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믿어지겠냐?"

"안믿지"

당연히 안믿는다. 그런 말도안되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하지만 눈앞의 사실이니 부인할래도 부인할 수가 없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녀석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거까지 알고있으면… 진짜겟지, 말하면 죽인다고 했으니까"

"무서워서라도 말 못하지…"

"후우… 그런데 기분은 좋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기분이 나는 지금 좋을까? 형한테 강간당하고, 이상한 놈이랑 같이 자고… 그런게 나는 지금 기분이 좋은걸까?

하지만 확실한건 나쁘지는 않다는 거다.

"상쾌해 죽겠다. 졸라 이쁘잖아, 몸매도 죽이고… 가슴이 좀 작지만… 이정도면 완벽하지 않냐? 김태희고 한가인이고 다 질질 짜겟네"

"빙신… 니 자뻑 어디가나 했더니… 이젠 공주병이냐?"

그러면서도 녀석은 내 몸을 찬찬히 뜯어살핀다. 하지만 다른 추잡한 욕망에 휩싸인 그런 눈빛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냥 살펴보는듯한 눈빛이다.

여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그냥 받아들이는 건가?

"그 못생긴 면상 갈아치우니까 속이다 후련하네"

"킥킥킥… 하긴, 너랑 얘기하면서 맨날 눈이 썩는줄 알았지, 뭐 변하니까 좀 볼만하네, 입이 좀 걸레인걸 빼면"

"이런 좀만이가… 왜? 따먹고 싶냐?"

"닥쳐 냄새나"

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말하자 녀석은 내 얼굴을 이상한 물건이라는듯 휙 밀어낸다. 왠지… 기쁘다.

"고자새끼, 이런 절세미녀를 보고도 꼴리지 않는 놈은 니가 처음일 거다"

"어익후, 남자새끼한테 박고싶을 정도로 게이새끼는 아닌뎁쇼?"

그 게이새끼 여럿 있거든?

-꼬르륵

…뭐야 이 대장 뒤틀리는듯한 불협화음은

"뭐야, 절세미녀께서 아침이라도 굶으셧나?"

"이런 썅…"

"아니 내가 왜 니 먹을 밥을 줘야 돼는데"

"배고프니까"

-덜컹

문을 꼭 닫은 수현은 정현을 길로 떠밀며 재촉했다. 수현이 이러는 이유야 간단했다. 배고프니까. 가끔 정현의 집에 놀러가서 얻어먹기는 하지만 정현이 직접 하는 요리를 먹은적은 그리 많지 않다.

"아나, 옷 갈아입을때 알아차려야 했어"

"얼른 가! 배고파 뒤지겟어. 나 아직 아침도 못먹었다고"

"아나… 내가 니 밥을 왜 챙겨줘야 하는데요. 이 똘추야"

수현은 막무가내였다. 지금 목표야 당연히 정현의 집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정현의 아파트를 가리키며 수현은 정현을 마구 떠밀었다.

"얼른 안가?! 오뉴월 뭐패듯이 맞고싶냐? 네가 오늘 매가 고픈가 보구나!"

"개념이 그 못생긴 면상에서 혹성탈출했냐! 내가 왜 니 밥을 챙겨줘야 하는데!"

"……"

정현의 독설에 수현이 상처받았는지 멈칫해서는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흑…흑…"

"아나, 이게 이젠 눈물연기까지 하네"

연기라는걸 알지만 그냥 두고볼수만은 없었다.

"어머, 쟤가 울렸나봐"

"어쩜… 여자를 울리다니, 저질이야"

"컥!"

마침 지나가던 한쌍의 여성들이 수군수군거렸다. 정현은 머리에 돌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더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에 멈춰야 한다.

"아나… 줄게 준다고"

"진짜지?"

"……개놈… 아니, 개년"

"얼른 가자~ 산동네 칙칙한 공기는 싫다고"

역시나 연기뿐이었는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는 수현을 보며 정현은 한대 갈겨주고 싶은걸 참았다.

산동네를 내려가면서도 정현은 몰랐다. 수현의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고마워'

수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다리아퍼"

"어디서 이게 연약한 척이야… 낚인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연신 다리아프다며 종아리를 주무르는 수현을 보며 정현이 아니꼽다는듯 중얼거렸다. 정현이 사는 아파트 바로 앞이었다.

수현은 진짜로 힘들었다. 변하면서 체격도 약해진 데다가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알통은 커녕 팔에 근육은 있는지 의심까지 가는 팔뚝만이 수현의 현재 체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오늘은 뭐해줄 거야아~?"

-와락

수현이 정현의 팔짱을 끼고는 생글거리며 묻는다.

"이게 어디다 들이대… 사람들 오해한다고"

"고마운줄 알아 자식아, 나같은 미인이랑 애인행세 하는게 어디 쉬운줄 알어?"

"됐거든요? 꺼져 주실래요 아가씨?"

"이런 씨방새가 말끝마다 욕질이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현이 욕하는걸 보고는 수군댄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가 입이 걸레라며… 수현은 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현에게 욕질을 해댄다.

"그러니까 맛있는거 해놔, 알겟냐?"

"예예~ 알아모시죠"

사람들 시선을 의식한 정현이 아파트 라인으로 재빠르게 들어간 다음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올랐다.

"갑자기 해달라는게 어딨어 자식아… 뭐할지 생각중이니까 자꾸 말시키지마"

"그런 거였어? 진작 말을 하지잉~"

수현은 팔짱을 풀고 정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한껏 애교를 부렸기에 보는 사람도 애간장이 타들어갈 만큼 귀여운 애교였지만 정현은 꼴보기도 싫다는듯 몸을 부르르 떤다.

"뭐야, 그 짜증나 죽겠다는듯한 표정은"

"며칠 지났다고 애교까지 부리는 남자새끼가 한심해서 그런다 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둘은 티격태격하며 이놈저놈거리고 있었다. 정현은 혼자 산다. 그의 집안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그게 익숙해지면서 정현은 자연히 요리실력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 음식을 맛본 수현이 틈만나면 밥먹자고 조르던 것이 이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딩동 11층입니다.

18층짜리 아파트에 사는 정현은 그중 11층에 살았다. 옆에서 칭얼대는 수현을 무시하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혼자사는 집에 이건 너무했다 싶을 정도의 물건들이 많았다.

"이런… 너 나랑 같이 살자"

"동성동거는 사절"

대형 프로젝션TV와 고급스러운 소파, 물론 컴퓨터는 최신이고(야동만40기가지만)… 소파도 30만원짜리 듀오백에 침대도…

수현은 올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혼자사는 자식이 왜 대형침대를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가 제일 궁금했다.

서재인듯한 방에는 책꽃이와 책들이 널려있었고 업무를 보는 곳인듯한 책상이 있었다. 물론 책에는 먼지만 쌓여있긴 하지만…

"이잉~ 정현아~ 나랑 같이살자"

"이게 어딜 붙어먹으려고"

정현은 팔뚝에 매달려서 칭얼대던 수현을 뿌리친 다음 부엌으로 가서 밥통을 열어보았다.

"밥은 있네… 얌마, 슈퍼가서 표고버섯이랑,송이버섯, 쇠고기 그리고……"

"기억 못하겟는데, 그리고 나 돈없어"

"돈이야 내가 주지 멍청아"

"이런 씁…"

"안 받아적고 뭐해, 니 머리로 기억이 나겠냐?"

수현은 투덜거리며 서재로 가 메모지와 펜 하나를 들고 나왔다.

"받아적어, 표고버섯,느타리버섯,송이버섯…음… 당근……있고, 당근 적지마"

"…제대로 말해!"

"적기나 해, 파… 쪽파 말고 대파2뿌리 고추, 풋고추 말고 빨간고추, 음… 마늘은… 있네 그리고 쇠고기200g 끝"

"뭐가 이렇게 많아? 뭐 할껀데?"

"버섯전골"

"오오!"

수현은 군말없이 쪽지를 들고 뛰쳐나갓다.

"얌마! 돈 안가져가?"

"아차차!"

"멍청하긴"

수현은 얼굴을 붉히며 정현이 주는 만원짜리 네장을 받아들었다.

"머 나머지 먹고싶은거 있으면 사오던가… 다쓰지 마"

"…손님한테 이런거 시켜도 되는거야?"

"먹기 싫으면 관두던가"

정현이 들고있던 앞치마를 아무데나 휙 던지려고 하자 수현이 배시시 웃으며 얌전히 밖으로 나갔다.

-덜컥

"후우… 별 이상한게 꼬여가지고"

정현은 냉장고를 열고 양파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흐으… 춥다"

추위가 사납게 몸을 훑지만 조금 있다 먹을 버섯전골을 생각하면 추위도 다 가신다. 아파트 중앙에 서있는 시계탑의 시침이 4시를 가리킨다. 위치로 볼때 대략적으로 20분 정도라는걸 알수 있다.

"으으으…"

아파트 바로 옆이 슈퍼마켓이라서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추운건 싫었다.

슈퍼마켓 문을 열고 들어간 수현은 쪽지를 열심히 쳐다보며 재료들을 하나씩 하나씩 골랐다.

"음…파?"

'대파였지 쪽파였지?… 아 몰라!'

도중에 파라고 적힌 것이 대파인지 족파인지 몰라서 그냥 둘다 사버린 수현은 다른 여러 재료들을 고른 뒤에 뭔가 살게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흐음~"

수현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수현의 눈길이 멈춘 그 물건은 찬란한 푸른빛을 영롱하게 뿜어내고 있는 X이슬 이었다. X이슬 3병 정도를 집은 수현은 그걸 바구니에 넣고 감자칩을 초대형 사이즈 하나, 그리고 술안주용으로 딱좋다는 맥반석 오징어 구이를 두개 넣었다.

-턱

꽤나 많은 양에 주인은 놀라는듯한 눈치였다. 조그만한 아가씨가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사는지 의구심이 생긴다는듯한 눈치였다.

수현의 빼어난 미모에 나이에 대한 관심은 어디갔는지 바코드를 찍으면서도 멍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보던 주인은 잠시 후 옆의 마누라에게 허벅지를 꼬집히고 난 다음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구…"

"어딜봐 임마"

수현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으며 돈을 지불했다. 뭐 정육점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바로 옆 가게가 정육점이기 때문이다.

"뭘 이리 늘쩡거려 임마"

"시끄러"

-털썩

수현은 봉투를 부엌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남은 돈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소파에 쓰러져 버렸다.

정현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수현이 사온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새퀴가 술을 사왔네?"

"의심도 안하더라? 흐흐"

"저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가지고"

수현은 개무시하고 코트를 벗어놓고 소파에 엎드려서 TV를 틀었다. 정현은 지친다는 표정으로 재료들을 꺼내 썰기 시작했다.

송송송송하며 야채 써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오고 수현은 TV를 보면서 멍한 표정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은 TV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있는듯 하다.

"배고파…"

수현은 연신 배고파를 연발하며 소파 위를 이리저리 뒹굴거린다.

-쿵!

"악!"

"멍청하긴…쯧쯧"

"우씨"

정면으로 코를 바닥에 부딪히며 떨어진 수현이 코를 감싸쥐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살인적일 정도로 귀여운 모습에 얼굴을 붉힐만도 하건만 정현은 그냥 멍청나하는듯한 눈빛을 한번 준 뒤 다시 요리에 집중한다.

"우오"

수현이 소파 밑에 손을 한번 집어넣더니 뭘 찾는지 더듬거린다.

"응?"

뭘 잡았는지 만지작거리다가 수현은 무언가에 놀라서 손을 빼고 손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한숨을 쉰다.

"컴터나 해야지"

수현은 정현의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초슬림형 컴퓨터를 보고 수현은 감탄사를 매뱉더니 한마디 한다.

"야! 내 허리가 더 얇을까 아니면 이 컴터가 더 얇을까?"

"빙신, 물어볼걸 불어봐라"

"…니놈하고는 진지한 대화를 할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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