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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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유는 이제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미 동승에게도 언질을 주어 그 또한 사병을 이끌고 이목을 끌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본인은 그 시기를 틈타 동쪽으로 돌아 황족들이 모인 촌락을 습격하고자 했다.
황제 본인을 잡을 수는 없었다.
예상 이상으로 경비가 삼엄한 부분도 있었고, 허유 본인도 황제 암살까지 노리는 것은 과욕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적이 아직 아군의 주목적이 조조 암살인지, 혹은 요인 암살인지 판단하지 못한 지금이기에야말로 이곳을 노리기에 최적일 터. 그런 기회를 황제 암살이라는 불확실한 도박에 날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준비는 모두 끝난 상황.
동승은 허유 본인의 말을 믿고 안전하리라는 담보 하에 군을 움직이고 있었다. 설령 동승이 제압당해도 그들은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진심으로 믿어버렸다.
“멍청한 놈.”
그는 자신을 거물로 여기고 있었다.
황실의 외척이나 큰 어르신.
그런 명패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조에게 있어 황제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불순물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걸러내야 할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것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멍청이를 어르고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준비는 되었느냐?”
“예, 허유 선생님.”
“좋다.”
동승은 사병 오백 이상을 거느리고 승전식 무대인 광장에서 한바탕 소란을 벌일 예정이었다. 현 허도는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터. 그러니 병력 대부분은 고작 오백의 군을 거느린 동승을 향해 몰려가겠지.
그가 생각하기에 썩 나쁘지 않은 책략이었다.
구태여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황족을 노린 것도 그 일환.
비록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조조 관리하에 놓인 허도에서 황족이 대거 죽는다면 그건 허투루 흘려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조의 위기관리능력. 더 나아가 조조 자체를 황가와 한에 불순한 의도를 품는 반역자로 몰아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어린 황제를 옹립하여 그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 황족까지 대거 사망한다면?
분명 볼만하겠지.
게다가 허유의 주인인 원소는 그런 정치적인 능력은 가히 천재라고 불러 무방한 인물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정치적인 이념을 심고, 그것을 승화시켜 주위를 선동하는 능력은 이 사건을 재조명하기에 합당했다.
군을 움직인다.
수백에 불과했지만, 황족을 지키는 병력이 대거 이탈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그들을 죽이고 허도를 탈출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승리.
그는 문득 순심의 얼굴을 떠올렸다.
멍청한 년.
네년의 손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부터는 동승이 제압당하고 주변 상황까지 일단락되기 전에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
“전원, 출발한다. 이제부터 황족 거주지에 도착할 시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전원 사살해라. 그 누구도 가리지 말고 전원 사살이다. 알겠느냐?”
“예!!”
그렇게 어둠을 틈타 허유는 작전을 개시했다.
문득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우습게 여겨졌다.
조조와 원소.
어릴 적 동문이자 친우였으며 현 천하에 이르러서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되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둠을 틈타 그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며 이득을 좇는 한 마리의 이리와도 같지 않은가.
그들이 남긴 찌꺼기를 탐하는 이리.
허유는 픽 웃었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리로 남을 생각은 없었지만, 두 호랑이가 서로 물고 뜯는 사이 자신은 이득을 챙겨 몸집을 불릴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점차 성장한다면 이후 누가 자신을 이리라 부르겠는가. 그 누가 자신을 무시할 것이고, 어떤 이가 허유라는 이름을 의심할까.
모든 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경비병까지 소란이 인 광장으로 몰려간 탓인지 제지하는 병사도 없었다. 이 드넓은 허도를 마지 숲처럼 누비는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어둠이라는 장막은 그들을 가려주었고, 이렇게 순조로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최근 허도에서는 장마철이 끝나고 태양만이 내리쬐어 건조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래도 밤이라고 제법 청량감 있는 바람이 불었다.
모든 게 좋게 흘러가리라.
이렇게 흐르는 강처럼. 혹은 바람처럼. 어둠을 몸에 두르고 나아가는 이들의 발목을 억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랬을 때였다.
“동작 그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그 이상의 움직임은 용서치 않습니다.”
“……뭣.”
허유는 숨을 들이켰다.
이제 저 도로만 빠져나가면 곧장 황족의 주거단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군청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니.
그 뒤로는 몇 병력이 포진되어 있었다.
아군과 비교해도 호각을 이룰 무리일까. 대충 보기에는 수백 정도로 정말 대동소이해 보였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여인의 존재는 만약이란 가정마저 지우기 충분했다.
조운. 하여 자는 자룡.
최근 들어 허도 내에서 가파르게 이름을 알리고 있는 무장이었다. 근래 허도에 머물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던 허유였기에 그것을 보자마자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서 멈춰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인다면 사형이다.”
“이런 빌어먹을. 네가 왜….”
“쥐새끼의 움직임을 상서령께서 모르셨을 거로 생각했나. 이리로 와서 포박을 받아라. 그러면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용의는 있다.”
여기서 붙잡힐 수는 없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건 뻔한 노릇. 왜 여기에 조자룡이라는 걸물이 대기하고 있었는지. 또 자신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예측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이대로 항복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있겠느냐.”
“일단 예의상 해본 말이라서.”
그녀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진소연은 전원 사형을 명했다. 주도자는 생포할 수 있으면 생포하라고 하였고, 그녀는 이제 그 명령에 따라 저들 전원을 죽이고 가장 선두에 선 저 남자를 포박할 일만 남은 셈.
조운은 그걸 다시 상기하며 살짝 소름이 돋았다.
광장에서 동승이 움직였을 때만 해도 모두는 그곳을 중심으로 방비를 갖추자고 하였다. 고작 동승 하나가 움직일 리 없었으니까. 분명 제2, 제3의 움직임이 있을 거로 생각했을 때 진소연은 단호하게 황족에게 병력을 돌렸다.
황궁은 그녀의 오라비인 전호가 철통으로 사수하는 상황.
그들이 다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면. 그리고 그 한정적인 조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주려면 황족을 건드리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며 단정했다.
곽가는 상서령을 향한 무력시위를 우려했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상장이자 최강의 패였던 조운을 황족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판단이 지금 결실을 맞이했다.
“전원, 역적을 추살하라.”
그 말이 끝나고는 조운도 창을 들었다.
그녀의 창이 달빛에 빛나 그 은색을 찬란하게 빛낸다.
허유 또한 허리에 찬 검을 쥐었다지만 그는 태생이 문관이었고, 그 휘하에 있는 이들도 나름 정예로 꾸리기는 했지만, 저 무지막지한 무장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싸워라!! 원가를 위해. 이 자리를 뚫어낸다면 백금, 이백금이라도 하사하마! 원공은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너희와 함께 싸울 것이다!!”
그는 소리치면서도 내심 좌절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대로 끝나는가. 조조에게 붙잡힌다고 해도 바로 처형당하지는 않겠지만, 그 표독스러운 계집애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스러질 수는 없는 일.
그렇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분명 목숨을 건 분투였지만, 그마저도 조운의 창을 당해낼 수 없었고, 그녀의 창이 빛을 발할 때마다 한 명씩 천천히 땅에 쓰러졌다.
그녀는 마치 한 마리의 나비와도 같았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적을 제압한다. 이 광경을 제삼자의 시점으로 봤더라면 아름다운 춤이라고 환호할 수 있겠으나 정작 그 창에 목을 꿰뚫려 쓰러져가는 이들의 눈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푸른 나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명과 고함이 뒤섞인 도심 시가지.
그곳에는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으로 뒤섞였다. 그 사이에서 홀로 창을 휘두르며 내지르는 조운의 모습은 무감각하니 무정하기 그지없었고, 허유는 그것을 보며 이내 고개를 떨궜다.
전황은 이미 굳어졌다.
완패.
그렇게 조운은 허유의 앞까지 당도하고 말았다.
“항복할 생각은?”
“……항복이다.”
그는 검을 놓고 손을 들었다.
이미 주변 병사도 전부 제압당한 지 오래. 이렇게 쉽게, 이다지도 간단하게 끝나버리는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데. 이것만을 위해 허도 건설과 함께 심어둔 공작원을 대거 차출하여 벌인 작전이었다.
설령 살아 돌아간다 하더라도 원소의 손에 죽겠지.
그러면 이쯤이 타협점이었다.
적어도 저 은색으로 빛나는 창에 목이 꿰이는 것보다는 이것이 나을 터. 허유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허도에서의 작전은 이미 실패.
“…부디 거칠게만 다루지 말도록.”
“내가 왜?”
“나는 너희 주군인 조조와도 동문이자 친우였다. 설령 길이 갈라졌다고 해도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음이니. 설마 주군의 친우에게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겠지.”
그는 계속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한 수단과 방법. 이미 이 작전이 실패함으로 원소에게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끊긴 것과 다름없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인력과 자원을 전부 날려버린….
순간 허유의 머리에 한 명이 스쳐 지나갔다.
순심.
분명 그 여자도 이곳에….
“읏! 누구냐!!”
순간 눈앞에 있던 조운이 소리쳤다. 그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내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고개를 떨궜다.
그 가슴팍 사이로 뾰족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뭐지, 이건?”
손으로 만져도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도 없이 그저 표면상에 비치는 그림자와도 같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허유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뜨거웠다.
그저 화끈한 열기만이 몸을 맴돌았다. 통증도 없는데, 제 가슴팍을 꿰뚫은 화살의 촉은 시야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설마 화살에 맞은 건가.
그 생각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다리부터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힘이 빠져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몸이 그렇게 차가운 대지로 스러져간다. 지면에 몸을 뉘이고도 그는 상처를 한참 어루만졌다.
손에는 끈적한 핏물이.
“……이게 나의 죽음인가.”
이 어찌 부질없고 덧없는 죽음인가.
주변으로는 소란이 일고 있었지만, 생명의 불씨가 천천히 사그라져가는 그에게는 알 바도 아니었다. 그마저도 천천히 들리지 않게 되어가니 신경 쓸 일도 아닐 터.
“뜨겁군. 아주 뜨거워….”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구나.
부귀가 무엇이고 영광이 무엇이냐. 그 모든 것이 지면에 몸 뉘인 이후에는 부질없이 무너져 사라질 덧없는 망자의 잔재이거늘.
“찾아라! 이들 말고도 암수가 존재한다!!”
조운은 소리 지르며 병사들을 재촉했지만, 화살이 날아든 방향에는 이미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추격한다고 해도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적을 찾을 수 있을 리도 만무.
허도는 제국의 수도로서 규모가 큰 대도시로 건설되었는데, 그 복잡함이 이런 시가지에서의 전투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녀는 저 멀리 어둠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 * *
멍청한 인간.
“허유를 사살했습니다.”
“좋아요. 우선 명령 내릴 때까지는 잠시 기다리세요.”
순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잠시 물렸다. 이미 허유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지만, 적어도 소란 정도는 일으켜줄 것으로는 기대했는데.
그녀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의 움직임이 예상 이상으로 빠르네. 분명 상서령이 통괄할 텐데. 내가 진소연이라는 사람을 조금 얕본 건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빠르게 웃음을 되찾았다. 허유의 실패도 그녀에게 있어선 다소 안타까울 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허유, 이 불쌍한 사람아.”
그는 너무 협소한 것을 바라보았다.
황족을 암살해? 성공한다면 그야 나쁘지 않겠지만, 그것 하나만을 믿고 너무 맹목적으로 달려서야 상대가 눈치채기 쉽지 않은가. 실제로 진소연은 상대가 가장 원할 것을 예측하여 정확히 그것을 틀어막아 버렸다.
원래 일을 일으킬 때는 상대의 허를 찔러야 했다.
“하여간. 그러니까 순순히 말을 들으라고 했는데.”
이미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 일이었지만, 그녀는 못내 안타까운 마음에 넋두리를 읊었다. 사살을 명한 게 자기 자신이었음에도 그녀는 그의 죽음이 제법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
“이제 시작할까.”
조조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허유와 동승이 옥쇄하였고 상대의 방비도 다소 흐트러졌을 때. 이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격이 닥친다면 그들은 어찌 반응할까?
“불놀이를 하자.”
커다란 불놀이를.
이 천하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그 불씨를 키워버리자.
축제에는 역시 불놀이가 재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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