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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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희뿌옇게 물든 시야로 천천히 움직이며 고민했다.
이제는 먼 추억으로밖에 남지 않은 그것. 고작 5년에서 6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세계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지 이제는 그 잔재조차 제대로 떠올리기 어려웠다.
시간이란 언제나 잔인했다.
이제는 부모님의 얼굴도, 동생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력 100이라는 몸은 굉장했다.
무너져내린 잔해에 깔렸음에도 그걸 치울 수 있었고, 사방으로 연기 피어오르는 와중에도 호흡을 참으며 움직일 수 있었다.
불길의 열기는 과연 지독했지만, 직접 불타는 게 아닌 이상에야 버틸 수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잔해를 손으로 치우거나 밀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심은 어떻게 됐을까.
이미 이 주변은 손이 남는 이들의 사병까지 전부 끌고 와 포위했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순심의 퇴로는 이미 차단한 것과도 마찬가지.
“아니지….”
헛소리를.
소연은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 없었다.
아직 이제부터인데. 여기까지 기반을 닦고자 얼마나 고생했고,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핏물을 몸에 발랐던가.
그 모든 희생과 죽음을 딛고 일어났다.
현대에서 배운 모든 윤리와 도덕을 저버리고 수많은 사람의 비명을 전조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움직여라.
아직 움직일 수 있을 터.
이 영문 모를 세계에서 치트의 몸을 빌려 여기까지 왔다. 이 자리까지 왔다.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불길은 점차 그 기세를 더해갔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 분명 가까이에 타고 있을 게 분명한 와중에 시야를 자욱하게 메꾸는 매운 연기가 자꾸 숨을 막히게 했다.
소연은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죽음은 쉬이 받아들이고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정했다.
이번에는 사태가 급해 조금 섣부르게 움직인 면이 있었다. 전부 끝났을 거로 생각했고, 자신 외에 움직일 손이 없었기에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안일한 사태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이번, 만… 살면 되니까…….”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열기 탓일까, 아니면 몸의 부상 탓일까.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감촉을 느꼈다. 혹은 그저 착각일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는 멍했고 몸은 무거워, 그저 이곳에서의 풍경이. 어쩌면 게임을 바탕으로 한 이 세계 자체가 전부 무너져 내려가는 감각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그녀는 마지막 잔해를 밀어냈고.
“여기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 * *
하늘을 새까만 연기로 메운 것 같았다.
채 접근하기도 힘들 정도의 불길.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은 이미 이 부지 대다수를 태우고 있었고, 그 어딘가에 소연 아씨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먼저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인근을 뒤지고 있었다.
소연 아씨가 미리 준비해둔 병력일까.
“쿠흡…!!”
한 발짝.
고작 한 발짝 들어서서 숨을 쉰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게 쓰렸다.
연기는 독하기도 독했지만, 무엇보다 뜨거운 열기까지 한 번에 기도를 거쳐 폐를 쓸어내린 듯한 감각이었다.
찾아야 한다.
오직 그 생각만으로 발을 움직였다.
큰 건물과 작은 건물까지 종합하여 이 부지에 존재하는 창고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다섯. 보이지 않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장 눈에 띄는 게 그 정도였다.
어디냐.
“소연 아씨이이이이이!!”
소리를 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심은 포박되었고, 이제 소연 아씨만 구해낼 수 있으면 모든 사건은 끝난다.
허도 염상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지만, 적어도 그 상처를 달랠 수 있게 된다. 불탄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재산의 손액 역시 어떻게든 모을 수 있었다.
물건이라면 언제든 다시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어버린 사람. 우리의 곁을 떠난 이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도저히 메꿀 수 없었다.
“아씨! 있으면 대답 좀 해보쇼!!”
외칠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을 뚫고, 무너져 가로막은 잔해는 청강으로 쳐내면서 계속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여기까지 오며 너무나 많은 사람을 잃었다.
시작은 어머니였다.
유소년기에는 전장을 돌며 조금이나마 정 붙였던 사람의 대다수는 전장에서 죽어갔다.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못 하고 그 죽음을 쓸쓸히 애도할 뿐.
게다가 기껏 모았던 놈들도 이제는 고작 열 남짓 남았다.
잃어버릴 뿐인 나날이었다.
모든 걸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반대로 내 손아귀에 남은 게 몇이나 있나 돌아보면 어떤가. 그 이후 좋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과거의 인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의 명부에 소연 아씨의 이름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죽을 바에는 내가 죽는 게 아직 나았다.
더는 누군가를 잃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내가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날 앞에서 당긴 건 진소연이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시간을 떼우기만 하던 내게 빛을 보여줬다.
앞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아씨.”
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시야에 방해되어 한 번 닦아냈는데, 핏물이 섞여 흘러내린 것을 깨달았다. 아까 잔해를 치우다가 머리에 부딪쳤는데 그때 찢어졌을까.
그보다는 뜨거운 게 더 거슬렸다.
사방으로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니 뜨겁지 않길 바라는 것이 더욱 웃겼지만, 이 절박한 순간에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어떠한가.
거추장스럽다.
육체는 물을 머금은 종잇장처럼 흐물거렸다. 크게 움직인 기억도 없는데 몸은 탈력감으로 지쳐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생각해보면 난 불길과는 좋은 인연이 없었다.
손에 새겨진 흉터가 그걸 증명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원한 바람 한 번 쐬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주변을 살피던 찰나였다.
저 멀리 병사 몇 무리가 화재 이후의 잔해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조조군의 정규군은 아닌 듯 보였지만, 생각해보면 이 사태를 수습하는 와중에 각 호족이 이끄는 사병까지 차출하여 움직이게 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들은 곧장 잔해 인근으로 가더니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치우면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찾았다, 여기다!!”
누군가의 외침.
그와 동시에 걷어진 잔해 아래로 누군가가 비틀거리면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검은 생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고 옷은 시꺼멓게 그을렸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빨갛게 달아올라 곳곳에 검은 무언가를 묻히고 있었지만, 그런 먼발치에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소연 아씨.
아직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다. 진짜로, 정말로.
살아있어 주어 고마워. 죽지 않아서, 그 생명을 계속 붙잡고 있어 주어 고맙다. 나만 남기고 먼저 떠나지 않아 감사했고, 그저 모든 것에 감사했다.
터덜터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을까.
검을 뽑는다.
내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저 앞에 병사들은 동시에 검을 뽑고는 소연 아씨를 겨누기 시작했다.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심의 남은 잔존병력? 아니, 그들은 이미 바깥으로 도망치던 차에 전부 제압당했다. 이 근방으로 주둔한 병력은 소연 아씨가 차출한 병력이 아니던가.
생각할 틈은 없었다.
알고 있지만, 몸이 무거워서.
일단은 움직여라.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재현장을 한참 걸어서 그런지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땀은 빗물처럼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머리가 뜨거워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뭐.
아직 움직인다.
몸은, 근육은, 내 다리는, 하여 내 생명은.
아직 이곳이 한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 * *
소연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왔다.
목을 짓누르던 잔해를 계속 밀어냈다.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길의 온도를 머금어 뜨거운 현장을 겨우 파헤쳐 겨우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본 얼굴.
“진소연.”
“너희느… 은, 또 누구니?”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물론 병사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복식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조조군의 정규 병력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러면 어느 가문의 사병일까.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애써 고민했지만, 그녀가 떠올리기에 황갈색의 복장에 붉은 실선을 이어 장식한 복식의 사병을 데리고 다닌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아예 기억에 없는 복식도 아니었다.
황족과 그 측근의 사병들이 보통 황갈색으로 사병을 꾸미던가.
그녀는 그것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다.”
“웃기네. 너희 전부 정말 너무 웃겨서….”
쥐고 있던 철봉은 이미 잔해 어딘가에 두고 왔다.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억지로 일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 당장 십수 명의 무리와 싸우라고 한다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말이 안 나오네.”
“어르신은 원소와 결탁하실 분이 아니다.”
그녀는 그 말에 살짝 웃었다.
역모로 엮었던 황족 관계자일까.
전부 쳐냈다고 쳐냈지만, 몇 명인가가 흩어져 다른 황족에게 의탁했다면야 그들 모두를 제거할 방법도 뚜렷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고작 십수 명, 적수라고 치기에도 민망한 정도의 숫자였다.
정치적으로도 아무런 반향을 줄 수 없고, 그저 살아남아 눈물 흘릴 뿐이라고 생각하여 무시했던 그것이 가장 절박한 순간, 가장 최악의 비수로 돌아왔다.
순심은 말하였다.
죄에는 벌을. 가장 당연한 논리라고.
“어르신은!! 비록 네놈들 조씨와 반목하였어도 진심으로 황족을, 한나라를 생각하셨던 분이다! 그분을 처형한 것이, 그리하여 무고한 이들까지 전부 죽이는 것이 너희의 방식이냐!!”
걸리적거리는 무언가를 치웠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보아 계속 조조의 발목을 붙잡을 거였고, 더 나아가 언제 반란세력으로 변모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내부에서는 계속 조조와 갈등을 빚으며 황족을 우대하는 이들을 주변으로 모아 정치적으로 세력을 기르려고 했던 인사들만 선정했다.
……그런 변명이 통할 리도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너무 많은 핏물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너희가, 복수하겠다는 거야?”
“처음에는 변양 선생을, 그 뒤로는 황족 어르신들을. 너희의, 특히 상서령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네년을 싫어하는 이들은 많다.”
“알고… 있어.”
그렇기에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어디까지나 강해진다면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전부 묵살할 수 있으니까.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분노 또한 정당하다.
누군가를 잃은 자의 분노는 언제나 긍정되어 마땅했다.
의지, 혹은 이득.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놓고 항상 경쟁하며 겨루는 정치판에서 밀려났다고 하여 남겨진 이들까지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것은 천벌임을 알아라.”
“웃기네…. 네가, 하느님이라도 된다는 소리로 들려서.”
인간의 손으로 인간을 벌하는 건 당연했다.
벌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다소 우습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죄를 규정하여 벌하는 것 또한 인간이었다.
그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인간.
신이라는 분께서는 결코 세계에 내리시지 아니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웃었다.
“너희가 그 잘난 신이라면 대답해줘.”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난 왜 이 세계로 떨어진 거야? 그분께선 내게 바라는 게 뭐였니? 아무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을 뿐이라면 너무 개연성이 떨어지잖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정신이라도 나갔나?”
소연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왜 이 세계에 내려온 거야.”
대답해달라고.
너희가 그 잘난 신을 자처했으면 이 질문에 답하라고.
그녀의 눈가에는 옅은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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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직전 단계라 몇 번 퇴고하고 방향성을 가다듬어도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드는 게 나오지 않아 이 작품 계속 붙들고 해봤습니다만, 좀처럼 방향성에 애를 먹었네요.
이 또한 변명이네요.
그저 죄송합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번에 출판용 개정 작업도 병행하며 전부 마무리를 짓고 있고, 작품 방향성도 제대로 설정해 앞으로는 매일 1, 2편씩 꾸준히 업로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는 정말 다시금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이제 방향성도 잡았으니 앞으로는 쭉 연재 이어가겠습니다. 고민이 공고했던 공지보다 길어진 점, 재차 다시금 사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