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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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떻게 지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운이의 말은 아직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 맴도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고, 소연 아씨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다.
여포와 진궁 선생은 내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운이는 그걸 몰랐다. 조조는, 글쎄.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릴 수 없었으니까 예외로 친다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는 확실히 말했어야 했다.
게다가 소연 아씨를 언급하는 그녀의 모습.
정말 처량하기 그지없어, 누가 보아도 슬퍼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고민이었고, 소연 아씨의 일과 맞물리니 당최 머리를 식힐 방법도 없어졌다.
“뭐야, 주인이. 오늘도 상태 안 좋아?”
여포는 내게 살짝 다가오며 그릇을 하나 내밀었다.
“그건 뭐야?”
“죽. 어제 저녁 식사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입맛 없을 땐 이런 거라도 먹어야지. 솔직히 이런 건 연약한 것들이나 먹는 거로 생각했는데, ……뭐, 주인이는 연약하니까.”
날 연약하다고 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여포는 그런 내게 죽 한 그릇을 내밀며 픽 웃었다. 그런데도 표정 어딘가에서는 긴장한 느낌이었는데, 자꾸만 이쪽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게 웃겨서 나도 조금 웃어버렸다.
세상 천하에 여포가 누구 눈치를 본다고. 천하무쌍이자 이 대륙 최강자인 여포가 내 눈치를 보며 애써 웃는다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그런 배려와 마음이 고마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을게.”
“그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릇을 여니 새하얀 쌀이 푹 익은 죽이. 독특한 건 그 위로 샛노란 꽃 한 송이가 올라간 거였는데, 이에 그녀를 한 번 돌아봤더니 이리 답한다.
“먹을 수 있는 거랬어! 향도 돋굴 수 있다더라고.”
꽃을 먹어?
아, 물론 가끔 그 뭐였더라. 아무튼, 그 조그마한 꿀을 빨겠다고 입에 물었던 꽃을 기억하긴 했다. 분명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워낙 어릴 적이라서 까먹었다. 그런 추억도 새록새록 나는 게 나쁘지 않네.
물론 꽃 자체를 식용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진짜 믿어도 되는 거 맞지?”
“꼬맹이가 그랬다고! 진짜야! 만약 탈 나면 내가 사마 꼬맹이 엉덩이를 팡팡 두들길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의심만 하지 말고 한 숟갈이라도 뜨라니까?”
미안하지만 여포의 가사 실력은 믿을 수 없었다.
무력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고,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여자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부분에서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니까 보답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
하지만 이건 아니다.
얘가 찢어먹은 이불의 숫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최근에는 좀 덜한 것 같지만, 아직 내가 덮는 이불은 몇 번이나 찢기고 기워져 바늘 자국이 잔뜩 나 있었으니까.
“잘 먹을게.”
“그럼! 누가 했는데.”
그래도 요즘은 나아지긴 했는데, 예전에는 한창 시행착오를 겪었지. 내 살다 살다 숯불을 입히랬더니 고개를 숯불로 내어온 경우는 처음 봤다. 농담 아니라 사마의는 그 광경을 보고 왜 숯덩이를 꺼내왔냐며 질책했을 정도니까.
일단 한 숟가락.
사실 죽이라는 게 실패할 수가 없는 요리긴 했다. 밑바닥도 눌어붙지 않은 게, 제법 많이 나아진 느낌도. 그런데 이 꽃은 대체 왜.
“그런데 진짜 꽃은 왜 넣은 거야?”
“아하, 아하하……. 그냥, 내 마음.”
여포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살짝 얼굴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뒤, 홀로 방에 남아 한 다시 한 숟가락 떴다.
맛은 심심했다. 흰 쌀죽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음식은 제법 따듯했다. 복잡했던 마음도 그녀와 잠깐 대화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부분도 있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순 없겠지.
잠깐 해소할 수 있을지언정 이 복잡한 관계는 언젠가 풀어내야 하는 문제였다. 상처라는 것은 원래 덮어두면 잊고 살 수 있지만, 이윽고 그것은 천천히 곪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나와 운이, 아씨의 문제는 단언컨대 이쪽이었다.
시간이 약이 될 수 없는 일. 우리는 서로, 덧붙여 자기 자신과도 대면해야 했다. 어쩌면 내가 어리숙하게 대처한 탓일까.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인 느낌도 드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남녀관계에서 복잡하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는 여자는 거부하지 않고 가는 여자도 거부하지 않는 인생. 어차피 밑바닥에서 살다 개처럼 죽을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연인이라느니 가정이라느니,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가.
그러면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잠시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바뀐 건 진소연이라는 사람을 만난 이후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그녀와 만나며 목표를 얻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동네 한량이요 도적으로 남을 것 같았던 인생이 진소연이라는 사람과 만남으로 뒤바뀌었다. 플레이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 여자와의 만남이 모든 걸 송두리째 뒤엎었다.
플레이어.
소연 아씨는 첫 대면에 자신을 그리 소개했다.
나는 아직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는 자기 과거에 대해 떠드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이한 사람과 만남으로써 나는 이 천하에 발을 들였고, 지금은 중랑장이라는 관직에도 올랐다.
운이는 내게 말했다.
그녀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그 뜻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했지만, 그녀가 나를 밀어내며 지었던 표정과 함께 오해하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 마음을 드러내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고.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하아…….”
슬슬 죽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을 이어가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더니 금방 사라졌네. 사실 어제 낮부터 제대로 먹질 않았으니까. 입맛은 없었지만, 그와 별개로 살짝 배고픔을 느끼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어떡할까.
바닥에 드러누워 그런 생각을 이어갔을까.
“아저씨.”
방문이 열리며 사마의가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그, 상서령이. 소연 아가씨가 오셨거든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 * *
사람은 전부 물렸다.
여포와 사마의에게도, 하물며 시종들까지. 소연 아씨가 먼저 단둘이 있게 해줄 수 있냐고 했는데, 그 말에 다들 떠나 이 저택에는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요?”
“그냥. 조금 네 생각도 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우리는 마당과 이어진 툇마루에 걸터앉았는데, 그녀는 다리를 번갈아 까닥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운이와의 대담 이후일까, 괜히 소연 아씨의 존재를 의식하게 됐다.
윤기 있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그것을 뒤로 묶어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 어깨의 선을 가느다랗게 가녀린 느낌을 주었고, 입술은 분홍색으로 도톰하게 자기주장 하고 있었다. 아니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데.
알고 있으면서도 운이의 말이 겹친 탓에 그녀와 입을 맞추었던 온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뜨겁고 부드럽게 마주했던 입맞춤.
짧았던가, 길었던가. 그것마저 아리송할 정도로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고, 그만큼 내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잠시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을 보냈다.
“들었어.”
처음 침묵을 깬 건 소연 아씨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는데, 그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어떨지 모르겠다. 단지 그녀는 정말 무표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어떤 걸….”
말하면서도 우스웠다.
어제 그 사건이 있었는데, 그러면 운이에게 들을 말도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나와 소연 아씨는 아직 이성으로서 이뤄진 관계가 아니었고, 그 부분에 있어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관계였으니까.
그걸 알고 있었는데.
“네가, 응. 말로 하긴 조금 그러네.”
심장이 옥죄여오는 감각이었다.
“여러 사람을 만났다고. 그렇게 들었어.”
“……그렇구만.”
우리는 그 말을 끝으로 또 잠시, 어쩌면 긴 침묵을 이어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했기 때문이겠지. 당장 손바닥도 흥건하게 젖어버렸으니까.
“나는 네가 운이와 서로 연인이라고 생각했어.”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이건 확실하게 우리 관계를 정하지 않은 내 문제였다. 운이는 그걸로 좋다고, 연인 관계로 이어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그 상냥함에 기대어 버린 것이 아닐까.
그 당시에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니면 어릴 적 기억이 발목을 잡은 걸까. 나는 사실 누군가와 정식으로 맺어진다는 것에 살짝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풍과 어머니가 그리된 것을 보았으니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겨질 사람을 걱정해서?
그건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경계에 있었다.
“기억하니?”
그녀는 내 손을 붙잡았다.
땀에 절어있는 손이라 살짝 부끄럽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런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고는 빙긋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병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그땐 웃겼지. 대뜸, 뭐라고 했지. 플레이어라고 했던가. 산적 엔, 뭐였지. 기억도 안 나네. 그러면서 갑자기 날 쥐어패지 않았소.”
“그랬지.”
우리는 그렇게 조금 전 주제와 잠시 동떨어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씨는 무슨 생각으로 주제를 바꿨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 화제에서 잠시 벗어난 것처럼도 느꼈다.
조금이나마 유예를 받은 기분도 들었다.
하여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운이가 내 목에 칼을 대고 붙잡았을 때라던가, 흑산적과의 결전이라던가. 아가씨는 그 당시 적의 목덜미를 물어 생살을 씹던 내 모습을 무서웠다고 했는데,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니, 그랬으면 말을 했어야지.”
“그때는 얕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이게 진짜 현실이 맞나, 한참을 고민하고 그랬다고.”
“……내가 좀 거칠게 싸우기는 하지?”
“그건 거칠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해.”
면목이 없네.
그런 느낌으로 우리는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주제는 계속 예전 추억을 읊는 일이었다. 아직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일들이 이미 우리에게는 추억으로 변해있었다.
그만큼 우리도 변했기 때문이겠지.
급격하게 변해버린 우리에게 있어 그날의 일들은 전부 추억으로 변해버렸다. 만약 그때와 지금이 같았더라면 조금 달랐겠지만, 그녀는 상서령이라는 고위 관직에 올랐으며 나 또한 중랑장이라는 관직에 올랐으니까.
잠시 대화를 이어갔을까.
이야기는 사마 가문을 찾아갔던 온현의 일로 뻗었다.
“온현에서의 일은 기억하니?”
“……아씨, 그건.”
“너는 그때 내가 왜 너에게 입을 맞췄는지 모르지?”
알고 있었다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잘 모르겠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니까.
“사실 그때는 나도 잘 몰랐어.”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고는 고개를 들었다.
낯부끄러워 살짝 고개를 돌려고 했는데, 그녀는 자신을 봐달라며 속삭였다. 그렇게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잘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 있잖아.”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아무래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왜 그렇게 웃는 거요.
당장에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눈동자로, 왜 그렇게 애처로운 웃음으로. 나는 그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마 이 웃음의 의미도 직접 말해주기 전까진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
예전에 그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꼈다.
진소연이라는 사람은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이었고, 그녀의 말과 행동은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사는 세계는 아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를 거라고. 저런 게 진정 대단한 사람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몰랐어. 아니면 알고서도 고개를 돌렸을 수도 있지. 미련하게 내 감정을 속이고, 바보같이 시선을 돌리면서.”
맞잡은 손을 살짝 떨리고 있었다.
“불안했어. 무서웠고.”
“아가씨.”
그녀는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
“있잖아, 호세야.”
나는 널 사랑한다고.
그녀는 애처롭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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