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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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령.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죠?”
빙긋 웃는 소연을 바라보는 순욱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당장 엊그제 있었던 일은 그녀의 정치생명에 있어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일. 그런데도 소연은 태평하게 승전식 준비에만 한창이었다.
“이후로는 조금 괜찮으신지요.”
“뭘요?”
“그, 유한 어르신께서…….”
소연은 그녀의 말에 빙긋 웃었다.
그거라면 문제 될 일도 없었다. 이대로 사태를 진정시킨다면 장차 조조의 권위에 도전할 이가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최근 아주 좋은 일도 있었기에 그 정도의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문제없어요. 그것보다는 조공의 승전식이죠.”
“그, 최근 황족들의 불만이 점점 거세지고 있어요. 상서령께서 무슨 생각이신지는 알지만, 그렇다고 황족과 너무 거리를 두시는 것도…….”
순욱은 불안했다.
이대로 황가 외척까지 전부 밀어내면 이 제국에서 황제 위에 조조가 서게 된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었고, 그렇기에 차후 조조가 변심하여 황제를 폐위시키고 본인이 황제가 되려 한다면 걷잡을 도리가 없는 셈.
그녀는 유씨 황족 자체에는 별 감정이 없었지만, 그게 한나라의 멸망과 이어진다면 얘기도 조금 달랐다.
“그들은 역모에 엮였어요. 설마 그걸 구명해달라고요?”
“아뇨, 그것은 아닙니다만.”
“일단 순욱 선생께서 하시는 말도 알겠네요. 어차피 이 일이 진정될 때까지의 일이고, 이 이후에는 일의 사안에 맞춰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차후 황족 따위는 걸림돌 축에도 끼지 않는다.
소연은 그 말을 애써 삼키고는 웃었다. 이런 말을 구태여 한나라의 존속을 바라는 순욱에게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현 조조에게 있어 꼭 필요한 인재였으니까.
“게다가 이번 일도 황족을 향한 암살시도를 막기 위함이라는 건 아시잖아요? 조공의 빈자리에 맞물려 황족이 피살당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됐죠. 저는 쓸모없는 이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이 제 의도를 이해해준다면 나머지야 별거 있나요?”
여기서 순욱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당당하게 황족을 일컬어 쓸모없는 자라고 폄하할 의도가 보였다. 아무리 황족에게 권한이 없다 하여도 예우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던 그녀는 살짝 눈을 치켜떴다.
물론 그걸 제외하고는 진소연의 말에 틀린 부분도 없었다. 살짝 불편하기는 해도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소연은 빙긋 웃었다.
“그것보다 이거 좀 확인해주시겠어요?”
“이건…….”
“이번 승전식 준비를 위한 발주에요. 역적이며 거물인 원술을 죽였으니까 화려한 승전식이 필요한데, 아시다시피 저희 사정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전쟁 준비하며 내어준 채권을 비롯하여 빚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런 승전식으로 백성들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조조라는 인물을 내걸어 지지를 끌어모을 필요가 있던 셈.
그렇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처리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순욱은 그녀가 내민 발주서를 쓱 훑어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고, 그것을 툭 치며 고개를 들었다.
“일단 목재의 값이 너무 비싸게 쳐졌네요.”
“전쟁 물자를 공수하면서 시세가 올라간 것도 있고, 어느 정도 저희도 편의를 봐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너무 비싼가요?”
“제가 보기에는 비쌉니다.”
이런 행정적인 분야에 있어서 소연은 아직 순욱만 못했다. 그녀는 원래 역사에서도, 그리고 실제 게임에서도 그러했듯 이러한 정치와 행정 분야에서는 현 천하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꼽힐 인물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고는 말을 이었다.
“편의라면 세금을 다소 낮춰주거나 이동할 때 군을 붙여주는 등의 편의만으로도 족하리라 봅니다.”
“세금 감면이 장차 더 손해 아닌가요?”
“물론 일시적이란 조건을 붙여야죠. 그러더라도 싸게 끝내려면 지금 몇몇 상품의 가격을 비싸게 불러주는 것이겠지만, 세금 감면 등은 앞으로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으로도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이면 상대도 기분 좋고 우리도 기분 좋은 게 최고였고, 실제로 이번 원술 원정에서는 상단에 특히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그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려 한다면 베어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런 편의 정도는 얼마든 베풀 수 있었다.
“나쁘지 않네요. 한 수 배웠어요.”
“이런 의견으로도 괜찮으시다면.”
순욱은 빙긋 웃으며 소연의 말을 받았다.
황족 관련하여 아직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의 불화가 없다면 잠시 덮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음이니. 그렇기에 순욱은 애써 고개를 돌려 발주서로 시선을 돌렸다.
“석재, 특히 백암 같은 경우에는 너무 비쌉니다. 물론 공급이 적다는 건 알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 비싸요. 차라리 다른 석재로 대체하는 것도.”
“아뇨. 그건 그대로 진행하죠.”
소연은 순욱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승전식은 그 어떤 때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하게 치러질 필요가 있었다. 그 어떤 행사보다 화려하게, 원소가 역경을 함락하였다면 조조는 대군주였던 원술을 베었다. 그 공적을 천하 전체에 알릴 필요는 분명했다.
이것은 상징이자 천하 전체를 향한 도발이었다.
조조는 황제를 보필하여 그 권위를 짓밟았던 원술을 쓰러뜨린 이 나라의 충신이노라고. 하여 만 권신과 제후, 백성에게까지 알린다.
“이건 단순한 행사가 아니니까요.”
“그러시면.”
“천하 전체에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이 난세를 끝낼 영웅이 등장했음을.
* * *
동승은 자리에 앉아 팔을 부들거렸다. 목에서 살짝 흘러나오는 피는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려 작은 양이었지만 영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호되게도 당하셨군.”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쯧. 덜떨어진 천것이라면 어찌 될 줄 알았소만, 놈은 내 예상 이상으로 분수도 모르며 기회를 떠먹여도 내뱉는 머저리였소.”
“나는 분명 긁어 부스럼이라고 하였거늘.”
동승의 말에 남자는 픽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놈은 출신도 불분명하지. 그런 주제에 실력이 있다면 한 번 의심해봐도 좋았을 것을. 그대는 다 좋으나 남을 너무 깔보는 게 단점이오.”
“지금 그대까지 날 모욕하는 거요?”
“……모욕이라.”
그는 작게 웃었다.
모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 사실 그도 동승이 가진 지위와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손잡고자 생각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단지 필요하니 이용하려 했거늘, 자꾸만 차후 원소군에서의 지위를 운운하여 골치 아프던 차.
끝내면 처분해야 할까.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고민했다.
“그래서!”
그걸 모르는 동승은 평소처럼 소리를 높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목을 끌었소. 이제 저들은 당분간 내 쪽을 한껏 주시하겠지. 내가 애써 키운 사병도 전부 당신에게 주었는데, 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소?”
“말은 정정하시지.”
그는 그런 동승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원래 계획이었던 황제의 밀서 하나도 못 받아왔다. 그래놓고 나보고 대책만 내놓으라고? 원래라면 이렇게 좀스럽게 움직일 필요도 없던 것을. 못 할 것이라면 말이라도 하지 말았어야지.”
“이익, 이보시오! 그 어린 년이 변덕스레 행동하는 걸 내 어찌 예상할까! 그래도 내 병력과 사람을 이어주었으니 나 또한 충분한 공신이 아니겠소?”
공신 같은 소리를 한다며 그는 남몰래 혀를 찼다.
물론 동승의 협조 덕에 더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마침 허도 내부에서도 원소군의 간자를 전부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이제는 승전식 준비에 한창인 상황.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는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동공. 내 질문 하나 하겠소.”
“뭐요?”
“사람이 가장 혼잡하고 복잡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시오?”
“그야……. 설마 이 승전식을 이용할 생각이오?”
동승의 말에 그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전식이 열린다면 분명 조조의 본대가 귀환한 상황인데, 아무리 그래도 조조와 대군의 감시까지 피하며 거사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 직전에 노려야지.”
전부 일이 끝나 긴장이 풀릴 때.
곧 조조의 귀환과 맞물리는 그 시점이야말로 상대의 긴장이 가장 풀렸을 때였다. 그때를 노린다면 다소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
물론 전제는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당일엔 동공이 직접 움직여야겠소.”
“나, 나까지?”
“그럼. 고작 이것 하나로 원공에게 과시할 수 있을 것 같소?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어차피 그 일이 시작할 즘에는 전부 이목이 쏠렸을 것이고, 성공만 한다면 내 원공에게 가 당신의 공을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읊을 터이니.”
하나는 방패막이.
동승을 이용하여 이목을 끈다. 물론 안전과는 거리가 먼 행위였지만, 어차피 동승을 이용하여 내부에서 암약했다는 사실이 퍼져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동승은 바로 죽어주면 고마운 일.
“그,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소.”
이미 축제 준비에 맞물려 허도로 들어오는 사람 중 그의 사람을 대거 섞었다. 물론 심배의 숨통을 삽시간에 조여 그 목을 쳐낸 진소연의 존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지만, 동승까지 버림 말로 써가며 움직이는 것을 과연 눈치챌까?
눈치채도 좋았다.
어차피 몇 군데 손을 써두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그, 그런데 정말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동승의 질문에 그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을 수 있느냐니. 그런 의문에 동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원공과 당신을 도왔는데, 정작 원공께서 나를 버릴 수 있는 거 아니요. 게다가 이 일도 그렇고, 당신을 믿어도 되겠소?”
“허, 지금 날 의심하나?”
동승이 이에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그는 그보다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동승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나는 과거부터 원공과는 죽마고우와 같았고, 조조 그년 또한 한때는 내 벗이었다. 그런 이들과 함께하면서도 지혜로는 누구에게도 뒤쳐진 적이 없어.”
“아니, 믿소이다. 믿고말고!”
“허유라는 이름을 꼭 그 가슴에 새기도록.”
앞으로 천하 전체에 널리 알려질 이름이라고.
허유는 저 자신을 그리 소개하며 빙긋 웃었다. 동승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는데, 허유의 표정을 본 어지간한 사람들은 전부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이 찢어지라 웃고 있었다.
“아, 알겠소이다. 믿겠소.”
“암! 그래야지.”
이윽고 천하의 기재로 이름 날릴 자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떨떠름하게 말하는 동승을 바라보며 픽 웃어준 허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며 고개를 까닥였다.
“자, 이제 다시 일 얘기를 시작할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할 뿐.
심배가 죽었으니 상대도 방심하겠지. 물론 진소연이라는 상대 자체는 주도면밀한 데다가 과격한 수도 꺼리지 않아 상대하기 골치 아픈 부류였지만, 애당초 사람 그늘에 숨어 암약하는 자신과는 선 위치가 달랐다.
질 리가 없는 싸움.
아아, 세상은 정말 살만하구나.
허유는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입꼬리 찢어지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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